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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살, 새 삶
윤소리
스무 살은 수많은 ‘시작’이다. 성인의 시작, 새로운 환경에서의 시작, 대학에서 새로운 공부의 시작.
시작이라는 롤러코스터를 타고 빠르게 오르내리는 속도에 적응해나가고 있던 스무 살 여름, 교수님이 나에게 중국 어학연수를 권유하셨다.
나는 당시 중국어 관련 학과에 재학 중이었다. 우리 학과는 매년 몇 명 선발하여 방학 동안 연수를 보내곤 했다. 첫 여름방학을 앞두고 내가 그 몇 명 중에 선발이 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나는 어학에 대한 큰 뜻이 없었다.
사실 나는 그때 가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음악 관련 학과는 가고 싶지 않았다. 고민 끝에 어학은 배워두면 언제든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진학한 학과가 바로 중국어 학과였다.
내가 진학한 학교는 전문 대학교였고, 일반 대학에 비해 취업 과정이 빠르게 진행되는 특성 탓에, 1학년 학기 초 교수님과 상담하는 시간이 모든 학생에게 한 번씩 찾아왔다.
그때 나는 패기 넘치게 “전 음악 공부 중이고 가수가 되고 싶습니다. 학교 공부는 열심히 하겠지만 취업 생각은 없습니다.”라고 교수님께 말씀드렸다.
당시 교수님은 고집이 세고 조금 강압적인 옛날 스타일의 어른이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을 듣고도 “정신 빠진 소리 하지 마라!” 하고는 내쫓으셨다. 그런데도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뜻대로 학교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교수님도 뜻을 굽히지 않으셨다. 정말 눈곱만한 관심조차 없었던 나에게 계속 어학연수를 가라고 하니 나로서는 너무 황당했다.
“교수님, 정말 저는 가수 할 건데요, 그냥 다른 친구를…”
“잔말 말고 갔다 와.”
나를 옥상에 데리고 가서 담배를 태우시며 말하는 교수님의 태도는 강경했다. 집에 돌아온 나는 어머니께 이 사실을 알리고 상의했다.
그런데 어머니 역시 다녀오라고 밀어붙이시는 것이었다. 몇 명 되지 않는 학생만 갈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왜 가지 않느냐고 하는 어머니에게 방학 동안 음악 공부에 더 전념하고 싶다는 내 설득은 별로 효과가 없었던 것 같다.
사실 나는 낯선 환경을 매우 싫어한다. 어린 시절부터 자주 이사한 탓에 전학도 자주 하게 되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나가는 과정을 반복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새로 바뀌는 상황에 매우 피로감을 느꼈다. 또한 내향적인 성격인 나에게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확고해지면서 더욱 거부감이 들었다. 한곳에 머무르고 싶고, 현재 환경이 변하지 않기를 간절하게 원하곤 했다.
그런데 스무 살이 되어 대학 생활에 적응한 지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전혀 다른 환경으로 가라니. 그것도 말도 안 통하는 외국이라니 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여름방학이 총 두 달 정도인데 어학연수 기간은 6주였다. 그 전에 연수를 가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까지 합치면 사실상 쉴 수 있는 방학이 조금밖에 되지 않았다. 휴식이 간절했던 나에게 해외어학연수는 너무 가혹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고집이 센 교수님과 어머니를 나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해외에 나가기 위해 난생처음 여권을 발급받고, 엄청나게 큰 캐리어에 짐을 잔뜩 싸고. 그렇게 타국에서 6주를 보내기 위한 수많은 준비 끝에 2014년 7월 8일, 나는 드디어 중국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다. 6명의 동기와 함께.
내가 6주간 지내며 배우게 될 곳은 ‘옌타이노동대학’이라는 곳이었다. 학교 안에 기숙사가 마련되어 있었기에 동기들과 각자 조를 짜서 2인 1실로 생활하게 되었다.
내가 있던 기숙사의 방은 작은 화장실이 딸린 한 칸짜리 방이었다. 싱글 침대 두 개가 양옆 끝에 놓여 있고, 침대와 침대 사이의 거리는 50cm 정도 되었다. 또 침대 발밑의 방향으로 책상이 두 개 놓여 있었다. 2인 1실로 사용하기 딱 좋은 방이다.
학교 수업도 잘 적응하고 있었고, 어학 실력도 빠르게 늘어가고, 또 친구들과도 재미있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학교 식당에서는 저렴한 가격에 달걀 볶음밥과 토마토 달걀 볶음을 사 먹을 수 있었고 학교 교문 앞 마라탕 집에서 한국 돈 삼천 원으로 원하는 재료를 잔뜩 넣은 마라탕 한 그릇을 언제나 먹을 수 있었다.
또 밤에는 양꼬치 가게에서 양꼬치를 실컷 먹어도 한국 돈으로 만원이 채 나오지 않았다. 버스 타고 시내를 나가도 버스비가 1위안, 당시 한국 돈으로 이백 원도 채 되지 않았다. 그래서 매 주말이 되면 시내로 나가 구경하고 근처 바다도 보고 왔다.
또 옌타이 근처에 엄청나게 큰 리치 농장이 있어서 과일 ‘리치’가 매우 저렴했다. 한 봉지 가득 담아도 한국 돈 삼천 원 정도였다. 우리는 매일 매일 한 봉지씩 사서 다 함께 그 한 봉지를 모두 까먹고는 했다.
이렇게 보면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 오히려 즐거워 보이는 해외 유학 생활이었지만 나는 한가지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불면증, 밤이면 잠이 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외국에 오게 되어 적응하느라 잠시 그런 줄 알았다. 실은 나는 한국에서도 자주 잠을 설치곤 했기 때문에 더욱더 문제라고 느끼지 못했다.
중국에선 한 번도 깨지 않는 통잠을 자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도 되지 않았고 매일 최소 세 번은 깨곤 했다. 원래도 그랬는데 낯선 곳에서까지 이런 현상이 계속되자 하루하루가 너무 지쳤고, 괴롭게 느껴졌다.
그러다 보니 점점 유학 생활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힘들어했다. 친구들 앞에서는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일과를 마치고 밤이 되어 친구가 잠자리에 들면 그 순간부터 나에게는 새로운 전투가 시작됐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날이 많았고 어떤 날엔 이유 없이 눈물이 나 아침이 올 때까지 마냥 울기도 했다.
처음엔 향수병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가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하며 버티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날이 갈수록 하루하루가 너무 길게 느껴졌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시간이 멈춘 듯 느껴졌다.
룸메이트가 자고 있어서 책을 읽을 수도 없었고, 중국의 인터넷은 한국만큼 빠르지 못해서 유튜브를 보지도 못했다. 침대와 침대 사이가 꽤 가까운 거리였기 때문에 친구가 깨어날까 걱정되어 울 때도 소리 죽여 울었다.
할 수 있는 건 이어폰을 낀 채로 노래를 들으며 천장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목적지 없는 생각의 기차를 운행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왜 잠을 자지 못할까. 언제부터 잠을 설치게 되었을까.
처음엔 그 생각이 시작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생각의 답이 나오면 다시 그 답에 꼬리물기처럼 다른 생각이,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 시간은 나의 짧은 20년 삶 전반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나의 불면증 원인과 시기를 시작으로 내 삶에 대한 고찰이 되었던 셈이다.
열네 살, 중학교 1학년이 된 우리 반에는 유독 불량한 남자아이들이 많았다. 학교를 늦게 오는 건 너무 당연했고, 수업 중에 선생님께 대들고 의자를 던지는 일도 있었다. 화가 난다고 복도 창문을 깨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들은 선생님의 심부름을 자주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던 나에게 화풀이를 하곤 했다. 다른 친구들과 잘 지내긴 했지만, 선생님이 그들을 불러 혼낸 날엔 교실로 돌아온 그들의 표적이 내가 되었다.
그들은 나를 자신의 불량한 행동에 대해 선생님께 고자질하는 아이로 인식했다. 한 번도 그런 행동은 한 적도 없었지만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단정지은 그들에게 내 항변은 통하지도 않았다. 나는 학교에 있는 시간이 너무 괴로웠다. 언제든 난 그들의 화풀이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불안했기 때문이다. 학교에 가는 게 너무 싫었다. 가족들에게 말하지도 못하고 나는 하교한 순간부터 다음 날을 생각하며 끙끙 앓았다. 그 시름은 자는 동안도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한두 시간에 한 번씩 깨어났다. 깨어나서 시계를 보고 ‘몇 시간 뒤에 또 학교 가야 하네….’ 하고 괴로워했던 기억이 여전히 선명하다.
돌이켜보니 내 불면증의 시작은 그때였다. 나는 근 6년간 불면증을 앓고 있었다. 그러나 겨우 열네 살 때부터 찾아온 불안과 우울을 나는 모른 척해왔다.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고, 나보다 더 힘든 사람도 많은데 내가 엄살을 부리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나를 방치했다. 별일 아니라 치부하고 그냥 잠을 못 자는 것뿐이라고 무시했다.
피로가 쌓이고, 못 견딜 정도가 되면 쉬는 날 몰아서 쓰러져 잤다. 그런데 매일 일정이 가득한 날들이 반복되고 주말 역시 쉬지 못해 피로가 쌓이기만 하고 풀 수 없게 되자 몸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몸이 상하자 마음도 더 아프게 되었다. 6년 동안 나에게서 방치된 나는 어떠한 방패도 없으니 쉽게 상하고 갉아 먹혔다.
그런데도 나는, 내가 약하고 엄살이 심해서 그런 거라고 내 탓만 했다. 그렇게 끝도 없이 무너지는 나를 도저히 방치할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뒤늦게 문제를 알아차렸다.
난 마주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매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문제점을 생각하고 그 문제의 원인을 생각하고. 매일 반복하던 시간은 나에게 너무 괴롭고 외로운 시간이었다. 내 마음에 깊게 난 상처를 들여다보는 일은 곪아 터진 상처를 맨눈으로 마주할 때처럼 끔찍했다.
하루는 친구들이 휴일에 바다를 보러 가자고 했는데, 나는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함께 가지 않았다. 그렇게 혼자 방에 누워있을 때, 불쑥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면 아무도 말리지 못해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나를 깨달았을 때 너무 무서웠다.
그때 나는 처음 인정했다. 내가 진짜 아픈 걸 수도 있다고. 어쩌면 내가 너무 나약하고 엄살을 부리는 게 아니라 진짜로 마음에 병이 생겼을 수도 있겠다고.
한 번도 나의 아픔을 마주하려고 해 본 적도 없었고 내 아픔이 특별하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내 아픔이 남의 아픔에 비해 특별한지가 중요한 건 아니었다.
내가 아픈지 아프지 않은지, 그걸 알아야 내가 나를 돌볼 수 있지 않은가. 내가 나를 돌볼 수 있어야 남을 돌볼 수 있다. 나는 늘 남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는 핑계로 나를 버리고는 했다. 그런데 내가 멀쩡하지 않은데 남에게 어떻게 피해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스무 살, 중국에서 6주간의 시간 동안 어학연수 그 이상의 것을 배우게 되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가족들에게 내가 아프다는 것을 알린 일이었다.
사실은 내가 마음이 많이 망가진 것 같다고. 이제껏 그것을 방치하고 살았지만, 이제는 내가 나를 마주해야 할 것 같다고. 그래서 꼭 병원도 가고 치료도 받고 도움도 받아서 나아지고 싶다고.
스무 살은 나의 삶의 새로운 시작이었다. 그때부터 돋아난 새살과 새 삶으로 나는 더 나은 내가 되어 가고 있다. 그때 만약 내가 내 상처와 스스로 마주하지 못했다면 지금 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이후로 나는 지금도 꾸준히 치료받고 있다. 이제는 예전보다 먹는 약의 용량도 확연히 줄었고, 가끔 그 약을 까먹어도 전처럼 큰 문제를 겪지 않을 정도로 나아지고 있다. 처음엔 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고 생각해서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상처가 나거나 뼈가 부러질 때도 다치는 건 순식간이지만 낫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러니까 내가 6년 동안 방치한 상처가 낫기 위해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줄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다치는 게 무섭지 않다. 내가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내가 다쳤을 때 그 상처를 바로 마주해야 빨리 치료할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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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혼자 힘으로 새 삶과 새 살을 만들어 냈군요. 용기와 노력에 박수를 보내요.
지금의 여유로운 미소를 노래에 담아보면 어때요? 공연 한 번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