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상서문(上書文)의 수취인 진보영감 전(眞寶令監 前)이란 의미를 대개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5권 경상도 편과 대동지지 등에 실려 있는 진보현(眞寶縣) 조의 내용을 살펴봄으로써, 1862년(철종 13, 壬戌) 3월에 기호(畿湖) 지방의 박현진(朴玄鎭) 박준희(朴準熙) 등이 진보현감(眞寶縣監)에게 탄원한 글의 올바른 인식으로 선조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후손들이 살펴보고 선대의 위업을 정립하기 위하여 몇 가지 사료를 들어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탄원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畿湖居 士人 朴玄鎭 準熙 等 上書 于” 라 제(題)한 이 글은 지방의 선비(士人)들이 지방관아의 수령(首領)에게 올린 일종의 탄원서로 보인다. 인조반정에 영의정인 퇴우정(退憂亭) 박승종(朴承宗, 1562∼1623)과 그의 장자인 경기관찰사 기백(畿伯) 박자흥(朴自興, 1581∼1623)이 자결하여 죽음에, 역적의 후손으로 몰린 후손들이 산천음곡(山川陰谷)으로 숨어들어 목숨을 부지하기가 200여년이라, 그 자취를 찾을 길이 없게 되었는데, 1857년(철종 8, 丁巳)에 박승종, 박자흥 등이 신원(伸寃) 복권됨에 따라 경상도 진보현 남쪽 고을 어천(漁川)이라는 고을에 사는 박 씨들이 기백(畿伯) 공의 후손임을 증빙할 수 있는 소중한 문적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이를 탄원서에 첨부하여, 진보현감(眞寶縣監)에게 신원 복권된 대신들이 후손들이므로 이들의 면역(免役)을 허락하여 줄 것을 탄원함에, 기호(畿湖) 지방에 사는 박현진(朴玄鎭) 박준희(朴準熙) 등이 소두(疏頭)가 되어 작성한 탄원서 형태이다. 그런데 이글의 번역에 있어, 원문의 번역은 문중에서 다하였으므로 이렇다 할 토를 달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만 문서(文書) 원문에 수신 관아의 수령을 진보영감 전(眞寶令監 前)이라 직역하였는데, 이를 단순하게 “진보영감 전”이라 번역함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일상적으로 문서라는 것은, 그 수신인 실체가 분명하여야 하기 때문에 필자는 이를 당시의 진보현(眞寶縣) 수령의 고유 직책으로 번역함이 옳다고 보고 있다. 그런 이유로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5권 경상도 편에 실려 있는 진보현(眞寶縣) 조의 내용을 먼저 살피고자 하는 것이다. 한 가지 덧붙일 말은, 필자가 인식하기에는 어천(漁川)이란 고을은 대개 청송도호부(靑松都護府)에 소관된 지역으로 보이고 진보현 예하의 고을로 여겨지는데, 무슨 연유로 진보현의 수령에게 탄원서가 제출되었는지가 불분명하다. 그 이유를 살펴 보건데, 진보현이 청송도호부 소관이라서 예하 관청인 진보현에 탄원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유가 있어서 진보현으로 탄원한 것인지를 살펴 각주(脚註)함이 옳을 듯하다. 이는 어천 문중에서 고증함이 올바르다 생각되어 부연하지 않겠다.
다음은 1611년(광해 3년)에 목판본으로 복간(復刊)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이다.
이 판본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소장기호; 奎貴193-v.1-25>본을 저본(底本)으로 한다. <원문> 新增東國輿地勝覽卷之二十五 慶尙道 編 【眞寶縣】[東至寧德顯界三十里至寧海府界十五里南至靑松府界二十八里西至安東府界二十里北至寧海府界二十三里距京都六百十六里] 【建置沿革】漆巴火縣新羅景德王改眞寶爲聞韶郡領縣 助攬縣景德王改眞寶爲野城郡 高麗初合二縣甫城府[一云載岩城] 顯宗屬禮州後因倭寇居民一空。本朝 太祖置甫城監務 世宗合於靑鳧號靑寶郡尋罷改今名復爲縣監 成宗五年以縣人琴孟諴毆辱縣監申石同 革屬于靑松府 九年因土人申訴復舊 【官員】 縣監 訓導 各一人 【郡名】 漆巴火 助攬 眞安 甫城 載岩 靑寶 眞海
<국역문-한국고전번역원 번역문을 인용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5권 경상도 편 진보현 조【진보현(眞寶縣)】동쪽으로 영덕현(盈德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30리, 영해부(寧海府) 경계까지 15리, 남쪽으로 청송부(靑松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28리, 서쪽으로 안동부(安東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20리, 북쪽으로 영해부(寧海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23리, 서울까지의 거리는 6백 16리이다. 【건치연혁】 칠파화현(漆巴火縣)을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진보(眞寶)로 고치고, 문소군(聞韶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으며, 조람현(助攬縣)을 경덕왕이 진안(眞安)으로 고치고, 야성군(野城郡)의 영현으로 삼았는데, 고려 초에 두 현을 합하여 보성부(甫城府)를 설치하였다 어떤 이는 재암성(載岩城)이라고도 한다. 현종(顯宗)은 예주(禮州)에 귀속시켰는데 뒤에 왜구(倭寇)로 인하여 주민이 싹없어졌다. 본조에서는 태조(太祖) 때 보성감무(甫城監務)를 두었다. 세종(世宗)은 청부(靑鳧)에 합쳐 청보군(靑寶郡)이라 불렀다가 얼마 안 있어 이를 파하고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다시 현감(縣監)을 삼았다. 성종(成宗) 5년에 현인(縣人) 금맹함(琴孟諴)이 현감(縣監) 신석동(申石同)을 구타 모욕하였다 해서, 청송부(靑松府)에 혁속(革屬)시켰는데, 9년에 토인(土人)들이 신소(申訴)하였으므로 복구(復舊)시켰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칠파화(漆巴火)ㆍ조람(助攬)ㆍ진안(眞安)ㆍ보성(甫城)ㆍ재암(載巖)ㆍ청보(靑寶)ㆍ진해(眞海). <아래의 각주(脚註)는 편집자가 읽는 이의 이해를 돕고자 덧붙였다.>
1> 載岩城(재암성); 일부기록에는 載巖城이라 번역하였으나 이 글의 저본인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소장기호; 奎貴 193-v.1-25(광해군 3년) 復刊本>에는 載岩城으로 되어 있다. 2> 居民一空(거민일공); 주민이 싹없어졌다. 라고 번역된다. 3> 尋罷(심파); 얼마 없어 파했다. 라고 번역된다. 4> 毆辱(구욕); 때리고 모욕을 줌. 이라고 번역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5권 경상도 편 진보현 조를 살펴 보건데, 관원은 현감(縣監)ㆍ훈도(訓導) 각 1인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세종대에서부터 신증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던 1530년대까지는 진보현에는 현감(縣監)이 파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탄원서가 작성되었던 시기인 1862년에 진보현은 어떤 직제가 되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이를 고증하는데 가장 적합한 자료가 1864년경의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 편(編) 대동지지(大東地志)라 여겨진다. 다음은 대동지지(大東地志) 청송군(靑松郡) 조(條)와 진보현(眞寶縣) 조(條)의 연혁(沿革)이다. 저본(底本)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소장기호; 4790-37 v.1-15>으로 1932년 필사본이며 그 내용은 기원전 57년(신라시조 원년 甲子)부터 1863년( 조선 철종 14)까지의 1920년간의 기록이다.
大東地志 卷七 【靑松】 【沿革】本新羅靑已 景德王十六年改積善爲野城郡領縣 高麗太祖二十三年改島伊又改雲鳳 成宗五年改靑島 顯宗九年屬禮州 恭讓王二年置監務 本朝太祖三年以眞寶來倂 世宗卽位之年以 中宮沈氏[昭憲王后]貫鄕陞靑寶郡 後析置眞寶縣以松生來屬改靑松 世祖朝陞都護府 成宗五年以眞寶來合 九年析之 【官員】都護府使兼安東鎭管兵馬同僉節制使一員
<국역문 - 필자의 拙譯임> 대동지지 7권 【청송도호부】 【연혁】본래 신라의 청기현(靑己縣)이다. 경덕왕 16년에 적선(積善)으로 고쳐 야성군(野城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 태조23년에 부이(鳧伊)라고 고쳤고, 또 운봉(雲鳳)이라고 고쳤으며, 성종(成宗) 5년에는 청부(靑鳧)라고 고쳐서 예주(禮州) 속현이 되었다. 공양왕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조선)에서는 태조 3년에 진보현(眞寶縣)을 합쳤고, 세종(世宗)이 즉위년에 왕비심씨<소헌왕후(昭憲王后)>의 관향(貫鄕)이라고 하여 청보군(靑寶郡)으로 승격시켰다가, 뒤에 진보(眞寶)를 때어내어 현감(縣監)을 두고, 송생현(松生縣)을 가져다 붙였으며, 청송으로 고쳤다. 세조(世祖)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켜 시켰다. 성종 5년에 진보(眞寶)를 가져다 붙였으나 9년에 다시 때어내었다. 【관원】도호부사겸안동진관병마동첨절제사(都護府使兼安東鎭管兵馬同僉節制使) 1원(一員)
大東地志卷八 【眞寶】 【沿革】本新羅漆巴火 景德王十六年改眞寶爲聞韶郡領縣 高麗太祖陞爲甫城郡[一云載岩城]以眞安縣來屬 顯宗九年屬禮州又析眞安屬于盈德 恭讓王二年置監務 本朝 太祖三年合于靑島 世宗朝析置縣監 成宗五年革屬靑松[以縣人琴孟誠毆辱縣監申石同]九年復舊[因土人申訢] 【邑號】眞海 【官員】縣監兼安東鎭管兵馬節制都尉一員
<국역문 - 필자의 拙譯임> 대동지지 7권【진보현(眞寶縣)】 【연혁】본래 신라의 칠파화현(漆巴火縣)이다. 경덕왕(景德王) 16년에 진보(眞寶)로 고치고, 문소군(聞韶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태조 때에 보성군(甫城郡)으로 승격하였는데 일설에는 재암성(載岩城)이라고도 하며 진안현(眞安懸)이 예속되었다. 현종(顯宗) 9년 예주(禮州)에 귀속시켰는데 또 진안을 떼어내어 영덕에 귀속시켰다. 공양왕 2년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조선) 태조(太祖) 3년에 때 청부(靑鳧)에에 합쳤다가 세종(世宗) 조(朝) 때어내어 현감을 설치하였다. 성종(成宗) 5년에 청송부(靑松府)에 혁속(革屬)시켰는데, 이는 지방사람 금맹함(琴孟諴)이 현감(縣監) 신석동(申石同)을 구타 모욕하였기 때문이다. 9년에 복구하였는데 지방인들이 신소(申訴)하였기 때문이다. 【읍호】진해(眞海) 【관원】현감겸안동진관병마절제도위(縣監兼安東鎭管兵馬節制都尉) 1원(一員)
<아래의 각주(脚註)는 편집자가 읽는 이의 이해를 돕고자 덧붙였다.>
5> 島伊(도이); 원문의 島伊(도이)는 鳧伊(부이)의 오기(誤記)이다. 부이(鳧伊)로 고쳐 번역한다. 6> 靑島(청도); 원문의 靑島(청도)는 靑鳧(청부)의 오기(誤記)이다. 청부(靑鳧)로 고쳐 번역한다. 7> 析置(석치); 때어내어 설치하다.
이로서 필자가 처음 이 상서문(上書文)을 대하면서, 일부 해석상에 "진보향교 영감에게 상소를 올린 상소문 云云함"을 얼른 이해하지 못했던 사소한 문제가 이해되는 바이다. 또한 언어의 선택에서 중요한 개체는 단어인데, 필자가 알기로 '상소문(上疎文)'이란 "임금에게 올리던 글"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다 정확한 사전적 의미는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말하며, 이를 주소(奏疎)로 구분하여 주봉(奏封), 주계(奏啓), 주장(奏狀), 봉사(封事), 주차(奏箚)라고도 칭하며 임금에게 간(諫)하거나 논(論)하는 총칭으로 쓰이기도 한다. 조선시대 때는 보통 상소(上疎)와 상주(上奏)를 구분하였는데, 의견서나 품의서 등을 올리는 것을 상주(上奏)라 하며, 상소(上疎)는 주로 임금에게 정사를 간하기 위하여 올리는 글을 말한다. 이는 서거정이 동문선에서 주의(奏議)와 차자(箚子)를 분류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므로 상소문이란 용어를 쓰기에는 부적합하고 탄원서 또는 상서 등으로 쓰이는게 올바르지 않은가 여겨진다. 이렇듯이 선현들의 유고(遺稿)와 사적(事蹟) 등과 관련하여서는 사소한 문제일지라도 하나의 귀중한 소명자료로 부각되는 것이므로 그 취급을 정확히 하여 놓아야만 당시의 소상한 것 까지도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주는 것이니, 어찌 후손으로서 이어갈 수 없음을 부끄러이 알고 절차탁마(切磋琢磨)함이 없이 하늘만 쳐다보고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겠다.
언제나 어천 문중에 선조님들의 은공(恩功)이 함께하시어 9대 관가(官家)의 바른 기틀을 완연히 세워 나가시기를 기원하여 본다. 역사의 수레를 되돌릴 수는 없겠으나 굴곡진 역사는 반드시 새로이 새겨질 것이라 믿는다. 필자는 "莫見乎隱" "莫顯乎微"라는 성현(聖賢)의 말씀이 그대로 생겨난 말이 아니라 믿는 사람이다. "隱晦顯明亦各有時也"라 하시던 선친의 가르침이 생각나는 오늘이다.
|
첫댓글 약간의 수정 보완을 하였습니다. 읽는이의 양해를 바랍니다.
충분히 살펴보고 검토한 후 수정보완하겠습니다.
세심한 부분까지 마음써 주셔서 다시 한 번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