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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로 영혼의 새벽을 여는
첫맛과 끝맛을 함께 지닌 수필가 정봉구 교수
최원현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는 어딘가에 샘이 숨어있기 때문이며, 겨울이 아름다운 이유는 봄이 움트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 편의 글을 이루기 위해 작가는 얼마나 많은 마음앓이를 하는가? 그러나 그러한 앓이를 행복이요 즐거움으로 느끼는 작가라면 그보다 더 큰 축복은 없을 것 같다. 거기에 독자가 작품을 찾아 읽어주고 그 작품을 통하여 글쓴 이까지 사랑하게 된다면 작가의 행복감은 하늘에 닿고도 남으리라.
하지만 수필작가에게 있어서 작품은 자신들의 나신(裸身)같은 삶의 이야기이기에 때로는 독자가 한없이 두려워질 때가 있다. 얼마큼 나를 드러내도 되는 것인지, 그러고도 독자에게 아무런 공감조차 주지 못하고 되려 자기를 비하 시키는 결과에 이를 수도 있다는 우려는 수필을 쓰는 이들이면 한번쯤은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글을 쓰면서 항상 염려하고 걱정한 것은 내가 생각하는 사리(事理)의 초점이 독자들로부터 동떨어진 것이 아니기를 희구하는 바람'이라는 고백이 설득력있게 가슴에 와 닿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면에서 수필은 더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내 이야기로써 남(독자)을 감동 시켜야 하고, 내 사리(事理)이면서 독자의 사리에서 동떨어지지 않아야 하는 어려움은 수필을 써보지 않고는 결코 쉽게 이해될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염려와 불안을 말끔히 씻어내고, 읽는 이들의 영혼까지 새벽처럼 맑히는 글을 쓰시는 분이 있으니 곧 불문학자 수필가인 정봉구 교수시다.
'문학을 하나의 꿈이라고 설정할때 작가는 현실에서 경험하는 잡다한 사상(事象)과 현상(現象)을 작품화함으로써 아름다운 꿈을 조각한다'고 하는 정봉구 교수님을 원로 수필가 초대석에서 찾아 뵈었다.
"일제 강점기인 1925년 12월 9일 경기도 화성군 송산면에서 아버지 정재현(鄭載玄), 어머니 김국향(金菊香)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출생후 광복까지의 일제하에선 향리에 살면서 2년간 한문을 수학했고, 보통학교 3년 수학후엔 서울로 옮겨 심상소학교와 고등소학교를 거쳐 공업학교 과정을 졸업 했습니다. 광복 후에는 성균관대학교 예과를 거쳐 48년 불문과에 입학 수학중 6.25동란을 맞아 피난하다가 국민병에 동원되어 복무를 하였지요.
1951년에서 58년까지 고향의 송산중학교 설립에 참여하여 국어와 영어를 가르치는 교사생활을 하다가 다시 성균관대학교 불어불문과에 들어가 61년에 졸업을
했는데 대학원에서 공부를 계속하여 <빅토르 위고 詩의 낭만주의 세계>란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Alain의 행복발견과 정념사상 고찰>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상명여자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상명여자사범대학 불어교육과 교수로 1961년부터 82년까지 재직 했고, 그후로는 숭실대학교 불어불문과 교수로 있다가 91년에 법정 정년을 맞아 퇴임을 하였습니다."
오랜만에 뵈온 정봉구 교수님, 1925년생이시니 일흔 다섯의 연세이신데 정년 후 10년이라는 세월의 의미가 좀처럼 이해되지 않을만큼 정교수님은 오히려 젊은 우리보다도 더 넘치는 젊음을 보이셨다. 평생을 강단에 서서 말을 하며 살아오셨으면서도 원래 재미있게 말 잘하는 재주가 없어 미안하다고 하시는 교수님께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냐고 했더니 " 퇴임후 숭실대학교 특별대우 강사로 4년을 있었고, 현재는 덕성여자대학교 평생교육원, M.B.C.문화센터, 신촌 현대백화점 및 반포타운의 현대문화센터, 도봉구 문화예술강좌 등 수필창작교실에서 창작지도를 하고 있다"고 하신다.
아마 정년 후로도 쉬지 않고 후학들을 위해 동분서주 하신 것이 저처럼 건강과 젊음을 함께 유지 하시는 비결인 것 같다.
교수님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면서 말씀을 들으면서 마치 고향 강가 포구에서 다가오는 나룻배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편안해 지는 것도 강의로 평생을 사신 것이 그대로 배여 있으심이 아닐까.
교수님께선 1950년에 초등학교 교사직에 있던 파평(坡平) 윤씨인 윤경의(尹庚義)와 결혼하여 2남 2녀를 두셨고, 손자도 셋이나 있으시다는데 고향은 씨족부락이어서 지금도 4촌 일가를 비롯하여 많은 친척들이 살고 있으며, 가까운 경기도 화성이라 때맞춰 성묘도 가고, 시제에도 참석하는 등 고향 나들이를 자주 하는 편이시란다.
고향에 대한 특별한 추억이 있으시냐고 하자 "광복후(49년) 면민의 호응을 얻어 몇 몇 유지들과 고향 땅에 처음으로 중학교를 설립하고 무보수 교사로 근무하며 학생들과 면소유지 산에 학교 터를 닦고 흙벽돌을 직접 만들어 교사 건물을 짓고 학교를 이룩해 냈던 일"이라고 하셨다. 교수님께서 떠나오신 후로 학교는 더 발전하여 고등학교까지 설립 되어 오늘에 이르렀는데 지금의 송산중학교 교가도 창립 당시 교수님께서 작사하셨던 시(詩)라고 한다.
정교수님은 하룻길도 되지 않는 가까운 곳에 고향을 두고 있으시지만 고향에 대한 애정과 기억들이 유난하신 것 같다. L교수로부터 받은 '한촌모설'(寒村暮雪)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40살의 부채를 펴게 되면 고향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는 수필 '부채의 향수'에는 한 폭의 고향 풍경이 눈에 보이듯 그려진다.
'병풍인 양 버티고 서있는 뒷산을 등지고 하얀 눈에 덮인 두 채의 집이 거의 파묻히다시피 보일락말락 하고, 뜰 마당에 가려진 노적가리는 숫제 눈더미인가 싶은데 물지게를 지고 가는 촌부(村夫)의 모습이 이 쓸쓸한 마을의 생명을 상징하는 양 싶었다.'
그만큼 정교수님은 고향을 사랑하는 분이시다. 그렇기에 그의 호(號)까지도 고향인 남양(南陽)의 '南'과 사강(沙江)의 '沙'를 따서 '南沙'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겠는가.
교수님은 광복후 문학동인인 <백맥(白脈)>에 가담하면서 처음엔 시를 쓰셨다고 한다. 문학 습작은 일제시 문학서들에 빠지게 되면서였으며, 본격적으로 수필을 쓰기 시작한 것은 70년대에 수필동인 <現代隨筆>에 동참하면서인데 공덕룡, 서정범, 박연구, 윤재천, 이기진 등이 그 동인으로 동인지 <현대수필>을 5집까지 내셨단다. 그러나 정교수님이 특별히 문학적으로 영향을 받았던 것은 프랑스 철학자 Alain의 어록(語錄)으로써 그것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도 썼고, 번역도 하셨다고 한다.
정교수님의 수필엔 삶이 그대로 내재한다. 첫 수필집의 제목이기도 한 <크로바의 回想>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학생의 신분으로 매일 오후 네시에 어김없이 찾아와 조용한 미소와 네잎짜리 크로바를 들고 문병 해준 정성에 힘입어 병이 쾌차하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부부의 연을 맺었던 일을 회상한 내용이다. 아내가 되고, 10여년이 흘러 네 아이의 엄마가 된 그 때의 소녀가 가져다 준 네 잎 크로바를 가장 즐겨 읽는 책의 갈피에서 발견할 때마다 지난 날을 회억(回憶)하는 마음처럼 삶을 그대로 수필화하는 진솔함 속에 인간의 애정 감정이나 자기 갈등 속에서 찾아보려는 생활의 메아리들을 특별히 기억해 두고 싶은 일이나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들과 잘 조화시켜 수필의 문학성을 지키려 하고있다.
그래서일까. 살아오면서 특별히 기억 되는 행복했던 순간이나 추억 되시는 일이 있으시냐고 했더니 문학동인 모임에 동참 했을 때와 처음으로 작품이 발표되던 때, 그리고 첫 수필집 <크로바의 회상>을 냈을 때, 문학상 그러니까 번역문학상(1987)과 한국수필문학상(1994)을 받았을 때 등이 특별히 기뻤고, 하나 더 든다면 프랑스 정부의 초청으로 프랑스에서 긴 기간은 아니지만 <프랑스어 교육을 위한 연수>를 위해 빠리에 체류하며 수학했던 일 등이 잊혀지지 않는 일들이라고 말씀 하신다.
일생을 살아오며 기쁘고 즐거운 일, 괴롭고 안타까운 일이 한 둘이겠는가만 정교수님의 삶속에서 특별한 기억으로 자리잡은 것들은 모두 문학에 관련된 것들인 것은 그만큼 문학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지극하단 얘기일 것이다.
정교수님은 불문학자시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불문학을 전공하셨고, 1965년 이래 대학 강단에서 줄곧 불문학을 강의 하셨다. 뿐아니라 '세계문학전집'(1969.을유문화사)의 <砲火>(앙리 바르뷔스 작)를 시작으로 수많은 번역서를 내었으며, 불어불문학회 회장을 맡는 등 불문학계를 선도해 오신 분이다. 그런 정교수님은 프랑스 문학 속의 수필과 우리 수필과의 차이, 그리고 우리 수필이 지향해 가야 할 목표 같은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 하실까?
"차이라고 하면 프랑스의 에쎄(Essais)는 주로 인성 비평의 글로 주지주의(主知主義)적 경향이 현저하고, 우리 수필은 대체로 정감적인 주정주의(主情主義)적 정서 경향이라 할 수 있겠지요. 우리 수필도 이제 어떤 틀에 매이지 말고 다양한 연구로 깊은 성찰과 성실한 자아탐구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격에 벗어난 잡문 내지는 넉두리가 되면 안됩니다."
< 수필과 비평>지에 20회가 넘게 연재중인 '프랑스문학 회상' 속에서도 그런 전문가다운 모습을 쉽게 느낄 수가 있다. 그러나 정교수님의 작품이 그렇다고 모두 서구적인 경향만이라는 것은 아니다. 고향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것처럼 순수한 우리의 것, 우리 삶쪽에 더 큰 비중을 두신다. 그래서 정교수님이 자선하신 대표작 5편도 그런 교수님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 같았다.
'대표작을 선정 한다는 것이 수필마다 창작 의도나 주제 설정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얼른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수필집 <우리의 행위는 우리를 뒤따른다>에 있는 '축제 거리에서 산 장미'와 <첫맛과 끝맛>에 들어있는 '첫맛과 끝맛', '백발과 대머리', 그리고 <영혼의 새벽>에 들어있는 '서울의 아침을 뛰면서'를 들 수 있고, 최근작인 '환상 속에서 쓰다만 소설'은 현재 심정의 고백을 쓴 것이어서 함께 넣고 싶습니다.'
문학 속에서 수필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에 대해서도 교수님은
'상품 가치로서의 비중은 타 장르보다 떨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필은 교양인의 문학이며 문학을 굽어보는 문학이라고 봅니다. 수필가는 전업적인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설령 수필에 전적으로 매이고 있다해도 수필의 위상은 항상 초연하다고 봅니다.' 라고 말씀 하신다.
정교수님은 독자의 상상력을 확인시킬 수 있는 글을 쓰시기 위해 남달리 애를 많이 쓰시는 분이셨다. 생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가 글을 읽는 기쁨 보다는 글을 생각하는 고통 속에서 수필을 쓰면서 열병을 앓는다고 하셨다. 그것은 독자를 위해 정말 글다운 글, 수필다운 수필을 낳고 싶은 산모의 심정이 아닐 수 없다. 해서 글의 배열과 언어의 정련(精鍊)을 위하여 수없이 고심하고 '천형(天刑)같이 무섭고 힘든 작업'이 될 지라도 감내하는 것이리라. 뿐아니라 준엄한 삶의 굴레 속에서 안타까운 의혹의 고뇌를 짓씹는 한창 때의 젊음을 아쉬워 하면서 꿈의 조각들을 통해 진정한 삶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헝클어진 꿈의 조각들 속에서 새롭게 스스로를 찾아보려 시도(試圖)를 하기도 했다는 정교수님은 수필 속에서 성실한 생활과 생각으로 생각의 깊이를 더해가도록 스스로 다짐하곤 한다고 하셨다.
수필!, 21세기는 장문이 아닌 단문의 시대 곧 '수필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 수필이 문학 속에서 진정한 위상을 확보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정교수님이 염려하고 추구하고 바램하는 것처럼 역량있는 작가가 많이 나와서 뛰
어난 좋은 수필을 써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정교수님이 생각 하시는 좋은 수필이란 어떤 것일까?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 정교수님은 상당히 조심스런 대답을 주셨다.
" 한 마디로 결정하기 어렵습니다. 각 분야에 걸쳐 다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작가의 정신이 진지하게 성실히 배여있는 작품이 좋은 글이라 생각 됩니다."
그러면 정교수님은 스스로의 문학세계를 어떻게 평하실까?
" 스스로 내세울만큼 자신을 도도하게 자부하지 못합니다. 대학에서 공부하고 또 강단에서 강의한 프랑스 문학에 바탕을 두며 자신이 살아온 또 살려고 희구하는 것의 의미를 추구하는 형태의 시각 곧 인간실존의 의미 추구를 위한 탐색자의 성찰이라고나 할까요? 약간은 지적이고 동화적인 씨니즘 다시 말해서 자아실현의 이상 추구라 해두고 싶군요."
작가라면 누구나 자기만의 문학세계를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필가에겐 어쩌면 자기의 문학세계를 독자와 공유하지 않으면 안될 운명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창작의 세계만일 수 없는 수필의 세계, 그렇기에 더더욱 글쓰기의 근본이 확실히 갖춰져 있는 수필이 아니면 수필다운 수필이 될 수 없다는 것인가. 정교수님은 수필문학 발전을 위해, 그리고 수필을 쓰고, 또 쓰고자 하는 분들을 위하여 한 말씀을 곁들여 주신다.
" 무엇보다도 정확한 문장법을 지키고 엄격한 수사법(修辭法)에 의하여 글을 쓰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본적인 어문(語文)수련을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글의 내용이 어떠하건 문장법의 기본이 되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1945년 조국 광복의 열광을 안고 모인 청년작가들이 동인을 결성하고 동인지 <白脈>을 통해 그들과 교류하며 문학활동을 시작했던 정교수님, 그때는 시인으로 문단에 참여하며 창작시들을 발표 했는데 K.B.S. 라디오 방송프로인 <시낭송.꽃다발>(매주 수요일)에 여러 편의 시를 발표 했었으며, 그때 동인으로 구경서, 김윤성, 정한모, 조남사 등이 함께 활동했던 대표적인 분들이시란다.
수필집도 여러 권을 내셨다. 74년에 첫 수필집 <크로바의 회상>을 냈었고, 85년에 <영혼의 새벽>, 90년에 <우리의 행위는 우리를 뒤따른다>를, 95년에 네번째의 수필집 <첫맛과 끝맛>을 냈으며, 96년엔 그간의 수필창작 강의 내용을 모아 <새로운 에세이 작법>이란 창작 이론서까지 내셔서 수필을 공부하는 수필학도들이나 가르치는 강의 교재로도 많이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문학단체 활동으로는 81년부터 수필문우회에 참여하고 계시며, 한국불어불문학회 이사, 감사 및 회장을 역임 하셨고, 현재 한국수필문학진흥회 부회장, 한국문인협회 및 국제펜클럽 회원으로 활동 중이시다.
마지막으로 우리 수필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바람직한 비평이 따라야 된다고 생각되어 견해를 여쭤 보았다.
" 수필 비평은 작품으로서의 내용과 형식을 고루 분석 비평하며 장점과 문제점, 결점 등을 뚜렷한 기준에 의하여 제시하고 언급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작가에게 낙담과 좌절을 주기 보다는 희망과 의욕을 주도록 방향감을 줄 수 있는 비평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것이다. 특히 수필 비평은 작자의 인격비평이 될 수 있으므로 더더욱 조심스럽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비평은 발전적인 방향성을 제시해 주는 것보다 더 큰 역할은 없다고 본다. 희망과 의욕의 방향감을 주는 비평이야말로 바람직한 비평이 아니겠는가.
꽤 오랜 시간동안 말씀을 나누었지만 궁금한 것이 아직도 많고, 또 듣고싶은 말씀은 끝이 없다. 하지만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수필문우회 합평회가 있는 날이란다. 아쉬움 가득 교수님과 헤어져 나오면서 교수님의 수필 '첫맛과 끝맛'의 한 부분을 생각했다.
'정말로 삶의 맛을 터득한다는 것은 이미 삶을 다한 사람의 경지인 듯도 하여 차라리 물인지 불인지 모르고 지내는 편이 더 좋을성 싶기도 하다. 그래서 항상 사람은 모순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닐까. 꿈이니, 사랑이니, 행복이니, 끊임없이 되뇌이며 엄청난 목표를 세워놓고 그 요원한 이상을 향하여 의연한 척 했지만 그 역시 안과 겉의 차이일뿐 이것은 첫맛이요, 저것은 끝맛이요, 가려 보며 생각해 보지만 삶의 시초와 종결이 그렇게 정연히 갈라질 수도 없는 일, 크게 내닫는 사람, 또는 초연한 사람을 그리며 산다.'
정봉구 교수님의 그리움, 그것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그리움이 아닐까. 어차피 글쓰기란 그리움을 문자로 구체화 시키는 작업일 것이다. 그러나 첫맛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끝맛을 인정치 않으려 하고, 더러는 첫맛을 아예 인정조차 않은 채 분수에도 맞지않은 끝맛의 욕심에 부풀어 있기도 한데 정교수님의 수필을 읽고 정교수님을 뵈오면서 느끼는 것은 나다운 내 맛, 나만의 내 맛에 막중한 책임과 의무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맛은 곧 멋이 아닌가. 맛과 멋을 잘 내는 사람이 멋진 사람일텐데 정교수님이야말로 첫맛과 끝맛을 감칠맛으로 지닌 멋진 분이심을 깨닫게 된다. 귀한 만남 속에서 주신 소중한 말씀들은 수필을 사랑하고 수필을 쓰는 모든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저만치 수필문우회의 문우들을 만나기 위하여 총총이 떠나 가시는 등 뒤로 후광처럼 오후의 햇살이 숨죽이며 따라붙고 있다.
< 수필과 비평> 1999. 1.2월호
남사 정봉구(南沙 鄭鳳九) 선생은 1925년 12월 9일 경기도 화성군 송산면에서 정재현∙김국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불치의 위암 진단을 받은 후 투병을 하시다 2022년 8월 25일 우리 곁을 떠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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