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몰려드는 군웅(群雄)들
시월(十月) 이십구일(二十九日).
태산 관일봉(貫日峯) 능선 너머로 뽀얗게 여명이 스미는 것으로 시월 이십구일의 아침은 시작되었다.
하나 이 아침을 태고의 유적(幽寂)과 새소리, 서리앉은 풀잎 위를 다람쥐가 스쳐 뛰노는 아침으로 생각한다면 큰 오해이다.
아직 여명이 트기도 전인 새벽 묘시(卯時) 경부터 태산 관일봉을 오르는 길은 인파로 꽉꽉 메워지고 있었으며, 그런 그들이 내쏟는 소음은 중원의 모든 시장바닥을 다 합쳐놓은 것보다도 더 시끄러웠던 것이다.
사해대검회.
사상 최고의 규모와 그 비중에 미루어 대회는 시작되기도 전부터 갖은 소문이 난무했다.
우선, 비공식적인 것이긴 하나 대회참가자, 즉 직접 비무를 하는 사람만 해도 무려 일만에 다다른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대회의 진행시간은 아무리 못 걸려도 두 달이 넘게 걸릴 것이며, 최후의 우승자를 가리는 날은 내년 원단(元旦) 정초가 될 거라는 얘기였다.
참가자 일만에 그들에게 딸린 특수조련인이며, 시종들을 감안해 약 오만의 사람들을 수용할 대막사촌이 태산의 한 계곡에 이미 지어져 있다고 했다.
당시 대도(大都) 장안(長安)의 집 수가 일만 호(戶)라 하였으니 오만의 사람이라면 그대로 도시 하나의 규모.
사실 대봉황천은 이 막사촌을 건립하기 위해 하나의 산봉을 아예 평지로 만들고 두 개의 계곡을 다져야만 했다.
막사촌의 이름은 단계촌(丹桂村)이었다.
워낙 참가하는 사람이 많아 대회는 모두 십여 곳에서 나누어 진행된다.
약 한 달에 걸쳐 진행되는 이 예선비무에선 구천구백이십 명이 탈락하고 팔십 명의 고수들만 남게 되는데, 이 팔십 명이 다시 대봉황천의 중앙무대로 장소를 옮겨 소위 본선을 치르는 것이다.
각 예선장소의 공증인(公證人)은 대봉황천 고수 일인, 오대문파 명숙(名宿) 일인, 기타문파 명숙 일인, 모두 세 명으로 구성된다.
대회가 시작되기도 전에 군웅들은 제각기 우승후보를 점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일반적으로 무림에서 열리는 대소 비무대회에는 대게 각 문파의 젊은 고수들이 참여할 뿐, 노장고수들은 참여치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들로선 나와서 이겨 봐야 그렇고, 만약 진다면 망신이니 자연 그런 대회를 기피해 왔던 것이다.
하나 이번 대회에 대봉황천이 내건 우승자에 대한 조건이 무림에 상세히 알려지자 그런 사실들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초청장에서는 단순히 비무의 우승자 및 서열 팔위까지의 고수자들에게 대봉황천의 적통을 이어받을 권리를 부여한다고만 밝히고 있으나, 대회에 임박하여 나타난 조건은 더더욱 엄청난 것이었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산(山).
즉, 금악(金嶽)!
어디에 있는 것인지, 정말로 산 전체가 황금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나 이 금악이 바로 대봉황천 만룡가의 발원지(發源地)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었다.
천 년의 신비!
당금 무림 최고의 무예수준을 자랑하는 만룡가의 발원지 금악이 서열 팔위까지의 고수자에게 전면 개방된다는 것이 바로 대회에 임박해 흘러나온 소문이었다.
그러자 무림은 또다시 발칵 뒤집혔다.
젊은 신진고수층은 말할 것도 없고, 심산에 은거하여 속세와 인연을 끊고 있던 대기인(大奇人)들까지 속속들이 무림에 나타났다.
나이 백 세부터 나이 십오 세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남녀노소가 망라된 전무후무한 참가진용이 갖추어진 것이다.
군웅들은 풍문으로, 또는 근거에 의하여 소위 검회이십강(劍會二十强)을 점치기에 바빴다.
그들이 뽑은 검회이십강이란 다음과 같았다.
개화십강(開花十强).
꽃이 피기 시작하는 것이 개화이니, 즉 소장, 청년, 소년층의 고수를 말하는 것이다.
사천당가(四川唐家)의 차대장령(次代掌令)이며, 백이십수열화폭(百二十手熱火暴)으로 사천 일대에서 젊은 사자로 불리는 사자여래(獅子如來) 당인(唐仁).
녹림십팔채(綠林十八寨)의 공동전인이자 연북(燕北) 일대 암흑가의 총수인 묵비향(墨飛香).
무림북두 소림(少林)이 백 년 이래로 키워낸 최고의 기재라는 초우법승(草羽法僧).
한 자루 서벽신검(瑞碧神劍)으로 중주(中州)를 진동시킨 점창(點蒼)의 수일평(首一平).
한 번 몸을 띄우매 그 종적이 없고 용모는 깎아놓은 상아를 방불케 한다는 곤륜(崑崙)의 운연(雲燕).
화산(華山)이 심혈을 기울여 배출한 권장(拳掌)의 젊은 달인, 권왕지왕(拳王指王) 목철우(木鐵羽).
대연승허(大然昇虛)의 보타암 청조각(靑操閣) 최고의 가인(佳人), 능파선녀( 罷仙女) 예소벽(芮小碧).
신비의 도적떼 생사선주(生死船主) 혈독(血毒) 혜공(慧拱).
만해창파(萬海蒼波) 숭명제도(嵩明諸島)의 고독도주(孤獨島主) 불인기(不仁奇).
온몸이 불인 듯 시뻘건 화염에 휩싸여 펼쳐지는 마도지한(魔道之漢) 혈영신공(血影神功)의 전인, 혈영문주(血影門主) 화월후(火月吼).
이상이 젊은 후기지수 십 인, 개화십강들의 이름이다.
낙화십강(落花十强).
꽃이 떨어지는 것이 낙화이니 인생의 황혼기인 노년, 장년의 고수층을 일컫는 말.
만독귀수(萬毒鬼手) 준남(準南) 응조왕(鷹鳥王).
유랑개방(流浪 )의 벽력신개(霹靂神 ).
백근철괴(百斤鐵槐)의 대살성, 구혈모모(求血 ).
안남(安南) 신기방주(神旗 主) 무량신군(無亮神君).
남악형산(南嶽衡山)의 신비문파 귀곡(鬼谷), 혈기자(血機子).
패문(覇門)의 패문마황(覇門魔皇).
인마(人魔) 담동(潭洞).
무정곡(無情谷)의 살검광생(殺劍狂生).
만천하 표국의 연합체인 중원표련(中原 聯)의 총국주(總局主) 환우진신검( 宇眞神劍) 미량(彌良).
그리고 백 년 전, 흑백쌍마(黑白雙魔)의 하나였던 백마(白魔) 위걸(魏傑) 등이 낙화십강에 꼽힌 이름이었다.
그저 앉아서 이름만 듣고 있어도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는 일대의 거물이요, 효웅들!
어쨌든 태산은 시끄러웠다.
말할 수 없이 시끄러웠다.
그 태산의 중턱쯤 되는 곳을 운룡 일행이 오르고 있었다.
* * *
가파른 산길인데도 어느새 소문을 들은 것인지 각종의 음식과 주류를 파는 노점(路店)들이 산길 양쪽으로 즐비했다.
그들이 호객하는 소리, 사람들의 잡담소리, 병장기 찰캉이는 소리 등이 번잡하게 어우러진 속에서 문득, 운룡의 옆에서 걷던 두자상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운형의 그 검법변화는 어디서 익힌 것이오?"
운룡은 주위의 번잡한 풍물을 신기한 듯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몇 사람과 겨루어 얻은 바를 적당히 갈무리한 것이지요. 아직 춘풍화우 일식밖에 못했어요. 오늘부터는 횡소천군, 선인지로의 초식도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두자상의 얼굴에 언뜻 한줄기 놀람의 빛이 스쳐 지났다.
"스스로……?"
'이 사람은 나이는 어려도 거짓을 말하지 않는 사람이다. 스스로 만든 것이라면 정말 놀라운 일이로구나. 나조차도 그 검법 앞에 섰다면 어찌 막을지 몰랐을 것인데…… 나머지 두 초식의 연구에 심력을 기울어야겠군.'
그러나 두자상의 마음은 그리 밝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오는 길에 주워들은 비무참가 고수들의 수준이 너무 뛰어났다.
개화십강은 그야말로 중천에 떠오르는 해처럼 욱일승천(旭日昇天)하는 후기지수들이요, 낙화십강은 대봉황천의 제고수와 겨루어도 손색이 없을 희대의 거물들.
'열 곳에서 나누어 한다 해도 최종 팔십 인이 하는 본선비무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여덟 번을 전승해야 한다. 이십강의 고수들은 고사하고라도 일만의 비무참가자들마저 하나같이 각 문파의 정예로 선발된 자들이니 단 한 시합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어려운 일이로구나…….'
두자상이 생각을 잇는 동안에 일행은 한 곳의 너른 공지에 이르렀다.
사방의 너비는 반 마장 정도.
거대한 공간은 인공으로 숲과 산을 깎아 고운 모래를 깔아 놓은 것이고, 공간 저편으로는 어디까지 뻗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화강석 돌계단이 아득히 위로 뻗어 있었다.
계단이 뻗어오른 저 위.
거대한 원시림 위로 하나의 성(城)이 우뚝 솟아 있는 것이 보였다.
아침햇살을 받아 마치 이제 막 나래를 떨치고 오르려는 봉황과도 같은 모습의 아름다운 성.
그렇다. 바로 저 성이야말로 천하 제일의 명망을 떨치고 있는 대봉황천의 총본산인 봉황성(鳳凰城)이 아니겠는가?
이 공지는 본래 성으로 오르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한 입당(入堂)으로 쓰이던 곳으로써 공지를 빙 둘러 이십여 채의 아름다운 전각들이 세워져 있었다.
지금, 공지는 거의 발디딜 틈조차 없이 빽빽이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고, 공지의 한쪽에는 거대한 안내문이 세워져 있었다.
<一, 비무에 참가하고자 하는 사람은 각 입당에 접수를 할
一, 천지현황우주홍황일월(天地玄黃宇宙洪荒日月)의 열 개 비무장소에 대한 구분을 받은 사람은 안내를 받아 단계촌(丹桂村)의 숙소로 입소할 것.
一, 숙소에 입소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비무참가자 및 그의 수행원 오 인(五人)에 한함.
一, 비무는 각 비무처의 대주(臺主)의 권한에 의해 임의로 조정되며 예선비무의 기한은 십일월 말일까지임.>
두자상이 가장 가까운 곳에 세워진 전각을 가리켰다.
"저곳으로 가지요."
전각의 안에는 다섯 개의 탁자가 놓여 있었고, 각 탁자마다 두 명의 백의인이 앉아 접수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탁자의 앞에는 무게가 약 이백 근은 실히 될 무거운 쇠향로 하나가 놓여 있었다.
향로의 앞에는 은색검수(銀色劍穗)의 백의무사가 우뚝 서 있었다.
운룡 일행이 다가서자 향로 앞의 백의무사가 웃으며 포권의 예를 취했다.
"접수하시기 전에 가벼운 관문통과를 바랍니다."
그는 말과 함께 향로를 가리켜 보였다.
두자상이 물었다.
"그것은 무슨 관문이오?"
"대회의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우선 일차 참가자들은 이십 년 이상의 내력을 지닌 사람으로 규제하고 있지요. 이는 대회의 형평을 유지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이백 근 정도의 향로를 들자면 최소한 이십 년의 내력이 있어야 한다.
그저 참가하는 데 의의가 있다는 어중이떠중이 무사들을 규제하기 위한 조치가 틀림없었다.
두자상은 내심 은근히 염려가 되었다.
'운형의 나이 이제 십육 세이니…… 그에게 과연 이십 년 이상의 공력이 있을까?'
하나 그의 기우를 비웃기라도 하듯 운룡은 씩씩하게 앞으로 나서더니, 그것도 두 손도 아닌 한 손으로 향로를 번쩍 들었다.
그는 향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한참을 바라보더니 자리에 탁 내려놓고 백의무사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구경 잘했소."
두자상은 만족한 표정으로 연비를 힐끗 바라보고는 그의 뒤를 따랐다.
탁자에 앉아 있던 백의인은 운룡의 도사복장을 의외라는 듯 가볍게 훑어보더니 한 개의 두꺼운 책자를 내밀었다.
"이곳에 본인과 수행인의 출신성명을 기록하시오."
운룡이 먼저 썼다.
그 아랫줄에다 두자상이 익수(益手) 두자상이라 적었고, 연비는 그냥 자신의 이름만 썼다.
백의인은 책자를 쭉 훑어본 후, 고개를 끄덕이며 한 개의 붉은 홍패(紅牌)를 내밀었다.
앞면에 천(天)자가 새겨진 홍옥의 패였다.
"천대(天臺)의 팔백일흔두 번째 접수인이 되셨소. 동쪽 숲으로 가면 안내인이 있을 것이오. 귀 진인의 무운을 비오."
그때 돌연 한소리 낭랑한 웃음과 더불어 한 사람이 불쑥 그의 옆으로 나타났다.
"핫하…… 운형은 도대체 그럴 수 있소? 소제를 하루종일 기다리도록 만들다니 말이오."
운룡은 무심히 그를 바라보다 순간, 만면에 활짝 웃음을 피워 올렸다.
"옥시주!"
백의인.
한 자루 섭선을 든 채 빙글빙글 웃고 있는 준수한 용모의 그는 바로 기수의 배 위에서 만났던 귀공자 옥수(玉秀)가 아닌가?
그의 뒤에는 두 사람이 호위하듯 서 있었는데, 좌측의 위인은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늙은 초의피혜(草衣皮鞋)의 백발노인이었고, 우측의 인물은 곱게 늙은 흔적이 역력한 화의노파(華衣老婆)였다.
옥수가 말했다.
"소제는 어제 제남부에서 운형을 기다리느라 눈이 빠질 뻔했소. 운형은 약속을 잊어버리기라도 했단 말이오?"
약속?
그렇다. 운룡은 비무 하루 전날 제남부에서 그와 만나기로 하지 않았던가?
운룡은 약속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었다. 다만 자신의 한철검으로 초식을 연구하고 싶은 일념이 더 강했을 뿐…….
운룡이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자 옥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됐소."
그는 탁자의 백의인쪽을 힐끗 바라보더니 그 앞에 놓인 명부를 자신쪽으로 쓰윽 끌어당겼다.
허공섭물의 수법!
스르르 손 안으로 딸려 들어온 명부의 수행인 란에 그는 옥수라 적었다.
이어 뒤에 서 있던 노인들도 각기 남해쌍기(南海雙奇)라 적었다.
한 명의 비무참가자가 오 인의 수행인을 거느릴 수 있으니 빽빽하게 들어찬 셈.
두자상은 묵묵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 가볍게 검미를 찌푸렸다.
'저들은 누구인가? 그 수법으로 보아 범상한 위인들이 아닌 것 같은데 왜 비무에 참가하지 않고 수행인임을 자처할까?'
그때 운룡이 옥수를 그에게 소개시켜 왔으므로 두자상은 담담히 웃으며 두 손을 맞잡았다.
"두자상이오."
"옥수이오."
그들의 시선이 잠시 허공에서 불꽃튀듯 얽혔다가 떼어졌다.
옥수는 옥수대로 두자상과 연비가 범연한 인물이 아니라고 본 듯 유심히 살펴보는 눈치였다.
어쨌든 단숨에 여섯 명으로 불어난 운룡의 일행은 가벼운 담소를 나누며 동쪽 숲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은 아직도 꾸역꾸역 몰려 올라오고 있었다.
* * *
단계촌(丹桂村).
대봉황천의 입당으로부터 산 하나를 가로넘어 있는 이곳은 그대로 하나의 거대한 도시였다.
"관일봉을 휘감은 연일(連日)과 충일(庶日), 두 봉우리 사이에 있는 계곡 두 개를 아예 깎아냈지요. 산아래 임시숙소와 더불어 연 공정비 황금 십만 냥에, 연 인원 오천의 인부가 동원되어 도합 삼 년에 걸쳐 만든 도시이오. 이번 비무가 끝나고 나면 대봉황천에 속한 무사들의 모든 식솔들을 이주해 살도록 하게 할 계획이오이다."
안내무사의 말마따나 어스름 땅거미가 깔려오는 계곡 아래 단계촌은 그대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에는 도합 총 일만 호의 집이 있으며, 기타 주루나 반점(飯店), 일용품점과 상점, 심지어는 도박장과 기루까지 있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번 대회에 대비하여 산동성 일대의 상인(商人)들이 일백여 명이나 이곳으로 투입되었다는 것이다.
집과 건물들은 바닥에 청석을 깐 넓은 도로의 양쪽으로 지어져 있었다.
주거지와 상권(商圈)은 엄격하게 구분이 되어 있었으며, 군데군데 수목이 심어져 있어 매우 정결하고 상쾌한 느낌을 주었다.
운룡 일행이 안내를 받는 가옥은 천(天), 팔백칠십이라고 쓰여진 푯말이 붙은 아담한 목옥(木屋)이었다.
목옥에는 네 개의 방과 주방 하나, 그리고 욕실 등이 딸려 있었으며, 백의를 걸친 한 명의 시녀가 앞에 서 있다가 일행이 이르자 공손히 허리를 굽혀 보였다.
"추련(秋蓮)이에요. 앞으로 고인들을 모시게 되었어요."
안내무사는 이곳까지 일행을 안내한 후 돌아가기로 되어 있었다.
"향후 모든 연락은 추련을 통해서 하게 되오이다. 천대(天臺)에는 약 일천의 고수들이 배정되었소. 예선비무 진행의 모든 권한은 대주(臺主)에게 일임되어 있으며, 오늘밤 대주의 간단한 인사말씀이 있을 예정이오니 그렇게 알고 계시오."
안내무사가 몸을 돌려 나가자마자 미공자 옥수가 앞으로 나서더니 멋대로 방 배정을 하기 시작했다.
"운형은 비무참가자이니 제일 안쪽의 방을 쓰도록 하시오. 그 옆방은 소제가 쓰겠고, 건넛방은 모모(
)와 연노(燕奴)가 쓰시오. 그리고 입구쪽의 방은 두형과 연형이 쓰면 되겠구려."
도대체가 일방적인 결정이며, 행동이었다.
두자상은 가볍게 검미를 찌푸렸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목옥은 매우 정결한 구조였다.
각 방의 침상은 최고급의 원목을 썼고, 기타 모든 시설도 장시간의 유숙생활에 조금의 불편함도 없도록 치밀하게 고려하여 설계된 것이었다.
추련이 내온 간단한 저녁요기 후 일행은 밖으로 나섰다.
술시(戌時) 정각에 천대 대주의 개촌의식(開村儀式)이 있다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단계촌은 모두 열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천지현황우주홍황일월(天地玄黃宇宙洪荒日月)의 열 구역으로써 각 구역에는 제각기 일천 호의 집과 오십 호의 상가, 그리고 하나의 연무장 및 광장이 있었다.
천대 광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다.
그들은 제각기 편안한 자세로 초지에 앉거나 서서 담소하고 있었다.
옥수는 광장에 이르러 주위를 쭉 휘둘러보더니 붉은 입술을 삐죽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모조리 쓸모없는 작자들만 모였군."
입술을 삐죽이는 모양이 마치 소녀 같았다.
하나 두자상과 연비의 얼굴은 그리 밝은 편이 아니었다.
그들의 시선은 장내의 중앙을 향하고 있었다.
한 그루 노송(老松) 아래서 뭇무리들에게 둘러싸인 한 사람.
일신에는 엷은색의 비단 남의(藍衣)를 걸쳤고, 이마에는 주옥(朱玉)을 박은 영웅건(英雄巾)을 둘렀다.
밝게 웃을 때 드러나는 치아가 건강하고 탄력있어 보이는 이십대의 청년.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고나 할까.
우측 가슴에 새겨진 사자의 문양이 그의 헌걸찬 풍채에 위풍을 더해주고 있었다.
두자상은 그 사자문양을 찢어버릴 듯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재수도 없군. 저자는 바로 개화십강(開花十强)의 하나인 사자여래(獅子如來) 당인이 아닌가!"
사자여래 당인.
사천당가가 낳은 백 년 래의 가장 걸출한 인재이며, 신기(神技)에 이른 암기비법으로써 미래의 무림을 영도해 나갈 젊은 지도자로 자타의 공인을 받고 있는 자.
예상 못한 일은 아니나 검회이십강의 모습을 보게 되자 두자상은 적잖이 마음이 꺼림직해진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은 오랫동안 사자여래로부터 떠나지 못했다.
반면에 운룡은 천진난만할 정도로 태연자약했다.
그는 시종 떠들썩하게 웃으며 옥수와 말을 주고받는가 하면 주위를 이리저리 기웃거리고 있었다.
달이 떠올랐으나 사방에 밝혀진 횃불 탓으로 그 빛은 그리 눈에 띄지 않았다.
저 멀리로 몇 개의 횃불무리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개촌의식이라는 것이 각 대별로 벌어지는 모양이었다.
그때 돌연 주위의 왁자한 소음을 일시에 압도하는 커다란 북소리가 장내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둥둥둥!
이어 장중한 외침이 뒤를 이었다.
"천대의 삼대주(三臺主) 왕림이오!"
그러자 주위는 즉시 고요해졌다.
저편 어둠으로부터 일단의 무리가 광장 중앙에 위치한 대를 향해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선두에는 각기 향로(香爐), 검(劍), 그리고 봉황이 새겨진 금기(金旗)와 천(天)자가 새겨진 황기(黃旗)를 든 네 명의 동자(童子)가 섰고, 그 뒤로 금환(金環)이 달린 백색무복을 날렵하게 차려입은 십이 명의 백의무사들이 두 줄로 걷고 있었고, 마지막으로 삼 인(三人)이 천천히 담소하며 따라 나왔다.
그들의 모습이 나타나자 좌중엔 즉시 가벼운 소요가 일었다.
"저기 가운데 선 이는 바로 숭산 소림의 장경각주(藏經閣主)인 심인노선사(心印老禪師)가 아닌가! 청설헌(聽雪軒)에 은거하여 근 삼십 년간이나 모습을 보이지 않던 고매한 신승이 웬일이신가?"
"허어…… 그 뒤의 노객(老客)은 오십 년 전 한 자루 운액보검(雲腋寶劍)으로 무림을 풍미하던 성숙해(星宿海)의 이대선생(李大先生)이시다!"
"한데 선두의 저 라마승(喇 僧)은 누굴까? 일신에 풍기는 위엄이 마치 칼끝 같아 오히려 심인노선사와 이대선생을 압도하는 듯하구나."
소림의 심인노선사는 주의선삼(朱衣禪衫)에 한 자루 난은방편산(爛銀方鞭 )을 든 채 자애롭게 웃고 있었고, 성숙해 이대선생은 백색수풍(白色隨風)의 차림에 갈대꽃 같은 수염을 휘날리고 있어 마치 심산을 유보하는 신선처럼 보였다.
그리고 한 사람, 라마(喇 ).
일신에는 불타듯 짙은 혈가사(血袈裟)를 입고 있었다.
귀밑까지 늘어진 백미(白眉) 아래서 실처럼 가는 안광을 쏟아내는 동공을 마주보고 있자면 현기증이 일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풍기는 노라마승이었다.
그가 손에 든 한 자루 법장(法杖)을 주시하며 두자상이 입을 열었다.
"저 노라마가 누군지 아시오?"
연비에게 한 말이었다.
연비라는 이 냉혹한 흑의무객은 인상만큼 싸늘한 어조로 씹어뱉듯 말을 내뱉었다.
"천룡대라마(天龍大喇 )."
"그렇소, 천룡대라마이오. 천축인으로서 중원에 귀의하였고, 지금은 진천우도 대천주의 첫째 아들인 도남강(屠南江)의 심복으로 있는 자이오. 그 모습을 거의 볼 수 없다 하더니 천대 대주로서 나타났군."
천룡대라마는 심인노선사와 이대선생을 좌우에 거느린 채 중앙단상에 우뚝 몸을 세웠다.
이어 어두운 밤하늘을 힐끗 올려다보고 난 그의 입에서 유창한 한어(漢語)가 흘러나왔다.
"다망한 중에도 본 검회에 참석코자 천리길을 달려오신 강호제위께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사를 드리오. 노납은 대봉황천의 법교공봉(法敎供奉)을 맡고 있는 천룡이며, 금번 심인노선사와 이대선생과 더불어 감히 천대 검회예선의 공증인을 자처하게 되었소."
그의 목소리는 그리 크다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중인들의 귀에서 마치 벽력처럼 쾅쾅 울리고 있었다.
"이미 강호제위께서 알고 계신 바와 같이 열 곳의 검회예선에서 팔십 인의 고수가 도태전(淘汰戰)으로 선발되어 최종본선을 겨루는 것이 본 대회의 규정이오. 본 예선의 기한은 삼십 일, 내일 아침 사시(巳時)부터 비무를 시작하오. 기타 본 검회예선의 대진표는 각계 일백여 고수가 모여 엄정한 추첨을 거친 후 오늘 내로 제위의 처소로 보내 드리겠소. 부디 각 제위의 건승(健勝)을 비오!"
* * *
"어렵군……."
촛불, 어린아이 팔뚝만한 촛불이 타오르는 방이었다.
연비는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고, 두자상은 탁자에 앉아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한 장의 지편(紙片)이 놓여져 있었다.
"이 대진표를 좀 보게. 놀랍게도 검회이십강의 고수 중 네 명이 이 천대에 있네. 사자여래 당인, 생사선주(生死船主) 혈독(血毒) 혜공(慧拱), 보타암 청조각의 능파선녀( 罷仙女) 예소벽(芮小碧), 그리고 백마(白魔) 위걸(魏傑), 이렇게 개화십강이 셋, 낙화십강의 노괴물이 하나,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연비의 시선이 힐끗 두자상을 향했다.
"첫번째 상대 안에 그들이 포함되어 있소?"
그로선 보기 드물게 정중하며 진지한 어조였다.
두자상은 고개를 저었다.
"첫번째 상대는 흑군자(黑君子)라는 자이오. 만약 이자를 이기게 되면 곧장 백마 위걸이 다음 적수이오."
"그럼 됐군."
두자상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뭐가 됐단 말이오?"
"그를 믿으란 말이외다. 어차피 애초의 목표에 다다르자면 언젠가는 싸워야 할 상대들, 빠르다는 건 늦는 것보다 확실히 좋은 것이오."
연비는 창밖을 힐끗 바라보더니 옆에 놓아두었던 검을 집어들고는 휙 침상에서 뛰어내렸다.
"나는 잠깐 볼일이 있으니……."
성큼성큼 건장한 뒷등이 문 밖으로 사라져 갔다.
두자상은 기광이 일렁이는 시선으로 그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처음 황명을 받고 떠날 때 승상이 특별히 천거한 자였다.
―도마색출에 큰 도움이 되리라.
어떤 일이 있어도 연비, 그를 신임하시오.
하나 이 년을 같이 다녔어도 그 내력조차 알 수 없는 입이 무거운 사내.
검법의 일대고수라는 것만 알 뿐, 그 검법조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두자상은 오랫동안 그가 나간 문을 주시하다가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그는 다시 머리를 감싸안고 대진표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첫번째 상대, 흑군자…… 이자는 또 어떤 자인가……."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연비는 목옥의 앞에 서서 주위를 한차례 휘둘러본 후, 한쪽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기 시작했다.
나무그늘 아래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쏟아지는 달빛 아래 석상처럼 선 채 저 멀리 대봉황천의 봉황성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자.
그는 바로 귀공자 옥수였다.
그때 돌연 옥수의 몸이 흠칫했다.
그는 수중의 섭선을 바짝 움켜쥐며 몸을 돌리려 했다.
순간 한소리!
냉막한 목소리가 그의 몸을 뚝 얼어붙게 만들었다.
"움직이지 말도록……."
전신으로 거미줄처럼 끈적하게 밀려오는 살기.
옥수의 이마에 언뜻 한 방울의 땀방울이 맺혔다.
이런 거대한 살기는 그 생애 처음 당해 보는 것이었다.
'중원에…… 내가 알지 못하는 이런 고수가 있었던가?'
그는 짐짓 태연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심야에 웬 살기인가? 나에게 볼일이 있소?"
냉막한 목소리가 말을 받았다.
"지금부터 묻는다. 한 마디라도 허튼 대답일 때는 용서하지 않는다."
"나를 벨 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백 년 전, 이 땅에서 사라졌던 일대의 두 살성(殺星), 연산일괴(燕山一怪)와 구양신모(歐陽神母)를 휘하로 거느리고 다니는 당신의 무예는 익히 짐작할 수 있다. 당신은 과연 내 일검을 피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 나는 그 어떤 순간에도 당신의 사지(四肢) 중 하나는 자를 수 있어."
식은땀이 흐르는 대답.
그의 말은 옳았다.
기선을 제압당한다는 것은 고수들에게 있어선 생명을 이미 남에게 맡기는 것과 같았다.
옥수는 문득 한줄기 탄식을 터뜨렸다.
"내가 졌군. 멋지게 졌는걸. 당신은 무엇을 묻고 싶소?"
"첫째, 왜 운룡에게 접근하고 있는가?"
순간 옥수는 놀람에 찬 외침을 터뜨렸다.
"당신은 연비구려?"
"묻는 말에나 대답하라!"
"좋아. 단순히 그가 좋아서이오."
"확실한가?"
"그렇소."
"검회에는 왜 참가하지 않나?"
"이따위 시시한 검회에는 흥미도 없소."
"인정한다. 그렇다면 당신의 사문내력은?"
옥수는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았는지 싱긋 웃었다.
"말할 수 없소."
"내 검은 말을 잘 듣는다. 나는 두 번 경고하지 않아."
"이것 보시오, 연비. 그대나 나나 피차 마찬가지 입장이 아니오? 나는 절대 운룡을 해칠 사람이 아니오. 나는 순수한 마음으로 그를 돕고 싶소. 내가 보건데 당신도 그런 것 같으니, 우리가 굳이 사문 따위를 두고 얼굴을 붉힐 것이 뭐 있소?"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 옥수는 자신의 몸을 옥죄고 있던 살기가 느슨히 풀려가는 것을 느꼈다.
바로 그때 옥수의 몸이 그 자리에서 퍽 하고 꺼졌다.
아니, 꺼졌다 싶은 순간 그는 이미 연비의 턱 아래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창!
연비의 쇠꼬챙이 같은 검이 날카롭게 솟구쳐 나왔다.
하나 다음 순간, 옥수는 이미 십여 장 밖의 공중을 날고 있었다.
파팟!
그는 낭랑하게 웃으며 유연한 몸놀림으로 스르르 내려섰다.
"하하핫! 그 한 칼은 심야에 허락도 없이 문초를 한 값이오."
연비의 시선이 힐끗 자신의 옷자락을 향했다.
한 치 가량 좌우로 잘려나간 십자 모양의 검흔.
순간 연비의 회색 동공에 가벼운 흔들림이 일었다.
옥수가 마음만 먹었다면 이미 자신의 가슴은 두 토막으로 잘려나가 버렸을 것이 아닌가?
'날으는 제비의 눈을 반 토막으로 가르는 내 검을 그 짧은 시간에 피해냈다. 그리고 나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빠른 쾌검(快劍)…… 틀림없군. 그녀는 바로 그곳의 고수야.'
그녀?
그녀라니…….
연비는 왜 옥수를 그녀라 칭한 것일까?
설마하니 옥수가 여인의 몸이란 말인가?
또한, 그가 말한 그곳이란 어디일까?
그때 막 목옥의 안으로 발을 들여놓던 옥수가 이쪽을 돌아보며 외치는 것이 보였다.
"어서 들어오시오, 연형. 우리는 특수조련인답게 운형이 싸울 흑군자인지, 흑망아지인지 하는 자에 대해 두형과 더불어 연구를 해야 하지 않겠소?"
대전전야(大戰前夜).
자욱한 긴장과 예기 속에 밤은 말없이 깊어갔다.
그리고 십일월 초하루의 날이 밝았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