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오늘 우리나라의 프로야구를 처음 경험해 보는데 팀 분위기가 굉장히 좋아요. 앞으로 NC 다이노스와 함께 한국무대에서 뛸 생각을 하니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 본 인터뷰 내용은 2011년 10월에 작성되었습니다. )
NC 다이노스 가을캠프에서 만난 정성기 선수의 얼굴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힘든 표정이 역력했지만 그의 입가에선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이상하게도 운동을 하 면 할수록 힘이 난다는 정성기 선수. ‘힘들지만 야구를 할 수 있다.’라는 사실에 행복해하는, 그의 특별한 야구
스토리를 여러분께 들려드리고자 한다. 동의대 졸업 후 바로 2002년 미국 프로야구 애틀랜타에 입단한 정성기 선수. 모든 야구선수들의 로망인 꿈의 무대에 진출했다는 기대감보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낯선 나라에 간다는 두려움이 먼저 들었다. “MLB는 모든 야구선수들의 꿈의 무대이니까 제의를 받은 것에 행복했지만 사실 가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막상 ‘가서 잘할 수 있을까?’라는 불안함과 ‘세계 최고의 선수들만 모인 그 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들이 저를 작게 만들었죠.
그런데 애틀 랜타에서 대학시절 내내 오퍼(Offer)가 들어와 더 이상 거
절을 못할 정도가 되어버렸어요.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번 열심히 해보자! 나는 할 수 있어!’라는 굳은 다짐을 하고 태평양을 건넜습니다.” 하지만 굳게 마음을 먹고 건너간 미국생활은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한국문화와 전혀 다른 미국문화는 당장 생활하는 부분에 있어 큰 장애가 되었다. 씩씩하던 그에게도 첫 번째 시련이 찾아 왔다.
“은행업무와 같은 사소한 일들조차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답답했어요. ‘이 먼 미국까지 와서 작은 은행업무 조차 나 혼자서는 못 보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여기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시합 도중 타자가 친 공이 제 오른쪽 손을 강타했어요. 낯선 환경 속에서 부상과 문화적 차이를 겪다보니 첫 해는 많이 부진했습니다.” 하지만 누구보다 정신적으로 강했던 정성기 선수였다.
태평양을 건너면서 스스로 굳게 다짐했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다시 한 번 스파이크 끈을 조였다.
그 결과 그 다음해인 2003년, 그는 싱글A로 승격하여 1승 4패, 24세이
브라는 좋은 성적을 내게 된다. “2003년, 팀에 정식으로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롱릴리프 투수로 활동하다가 시즌 후반에 가서 마무리 투수로 활약했어요. 애틀랜타 투수코치 중 ‘켄 윌리스’라는 코치님이 계신데 그분이 항상 저에게 좋은 말씀들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야구는 머리로 해야지 절대 몸으로 하는 운동이 아니다. 정신적으로 많이 생각하라.’면서 말이죠. 그래서 항상 공을 던질 때 마다 코치님이 해주신 조언들을 되새겼어요. 그 결과 2003년 시즌에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정성기 선수가 활동했던 팀은 애틀랜타에서도 싱글A에새로 생긴 팀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많은 유망주들이 그와 함께 입단했다. 그리고 그 유망주들 중 지금 애틀랜타 의 포수인 ‘브라이언 매켄’과, 우익수로 활약 중인 ‘제프 프랭코’가 있다. 그의 동기들이 싱글A를 거치고 MLB로 올라가 맹활약을 펼치는 동안, 아쉽게도 그는 군복무 문제 때문에 한국행 비행기에 올라야만 했다. “군대도 상무나 경찰청이 아닌 현역으로 가게 되었어요. 이미 입대하던 순간부터 부대에선 제가 야구선수인걸로 유명하더라고요. 한 번은 선임이 장난으로 제게 돌 하나를 쥐어주면서 ‘저기 산으로 한 번 던져보라’고 하셨어요. 선수 자존심이 있어서 던지기 싫었지만 하늘과 같은 선임 말이니 어쩌겠어요.. 돌을 던졌죠. 그런데 제가 돌 던지는 모습을 보고 모두가 깜짝 놀라는 거예요. 이렇게도 돌이 날아갈 수 있냐며 말이죠.
그 당시 밑의 부대에선 지금 롯데 자이언츠의 김사율 선수가 군 복무 중 이었는데 소문이 그곳까지 났다며 나중에 이야기 해주더라고요. 하하하. 비록 몸은 군대에 있었지만 야구는 잊지 않고 매일 생각했어요.”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할 시기에 그에게 국내 구단에서입단 제의가 들어왔다. 하지만 정식‘선수’가 아닌‘연습생’으로 들어오라는 제의였다. 자존심이 그 누구보다 상했다.
그래서 일주일 만에 여권을 만들고 다시미국 애틀랜타로 돌아갔다. ‘내가 꼭 성공해서 보란 듯이 보여주리라.’라는 마음을 먹고 다시 공을 던졌다. 그 결과 그는 2007년 싱글A 마이클 비치에서 22세이브, 평균자책 1.15를 기록하며 애틀랜타 산하 싱글A 최우수 선수로 선정 되었다. 그리고 시즌 말미에는 더블A 미시시피로 승격했다.
하지만 승승장구 하던 그에게 두 번째 시련이 찾아왔다. 바로 ‘에너하임’으로의 이적 통보였다.
“07년도 시즌엔 만족하는 성적을 냈지만, 08년도 시즌은 작년 시즌에 비해 많이 부족했어요. 솔직히 얘기 하자면 제가 마음이 급했죠. 이번기회에 무조건 메이저리그로 올라가야겠다는 생각만 했어요. 구단에서도 곧 메이저리그로 올려준다는 이야기까지 했으니 더 급한 마음이들면서 하나씩 밸런스가 무너지기 시작했죠. 또 제가 홈경기의 성적이 좋지 않았어요. 그 당시 남의 집에서 생활하다 보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죠. 잘해주셨지만 우리집은 아니었으니 눈칫밥을 먹었어요.
그나마 방어율 유지할 수 있었던 건(평균자책 4.41) 원정경기에서 모두 무
실점이었기 때문이에요.” 그에게 있어서 애틀랜타는 전부였다. 그리고 또한 팀 내에서 입지가 좋았다. 그래서 더욱이 이적 통보는 받아드리기 힘들었다. 호텔방에 틀어박혀 일주일동안 미래에대해 고민했다. “모든 애틀랜타 스텝들이 가족처럼 대해주셨어요. 08시즌에 부진하긴 했지만 이적 통보를 받을 정돈 아니었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구단주가 바뀐 것 때문이었어요. 예전의 구단주께선 메이저리그 게임을 안보시고싱글A인 우리 게임을 보러올 정도로 절 많이 아껴주셨거든요. 그런데 구단주가 바뀌면서 새로 오신 구단주가 자신의 라인(Line)으로 선수를 채우고 기존 선수들을 트레이드 했죠.
미국에서는 라인이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우리 팀에서도 이런 대우를 받는데, 에너하임으로 이적해봤자 지금보다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이럴 바엔 나이도 있으니 국내로 돌아가서 야구를 해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행을 결심했지만 해외파 선수는 2년간 국내에서 뛸수 없다는 KBO의 규정이 또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그의 세 번째 시련이었다. 백방으로 국내무대에서 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봤지만 방법은 없었다. 다시 2년을 쉬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모교인 효천고등학교를 찾아가
후배들을 지도하며 연습을 했다. 그리고 올해 초, 그의 마 이너리그의 경력을 인정받아 일본 프로야구 ‘니혼햄’ 에서 먼저 테스트 요청이 들어왔다. |
“니혼햄에 합류해 함께 훈련을 해보니 정말 좋았어요.
팬들도 매너가 좋고, 팀도 가족과 같은 분위기에서 야구
를 하고 있더라고요.” 결과적으로 입단하지 못해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야구공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를 오랫동안 지켜본 중고등학교 후배인 NC 다이노스 스카우터가 그에게 NC 다이노스 트라이 아웃을 받아 보라며 권유했다. 그래서 올해 9월, 어쩌면 그에게 마지막 기회일 수 있었던 트라이 아웃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트라이아웃 하기 전날, 오후 6시에 유상현 선수와 순천터미널에서 창원 가는 버스를 탔어요. 그런데 자리가 없어 맨 뒷자리 가운데 석에 앉게 되었죠. 그날은 비가 많이 내리던 날이었어요. 사실 평소에 안전벨트를 잘 매지않는데 그날따라 기분이 이상해 바로 안전벨트를 맸습니다.
그리고 잠시 잠을 청했는데 눈을 떠보니 차가 빗길에 미끄러지고 있더라고요. 처음엔 꿈인 줄 알았어요. 한국무대에서 뛰기 위해 2년이란 긴 시간을 기다렸는데, 기회도 얻지 못하고 이대로 죽는구나 싶었죠.” 빗길에 미끄러진 버스는 낭떠러지 아래로 점점 굴러가고있었다. 그리고 버스가 낭떠러지 아래로 넘어가는 순간,그는 이대로 끝인가 싶었다. 다행히 하늘이 도와 버스는 전봇대 전선에 걸리게 되었고, 그는 낭떠러지 바로 앞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구급차를 타고 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었어요. 그 순간에도 ‘빨리 가야되는데.. 마지막 기회인데..’라는 생각만 들었죠. 그래서 치료도 받지 않고 병원에서 창원으로 넘어갔어요. 의사선생님이 안된다고 말렸지만 그 당시제게 중요했던 건 아픈 몸보다 마지막 기회를 잡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안전벨트를 매서 많이 다치지 않아 다
행이에요.”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그래도 컨디션은 최상이 아니었다. 마지막 기회이기에 트라이아웃에서 정신력으로 공을 던졌다. 그동안 야구했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 공을 던지고 내려왔다. 그리고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그는 결국 ‘합격’을 만들어냈다. “합격전화를 받는 순간 울컥했어요. ‘이제 드디어 한국무대에 설 수 있게 됐구나!’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저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신 부모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어요.
어렸을 때부터 야구를 했는데 사실 야구는 돈이많이 들어가잖아요. 그땐 몰랐는데 철이 들고 난후 부모님께 굉장히 죄송했죠. 저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될 고생들을 하셨으니 까요.
부모님께 제가 잘사는 모습을 보여드 리는 것이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다사다난했던 시절을 버틸 수 있었던 건 다 부모님 덕분이에요.”
NC 다이노스를 통해 국내 프로야구에 첫발을 내딛는 정성기 선수. 그에게 있어서 NC 다이노스는 특별하며 신기하다고 한다. 그가 야구를 하면서 몸을 담았던 모든 팀들이 전부 창단 팀이거나 창단한지 둘째 해가 되는 신생팀들이었다. 그래서 NC 다이노스는 운명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제가 그동안 수많은 시련들을 겪었잖아요. 그 시련들에 넘어지지 않았던 건 모든지 포기하지 않고 꾸준하게 했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 오늘 운동해야할 목표량을 정해놓았는데, 훈련이 많아 피곤해도 포기하지 않고 꼭 목표치를 이루고 잤어요. 포기하고 침대에 누우면 잠도 오지 않는 성격이라.. 후배들이 저 때문에 굉장히 피곤해 하죠. 하하하.
그래도 이 포기하지 않는 성격 때문에 NC다이노스의 일원으로 합류하게 되었잖아요. 요즘 너무행복합니다.”
그는 이제 NC 다이노스의 최고참선수가 되었다. 띠 동갑을 훌쩍 넘는 어린 후배들과 함께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리고 솔선수범하여 후배들을 잘 이끌기로 다짐했다. “내년 2군 리그에서 뛰게 되지만, 저는 2군이든 1군이든 야구는 다 똑같다고 봐요. 2군 경기라도 후배들을 잘 이끌어서 열심히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봤을 때 ‘NC 다이노스는 2군이라도 이렇게 열심히 하는구나, 미래에 좋은 팀이 되겠구나!’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최고참으로서 선수들을 잘 이끌겠습니다. 기대 많이 해주세요.” ‘그럼 팀이 아닌 정성기 선수의 개인적인 꿈은 무엇인가요?’라는 나의 질문에 그는 자신의 백넘버를 가리켰다. “제 뒤에 백넘버 보이세요? 41번이에요. 왜 제 백넘버가 41번이냐면, 제 목표가 41살까지 그만 두지 않고 야구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아직 보직은 정해 지지 않았지만,
만약 마무리 보직을 맡게 된다면 한해에 20세이브 이상 올리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결과적으론 꾸준히 노력하는 선수가 되고 싶습니다.”
이제 올라가는 롤러코스터만 탈 청춘(靑春) 정성기 선수. ‘여러분 모두가 지금 인생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롤러코스터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바로 올라갈 때가 있고 내려갈 때가 있다는 것인데요. 하지만 더 중요한 특징이 있어요. 바로 안전벨트가 존재한다는 점이에요. 안전벨트가 확인이 되지 않으면 롤러코 스터는 출발 하지 않아요. 알게 모르게 여러분 허리에는 안전벨트가 매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시고 여러분 인생의 롤러코스터를 즐기시길 바라겠어요.’
위에 있는 이야기는 정성기 선수와 인터뷰를 나누는 동안 내가 계속 떠올렸던 개그맨 김국진 씨의 롤러코스터이야기이다. 그의 시련이 가득한 야구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바로 정성기 선수는 허리에 안전벨트가 매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많은 시련들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다. 정성기 선수의 기사를 마무리 하면서 나는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동안 내 허리에도 안전벨트가 매어져 있었는데 내려오는 걸 두려워하지는 않았는지 말이다.
정성기 선수의 기사를 읽은 독자 여러분도 우리의 허리엔 안전벨트가 매어져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인생의 롤러코스터를 두려워하지 않은 정성기 선수. 그러기에 그는 아직도 청춘(靑春)이다. EDITOR 최선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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