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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 배달겨레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고 고유한 글자를 창조하였고, 어느 나라 사람보다도 먼저 활자도 발명하여, 우리 자손 만대의 복지 사회 건설은 물론 세계 문화 건설에 이바지하도록 은혜 받은 자랑스런 겨레다.
2. 우리는 하루라도 빨리 1) 조국 현대화를 완수하기 위해서
다음 세 가지 목표를 향해 대학생으로서 가능한 우리의 모든 힘을 동원하여, 대학 안에서부터 대학 밖으로, 나로부터 이웃으로, 나아가 정부 당국으로 하여금 한글전용의 법제화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될 때까지, 조국 현대화의 대열에 참가한 온 국민의 이해와 협조를 촉구하고자 한다.
[ 3대 목표 ] 1967년 3월 16일
국어운동대학생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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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병우 타자기로 찍은 이 선언문을 서울대 이봉원군으로부터 받아서 학교 교정에서 학우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함께 모임을 만들자고 호소했다. 종교 포교하듯이...
그런데 어려움이 생겼다. 학교에 동아리로 등록을 하고 활동을 해야 하는데 지도교수 두 분을 모셔야 한다고 했다. 다른 모임은 지도교수가 한 분인데 우리만 그랬다. 방해하는 세력이 있는 거로 보였다. 그런데 그 때 교수들은 거의 일본 식민지 교육으로 일본식 한자혼용에 길들어서 마땅한 분을 찾기 힘들었다. 김성배 교수님께 부탁드렸는데 학교 분위기가 한자를 좋아하는 이들이 많아서인지 선뜻 나서지 못하셨다. 빨리 등록을 하고 다른 학교와 함께 한글날에 행사하기로 했는데 등록을 안 하면 불법단체가 되어 앞으로 할 수가 없고 계속 활동을 할 수 없기에 걱정스러웠다.
결국 한글날 전에 학교에 등록을 못하고 다른 학교와 함께 하는 한글날 행사에도 학교 이름을 걸고 참여하지 못했다. 그 때 한글날에 고려대에서 모여 정부에 한글전용 성명서를 발표하기로 했는데 서울대 국어운동대학생회도 학교에서 승낙을 안 해서 성명서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고 우리 학교도 나만 개인으로 참여했었다. 정부에서도 불법행사라고 경찰이 막아서 그 행사도 제대로 못했다. 그런데 한글날이 지난 뒤 우리 학교 신문에 한글로만 글을 쓴 교수님이 있었다. 불교대 한상련 교수님이었다. 난 그 글을 보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난 바로 한 교수님 연구실을 찾아서 “나라사랑, 한글사랑 뜻을 펴려고 모임을 만들었는데 학생과에서 지도교수를 두 분을 모시라고 해 공식 활동을 못하고 있습니다. 다른 모임은 지도교수가 한 분인데 우리 활동을 막으려고 그러는 거 같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리니 “무슨 말이냐! 우리 학교는 호국 불교가 건학정신이다. 나라를 위하는 일을 하겠다는데 누가 막느냐! 우리 학교 1회 선배인 만해 스님도 한글을 사랑한 분이다. 나는 국어 전공은 아니지만 내 이름이 쓸모가 있다면 나를 지도교수로 올리고 학교에 등록을 하라.”고 바로 승낙하셨다. 참으로 고맙고 기뻤다.
한글날에 고대 연대 서울대 국어운동학생회들이 함께 발표한 건의문.
그 때 지도 교수님을 맡아주신 김성배, 한상련 교수님이 고맙다. 김성배 교수님은 내 혼인 주례를 맡았을 때 주례사에서 “이 젊은이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라고 하신 것이 지금도 생생하고 이 말씀이 내게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회원 모집에 앞장선 농어촌연구부 후배인 국문과 김윤진, 행정과 정문환 후배가 고맙고, 함께 애쓴 학교 동기 국문과 김범열, 후배 오출세와 박연백 후배를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모임을 만드는 데 농어촌연구부 뜻벗들이 많이 도와 주었기에 모임을 쉽게 만들고 어느 학교보다도 우리학교가 활발하게 활동을 하게 된다.
3.9.4. 동국대학교 국어운동대학생회 창립 선언문
“국어운동은 겨레운동이어야 한다”
우리는 일찍이, 세계에서 가장 좋은 글자, 한글을 세종대왕이 애써 만들어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조용히 한글에 대해, 국어에 대해, 생각해봐야 하게 되었다. 제대로 살려서 쓰지 않기 때문이다. 이건 잘못이고 모순이다.
우리 모두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글자라고 하면서도 한글을 푸대접하고 돌보려하지 않고 있으며 우리의 고유한 말은 잡다한 외국어가 뒤섞여서 주객을 분간 못할 정도가 되고 있다. 우리 민족이 또 동양이 서양에 비해 여러 면에서 뒤떨어진 것은 한자를 쓴 탓이라고 하면서도 한글보다 한자를 더 좋아하고 더욱더 한자를 쓰려고 한다.
우리의 자주, 주체성과 민족성은 희미해지고 남의 것을 흉내 내고 남을 따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더 즐기고 있다. 아마도 이 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여러 면에서 뒤떨어지고 다른 나라에 예속되기를 바라는 이 나라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는 것이 다른 나라에 뒤떨어지고 다른 나라에 예속되는 것인지 알아 고치려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한일회담 체결 때 많은 사람들이 민족 주체성을 강조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 주체성을 지금 어디서 얼마나 찾아 볼 수 있는가. 우리는 지난날의 치욕을 즐기는 사람은 아니다.
우리나라가 왜 몽골 원나라에 짓밟히고 시달렸으며, 중국 영양아래 살았고, 일본에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겼는지 생각해보자. 그 때 누가 그렇게 되길 바랐겠는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그랬을 것이다. 미리 그렇게 될 근본 원인을 찾고 그 문제 고치는 것을 꺼리고 주저했기 때문이다. 그 이름 하여 사대주의 사상이 우리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든 가장 큰 원인이다.
나는 생각한다. 지금 우리의 위치를 조금만 살피자. 자세히 살피면 비관하고 자살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류가 가장 싫어하는 위험 속에 들어있다. 전쟁을 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것도 동족끼리 싸우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외국의 원조 없이 살 수 없는 형편이다. 지금 우리는 우리 이웃 중국과 소련, 일본과 당당하게 맞설 수 없는 형편이다.
만약에 옛날처럼 그들이 우리를 간섭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막아낼 수 없다. 우리 사는 형편을 보자. 맛이 좋은 것 찾아 먹는 것은 그만두고 배나 채울 수 있는가? 우리는 외국 책이나 번역하고 외국어나 배우다 세월을 다보내고 판이 끝난다. 외국어나 배우고 그것을 번역하여 읽기나 하고 새로운 제 나름대로 연구한 게 하나도 없이 무슨 학자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 모두 하루나도 빨리 각성하여 메마른 우리를 살찌게 하고 힘 있게 하여 어느 나라와도 한판 붙을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썩은 전통이나 개인 고집은 깨끗이 버리고 진정 우리 민족이 살길이 있으면 주저 없이 부지런히 걷지도 말고 뛰어야 한다. 우리 동국대인은 교가에서부터 새 역사를 창조하자고 외친다. 우리는 참된 새 역사의 창조자 개척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말 우리글 사랑하고 널리 퍼트려서 우리 겨레의 살길을 찾고 아울러 인류의 나갈 길을 밝히자. 우리 민족의 살길은 먼저 우리 것을 찾고 키우는데 있다. 우리 것 중에 우리말 우리글을 지키고 닦는 것이 가장 먼저요 으뜸이다. 함께 이 길을 가자.
1967년 10월 이대로 씀
1967년 한글날 고려대에서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국어운동학생회 회원들과 함께 '한글전용 범국민운동 점화식'을 열고, '국민에게 드리는 호소문'과 '대통령과 문교부장관에게 드리는 건의문'을 채택한 뒤, 서울 시내 거리로 나가 가두계몽 행사를 벌이기로 했었다. 그런데 고려대 학생과에서 그 유인물이 경찰의 검토와 허가를 받지 안했다고 못하게 했다. 그 때 우리 동국대학교는 학교에 동아리 등록을 못해서 그 행사에 동국대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개인으로 참석했다. 그 때 조선일보에 서울대 국어운동학생회 이름도 나오지 못했는데 그 학교 학생과에서 국립대학은 교외 행사에 참여해선 안 된다고 했기에 그렇게 되었다.
3.9.5. 521돌 한글날에, 국민들께 올린 호소문 전문
521돌 한글날에 즈음하여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글
오늘은 세종대왕께서 우리 한글을 만들어 반포하신 지 521돌이 되는 날입니다. 한글은 우리 배달겨레 정신문화의 최대 산물인 동시에 세계 온 인류의 글자문화에서 최상의 공탑이기 때문에, 이 날은 우리 겨레만의 경사가 아니요, 세계 모든 문화민이 경하해 마지 않는 기념일인 것입니다.
따라서 뜻깊은 이 날을 맞이하는 우리는 몸가짐을 가다듬어 다시 한 번 '우리 얼을 살리고, 우리말을 다듬고, 우리글을 키우는' 겨레의 지중한 사명을 되새겨야 할 줄 압니다. 그러나 해마다 한글날 기념식에 참석하는 우리의 어두운 표정은 오늘도 밝게 펴질 줄을 모르니 가슴 답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때 우리말과 글을 없애버리려던 외세의 압력에서 해방이 되고, 그 감격으로 탄생한 조국의 품에서도 한글은 아직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우리는 과연 떳떳이 이 날을 반길 수가 있겠습니까?
한자에 매인 우리의 글자생활을 혁신해서 당장 오백여 년의 이 겨레 숙원인 한글전용이 단행된다면, 우리는 비로소 세종대왕의 은덕에 보답할 수 있는 것이요, 한글에 대해서도 제대로 대접을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잠깐 일손을 멈추고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지금 배우고 쓰고 있는 이 한자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경제적 손실과 노력의 낭비를 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그런데 이 손실은 나 하나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 순간 3천만 배로 확대되어 조국의 발전을 저해하지 않습니까?
일상생활에서 한글전용은 한자 교육을 반대하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이미 되어 있는 한문 문헌의 연구와 선대문화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각도에서 한자 교육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자는 어디까지나 외국어란 사실을 잊으시지 않는 한에서 말입니다.
지금 아무런 근거도 없이 오로지 버릴 수 없는 사대주의와 극도의 이기주의 그리고 편협한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국민들의 즉흥적인 감정에 따른 일부 반발은 이제 더 잘 사는 내일을 위해 몸부림치는 조국을 그들이 외면하지 않는 한 곧 사라지리라 믿습니다.
우리보다 더 잘 사는 나라에서도 '지금보다 더 빨리 생각하고, 더 빨리 뛰고, 더 빨리 써야'만 국제 경쟁에서 낙오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우린 언제까지나 조국현대화 푸념만 되풀이해야 하겠습니까?
국민 여러분! 내일 우리가 딛고 설 디딤돌을 갈고 닦음에 여념이 없는 저희 젊은 세대는 다행히도 조국의 새 정책에 의해 한글교육을 받아왔고, 또 그러한 환경에서 자라나 어느 누구보다도 떳떳하게 당장의 한글전용을 외칠 수 있는 자격자이며, 또 그 가능성을 누구보다도 가장 실증할 수 있는 증인이라는 신념에서, 이 호소문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름답고, 쉽고, 과학적이고, 민주적인 우리 한글만 가지고도 어떠한 학문도 문학도 훌륭히 해낼 수 있고, 세계문화 건설에도 자랑스럽게 이바지할 수 있다는 확신에서 또한 이 호소문을 쓰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우리는 또다시 한글날을 맞았습니다. 이 날은 또 하나의 개천절이요, 광복절이요, 제헌절입니다. 그 뜻은 이 겨레에게 새 생명을 주었기 때문이요, 대다수의 동포를 무지로부터 해방했기 때문이요, 비로소 만인평등의 민주주의 바탕이 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나라 4대 국경일 중에서 삼일절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한데 어울린 셈입니다.
국민 여러분! 그러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무엇을 함으로써 제외된 삼일절을 우리의 날로 초대하여 함께 만세를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다름이 아닌 삼일정신을 이어받는 '범국민운동으로 벌이는 한글운동' 바로 그것입니다.
한글운동은 우선 내 이름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름은 아름다운 우리 말로 우리 글로써 짓고 또 써야 하겠습니다.
진정 한글전용 생활화 운동은 이렇게 내 주변 가까이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때는 민원서류는 물론 신문, 잡지, 광고문 등 각종 문서가 모두 한글만으로 씀으로써, 정부의 새 한글 전용법이 제정될 필요도 없이 우리 국민 스스로 글자혁명을 완수해 또 한번 슬기로운 배달겨레의 이름을 온 세계에 떨칠 것입니다. 그 때 우리 진정 웃을 수 있고, 건강할 수 있고 그리고 배부를 수 있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고맙습니다.
1967년 10월 9일
국어운동대학생회
대통령께 드리는 건의문
대통령 각하
저희 국어운동학생회는 제 521돌 한글날에 즈음하여 다음과 같이 건의합니다.
- 건의내용 -
(그 하나)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던 해 10월 9일 법률 제 6호로 제정 공표된 한글전용법 조문에는 "다만 얼마동안 필요한 때는 한자를 병용할 수 있다"는 단서가 붙어있습니다. 그러나 이 단서를 다음과 같은 이유로 당장 삭제해 주실 것을 건의합니다.
첫째: 많은 수를 위하는 진정한 민주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둘째: 조국 현대화를 앞당겨 완수하기 위해서
셋째: 민족문화 발전과 국가의 주체성을 살리기 위해서
넷째: 극심한 국제적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다섯째: 한글전용 정책에 의한 새 민주교육을 받고 자라난 저희 세대는, 한글전용을 생활화하는 데 성공할 수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 둘) 대통령 직함으로 각하의 이름을 쓰실 때는 꼭 한글로만 쓰실 것을 아래와 같은 이유로 건의합니다.
첫째: 더욱 과감한 한글전용법의 제정을 촉진하고, 국민들에게 한글 운동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둘째: 국내외적으로 자주 독립 국가의 위신과 배달겨레의 긍지를 지키기 위해서
(1967. 10. 7.)
국어운동 대학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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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운동 학생회의 취지와 나아갈 길
한 나라의 말과 글은 곧 그 민족의 문화요, 생명입니다.
그들이 말은 바 사명을 다하고 있을 때 문화의 꽃을 피울 수 있고, 잘 사는 나라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우리 고유의 말이 있고 이를 표현할 수 있는 훌륭한 글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좀더 쉽고, 좀더 깨끗하고, 좀더 아름답게 갈고 닦아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 말 내 글을 소중히 여길 줄 몰랐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엄연히 우리 말, 우리 글이면 서도 남의 것처럼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한글은 창제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수많은 고난을 겪어 왔습니다. 이른바 '진서'에 눌려 언문이라 천대받으며 기를 펴지 못하고 아녀자들의 손에 의해 겨우겨우 명맥을 이어 왔습니다. 구한말이래 몇몇 선구자들의 각성으로 조금 빛을 보는 듯 하다가, 한때 우리 문화를 송두리째 없애 버리려던 외세의 압력으로 다시 한 번 고난의 역사를 기록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억압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그 감격으로 탄생한 조국은 한글전용을 국가 교육의 근본 방침으로 삼았습니다. 1948년 그 제정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이기주의적 편협한 사고 방식에 젖어 있는 기성세대들은, 자라나는 새 세대와 국민 대다수의 염원을 외면하고 '당분간' 이란 단서를 핑계삼아 이 겨레의 숙원인 한글전용 실시를 무한정 지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한자의 사용은 우리의 자유로운 의사 소통을 방해하고, 대중언론 매체의 혜택에서 대중을 격리시키고, 지식의 보급을 어렵게 하여, 문화는 있으되 일부 특수층 전유의 문화에 머무르게 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대주의 사상에 힘입어 수천 년 동안 뿌리박아 온 한자말, 36년간의 일제 유물로 살아남은 일본말, 만국어란 허울 좋은 가면 속에 흘러 들어온 영어, 이들로 말미암아 우리말은 점점 더 혼탁해지고 있습니다. '밀가루'보다는 '소맥분'을,'이기주의'보다는 '에고이즘'을 써야 유식하다는 비뚤어진 사고방식에 비롯된 것이 라 생각됩니다. 또 냉혹한 사회상을 반영해 주는 듯 부드럽고, 고와야 할 말씨는 점점 더 거칠고, 저속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말 우리 글은 아직도 그 가야 할 바른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가 그렇게 되도록 방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귀로 흘려 버리기엔 너무나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해방 후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온 물질 문명은 정신문화의 근본인 내 말, 내 글의 중요성조차 우리에게서 앗아가 버렸습니다.
물질 문명의 매력은 그의 지나친 숭상을 가져왔고, 그러는 동안 우리는 넋을 잃고, 그의 추종에만 급급했던 나머지, 남의 문화, 남의 사상에 말려들어, 내 것의 소중함을 망각해 버린 것입니다. 지식층은 지식층대로, 대중은 대중대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위치,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잃고 허둥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한 우리 젊은 세대는 우리 말, 우리 얼, 우리 글을 찾자고 부르짖으며 새로운 학생운동의 물결을 일으킨 것입니다.
한글전용은 빼앗긴 우리 글을 되찾고 국어를 정화하여 빼앗긴 우리말을 찾음으로써, 흐려진 우리 얼을 맑게 되살리어, 민족주체성의 확립을 목표로 하는 국어운동이 바로 그것입니다. 단순한 한글전용, 국어정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운동을 범국민운동으로 전개시킴으로서 내 말, 내 글의 바른 길을 찾음은 물론 지나친 개인주의 사랑을 견제하고 그만큼 민족혼을 불어넣자는 것이 국어운동 학생회의 취지며 나아갈 길입니다.
3.9.6. 내 이름을 ‘이대로’라고 바꿀 때 도와준 농촌운동 뜻벗들.
나는 학교에 농촌운동을 하는 모임인 농어촌연구부가 있어 입학식을 하자마자 바로 들어가 열심히 활동을 했다. 입학식을 하고 나니 여러 동아리 선배들이 학과 교실을 돌며 자신들 동아리에 들어오라고 설명했다. 내가 대학에 들어온 것이 국어운동과 농촌운동을 하려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바로 농어촌연구부에 가입했고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활동을 했다. 그 때 그 모임 출신이 우리 학교 총학생회장, 농대 학생회장이었고 그 학교 동아리 가운데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모임이었다. 그 때 학교 밖에도 농촌운동 모임이 있었고 여러 대학생들이 함께 하는 대학4H모임이 있어 여러 대학이 연합해서 행사도 많이 했는데 그 또한 열심히 참여했다.
왼쪽은 학술토론회에서 토론 우수상으로 탄 은컵, 가운데는 과외 교육하던 학생들. 오른쪽은 과외교육지침 적바림.
나는 방학 때에도 고향에 가지 않고 이 애들을 가르치면서 학비를 벌었는데 그렇게 내가 번 돈으로 화신 백화점에 가서 내가 갖고 싶어 하던 양복과 구두와 시계를 사서 기념으로 찍은 것이다. 난 그 때까지 교복도 없었고 구두도 시계도 없었고 남대문시장에서 헌 군복 물들인 옷과 군화를 사 신고 다녔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했는데 그 때 고생이 큰 경험이다.
60년대만 해도 농촌문제 학술토론회와 연수회도 많았는데 중앙대가 개최한 농촌문제 토론회에 참석해 우수 토론상을 탄 것은 잊을 수 없다. 1967년 국어운동학생회를 만들었으나 지도교수를 모시지 못해 학교 동아리로 등록을 못하고 고민하던 때에 그 토론회에 참석해서 “가난과 무지에서 허덕이는 농촌문제를 해결하려면 농민 문맹퇴치와 한글전용 정책과 농산문 생산 원가를 보장하는 정책을 강력하게 펴야 한다. 그래서 스스로 농촌문제를 풀도록 해야 한다.”주장했다. 그 때 국어운동대학생회 모임을 도와주던 국문과 여학생인 김윤진 후배와 함께 갔는데 내 주장이 인정을 받는 것을 보고 더 열심히 활동하고 도와주어서 나도 힘이 났다.
그리고 대학 3학년 때에 농어촌연구부 모임 회보인 학농 4호 편집 책임을 내가 맡았는데 3호까지 한자혼용으로 만들던 것을 한글전용으로 만들었다. 말로만 한글사랑과 한글전용을 외칠 것이 아니라 실천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때 난 아버지가 지어준 한자 이름 ‘李澤魯’를 ‘이대로’라고 한글로 바꾸어 불렀는데 그 이름을 바꿀 때에 농촌운동을 하는 친구들과 의논했고, 그들이 내 이름이 좋다며 불러주었다. 또 그 회보 ‘학농’에 ‘이대로’라는 이름으로 처음 글을 썼다. 내 뜻과 내가 하는 일을 발 벗고 밀어준 농촌운동 뜻벗들을 잊을 수 없다. 나는 농촌운동 모임에서 조직생활을 익혔기에 국어운동학생회도 잘 이끌 수 있었던 것도 고마움이다.
왼쪽은 한자로 쓴 학농 3호, 그 옆은 내가 한글로 만들 4호이고 그 책 163쪽에 ‘이대로’라는 한글이름으로 처음 쓴 글이다. 그 때는 지금처럼 셈틀로 글을 쓸 때가 아니고 등사기로 책을 내기도 하는 때였다.
이 때 농연 동지들은 내가 국어운동대학생회를 만들고 내 스스로 우리 말글로 지은 [이대로]라는 내 이름으로 편지를 보냈습니다. 본래 내 아버지가 지어준 내 이름은 한자이름 [李澤魯 이택로]입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말과 글자가 있으면서 우리 말글로 이름을 짓지도 못하고 안 짓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내 스스로 [이대로]라고 한글로 지어 불렀고 한글이름 짓기 운동을 했습니다.
한글로 이름을 지을 때 나는 농연 동지들에게 "나는 내 식대로, 내 뜻대로 살겠다는 신념과 죽는 날까지 농촌운동과 한글사랑 운동을 하겠다는 두 뜻을 담아 내 이름을 [이대로]라고 바꿔 부르겠다. 한글로 쓰지만 큰 두 길을 가겠다는 내 신념을 담고 죽는 날까지 가겠다는 다짐이다. 이름은 부르기 쉬고 기억하기 쉬워야 하고 내자기의 인생철학이 담겨야 한다. 나는 6남매 맏아들이니 형제들이 쓰는 돌림자 '로'는 붙여 넣었다."라고 말하고 농연 동지들에게 어떤지 물으니 모두 좋다고 했다. 그리고 이들이 그 이름을 불러주었다. 친구들은 내가 툭하면 나라사랑 한글사랑 겨레사랑 농촌사랑 어쩌고 떠드니 앞으로 정치를 하려느냐고도 했다.
아래 찍그림은 내가 서울에 남아서 위 ‘학농’을 편집할 때 충남 아산 이기영 동창 집에 가 있던 이순섭 농연 부장이 내게 원고와 함께 보낸 옆서입니다.
1968년 겨울 방학 때 학교에 남아 학농 편집을 하고 있는 내게 이순섭 부장이 내게 쓴 엽서
이순섭 부장은 나보고 "대로 각하"라고 불렀다. 이기영 친구는 제 이름은 나를 따라서 [이대식]이라고 바꿔서 부르기도 했다. 내가 이름을 바꿀 때 이 뜻벗들과 의논을 했다. 그 때 이들이 좋다고 해서 자신감을 가지고 ‘이대로’란 이름을 썼다. 그 때만 해도 모임에 가서 참석했다는 서명을 하면 모두 한자로 이름을 썼지만 나만 한글로 이름을 썼다. 그러면 옆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며 위 아래로 살펴보았다. 위 엽서에 ‘이대로님’이라고 ‘님’자를 썼는데 그 때만 해도 거의 ‘귀하’라고 했으나 그 한자말을 안 쓰려고 내가 그렇게 쓰니 벗들도 좋다며 따라서 썼다. 참으로 고마운 벗들이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이대로’라는 이름으로 어깨를 펴고 산 것은 이 벗들이 알아주었기 때문이다. 그 때 온양에 사는 이기영군은 제 이름을 ‘이대식’이라고 지어 부르기도 했다. 그는 고향에 내려가 부모님 모시고 과수원과 목장을 한 착실한 벗이다. 그리고 아산군 축협조합장도 했고, 고향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겠다고 국회의원도 출마했는데 떨어지고 마음에 상처를 받아서인지 췌장암에 걸려 일찍 이 땅을 떠났다. 내가 가장 좋아하고 믿었던 뜻벗이고, 가장 착하고 열심히 산 그 친구였는데 참으로 안타깝고 그립다. 나라도 튼튼하게 오래 살면서 그가 못하고 떠난 일까지 다하고 하늘나라에서 반갑게 만나고 싶다.
3.9.7. 국어운동 대학생회 초창기, 1968년 내 일기
1968년 4월 9일. 서울대에 갔다. 또 비가 왔다. 이봉원군을 만나 간단한 현상 문제를 의논하고 공병우타자기회사에 들렀다 헤어졌다. 다음 주 쯤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동국대 4개 대학이 함께 가두 간판 계몽 활동을 하기로 했다. 봉원이 연세대 정중헌 회장에게 연락을 해달라고 부탁한다. 공병우타자기에 타자를 부탁할 선언문 초안을 써달라는 것이었다. 그저께 퇴계로 해성 다방에서 우리 학교 회원 포섭을 위한 만남이 있었고, 또 오늘 명동 근처 방초 다방에서 우리학교 총학생회장에 출마하겠다는 김회창이를 만나서도 국어운동학생회 지원을 부탁했다. 어디서나 직업의식이 나타난다. 할 수 없나보다. 그게 당연한 것이다. 좀 더 힘내고 머리를 써야겠다.
4월 10일. 아침 일찍 집안 일 돌보고 내 학교로 가지 않고 연세 대학으로 직행했다. 물론 수업은 빠졌다. 어떤 일이고 잘 하려면 그 사람의 시간과 돈과 정신력을 요구하고 희생을 강요한다. 나는 나의 희생의 대가를 어디에 바라진 않겠다. 따뜻한 봄날 연세대 교정은 정말 화창했다. 여학생이 우리 학교 에 비해 많았다. 무엇인가 잘 해야겠다는 각오가 섰다. 서울대는
몇 번 갔는데 연대는 처음이다. 연대 정형을 만나지 못했다. 학교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쪽지를 써 놓고 왔다. 그런데 봉원군이 행사에 대한 자세한 의논을 하지 않고 무조건 따르라고 한다. 두고 볼 일이다. 지도 교수 문제와 학교 모임 등록 문제가 머리를 아프게 한다. 나는 내가 좋다고 생각해서 또 믿었기에 하는 고생이다. 나는 잘나지도 않았고 못나지도 않았다. 나는 나대로 살뿐이다. 그래서 나는 이대로 인지도 모른다.
4월 17일. 지난 토요일에는 소공동 대호 다방에서 고대 박노용, 서울대 봉원군과 만나 앞으로 계획을 세웠다. 우리의 앞에는 가지가지 풍랑이 예상되고 있다. 공병우 타자 회사에 다음 행사에 쓸 회칙, 취지문 부탁한 것 받아왔다. 정말로 감사했다. 그분들의 앞날에 행운이 많길 빈다. 다음 주 고대, 연대, 서울대 우리 학교가 만나 간판 계몽과 한글전용 호소할 계획이다. 오늘 우리 학교 회원들 이 모여 김성배 지도교수님 모시고 말씀 듣다. 앞으로 불굴의 투쟁을 다짐했다. 김 교수님께 깊이 감사했다. 오늘 어렵지만 참고 애쓰면 보람을 얻으리라.
4월 27일. 화창한 봄 날씨. 우리 학교와 서울대, 고대 연대 국어웅동학생회는 한글전용 거리 계몽, 한자 간판 바로잡기 운동을 나셨다. 동숭동 서울대에 모여 선언문과 결의문을 채택하고 거리로 나갔다. 세 패로 나누어 버스 안에서, 거리에서, 지하도에서, 다방에서 우리의 호소문과 선언문을 시민들에게 나누어주고 간판 계몽을 했다. 나는 후배들과 광화문 지하도에서 호소문을 나눠주었다. 후배들이 부끄러워했다.
호소문을 나눠줄 때 안 받는 사람들이 있었고 인사하는 사람도 있었다. 옷 잘 입은 사람들이 고자세로 받지 않아서 미웠다. 오늘 행사에 우리 학교가 가장 늦게 갔지만 가장 많이 나가 열심히 해서 흐믓 했다. 우리 학교 윤진이가 홍일점 여학생으로 나가 티브이 인터뷰를 하고 라디오는 내가 했다. 난 학훈단 훈련도 빼먹었고 힘들었지만 보람 있었다. 모레부터 시험인데 공부 할 시간을 빼앗겼다. 그러나 뜻있는 일이기에 후회는 안 한다.
행사를 마치고 한일관에서 식사를 하면서 중앙대 대학원장이시고 한글전용에 앞장서시는 정인섭 박사를 모시고 말씀을 들었다. 우리 학생들이 너무 자랑스럽고 장하다시며 백발이 성성하신데도 뜨겁게 말씀하셨다. 간판 정리는 각 학교별로 나누어 할 것과 한 신문사씩 책임지고 한글전용 촉구 운동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간단한 오락시간을 가졌는데 흥겹게 아리랑 노래까지 부르시며 즐거워 하셨다. 식사 후 정 박사님과 네 학교 대표는 다방에 가서 앞으로 할 일을 얘기했다.
그리고 우리 임원들은 나오다가 한글 간판 단 집을 보고 반가운 인사를 하려 들어가 우리 회지를 주려니 책 팔러 운 줄 알고 처음엔 쌀쌀하게 말도 못 걸게 했다. 정말로 한국의 비극이 거기에도 있었다. 앞으로 더 많은 노력하기로 하고 우리 목적 달성을 빌었다. 대통령께 충무공 동상에 쓴 한자를 한글로 써주길 건의하고자 한다.
5월 2일. 보슬비가 왔다. 비가 와서 그런지 산이 푸르고 세상이 깨끗하다. 기분 좋은 날이다. 어제는 대통령께 한글전용을 해주십사 편지를 썼다. 그런데 오늘 한글전용에 관한 정부 계획을 발표하는 뉴스가 나왔다. 기쁘다. 나는 “그러면 그렇지! 이제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는 구나!”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이제 모든 것이 제대로 될 때가 되는가 보다. 내 머리를 써야 할 때가 오나보다. 나는 꼭 이루어 낼 것이다. 지난달 27일 행사 때 정인섭 박사께서 우리끼리
인사말은 "안녕 하세요"하지 말고 "한글전용"이라고 하자는 말씀까지 하시고 국어운동 노래를 지어 부르자 하셨다. 우리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벅찬 것 같지만 다 될 수 가 있다. 어제 정문환이 자기 과 친구를 소개하면서 우리 모임에 가입하기로 했다고 했다. 고맙다. 지난번 시험 때 김양율과 김경하가 날보고 시험지에 한자를 섞어 썼다고 야단이고, 안교수가 한자를 쓰라고 한다고 불평하면서 범국민운동으로 한글전용을 추진하는 데 교수가 그럴 수 있느냐고 열 냈다. 믿음직스럽고 고맙다. 모임을 잘 이끌어야겠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꿋꿋이 밀고 나가자.
5월 15일. 어제 서울대로 이봉원을 만나러 갔다. 국운회지를 얻기 위해서이다. 봉원이가 입주 가정교사를 하는 집에서 쫓겨나 고향에 다녀온다고 해서 지난 토요일에 만나지 못했다. 고고학과 김 군을 만나 얘기를 들었다. 기분이 우울했다. 필시 그는 국어운동 한다고 바빠서 가정
교사로서 충실하지 못했을 것으로 안다. 애국한다는 것이 개인에게는 피눈물 나는 일이다. 그 대가를 언제 어디서 보상받을 수 있을까. 힘을 내자고 다짐한다. 그저께는 문화방송에서 서울대 고운이름 뽑기 심사평에 대한 좌담이 나왔는데 이봉원은 없었다. 그래서 그가 가정교사를 하는 집에 전화하니 없다고 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내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 같다.
5월 18일. 국어운동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절대로 보통 노력으로 될 일이 아니다. 무서운 각오와 의지, 그것만이 날 성공시키고 세상을 좋게 만들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모임에 철저하고 모든 사람에게 친절히 하라. 너그러워라. 조그만 것에 집착하지 말라.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죽지 않을 것이다. 나는 보통사람처럼 움직여선 안 되겠다. 좀 더 활발하게 앞을 내다보며 아무 거침없이 시원스럽게 살아야겠다. 남다른 노력, 피나는 투쟁만 있을 뿐이다. 나는 각오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눈앞의 작은 일에 관심을 쏟지 않고 더 넓게 보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피땀을 아끼지 않겠다고 ... 내 각오가 얼마나 갈지는 의문이다.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3.9.8. 고마운 한상련 지도교수님
1967년 내가 동국대학교에 국어운동대학생회를 조직하고 학생과에 동아리 등록을 하려니 지도교수를 모시지 않으면 등록을 해줄 수 없다고 했다. 한글날에 다른 학교와 합동으로 한글전용 선언식을 하려고 했기에 답답했다. 그 때만 해도 교수들은 거의 한글전용을 반대하는 일본 식민지 지식인이라 어떤 분을 모셔야 할지 걱정을 하고 있는데 국문과 김윤진, 오출세 후배가 김성배 교수님이 강의시간에 한글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해서 찾아뵙고 말씀을 드렸더니 교양학부장이란 교직을 맡고 있어서 어렵다고 했다.
그래서 고대 박노용군이 앞장서서 시행하는 한글날 행사에 우리 학교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나 혼자 개인으로 참여했다. 학교에서 등록을 안 하고 외부 활동을 하면 불법단체가 되어 다음에도 등록을 안 해주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 때 이완용의 손자라는 국문과 이병주 교수와 불교과 교수들이 한글전용을 찬성하지 않는 학교 분위기여서 학생과에서도 우리 모임을 탐탁하게 보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농촌운동 윤천영 선배가 학생과장과도 가깝게 지내기에 학생과에 잘 말해달라고 부탁도 했으나 안 되었다.
그렇게 한글날이 지나고 고민하던 때 학교 신문에 한글로만 논단을 쓰신 분이 있었다. 불교대학 한상련 교수님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연구실로 찾아가 지도교수님을 모시지 못해 공식 활동을 못하고 있으니 지도교수님을 맡아달라고 말씀을 드렸다. 내 말을 들은 교수님은 “우리 동국대는 호국불교 정신으로 설립한 대학이다. 또 한글을 사랑하는 만해 한용운 선배 정신이 흐르는 대학이다. 누가 나라와 겨레를 위하는 모임 활동을 방해한단 말이냐! 나는 국문학 전공은 아니지만 내 이름이 필요하면 지도교수로 등록을 하라.”며 쾌히 도장을 찍어주셨다. 참으로 고맙고 날아갈 듯 기뻤다.
그래서 한 교수님을 모시고 바로 창립총회를 열고 다른 어떤 학교보다도 더 열심히 활동을 했다. 마침내 정부가 우리 학생들 소리를 듣고 한글전용 정책을 펴기로 발표하는 것을 본 한 교수님도 기뻐하셨다. 내가 졸업한 뒤 군에 입대해서 바로 한 교수님께 고마운 인사편지를 했더니 바로 답장을 해주셨다. 참으로 고맙고 훌륭한 분이다. 내가 졸업을 한 뒤 우리 학교 모임 지도교수님은 김성배 교수님이 맡아주셨기에 뵐 기회가 없어 오랫동안 인사도 못했는데 수십 년 뒤 일간 신문에 돌아가셨다는 보도 기사가 난 것을 보고 빈소가 있는 원호병원에 갔더니 애국 단체 화환이 가득했다. 아마 한 교수님이나 그 부모님이 독립유공자였던 거 같다.
3.9.10. 대학은 뜻을 영글게 하고 펴는 곳
나는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부터 대학은 안 가기로 아버지와 약속을 했기에 정말 대학에 가려고도 안 했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내가 대학에 가서 국어운동과 농촌운동을 해야겠다고 다짐했기에 그 일을 하려고 억지로 대학에 들어갔다. 내게 대학은 대학에서 지식을 배우는 것보다 그 내 뜻을 영글게 하고 실천하는 곳이었다. 대학생은 다 큰 사람이다. 나는 성인으로서 뜻이 같고 통하는 뜻벗(동지)을 찾고 함께 뜻을 이룩할 길을 만드는 곳이었다. 그러니 어린 애처럼 부모에 의지하고 제 형편을 불행하게 생각할 때도 아니고 처지도 아니다. 스스로 제 앞길을 개척하고 열어가야 한다.
내 고등학교 동창이고 같은 대학 같은 학과에 다는 한 벗은 일류대학에 못간 것을 아쉬워하면서 만족하지 못했지만 나는 대학에 들어갔다는 것만 해도 좋았고 만족스러웠다. 지금 그 때 일기나 글을 읽어봐도 나는 그 때 다 컸으며 그 때 생각과 뜻이 정확하고 분명했다. 다만 내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계속 대학을 다닐 수 있을까가 걱정이었다. 그래서 무서운 것도 없었고 힘든 줄도 모르고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모임 활동을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활동을 했다. 그래서 지금도 학교에 불만이 없고 그 때 최선을 다한 활동이 자랑스럽다. 그래서인지 친구들도 나를 별난 사람이라면서 오히려 나를 부러워하고 알아주고 도와주고 따라주기도 했다. 친구가 과외 공부할 초등학생들을 모아준 것도 그 하나다. 나는 살아오면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을 여러 번 느끼고 체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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