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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 묘역 문화재 등재 기념 특집 인천교구 주보 제2179호(2012. 2. 12), 제2180호(2012. 2. 19)에서 발췌 |
인천교구에서는 남동구 장수동 반주골에 위치한 한국 천주교회의 첫 세례자 이승훈 베드로 선조 묘역의 역사적 가치를 더욱 확산시키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문화재청에 문화재 지정 신청을 하였습니다. 이에 이승훈 묘역이 문화재로 지정됨을 경축하며 [이승훈 묘역 문화재 등재 기념 특집]을 3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 세례명 : 베드로 |
이승훈은 한국 최초의 영세자이며, 한국 천주교회 창설자 중의 한 사람이다. 인천 장수동은 이승훈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된 후 안장된 곳이며 이곳에는 아들 신규와 택규의 묘가 함께 있다 . 1981년 11월 28일 이승훈 묘가 개복되어 유해는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으로 옮겨졌고 나머지 부분은 반주골에 남아있다. 이승훈은 아버지 이동욱과, 당대의 대표적인 유학자였던 이가환의 누이인 어머니 이씨와의 사이의 장남으로, 1756년, 서울 반석방(현 중림동)에서 태어났다. 다산 정약용의 매부이기도한 이승훈은, 1780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던 중, 이벽과 사귀게 되어 이벽으로 부터 천주교를 배웠다. 1783년, 이승훈은 동지사 겸 사은정사 황인점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가는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가게 되었다. 이 여행 결정에는, 당시 남인 학자들 중에서도 가장 열렬히 천주교를 연구하던 이벽, 정약종, 정약용등의 주선에 의한 것이니, 세계 천주교회사상 유례가 없는 이 민족적 자진 귀의의 특사로서 이승훈은 이해 10월 14일 서울을 떠나 12월 21일 북경에 도착하였다. 이승훈은 북경에 머무른 40여 일 동안, 북당천주교회에서 예수회 신부님들로부터 교리를 배운 후 그라몽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는데, 조선교회의 주춧돌이 되라는 뜻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고, 한국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다. 1784년 3월 24일, 이승훈은 천주실의등 수십 종의 교리서와 십자고상, 묵주, 상본등을 갖고 귀국하여 오로지 천주교 교리 연구에 몰두하였다. 음력 9월경, 이승훈은 드디어 수표교(현 청계천 3가에 있었음)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벽에게 세례자 요한이란 세례명으로 세례를 주고, 그와 함께 복음 전파에 나섰으며 중인 계급에게도 전교하고 세례를 주었다. 이승훈이 1789년 말까지 전교 영세시킨 교우 수는 무려 1000명을 헤아린다는 것이, 북당 선교사들에게 보고한 이승훈 자신의 서한에 잘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탄생한 조선 교회는, 이승훈을 추대하여 교중영수(敎中領袖)로 삼고, 그를 중심으로 다양한 교회 활동을 전개하였다. 1801년 신유교난이 일어난 2월,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 등 사학의 원흉으로 의금부에 구금되어 6차의 신문을 받고, 이승훈은 정약종, 최필공, 최창현 등과 함께 서울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시신은 자택으로 옮겨진 후 선영산이 있는 이곳 인천 만수동 반주골로 옮겨 묻히게 되었다. 이승훈 묘역 문화재 등재 추진 과정 인천교구에서는 남동구 장수동 반주골에 위치한 한국 천주교회의 첫 세례자 이승훈 베드로 선조 묘역의 역사적 가치를 더욱 확산시키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문화재청에 문화재 지정 신청을 하였습니다. 이에 이승훈 묘역이 문화재로 지정됨을 경축하며 [이승훈 묘역 문화재 등재 기념 특집]을 3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인천광역시 남동구 장수동 산 132-1번지 일대의 이승훈 성현의 묘역은 1979년 인천 교구가 경성구 천주교회로부터 증여를 받아 취득하였다. 이후 교구에서는 이승훈 성현의 묘역을 정비하기 위하여, 1988년 남동구청과 건설부의 정비작업에 대한 허가를 얻으려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관계 법령에 따라 그 뜻을 이루기가 어려웠다. 1997년 좀 더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묘역 정비에 관한 자료를 준비하고 그 계획서를 작성하여 남동구청에 제출하였고, 1998년 정비 계획에 대한 승인을 얻었다. 이에 교구에서는 동년 3월부터 5월까지 약 3개월간 정비작업을 진행하였고, 지금의 묘역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정비작업 이후 이승훈 성현의 묘역 문화재 지정에 대한 의견이 대두하였고, 1999년 교구에서는 인천광역시 문화 관광국에 이승훈 성현의 묘역 문화재 지정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1981년 이승훈 성현의 유해가 천진암으로 옮겨지면서 장수동 묘역은 유해가 존재하지 않는 초성 묘에 불과하다고 판단되었고, 이에 문화 관광국은 묘역을 문화재로 지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며 결국 현지조사도 시작하지 않은 채 기각되었다. 2011년 우리 교구는 이승훈 성현의 묘역 성역화를 위한 작업에 재착수하였다. 문화재 지정 처리 절차(재착수) ① 1차 신청(2011.5) ② 2차 신청 (2011.8) ③ 문화재 심의 대상 공고 : 2011.11.17 성현 이승훈의 묘역은 비록 유해 일부만 천진암으로 옮겨졌을 뿐 그 잔뼈와 진토가 묻혀있는 거룩한 장소이다. 우리 인천 교구는 이승훈 성현이 묻혀있는 묘지를 순교자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으로 변함없이 참배하며 성지로 여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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