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임진년 여름 {양무리 마을} 연중론 비평 토론 초반, ‘피터 마스터스 {영혼의 의사} 손성은 역’을 ‘{성경}에 버금가는 중생론 교과서, 오류 없는 중생론 표준교과서’로 삼은 한국 교회 연중론 좌장 로빈슨 크로소 윤영상 목사님은 “연중론을 지지하는 해석들이다.”며 라마드 목사님께 ‘칼빈 선생님, 송영찬 목사님, 고신 교수 위원회의 고넬료 구원에 관한 해석’을 제시하셨다. 아래 토론은 별명 ‘새삶’을 쓴 내가 ‘윤영상 목사님이 라마드 목사님께 제시한 이 해석들은 사도행전 11장 14절에 비춰 옳지 못한 해석들, 그릇된 해석들이다.’는 사실을 밝힌 토론이다.
내 어리석은 자랑이지만, 나는 김대중 정부 시절에 ‘언론비평 사이트 {인물과 사상}’에서 활동했다. {인물과 사상}에서 내 토론법은 안티 기독교인들이나 극우, 극좌들에게 그들 다음 답변들을 예상하며 댓글들을 올리는 토론법, 상대 텍스트들을 모아두는 토론법이었다. 이른바 “미끼”, “낚시밥”을 던져 낚싯대를 채는 토론법이었다. 그래서 백전백승의 전력을 기록했다. {뉴스앤조이}에서도 하나님께 육두문자를 서슴지 않던 ‘이스마엘의 도끼’를 이 토론법으로 낚아 ‘이스마엘의 도끼’ 붓을 꺾었다.
2012년 여름 {양무리 마을} 연중론 비평 토론에서도 홀리조이 손성은 목사님과 로빈슨 크로소 윤영상 목사님 텍스트들을 모아두며 결정의 순간을 노려, 쥐고 있던 칼(?)을 뺐던 나···.
긴 토론 글이긴 하지만, 윤영상 목사님이 “연중론을 지지하는 해석들이다.”며 제시하셨던 이 해석들을 ‘그릇된 해석’으로 한순간에 뒤집어엎는 ‘사도행전 11장 14절’과 ‘F. F 부르스 {핸드릭슨 패턴 주석집: 사도행전}’에서 ‘고넬료의 경건(하나님 경외)에 관한 해석’이라는 쌍검을 손에 쥐고 있던 내가 어느 시점에서 이 쌍검을 빼서 휘두르는가를 살펴보시기를 바란다.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MDcs/2066
고넬료가 소위 “초기 중생”한 시기는?
새삶 (2012.07.09.11:57)
사도행전 10장 36, 37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말씀을 보내셨으니, 이분이 만유의 주님이시다. 요한이 선포한 세례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해 온 유대에 전파된 그 말씀을 당신들이 알고 있다.
‘니고데모의 경건, 사울(바울)의 경건, 에티오피아 내시의 경건, 루디아의 경건, 특히 고넬료의 경건(하나님 경외)을 소위 “연속적 중생관”의 초기 중생 단계로 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더군다나 고넬료와 고넬료 친척들과 친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의 복음”을 사도 베드로를 만나기 전에 이미 알고 있던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더욱더 그렇습니다. 또한 이런 관점에서라면 사울의 소위 “초기 중생” 역시 스데반 집사에게 복음을 들은 때로 생각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오순절 성령 강림 때 회개를 촉구한 베드로 사도 설교로 소위 “완전 중생”을 한 무리 역시 “요한이 선포한 세례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해 온 유대에 전파된 그 말씀”을 오순절 성령 강림 이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고 본다면, 그들을 오순절 성령 강림 이전에 이미 초기 중생을 한 무리로 봐도 되겠군요.
그렇다면 소위 “연속적 중생관” 관점에서는 그 무리가 초기 중생 단계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사도행전 2장 14절~36절)으로 봐도 되겠군요. 사울(바울) 역시 초기 중생 단계에서 예수님을 핍박한 것이구요.
댓글 37
로빈슨 크로소 12.07.09. 12:34
초기 중생은 중생의 시작으로 이 중생이 시작되는 순간은 순식간에 비밀스럽게 됩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중생이 시작하면 그 결과로 죄를 깨닫게 되고, 회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 무리가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웃고 빌라도 앞에서 “죽이라.” 외치고 십자가에 죽이는 그 때 초기 중생을 한 후의 상태라면 그들은 왜 죄를 깨닫지 못했을까여? 아직 중생이 시작되기 전이기 때문에 “저들이 아직 그들의 죄를 모르고 있다.”라는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주님께서도 십자가에 달려서 “저들은 저들의 죄를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고요. 즉 ‘중생 시작 이전’입니다.
┗ 새삶 12.07.09. 12:41
그러면 그 무리가 자신들 죄를 알았을 때는 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또한 고넬료가 자기 죄를 알았을 때, ‘주님께서 자기 죄를 대속하셨다.’는 것을 안 때는 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 로빈슨 크로소 12.07.09. 12:52
무리가 자기 죄를 알았을 때에 대해서 제가 바로 밑의 덧글에서 사도행전 2장 37절을 언급했습니다. 참고 하시고요.
고넬료가 자기 죄를 깨달았을 때는 성경에 기록돼 있지는 않으나, 초기 중생을 한 결과로 나오는 회개의 삶은 나오지요. 즉 경건한 삶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넬료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셨고, 하나님께서 고넬료의 기도에 응답해서 베드로를 보냈다고 했지요.
그리고 그는 복음을 듣고 성령 세례를 받습니다. 그럼 고넬료가 무엇을 기도했는지 그 기도 제목을 알 수 있지요. 그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 기도한 것이고 그 기도에 응답하신 것입니다.
┗ 로빈슨 크로소 12.07.09. 12:54
{천로역정} 혹시 읽어 보셨나요? {천로역정}에 보면 크리스천이 처음에 애통하며 자신의 죄를 깨달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며 자신의 구원을 위해 애쓰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좁은 문을 들어가서 해석자의 집에서 배우는 그의 모습까지. 바로 그 부분들을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 새삶 12.07.09. 13:16
고넬료의 경건(하나님 경건)을 하나님께 열심이었고(사도행전 22장 3절)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립보서 3장 6절)로서 바울의 경건(하나님 경외)과 동일선상에서 생각하시지는 않는군요. 바꿔 말하면, 경건한 고넬료를 사도행전 22장 12절에 적힌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보시지는 않는군요.
┗ 로빈슨 크로소 12.07.09. 13:27
고넬료와 바울의 회심 이전 상황을 같은 경건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없습니다. 경건이란 단어가 같이 쓰였다고 같은 의미로 해석하면 본문대로 해석하지 않는 겁니다. 바울이 사울 때에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어떤 행위로 나타났는지 고넬료와 극단적으로 비교되며,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의 그러한 경건을 직접 평하시지 않았습니까?
고넬료의 열심은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과 사울의 열심은 주님을 핍박하는 것으로 평한 것만으로도 두 사람 열심은 본질적으로 틀립니다.
┗ 로빈슨 크로소 12.07.09. 13:28
그리고 고넬료가 율법으로 인해 경건해지려고 했다면 율법의 몽학선생 역할로 그가 회개 중에 있다는 소리도 되는데요?
로빈슨크로소 12.07.09. 12:37
‘초기 중생=중생의 시작’은 ‘순식간에 비밀스럽게 됨’. 과정이 아님.
‘죄의 각성과 회개’는 중생이 시작되면 그 결과로 죄를 깨닫게 되고, 회개를 하기 시작함(과정). 새 출생.
행 2장 37절: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려서 “형제들이여,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말했다.
“마음에 찔려”, 이들은 베드로 설교를 듣고 그제서야 마음에 찔렸다고 합니다. 즉 죄를 깨달은 것입니다. 이들은 지금 죄를 각성하고 있는 중이며 회개를 하는 중입니다. → 이들에게 제자들은 “주를 믿으라.”, “세례를 받으라.”고 계속 권고하며 ‘회개’를 계속 촉구하지요.
새삶 12.07.09. 14:42
1) 사도행전 13장 16절: 바울이 일어나 손짓을 하며 말했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너희는 들어라.”
2) 사도행전 13장 26절: “형제들아, 아브라함 자손들과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아, 하나님께서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으나”
3) 사도행전 13장 43절: 회중이 흩어진 후에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자들 중에서 많은 이가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바울과 바나바가 그들과 함께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고 권했다.
4) 사도행전 13장 50절: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읍의 지도층을 선동해,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도록 해 그들을 자신들 지역에서 내쫒았다.
┗ 새삶 12.07.10. 22:43
{톰슨 주석 성경}을 살펴보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너희”, 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유대교로 입교(개종)를 한 경건한 자(이방인)”으로 해석하는군요.
그러면 소위 “연속적인 중생관” 관점에서 바라보는 고넬료 경우와 마찬가지로 바울과 바나바를 따른 경건한 이방인들은 유대교인일 때 소위 “ 초기 중생”이 있었던 사람들로 보면 되겠군요.
또한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지 않은 경건한 이방인과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한 경건한 귀부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기는 했지만 초기 중생이 없었던 사람들로 보면 되겠구요.
┗ 새삶 12.07.09. 14:46
그러므로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지 않은 경건한 이방인들과,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한 경건한 부인들을 “율법으로 인해 경건해지려고 했다면 율법의 몽학선생 역할로 그가 회개 중에 있다.”는 로빈슨크로소 님 관점에서 절대 바라보면 안 되겠습니다.
┗ 로빈슨 크로소 12.07.09. 14:53
새삶 님, 연속적 중생관을 모르시면서, 어떻게 연속적 중생관으로 성경 구절들을 마구잡이로 그렇게 일획적으로 해석하시려고 하는지요? 새삶 님이 알고 있는 연속적 중생관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대체 어떤 연속적 중생관을 알고 계시길레 그렇게 위의 구절들을 그런 식으로 해석해 놓고는 그게 연속적 중생관으로 해석한 것이라고 서슴없이 말하시는지요?
새삶 님이 알고 계신 연속적 중생관을 설명해 주십시요. 그게 더 빠르겠군요. 이런 식으로 하자면 성경 66 권의 인물들 다 끄집어 낼 것 같은데요?
{톰슨 주석 성경}은 ‘스터디 바이블’입니다. 즉 그 주석ㅡ톰슨 주석도 다른 주석을 요약한 요약 주석임ㅡ 출처도 불분명한 내용들입니다.
┗ 새삶 12.07.09. 14:51
로빈슨 크로소 님이 고넬료 경우를 “마구잡이로 그렇게 일획적으로 해석”하셨기 때문입니다.
┗ 로빈슨 크로소 12.07.09. 14:58
박윤선 주석과 메튜 헨리 주석도 같은 식으로 해석했는데요? 그리고 대부분 고넬료가 성령받기 전 그 상태를 그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성경 본문이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고넬료가 성령받기 전에 경건한 상태가 회심의 과정 중에 있다는 해석이 마구잡이 식 해석이라면, 새삶 님이 추천하는 정상적이고 올바른 해석을 추천해 주시기 바랍니다.
상대방 해석이 마구잡이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그와 반대되는 올바른 성경 해석의 샘플을 먼저 올려 주시면 서로에게 유익이 되지 않겠습니까? 근거 없이 그냥 “당신은 마구잡이다.”라고 하면 안되지요.
┗ 새삶 12.07.09. 15:00
제가 {톰슨 주석 성경}만 살펴봤겠습니까? 다른 주석집도 살펴봤습니다. {톰슨 주석 성경}과 동일하게 해석하더군요.
┗ 로빈슨 크로소 12.07.09. 15:04
그럼 출처와 그 내용을 올려봐 주시기 바랍니다. 고넬료에 대한 해석은 제가 자유게시판에 이미 박윤선 주석과 메튜 헨리 주석을 올렸습니다.
로빈슨 크로소 12.07.09. 15:00
1. 새삶 님이 알고 계셔서 말하고 있는 연속적 중생관이 무엇인지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2. 고넬료가 성령 받기 전에 그가 하나님을 경외한 것이 어떤 상태였는지 새삶 님이 보기에 올바른 해석을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 새삶 12.07.09. 15:04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경외한 상태, 경건한 상태와 같은 상태였다.’고 생각합니다. 바꿔 말하면, ‘사도행전 22장 12절에 적힌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 로빈슨 크로소 12.07.09. 15:05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경외한 상태, 경건한 상태와 같은 상태였다.’고 생각합니다. 바꿔 말하면, ‘사도행전 22장 12절에 적힌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 이 글이 위 1,2번 중 어느 질문에 해당하는 답변인가요?
┗ 새삶 12.07.09. 15:07
2번에 해당하는 답변이라고 생각했는데, 로빈슨 크로소 님이 요구하는 답변은 다른 사람 해석을 말씀하시는가, 봅니다.
┗ 로빈슨 크로소 12.07.09. 15:11
그렇지요. 새삶 님 해석은 주관적인 견해이고, 최소한 유명한 신학자 해석으로 자신의 해석이 타당성이 있는 해석이라는 근거 자료를 첨부를 해야 되지 않을까요? 그래야 더욱 신뢰 있는 이의 제기가 될 것입니다.
일단 위의 1,2 에 대한 신뢰 있는 답변들이 올라오면 그때 또 참여하겠습니다. 샬롬!
┗ 새삶 12.07.09. 15:15
지금은 {등업게시판}에서 삭제해 버렸지만, 어제 {자유게시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위 “연속적인 중생관” 토론에 참여하고 싶다며 등업을 부탁했지만, 등업이 안 되어 글 보기가 무척 불편해 그렇습니다.
┗ 새삶 12.07.09. 22:38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원칙으로 고넬료 상태를 해석하려고 노력했건만, 주관적인 견해로 몰아붙이시니, 당황스럽습니다.
또한 ‘고넬료 경건이 초기 중생 단계를 뜻한다면, 사도행전 13장에 적힌 경건한 무리들, 바울과 바나바의 복음을 듣고 회개한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기 전에 초기 중생 단계에 있었다.’는 제 해석도 로빈슨 크로소 님이 받아들이지 않으시니….
┗ 로빈슨 크로소 12.07.09. 22:51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것에 이의를 달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대로 해석해도 각자 다르게 해석이 될 때에는 자기만의 해석이 아님을 다른 신학자나 대표격되는 해석자도 같은 해석임을 근거 자료로 올려 자신의 해석의 타당성을 드러내는 것이 토론과 논쟁의 기본 절차입니다.
로빈슨 크로소 12.07.09. 15:17
연속적인 중생관 토론은 저와 라마드 님의 개인적 토론이고, 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 내용에서만 토론을 진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참여하시려면 그 책 텍스트 내용만으로 하셔야 합니다.
로빈슨 크로소 12.07.09. 15:18
그리고 현재 제가 라마드 님과 새삶 님께 거의 동일한 질문을 올린 상태입니다.
새삶 12.07.10. 12:25
로빈슨 크로소 님 《‘초기 중생=중생의 시작’은 ‘순식간에 비밀스럽게 됨’. 과정이 아님.》 → 로빈슨 크로소 님, ‘초기 중생은 비밀스러운 것이기에 사람이 알 수 없다.’는 뜻이죠?
그런데 저는 성경의 인물들을 놓고 ‘사람이 알 수 없는 이 비밀스러운 초기 중생의 구체적인 시기’까지도 소위 “연속적인 중생관” 관점에서 알려고 애를 썼군요.
소위 “연속적인 중생관의 실전 예제”로서 초기 중생의 구체적인 시기까지 알려고 애써 본 것은 다만 ‘추측’하는 행위였지만, 추측하는 행위일지라도 초기 중생 구체적 시기를 추측해 보는 이 행위는 ‘신비’에 속하는 ‘하나님의 주권(영역)을 넘보는 행위’임을 느낍니다.
┗ lamad 12.07.10. 13:59
하나님의 신비의 면에서 중생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기계적인, 혹은 수학의 공식적으로 대입하듯 다루기 때문’이라고 제 개인적으로는 생각해 봅니다.
┗ 로빈슨 크로소 12.07.10. 16:57
초기 중생의 시기는 모르지요. 그래서 벌콥은 “부르심과 초기 중생을 세밀히 구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후크마는 아예 “동일한 것이다.”고 주장했는데….
벌콥은 “부르심은 외향적 성향으로 눈에 드러나는 성향을 가졌고, 초기중생은 내적인 것이고 비밀스러운 것이라 전혀 드러나지 않는 것이라 이 둘을 세밀히 구별하고 효과적 부르심 안에 초기 중생이 포함된다”고 말합니다.
lamad 12.07.10. 13:26
(요 3: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요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 lamad 12.07.10. 14:04
연속적인 중생론은 니고데모 말처럼 중생을 설정하는 듯합니다. → 4절.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중생의 신비의 사역을 인간이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 8절.
‘알지 못하는 영역까지 알려고 하는 게 연속적 중생론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니고데모 질문에 대한 실천이 연속적 중생론 아닌가!’ 생각합니다.
‘해석의 근거를 니고데모 질문에서 중점을 가져온 게 연속적 중생론’이 아닌지요?
‘생명의 시작 → 10 개월 → 출생’, 이런 방식으로 ‘공식화=시간을 정한다’고 생각합니다.
‘연속적인 중생관 실전 예제로 나온 성경 구절들을 이런 방식을 대입하지 않았나요?’ 묻고 싶네요.
┗ lamad 12.07.10. 13:39
벌콥 《언약의 집행 하에 생활하지 않았던 자들은 중생과 효과적인 부르심 사이에 시간적 간격을 상정할 필요가 없다. 효과적인 부르심에서 이들은 자신의 갱신을 인식하게 되고, 즉시 중생의 씨앗이 새로운 생명으로 발현하게 된다. 이는 중생, 효과적 부르심, 회심이 모두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 로빈슨 크로소 12.07.10. 17:03
니고데모가 언약을 지키지 않고 지 멋대로 살던 사람이었다고요? 라마드 님 참 이상한 분이시군요. 벌콥과 후크마도 중생을 설정한다고 말하고 있군요.
후크마도 벌콥도 ‘루디아가 고넬료가 이때 회심했다 뭐 했다.’라고 설정하는데….
┗ holyjoy 12.07.10. 20:04
제가 벌코프의 영문 자료를 올려드렸는데도 라마드 님은 전혀 참고하시지 않으시는군요.
“언약의 집행 하에 생활하지 않았던 자들”이 미국 문화 속에서, 그리고 화란 문화 속에서 그것도 벌콥이 책을 발간한 1940년대쯤에 어떤 의미로 해석돼야 할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누가 도대체 그 당시에 “언약의 집행 하에 생활하지 않았던 자들”이라고 보십니까? 그리고 그런 사람이 누군지에 관계없이 연속적 중생론은 유효합니다. 왜냐하면 ‘순간적 중생’ 개념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이상하게도 고집부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라마드 님은 벌코프를 오해하고 계십니다.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MDcs/2067
Re: 고넬료가 소위 “초기 중생”한 시기는?
lamad (2012.07.10.14:06)
다음 댓글들은 새삶 님 <고넬료가 소위 “초기 중생”한 시기는?>라는 글에 있는 댓글들입니다.
새삶 12.07.10. 12:25
로빈슨 크로소 님 《‘초기 중생=중생의 시작’은 ‘순식간에 비밀스럽게 됨’. 과정이 아님.》 → 로빈슨 크로소 님, ‘초기 중생은 비밀스러운 것이기에 사람이 알 수 없다.’는 뜻이죠?
그런데 저는 성경의 인물들을 놓고 ‘사람이 알 수 없는 이 비밀스러운 초기 중생의 구체적인 시기’까지도 소위 “연속적인 중생관” 관점에서 알려고 애를 썼군요.
소위 “연속적인 중생관의 실전 예제”로서 초기 중생의 구체적인 시기까지 알려고 애써 본 것은 다만 ‘추측’하는 행위였지만, 추측하는 행위일지라도 초기 중생 구체적 시기를 추측해 보는 이 행위는 ‘신비’에 속하는 ‘하나님의 주권(영역)을 넘보는 행위’임을 느낍니다.
┗ lamad 12.07.10. 13:59
하나님의 신비의 면에서 중생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기계적인, 혹은 수학의 공식적으로 대입하듯 다루기 때문’이라고 제 개인적으로는 생각해 봅니다.
┗ 로빈슨 크로소 12.07.10. 16:57
초기 중생의 시기는 모르지요. 그래서 벌콥은 “부르심과 초기 중생을 세밀히 구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후크마는 아예 “동일한 것이다.”고 주장했는데….
벌콥은 “부르심은 외향적 성향으로 눈에 드러나는 성향을 가졌고, 초기중생은 내적인 것이고 비밀스러운 것이라 전혀 드러나지 않는 것이라 이 둘을 세밀히 구별하고 효과적 부르심 안에 초기 중생이 포함된다”고 말합니다.
lamad 12.07.10. 13:26
(요 3: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요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 lamad 12.07.10. 14:04
연속적인 중생론은 니고데모 말처럼 중생을 설정하는 듯합니다. → 4절.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중생의 신비의 사역을 인간이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 8절.
‘알지 못하는 영역까지 알려고 하는 게 연속적 중생론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니고데모 질문에 대한 실천이 연속적 중생론 아닌가!’ 생각합니다.
‘해석의 근거를 니고데모의 질문에서 중점을 가져온 게 연속적 중생론’이 아닌지요?
‘생명의 시작 → 10 개월 → 출생’, 이런 방식으로 ‘공식화=시간을 정한다’고 생각합니다.
‘연속적인 중생관 실전 예제로 나온 성경 구절들을 이런 방식을 대입하지 않았나요?’ 묻고 싶네요.
┗ lamad 12.07.10. 13:39
벌콥 《언약의 집행 하에 생활하지 않았던 자들은 중생과 효과적인 부르심 사이에 시간적 간격을 상정할 필요가 없다. 효과적인 부르심에서 이들은 자신의 갱신을 인식하게 되고, 즉시 중생의 씨앗이 새로운 생명으로 발현하게 된다. 이는 중생, 효과적 부르심, 회심이 모두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댓글 40
holyjoy 12.07.10. 15:18
라마드 님, 이제는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혀서 벌코프 글까지 왜곡하고 자신의 생각대로만 해석하려고 하니, 참으로 사람의 편견이라는 것이 무섭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본문은 이미 앞선 토론에서 충분히 검토됐던 부분입니다. 제가 영문까지 올려서 검토했었습니다. 라마드 님이 올리신 벌코프 글이 있는 바로 앞부분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중생의 정의가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올리신 글 중에 “언약의 집행 하에 생활하지 않았던 자들”이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특별히 벌코프가 화란교회 출신인 점을 고려해서 해석해 보시기 바랍니다. 최소한 벌코프 { 조직신학}이 출간된 1940년대 미국 교회 상황을 고려해 보십시오.
┗ holyjoy 12.07.10. 15:20
도대체 라마드 님의 쓰신 안경돗수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합니다. 연속적 중생론을 주장하는 것이 순간적 중생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라마드 님이 계속 말하는 것은, 더 이상의 생산적 토론이 불가하지 않은가 여겨집니다만, 제가 그 부분 영문을 다시 한 번 올려놓겠습니다.
┗ 새삶 12.07.10. 15:52
토론과 “라마드 님의 안경돗수”가 관계가 있나 보군요.
로빈슨 크로소 12.07.10. 15:59
네. 쬐끔 관계가 있긴 합니다.
‘좁은 의미의 중생(초기 중생)’과 ‘넓은 의미의 중생(회심)’이
1) ‘순간적’으로 혹은 2)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모두 포괄한 것이 <연속적 중생론>인데,
라마드 님은 ‘좁은 의미의 중생과 넓은 의미의 중생과 연속적 중생론이 서로 틀리다.’고 합니다. 물론 근거는 없고요. 그냥 틀리답니다. 왜 틀린지는 절대 말하거나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냥 연속적 중생관이 무엇인지 몰라도 일단 “틀리다.”고 계속 주장하셔서 주인장께서 저리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 로빈슨 크로소 12.07.10. 16:02
라마드 님은 초기 중생과 회심이 순간적으로 일어난 것을 선호하셔서 벌콥이나 후크마의 순간적, 점진적 중생 중에 순간적만 저렇게 계속 주장하십니다.
루디아가 이방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루디아가 언약의 집행 하에 생활하지 않았던, 즉 하나님께 대항해 거역하고 온갖 죄악을 지으며 생활했다고 저렇게 벌콥의 순간적 회심의 과정을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삶 12.07.10. 15:59
헤르만 바빙크 《회심은 그 본질에서 하나이지만, 회심이 일어나는 사람들에 따라서, 그리고 회심이 일어나는 환경에 따라서 그 양식이 천차만별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걸어가는 길은 하나지만, 회심으로 인도되는 방식은 다양하고 각각 경험하는 바도 여러 가지다. …(중략)… 우리 눈이 이런 영적 생활의 부요성을 향해 열리자마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우리 좁은 마음의 기준에 따라서 판단하는 것을 중지한다. 하나의 방법만 알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이 경험했고 그렇게 주장하는 똑같은 경험을 얘기할 수 없다고 해서, 그들을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로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 편협한 마음보다 훨씬 부요하고 넓다.》
로빈슨 크로소 12.07.10. 16:04
{기독교 강요 3} 17:4 《사실 고넬료는 이 당시에 이미 지혜의 성령의 조명하심을 받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된 지혜가 그에게 있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그리고 그는 그 동일하신 성령으로 거룩하게 된 상태에 있었던 것도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는 의를 행하고 있었는데 사도의 가르침에 의하면 성령의 가장 확실한 열매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하는 모든 것들은 전부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들이다. 그러므로 그가 그런 것들을 갖고서 노력을 기울여서 은혜를 받도록 자신을 준비했다는 논리는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일단 칼빈은 고넬료가 성령 받기 전 하나님 경외하는 상태가 위와 같다고 말합니다.
로빈슨 크로소 12.07.10. 16:29
논쟁 요약: 연속적 중생관으로 루디아와 고넬료의 회심 이전 하나님을 공경하고 경외한 상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라마드 님)
루디아: “마음을 여시니 복음 들음” → 초기 중생+회심이 이때 순식간에 이뤄짐.
고넬료: “복음 듣고 성령을 받음” → 초기 중생+회심이 이때 순식간에 이뤄짐.
이 해석은 후크마와 뻘콥 해석임.
위 주장의 단점: 루디아와 고넬료가 좁은 의미의 중생이 시작되기 전 하나님을 공경하고 경외한 상태에 대해서 해석 못하게 됨. 즉 한 구절의 반만 해석하고 반은 해석 못해서 앞뒤 맞지 않는 해석이 됨.
로빈슨 크로소 12.07.10. 16:19
홀리조이와 저)
루디아: “마음을 여시니 복음 들음” → 회심의 순간
고넬료: “복음 듣고 성령을 받음” → 회심의 순간
이 해석은 칼빈과 고신 교수 및 메튜 헨리 주석이 근거 자료임.
위 주장의 장점: 후크마와 벌콥이 해석하지 못한 루디아와 고넬료의 회심 전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공경한 그 상태에 대한 해답을 회심 사건과 연관성 있게 제시.
┗ lamad 12.07.10. 23:15
성경 본문 해석이 다르면서 “후크마와 벌코프가 연속적 중생을 주장한다”고요? ^^
성경 본문 해석이 다르다. → 저는 이 부분이 안개라고 봅니다.
로빈슨 크로소 12.07.10. 16:27
용어정리
<중생의 세분화>
1) 좁은 의미의 중생 = 수태, 초기 중생, 중생 시작, 생명의 씨앗이 심김, 생명의 원리가 심김 등. → 순간적이고 비밀스러워 알지 못함.
2) 넓은 의미의 중생 = 회심, 돌이킴, 새 출생 등. → 순간적일 수 있고, 점진적일 수 있으나, 공통적으로 체험적이고 의식할 수 있음.
1)과 2)의 관계를 벌콥은 말하길
1)은 생명의 원리가 전인격적으로 심어지는 것이라고 표현.
2)는 전 인격적으로 심겨진 생명의 원리가 전인격적으로 눈에 보이게 나타나는 것이라 표현.
위의 1) 과 2)의 상태를 통틀어 표현한 단어가 <연속적 중생관> 임.
새삶 12.07.10. 16:26
그러니까 칼빈에 따르면 ‘고넬료는 베드로에게 복음을 듣기 전에 이미 회심한 하나님의 자녀, 소위 “완전한 중생”을 한 사람이었다.’는 뜻이군요. 바꿔 말하면, ‘고넬료와 그의 온 집안은 베드로에게 복음을 듣기 전에 이미 구원받았다.’는 뜻이구요.
┗ 로빈슨 크로소 12.07.10. 16:38
새삶 님 회심이 일어나는 것이 ‘한 순간에’ 일어나기도 하지만 ‘점진적’으로 일어나기도 합니다. 고넬료나 루디아의 경우 ‘한 순간에 일어났다.’고 해석하면
1) 새삶 님은 루디아와 고넬료가 복음을 듣기 전에 구원 받은 것으로. (단점: 구원 받은 후 복음 들음?)
2) 라마드 님은 복음을 들은 후에야 회심한 것으로 해석이 되어 절름발이가 됩니다.(단점: 회심하기 전 경건 생활은 뭔미?)
그러나 루디아와 고넬료의 회심을 순간적으로 말고 ‘점진적’으로 해석해 보시기 바랍니다.
1) 루디아: 공경( ? ) → 마음을 여심( ? ) → 복음을 듣고 회심
2) 고넬료: 경외( ? ) → 복음을 듣고 성령 받음( ? )
(?) 안에 무엇이 들어가게 되겠습니까?
┗ 로빈슨 크로소 12.07.10. 16:41
순간적 중생 말고, 점진적 중생으로 해석을 하면 그 구절에서 눈에 띄게 신앙적인 부분들이 회심으로 연관지어져 해석이 되는 통일성을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참고로 칼빈은 복음듣기 전에 고넬료가 회심했다고 말하지는 않았는데요.. “지혜의 성령의 조명을 받고 있었다.”고 했지요. 즉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셔서 죄를 각성 중이거나, 회개하는 중이라 할 수 있지요.
┗ 새삶 12.07.10. 16:41
가로 속에 들어갈 제 답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 또는 하나님의 일반(보편) 부르심에 따른 하나님 공경)입니다.
┗ 로빈슨 크로소 12.07.10. 16:45
칼빈 윗글 잘 읽어보시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당시에 이미 지혜의 성령의 조명하심을 받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 성령께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회개하는 경건한 생활을 하는 중.
“그리고 그는 그 동일하신 성령으로 거룩하게 된 상태에 있었던 것도 분명하다.” → 죄를 깨닫게 하시고 회개케 하시는 동일하신 성령으로 인해 베드로에게 복음을 들을 때에 거룩하게 하심.(즉 회심케 하심).
일반 은총이나 일반(보편) 부르심으로는 회심에 이르지 못합니다. 즉 그들이 일반(보편) 부르심만을 받은 상태였다면, 저렇게 회심으로 이어지지 못합니다.
┗ 로빈슨 크로소 12.07.10. 16:46
고넬료나 루디아가 구원을 받은 그것을 기준으로 그들이 구원받기 전 하나님을 공경하고 경외한 것이 일반(보편) 부르심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새삶 12.07.10. 16:43
사도행전 5장 34~39절: 율법교사로서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가말리엘이라고 하는 한 바리새인이 공회에서 일어나 사도들에게 잠깐 밖에 나가 있도록 명령하고, 공회원들에게 말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스스로 조심해라. …(중략)…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이 사람들에게서 손을 떼고 그들을 내버려 둬라. 만일 이 사상이나 행위가 사람에게서 왔다면 없어지겠으나,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며, 도리어 너희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의 말을 옳게 여겨,》
┗ 새삶 12.07.10. 16:44
위 구절에서 드러나는 ‘가말리엘의 하나님 공경’은 어떤 공경일까요?
┗ 로빈슨 크로소 12.07.10. 16:51
가말리엘이 하나님을 공경한 것이 어떤 것인지 가말리엘의 구원으로부터 역추적해 보면 쉽게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가말리엘에 대해서 이후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심지어 제자 바울이 예수님을 믿게 돼 개종한 후에도 아무런 언급조차 없습니다. 즉 위 발언 이후 그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일반적, 보편적 언사적 소명(벌콥의 말을 빌리자면) 중에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성경적으로 근접한 상태라 보입니다.
┗ 로빈슨 크로소 12.07.10. 16:53
그런데 가말리엘 뿐 아니라 야곱의 형 에서도 순간적으로 돌아온 야곱을 반겼고, 사울 왕도 순간적으로 다윗을 반겼습니다. 그는 다윗에게 나는 틀리고 너는 옳다고 했는데, 결국 그러한 것이 회심으로 이어지지 않았기에 사울 왕이 그동안 받았던 은혜가 성령의 일반 은혜였던 것으로 역추적해 해석되는 것입니다.
새삶 12.07.10. 17:09
송영찬 목사 《고넬료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온전히 합당한 성도로 인정을 받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 ???
사도행전 11장 14절: “그가 너와 네 온 집안이 구원받을 말씀을 너에게 일러 줄 것이다.”고 했다.
┗ 새삶 12.07.10. 17:14
‘고신 교수 위원회 [답변]도 옳은 해석인가?’를 잘 생각해 보시길….
┗ 로빈슨 크로소 12.07.10. 18:32
송영찬 목사는 {개혁신보} 편집장 목사시고, 고신 교수 위원회는 아닙니다.
송영찬 목사 경우 제가 앞서 고넬료나 루디아의 회심 이전 경건을 ‘회심’으로 해석할 경우에 속하는 해석을 하신 경우라 보입니다. 그런데 고넬료가 성령 받기 전에 합당한 성도로 인정을 받으면 나중에 받은 성령 세례는 무엇인가? 라는 의문점에 대해서 나름대로 하나님께 합당한 성도로 인정 받았으니, 이제 교회와 한 몸이 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설명으로 성령을 받았다고 말하더군요. 물론 저는 이러한 해석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 로빈슨 크로소 12.07.10. 18:35
그리고 고신 교수 위원회 경우는 초대교회가 생기는 역사적 특이한 상황에서만 이러한 적용을 한 것 같습니다. 즉 예수님 제자들은 중생했으나, 성자께서 주실 성령 세례(성령의 내주)를 받지 못했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아직 죽지 않으시고, 부활하기 전 그리고 승천하기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 세례는 성자께서 비하와 승귀의 속죄 사역을 마치신 후에야 성도에게 내려주는 역사적, 즉 경륜적 시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경륜적 시기 때에 초대교회 당시 성도들을 중생 후 약속했던 성령 세례를 받는 것으로 공통적으로 해석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일부는 인정하나 일부는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 로빈슨 크로소 12.07.10. 18:38
즉 구속사적으로 교회가 생겨나는 시점에서 성령 세례가 중생 후 주어지는 것은 제자들에게는 인정된다 해도 고넬료나 루디아에게는 아니라고 봅니다. 이것은 교리가 틀려서 성경 해석이 틀리다기보다는 교리가 성경 해석에서 어떤 식으로 적용되느냐가 다들 약간씩 차이가 있어서 생기는 차이들이라 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큰 차이점들이 있더군요. 그래서 가장 성경 구절을 가장 완전하게(?) 혹은 안전하게 성경적으로 해석이 되는 쪽으로 해석을 하는 것이 올바르다 봅니다.
┗ 로빈슨 크로소 12.07.10. 18:40
저의 견해는 이미 알려드렸습니다. 그 자료들은 참고 자료일 뿐입니다. 즉 고넬료가 회심 이전에 경건하게 산 상태를 중생한 상태로 보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대부분 많은 분이 평균적으로 고넬료와 루디아의 회심 전 상태를 구원과 연관 있는 상태로 해석들을 하는 쪽으로 많이들 해석하고 있거나 아예 이 부분을 언급하지 못하는 경우 둘 중 하나로 나뉘어진다는 것입니다.
새삶 12.07.10. 17:17
F.F.부르스 《여기에서 더 중요한 사실은 고넬료가 보통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God-fearer)라고 불리는 이방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점이다.ㅡ물론 이 말은 유대교적인 관점에서 본 말이다. 당시의 많은 이방인들은 유대교 공동체로 완전히 개종해 들어가지는 않았으나 유대교 회당 예배에서 보여지는 유일신 사상과 또 유대인 생활 양식의 윤리 기준에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회당에 참석하며 헬라어로 읽는 성경과 기도에 꽤 정통하기도 했다. 또 유대인의 안식일 준수나 음식 규례 등을 세심하게 지키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 새삶 12.07.10. 17:18
F.F. 부르스 《고넬료 경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정규적으로 기도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선을 베풂으로써, 그가 유대교에 동조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그가 할례만 받지 않았을 뿐, 유대교 요구 사항을 다 만족하게 하는 요소들을 갖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 로빈슨 크로소 12.07.10. 18:43
네. 이러한 자료도 도움이 되는 자료라 생각됩니다. 동시에 예수님이 제자들도 역시 유대인의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 또한 마찬가지고요. 유대인의 신앙은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는 신앙이라는 점도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새삶 12.07.10. 17:40
로빈슨 크로소 님 《칼빈의 위의 글 잘 읽어보시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당시에 이미 지혜의 성령의 조명하심을 받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 성령께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회개하는 경건한 생활을 하는 중. “그리고 그는 그 동일하신 성령으로 거룩하게 된 상태에 있었던 것도 분명하다.” → 죄를 깨닫게 하시고 회개케 하시는 동일하신 성령으로 인해 베드로에게 복음을 들을 때에 거룩하게 하심.(즉 회심케 하심).》 → ???
┗ 새삶 12.07.10. 17:40
“왜냐하면 그는 의를 행하고 있었는데 사도의 가르침에 의하면 성령의 가장 확실한 열매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는, “왜냐하면 그는 의(구제)를 행하고 있었는데”라는 칼빈 선생님 말씀은 “그는 그 동일하신 성령으로 거룩하게 된 상태에 있었던 것도 분명하다.”는 칼빈 선생님 말씀을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까?
holyjoy 12.07.10. 18:30
이렇게 대화가 길게 늘어지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괜한 힘만 소진되는 것이 아닌지…. 로빈슨 크로소 님의 인내가 대단합니다. 새삶 님, 알고자 하는 욧점이 무엇인가요? 지금까지 토론에서 충분히 얻지 못하셨습니까?
┗ holyjoy 12.07.10. 18:31
로빈슨 크로소 님이 바치고 있는 시간이나 열정만큼 얻으시는 게 뭔가 싶어서 안쓰럽습니다.
로빈슨 크로소 12.07.10. 18:56
새삶 님, 회개의 기간 중에 고넬료가 행했던 의들이 그가 성령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가는 중이라는 확실한 열매라고 읽으면 이해가 쉽겠나요?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이런 식으로 성경의 모든 인물을 다 거론하실 것인가요?
새삶 12.07.09. 15:15 “지금은 {등업게시판}에서 삭제해 버렸지만, 어제 ‘{자유게시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위 연속적인 중생관 토론에 참여하고 싶다.’며 등업을 부탁했지만, 등업이 안 돼 글 보기가 무척 불편해 그렇습니다.” 하셨는데, 라마드 님께서 알려주신 것인가요?
그 토론은 라마드 님과 제 1:1 개인적 토론입니다. 라마드 님이 다른 분들도 참여해 달라고 일방적으로 선언을 하셨는데, 제 의사는 묻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그렇게 하시더군요.
┗ 로빈슨 크로소 12.07.10. 19:04
본인이 거론하셨다면 본인이 해결하셔야 하는데, 아직 준비가 안돼 있는 것 같아서 토론을 종료한 상태입니다. 새삶 님, 라마드 님께서 참여하라고 하셔서 이렇게 글을 올리시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과 벌콥 {구원론}과 {영혼의 의사} 책을 서로 비교해 보시고 무엇이 다른지 한번 비교해 주시겠습니까?
이렇게 서로 연구하고 오고가는 것이 있어야 토론이지요. 일방적 질문 공세만 있는 것은 토론이 아니지요.
일단 새삶 님에게 제가 제시했던 질문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 더 추가해 답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래 복사해 붙입니다.
┗ 로빈슨 크로소 12.07.10. 19:05
1. 새삶 님이 알고 계셔서 말하고 있는 ‘연속적 중생관’이 무엇인지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2. ‘후크마의 중생론’과 ‘벌콥의 중생론’과 {영혼의 의사}에서 제시한 ‘연속적 중생론’을 비교해 주시기 바랍니다.(추가 질문임.)
3. 고넬료가 성령 받기 전에 그가 하나님을 경외한 것이 어떤 상태였는지 새삶 님이 보기에 올바른 해석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여태 동안 제가 답변을 했으니 이제 저도 답변을 받았으면 합니다.
새삶 12.07.10. 20:18
로빈슨 크로소 님 《이런 식으로 성경의 모든 인물들을 다 거론하실 것인가요?》 → ‘연속적인 중생관 실전 예제를 내가 하면 정답(로맨스), 남이 하면 비정답(불륜)이다.’는 뜻인가요?
로빈슨 크로소 님 《라마드 님께서 알려주신 것인가요?》 → 준회원은 {자유게시판}에 있는 글을 볼 수 없는 걸로 생각하시나 보군요.
로빈슨 크로소 님 《여태동안 제가 답변을 했으니 이제 저도 답변을 받았으면 합니다.》 → 저는 전혀 답변을 하지 않은 것으로 이해해도 될까요?
┗ 로빈슨 크로소 12.07.10. 22:22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군요. 스스로 결정하십시요. 이후로 님의 글에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 lamad 12.07.10. 23:59
새삶 님께서 제가 할 일을 모두 끝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할 일이 없습니다. 새삶 님이 뉘신지, 감사드립니다.
============
이 토론 때 ‘새삶’으로 위장(?)한 나는 라마드 목사님께 전화를 드렸다. “홀리조이 손성은 목사님한테 {양무리 마을}에서 강퇴 당해 도와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는 전화였다. “토론을 하시면서 곧바로 대응하지 말고 차분히 대응하십시오.”라는 전화였다. 또한 “홀리조이 님과 로빈슨 크로소 윤영상 목사님이 궁지에 몰리시면, 라마드 목사님을 조롱하는 인신공격성 글을 쓰실 것이니까, 그런 인신공격성 글에는 신경도 쓰지 마십시오.”라는 전화였다.
또한 ‘{양무리 마을}을 반대하는 모든 일은 강릉예명 님 배후조종이다.’는 손성은 목사님과 윤영상 목사님 의심도착증을 알고 있었지만, 강릉예명 목사님께도 전화를 드렸다. “{양무리 마을}에서 라마드 목사님과 새삶 님이란 분이 연중론 비평 토론을 하고 계시는데, 저도 참여할까 합니다.”는 전화였다. ‘2011년 12월 말에 카페 {강릉예명}에 써 둔 내 비평문 <존 머레이 {구원론}을 두고 피터 마스터스는 ‘텍스트 비평’에 충실했는가? ①, ②>를 {양무리 마을}에 올려 토론의 실타래를 풀어야겠다.’는 생각에서 드린 전화였다. 강릉예명 목사님께서는 “라마드 목사님이야 이미 참석한 것 어쩔 수 없지만, 사계 님은 절대 참여하지 마세요.” 하셨다.
그런데 “제 비평문 <존 머레이 {구원론}을 두고 피터 마스터스는 ‘텍스트 비평’에 충실했는가? ①, ② >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내 질문에 강릉예명 목사님께서는 “그 비평문 어려워서 읽다가 도중에 그만뒀어요. 사계 님 글은 어려워요.” 하셨다. 나는 실망이 컸다. 이 비평문을 쓰면서 혼란스러운 내 정신을 깨닫고 ‘좌충우돌 혼란스러운 서술을 하는 {영혼의 의사}, {영혼의 의사} 지은이 피터 마스터스 목사 영혼(정신)을 지배한 미혹의 영이 내 영혼까지 지배하려고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 속에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애써 써둔 비평문을 끝까지 읽지 않으셨다는 점에서였다.
-2013년 7월 18일에 씀-
위 토론 흐름을 보면, 내가 사도행전 11장 14절 “‘그가 너와 네 온 집안이 구원받을 말씀을 너에게 일러 줄 것이다.’고 했다.”를 적어 ‘이방인 고넬료의 경건(하나님 경외)은 유대교의 경건으로서 구원(중생)받지 못한 경건임’을 증명해 연중론에 치명상을 입혔음에도, 한국 교회 연중론 좌장 로빈슨 크로소 윤영상 목사님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한국 교회 연중론 수장 홀리조이 손성은 목사님과 좌장 윤영상 목사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건했던 고넬료의 상태’를 이른바 “불완전 중생으로서 초기 중생: 수태” 뒤 이른바 “열 달 임신 기간”으로 주장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에게 복음을 들은 뒤 성령 세례를 받은 때’를 이른바 “완전 중생: 출산”으로 주장했다. 그런데 윤영상 목사님이 “연중론을 지지하는 글”로 내세우신 글들, “그는 그 동일하신 성령으로 거룩하게 된 상태에 있었던 것도 분명하다.”라는 칼빈 선생님 글과 “고넬료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온전히 합당한 성도로 인정을 받고 있었음이 확실하다.”라는 송영찬 목사님 글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건했던 고넬료의 상태’를 하나님 나라로 들어간 상태, 구원받은(중생)한 상태로 보는 글들이다. 그러므로 칼빈 선생님과 송영찬 목사님 글은 결코 연중론을 지지하는 글이 아니다. 그런데 위 토론 흐름을 보면, 내가 ‘칼빈 선생님과 송영찬 목사님 글은 결코 연중론을 지지하는 글이 아니라는 행간 의미를 담은 댓글’, 이를 지적하는 댓글(12.07.10.17:40에 쓴 댓글)을 썼음에도, 윤영상 목사님은 그 행간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새삶’이 {양무리 마을} 카페지기 홀리조이 손성은 목사님에게 강퇴당한 ‘사계 四季’ 나 朴埰同임이 밝혀진 뒤였다. 라마드 목사님께서 나에게 전화를 주셨다. “새삶, 사계 님이 적은 사도행전 11장 14절을 읽자마자 토론은 끝났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그리고 토론 종료를 선언했어요.” 하셨다. 또한 “강릉예명 목사님께 전화를 드려 이 일을 알려드렸어요. 강릉예명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사계 님을 크게 쓰셨네요.’ 하신 뒤 하나님께 감사드리셨어요.”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