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3장 1-9절. 율법의 의와 믿음의 의
1. 지난 시간에는 주님을 위해 충성 봉사하다가 병든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 교회가 기쁨으로 영접하라는 내용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빌립보 교회에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된다고 가르치는 율법주의 이단을 물리치라는 것과, 구원은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는다는 내용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9절에 나오는 말씀(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을 따라서, ‘율법의 의와 믿음의 의’라고 정했습니다.
3:1.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inally, my brethren, rejoice in the Lord. To write the same things again is no trouble to me, and it is a safeguard for you.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Τὸ λοιπόν, ἀδελφοί μου, χαίρετε ἐν Κυρίῳ.
the finally, brothers of me, rejoice in Lord
‘기뻐하라’(χαίρετε)는 현재 명령형입니다(rejoice).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τὰ αὐτὰ γράφειν ὑμῖν, ἐμοὶ μὲν οὐκ ὀκνηρόν,
the same things to write you, to me indeed not troublesome
‘쓰는 것이’(γράφειν)란 현재 부정사형 동사입니다(to write).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ὑμῖν δὲ ἀσφαλές.
to you but safe
1. 1-2장은 고요하고 감격조의 어조였으나, 3-4장은 상당히 격렬한 어조로 이단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 3장의 경고는 율법주의자에 대한 경고(1-11절)와 반도덕적인 방탕주의자들에 대한 경고(12-21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끝으로’(λοιπόν)란 ‘남은 것은’(something that remains)이란 뜻과 ‘끝으로, 나아가서, 이제는, 덧붙여서’(finally, from now on, henceforth, beyond that)란 의미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새로운 주제를 시작할 때 사용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2. ‘기뻐하라’는 말씀은 1장 18절과 2장 18절과 4장 4절과 10절에도 있습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은 참된 기쁨은 주 안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기쁨 후에 마음의 공허와 고독과 고통이 따릅니다.
이런 깊은 고독과 슬픔은 궁극적으로 죄 문제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성령님의 참된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는 참된 기쁨이요 참된 평강입니다. (요한복음 14:27)
주님이 주신 죄용서와 성령님이 주시는 평강과 희락은 영원하고 완전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22-23)
‘같은 말’이란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과 교회 안에서 불화를 시정하라는 것과 이단에 대한 경고를 포함한 말입니다.
3. '끝으로'
중요한 말이니 마지막 말 같이 들어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하다는 것은 율법주의 이단의 경계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자기의 율법적인 선행을 장차 구원의 조건으로 삼는 율법주의 이단을 강하게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와 같은 율법주의 이단과 대조해서, 바울 자신은 율법주의 이단보다도 더욱 자기의 율법적인 의를 신뢰할 만한 사람이지만, 이런 율법적인 자기 의를 배설물처럼 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의를 의지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강력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처럼, ‘끝으로’라는 말은 바울이 아주 중요한 구원의 복음을 율법주의 이단과 대조하여 강조하기 위해서 첫마디로 시작한 말입니다.
4.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바울은 본 서신의 여러 곳에서 '기뻐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1장 18절; 4장 4절과 10절).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이 옥중에 있을 때, 여러 가지 걱정과 불안과 다툼과 두려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기뻐하라'고 한 것은 기뻐함을 통해서 교회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화를 해소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은 이러한 기쁨이 이 땅의 행복들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하늘나라의 시민이 되고, 영생을 얻었기 때문에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5.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1) 여기서 '같은 말'이란 주 안에서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것을 포함해서 기뻐하고, 서로 화목하고, 이단을 경계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바울 사도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자신에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성도들에게는 안전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찬송가 205장에서 “평생에 듣던 말씀 또 들려주시오”라고 찬송한 것처럼 복된 소식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는 세상과 육신의 이기주의에 빠지기 쉬우므로, 주 안에서 천국 시민이 됨과 예수님 공로로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는 복음을 자주 자주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은 다른 성도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하려고 애쓰기보다는 복음의 말씀을 항상 들려주는데 용감해야 합니다.
(2)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이처럼 복음을 전하는 것은 전도자에게는 자신이 체험한 구원의 복음을 전하므로 수고로움이 없습니다.
(3)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복음의 말씀을 늘 전하고 듣는 것은 거짓된 이단들이 많은 세상에서 안전한 것입니다.
이단이란 복음을 변질시켜서 사람들의 귀를 현혹시키는 새로운 교리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어디서 좀 색다른 말씀을 듣거든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성경 말씀은 수 천 년 동안이나 내려온 오래된 말씀입니다.
신앙의 선배님들을 통해서 전해 받은 신앙과 다른 이상한 가르침에 현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3: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eware of the dogs, beware of the evil workers, beware of the false circumcision;
개들을 삼가고
Βλέπετε τοὺς κύνας,
beware of the dogs
‘삼가고’(Βλέπετε)는 현재 명령형으로서(beware of) ‘조심하라’는 뜻이고, 원형(βλέπω)은 ‘바라보다, 인식하다, 분별하다’(look, see, perceive, discern)는 뜻입니다.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βλέπετε τοὺς κακοὺς ἐργάτας,
beware of the evil workers
직역하면 ‘악한 일군들을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삼가고’(Βλέπετε)는 역시 현재 명령형으로서(beware of)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βλέπετε τὴν κατατομήν.
beware of the false circumcision
직역하면 ‘거짓된 할례를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삼가라’(βλέπετε)는 역시 현재 명령형으로서(beware of)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1. ‘몸을 상해하는 일’(κατατομήν)이란 할례파 신자들이 할례(περιτομή)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신 유대인처럼 할례를 고집하므로, 원래의 할례(περιτομή)를 비하하는 말로서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과거 번역에는 ‘손할례당’이라고 번역했는데, 지금 번역처럼 ‘몸을 상해하는 일’이라는 일반적인 언어로 번역하면, 할례당에 대한 경계가 부각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물론 단어 자체는 ‘살을 베는 것’(concision, mutilation)을 의미하지만, 영어 성경은 ‘거짓된 할례’(false circumcision)라고 적절히 번역했습니다.
‘삼가라’는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됨으로써 극히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 만큼 바울 사도는 ‘할례당’을 개와 행악자로 비하하면서 극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추종하는 성도들에 대해서는 지극히 관대하고 사랑이 넘쳤으나, 할례당 같은 이단에 대해서는 극히 공격적이었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 대해서 극히 경계하신 것과 같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마태복음 23:13-16, 23-29).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마태복음 23:33).
이런 ‘할례당 신자, 거짓 신자, 이단’은 로마교회에도 있었고(로마서 1:18), 빌립보 교회에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유대인으로서 예수 믿은 성도들도 할례를 받아야 참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과거 예루살렘 교회에도 이런 할례당들이 있어서 바울과 많이 싸웠고, 그래서 50년에 최초의 예루살렘 총회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사도행전 15장).
결론은 이방인 성도들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사도행전 15:19).
요즘에는 구약의 토요일 안식일을 지켜야 참된 구원을 얻는다는 안식교 이단이 있는데, 이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2. ‘몸을 상해하는 일’(κατατομήν)이란 전에 성경에는 ‘손할례당’이라고 번역했는데, 이것은 ‘절단’이라는 뜻으로서(concision, mutilation) 할례의 참뜻을 모르고, 몸만 절단하면서 개처럼 부도덕하게 처신하는 유대주의 할례파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방인인 빌립보 성도들에게 유대주의 할례파를 조심하라고 강하게 경계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개’(κυνός: dog)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할례받으라’고 괴롭히는 유대주의 할례파 이단을 가리키며, 마음으로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써는 참된 구원을 받지 못하고, 몸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로 할례를 받아야 완전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이단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할례파 이단들이 할례를 강조하는 이유는 몸에 할례를 받음으로써 자기는 결코 망하지 않는 구원을 받았다고 자랑하면서, 방탕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려고 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마음의 할례요, 성령으로 거듭나고, 날마다 성령으로 마음이 새롭게 되고, 날마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례는 마음에 하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2:28-29.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이처럼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된 삶이요, 참된 평안이요, 만사형통의 행복이요 참된 자유입니다.
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3. 율법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
이것은 빌립보 교회에서 율법주의 자기 의를 주장하면서 율법과 할례를 행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율법주의 이단에 대한 경계의 말씀입니다.
(1) 개들을 삼가고
'개들'은 당시에 집에서 기르는 개가 아니고, 길거리를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덤벼드는 사나운 개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7장 6절에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복음을 거역하고 물고 찢는 율법주의자들에게 대해서 ‘개’라고 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개들'이란 성도들을 괴롭히는 유대주의자들을 지칭합니다.
처음부터 살인자인 마귀의 성품을 닮아서 철저히 살인하려는 성질을 가진 율법주의자들을 가리킵니다.
(2)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이란 문자적으로 '악한 일꾼들'이란 뜻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지 않고,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교회 밖의 유대인들이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받은 율법주의 거짓 교사들입니다.
이들은 바울이 전도했던 갈라디아 교회에도 침투했었습니다.
또한, 이들은 고린도 교회에도 침투하여, 오히려 바울을 거짓 사도라고 추방운동을 벌였습니다.
이 율법주의 거짓 교사들은 예수만 믿어서는 완전한 구원을 얻지 못하고, 전통적인 유대인들처럼 할례도 받고, 유대인의 절기도 지키고, 유대인의 성결법을 지켜야 참다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 잘못된 사역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마귀의 성품을 닮아서 거짓을 일삼고, 거짓 증거를 통해서 예수님도 스데반도 바울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3) 몸을 상해하는 일(손할례당)을 삼가라 -
'손할례당'이란 남자의 몸을 칼로 훼손하는 할례당이라는 뜻입니다.
이 헬라어(κατατομήν)의 문자적 의미는 ‘절단한 자’란 뜻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버리고, 인간적인 노력과 종교의식을 중시하는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회를 설립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다른 곳으로 전도를 떠나가고 없는 사이에,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내려온 율법주의자들이 이런 이단을 퍼뜨렸습니다.
“너희들, 예수만 믿는다고 구원받는 줄 아느냐? 너희들 성경을 알고 있느냐? 성경에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했는데, 할례도 안 받고 무슨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냐?”
이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이라고는 구약성경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빌립보 성도들은 유혹을 받기 쉬웠습니다.
이들을 특별히 ‘손할례당’이라고 한 것은 율법주의자들이 금욕주의를 표방하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는 아주 경건한 사람들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금식하고,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고, 채소 하나까지 십일조도 드리는 겉보기에는 정말 경건한 사람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자신의 율법적 의와 경건을 자랑하는 손할례당이었습니다.
3: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we are the true circumcision, who worship in the Spirit of God and glory in Christ Jesus and put no confidence in the flesh,
우리가 곧 할례파라
ἡμεῖς γάρ ἐσμεν ἡ περιτομή,
we for are the circumcision
직역하면 ‘왜냐하면 우리가 할례파이기 때문이다’란 뜻입니다.
‘우리가’(ἡμεῖς, we)가 강조되어 ‘바로 우리가’란 뜻입니다.
동사(ἐσμεν)는 현재형입니다(are).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οἱ Πνεύματι Θεοῦ λατρεύοντες,
those in Spirit of God worshiping,
직역하면 ‘하나님의 영 안에서 예배하는 자들’이란 뜻입니다.
‘예배하는’(λατρεύοντες)은 현재분사로서(worshiping) 계속 예배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즉 순간마다 성령님 모시고,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는 삶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καὶ καυχώμενοι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and glorying in Christ Jesus
직역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하고’란 뜻입니다.
‘자랑하고’(καυχώμενοι)는 현재분사로서(glorying)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계속 자랑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καὶ οὐκ ἐν σαρκὶ πεποιθότες,
and not in flesh having put confidence
직역하면 ‘육체 안에서 신뢰하지 않는’이란 뜻입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와 ‘육체 안에’(ἐν σαρκὶ)는 서로 대조되고 있습니다.
‘신뢰하지’(πεποιθότες)는 완료분사로서(having put confidence) 육체를 신뢰하고 안주하면서 살아가는 불신자들의 모습을 가리킵니다.
1. 할례파는 예배의 의식과 육체의 할례를 자랑했으나, 참 할례파인 우리 성도들은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합니다.
요한복음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유대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 드리는 자신들의 율법 준수를 자랑했으나(누가복음 18:12),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자랑합니다(고린도전서 1:31).
2. 할례의 참뜻은 마음의 성결에 있고, 중생과 성화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중생하고 거룩하게 살고자 힘쓰는 우리 성도들이 참 할례파이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고 예배하는 자들이 참 할례파입니다.
이처럼 참된 예배와 봉사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 참된 성도들은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는 사람들이고, 자신들이 죄악 되고 허무하고 무가치함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참 할례파 성도들은 자신들의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높이고, 그를 의지하고, 오직 그를 자랑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만 우리의 의요, 거룩이요, 완전이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위로와 힘과 기쁨이시기 때문입니다.
'봉사'에 해당하는 헬라어(λατρεύοντες)는 유대인들이 공식적인 예배를 드릴 때 사용한 말입니다.
진정한 할례파인 우리 성도들은 전통이나 형식에 지배받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기쁜 마음으로 예배드립니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참된 예배는 우리가 상한 심령으로 겸손히 예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시편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할례파 이단자들은 율법 행위를 자랑했으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6: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육체'에 해당하는 헬라어(σαρκὶ)는 육체, 인간의 성품, 타락한 본성 등을 가리키는데, 본 절에서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인간의 모든 종교적 의식이나 공적 등을 가리킵니다.
로마서 7: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그러므로 진정한 할례파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종교적인 의식과 자랑을 신뢰하지 않으며,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함을 가리킵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진정한 할례파라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2:28-29.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골로새서 2: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3. 율법주의 할례파 이단자들에 대한 반론
(1)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표면적으로 육체에 할례를 행하는 자들이 진정한 할례당이 아니고, 마음에 할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진정한 할례당입니다. (롬 2:25-29; 골 2:11)
로마서 2:29.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바울은 진정한 할례당의 특징을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봉사'란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여 무료로 섬기는 것을 가리킵니다.
마치 예배 때, 예물을 드리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봉사’라는 이 단어(λατρεύοντες)는 예배드린다는 뜻이 있습니다(눅 2:37; 행26:7; 롬 9:4).
그런데, 이런 이기심 없는 진정한 봉사는 성령님의 능력과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봉사한다’는 말씀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할례파인 그리스도인은 외식적인 율법 행위에 따라 억지로 봉사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의 은혜 가운데서 구원의 은혜에 감사해서 봉사하는 것입니다(시 51:17).
(3)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을 지키는 인간의 행위를 자랑하였습니다.
그러나, 참 할례당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즉, 율법주의자들은 자기 행위를 통해서 정죄감을 갖는 자들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은 죄인이지만 주님의 은혜와 용서와 사랑을 받아 감사하고, 만족하는 사람들입니다(갈 6:14).
(4)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육체를 신뢰한다’는 것은 바울 사도가 5절과 6절에서 열거한 대로, 세상적인 혈통과 율법적인 자신의 업적 등을 자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도 예수를 믿기 전에는 이와 같은 육체에 대한 자존심을 대단히 높게 갖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빌 3:4-6)
그래서, 유대 종교를 방해하는 것처럼 생각되는 기독교를 박멸하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에는 이런 육체의 자랑거리를 배설물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죄악된 인간들만 상대하다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만나뵌 다음에는 세상 자랑거리가 정말 너무도 하찮은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3:4.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lthough I myself might have confidence even in the flesh. If anyone else has a mind to put confidence in the flesh, I far more: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καίπερ ἐγὼ ἔχων πεποίθησιν καὶ ἐν σαρκί.
although I having confidence even in flesh
직역하면 ‘비록 내가 육체 안에서 신뢰를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란 뜻입니다.
‘내가’(ἐγὼ, I)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갖고 있다고’(ἔχων)는 현재 분사형입니다(having)
만일 누구든지 다른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Εἴ τις δοκεῖ ἄλλος πεποιθέναι ἐν σαρκί,
if any thinks other to have confidence in flesh,
직역하면 ‘만일 어떤 다른 이가 육체 안에서 신뢰할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이란 뜻입니다.
‘신뢰할 것을 가지고 있다고’(πεποιθέναι)는 완료 부정사형 동사로서(to have confidence) 이미 신뢰할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생각하면’(δοκεῖ)은 현재형으로서(thinks) ‘생각하고 있다면’이란 뜻입니다.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ἐγὼ μᾶλλον·
I more
직역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다’는 뜻입니다.
‘나는’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1. 바울이 육체를 신뢰할 만하다는 것은 육체의 할례를 주장하는 율법주의 신자들에 대해서 바울 사도야말로 육체를 자랑할 만한 조건을 훨씬 더 갖춘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빌 3:5-6)
그러나 바울이 육체적 자랑의 조건들을 갖추고 있다고 말한 이유는 율법주의자들이 자랑하는 이런 육체적 조건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아무 쓸데 없는 무가치한 것임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이미 과거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 최고로 육체를 자랑할 만한 조건들을 갖추었으나(빌 3:5-6), 예수 믿고 나니 육체적인 자랑들이 다 쓸모 없고 무가치한 것이었다는 자신의 경험을 들어서 교훈한 것입니다.
이처럼 경험자의 말은 힘이 있습니다.
2. 바울은 육체를 신뢰하고 있는 율법주의 할례파를 반박하기 위해서 자신의 과거 바리새인 시절의 경험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현재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바울은 성령으로 봉사하고,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사람이지만, 육체적인 조건들을 자랑할 만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빌 3:5-6)
그러나 물론 지금은 바울이 육체를 자랑하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육체를 자랑하지 않은 것은 자신이 육체를 신뢰할 만한 조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지금 성령으로 봉사하고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현재의 생활에 비해서 과거 육체적 조건을 신뢰하고 자기 본위로 살았던 과거의 삶이 크게 잘못되고 실패하고 불행했다는 것입니다.
즉 과거에 율법주의자로 살 때 바울은 스데반을 죽이는 데 앞장서고, 교회를 핍박하고, 성도들을 때리고 잡아 가두었습니다. (행 8:1-3)
그래서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만이 자신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확실한 구원의 진리이며, 그 어떤 육체적 조건과 행위로도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5절과 6절은 바울이 자랑할 수 있는 육체적인 조건들이었습니다.
빌립보서 3:5-6.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3:5.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New American Standard Bible: circumcised the eighth day, of the nation of Israel, of the tribe of Benjamin, a Hebrew of Hebrews; as to the Law, a Pharisee;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περιτομῇ ὀκταήμερος, ἐκ γένους Ἰσραήλ,
circumcision on eighth day, from nation of Israel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φυλῆς Βενιαμείν, Ἑβραῖος ἐξ Ἑβραίων,
of the tribe of Benjamin, Hebrew of Hebrews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κατὰ νόμον Φαρισαῖος,
according to Law Pharisee
1. 바울은 자신의 육체를 신뢰할 만한 근거들을 제시합니다.
(1)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혈통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창 17:12; 레 12:3).
그러나,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는 성인이 되어서 할례를 받았습니다(행 16:3).
그리고, 이스마엘 자손들은 난 지 십삼 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런 개종자들이나 이스마엘 족속과는 달리 바울은 율법에 정한 대로 난 지 팔 일 만에 부모로부터 할례받은 진정한 유대인이었다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바울은 이스라엘 족속의 혈통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에서 개종한 사람(proselyte)이 아니라, 순수한 이스라엘 혈통에서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3) 베냐민의 지파요
베냐민은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아들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사울도 베냐민 지파였습니다(삼상 9:1,2).
그리고,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졌을 때도, 베냐민 지파는 남쪽 유다지파와 함께 순수한 신앙을 지킨 지파였습니다.
또한, 하만의 음모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에스더와 모르드개도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베냐민 지파는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했을 때는 성전 건축을 위해 유다와 레위 지파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느 11:7-9).
바울은 이런 베냐민 지파에 속한 것을 매우 자랑하였습니다(롬 11:1).
(4)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바울은 이방인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히브리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히브리인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바울은 유대인의 방식으로, 히브리말로써 양육을 받은 자였습니다(행 22:2, 3).
그러므로 그는 혈통은 물론 히브리말과 히브리 관습을 그대로 보존한 순수한 히브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인들 중에서는 혈통적으로는 히브리인이지만, 헬라어를 사용하고, 이방인 지역에 살면서 이방인의 풍속을 따라 사는 히브리인들이 많았습니다.
(5)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바리새파는 가장 엄격한 유대 종파로서 구약의 율법은 물론 구전이나 서기관이 해석한 전승을 연구하며 따르는 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바리새인의 아들로 태어나(행 23:6), 바리새파에 입문한 자였으며, 그 가운데서도 가장 존경받는 바리새인 스승인 가말리엘 밑에서 수학했습니다(행 22:3).
그러므로, 그는 바리새인 중에서 가장 신실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자였습니다.
3: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s to zeal, a persecutor of the church; as to the righteousness which is in the Law, found blameless.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κατὰ ζῆλος, διώκων τὴν ἐκκλησίαν,
according to zeal, persecuting the church
‘핍박하고’(διώκων)는 현재분사로서(persecuting) 계속 핍박하고 있는 모습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κατὰ δικαιοσύνην τὴν ἐν νόμῳ, γενόμενος ἄμεμπτος.
according to righteousness which (is) in law, having become faultless
직역하면 ‘율법 안에 있는 의로는 흠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흠 없는 사람이 되었다’에서 동사(γενόμενο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become) 단연코 무흠한 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1.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예루살렘과 유대와 다메섹에까지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사도행전 8:1-3, 9:13, 21)
이처럼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믿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회교도인들도 기독교를 핍박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합니다.
이처럼 바울은 유대교인으로서 기독교를 박해하는 것을 떳떳하게 자랑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과거의 자기를 정죄하면서, 같은 상태에 있는 율법주의 신자들을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율법의 의'는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명령들과 기준들을 지킴으로 얻어지는 '의'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런 율법을 온전히 지켜서 다른 사람이 볼 때 흠이 없던 자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 앞에서 자신을 책망할 것이 없었다고 했습니다(고린도전서 4:4).
그러나, 바울이 지킨 것은 율법에 대한 형식적인 순종에 불과하며 하나님이 진정으로 요구하시는 영적 순종에는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즉 참된 의는 율법을 준수하는 데 있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에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ut whatever things were gain to me, those things I have counted as loss for the sake of Christ.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Ἀλλὰ ἅτινα ἦν μοι κέρδη,
But whatever things were to me gain
직역하면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이었던 것들을’이란 뜻입니다.
‘유익이었던’에서 동사(ἦν)는 미완료과거로서(were) 계속 유익이었던 것을 가리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ταῦτα ἥγημαι, διὰ τὸν Χριστὸν, ζημίαν.
these I have esteemed, because of the Christ, loss
직역하면 ‘이것들을 내가 그리스도 때문에 손해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생각하게 되었다’(ἥγημαι)는 현재 완료형이고(I have esteemed), 원형(ἡγέομαι)은 ‘인도하다, 생각한다, 간주한다’(lead, think, suppose, consider)는 뜻입니다.
1. ‘내게 유익하던 것들’이란 5-6절에 열거한 여섯 가지 것들을 가리킵니다.
즉 바울이 유대교인이었을 때 유익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이제 예수 믿은 후로는 오히려 해로 여긴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로 번역된 말(διὰ τὸν Χριστὸν)은 ‘그리스도 때문에’(because of the Christ), 혹은 ‘그리스도를 통해서’(through the Christ)를 가리키고, 바울의 가치관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변화된 것을 가리킵니다.
‘여긴다’((ἥγημαι)는 것은 현재 완료형으로서(I have esteemed) 바울의 가치관의 변화는 과거 다메섹 도상에서 일어났고, 그 후로 아직까지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2. '무엇이든지'
앞의 5, 6절에서 언급한 바울이 신뢰할 만한 육체의 조건들은 다만 대표적인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본 절의 '무엇이든지'는 바울 자신에게 이익이 되었던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유대교에서 자신의 외적인 것들이 자랑거리가 되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를 만난 후부터 이전의 자랑거리가 이제는 아무 쓸모 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구원이 단지 예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을 깨달았을 때, 과거에 구원을 얻을 조건이 되리라 생각했던 외적인 조건들이 해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3. 아담의 타락 이후로 본질상 죄인된 사람이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는가요?
죄인된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칭의를 위해 사람들이 치러야 할 죗값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기로 하시고, 사람들의 죄 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지우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칭의를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충족시키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죄 용서와 칭의의 모든 조치를 취해 놓으셨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가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일만 남았습니다.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그 은혜를 전적으로 믿을 때, 비로소 우리들은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5:1-2.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New American Standard Bible: More than that, I count all things to be loss in view of the surpassing value of knowing Christ Jesus my Lord, for whom I have suffered the loss of all things, and count them but rubbish so that I may gain Christ,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ἀλλὰ μὲν οὖν γε, καὶ ἡγοῦμαι πάντα ζημίαν εἶναι
but truly therefore indeed, also I count all things loss to be
직역하면 ‘그러나 정말 참으로, 그러므로 또한 모든 것을 해로운 것이라고 내가 여기고 있다’는 뜻입니다.
‘해로운 것이라고’에서 동사(εἶναι)는 현재 부정사형 동사이고(to be), ‘내가 여기고 있다’(ἡγοῦμαι)는 현재형입니다(I count).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διὰ τὸ ὑπερέχον τῆς γνώσεως Χριστοῦ Ἰησοῦ τοῦ Κυρίου μου,
because of the surpassing of the knowledge of Christ Jesus of the Lord of me
직역하면 ‘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의 뛰어남 때문에’라는 뜻입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δι’ ὃν τὰ πάντα ἐζημιώθην,
because of whom the all things I have lost
직역하면 ‘그이 때문에 모든 것들을 내가 잃어버렸다’는 뜻입니다.
‘잃어버리고’(ἐζημιώθην)는 부정과거 수동태로서(I have lost) ‘내가 확실히 잃어버림을 당했다’ 혹은 ‘내가 단호하게 잃어버렸다’는 뜻입니다.
배설물로 여김은
καὶ ἡγοῦμαι σκύβαλα,
and I esteem rubbish,
직역하면 ‘내가 배설물로 여긴다’는 뜻입니다.
‘여긴다’(ἡγοῦμαι)는 현재형으로서(I esteem) 배설물로 ‘여기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얻고
ἵνα Χριστὸν κερδήσω
so that Christ I may gain
직역하면 ‘이는 그리스도를 내가 얻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얻기 위함이라’(κερδήσω)는 부정과거 가정법 동사로서(I may gain) 확실하고 단호하게 그리스도를 ‘얻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1.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γνώσεως Χριστοῦ Ἰησοῦ τοῦ Κυρίου: knowledge of Christ Jesus of the Lord)에서 ‘지식’이란 단순한 이성적인 지식이 아니라, 통찰력 있고 성령님이 주시는 신앙적인 지식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가 새롭게 가진 영적이고 통찰력 있는 체험적인 지식을 가리킵니다.
‘배설물’(σκύβαλα)이란 ‘폐기물, 쓰레기, 똥’(refuse, dregs, rubbish, dung)을 가리키는데, ‘개’라는 단어(κύων)와 ‘던진다’(βάλλω)는 단어의 합성어로서 개에게나 던져줄 음식 쓰레기나 똥이라는 뜻입니다.
‘잃어버리고’(ἐζημιώθην)는 부정과거 수동태로서(I have lost)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일시에 바리새인의 지식을 단번에 잃어버리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아는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된 충격적인 경험을 가리킵니다.
2.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알게 된 지식과 체험이 너무도 소중하기 때문에, 바리새인으로서 가졌던 율법적인 지식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바울은 바리새인적 지식을 해로 여기고 있고(ἡγοῦμαι), 바리새적인 지식을 배설물로 여기고 있다(ἡγοῦμαι)고 두 번이나 같은 말을 쓰면서, 과거 바리새적인 율법적 신앙의 무익성과 폐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3. '모든 것'이란 7절에서 자신에게 유익했던 '모든 것'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이해타산 관계가 없더라도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해로 여긴다는 뜻입니다.
'가장 고상함'이란 '탁월함'이라는 뜻으로서, 바울 자신이 가장 뛰어난 것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음을 의미합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내가 그를 위하여'라 함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라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지금까지 그가 귀중하게 여겼던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솔로몬의 예화>
(1) 겸손할 때, 심령이 가난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고 충성했던 솔로몬
열왕기상 3:6-9. “솔로몬이 가로되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저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예비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2) 세상 부와 권력과 향락을 추구하다가 불행을 만났던 솔로몬
열왕기상 11:1-8. “솔로몬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여호와께서 일찌기 이 여러 국민에게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와 서로 통하지 말며 저희도 너희와 서로 통하게 말라 저희가 정녕코 너희의 마음을 돌이켜 저희의 신들을 좇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저희를 연애하였더라. 왕은 후비가 칠백인이요 빈장이 삼백인이라 왕비들이 왕의 마음을 돌이켰더라. 솔로몬의 나이 늙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 부친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니,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좇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좇음이라.
(3) 회개한 솔로몬
전도서 1:1-2.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2:1-2.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전도서 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무엇을 버렸습니까?
어떤 학생은 주일날 교회에 가기 위해서, 그토록 좋아하던 만화 영화를 버렸다고 굉장한 결심을 이야기했습니다.
어른들은 우습게 여기실지 몰라도, 학생들이 컴퓨터 만화 게임을 버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요즘에는 컴퓨터 오락 메니아들이 많습니다.
컴퓨터 오락게임을 위해서 밤 3시까지 오락게임을 하는 경우가 보통입니다.
그런데, 어르신들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버렸습니까?
주일을 잘 지키기 위해서 친구와의 약속을 버렸습니까?
새벽예배를 참석하기 위해서 좋아하는 연속극과 영화를 버렸습니까?
저녁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서, 안방에서 TV 보는 것을 버렸습니까?
4. 뿐만 아니라, 바울은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배설물'(σκύβαλα:스퀴발라)는 개에게 던지는 것으로 '똥'이나 '음식 찌꺼기' 또는 '쓰레기'등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 이전의 삶 전체에 대해서 얼마나 철저하게 버렸는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버려야 할 가장 아까운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 속에서 이 한 가지 버려야 할 것을 버리기로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may be found in Him, not having a righteousness of my own derived from the Law, but that which is through faith in Christ, the righteousness which comes from God on the basis of faith,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καὶ εὑρεθῶ ἐν αὐτῷ,
and may be found in Him
‘발견되려 함이니’(εὑρεθῶ)는 부정과거 가정법 수동태로서(may be found)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확실히 발견되려는 것이다’는 뜻이고, 앞 절의 접속사(ἵνα)에 연결된 부정과거 가정법 동사입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μὴ ἔχων ἐμὴν δικαιοσύνην τὴν ἐκ νόμου,
not having my own righteousness which from law
직역하면 ‘나는 율법에서 난 나의 의를 가진 것이 아니요’란 뜻입니다.
‘가진’(ἔχων)은 현재분사로서(having) ‘현재 가지고 있는’이란 뜻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ἀλλὰ τὴν διὰ πίστεως Χριστοῦ,
but which through faith from Christ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τὴν ἐκ Θεοῦ δικαιοσύνην ἐπὶ τῇ πίστει,
which from God rigthteousness on the faith
1. ‘그 안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주님과 성도가 포도나무의 비유와 같이(요한복음 15:5) 주님과 성도가 하나가 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율법에서 난 의’는 결국 나의 의이지만(누가복음 18:9-12), ‘믿음으로 얻은 의’는 하나님께서 주신 의요, 은혜와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에베소서 2:8).
이처럼 믿음으로 얻는 의(以信稱義)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계시된 바요, 바울에게서 확연히 확인된 것입니다(로마서 4:1-13).
2.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이 말씀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재림의 날에 예수 안에서 발견됨으로 구원얻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 안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음이 발견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와 긴밀한 연합 관계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은 것을 가리키고, 자기 자신의 의로 구원받지 못함을 가리킵니다.
3.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의'(δικαιοσύνη)는 법정에서 한쪽은 '옳고', 다른 쪽은 '정죄'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 법정에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를 얻고, 자신의 율법적 행위로서는 정죄받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처럼, 바울 자신이 갖고 있는 의는 자신의 노력이나 율법을 지키는 행위에 의해서 온 것이 아님을 나타냅니다.
4.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하나님께부터 의롭다고 인정되는 것은 오로지 십자가에서 죄를 속량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유일한 조건인 '믿음'은 '행위'와 반대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자신의 노력이나 행위로는 '의'를 얻을 수 없음을 인정하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 세상을 떠나서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오직 예수님만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를 날마다 얻기 위해서, 방해되는 세상 것들을 배설물처럼 버리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세상적인 명예, 자신의 세상적인 선행, 자신의 공로 등을 배설물처럼 버리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오랫동안 봉사를 하다 보면, 자신의 공로가 예수님을 진실히 믿는 데 방해가 되는 수가 많습니다.
바울 사도를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바울 사도는 그렇게 희생 봉사를 위대하게 이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얻게 위해서 이 모든 것들을 날마다 배설물처럼 버리는 작업을 이 편지를 쓸 당시에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예수 믿고 나서, 자기의 공로주의로 타락해버리고, 주님의 은혜에서 떨어진 자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겸손하게 주님 공로만을 의지하는 성도가 되시고, 교만하여 은혜에서 떨어진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바울 사도는 갈수록 더욱 자신이 사도보다 가장 작은 자, 모든 성도들 중에 가장 작은 자, 죄인 중에 괴수라고 주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언제나 겸손히 주님의 구원의 은혜만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순수한 성도님들이 되시기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