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림(鶴林)
□ 마을 유래
매학·방학·임당 세 마을을 1945년 해방 이후 합하여 학림이라 하였다. 300여 년 전에 합천이씨가 들어와 삶으로써 마을이 되었다 하고 매학(梅鶴)은 매화나무와 학이 있었다하고, 방학(放鶴)에도 학이 있었으며, 임당(林堂)은 지금은 없어졌으나 울창한 숲속이 자리하였다고 전한다. 현재는 방학, 매학 2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 산천지명
◦ 두류봉(頭流峰) : 마을 북서쪽에 솟은 높이 932m의 산으로 본면의 한가운데에 자리하여 여기에서 남북으로 뻗는 능선이 큰골과 작은골의 경계를 이룬다.
◦ 효열비(孝烈碑) : 경주 최석복(崔錫福)의 효행과 그 아내 광산 김씨의 열행을 기려서 세웠다.
□ 마을의 문화자원
◦ 매학 유물산포지 : 고제면 삼거리 입석마을에서 북으로 1089 도로를 따라 가다가 고제초등학교에서 동편의 매학교를 건너 매학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쪽 야산일대에 위치한다. 현재 이곳은 매학마을의 북서구릉이 “중모들”쪽으로 뻗어내린 구릉으로 400m에서 425m에 이르는 해발고도를 갖고 있다. 남서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 말단부 남동쪽은 사과나무밭으로 개간되어 있으며 구릉상에는 추정 봉분도 있는 것 같다. 유물은 주로 과수원 일대에서 경질의 생활용 토기편이 채집되기 때문에 일단 유물산포지로 부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 방학 고분군 : 방학고분군은 고제초등학교 뒤편인 서쪽 구릉 말단부 해발 423m 일대에 위치하며 유적 분포상 건너편의 매학유물산포지와 대치하고 있는 유적이다. 유적이 위치한 동향으로 뻗은 구릉에는 소나무 밭이고 좌우로 밭으로 경자되어 있는데, 구릉상에 다수의 고분 흔적이 보인다. 소로를 따라 구릉을 오르면 등고선 방향과 교차되게 남아 있는 추정봉분과 남북축의 파괴석곽이 있고, 저평한 봉토흔적이 남아 있다. 파괴 석곽을 보면 길이 360m, 높이 50cm 정도의 규모이고, 상부는 없어지고 3단의 석벽만 남아 있다. 석재(石材)는 산록을 이용하였고 큰 것은 46cm×35cm×12cm, 작은 돌은 25cm×15cm×8cm 정도이다. 그리고 구릉의 남서 사면에도 길이 260cm, 너비 230cm 정도의 파괴석곽이 보이는데, 채집유물은 없다.
◦ 김동신(金東臣) [1871. ~ 1933] : 김동신은 경상남도, 전라북도의 접경 지대인 거창군 고제면 등과 지리산, 덕유산 인근 지역을 중심으로 활약한 의병장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아버지 김소제(金堯濟)와 어머니 창원 황씨(昌原黃氏) 사이에서 6형제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본래 한의(韓醫)였던 그는 1906년 음력 3월경 민종식(閔宗植)이 홍주 의병을 일으킨 것을 듣고 그를 찾아가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약속한 후 약 30명의 의병을 이끌고 전라북도 무주군 덕유산에 있는 자원암으로 내려와 머무르면서 거사를 준비하였다. 김동신은 민종식이 홍주성 전투에서 패하고 연계가 되지 않자 금산, 용담, 전주 등지에서 동지를 규합해 나갔다. 김동신의 병력은 30~70명일 때도 있었으나, 최고 1,000명에 이르기도 했다고 한다. 스스로 ‘김승지(金承旨)’라 불렀던 김동신은 자신의 비장으로 유종환(兪宗煥), 문태수(文泰洙), 최정근(崔正根), 성문길(成文吉), 오대근(吳大根), 국인묵(國仁默), 임병주(林秉柱) 등을 두었는데, 이들은 각각 50에서 수백 명에 이르는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
김동신은 군대 해산 후 의병 항쟁이 본격화되자 1907년 8월 전라북도 정읍군 백양사(白洋寺)에서 고광순(高光洵)과 의논하고 인근에 통문을 돌려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삼남 의병 도대장(三南義兵都大將)이 되어 경상남도 거창군을 비롯하여 전라남북도, 충청남북도 접경 지역에 출몰하여 활동하였다. 1907년 9월 10일에는 의병 80여 명을 통솔하여 순창의 우편 취급소와 경무 고문 분파소를 습격하였다. 이 순창 거의(擧義)는 군대 해산 후 호남 지역에서 발생한 의병 봉기의 선구가 되는 것으로 평가된다.
1907년 10월 10일에는 의병 600명을 거느리고 경상남도 거창군 월성에서 일본군 40명을 공격하였고, 10월 21일에는 의병 100여 명을 거느리고 이석용(李錫庸) 의진과 합세하여 용담군 심원산(深原山)에서 일본군 47명과 종일토록 교전을 벌였다.
1908년 3월 6일 삼남 의병 대장 김동신 부대를 비롯한 경남 서부 지역 의병 800여 명은 거창군 고제면 궁항리 매학(梅鶴) 일대에서 일본 군경 합동 토벌대 70여 명과 교전을 벌여 큰 타격을 입혔다. 의병장 김동신의 부대는 1907년 이후 경상남도 서부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의병 세력이었으며, 1908년 3월에 있었던 거창군 고제면 궁항리 매학 전투는 김동신 의병 부대가 일제와 맞서 싸운 대표적인 전투였다.
이처럼 김동신의 항전이 계속되자 일제는 김동신 부대의 근거지 중 하나인 지리산 문수암을 소각하는 등 진압에 혈안이 되었다. 이와 같이 전라·경상도 일대에의 종횡무진 혁혁한 전과를 올리면서 활약하던 중 뜻하지 않게 신병이 발병하여 남몰래 충남 회덕군 탄동면 덕진동에서 치료하다가 대전경찰서 일본 경찰에게 탐지되어 6월 8일 체포되었다. 그가 체포된 후에도 그의 부하 비장들은 계속해서 전북 무주, 경북 성주, 경남 거창, 전북 순창, 전남 담양 일대에서 지속적으로 활약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그와 함께 거의하여 선봉장으로서 활약하던 유종환·문태익·최정근·성문길·차은표·오대근·국인묵·임병주 등을 들 수 있다. 김동신은 이후 8월 1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일본군과 교전 내란죄’로 종신 유배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