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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장 에베소 사역 도중에 생긴 일들, 곧 성령강림과 두란노 서원 강론 및 마술책 분서 사건,
디모데 등의 파송과 데메드리오 소요 사건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넓게는 13:1-21:16까지 이어지는 바울을 중심으로 한 전 3차의 이방 전도 여행 일련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그리고 좁게는 18:23-21:16에 기록된 바울의 제 3차
전도 여행(A.D. 53-57년) 일련기사의 개시 부분이다. 이 바울의 전 3회에 걸친 전도 여행 기사는 과거 철저한 유대주의자로서 열렬히 예수의 복음을 탄압하던 바을을 회심시키시고 바로 그를 이제는 정반대로 순교(殉敎)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것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하신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를 보여 준다. 또한 이제 사도 바울의 그야말로 생명을 던진 철저한 헌신으로 주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명령(corm보on)과 동시에 약속(promise)으로 남기셨던 말씀 곧 성령이 강림한 후에는 성령의 주도로 주의 사도들이 땅 끝까지 이르러 주의 말씀을 증언함으로 복음이 세계 만민에게 전달되리라던 말씀(행 1:8)이 분명히 그리고 강력하게 성취되어 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이런 문맥 하에서 주로 소아시아 최남단에 위치한 에베소(Ephesus)에서의 바을 사역의 이모 저모를 보도하는 본장의 내용은 크게 5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7절은 에베소 사역 초기에 일어난 성령 강림 사건을 그리고 8-10절은 두란노 서원(書院)에서의 바울의 강른을 중심한 대략 2년간의 바울의 에베소 사역을 개략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11-20절은 바울의 에베소 사역 중 발생한 최대의 사건이었던 각종 마술사들이 복음의 진정성과 이를 전하는 사도 바울의 능력을 확인하고 그동안 우상을 빌어서 행하던 자신들의 마술 관련 서적을 스스로 불태운 사건을 보도한다. 21-22절은 향후 자신이 세운 선교 계획에 따라 바울이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미리 마게도냐로 파송한 사실을 보도한다. 끝으로 23-41절은 바울의 전도사역 말기에 그의 사역으로 우상 숭배가 타파(打破)되자 자신이 아데미(Artemis or Diana)를 섬기며 또 그 우상을 만들어 삶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데메드리오가 주동이 되어 바을 일행과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제거하려고 무모한 소동을 벌였으나 무마된 사건이 보도된다. 이러한 내웅의 본장은 역사적으로 볼 때에는 고대 로마 제국의 일부였던 예루살렘 땅에서. 구약과 신약을 동시에 계승하여 갓 건립되었던 초대 교회가 직면해야 했던 그 시대의 양대 문화 세력이었던 유대교와 헬레니즘 문화 중 후자와의 갈등을 주로 부각시키고 있다 하겠다.
1-7절의 에베소 성령 강림 사건 기사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우리는 무엇보다도 바울 사도 등이 선교 사역을 행하면서 어느 한 사람이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는 증거로 가장 중시한 것은 복음의 진리이며 또한 구원의 증거는 인간이 베푸는 무슨 의식이나 외적 중표가 아니라 성령 강림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성도 개인과 교회 롱동체의 구원의 기준과 보증은 인간이 만든 의식과 교리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계시와 성령의 역사이어야 한다는 구속사적 진리를 강력히 암시해 준다. 특히 성경이 완비된 현대에는 성도 개인과 교회는 성경 본뜻과 성령의 역사만을 궁극적인 전삶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8-10절의 두란노 서원(書院)에서의 강론을 중심으로 한 2년간의 바울의 에베소 사역에 대한 개략적 보도에서는 무엇보다도 제자들을 따로 모아 날마다 두해 동안을 말씀을 강론(講論)한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이는 결국 우리에게 이미 성도가 된 후에도 말씀 연구를 통한 영적 성장의 중요성을 새삼 각성시켜 준다. 유한자(有限者)인 인간은 결국 자신이 깨닫고 확신한 부분 만큼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반면에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은 무한자(無限者)로서 그분의 구원의 은혜는 실로 무한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아무리 깨우쳐도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다 깨우칠 수 없으며 또한 깨우친 그만큼 은혜를 더욱 크게 체험할 것이므로 날마다 말씀 연구를 계속해야 한다. 이는 구속사가 끝나는 그날까지 이 땅에 오고 을 모든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요구되는 진리이다.
11-20절의 복음의 사도인 바울의 능력을 보고 그동안 귀신들의 힘을 빌어 마술을 행하던 자들이 스스로 그들의 책을 불사른 사건은 우리에게 다시 한번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분이 세우신 구속의 법을 보여 주는 복음은 전우주와 역사에 대한 진리를 보여 주며 나아가 인간의 심령을 참으로 감화시키는 진정성과 감화력을 갖고 있다는 구속사적 확신을 더하게 해줄다.
21-22절의 당시 소아시아(Asia minor)의 에베소에 있던 바울이 앞으로의 선교계획에 따라 자신의 전도단 중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미리 마게도냐 지역으로 파송한 기사는 짤고 별로 의미없는 사설 보도인 것처럼 보이나 깊이 묵상하면 다음의 두 가지 큰 구속사적 의의가 발견된다. 첫째, 본문은 바울은 물론 그 개인이 위대한 사도였지만 그의 사역 기사를 보면 언제나 선하고 열심있는 동역자(同役者)들과 함께 사역했음을 보여 준다. 한 개인이 아무리 위대하다 하여도 그도 유한한 인간인 이상 그가 모든 일을 다 할 수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따라서 위대한 일을 성취한 사람일수륵 자신의 생각과 능력만 내세우지 않고 뜻을 같이한 사람들과 더욜어 큰 일을 잘 이를 수 있도록 때로는 지도하고 때로는 조화하는 법이다. 이는 하나럼과 교회의 일을 행하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더욱이 주 하나님의 사역자는 자신의 뜻이나 판단보다도 주의 섭리(攝理)와 계시를 따르는 자이며 또한 같은 주를 믿으며 함깨 신앙의 길을 가는 사람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성도는 일반인들 보다 더욱더 주 안에서 다른 성도들과 함께 공동사역을 해야할 필연성을 갖는 바 븐문은 이런 소위 팀 사역(Team Ministry)의 전형을 잘 보여 줄다. 둘째, 이런 초대 교회의 선교 사역 관련 사실을 보도하는 이런 짧은 기사는 여타 서신서들의 언급과 대조해 보면 역사적 사실을 가감얼이 기록한 것임을 확인케 된다. 이런 본문들은 결국 성경의 기록이 신학적 허구나 교조적(敎條的) 과장 없이 역사적 실재 사실과 그에 근거한 진리를 있는 그대로 보도한 진실성을 가진 책으로서 우리가 신뢰할만한 책임을 보여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3-41절의 데메드리오 소송의 진행과정 및 개별적 의의는 문단강해를 참조키로 하고 그 전반적 의의를 개관하면 다음과 같다. 이 소동 사건은 한마디로 영생과 구뭔이라는 절대 영뭔의 진리를 보여 주는 복음을 전인격적 차훤에서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일시(一時)의 세속적 이해타산에서 바라보는 뭇 인간들의 어리석고 추한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줄 사건이다. 왜냐하면 데메드리오와 그의 소송에 동조한 자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과연 진리이냐 아니냐는 따지지 않고 그것이 우상 숭배를 업으로 삼아 생활하는 자신들의 이해 타산과 상치되었기 때문에 무조건 배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옛날 구약의 거짓 선지자 발람(민 22-24장; 벧후 2:15; 유 1:11; 계 2:14)과도 같은 본장의 데메드리오와 같은 유형의 인간들은 전구속사의 시대를 두고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거듭 발견되고 있다. 이런 자들은 먼저는 복음의 진정성과 그 절대적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고 이를 세속적 이해와 혼동하는 어리석은 자이다. 나아가서는 인간의 사죄(敎罪)와 구원과 관련된 하나님의 절대 은혜를 일시의 세속적 이해타산을 기준으로 거부내지 모독하는 악한 자이기도 하다. 실로 세속적 이해타산으로 하나님의 복음에 대항함으로써 자신은 물론 타인의 전 영혼을 영원히 지옥에 던지는 일을 자행한 데메드리오의 소송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주님을 믿는다 하는 나 자신도 혹 실제적으로는 또 하나의 데메드리오와 같은 자가 아닌가 하는 구속사적 반성을 하게 된다.
외울 말씀
18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행 19:18-20)
에베소 사람들의 성령 세례
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3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4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바울의 두란노 서원 강론
8 ○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10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바울의 능력과 에베소의 마술 서적 분서 사건
11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13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14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15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6 악귀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17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18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바울의 선교 계획 및 디모데와 에라스도 파송
21 ○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22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간 더 있으니라
데메드리오 소동
23 ○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인하여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24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아데미의 은감실을 만들어 직공들로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25 그가 그 직공들과 이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유족한 생활이 이 업에 있는데
26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 허다한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27 우리의 이 영업만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전각도 경홀히 여김이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2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분이 가득하여 외쳐 가로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29 온 성이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가지고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들어가는지라
30 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31 또 아시아 관원 중에 바울의 친구된 어떤 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32 사람들이 외쳐 혹은 이 말을, 혹은 저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33 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니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발명하려 하나
34 저희는 그가 유대인인 줄 알고 다 한 소리로 외쳐 가로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 동안이나 하더니
35 서기장이 무리를 안돈시키고 이르되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성이 큰 아데미와 및 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전각지기가 된 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36 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
37 전각의 물건을 도적질하지도 아니하였고 우리 여신을 훼방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을 너희가 잡아왔으니
38 만일 데메드리오와 및 그와 함께 있는 직공들이 누구에게 송사할 것이 있거든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피차 고소할 것이요
39 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거든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단할지라
40 오늘 아무 까닭도 없는 이 일에 우리가 소요의 사건으로 책망받을 위험이 있고 우리가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보고할 재료가 없다 하고
41 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
본문 & 자료노트
원어연구-19:18, 자복하다
죄를 자복하는 것은 성도에게 필수적인 일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중생과 성화에 꼭 펼요한 것이기 떼문이다. 본문에서 '자복하다'에 쓰인 헬라어는 '엑소몰로게오'인 데, 이 단어의 원어적 의미를 살펴보면 진정한 죄의 자복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이 단어는 '엑스'와 '호몰로게오'의 합성어이다. 먼저 '액스'는 '밖으로'라는 뜻의 접두어 '엑크'의 변형이므로 이것은 '마음으로부터' 또는 '공개적으로' 즉 '솔직하게 드러내 놓는 것'을 의미한다. 죄는 부끄러운 것이므로 드러내기가 어렵겠지만 전혀 숨김 없이 공개할 비로소 그 죄와 죄책에서 떠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호물로게오'는 '동일하다'라는 뜻의 '호모스'와 '말' 또는 '논의'를 뜻하는 '로고스'가 합성되어 이루어진 말이다. 그러므로 '호몰로게오'는 '같다고 말하다' 즉. '말로써 인정하다' 또는 '고백하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죄의 자복과 연유하여 자신이 마땅히 심판받을 죄인임을 스스로 선포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문의 '엑소물로게오'는 자신의 죄를 솔직하게 드러내어 고백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와 같이 죄의 자복은 공개적으로 그리고 공식적인 선언으로 이루어진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죄는 감추려하고 자신의 선행이나 미덕은 드러내려 한다. 그러나 진실한 성도는 이와 반대로 선행을 감추는 반면 자신의 죄는 하나님 앞에 솔직히 드러냄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성화에 이르기를 힘쓸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향하신 그리스도의 참 뜻이 아니겠는가?
주요주제-19:2,6 성령 세레와 성령내주 및 성령충만
행 9장 자료노트 참조
주요주제-19:3-6 세레의 이해
행 8장 연구자료 참조
주요주제-19:6. 방언의 이해
고전 14장 연루 자료 참조
도표-19:11,12 바울의 주요 이적들
사도 바울은 수많은 지역으로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며 방문하였고, 그에 따른 기적 또한 많이 행했다. 이것은 주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혜 당신의 말씀을 전하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역사하신 것이다(롬 15:18). 다음애서 이 사도 바울이 행했던 기적들을 살펴보자.
장 소 이적 내용
1. 바보: 박수 엘루마를 소경이 되게 함(13:6-11)
2. 루스드라: 앉은뱅이를 일으켜 걷게함(14:8-10)
3. 빌립보: 한 여종에게서 점치는 귀신을 내어쫓음(16:16-18)
4. 에베소: 병든 자를 고치고 악귀를 쫓음(19:11,12)
5. 드로아: 죽은 유두고를 다시 살림(20:9-12)
6. 멜리데: 독사에게 물렸으나 해없음, 열병과 이질을 고침(28:1-9)
지도-19:1-41 바울의 3차 전도 여행 경로
주요주제=19:4 예수의 선구자 세례인 요한
눅 3장 연구자료 참조
풍습-19:6, 안수
창 48장 자료노트 참조
주요주제-19:8 '하나님의 나라' 이해
눅 서론 특별자료 참조
보감-19:9 굳은 마음의 10대 해악
1. 자신의 죄대로 보응받음(레 26:21)
2. 어떤 때에도 형통함을 누리지 못함(욥 9:4)
3. 광명의 길을 알지도 못하고 나아가지도 못함(욥 24:13)
4.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을 받지 못함(잠 1:26)
5. 환난 중에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함(잠 1:28)
6. 미련한 행위를 거듭 행하게 됨(잠 26:11)
7. 갑자기 고난이 닥쳐도 피하지 못함(잠 29:1)
8. 진리이신 하나님 말씀에 순종치 못함(행 19:9)
9. 하나님의 인도대로 회개하지 못함(롬 2:4)
10. 마지막 날의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을 피하지 못함(롬 2:5)
고고학-19:23-41 에베소의 연극장
에베소(Ephesus)는 본문에서 보듯이 사도 바울의 제 3차 전도 여행 당시 아데미 여신 숭배의 본거지로서 유명했던 곳이다. 그 에베소에서 복음을 힘있게 전하고 여러 권능의 이적을 행하던 바울은 급기야는 아데미 전각(嚴賜)의 은장색 데메드리오의 소요로 인해 바울과 그 일행은 곤욕을 치르게 된다. 그리고 이렇듯 바울의 설교로 야기된 엄청난 폭동의 장소로 본문 29절에 '연극장'이 제시되고 있다. 이에 많은 유적을 지니고 있는 에베소 중에서 본문의 배경이 되고 있는 에베소의 연극장 유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연극장의 위치 및 유적
에베소의 연극장에 대한 발굴은 1869년 대영박물관의 후원으로 우드(J.T. Wood)에 의해 대대적인 에베소 발굴 작업이 진행되던 중에 이루어졌다.
이 연극장은 에베소의 중앙에 위치한 피온 산(Mt.Pion) 서쪽 경사면에 있는 우묵한 지역에 자리잡고 있으며. 서쪽으로 1km 정도 떨어져 있는 항구를 정면으로 향하고 있다. 또한 이는 역시 에베소의 주요한 유적지인 경기장으로부터 남쪽으로 1km도 안되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연극장의 크기는 직경이 대략 50m이며, 약 25,000명 정도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그 청중들을 위해 마련된 좌석은 반원이 좀 넘는 등근 대리석으로 된 것으로서, 22열(列)로 된 충이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편 중앙에 높이 만들어진 무대의 뒷편에는 조각된 기둥이나 장식된 조각품들이 서 있어 헬레니즘(Hellenism) 문화의 특징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무대의 구조 및 전체적인 연극장의 구조에 대해서는 다음의 삽화를 참조하라.
2. 의의
이상 간략히 에베소의 연극장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 결과를 살펴보았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눈앞의 물질적인 이익과 헛된 우상에 눈이 멀어 데메드리오의 선동으로 인해 맹목적으로 전도자들을 해하기 위해 25,000명이나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연극장에 우루루 물려 들어간 무리들과 그속에서 힘없이 휩쓸리고 있는 전도자들의 모습을 연상해 볼 수 있겠다. 이처럼 성경 기사는 그 자체적으로도 또 이처럼 엄연한 사실로 드러나는 성경 이외의 자료들을 통해서도 그 사실성이 정확히 입증된다.
역사배경-19:8-10 회당의 이해
본서 14권 신약 총론 '신약 시대의 사회 ․ 문화적 배경' 참조
신학용어-19:11,12, 신유
행 5장 자료노트 참조
도표-19:13-16 제사장 스게와 일곱 아들의 5대 죄악
1. 예수를 믿지는 않고 그 이름만을 빙자함(13,14절)
2. 하나님의 능력을 무당들의 마술 정도로 업신여김(13,14절)
3.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지 못함(14절)
4. 형제가 다같이 연합하여 악을 도모함(14절)
5. 사특한 행위로 신실한 성도들을 미혹케 함(14-17절)
삽화-19:27 아데미 신전이 새겨진 에베소의 주화
삽화-19:27,28 에베소의 아데미 여신
헬라의 맹수와 달의 여신인 아데미와 달리 에베소의 아데미는 고대 근동의
풍요와 다산(冬産)의 신으로 숭배되었다.
역사배경-19:36-41 신약에 반영된 로마법
행 27장 자료노트 참조
도표-19:35 헬라 로마의 여러 신들과 각각의 특징
행 14장 자료노트 참조
19:1-7 에베소의 성령 강림
전장 마지막 단락(행 18:23-28)에서는 바을의 3차 전도 여행이 시작된 사실과 에베소 전도의 애비적 상황이라 할 수 있는 아볼로의 변화사건 등을 살펴보았다. 이어 본장에는 바울의 3차 전도 여행의 핵심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바울이 2차 전도 여행에서 귀환할 때 잠시 들러 복음을 전하고 훗날 다시 오기로 약속했던 에베소(행 18:21)에서의 전도 사역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그 가운데 본문은 소위 에베소의 오순절 사건이라 부르는 에베소의 성령 강림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바울이 2차 전도 여행에서 귀환할 당시 잠시 에베소에 들려 복음을 증거했다고는 하나 지극히 짧은 시간으로 어떤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베소 사람들 가운데에는 바울이 떠난 후 도착한 아볼로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이 있었다(1절). 하지만 그들은 복음의 진수인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비룻하여 성령 세례에 대해서는 무지했으며 단지 요한의 세례, 즉 물 세례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다(2,3절). 왜냐하면 아볼로가 비록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에 의해 가르침을 받아 복음의 진수를 깨달았다고는 하나 아볼로는 복음을 콱실히 깨달은 직후 곧바로 고린도로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바울이 3차 전도 여행 중에 에베소에 당도한 것이다. 에베소에 당도한 바울은 먼저 에베소 사람들이 불환전한 신앙을 소유했음을 감지하게 된다(1-3절). 그리하여 그는 그들에게 성령 세례를 가르치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한다. 이로써 에베소 교인들은 비로소 거듭남의 체험과 성령께서 베푸시는 무한한 영적 은혜와 은사를 경험하게 된다(4-7절).
이상의 사실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게 된다.
① 물 세례는 결코 구원의 표징이 되지 못하며 구원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온전히 하나로 연합시켜 주는 성령 세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②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성도들은 비륵 기적적인 성령의 능력을 체험치 못했다 할지라도 그 안에 성령이 내주하심을 확신하고 성령을 거스리는 일을 행치 않도륵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19: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 - 아볼로가 에베소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로부터 복음에 대해 보다 정확한 가르침을 받은 후 고린도로 건너와 복음을 전한 사실에 관해서는 행 18:26,27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볼로가 고린도로 건너가 얼마 동안 오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여하튼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 미 아볼로가 고린도로 건너 간 뒤로 서로 만날 수가 없었다.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 여기서 '윗 지방'이란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가리킨다(행 18:23). 이러한 본절은 행 18:23에서 끊어졌던 바울의 3차 전도 여행 기록을 이어준다. 즉 바울은 갈라디아와 브루기아와 같은 내륙 지방을 거쳐 다시 에베소로 오게 되는데 이것은 과거 2차 전도 여행 중에 그곳 회당의 유대인들에게 했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행 18:21)는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바울의 이번 에베소 여행은 이전에 성령께서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을 때(행 16:6)와는 달리 허락하셨음을 의미한다. 한편 이러한 바울의 행로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바울이 '루커스'(Lycus)와 '매안더 계곡'(Maeander Valleys)에 걸쳐 있는 저지대의 정규적인 상로(商路)를 잭하지 않고 보다 더 고지대에 있는 직선로를 택하여 에베소로 왔다고 주장한다(Ramsay. Bruce). 그러나 다른 일부 학자들은 브루기아의 구릉 지대를 통하여 왔다고 주장한다(Toussaint). 하지만 본서 저자인 누가가 바울이 어떤 경로를 통하여 왔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고 있지 않으니 그 정확한 여행 경로에 대하여서는 알 수 없다.
에베소. - 당시 로마의 통치 하에 있던 아시아 주의 수도로서 사모스 섬 맞은편. 카이스터(Cayster) 강가에 위치해 있었다. 당시 에베소는 자유 도시로 원로원과 시의회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소아시아 최대의 무역 중심지였다는 점이다. 동시에 이곳은 고린도에 버금가는 문화의 도시요, 예술의 도시이기도 하였는 바 이곳에 있는 응장한 극장(29절)은 아데미 신전(27절)과 더불어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속하고 있다. 이 에베소에 대한 보다 자세한 사항은 엡 서론 특별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어떤 제자들. - 이미 복음을 믿고 받아들인 성도들을 가리킨다. 행 18:27 주석 참조. 그런데 이들이 성령에 관해서는 알지 못하고 단지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들은 아볼로가 에베소에 서 아굴라 부부를 만나 성령에 관해 알기 전(행 18:24-26) 그에게 성경을 배운 사람들일 것으로 추정된다.
19:2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아느냐. - 보다 정확한 의미는 '너희가 믿고 세례를 받았을 때에 성령의 임재를 체험했느냐'이다. 이러한 물음으로 보아 바울은 이들을 처음으로 대하였을 때. 그 말하는 것이나 행동거지(行動擧止)를 통해 성령 충말하지 못한 상태를 감지한 것 같다.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 이러한 대답은 바울로 하여금 상당히 놀라게 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이들이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그의 열 한 제자들과 모든 성도들에게 보내주신 성령에 관해(행 1:5,8; 2:1-4)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저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으면서도(3절) 요한이 중거한 예수의 '성령'(마 3:11)에 관해 몰랐다는 것은 신기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이같은 대답으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의 신앙관은 아볼로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가르침을 받기 이전에 가졌던 신앙관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행 18:25). 아마도 그들은 아볼로와 유사한 방식으로 성경에 대한 지식을 습득했거나 또는 변화받기 전의 아볼로로부터 직접 배웠을 것 이다.
19:3 요한의 세례로라. - '요한의 세례'란 세례 요한이 요단 강에서 주던 물 세례를 가리킨다(마 3:6; 요 3:23) 이러한 물 세례는 자신의 죄를 것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였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보이는 신앙 고백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구원의 필수 조건 또는 분명히 구원받았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는데 이를 가리켜 소위 '성령세례' 또는 '불세례'라 한다(요 3:3-8). 행 8장 연구자료. '세례의 이해' 참조, 그런데도 세례인 요한이 사람들에게 물 세래를 베푼 것은 메시야의 길을 평탄케 하고 사람들에게 메시야를 증거하며, 메시야를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를 시킨 세례 요한의 사역과 관계가 있다(말 4:6; 눅 1:17). 즉 세례인 요한은 사람들에게 화해를 촉구하고 예수를 영접할 수 있는 마음 자세를 갖추도록 하기 위해 물 세례를 베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비록 물로 세례를 베푸나 예수께서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중거한 것이다(마 3:11).
19:4 바울이 가로되‥‥예수라 하거늘. - 바울은 이들이 지금까지 잘못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한다. 먼저 요한이 베푼 물 세례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 단계로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케 하는 회개의 세례라는 점이다. 다음으로 요한의 세례는 모든 사람들이 요한 뒤에 오시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려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처럼 바울은 그리스도의 길을 얘비하러 온 세례 요한의 사역의 특징을 정확히 정의하면서(막 1:7,8) 이제 세례인 요한이 중거혔던 얘수를 부각시킨다.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믿되 올바로 믿도록 하려는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19:5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 바울의 설명을 듣던 이들은 그제서야 자신들이 지금까지 추구했던 모든 것과 자신들의 믿음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바울로부터 주 애수의 이름으로 다시 세례를 받게 되었다. 여기서 '주 애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은 지극히 정당하다. 왜냐하면 세례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죄에 대하여선 죽고 새 생명으로 다시 살리심을 받는데 있기 때문이다'(롬 6:3-11). 또한 애수께서도 친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 하셨다(마 28:19). 한편 여기서 이들이 세례를 다시 받은 것은 아볼로의 경우와 차이가 난다. 즉 아볼로는 요한의 세례밖에 몰랐음에도(행 18:25) 다시 세례를 받았다는 언급이 없는데 반해 이들은 분명히 다시금 세례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차이점은 다음과 같이 이해된다. 즉 이들이 받은 세례는 어떤 절대적인 필요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세례를 다시 받고자 하는 자발적 의사에 따른 것이라는 점이다. 아무튼 이러한 본문은 신약에서 재 세례를 받은 데 대한 유일한 기록이다. 그러므로 이 기록은 재세례파(Anabaptist)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칼빈(Calvin)은 이를 반대하기 위해, 이때의 세례를 물 세례가 아닌 성령 세례로 주장하기도 하나 근거가 약하다. 오히려 이것은 세례관 뿐 아니라 기타 기독교의 정통 교리가 온전히 정립되지 못했던 초대 교회의 과도기적 현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19:6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하니. - 바울이 안수하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다. 이것은 바울의 사도적인 직능을 다시 한번 알게 해준다. 이와 유사한 경우로는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한 사람에게 성령이 임한 사례를 들 수 있다(행 8:17). 다음으로 성령이 임한 결과 저들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게 된 현상은 오순절에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과(행 2:4,6,8) 고넬료의 집에 모인 이방인들(행 10:44-46) 에게 성령이 임하셨을 때 나타났던 현상과 동일하다. 특별히 방언 현상은 예수께서 믿는 자들에게 나타나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으로(막 16:17) 성령의 은사 가운데 하나이다(고전 12:3,4,10). 한편 성령 세례를 체험한 이 사람들은 아볼로와 마찬가지로 복음의 증거자로 변신하여 이전의 그들과 같이 요한의 세례만을 믿는 자들에게 성령의 세례에 관하여 담대하게 증거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수리아 안디옥 이후로 새로운 이방선교의 중심지로 떠오른 에베소 교회의 핵심 인물들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의 사건을 가리켜서 '에베소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19:7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 - 직업이 의사였던 본서 저자 누가의 저술상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이처럼 정확한 숫자를 밝히거나 병명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12라는 숫자를 놓고 일부 학자들은 예수의 열 두 제자나 새 이스라엘, 즉 교회의 모든 성도들과 연결시켜서 생각하기도 하는데 지나친 우화적(allegorical) 해석이다(Tonssaint). 왜냐하면 누가가 그러한 상징적 의미를 시사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면 대략을 나타내는 '쯤'이라는 단어는 쓰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모두'(판테스)는 직접 형용어로서, '모두 통틀어' 또는 '그 사람들의 총 숫자'를 뜻한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 모인 자들은 그리 많지 않은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8-10 바울의 전반적인 에베소 사역 소개
에베소의 성령 강림을 소개한 전단락(1-7절)에 이어 본문은 바울의 에베소 사역에 대한 전반적인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을 보면 바울은 처음에는 에베소에서도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회당에서 복음을 증거하였다(8절). 그러나 바울의 이러한 회당 중심의 복음 전도 사역은 역시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완악한 유대인의 배척으로 약 3개월만에 중단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일이 여기에 이르자 바울은 장소를 옮겨 두란노 서원에서 복음을 증거하게 되는데 이러한 두란노 서원에서의 복음 증거는 은장색들의 소요가 있기까지(23-41절) 2년여 동안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음으로써 에베소에서의 복음 증거는 매우 큰 성공을 거두어 에베소는 물론 그 주변 지역에까지 복음이 확산되는 결실을 거두게 된다(9,10절). 11-20절까지는 성공적인 에베소의 복음 사역을 대표적인 사건을 들어 소개하고 있다.
19:8 회당에 들어가…담대히……권면하되. - 바울은 이미 2차 전도 여행시, 에베소의 유대인 회당에서 만난 이들과 교분을 나누었었다. 그때 그들은 바울에게 좀더 오래 머물러 달라고 간청하였으나 바울은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행 18:19,21)는 약속을 하고 떠났었다. 그러했던 바울은 이제 팔레스틴과 수리아에서의 볼 일을 다 마치고(행 18:22) 다시 에베소로 돌아와서 약속대로 회당에서 강론하기 시작했는데 그 기간이 삼 개월이나 되었다. 삼 개월이라는 시간은 이제까지 바울이 회당에서 말씀을 전파하던 중 가장 긴 시간이었다. 한편 본절의 '담대히…강론하며'(에파르레시아제토)는 시제가 미완료형이다. 이로 보아 바울은 삼 개월 동안 쉬지 않고 말씀을 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권면하되'(페이돈)는 '페이도'( )의 능동태 분사로서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려 한 모든 노력 행위를 가리킨다. 이는 곧 바울이 말씀 전하는 일에 전심전력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Robertson).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 바울은 삼 개월 동안 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일들'을 전하였다. 즉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밝히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장차 예수 재림시, 주 안에서 구원받는 모든 성도들로 인해 온전히 확립될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친 것이다. 이 중 '하나님 나라'에 관해서는 눅 서론 특별자료, '하나님 나라의 이해'를 보다 참조하라.
19: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 바울의 복음 전파 사역을 방해한 주동자들은 항상 동족인 유대인들이었다(13:45,50; 14:2,19; 17:5; 18:12-16). 그리고 유대인들의 선동에 말려든 이방인들이 이에 합세하였다. 따라서 본절의 '어떤 사람들'도 유대인들과 그에 동조한 에베소 거민들이라 하겠다. 한편 '마음이 굳어'(에스클레뤼논토)라는 말은 '완곡함과 강퍅함에 내버려두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는 '스클레뤼노'의 미완료 중간태이니 바울이 사람들의 마음을 굳게 만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스스로 마음을 굳게 먹었다는 의미이다(Robertson). 이처럼 스스로 마음을 강퍅하게 먹고서 진리의 말씀을 들을 귀를 막는 자들은 복음을 거절하는 소극적인 단계로부터 시작하여 결국에는 복음을 비방하는 적극적인 단계로 발전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순종치 않고. - 이 말 역시 '설득되지 않다', '따르지 않다', '믿음을 거절하다', '믿지 않다' 등의 뜻으로서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의 완악한 심리 상태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이에 대하여 일찍이 이사야는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사 6:9)하여 진리를 거스르는 자들이 있을 것임과 저들의 심령이 어떠한 상태일지를 예언하였었다.
이 도를 비방하거늘. - '도'란 '주의 도', '하나님의 도'와 같은 말로 구원의 복된 소식인 복음을 가리킨다. 행 18:25,26 주석 참조. 그런데 복음을 거스르는 자들은 복음이 사회의 미풍 양속을 저해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거나(행 16:21) 아니면 이를 전하는 것은 로마법에 위배되는 것이라는 식으로 비방하였다(행 18:13).
바울이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 여기서 '제자들'이란 바울이 회당에서 가르치는 동안 그곳에서 얻은 제자들로 추측되는데 그 수가 얼마인지는 알 수 없다(8절). 한편 '따로 세우고'(아포리조)는 '한계를 정하다', '구별하다'는 뜻으로서 바울이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과 구별하여 이 새로 얻게 된 제자들을 중심으로 신앙 공동체, 즉 교회를 형성하였다는 의미이다.
두란노 서원. - '두란노'(Tyrannus)라는 말이 자기의 이름을 붙인 그 건물에서 가르치던 선생이었는지 아니면 이 서원의 소유주인지 또는 서원 자체의 이름인지는 분명치 않다(Hervey). '서원'(스콜레)이란 본래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장소'를 뜻하는 말이나 여기서는 '강연장'을 가리킨다(Robertson). 한편 바울은 이곳을 빌려서 2년 동안 날마다 복음을 강론하였다. 그런데 어떤 사본에 의하면(Western Text) 바울이 이곳에서 5시부터 10시까지 가르쳤다고 나와 있다. 이는 오늘날의 시간으로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에 해당된다. 여러 학자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시간대는 대개 에베소인들이 낮잠을 자는 시간이었다고 한다(Bruce, Hervey, Longeneker). 그렇다면 바울은 다른 사람들이 일하는 시간에는 자신도 일하고 다른 사람들이 쉬는 시간에는 복음을 전파하였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유대인들의 방해로 인해 회당에서 더 이상 가르칠 수 없게 된 바울은 일전에 디도 유스도의 빈집을 사용했듯이(행 18:7) 이제는 두란노 서원을 사용하였다. 이 건물이 무료로 기탁된 것인지 아니면 바울과 제자들이 세를 주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19:10 두 해 동안을 하매. - 바울이 이 년 동안 날마다 두란노 서원에서 복음을 전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아마도 이때가 바울의 선교사에서 가장 절정기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행 20:31에 의하면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간 사역했다고 나와 있다. 이것은 3개월의 회당 전도 기간(8절)과 두란노 서원에서의 2년간, 그리고 이 후의 시간을 합친 에베소 체류 전체 기간을 말하는 것이다. 한편 바울의 여타 서신서에 의하면 이 기간에 에베소에만 복음이 전파된 것이 아니라 에베소를 중심한 소아시아 일대에도 복음이 전파되어 루커스 계곡(the Lycus Valley)의 골로새, 히에라볼리, 라오디게아 교회들과 또한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교회들이 생겨났음(골 2:1; 4:13; 계 2,3장)을 알 수 있다(Bruce). 즉 당시 에베소는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로서 소아시아 일대에서 이곳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여 들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바울의 두란노 강연을 들었으니 저들에 의해 복음은 무서운 속도로 아시아 전역으로 퍼져 나간 것이다.
19:11-20 바울의 이적적 권능과 에베소인들의 회개
앞서 우리는 2년 3개월여에 걸친 바울의 에베소에서의 복음 증거 사역의 전반적인 사실을 살펴보았다(8-10절). 이어 본문은 바울의 에베소에서의 성공적인 복음 증거를 대표적인 사례를 통해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은 크게 다음 세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첫째, 바울의 이적적 권능을 소개하는 부분이다(11,12절). 즉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치유와 축사의 이적을 행한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치유와 축사의 이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적 사명, 곧 이 세상에서 악의 세력을 축출하고 온전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눅 7:21,22)과 연계된 것으로 이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복음 증거는 큰 성과를 거두게 된다.
둘째,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의 어리석음을 보여 주는 부분이다(13-16절). 당시 에베소에서는 주술사들이나 마술사들이 악령을 내쫓을 목적으로 어떤 신적 권위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의 이름을 사용하여 주문하는 일이 매우 흔했다. 그런데 바울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악귀를 축출하자 이를 목격한 마술하는 유대인들과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도 그같은 효험을 보고자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그러한 행위는 그 어떠한 효험도 볼 수 없었다. 특별히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은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다가 오히려 귀신들에게 혼이 나게 된다. 즉 그들은 귀신도 알고 있는 주 예수의 이름을 자신들의 사악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려다가 망신만 당한 것이다.
셋째, 스게와 일곱 아들이 귀신에게 혼이난 이후의 상황을 보여주는 부분이다(17-20절). 즉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주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다가 낭패를 당했다는 소식이 에베소 전역에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특별히 마술과 주술하는 자들도 복음을 영접하고 새사람이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결국 에베소에서의 복음은 날로 흥왕하였고 주변 다른 지역에까지 널리 전파되었다.
한편 이상의 사실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게 된다.
① 예수의 이름을 이용하여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 하는 자들에게는 장차 엄청난 징벌이 임하게 된다는 것이다. 특별히 진실된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서 사업상이나 자기를 옳게 보이려는 목적으로 예수를 믿는 척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엄청난 책망과 함께 죄를 물으실 것이다.
② 예수의 이름은 샤머니즘에서 샤먼(Shaman), 즉 영혼과 대화할 수 있다는 무당이나 박수들이 사용하는 주문과는 다르며, 예수에 대한 바른 믿음이 없이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모두 구원과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③ 미신과 우상 숭배에 찌들어 있던 에베소 사람들이 복음의 능력을 체험한 뒤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마술사들까지 그들의 책을 불사르고 회개했듯이 죄악된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복음의 능력밖에 없다는 것이다.
19:11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 바울은 이미 루스드라와(행 14:8-10), 빌립보에서도(행 16:16-18) 이적을 행한 바 있다. 그와 같이 에베소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능력을 덧입혀 주사 이적을 행하게 하셨다. 여기서 '희한한 능'이란 우연히는 발생하지 않는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리키는데 주로 병고치는 능력과 악귀를 쫓아내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이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베푸신 것은 선교 사업을 촉진시키기 위함이었다. 즉 에베소에서도 각종 우상 숭배와 미신, 주술 따위가 성행하였는 바(13절) 사람들이 이에 많이 유혹되어 있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바울로 하여금 능력을 행하게 하심으로써 바울이 전하는 도(道)가 정녕 모든 사람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것임을 알도록 하신 것이다(17-20절).
19:12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나가더라. - 여기서 '손수건'은 일하다가 흐르는 땀을 닦기 위하여 머리에 두르거나 허리춤에 꽃고 다니던 천조각을 가리킨다. 그리고 '앞치마'는 일할 때 옷을 버리지 않기 위하여 허리에 두르던 것이다. 이것들은 아마도 바울이 장막 제조 일을 할 때 사용한 물건들일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물건 자체에 어떤 신비한 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능력과 그 능력을 받아들인 믿음을 통해서 기적들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바울의 이적 기사는 혈루증 걸린 여인이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을 때 병이 나았던 것(눅 8:44)이나 베드로의 그림자만 덮여도 병자들이 회복된 사건(행 5:15)과 동일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같은 능력을 바울을 통해 나타내신 것은 마술과 미신의 본거지인 에베소의 사람들에게 오직 당신만이 참신임을 나타내시기 위함으로 보인다.
19:13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명하노라. - 마술사들이나 주술사들이 악령을 내쫓기 위해 주문을 외울 때 어떤 권위자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런데 바울이 예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는 것을 본 마술사들은 자신들도 그같은 효험을 보려고 예수의 이름을 사용한 것이다. 한편 당시 유대인 마술사들은 가는 곳마다에서 상당한 인정을 받고 있었는데, 이는 저들이 특별한 효과가 있는 주문을 사용한다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들은 '예수'란 이름은 물론 '아브라함'이란 이름도 주문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Bruce). 실제로 파리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한 파피루스(Paris Magical Papyrus, 574)에는 주술사들이 '내가 히브리인의 하나님 예수에 의해 네게 명하노니'라고 주문을 외웠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베드로나 바울이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른 것은(행 3:6; 16:18) 그분께서 허여(許與)하신 권능에 의지한다는 신앙의 표시이지 결코 주술을 외운 것은 아니었다(막 9:38; 눅 9:49). 그러므로 유대인 마술사들의 행위는 성령을 돈을 주고 사려고 했던 마술사 시몬의 행위(행 8:18,19)와 별반 다를게 없다.
19:14 제사장 스게와. - 원문에는 '대제사장 스게와'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성경상으로 그에 대해 더 이상 알려진 것은 하나도 없다. 한편 이 기록에 의하면 당시 대제사장이 어떻게 예루살렘에 살지 않고 이방인 땅에 살고 있는가 라는 의문이 생긴다. 이에 대해서 대체로 다음 두 가지로 추측할 수 있다. 첫째, 이는 대제사장이 아니라 그 가문에 속한 자란 것이다. 둘째, 자신의 장사를 위해 대제사장 가문이라고 거짓말하였을 것이다. 이 중에 첫 번째 견해는 그다지 신빙성이 없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문헌에는 스게와라는 대제사장의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Hervey).
19:15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 비록 하나님의 초월적인 권능에는 비교할 바 못되지만 마귀도 초자연적 능력을 지니고 있음에 대하여서는 이미 행 16:17 주석에서 살펴본 사항이다. 이러한 사실은 본절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즉 악귀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마귀의 권세를 깨뜨리기 위하여 성육신(成肉身)하셨음과 바울이 그러한 예수에 대하여 증거하는 자임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에 반해 스게와의 아들들은 실상 예수와 무관한 자들임도 간파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본절의 악귀의 말은 그들(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예수나 바울과 아무런 관계도 지니고 있지 않는데, 어찌하여 내가 그들에게 순종해야 된단 말인가라는 뜻이 된다. 즉 악귀의 대답은 그들에 대한 조롱이었던 것이다. 한편 본절에 사용된 '알다'라는 동사는 각기 다른데 전자는 '인식하는 것'(기노스코), 후자는 '알게 된 것'(에피스타마이)을 의미한다. 이 두 동사의 차이를 엄격하게 설명하기는 어려우나 아마도 마귀는 하나님이신 예수와 인간 사역자인 바울을 구별하는 의미에서 각기 다른 단어를 사용한 듯하다(Vincent).
19:16 그 두 사람에게 뛰어 올라‥‥벗은 몸으로‥‥도망하는지라. - 악귀는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예수에 대한 아무런 믿음도 없고 성령을 받은 일도 없으면서 단지 바울의 흉내를 내어 예수의 이름을 주문처럼 내세웠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악귀들린 사람을 통하여 그들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스게와의 형제들은 악귀를 쫓아내기는 커녕 오히려 능욕을 당하여 도망치게 되었다. 한편 스게와의 아들들은 일곱인데도 불구하고(14절) 본절에선 '그 두 사람에게'(암포테론)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헬라어 '암포테 론'은 '모두에게'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는 일곱 아들 중 두 사람만 마술을 행하였거나 또는 일곱이 함께 행하였으나 둘만 봉변당했다는 뜻이 아니라 스게와의 일곱 아들 모두가 봉변당했음을 뜻하는 것임이 분명하다(Longeneker, Bruce, Robertson).
19:17 다 이 일을 알고 두러워하며. -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예수의 이름을 잘못 사용함으로써 악귀에게 봉변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는 자마다 이처럼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즉 저들은 바울이 주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한 것(11,12절)과 더불어 이번 일을 통하여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가 자신들이 신봉하는 신들과는 전혀 다른 전능자이심을 깨달았던 것이다.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 에베소의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의 이러한 행위를 진정한 신앙 행위로 보기는 힘들다. 물론 이번 일로 인하여 예수를 믿게 된 자들이 상당수 생겨났을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여전히 미신과 주술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 채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이 봉변을 당한 것처럼 자신들도 행여나 예수로 인해 곤경을 당하지 않을까 염려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이들은 단지 예수의 이름이 귀신들을 압도한다는 사실 그 자체 때문에 예수의 이름을 높인 것 뿐이라 하겠다.
19:18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 바울에 의해 일어난 일은 에베소에 거주하는 유대인과 헬라인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즉 지금까지 그들이 보지도 듣지도 못한 경험을 하게 되자 그들은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은밀히 행해오고 있던 죄악들을 고백하기 시작하었다. 이것은 당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직도 과거의 생활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미신과 주술을 행하고 있었음을 의미하고 있다
(19절). 그러나 이제 이들은 여수의 능력을 체험함으로 말미암아 주술과 미신에 빠졌던 그들의 죄악에 대하여 회개하기에 이른 것이다.
자복하여‥‥고하며. - 이는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깨닫는 자의 자세이다. 사실 비록 하나님 앞에서는 예수의 대속 사역으로 인해 죄 없다 함을 선언받은 성도들이 지 만 여전히 죄성을 지니고 있는 까닭에 성도들은 알게 모르게 범죄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성도라면 자신의 죄를 깨달았을 때 이처럼 자복하며 회개하기 마련인데, 이는 하나님깨로부터 죄 용서함을 받고 다시금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요일 1 :9).
19:19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 '마술'에 해당하는 헬라어 '패리에르고스'는 본래 '쓸데없는 일'을 가리킨다. 그러나 나중에는 '터무니 없는 일'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런데 본서 저자 누가가 '마술'을 이러한 용어로 표현한 것은 그가 마술을 우상 숭배 행위와 마찬가지로 헛되고 무익한 것으로 간주했음을 시사해 줄다(Robertson). 한편 당시 에베소에 이러한 헛된 일을 행하는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는 것은 그 도시 전체가 죄악에 빠진, 즉 영적 기갈 상태에 있었음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와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고 회개함으로써 복음이 에베소 전역으로 확산된 사실은 복음의 능력이 사탄의 능력을 훨씬 능가한다는 사실과 종국적으로는 복음이 사탄의 세력을 완전히 파하고 승리하게 될 것을 보여준다.
책을 모아‥‥불사르니. - 이처럼 지금까지 마술을 행하던 자들이 자신들이 사용하고 있던 마술과 관련된 서적들을 모두 모아 대중 앞에서 불태웠다는 것은 공식적으로 그 책의 내용을 부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것은 이들이 이제 죄악된 삶을 청산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의미하거나 그렇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지금까지 종사하였던 헛된 일을 청산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한편 마술과 관련된 서적들은 파피루스나 양피지에 그 내용을 기록했는데, 이러한 기록된 주문들은 뜻모를 단어, 또는 비상한 힘을 발휘한다고 믿어진 단어와 명칭들을 일정한 형태로 정리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처럼 주문이 기륵된 파피루스나 양피지는 비단 주머니에 보관되었으며 부적으로도 사용되었다.
은 오만. - 이 돈의 화폐 단위가 헬라인들이 통용하던 드라크마(drachma)인지 아니면 로마인들이 통용하던 데나리온(denarius)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의견이 다양하다. 그러나 이 두 화패의 가치는 거의 비슷한 바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한다. 본서 1권 성경 총론, '성경 도량형 환산표' 참조. 따라서 은 오만 드라크마(내지는 데나리온)는 노동자 137명의 일년 품삯에 해당하는 막대한 돈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불 속으로 던져진 책들의 가치에 의하면 당시 에베소에 마슬이나 미신이 얼마나 극심했던지를 짐작할 수 있다.
19:20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세력을 얻으니라. - 공인 본문(Textus Receptus)에는 본절이 '주의 권능에 따라 말씀이 흥성하여 널리 퍼지니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바울이 예수의 권능을 힙입어 행한 여러 이적들(11,12절) 덕분에 복음 확장 사역이 상당한 진척을 거두게 되었음을 나타내 줄다. 이는 실로 하나님께서 바울로 하여금 이적을 행하게 해주신 목적이 달성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11절 주석 참조. 그러나 우리가 유념해야 할 사학은 이러한 이적 현상은 아직 하나님의 말씀인 신 ․ 구약 성경이 모두 완성되지 않았던 시대에 복음 확장을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시적인 방편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과 구원의 길이 분명히 명시되어 있는 신 ․ 구약 성경이 우리 앞에 주어져 있으니 이에 의거하여 복음을 전할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보다 이적 따위를 더 추구해서는 마땅치 않다.
18:21-22 바을의 전도 계획
본문은 바울의 에베소에서의 전도 사역을 언급하고 있는 중간 부분에 삽입된 기사로, 저자 누가가 바울의 앞으로의 전도 계획을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바울의 전도 계획과 그 계획이 수정되게 된 불가피성 등에 대해서는 바울 서신에 다시 나타나고 있다(고후 1:15-17). 하여튼 바울은 에베소에서의 사역이 성공적인 결과를 낳게 되자 다시금 새롭게 전도 여행을 계획했다. 이러한 바울의 전도 계획은 본래 2차 전도 여행 당시 들렀던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을 들어 2차 전도 여행에서의 귀환 때와 마찬가지로 고린도의 겐그러아 항구에서 출항하여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다시금 로마로 가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예루살램에 가고자 한 것은 그의 전도 결과를 보고하고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에서 모은 구제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는 적어도 유월절 이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거기서 유월절을 지키고자 한 듯하다. 또한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가고자 한 이유는 로마를 유럽 전도의 전초 기지로 개척하고 로마 교회의 도움을 받아 유립 전도 여행을 떠나고자 함이었다. 사실 소아시아 지역은 이미 복음이 많이 전파되었고 또한 다른 전도자들이 이미 복음을 전했던 까닭에 이미 복음이 전해진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는 바울의 전도 원칙(롬 15:20)에 적합한 지역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유럽 쪽으로 그의 발걸음을 옮기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이러한 전도 계획은 일부 차질을 빚게 되었으니 고린도에서 바울을 해하려는 음모가 있어서(행 20:3) 바울은 부득불 다시 마게도냐와 드로아 지역을 돌아 앗소에서 배를 타고 밀레도를 거쳐 비로소 가이사랴에 상륙하게 되었으며(행 13장 연구자료, '전 3차에 걸친 바울의 전도 여행' 참조). 예루살렘에 도착한 뒤 바울은 유대인들의 고소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 것이다(행 21:27; 24:27). 그러나 비록 미결수의 몸으로라고는 하지만 바울은 로마에 가게 되었으니(행 28:16) 전설에 의하면 바울은 그가 소원하던 서바나 전도까지 하였다고 하여 궁극적으로는 그의 전도 계획이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여튼 우리는 여기서 바울의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다른 목회자를 배려하는 목회 윤리의 모범을 보게 된다.
19:21 이 일이 다 된 후. - 여기서 '이 일'이란 바울이 에베소에서 두 해 동안 행한 일(10절)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을 다른 말로 바꾸면 '에베소에서 머물기로 작정된 날이 다 된 후'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바울의 에베소 전도가 성공적으로 마쳐지게 되었음을 시사해준다.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 바울은 에베소에서의 전도 사역을 성공적으로 마치게 되자 이처럼 이미 2차 전도 여행시에 세운 교회들(행 16-18장)을 다시 찾아가 제자들의 믿음을 굳게 하고 교회를 공고히 하려고 계획했다. 그런데 그가 최종적으로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한 것은 아마도 당시 팔레스틴에 기근이 심하여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마게도냐와 아가야 교회의 연보를 모아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롬 15:25: 고전 16:3,4).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바울은 선교 여행을 마무리 지으면서 다시금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 그간의 성과에 대하여 보고하며 아울러 로마를 경유해 서바나로 선교 여행을 떠나기 위한 준비를 하려는 목적에서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했을 수도 있다. 이러한 본절의 기록은 고전 16:5-9과 일치한다. 따라서 이때에 이미 고린도전서가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여기서 '경영하여'(에데토 엔 토 프뉴마티)란 '성령 안에서 결정하다'란 뜻인데, 이것은 바울이 성령의 지시에 의해 그러한 지방으로 가고자 하였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 바울이 이처럼 로마로 가고자 한 것은 그의 숙원이었다. 그는 궁극적으로 서바나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였는데(롬 15:23) 로마는 그러한 유럽 전도의 전진 기지로 삼기 알맞은 당시 유럽 세계의 중심지였다. 한편 바울이 그토록 가기를 갈망했는 로마는 미결수의 몸으로 방문하게 되는데(행 28:16), 전설에 의하면 바울이 서바나까지 전도여행을 했다고 한다(Clement). 그렇다면 바울은 로마에서의 1차 투옥(A.D. 61-63)과 2차 투옥(A.D. 66-67) 기간 사이 어느 때에 서바나를 방문했을 것이며, 로마의 대화재(A.D. 64) 사건은 그가 서바나에 있었을 때 발생했을 가능성이 크다.
19:22 디모데와 에라스도…보내고. - 디모데가 데살로니가로 파송되었다가 다시금 고린도에서 바울과 상봉한 사실에 대하여선 이미 행 18:5 주석에서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 이후의 행적이 전혀 언급되지 않다가 이처럼 본절에서 다시금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자기를 돕는 사람'이란 언급을 보면 그 동안 디모데는 바울과 동행 동사(同行同事)하며 에베소에 머물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바울은 에베소에서 디모데와 함께 사역하다가 디모데를 다시금 마게도냐 지방(행 16:6-17:15)으로 보낸 것이다. 한편 '에라스도'(Erastus)는 본서에서 처음으로 언급되는 인물이다. 그는 딤후 4:20에서 바울의 친한 동료로 소개되고 있다. 아마도 그는 롬 16:23에 나타난 고린도시의 재무관 에라스도와 동일인일 가능성이 크다.
아시아에 얼마간 더 있으니라. - 바울은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마게도냐로 보낸 후 혼자 에베소에 얼마간 더 머물렀는데 그 이유는 고전 16:8,9에 나와 있다. 즉 에베소에서는 5월에 아데미(Artemis)의 대축제와 에베소 경기가 열렸다. 그리고 이 축제로 인해 많은 이오니아 사람들이 에베소로 몰려 왔었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5월 말까지 에베소에 머물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고서 그곳에서의 전도 사역을 마치려 했던 것이다(Hervey). 그러나 축제가 일어나기 전에 데메드리오에 의해 소동이 일어나자(23-41절) 바울은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었다(행 20:1). 한편 혹자는 바울이 에베소가 아닌 소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 머물렀다고 주장하나(Wendt, Zahn) 근거가 없다.
19:23-41 에베소 은장색들의 소요
본문은 20절에 이어지는 부분으로 바울이 에베소에서 성공적인 전도 사역을 수행하고 있을 즈음에 발생한 은장색들과의 충돌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소동의 원인을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다(23-27절). 에베소에서는 아데미 여신에 대한 숭배가 대단하여 길이와 넓이가 각각 120m와 60m나 되는 신전이 있었으며 수많은 순례자가 끊이지 않았다. 때문에 이곳에서는 아데미 신상이나 신전의 모형을 제작하여 파는 사업이 번창하였었다. 그런데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우상은 헛된 것이라고 전했기에 복음을 영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이 은장색 사업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리하여 데메드리오라는 은장색이 같은 직종의 사람들을 선동하여 소요를 일으킨 것이다. 물론 데메드리오가 무리를 선동하여 소요를 일으킨 표면적인 이유는 바울의 복음 전도로 인하여 그들이 섬기는 아데미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바울의 복음 전도로 신상과 신전의 모형을 팔아 부를 얻는 자신의 경제적 기반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려는 조치였다. 이것은 마치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인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박해했으나 실상은 자기들의 종교적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였던 것과 같다. 결국 유대인이나 에베소의 은장색들이나 모두 종교를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 방편으로 사용한 것이다.
둘째, 소동의 과정을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다(28-34절). 데메드리오의 선동으로 흥분한 은장색들과 군중들은 바울과 같이 다니던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 연극장으로 끌고갔다. 이에 바울은 동료를 구하려는 마음으로 극장으로 들어가고자 하였지만 바울의 친구들은 그의 안전을 염려하여 만류하게 된다. 한편 여기서 이번 소요의 주동자인 데메드리오는 뒤로 빠졌고 군중 심리로 흥분한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극장 안에 모여 있을 뿐이었다. 이때에 유대인들은 군중들의 소동이 우상 숭배를 금지했던 유대교에도 미칠까 두려워하여 알렉산더를 통해 소요를 진정시키려고 하였지만 군중들을 더욱 흥분시키는 결과만 낳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맹목적인 종교심이 낳은 무지와 에베소 내에서 무기력한 위치에 있었던 유대교의 실상을 잘 알 수 있다.
셋째, 소동의 진정 국면을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다(35-41절). 에베소의 서기장이 지혜로운 말로 소동을 진정시키고 군중을 해산한 것이다. 즉 에베소의 서기장은 이 소요가 불법 사태임을 알면서도 군중들의 자존심과 그들의 종교심에 만족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소동이 합법적이 아님을 이해시켜 군중들의 소란을 진정시킨 것이다.
이상의 본문의 내용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준다.
① 사도행전 전체의 내용이 보여 주듯이 세상의 박해와 핍박에 비례하여 복음은 더욱 생명력 있게 성장하여 큰 결실을 맺는다는 것이다. 특히 에베소 교회는 본문이 보여 주듯이 핍박이 심했지만 고린도 교회와 더불어 나중에는 가장 큰 교회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박해가 심할수록 하나님의 역사하심 또한 크다는 점을 확신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
② 종교는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자들에 의해 이용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이러한 자들이 교회에 침투하는 것을 경계함은 물론 이들이 교회 내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
③ 복음 전도자는 물론 성도들도 말과 행동이 일치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동료들을 위해 자기 생명도 아끼지 않으려 했었다. 그와 같이 성도들도 비록 자신에게 해가 된다 할지라도 남을 먼저 생각하는 이타적인 희생 정신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19:23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인하여. - '그 때쯤'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바울이 아직 아시아에 머물러 있는 동안일 것이다(22절). 다음으로 '이 도'(테스 호두)는 본서에서 기독교 신앙과 복음을 지칭하는 것으로 자주 사용되고 있는 단어이다(행 9:2; 18:25,26). 혹자는 본절에서의 '이 도'를 에베소의 수호신 아데미(24절)와 관련이 있는 말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나(Loisy) 그런 것 같지는 않다.
19:24 데메드리오. - 아데미의 은감실(銀龕室) 제조업자의 조합장 격이었던 인물이다. 요삼 1:12에는 진리의 신봉자 데메드리오가 소개되고 있는데 동명 이인이다.
아데미. - 본절의 아데미(Artemis)는 우선 헬라의 아데미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즉 헬라의 아데미는 제우스(Zeus)의 딸이요 아폴로(Apollo)의 누이로, 순결한 처녀의 신이자 사냥의 신이었다. 이 아데미는 로마인들이 섬기던 다이아나(Diana)와 같다(Bruce, Toussaint). 그러나 에베소의 아데미는 다산(多産)을 상징하는 대지의 모신(母神)이자 신들과 사람들의 어머니로서 소아시아에서는 태고적부터 숭배되어 온 여신이다. 이 신상은 12개의 유방을 지닌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그와 유사한 형상의 운석을 우상시한 것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다(Bruce). 한편 이곳 에베소의 아데미 신전은 가로와 세로의 길이가 각각 120m와 60m가 되는 엄청난 규모였다(Longeneker). 그리고 해마다 수많은 순례자와 여행자들이 이 신전을 방문하려고 원근 각처에서 에베소로 몰려 들었다. 그래서 이 신전의 주변에는 이들을 상대로 음식이나 기념품, 제물 등을 팔고 숙소를 제공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장사꾼과 행상인들이 득실거렸다. 그중에서도 특히 가장 수입이 좋은 장사는 아데미 여신의 은감실, 즉 은으로 만든 아데미의 신전모형물을 파는 업이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것을 기념품이나 헌물 또는 호신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에베소인들의 우상 숭배 행위를 질타함으로 인해 그들의 경제적 수입에 영향을 미치자 은장색 조합의 우두머리인 데메드리오가 주동이 되어 소동을 일으킨 것이다. 아마도 그는 이러한 소동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효과를 거두려 하였을 것이다. 첫째는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의 전도를 방해하려는 것과, 둘째는 아데미 여신에 대한 보다 큰 열심을 불러일으키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일은 결국 그들에게 보다 많은 수입을 가져다 줄 것이었기 때문이다.
19:25 직공들과…영업하는 자들. - 아데미의 은감실을 만드는 데 종사하거나 그것들을 파는 장사치들을 시킨다. 즉 데메드리오는 그의 동업자를 모두 다소집한 것이다.
모아 이르되…이 업에 있는데. - 데메드리오는 아데미의 은감실과 관련해 생계를 이어가던 모든 자들을 모아 선동적인 연설을 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의 전도 사역으로 인해 자신들의 수입이 현저히 줄어들 상황에 처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데메드리오의 선동은 물욕과 여신에 대한 종교적 열심이 간교하게 혼합된 것으로, 상업적인 동기가 주된 동기이고 종교적인 이유는 주된 동기를 미화하기 위해 덧붙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26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 - 이 말은 바울이 아시아 전역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다는 표현은 아니다. 대신 에베소를 중심으로 전파한 복음이 아시아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는 의미이다. 10절 주석 참조.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 데메드리오가 직공들에게 이같은 말을 한 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이 아시아 전역에 걸쳐 전파됨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우상을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였음을 시사해 준다. 즉 비록 약간 과장된 표현이라 할지라도 본절은 바울이 실제로 아시아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19:27 영업만…아니라…아데미의 전각도…떨어질까 하노라. - 데메드리오는 자신의 동업자들을 선동하면서 나름대로 세 가지 합리적인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아데미가 한갖 우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바울의 전도로 인해 아데미 신전 모형을 만드는 자신들의 사업이 신용을 잃게 되고 만다는 것이다. 둘째, 복음이 전파되면 될수록 아데미 신전 모형을 사려는 사람이 적어짐으로 인해 결국 신전의 권위도 떨어진다는 것이다. 셋째, 온 세계가 숭상하는 이 여신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고 그로 인해 여신의 분노를 유발하여 대재난이 닥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데메드리오의 주장은 아데미의 위엄과 권위 수호를 위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 그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의 이익 유지에 있음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이다. 24,25절 주석 참조.
아데미의 전각. - 아데미 여신의 신전을 가리킨다. 이 신전은 B.C. 550년에 창건되었다가 B.C. 356년에 에로스트라토스(Erostratos)라는 이름을 가진 정신 착란증 환자에 의해 불태워졌다. 그리고 후대에 새롭게 재건되었다. 한편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에베소 외에도 도처의 32곳에서 아데미 숭배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비록 전세계적이지는 못했더라도 이 아데미 숭배는 상당히 광범위한 지역에서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19:28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 데메드리오의 선동에 의해 분노와 위기감을 느낀 자들은 이처럼 바울이 전하는 여호와 하나님을 업신여기기라도 하듯 자신들이 섬기는 아데미 여신을 찬양하였다. 그런데 몇몇 서방 사본(Western Text)에는 본절 초두에 '거리로 뛰어나가'라는 말이 부기되어 있다. 때문에 혹자는 이들이 에베소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아카디안 대로(ArcadianWay), 즉 에베소 항구에서 피온(Pion) 산 기슭에 있는연극장 (29절)까지 곧게 뻗어 있는 길을 휩쓸고 다니면서온 성읍을 소란케 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Longeneker).
19:29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 - 데메드리오에게 선동된 무리들의 흥분은 급속히 퍼져 에베소 온 성읍을 혼란으로 몰아 넣었다. 그리고 이 와중에서 바울의 동반자인 가이오와 아리스다고가 무리들에게 붙잡혔다. 무리들이 이들을 어떻게 찾았는지는 분명치 않은데 아마 우연히 거리에서 만나서 연극장에 끌고가 증언을 강요하도록 한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연극장은 극장 또는 정치적 공중 회합 장소로도 쓰이는 노천극장으로 약 25,0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대형 건축물이라고 한다. 본장 자료노트 참조. 한편 본절의 가이오(Gaius)가 행 20:4에 나오는 가이오와 동일 인물인지는 확실치 않다. 왜냐하면 본절의 가이오는 마게도냐인으로 소개되어 있으나 행 20:4의 가이오는 더베 출신으로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성경에는 고린도교회의 가이오(롬 16:23)와 요한 삼서의 수신인 가이오(요삼 1:1)가 나온다. 그러나 이들의 동일인 여부 역시 분명치 않다. 다음으로 아리스다고(Aristarchus)는 행 20:4에서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출신으로 소개되고있다. 행 27:2에 의하면 그는 바울의 로마 여행시 동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30 백성 가운데로…말리고. - 뒤늦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가 체포된 사실을 안 바울은 그들을 구출하고 군중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극장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아마도 바울은 자신이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러한 일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한 것 같다(Longeneker). 그러나 바울의 그러한 생각이 에베소 교인들의 눈에는 위험 천만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에베소 교인들은 바울이 연극장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극구 만류하였다. 한편 후일에 바울이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고전 15:32)이라고 말한 것은 이때의 일을 두고 한 말일 것으로 짐작된다.
19:31 아시아 관원 중에…어떤 이들. - 이들은 아시아(행 16:6 주석 참조)의 각 도시에서 해마다 뽑히는 10인의 의회 관원들을 가리킨다. 이들의 주임무는 동맹을 결성하여 로마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고양시키는 것이었다. 때문에 이들은 대체적으로 부유한 집안의 출신들이었다(Hervey). 그런데 이들 중 몇몇이 바울과 친분관계를 맺고 있다가 위급한 상황에서 바울에게 조언을 해주었다는 사실은 그 당시 기독교가 이미 상류 계층에까지 상당히 파급되어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행 13:1).
19:32 태반이나 알지 못하더라. - 이는 군중 심리에 의해 부화 뇌동한 무리들의 어리석은 행태를 여실히 드러내 준다. 즉 데메드리오의 선동에 의해 '아데미'를 연호(連呼)하며 거리를 돌아다닌 자들에게(28절) 덩달아 합세한 군중들은 일의 자초지종은 물론 자신들이 해결하고자 하는 이슈(issue)가 무엇인지 조차 몰랐던 것이다. 이로 보아 데메드리오는 무리들을 선동해 놓고선 결정적인 순간에 뒤로 살짝 빠져 있었던 것 같다.
19:33 알렉산더를 권하여…발명하려 하나. - 본절의 알렉산더(Alexander)가 딤전 1:20; 딤후 4:14에 나오는 구리 장색 알렉산더와 동일인 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에베소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을 대표해서 에베소인들에게 자신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변명을 하기 위해서 나온 자라는 점이다. 사실 에베소인들의 눈에는 유대인이든 그리스도인들이든 모두 자신들이 섬기는 우상을 배척하는 자들로 비쳤을 것이다. 때문에 유대인들은 바울로 인한 에베소인들의 소요와 적개심이 자신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Bruce). 이러한 사실은 '발명하다'(아폴로게이스다이)가 '자신을 방어하다', '스스로 변호하다'라는 뜻으로 쓰였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19:34 그가 유대인인줄 알고…하더니. - 에베소인들은 알렉산더가 자신들 앞에서 유대교도들과 바울과는 무관함에 관해 변명하려 하자 큰 소리를 외침으로 저지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아데미 여신을 거부함에 있어선 그리스도인과 유대인들의 차이점을 구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왕에 지니고 있던 유대인들에 대한 경멸심을 적대심으로 확대하여 폭발시키려 한 것으로 보인다. 행 18:2 주석 참조.
19:35 서기장. - 에베소 시의회에서 선출된 최고 행정관리를 가리킨다. 비록 로마 당국에서 임명한 관리는 아니나 로마 총독과 논의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Robertson). 그는 시의회의 결의 사항을 발표하고 집행하는 관리로서 시민들과 로마의 주 행정 당국 사이를 연결시켜 주는 중요한 일을 맡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에베소에서 발생하는 모든 종류의 소요 사태나 불법 시위에 대하여서도 책임을 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 소요 사태가 몰고올 로마 당국의 문책을 염려하여 일단 소요를 진정시키려고 애쓴 것이다.
쓰스에게서 내려온. - 헬라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Zeus)를 가리킨다. 행 14:12 주석 참조. 한편 쓰스에게서 내려왔다는 말은 아데미 신상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로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을 신으로 섬기면서 생겨난 전설이다.
전각지기.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네오코로스'( )는 '신전'(나오스)과 '청소하다'(코레오)의 합성어로서 본래 아데미 신전의 가장 천한 청소부를 가리켰다. 그러나 후대에는 '신전 수호자' 내지는 '신을 섬기는 헌신자'라는 뜻으로 바뀌어 신에게 특별히 바쳐진 도시에 붙인 명예로운 이름이되었다(Robertson). 서기장이 이같은 말을 하게 된 것은 에베소인들의 자존심을 살려주고 자부심을 부추기어 그들의 소란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19:36 이 일이…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 - 에베소는 아데미의 전각지기로서 그 존엄성은 아무도 부정 못할 것이니 진정하라는 말이다. 사실 당시 에베소는 아데미를 섬기는 대표적인 도시였다. 따라서 그곳 주민들은 아무런 구애도 받지 않고 마음껏 아데미를 숭배할 수 있었고, 이 일을 갖고서는 아무런 염려도 할 필요가 없었다.
19:37 도적질하지도…여신을 훼방하지도. - 웅성거리는 무리들을 안돈시킨 서기장은 이제 정당한 사유도 없이 잡혀온 가이오와 아리스다고(29절)를 풀어주기 위해 무리들을 설득하고 있다. 즉 가이오와 아리스다고가 아데미 신전의 물건을 훔치거나 아데미 여신을 훼방한 적이 없으니 어떻게 징벌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당시에는 그러한 죄목으로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을 고소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성도들에게 이방 신전의 물건을 훔치는 행위를 철저히 금지시켰다. 따라서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도 바울의 모범을 따랐을 것이다. 더욱이 바울은 이방 신들이나 특별히 아데미신을 비방하는 대신 사람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는 참신이 하나님이심과 그분의 독생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곧 온 인류의 구세주이심을 증거하였으니(행 17:22-31) 가이오와 아리스다고 역시 그러한 식으로 전도하였을 것이다.
19:38 재판 날…총독들도 있으니. - 자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고발하려는 자가 있다면 적법한 절차에 따라 소송을 제기하라는 서기장의 결론적 말이다. 여기서 이 적법한 절차란 로마 총독의 주재하에 실시되는 정규적인 순회 재판일에 소송을 제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여기서 '총독들'(안뒤파토이)이라는 복수형이 쓰인 것은 당시아시아 도에 실제로 두 사람의 총독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실제로 A.D. 54년말-55년은 아시아 도의 총독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Marcus Junius Silanus)가 아그리피나 2세(Agrippina II)의 계략에 의해 독살당한 후 그의 후임자가 도착할 때까지 두 집정관 겔라(Celer)와 헬리우스(Helius)가 아시아 도를 다스리고 있던 때이다. 이때는 바울의 3차 전도 여행(A.D. 53-57년)이 시작된 지 2-3년 되는 해로서 그가 에베소 사역을 마무리 지으려고 한 때와 일치된다(8,10절; 행 20:1).
19:39 그 외에…민회에서 결단할지라. - '민희'란 시의원들로 구성되어 있던 자치 의결 기관을 가리킨다. 이 민회는 정규적으로 매월 세 번씩 모였으며 모일 때마다 도시 내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자체적으로 해결하며 또한 그 도시의 행정 사무 일체를 논하였다. 따라서본절은 굳이 로마 총독에게 정식 재판을 요구할 정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면 이 민회에 청원하여 문제를 해결하라는 뜻이다.
19:40 책망받을 위험이 있고. - 서기장은 이번 소동의 불법성을 거듭 지적하면서 이처럼 무리들에게 해산을 종용하고 있다. 이는 불법 집회가 있으면 시의 치안 책임자인 자신이 로마 당국의 문책을 받게되고 나아가서 이 소요의 주모자는 재판에 회부되기 때문이었다. 사실당시 로마는 식민지 정책에 극히 관대하였으나 소요 사건만은 엄정히 처리하여 주모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도시의 자치권을 박탈하기까지 하였다. 따라서 서기장은 이유 없는 불법 집회로 인하여 로마 당국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그의 지위가 위태롭게 됨은 물론이요 에베소의 자치권이 박탈되는 위험을 겪지 않기 위해 본절과 같은 말을 한 것이다.
19:41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 - 데메드리오의 선동에 놀아나던 무리들은 서기장의 끈질긴 설득과 최후의 위협에 굴복당하여 결국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써 위기 상황은 끝났는데 이는 실로 배후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 덕분이 아닐 수 없다. 즉 서기장의 이와 같은 판결은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때 유대인들에 의해 발생한 고린도 소동에 대해 아가야 총독갈리오가 취했던 조치처럼(행 18:12-16) 기독교에 대한 유리한 판례를 남긴 것이다. 행 18:16 주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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