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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사도직 책임수녀님으로부터 부탁받아 작성한 글을 발표 일주일 전이지만 미리 보실 수 있도록 여기에 올립니다. 발표시간의 제약 때문에 자세한 근거를 제사해야 하는 경우에 각주를 달았는데, 복사해서 옮겨놓으니 이 '다음 사이트의 까페' 환경에서는 각주가 빠지는군요.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평화사도직 모임; 2019.10.19.(토); 이기우 신부
1. 동양평화론
1.1.요지
‘동양평화론’은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의거 후 죽기 전에 남긴 글이다.
"한국ㆍ청국 그리고 일본은 세계에서 형제의 나라와 같으니 서로 남보다 친하게 지내야 한다. 그러나 오늘에 있어 형제간의 사이가 나쁠 뿐이며, 서로 돕는 모습보다는 불화만을 세계에 알리고 있는 형편이다. 일본이 오늘날까지의 정책을 고치겠다고 세계에 발표하는 것은 일본으로서는 다소 치욕이 되는 점도 있을 것이나 이는 불가피한 일이다. 새로운 정책은, 여순을 개방한 일본, 청국 그리고 한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항으로 만들어 세 나라에서 대표를 파견해 평화회의를 조직한 뒤 이를 공포하는 내용을 담아야 한다. 이것은 일본이 야심이 없다는 것을 보이는 일이다.
여순은 일단 청국에 돌려주고 그것은 평화의 근거지로 삼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패권을 잡으려면 비상한 수단이 필요하다는 것은 바로 이 점을 말하는 것이다. 여순의 반환은 일본의 고통이 되기는 하지만 결과에 있어서는 오히려 이익을 주는 일이며 세계 각국이 그 영단에 놀라고 일본을 칭찬하고 신뢰하게 되어 일본 청국 한국이 영원한 평화와 행복을 얻기에 이를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동양의 중심지이며 항구도시인 여순을 영세중립지로 만들어 각국 대표에 의한 상설위원회를 설치함과 동시에 다음과 같은 것을 시행토록 주장한다.
첫째, 동양평화회의를 조직하여 3국 인민 중에서 회원을 모집하고 재정확보는 1인 당 회비 1원씩을 모금하여 운영할 것. 둘째, 3국이 공동하여 은행을 설립하고 각국이 공용하는 화폐를 발행하여 금융ㆍ경제면에서 공동발전을 도모할 것. 셋째, 각국의 중요한 지역에 평화회의 지부와 은행지점을 개설하여 재정적 안정을 도모할 것. 넷째, 영세 중립지 여순을 보호하기 위하여 일본군함 5ㆍ6척을 정박시켜 놓을 것. 다섯째, 3국의 청년들로 군단을 편성하여 최소한 2개 국어로 교육시켜 평화군을 양성할 것. 여섯째, 일본의 지도아래 한ㆍ청 두 나라의 상공업을 발전시켜 공동으로 경제발전에 노력할 것. 일곱째, 한ㆍ청ㆍ일 세 나라가 황제가 국제적으로 신임을 얻기 위하여 합동으로 로마 교황으로부터 대관을 받을 것." 마지막으로, 안중근은 일본에 대하여 한국과 청에서 행한 침략만행을 반성하기를 촉구하였다.
1.2. 이토 히로부미의 극동평화론
안중근이 옥중에서 죽음을 앞두고 동양평화론을 글로 적어 남긴 이유는 당시 이토 히로부미가 거짓으로 동양의 평화를 유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메이지정부에서 동양평화로 포장된 일제의 대외침략정책을 진두지휘하던 인물로서, 조선을 일제의 식민지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일본은 1876년 조선과 강화도조약을 맺으면서 ‘朝鮮國은 自國의 邦으로 日本과 平等한 權을 保有한다’고 선언한 이래, ‘동양의 평화와 한국의 독립’이라는 명분으로 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을 도발하였다. 이때의 ‘한국 독립’이란 5백 년 이상 속국처럼 중국의 영향권 내에 있었던 한국을 청나라로부터 떼어놓고 나서 일본이 지배하려는 속셈이 담겨 있는 위장된 명분이었다. 이 명분으로 반일세력(反日勢力)을 제압하는 동시에 부일세력(附日勢力)의 활동력을 강화시키는 데 주력하였으며 종내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병합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이토 히로부미의 동양평화 사상은 힘에 의하여 그리고 일본을 중심으로 한 평화라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유감스러운 것은 이토의 ‘극동평화론’의 취지를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 상당수도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아시아가 연대해야 한다는 의식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러자면 제일 근대화에 앞선 일본이 중심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은연 중에 가지고 있었다. 또한 조선에 파견된 프랑스 선교사들 역시 천주교를 박해했던 조선 조정보다는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지녔던 이 생각의 바탕에는 그 당시 유럽에 널리 퍼져있던 ‘사회진화론’이 작용하였다. 결국 안중근이 저격한 것은 이토 히로부미였으나, 실제로 맞서 싸우고자 했던 것은 이토의 거짓평화론이었다. 안중근이 처형당한 그해 8월 29일에 조선은 일본에 의해 강제로 합병되고 말았다.
1.3. 안중근이 법정에서 밝힌 이토의 죄상 15가지
힘에 의한 극동평화론을 앞세워 한국을 침략한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을 안중근은 열다섯 가지로 밝혔다. 제1,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제2, 한국 황제를 폐위한 죄. 제3, 을사5조약과 정미7조약 강제로 체결한 죄. 제4, 무고한 한국인을 학살한 죄. 제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제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 제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제8, 군대를 해산 시킨 죄. 제9, 교육을 방해한 죄. 제10, 한국인들의 유학을 금지시킨 죄. 제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운 죄. 제12, 한국인이 일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거짓말을 퍼뜨린 죄. 제13, 한국이 태평무사한 것처럼 천황을 속인 죄. 제14,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 제15, 일본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2. 빌렘 신부와 알사스-로렌
이런 상황에서 유독 안중근 홀로 이토의 평화론을 저지하고 거짓으로 폭로하고자 하얼빈 거사를 결행했으며 동양에서 실현되기를 바랐던 참된 평화를 알리고자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을 남겼다.
2.1. 동양평화론의 배경
안중근의 동양평화 개념은 어떠한 사상적 또는 시대사적 맥락에서 형성되었을까? 지금까지 많은 안중근 연구자들은 그의 동양평화론이 동아시아와 관련된 이 시기 지적 자원들의 영향 아래에서 형성되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서, 당시의 ‘문명개화론자’들이 전개한 삼국공영론 내지 삼국제휴론 등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관념론들과 달리, 실제로는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는 일본이 동아시아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제국주의적 민족주의 움직임과, 침략을 당한 중국과 한국 등에서 이에 대항하는 저항하거나 투항하는 민족주의 움직임 밖에는 찾아볼 수 없다. 일본 제국주의가 중국과 한국을 침략하는 상황에서 침략적 성향을 교정함으로써 동아시아 지역주의 내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포섭하고 중국과 한국이 형제적 관계로 연대를 맺게 하려는 시도는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이 유일하다. 더군다나 이는 그의 사후 반세기가 지난 후 유럽에서 나타난 통합의 시발점에 해당하는 사상들과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을 정도로 국가 간 연합에 필요한 실용적이고 독창적인 제안을 담고 있다. 그는 본의 아니게 국제평화의 조건을 예언한 셈이 되었는데, 동북아시아에서보다 유럽에서 먼저 실현된 결과가 되었다.
안중근의 시대에 조선 안에서 유럽을 비롯한 세계 정세의 흐름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이들은 프랑스 선교사들 밖에 없었다. 당시 조선의 유림들은 조선이 소중화(小中華)세상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니 이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중화적 세계관이었다. 특히 안중근은 자신에게 세례를 주고 함께 황해도 지방에서 선교 활동을 했던 빌렘(Nicolas Joseph Marie Willhelm. 한국명 : 홍석구. 1860-1936) 신부와 8년 동안 함께 하면서 그로부터 국제 정세에 대해 배웠다.
빌렘 신부는 안중근보다도 19살이 많은 1860년생으로, 파리외방전교회에 들어가 1883년에 사제로 서품되어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처음에는 페낭 신학교의 교수 요원으로 5년간 조선인 신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889년 조선에 입국하여 제물포, 용산 신학교, 미리내 본당을 거쳐 1896년 8월, 황해도 안악의 마렴에 부임하여 황해도 지역만을 담당하는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다. 그러다가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과 그 일가의 입교를 계기로 1989년 선교 거점을 신천군 청계동으로 옮긴 후 1913년까지 청계동 본당에서만 무려 15년 정도 주임을 맡아 황해도 일대에서 선교활동을 수행하였다.
당시 빌렘 신부의 왕성한 선교활동은 서울의 뮈텔 주교가 입에서 침이 마르도록 칭찬할 정도로 당시 천주교회 전체의 모범이 되는 사례로서 소개되었다. 이러한 실적을 거둔 빌렘의 황해도 선교활동을 그림자처럼 수행했던 인물이 안중근이었다.
이 과정에서 빌렘 신부와 안중근 사이에 깊은 신뢰가 형성되었으리라는 점을 상정하기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상호 관계가 수록되어 있는 프랑스어 고문서 자료들이 아직 발굴되어 있지 않아서 명확한 근거를 가지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을 따름이다. 하지만 뤼순을 중심으로 한 한청일 동양삼국의 평화를 그리며 생애 최후의 순간에 동양평화론으로 남길 정도로 각인되었던 안중근의 역사의식은, 역시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서 분쟁의 불씨가 되었던 알사스-로렌 출신이었고 8년 동안이나 독보적인 선교 활동을 함께 벌이며 사제 관계를 맺었던 빌렘 신부의 영향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2.2. 알사스-로렌의 지정학적 위치와 유럽 연합의 발전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위치한 알사스-로렌 지역은 석탄과 철광석이 풍부하여 양국 사이에 끊임없는 갈등과 분쟁의 원인을 제공하던 화약고였다. 그래서 이 지역을 갈등의 원인으로부터 화해와 평화의 공동 상징 지역으로 전환시키는 일은 직접 독프분쟁의 피해자였던 알사스-로렌 지방 주민은 물론 국가주의에서 유럽통합으로 이행함으로써 항국적으로 유럽의 평화를 실현하고자 하던 유럽인들의 오랜 숙원이었다. 빌렘 신부도 그런 유럽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이 오랜 염원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엄청난 인명이 살상되고 난 후 비로소 실현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곳의 중심 도시 스트라스부르에 유럽의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본부를 두게 되었다. 먼저 이 지역의 석탄과 철광석 자원을 독일과 프랑스가 공동으로 사용하게 하는 유럽석탄철강공동체가 1951년에 탄생하였고, 1957년에 유럽경제공동체와 함께 통합되어 1967년에 유럽공동체(European Communities: EC)가 탄생하였다. EC는 공동의 기금을 마련하여 공동의 산업정책, 공동의 농업정책, 공동의 어업정책, 공동의 지역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1986년에는 단일유럽의정서가 성립되어 단일시장을 설립할 것을 규정함으로써, 상품, 노동, 자본, 서비스가 자유로이 국경을 넘어 왕래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 목표는 공동의 교육정책과 공동의 언어문화정책으로 공동의 시민권을 창출하는 것이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일 년 후 독일이 통일되자 사회주의권에 남아있던 동유럽 국가체제들이 붕괴되어 서유럽을 넘어선 유럽 전체의 통합이 추진되었다. 1991년 이후에는 마스트리히트 조약으로 유럽연합(European Union)이 창설됨으로써, 단일시장이 성립되고 중앙은행이 설립되었으며 단일화폐가 도입되었다.
이러한 유럽통합의 시발지점이 알사스-로렌 지역이었다. 이 지역 출신인 빌렘은 역사적인 분쟁 지역 주민이 지녀야 하는 숙명적인 슬픔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며 이를 발판으로 이룩될 수도 있는 유럽 평화의 꿈을 지니고 있다가 선교지에서 만난 청년 안중근에게 전해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안중근은 빌렘으로부터 전해 들은 이 유럽 평화의 꿈을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할 운명에 놓여 있는 조선의 독립을 염원하면서 더 나아가 동양평화의 꿈을 키웠을 것이다. 그러다가 하필이면 공교롭게도 하얼빈 의거 후 중국과 일본 그리고 청나라가 모두 탐내는 동북아시아의 지리적 중심지인 뤼순에 수감되자 사형이 확정된 후 죽기 전에 오랫동안 간직해 오던 꿈, 즉 이 뤼순을 시발점으로 한 동양평화의 꿈을 글로 적어 남겼을 것이라 추정한다.
3. 안중근의 꿈, 우리의 꿈
3.1. 안중근은 왜 그리고 어떻게 천주교인이 되었나?
순흥 안씨 문중에 속한 안중근은 고려 시대 후기 유학자인 안향의 26대손이다. 그는 부친 안태훈을 좇아 천주교에 입교했는데, 그 당시 부친이 명동 성당에 들렀다가 천주교 교우를 만나 먼저 입교했고 부친이 들고 온 천주교 서적 120권을 읽고 나서 빌렘 신부로부터 교리를 배워 1879년에 토마스라는 세례명으로 영세하였다. 그가 이 세례명을 택한 이유는 토마스가 아시아에까지 와서 복음을 전한 사도이기 때문이었다.
안중근이 정식으로 교리를 배우기도 전에 주요한 천주교 서적을 120권이나 읽은 일은 그 당시 지식인들이 천주교에 대해 보였던 지성적 풍조를 대변하는 것이다. 그는 빌렘 신부와 함께 순방하고 다녔던 황해도 신천 지방의 청계동 본당 관할 모든 지역 내에서 8년 동안 활발하게 종교적인 활동을 수행했다. 즉, 빌렘 신부를 수행하면서 길을 안내하고 심부름을 하거나 미사 때에 복사를 서는 일, 사제가 신자들에게 베푼 모든 종류의 성사에 참여하는 일, 때로는 외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거나 예비자들에게 교리를 설명해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부당하게 침해당하는 신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지켜주기 위한 중재 및 알선 노력을 벌임으로써 정의 구현에 힘썼는데 이것이 사회적인 선교활동에 해당한다. 그의 선교활동으로 당시 다른 지방에서는 입교자가 거의 없다시피 했으나 황해도 지방에서는 한 해 600-800명 정도로 입교자가 늘었다.
그의 사회적인 선교활동은 일제의 조선 침략이 노골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더욱 확대되어갔다. 1906년 진남포에서 선교사가 설립한 학교의 재정을 담당하면서 학생들에게 신앙심과 함께 애국정신을 고취시키고, 구한말에 전개된 갖가지 식산흥업운동이나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는가 하면, 나아가 의병활동 및 그 연장으로서 하얼빈 의거를 통하여 천주교 신자로서 민족독립 운동의 전명에 나서서 ‘민족구원’의 기치를 높이 든 것도 모두 사회적인 선교활동이었다.
안중근이 수행한 이 같은 선교활동은, 한국인의 민족문제를 애써 외면한 채 타협적이고 친일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당시 천주교회 교단의 태도와는 매우 대조적인 것으로서, 천주교 신자도 애국자가 되어야 함을 교회 내외의 모든 인사들에게 당당하게 선포하여 천주교의 명성을 드높였다.
3.2. 안중근은 왜 총을 들었나?
안중근은 이토의 사망을 알게 되었을 때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호를 그었다. 그리고 빌렘 신부가 병자성사를 주러 와서 고해를 할 때, 이토와 함께 죽여야 했던 다른 세 명의 수행원에게 총을 쏜 행위에 대해 회개하는 고백을 했다. 그러니까 이토에게 총을 쏜 행위에 대해서는 전혀 죄의식이 없었다는 뜻이다.
이 점은 미조부치 검찰관이 행한 심문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미조부치가 안중근에게, 이토를 저격한 행위는 천주교의 계명에 어긋나는 살인 행위라고 심문하자, 그는 악인이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데도 수수방관하는 태도야말로 더욱 부당하며 자신의 행위는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정당방위라는 점을 분명히 주장하였다. 그는 이후의 공판에서 자신이 이토를 저격할 수밖에 없었던 15개조의 죄상을 나열하면서 이토의 악행을 ‘가공할 죄악’으로 규정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안중근은 이토 저격을 군인의 신분으로 민족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행한 정당방위이며, 더 큰 악을 제거하기 위하여 작은 악을 행하는 것은 정의의 원칙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다고 확신하였다. 이때 빌렘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복사를 하며 미사에 참례하고 나서 그가 쓴 최후의 유묵이, ‘천당지복영원복락’(天堂至福永遠福樂)이다. 여기서도 나타나듯이 그는 추호도 자신이 십계명의 5계를 범한 살인범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천당에 들어갈 것을 확신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교수형을 당한 뒤 수의에서는 예수님 상본과 가족사진이 발견되었다. 그는 의병활동을 하는 중에나 수감 중에도 이 성화를 소지하고 매일 기도를 거르지 않았으며, 사형을 선고받은 후에는 성금요일이었던 3월 25일에 형이 집행되기를 청했으나 일제는 이토가 죽임을 당한 날인 26일에 집행하였다.
3.3. 안중근은 왜 동북아시아 평화의 아이콘이 되었나?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에 자신의 민족운동과 동양평화 노력의 근간이 되는 사상을 담았다. 이 사상은 초기 한국천주교회 평신도들이 유가문화의 사상적 기초 위에서 자발적으로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여 교회를 세우고 순교로서 지켰던 신앙의 전통이 당대 역사 안에서 계승되고 더욱 발전하여 확대된 형태로 구현되었다. 이렇듯 안중근의 내면에서 유가사상이 천주교 신앙으로 발전함으로써 종교적인 선교활동에서 사회적인 선교활동으로 나타났으며, 그 범위는 민권운동과 교육운동을 거쳐 항일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것은 일본제국주의가 시시각각으로 조선을 침략해 오던 급박한 국제정세 속에서 민족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한 현실적인 방안을 모색하며 투쟁한 결과이다.
이러한 그의 선교 활동은 옥중에서 저술한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을 통해서 정의와 평화라는 가치로 귀결되었다. 그가 이토를 저격한 목적은 국제 질서에서 무너진 정의를 바로 세움으로써 민족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활동과 저술에서 나타난 신앙과 의식은, 현세적인 기복신앙이나 편협한 민족주의에 국한되지 않으면서도 불의한 일제 침략과 타협하여 종교의 자유를 구하는 몰역사적인 호교론에도 빠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정의의 사도로서 민족의 존엄을 짓밟는 침략에 대항하여 그 불의를 응징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며, 또한 평화의 사도로서 민족들이 존엄과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국제적 협력체계를 세우려고 하였다. 이러한 국제 평화의 구상을 현실적으로 실현하기 위하여 가톨릭교회가 보편종교로서 지닌 도덕적 신뢰에 기초하여 영구적 평화를 세우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천주교 신앙으로 성숙한 유가사상의 바탕 위에서 자리잡고 종교적인 범주에서 시작하여 민권운동과 교육운동을 거쳐 항일운동으로 하얼빈에서 의거를 한데다가 동양평화론의 사상까지 알려짐으로써 한국은 물론 중국의 민중은 패배적이었던 분위기를 일소하는 기회를 맞이하였다. 즉, 안중근이 의거 후 사형을 당하자 한국인들은 물론 중국인들도 위기상황 속에서 헤매다 약해진 민족을 다시 일으켜 세울 정신적 자양분을 얻게 되었다. 당시 중국의 정치가와 지식인들은 안중근의 의거를 극찬하였으며 좌우 정파를 초월하여 반일 애국주의의 상징으로 인식되었으며, 이러한 인식이 수많은 신문의 기사들, 영탄시, 추도작품 등에 반영되어 있다. 여기서 안중근은 저항의 상징이었으며, 협객의 상징이자 평화사절의 상징이었다.
안중근 의거는 이토 히로부미를 일본 근대화의 원훈(元勳)으로 존경하던 일본인들을 충격에 빠뜨렸지만, 안중근이 수감되어 있던 뤼순 감옥에서 그를 만났던 일본 관헌들과 검찰관, 법원장 등은 그를 존경하여 마지않았다. 그들은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한 행위가 개인적인 원한에서가 아니라 조국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 벌인 것이었으며 그가 숭고하고 뛰어난 인품을 지닌 인물임을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알고 존경하게 되었던 것이다.
황해도 해주이고 평양에서도 교육활동을 했던 안중근에 대하여 항일무장투쟁의 전통에 기반하여 정권을 수립한 북한에서는 당연히 그를 독립운동가의 원조로 추앙하였다. 그런데 한국에서 안중근에 대한 평가는 사회적인 평판과 교회 내부의 평판으로 나누어 볼 필요가 있다. 안중근 의거는 거사 직후는 물론 재판 과정과 사형 집행 직후부터 일제의 침략에 울분을 토하며 조선의 독립을 열망하던 민중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으나, 당시 천주교회의 수장이었던 뮈텔은 안중근을 살인자로 단죄하였고 그에게 병자성사를 주러 간 빌렘 신부에게 성무집행정지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의거 직후 강제로 한일합방이 이루어졌으나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를 차린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는 안중근의 독립운동을 계승하려는 열기가 뜨거웠고, 그의 동생인 정근과 공근 그리고 사촌동생 명근과 조카들이 이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안중근은 으뜸가는 추앙을 받은 반면 천주교회에서는 합방 10년만에 거족적으로 일어난 삼일만세운동에도 불참하였고 친일행각을 이어갔다. 해방 이후에도 안중근에 대한 기억은 좀처럼 생겨나지 않다가, 정의구현사제단의 건의에 따라 2007년 김수환 추기경이 추모미사를 거행하면서, “안의사의 의거는 가톨릭 신앙과 상치된 것이 아니며 그 안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인정하고 “신앙심과 조국애는 분리될 수 없으며 일제의 무력 침략 앞에 민족의 존엄과 국권을 지키기 위해 행한 모든 행위는 정당방위와 의거로 보아야 한다”고 엄숙히 선언하였다. 또한 한국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과오를 당시 제도교회가 범했음을 고백하며 안중근을 복권시켰다.
3.4. 동북아시아의 현실과 미래를 위한 전략
안중근의 평화 구상은 유럽연합(EU)의 모태가 된 프랑스 외무장관 로베르 슈만의 ‘유럽석탄철강공동체’ 제안보다 40년 앞선 선구적인 제안이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이념적 기초가 됐다는 사실도 기억할 일이다. 실제로 안중근 순국 이후 9년 만에 나온 3·1독립선언서는 조선독립을 출발점으로 하는 ‘동양의 평화’를 제창했다. 안중근의 원대한 구상이 담긴 동양평화론은 한반도 평화체제에 기초한 동아시아 경제안보공동체를 실현할 길을 찾는 데도 빛을 던진다.
그렇다면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이 현 시기 동북아시아에 주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유럽연합과 동북아시아(남북한, 중국, 일본, 대만의 5개국)은 경제 규모가 비슷한데, 인구는 3배이며 경제 규모는 비슷하고 영토는 네 배 이상인데다가 문화적 동질성의 두께가 더 넓어서 국가 연합의 가능성이 더 크다. 문재인 대통령이 제안한 바 있는 동아시아 철도공동체 구상은 동북아시아 6개국과 미국이 함께 참여하자는 제안으로서, 유럽석탄철강공동체가 전후 유럽의 경제를 재건하고 평화를 구축하여 오늘의 유럽연합을 탄생시킨 것처럼, 호혜적인 경제협력을 통해 다자평화안보체제로 발전해 나가는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안중근의 꿈이 백 년 후인 오늘날 실현될 수 있느냐 하는 과제는 유럽연합 이전 유럽에서 전범국가였던 독일과 마찬가지로 전쟁을 일으켰던 일본이 역사적 전망을 공유하고 동질성을 회복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또한 중국과 일본을 지리적으로 연결하는 교량적 위치에 있는 한반도가 분단되어 있으므로, 남북한이 분단 구조를 극복하고 민족 통합의 길로 나아가야 하는 일도 선결과제이고, 유럽연합의 통합과정에서 호의적으로 지원하였던 미국이 동북아시아에서는 중국과 대결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이러한 장벽과 과제가 만만치 않은 도전으로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백 년 전의 조선에서 안중근이 동양평화를 구상하면서도 마주쳐야 했던 도전에 비하면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도전은 약과이다. 도전보다 가능성이 더 커 보이기 때문이다. 유럽연합을 이루고 있는 나라들보다도 훨씬 더 빠른 경제성장을 보이고 있으며 미국을 넘보는 중국, 유럽 어느 나라보다도 경제규모가 큰 일본 그리고 식민지였던 처지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한 한국은 서로 힘을 합칠 수만 있다면 유럽연합에 못지않은 연합을 이루어낼 수 있는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다. 영토와 인구는 물론 경제력에 있어서 유럽연합을 훨씬 뛰어넘을 수 있는 국제단위가 동북아시아인 것이다. 이 엄청난 잠재력을 가로막고 있는 장벽을 뛰어넘어 남북통합, 한일 및 중일 화해를 모두 이끌어낼 수 있는 역사적 힘은 민주주의와 문화의 역량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한국인들은 과제와 기대를 동시에 안고 있다.
어째서 그러한가? 한국인들이 이룩한 성숙된 민주역량으로는 대한민국을 정의로운 나라로 탈바꿈시키고 그 힘의 바탕 위에 민족 통합을 점진적으로 달성해나감으로써 북한을 국제사회의 정상적인 일원으로 포섭할 수 있다. 또한 일본의 시민운동 세력도 한국의 민주화 경험을 배우고 자극을 받으면 70년 자민당 장기일당체제를 무너뜨리고 민주 정권을 세울 수 있는 자극도 받을 수 있다. 13억 명의 인구 중 중산층이 4억 명을 돌파한 중국도 머지않아 경제력에 걸맞는 민주주의적 요구가 생겨날 수밖에 없는데, 지금 홍콩이 그러하듯이, 여기에도 정치적 한류가 커다란 자극 유인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한국인들의 문화적인 역량으로는 남북한의 민족적 동질성을 회복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으며, 만주 동북3성 지역에 흩어져 사는 조선족과의 교류 및 통합에도 기여할 수 있다. 대립과 갈등이 아니라 평화 공존을 지향하는 한류 문화로서는 중국과 일본의 국민들에게도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긍정적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문화적 한류는 화해와 공존 그리고 평화의 메시지를 담고 있어서 일본의 혐한문화와 중국의 동북공정도 능히 뛰어넘을 수 있다.
이미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한 대한민국은 백 년 전의 대한제국이 아니다. 분단된 남쪽의 규모만으로도 일본을 추격한 경제력으로나 일본에 능히 맞설 만한 국방력, 중국을 상대로 대등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의 외교력이 백 년 전 안중근의 시대와 지금이 분명히 다른 점이다. 일방적으로 유지되어온 한미동맹도 성장한 한국의 국력에 걸맞게 수정되어야 할 때가 무르익었다. 일본을 중심으로 짜여졌던 판도가 한국의 국력이 성장함으로써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과도 적대적인 관계는 종식시키고 바야흐로 교류협력의 장이 열리기 시작하는 때를 맞이하고 있다. 이렇게 성장한 대한민국의 국력을 바탕으로 하고, 민주주의 역량과 문화적 역량이 성숙하는 데 한국 가톨릭교회의 신앙인들이 기여할 수 있다면 안중근의 꿈은 우리의 꿈이 되어 꽃피울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민족 복음화의 길이요, 동아시아 복음화를 위한 초석이 될 것이다. 이는 또한 그동안 안중근 토마스의 신앙 안에 통합된 애국심을 망각해 온 신앙후손의 죄과를 보속함으로써 하느님 사랑과 겨레 사랑을 함께 이루는 길이기도 하다.
3.5. 안중근의 유언과 영성
안중근의 생애와 죽음에서 우리는 그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분투노력한 선교 활동의 자세와 함께 특히 하얼빈 의거 후 죽음에 이르기까지 보여준 자세에서 영성을 보아야 한다. 그는 한국의 진정한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악을 미워하고 그 악을 저지르는 자를 응징했을 뿐 그 악에 물들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의 황제처럼 일본의 천황도 존중했고, 일본과 일본인을 증오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동양 평화의 주축이 되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일 때에도 그에게 세 발의 총알을 발사했으며 혹시 그로 의심되는 두 사람에게도 각각 한 발씩 발사했으나 나머지 한 발은 쏘지 않고 남겨두었다. 무엇보다도 의거 후 수감 중에 검사관이나 재판관 심지어 간수를 대할 때에도 이토의 죄상을 거론했을 뿐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으며 의연하게 대처했기에 그를 만나본 일본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리고 죽는 순간에 ‘대한 독립’을 외치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지금 남아있는 유묵들은 그를 존경한 일본인들이 그가 죽기 전에 그의 뜻을 간직하고자 부탁하여 그가 쓴 붓글씨들이다.
또한 주교로부터 살인자로 낙인찍히고 생전에 그토록 충성했던 제도교회로부터 아무런 변호도 받지 않았으나 유서 속에서 남은 가족들이 주교에게 순명할 것과 장남을 사제로 키워달라고 당부하였다. 또한 자신에게 세례를 준 빌렘 신부가 주교의 지시를 어기고 병자성사와 미사를 해주러 찾아왔을 때 자신의 의거를 도와주느라 경제적으로 손해를 본 이들과 함께 행동함으로써 징역을 살게 된 이들에게 죄를 지었노라고 참회했고 자신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갈 것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2천만 동포들에게는 자신이 살아온 대로, 하느님을 믿을 것과 교육과 산업에 힘쓸 것 그리고 독립운동에 매진하라고 당부하면서 자신은 천국에서도 동포들의 독립노력에 함께 하겠노라고 약속하였다.
악을 미워하되 악에 물든 죄인에게 선을 보여주었으며, 악에 시달리는 동포들에게 같은 선을 살아가라고 격려하고 떠나간 인간, 더욱이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하느님 사랑으로 겨레 사랑을 증거하고 떠나간 그가 안중근이었다.
추가 묵상 주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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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 80년대 초부터 접하게 된 교육이 퍼즐 조각처럼 이어지는 느낌입니다.
이해력이 많이 부족함을 스스로 인정합니다. 그래도 더 많이 관심을 가지고 공부했으면 좋겠습니다.
대충 읽고도 마음이 움직입니다. 복사해 한글에 붙여 다시 찬찬히 읽어 보겠습니다.
아무래도 과천에 살때 영원한 도움의 수녀님들의 영향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네요.
새삼 80년데 중반에 계셨던 송 수녀님 그 이후 루카 수녀님 제오르지아 수녀님이 기억이 납니다.
평신도로서의 자세,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고자 했던 의지, 실행방안(경제공동체, 평화공동체, 문화공동체 등) 속에 녹아있는 현실적인 판단......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그동안 독립운동가로서의 글귀에 많이 익숙해져 있었지 신앙인으로서의 글귀에는 익숙치 못했던 듯 합니다. 안중근 토마스 의사의 자제들을 방치한 것도 우리 모두의 잘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