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동림사(강서성 여산) ...사문은 국왕에게 예를 하지 않아도 된다
이산이 도교뿐만아니라 불교와 관련이 깊어진때는 384년 동진시대에 혜원慧遠(334~416년)스님이 여산 동림사에서 상주하면서부터이다. 어느날 여산에 머물고 있던
혜원스님에게 고교의 도사였던 陸修靜(406~477년)과 유교의 도윤명陶淵明(365~427년)이 혜원을 찾아왔다 오랜만에 만난세사람은 며칠을 즐겁게 담소를 나누었다
육수정과 도윤명이 돌아가려고하자,혜원은 이들을 전송하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산문밖인 호계교를 건넜다.혜원은 산문을 벗어나지않기로 맹세한지 30년만에 다리를 건넘으로써
그서원이 무너진것이다. 이때 혜원이 두친구에게 "30년동안 산문밖을 나가지 않았는데 오늘 그맹세를 저버렸다.
"고 말하자 세사람은 손벽을 치며 크게 웃었다. 훗날 사람들은이고사를 호계삼소虎溪三笑 라고 하였다
종교를 초월해 진리를
나누며 세사람이 웃었다는 삼소三笑라는데서 유래하여 천주교 수녀,원불교정녀,불교의 비구니모임 이 있는데 이를삼소회라고한다. 혜원은 어려서 유교와 도교등을 두루섭렵했다
21세에 출가해 도안道安(312~385년)을 찾아가 수행정진했다 .혜원은 전란에 휩쓸리지않고 조용히 불도를 연구하고자 제자들을 거느리고 여산의 서림사로 옮겨왔다. 이때부터혜원문하로 을
찾아드는 승려들이 점점많아지는데 도저히제자들을 수용할공간 이 없었다.이에 당시 강주자사에게 새로운절을 세워줄것을 부탁해 세운것이 동림사이다. 384년51세에 혜원이 동림사에 들어온이후열반할때까지 30여년을 여산에서 벗어나지를 않았다
. 혜원은 여산 동림사에 머물면서 승려들을 멀리 서역까지 보내어 범본을 구하였으며 ,계빈국승가바제 僧伽婆諦에게청하여 <아비담론><삼법도론>을 다시 번역케 하였다
또한 구마라집에 의해 역출된 <십송율>이 미완성으로 그치자 ,혜원이 제자를 보내어 역경에 힘쓰도록해 번역이 완성되었다. 한편그는 <대지도론요약>등 저술활동에 도 힘썼다, 이런혜원의중시하는 사상때문인지,
현지도량내에 역경대譯經臺와 인경실引經室이 있다.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하여 13세에 외숙부를 따라 낙양(洛陽)에서 육경(六經)과 노장학(老莊學)을 배웠다. 공부가 깊어지자 당시의 명유(名儒)인 범선자(范宣子)에게 배우고자 했으나 전란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도안이 항산(恒山)에서 불법(佛法)을 가르친다는 명성을 듣고 찾아가 『반야경(般若經)』강의를 들었다.
강의를 듣는 순간 눈에서 비늘이 떨어진 듯한 깨달음을 얻었다. ‘ 유도(儒道) 등의 아홉 가지 유파는 모두가 쌀겨와 술지게미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탄식한 혜원은 동생 혜지(慧持)와 함께 머리를 깎았다.
혜원은 21살, 도안은 42세였다. 혜원이 밤낮으로 경전을 읽고 외우며 수행 정진하는 모습을 본 스승은 매우 흡족했다. 혜원은 24세부터 강의를 시작했다. 혜원은 실상(實相)을 묻는 손님에게
『장자(莊子)』의 내용을 인용하여 의혹을 풀어주었다. 이후부터 도안은 특별히 혜원에게만은 속가의 책을 허락해주었다.
도안은 혜원의 빼어난 근기와 수행력을 인정하여 ‘중국의 불교는 혜원에게 달려 있다’고 말했다.
그런 스승이 왜 자신에게는 한마디 말도 남기지 않으실까. 혜원이 다시 스승님께 꿇어 앉아 가르침을 청했다. 도안이 대답했다.
“그대와 같은 사람을 내가 어찌 근심할 일이 있겠는가?” 혜원은 스승과 헤어져 제자 수십 명과 함께 남쪽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형주(荊州)로 가서 상명사(上明寺)에서 주석하였다. 그 후 나부산(羅浮山)으로 가고자 심양(潯陽)에 이르렀는데
여산(廬山)의 봉우리가 맑고 고요해 용천정사(龍泉精舍)에서 머물렀다. 여산은 산세는 웅장한데 물과의 거리가 멀었다. 이에 혜원이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며 ‘만약 이곳이 우리가 깃들어 머물만한 곳이라면 샘이 솟아오르게 해주시오’라고 하자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맑은 물이 솟아 나와 개울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용천정사를 용천사(龍泉寺)라 했다.
당시 사문 중에서 혜원과 친한 혜영(慧永)이란 스님이 있었다. 혜영은 자사(刺史) 환이(桓伊)에게 부탁해 비좁은 용천사 대신 여산 동쪽에 승방과 불전을 건립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렇게 해서완성된 절이 동림사(東林寺)였다. 동림사는 강서(江西)성 북부(北部)여산의 서쪽 기슭에 있다. 동림사를 근거로 혜원의 사상이 남조(南朝)에퍼져나가게 된다.
동림사가 완공되자 혜원은 경전 정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제자 법정(法淨)과 법령(法領)을 서역(西域)에 보내범어 경전 원본을 찾아와 번역하게 했다.
391년에는 계빈국(罽賓國:현 가큐미르)출신 승가제바(僧伽堤婆)스님이 여러 경전에 박식하다는 소식을 듣고 심양에 온 그를 초청해
『아미담심론(阿毘曇心論)』과 『삼법도론(三法度論)』을 번역하게 했다.
혜원은 경전이 완성될 때마다 손수 서문을 짓고 종지를 표시하여 학자들에게 남겼다.
이번 역경 사업에는 80명의 승려와 강주(江州) 자사(刺史) 왕응지(王凝之), 서양(西陽) 태수 임고지(任固之) 등이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왕응지는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의 아들이다. 도를 구하는 혜원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401년에는 서역승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13)에게 여러 차례편지를 보내 불법에 대해 의논했다.
불야다라(弗若多羅) 스님이 『십송률』의 범본을 외워 구마라집이 진(晋)나라 글로 번역했는데 3분의 이를 시작하면서 불야다라가 세상을 떠났다.
혜원이 항상 번역이 중단된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 후 담마류지(曇摩流支)가 이 경을 외운다는 소리를 듣고 편지로 보내 나머지 부분을 완성하게 했다.
그는 문구가 번다한 『대지도론(大智度論)』의 요점을 초록하여 20권의 책을 썼고, 『법성론(法性論)』도 지었다.
『고승전(高僧傳)』에 의하면 그의 저서는 10권 50여책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현재는 『홍명집(弘明集)』, 『광홍명집(廣弘明集)』, 『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에 단편적으로 산재되어 있을 뿐이다.
혜원이 주석한 동림사는 어느새 동진 불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많은 귀족들과 지식인들이 혜원을 찾아 동림사로 모여들었다.
유유민(劉遺民), 뇌차종(雷次宗), 주속지(周續之), 필영지(畢穎之), 종병(宗炳), 장채민(張菜民), 장계석(張季碩) 등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혜원에게 귀의했다. 귀의했다고는 하나 그들의 태도는 은둔적이고비현실적이었다.
그들은 유가(儒家)의 도덕 같은 속박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청담(淸談)에 빠져 있었다.
정치에 대한 부정과 허무주의적인 사상에 젖어 세속을 벗어난 삶을 추구하며 살았다.오랜 전란을 겪으면서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를 꺼려하는 데서온 습관이었다.
이상향을 찾아나서는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 신과 인간의 사랑을 그린 고개지(顧愷之)의 「낙신부도(洛柛賦圖)」가 모두 이 시기에 등장한 작품이다. 노장사상에 젖어 죽림에서 세월을
보낸 죽림칠현(竹林七賢)의 출현은 청담사상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서는 혜원의 결단이 필요했다. 이것이 백련사(白蓮社)가 출현하게 된 계기다.
402년 7월28일, 혜원은 승속의 제자 123명과 함께 반야대의 아미타불상앞에서 염불결사운동을 실행에 옮겼다. 백련사는 서방정토를 염원하며 염불 삼매를 닦은 최초의 염불결사로 불교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백련사는 청담에 빠진 귀족들의 은일적인 불교를 실천적인 신앙으로 바꾸었다. 결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죄를 참회하고 정토에 태어날 것을 염원하며 신행생활을 이어갔다. 이로써 여산의 동림사는 동진불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대지도론요약><사문불경왕자론><아비담심론> <삼법도론><십송율>염불실천<반주삼매경>
미륵정토교:도안(혜원) 미타정토:혜원 백련사 정토신앙:담란(476~542) 찬아미타불게:정토교의 기초 관무량수경의 염불관을 기초로:칭명염불 선종은-남방쪽 정토종계- 북방 선종 율종은 미타신앙주측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