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panese Invasions of Korea: Every 10 Days (youtube.com)
1. 조선의 대외전쟁 성적표
가. 임진왜란 : 2주만에 서울 함락.
1592년 4월18일 고니시 장군의 첫부대가 부산에 도착하는데 수도 한양에 입성한 것은 5월 2일이고, 가토부대가 5월 3일이다.
나. 병자호란 : 1주만에 서울 함락.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40여 년 후인 1637년 압록강을 건넌 야인(野人)이라고 홀대했던 여진족은 불과 7일만에 한양을 점령했다.
참 초라한 전쟁성적표이다. 조선은 왜 이렇게 약체였을까. 인구가 1,000만이 넘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참 어이가 없어보인다.
조선이 당시에 약했던 것은 농업기반이 취약했던 것이 그 이유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 왜군이 점령했을 때 굶주린 조선인이 일본군에 먹을 것을 구걸하러 갔다가 오히려 죽임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조선의 정규군은 3만명 수준이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3만명 수준의 군인도 먹여 살릴 여력이 간당 간당했다는 말이다. 중국은 전쟁에 나서면 보통 100만 대군이다. 그런데 진실의 여부가 오늘날에도 논란 거리가 되고 있는 이이 선생의 "10만 양병설"이 선경지명이라고 평가를 받는데, 한편으로는 중국에서 100만 대군이 처들어오면 3만 군대나 10만 군대나 병기에 희생되는 군사보다도 밟혀서 죽는 병사가 훨씬 많을 것이라는 사실은 6-25 때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보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의 전쟁 성적표를 보고서 6.25 때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은 3일만에 서울울 점령했으니 대한민국보다 낫다고 자위해야 하나...
2. 임진, 정유 7년 전쟁의 사실상 종결지 전라도 유일의 왜성인 "순천왜성(順天倭城)"
임진왜란 때는 왜군은 호남을 노략질하지 못했다. 처음 한양 진격 시에는 속도적으로 부산에서 한양으로 단번에 진격했다. 이런 전쟁의 행태를 보면 왜군은 보급에 대한 문제를 속도전으로 커버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방적으로 밀리던 임진왜란의 전세를 역전시킨 전투는 " 이치 전투(梨峙戰鬪) "로 는 1592년 전라도 진산군과 고산현 경계의 이치에서 일본 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군이 맞붙은 전투로 이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전라도 공략에 실패하게 된다.
만일 이치가 뚫렸다면 그대로 조선군의 곡창지대인 전라도가 점령되는 상황이었는데 곡창지대 호남을 사수해 조선의 보급로를 유지하고 전라도의 조선의 수군과 육군이 후방 교란의 부담없이 왜군과의 전투를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전라도의 생산력을 바탕으로 호남,영남에서 일어난 의병들에게 보급을 하여 정규군의 열세를 극복한 중요한 전략적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곡창 전라도를 확보하지 못한 왜군은 이후 보급에 차질이 생겼고 이로 인하여 왜군은 다시 남하하여 부산 쪽으로 집결하게 되어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진다.
명나라와 일본 간의 지루한 휴전협상이 진행될 때 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는 명나라 황제로 부터 일왕(日王)으로 책봉을 받았는데 책봉사에 의한 책봉의식을 진행할 때 히데요시는 경건함과 기쁨으로 책봉례에 응한 것이 당시 현장의 의 몇몇 기록으로 전한다.
정유재란은 임진년과 달리 왜군과 전라도의 전쟁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로써 임진년에 보전되었던 전라도가 정유재란에는 철저히 유린되었다.
칠천량 전투로 경상도 해안을 차지한 왜군은 전라도의 제해권까지 장악했고, 뒤이어 서해안 쪽으로 진격한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하지만 이순신은 명량대첩으로 왜군의 계획에 차질을 빚게 하면서 남해안의 제해권을 다시 회복하면서 왜군의 해상 보급로를 차단하여 단번에 전세를 역적시키게 된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왜군의 철군 결정이 하달 되어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게 된다.
일본 본토에서 철군 지시가 내리자 왜군은 울산과 사천, 순천을 통해 빠져나가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순천왜성에서 조명연합군과 왜군 7만 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 국제전이 벌어지는데 이를 후세에 " 순천왜성 왜교성 전투( 1598년 음력 9월 20일 ~ 10월 7일) "라고 하였다.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였다. 왜국은 히데요시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 조선에 주둔한 군대를 철수시킬 것을 의결한다.
그러나 비밀유지는 실패로 돌아갔고 이것이 조선측에도 알려지면서 음력 9월부터 조명연합군은 울산왜성의 가토 기요마사를 공격목표로 한 동로군, 사천왜성의 시마즈 요시히로를 타겟으로 한 중로군, 순천왜성의 고니시 유키나가 군을 타겟으로 한 서로군을 편성하여 남진, 왜군을 추격하는 전략을 세운다. 한편으로 진린의 명나라 수군과 이순신의 조선수군을 하나로 묶어서 수로군을 따로 편성한 다음 전라도 부터 경상도 까지 남해안을 따라서 왜군을 밀어내는 전략도 세운다. 이를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이라 한다.
서로군 제독 유정은 8월에 조선에 들어와 군대를 거느리고 한성, 수원, 전주를 경유하여 남하한 후 9월 19일 순천 왜교성을 공략하게 된다. 여기에 1만여명의 조선군이 포함되어 총 3만 6,000명의 지상 병력이 동원되었다.
수로군은 조명연합 함대를 편성하여 7월 24일 절이도 해전에서 승리 후, 9월 말에 조명연합육군과 연합 전선을 구축하게 된다. 지상군 3만 6천, 수군 1만 5천 합하여 5만 1천명의 군대였다. 이때 순천왜성에서 항전한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군은 1만 5천명 정도라고 하니 7만 여 명에 이르는 군사가 한 곳에서 전투를 벌인 대규모 국제전이었다.
퇴각하는 왜군과의 마지막 일전은 1598년 11월 노량해협에서 벌어졌다.
당시 이순신과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陳璘)은 각각 남해 관음포와 곤양(昆陽, 사천)에서 일본으로 돌아가는 왜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왜군의 함대가 노량 방면으로 이동한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조명 연합군은 노량으로 이동해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일본군이 연합군의 기세에 눌려 관음포 쪽을 향해 후퇴하자, 연합군은 이를 추격하며 공방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이순신은 왼쪽 겨드랑이에 유탄을 맞고 쓰러진 뒤 “싸움이 지금 한창 급하니 조심하여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라는 말을 남기고 절명했다. 노량해전에서 조명 연합군은 200여 척의 적선을 침몰시켰다. 두 차례에 걸친 왜란은 이로써 6년 7개월 만에 종결됐다.
이러한 정유재란 전개의 전장의 마지막 3개월 간의 모습을 명나라 종군화가가 두루마리 그림으로 남긴 것이 "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券) "인데 이를 19세기 화가가 8폭 병풍으로 다시 그려서 전하는 것이 " 정왜기공도병(征倭紀功圖屛) "이다.
임진왜란은 전라도 유일의 왜성인 순천왜성에서 왜군을 패퇴시킴으로써 종결되는 전쟁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순천 왜교성 전투가 크게 조명되지 못했는데 이번에 개봉되는 김한민 감독의 임진왜란 3부작의 완결편인 " 노량 "에서는 어떠한 모습으로 그려질지 영화의 개봉일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