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9
자식 교육을 위해 미국에 이민 가서 사는 가정에서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녀석이 말썽을 피우길레 엄마가 그 녀석을 매로 때리며 야단쳤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들녀석이 금방 경찰에 전화하여 '엄마가 자기를 때렸다'고 신고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곧 경찰이 달려와서 경찰서에 끌려가 곤욕을 치르고 나왔습니다. 그 어머니는 얼마나 화가 나든지 그 아이를 데리고 한국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인천 공항에 내리자마자, 아들 볼기를 실컷 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길로 비행기를 타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한국에서도 자기 자식을 함부로 때릴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몇 해 전 신문 기사의 내용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가게에서 퇴근하여 집에 오니 집에는 딸 혼자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딸 방에 남자아이가 있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집에 딸과 남자아이가 함께 있는 것을 본 아버지는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남의 아들을 때릴 순 없어, 무엇을 딸에게 던졌는데 그만 딸의 이마에 맞아서 피가 쏟아졌습니다. 놀란 아버지는 딸을 데리고 병원에 가서 치료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딸은 병원에서 나와 파출소에 가서 아버지를 고소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딸의 고소로 폭행치상 혐의로 형사 입건되었습니다. 요즘 고소 안 당하고 부모노릇 하는 것 감사해야 할 판입니다. 자식 키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엊그저께 7월 15일자 한국일보에 [범행 순간에도 웃고 떠들고…친구 엄마에 강도 짓까지]라는 제목의 이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또래 여학생을 집단폭행하고 숨지자 미션 수행하듯 시신을 유기하고(홍은동 사건), 여학생을 성폭행해 투신 자살케 하고, 엄마를 살해한 후 태연하게 치킨을 시켜먹고…. 최근 1315세대(13세-15세)가 저지른 흉악범죄 사례는 일일이 들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성인범죄 못지 않게 잔혹할 뿐 아니라 범죄 뒤의 행동양태는 죄의식 결여를 넘어 엽기적이기까지 하다. 강도나 성폭행, 심지어 살인까지 1315의 강력범죄는 일반의 예상을 뛰어넘은 지 오래다. 특별한 범행동기도 없다. 홍은동 사건의 현장검증에선 피의자들이 범행을 뉘우치거나 하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아 경찰조차 당황했다는 후문이다... 지난달 15일 울산의 한 초등학교 6학년 남학생(13) 2명은 정신지체장애가 있는 동급생 A양을 학교 옥상으로 끌고 가 번갈아 성폭행했다. 사흘 뒤 또다시 A양을 성폭행 하려다 걸린 이들이 댄 이유는 '인터넷 동영상을 보고 호기심이 생겨서'였다. 이 정도는 1315 범죄 중에 약한 축에 속한다. 지능적이고 계획적인 범행도 서슴지 않는다. 올 4월 가스관을 타고 올라가 원룸 20여 곳을 턴 김모(15)군 등 4명은 직장인들이 출근하고 없는 오후 시간대를 골라 초인종을 눌러보고 응답이 없으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망을 보는 사람과 침입하는 사람 등 역할까지 나눴다. 대상도 가리지 않는다. 친구 어머니를 상대로 강도 짓을 벌이거나 '힘이 약해 못 쫓아올 것 같았다'며 80대 할머니의 돈을 뺏은 중학생(15)들도 있다. 1315가 저지른 강력범죄의 심각성은 통계로도 확인된다. 대검찰청이 내놓은 '범죄분석'에 따르면 2008년 기준 소년(12세 이상 20세 미만) 강력범은 3,016명으로 전년에 비해 56% 늘었다. 범죄 유형은 강도가 1,226건, 강간 등 성폭력 1,589건, 살인도 12건이나 됐다. 문제는 이들의 범죄가 너무도 끔찍한 양상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청소년들이 이렇습니다.
지금 전 세계가 심각한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청소년 문제가 이스라엘에는 없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 이유는 저들의 교육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민족 교육은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밤낮 외국인의 침략으로 성전이 파괴되고 학교가 없어지고 성벽이 무너지는 환난 속에서 교육만은 계속해 왔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오늘에 이르도록 만든 위대한 교육은 무엇입니까? 그 교육은 바로 '쉐마'라고 부르는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한 것입니다. 쉐마는 신명기 6장 4-9절까지의 말씀을 말합니다. 본래 '쉐마'란 "들으라!"는 뜻입니다.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나라 부모님들이 자녀교육에 쏟는 열의는 가위 세계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단연 금메달 감입니다. 이처럼 교육에 온갖 열성을 다 쏟고 있음에도 우리나라에서 노벨상 고학상 하나 타지 못하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이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교육의 방법이 잘못됐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열의는 있는데 지혜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교육에 대한 바른 목적과, 바른 가치관, 바른 철학이 먼저 정립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을 보십시오. 미국에 사는 이스라엘사람은 인구비례로 볼 때, 전체 미국인 가운데 이스라엘 사람이 차지하는 비율은 3%밖에 되지 않으나, 미국 전체 대학교수의 30%가 이스라엘사람이요, 노벨상 수상자의 24%가 이스라엘사람입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의 자녀교육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합니다.
유대인들은 누구도 추종하지 못할 만큼 교육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은 나라 없는 민족으로 2천년 동안 세계를 유랑하고,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히틀러 치하에서 600만이 학살당하면서도 민족의 생명을 이어갔습니다. 나라 없는 서러움, 그 비통한 눈물은 시온주의로 결속되어 저들은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을 회복하고 거기에 오늘의 이스라엘을 건국하였습니다. '다시는 당하지 말자'는 피맺힌 외침과 각오는 예루살렘 통곡의 벽에서 다짐하며 기도하는 행렬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수상의 월급이 운전기사 보다 적고, 대학교수의 월급이 노동자보다 적어도, 그토록 헌신적인 정치를 하고 성실한 학문 연구가 이루어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철저한 신앙교육 때문입니다.
'교육'을 몇 가지로 정리해본다면, 첫 번째는 생물학적 교육이 있습니다. 신체적인 동작과 기술을 훈련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엄밀히 말해서 '교육'이 아니라 '길들이기'로서, 단순한 모방을 통한 기술 전수일 뿐입니다. 인간교육이라기보다 편리한 기구를 만드는 수단으로서 길들이기입니다. 옛날 어린아이들은 "너 장차 어떤 사람이 되겠느냐"라고 물어보면 그저 '훌륭한 사람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요새는 "필요한 사람이 될래요"하고 대답합니다. 대답은 그럴듯한데, 문제는 그 필요하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취직이 잘 되고, 돈 잘 버는 사람이 되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필요치 않으면 죽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듯 사람을 생산의 수단만으로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이처럼 유용한 생산 도구로 훈련하는 것은 결코 바른 교육이라고 할 수 없고, 인간을 도구화시키는 훈련일 뿐입니다.
두 번째는 철학적 교육이 있습니다. 생각하는 존재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지식을 주고 정보를 공급하고 합리주의적 논리성을 키워서 그로 하여금 생각할 줄 아는 지성적 존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성은 상당히 수준이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인간성은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 못되어졌습니다. 어떤 어머니가 외출을 했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초등학교 3학년인 딸아이가 제 나이에 걸맞지 않는, 아주 두꺼운 책을 읽고 있더랍니다. '무슨 책을 보나?'하고 옆에서 보았더니, 스포크 박사의 [육아전서]였습니다. 어머니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너 왜 그런 책을 보느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어린아이가 대답하는 말이 "교육적으로 내가 교육을 잘 받고 있는지, 잘못 교육받고 있는지 그것을 살피는 거예요"하고 대답하더랍니다. 요새 아이들이 이렇듯 지나칠 정도로 이기적입니다. 똑똑하고 총명하게는 가르쳤는데, 그 근본에 있어서 인간성을 잃고 자기 중심적이고 유아독존적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이상적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인격적 교육이 있습니다. 전인교육이라고도 합니다. 인간이 가진 본래의 잠재력을 계발해보겠다는 것입니다. 유태계 독일 신학자 마틴 부버가 주장하는 대로, '나와 그것'(I and It)이 아니라 '나와 너'(I and Thou)라는 인격적 대상으로 여기며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를 책망할 때도 논리적으로 설명을 하고, 친절하게 사랑을 베풀어서 깨닫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어린이들에게 많은 자유도 주고, 스스로 학습하고 깨닫도록 소위 교육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학생이 선생님을 평가하고 선택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교육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해왔는데 세상은 점점 더 어지러워집니다. 옛날보다 얼마나 많은 자율과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인간으로 교육하지만 인간은 점점 악해가고 있습니다. 인격과 자율을 가르치면서 스스로 자유와 정의를 추구하도록 교육하는 데도, 이웃과 공동체를 위해서는 희생하거나 봉사할 줄 모르고, 예의도 윤리도 모르는 이기주의자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교육에 많은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교육 전문가들까지도 '교육이 손들었다, 도저히 어떻게 해볼 길이 없다'라고 탄식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어느 학교에서 운동장 둘레의 울타리를 철거했습니다. 울타리가 아이들에게 정신적으로 구속감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울타리 철거 후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울타리가 있을 때는 아이들이 운동장 전체에 흩어져서 놀았는데, 울타리를 철거한 후에는 운동장 가운데서만 모여 노는 것이었습니다. 이 실험으로 아이들에게 울타리는 구속감이 아니라 안정감을 준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울타리가 없어지자 아이들은 오히려 운동장의 활동 범위를 좁혀 자기들끼리 모여 서로 의지한 것입니다. 도브슨 박사는 "아이들에게 울타리가 필요하다"는 자신의 명제를 실험을 통하여 증명하였습니다. 아이를 구속하지 않고 자유롭게 하며, 그들의 요구에 응하는 것은 좋은 교육이나 사랑에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가정의 규율, 부모의 훈계와 징계, 사회 공중 도덕 등의 울타리는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채찍'이란 말은 교육학적으로도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하나의 남은 길이 있습니다. 바로 신학적 교육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계율이요 계명이요 명령입니다. '가라, 먹지 말라, 오라, 행하라, 떠나라, 사랑하라' 명령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십계명은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따로 설명이 없습니다. '그리하면 살리라'고 말씀하실 뿐입니다. 말씀으로 스스로를 다스리게 하고, 말씀과 성령 안에서 성장하도록, 말씀을 심고, 그리고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훈련하는 이것이 신학적 교육입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무에 가위질을 하는 것은 나무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야단맞지 않고 자란 아이는 똑똑한 사람이 될 수 없다." 옳은 말입니다. 히브리서 12장에서는 "징계는 다 받는 것이어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12:8)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징계는 있어야 하고, 자녀들은 징계 속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몇 해 전에 미국에서 목회자 수양회에 삼백여 명의 목사님들이 모였는데, 거기에 참석한 목사님 한 분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하소연을 했습니다. 20년 전 한국을 떠나올 때에는 큰 욕심이 두 가지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미국에 가서 공부를 좀더 해보겠다는 생각이 있었고, 또 하나는 셋이나 되는 자녀들을 제대로 가르쳐보겠다는 생각이었답니다. 처음에는 부부가 무척이나 고생을 했는데, 교민들이 제법 많아져 교회도 성장하게 되었고, 아이들도 열심히 공부해서 일류대학에 들어가 박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미국에 오기를 잘했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자식들이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는데 부모가 골라준 배우자는 마다하고 미국 여자와 결혼을 하더랍니다. 그것까지도 참았는데 얼마 후부터는 아예 교회에도 나오지 않더니 급기야 이혼을 하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미국에 사는 교포 2세들 가운데 50퍼센트가 국제결혼을 하고, 그중 80퍼센트가 이혼을 한다고 합니다. 인격 파탄의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목사님인 그 아버지가 보다못해 한마디 충고를 했더니 그 아들 하는 말이 "우리를 왜 국제 고아로 만들어서 이 고생을 시킵니까?"라며 마구 대드는데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그만 정신이 확 들더랍니다. '이럴 수가 있나? 2O년 동안 얼마나 고생하면서 저희들을 키워 왔는데 이제 와서 이런 말을 듣게 되다니…' 가슴이 미어지게 아프더랍니다. 주위에 앉아 있던 몇 분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함께 울더랍니다. 다 같은 신세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잃어버린 세속적인 공부와 성공은 그 인격과 인생을 병들게 하고 맙니다.
믿는 일과 배우는 일은 같은 사실의 양면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일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제자라는 말은 배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에게 배우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11:29)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요13:13)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인생의 스승으로 삼고 혹은 선생으로 작정하고 그의 가르치심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말로서, '예수를 배운다'는 말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하신 중요한 일이 교육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하신 일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즉 회당과 같은 곳에서 설교하신 것입니다. 둘째,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천국의 진리를 교육하신 것입니다. 셋째, 백성들을 섬기셨습니다. 병을 고치시고 마귀를 쫓아내시고 슬픈 자를 위로하시며 낙심한 자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이로 볼 때, 예수님의 삼대 사업 중의 하나가 교육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교육하시는 방법으로 12사도를 택하시고 그들과 같이 3년을 살면서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생활 교육을 하신 것입니다. 같이 먹고 같이 마시고, 웃고 놀고 성내고 울고 글 배우고, 묻고 노래하고 하면서 실제로 인간 교육을 하셨습니다. 마치 오늘의 캠프 생활처럼 3년 동안 생활 교육을 실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시기를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고 최후의 명령을 주시기도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쉐마 교육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째, 무엇을 가르쳐야 합니까? 본문 1절은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신6:1). 여기서 '명령과 규례와 법도'란 성경 여러 곳에서 서로 혼용되고 있는 병치어(倂置語)로서, 의식법과, 시민법, 그리고 기타 제반 규례들을 포함한 하나님의 전 율법을 가리키는 강조적 표현으로, 곧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우선적으로 가르쳐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 교육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본문 2절과 5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2, 5).
우리는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도 많은데, 그 외에 학원이나 개인 교습을 통해 가르치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피아노에 바이올린, 미술학원, 태권도, 속셈학원, 웅변, 서예, 컴퓨터 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교육은 간단합니다. 오늘 말씀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육의 핵심이요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든 교육이 하나님의 말씀인 이 율법에서 비롯되었고, 이 율법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글이 달리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읽기 위해 필요한 것이기에, 처음부터 성경을 가지고 글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성 어거스틴이 말한 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나머지는 네 마음대로 하라"고 했는데,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기만 한다면, 다른 어떤 것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구세군의 창설자인 부스 대장의 아내인 캐서린은 8명의 자녀들을 잘 양육하여 사회에 크게 공헌하게 하였는데, 사람들이 자녀들을 어떻게 그렇게 잘 양육했는지를 묻자 "마귀가 와서 나쁜 생각을 넣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기에 그 속에 부패성과 죄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때문에 어릴 때부터 하나님 말씀으로 철저히 신앙교육을 하지 않으면 그 부패성과 죄성이 자라, 나중에 바로 세우기가 어렵게 됩니다.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하여 바로 잡아 주지 않으면, 결국에는 사회가 원치 않고, 하나님이 원치 않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가치관이 혼동된 세상에서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생의 바른 길을 가도록 가르쳐야만 합니다.
어떤 조종사가 비행 훈련을 받을 때, 훈련 교관이 "비행기 조종석에 앉아서는 절대로 자신의 감각을 믿지 말라. 특히 악천후 속에서 비행할 때나 고도가 높아질 때, 공중의 한복판에서 항로를 이탈했을 때, 더욱 자신을 믿지 말라. 그때는 계기판만 믿어라"고 거듭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조종사들과 마찬가지로 이 조종사도 비행 감각에 대해서 자신만만해 했습니다. 훈련을 통해서 이미 비행 감각을 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시험 비행 때도 감각에 의지하여 무난히 비행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조종사가 한번은 비행을 하는 중에 앞뒤를 분간할 수 없는 짙은 안개 속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조종사는 자신의 비행 지식을 총동원하였지만, 방향조차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계기판을 보아라. 계기판을 믿고 따라가라"고 한 비행학교 훈련교관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것과 계기판의 기록은 판이하게 달랐으나 조종사는 계기판을 보면서 방향과 고도를 잡고 침착하게 조종하였더니, 곧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인생 길을 가는 동안 악천후와 같이 혼란한 상황을 만날 때, 사람들은 자신의 지식이나 감각을 따르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 길에 계기판은 자기 생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생의 계기판으로 삼아, 말씀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길을 잡아야 바로 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모든 사고와 행동의 기준으로 삼고 나아갈 때만 끝까지 바르고 안전한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지방에 사는 어떤 장로님은 자기 딸이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여 기숙사로 들어가게 될 때, 두 가지를 약속했다고 합니다. 하나는 매일 밤 10시에 부모와 딸이 서로를 위해 기도하자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매일 아침 잠언을 한 장씩 읽는 것이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이렇게 객지 생활을 하는 딸의 인격과 생활을 하나님께 맡기도록 했던 것입니다. 딸은 그 약속을 잘 지켰습니다. 매일 밤,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부모를 위해 함께 기도함으로써 일상의 생활도 경건해졌습니다. 또 31장으로 되어 있는 잠언을 한 달에 한 번, 일년이면 열 두 번을 읽게 되면서,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둘째, 어디에서 가르쳐야 합니까? 우리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할 곳은 어느 곳에서나 가르쳐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6:7). 그야말로 집에서나 길에서나, 누웠을 때나 일어날 때나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게 이 율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먼저 가정에서 가르치고, 가정에서만 다 가르칠 수 없기에 우리는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강론할 것이라'는 말씀은 자신의 가족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듭 주지시켜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일상 삶과 사고(思考) 가운데서 늘 말씀에 유의하며, 또한 이를 준수하는 생활에 힘쓰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스펄전(Spurgeon)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정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지배될 때에 천사들이 그들과 동거하며 그들의 가족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때에 천사가 그 일원이 될 것이다." 경건한 가정 분위기를 먼저 만들어야 교육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가르치라고 합니다. 그리고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구체적으로 생각해봅시다. 누가 가르치는 것입니까? 부모님이 가르칩니다. 부모님이 가르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어디에서 가르칩니까? 가정에서 가르칩니다. 무엇을 가르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칩니다. 먼저 행하고 본을 보여주며 가르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토라(율법), 모라(선생), 호라(부모)는 모두 [야라]라는 같은 어근에서 나왔습니다. 이 말은 "가르친다, 교훈한다, 어떤 모양으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인 이스라엘에게 토라를 주었고 이스라엘의 부모는 자기 자녀에게 토라를 가르치는 사명을 가지고 있기에, 부모란 말은 '토라를 가르친다'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이 얼마나 의미 있는 말입니까?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이스라엘 모든 자녀들은 가정에서 부모를 통하여 글을 배우고 하나님을 알게 되며 토라를 배우고 회당을 알게 됩니다.
한 소년이 '위대한 스승'을 만나기 위해 오랫동안 방황했습니다. 소년은 깊은 숲과 황량한 사막을 헤맸으나 '위대한 스승'을 찾지 못했습니다. 소년은 너무 지쳐서 나무 밑에 털썩 주저앉아 쉬고 있었습니다. 그때 흰 수염과 맑은 눈동자를 지닌 한 노인이 나타나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소년아, 왜 그렇게 방황하고 있느냐?"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위대한 스승을 찾고 있습니다." 노인은 얼굴 가득히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네가 찾는 위대한 스승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주마. 지금 곧장 너희 집으로 돌아가라. 그러면 한 사람이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뛰어나올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네가 찾는 '위대한 스승'이란다." 소년은 '위대한 스승'을 빨리 만나고 싶어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소년이 대문을 두드리자 한 여인이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뛰어나와 소년을 맞았습니다. 그 '위대한 스승'은 바로 소년의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최선의 교육자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스승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교육을 학교나 학원에 모두 맡겨 버립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모든 교육을 다 맡아 줄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점수 이상 무엇을 해 줄 수 있습니까? 한국 교육의 문제점은 아이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많이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이 안다고 훌륭한 교육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서구에서는 필요 이상의 과중한 공부를 학교에서 시키지 않는 다고 합니다. 깊은 연구는 전문가에게 맡기면 됩니다. 모든 교육이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참된 신앙적 교육의 장은 가정입니다.
자녀를 가르치려면 부모가 먼저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어른들은 TV를 보면서 아이들에게는 공부하라는 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남을 가르칠 때 자기도 가르쳐야 합니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그리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부모의 마음속에 하나님 말씀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요즘은 중학교 때부터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답니다. 선생님은 담배를 피우면서 아이들에게는 담배 피우지 말라고 강요하면, 그들의 대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선생님은 하루에도 여러 번 피우는데, 그렇게 좋은 것이라면 나는 일찍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어떤 아이가 공부를 하지 않아 아버지가 답답해서 말했습니다. "야 이놈아, 아브라함 링컨은 너만했을 때 혼자 고학을 하고 열심히 노력해서 측량기사가 됐단다." 그러자 아이가 아버지에게 "아버지, 링컨은 아버지만 했을 때 대통령이 됐어요"하더랍니다. 가르치는 자가 모범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생활은 전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자녀들에게 신앙을 심어주니 아버지의 신앙을 이어받는 전래의 신앙이요, 가문의 신앙이기에,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유대인들은 자녀에게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가르치며 민족의 지도자 모세를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을 주신 것을 가르쳐, 자녀들은 부모로부터 전승되어 온 신앙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것입니다.
개그우먼 이성미 씨의 자녀교육에 대한 기사가 인터넷 신문 [조은 뉴스](www.egn.kr/)에 지난 3월에 실렸습니다. 나이 마흔 둘에 셋째를 낳은 이성미 씨에게 아이들이란, '신이 맡긴 보물'이라고 했습니다. 지난해 가을, 7년 동안 캐나다에서 아이들을 뒷바라지하다가 영구 귀국한 그녀가 '세 아이를 키우는 즐거움'을 이야기했습니다. 부와 명예가 보장되는 최정상의 자리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2002년 세 아이와 함께 캐나다로 떠났던 개그우먼 이성미(51) 씨는 당시, 모든 일을 접고 캐나다 행을 결정한 그에게 주변 사람들은 '이렇게 가면 나중에 복귀하기 힘들다'며 협박 반, 사정 반으로 붙잡았지만 초등학교 6학년이던 큰아이 은기(21)가 유학 가기를 간절하게 원했는데, 처음에는 수재도 아니고 유학을 보낼 만큼 넉넉한 형편도 아니어서 단칼에 잘라버렸는데,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 보니 아이 마음도 이해가 되어, 아이를 혼자 보내는 건 내키지 않아 두 딸도 데리고 캐나다로 떠났습니다.
캐나다에 가서 그녀의 하루는 온전히 교회생활과 아이들을 위해 쓰였는데,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교회에 다녀오면 아침 7시부터 아침 식사 준비하고,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점심에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이들 도시락을 학교로 날랐다고 합니다. 자기가 어린 시절 엄마 없이 외롭게 자란 탓에, 엄마가 학교로 오는 아이들이 그렇게 부러웠기에 캐나다에서는 원 없이 아이들 학교를 갔는데, 아이들도 그때마다 무척 좋아했다고 합니다. 오후 3시 하교시간이면 아이들을 데리러 학교에 가곤 했는데, 다람쥐가 쳇바퀴 돌 듯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따분하질 않고, 세 아이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었지만 오랫동안 꿈꿔온 행복이었다고 합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보다 인사 잘하는 아이, 인간다운 면모를 가진 사람이 되길 원했고, 일방적인 지시보다 사소한 문제도 아이들에게 먼저 의견을 구했습니다. 한번은 큰아들 은기가 학교에서 사소한 다툼을 벌인 적이 있는데, 알고 보니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나름대로는 아이들을 자유롭게 키운다고 생각했는데 저도 모르게 '개그우먼 이성미의 자식'으로 키우고 있었기에 이로 인한 부담감으로 아이가 공격적이었던 것을 알고는 아들 앞에 무릎을 꿇고 진심으로 사죄했습니다. "엄마가 너를 이성미의 아들로 커주길 바랐던 것 같다. 그게 너를 많이 힘들게 했구나. 엄마를 용서해다오." 이후 한창 사춘기를 겪으며 엄마와 하루가 멀다고 다투던 은기는 엄마와 동생들을 먼저 배려하고 자신의 인생을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하는 듬직한 아들로 새롭게 태어나, 어느덧 대학생이 된 은기를 스무 살이 넘어 해줄 것이 없어져 독립하도록 미국에 남겨놓고 한국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아이들을 바르게 교육시킬 수 있었던 데는 이런 숨은 비밀이 있었습니다. 그녀가 캐나다에 있는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할 때, 한번은 자녀교육의 중요성을 공부했는데, 그 다음 주에 심각한 얼굴로 목사님을 찾아가서 "좋은 신학생 한 분을 추천해 달라"고 하더랍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아이 과외를 시키려고 한다"고 하기에 "무슨 과외냐?"고 물었더니 "성경도 가르쳐주고 기도도 함께 하고 영적으로 바로 자라도록 지도해 줄 신앙과외 선생님을 찾아달라"고 하더랍니다. 목사님은 신앙과외라는 말을 처음 들으며,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에 큰 감동을 받고, 하나님께서 이 가정을 크게 축복하시겠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합니다.
셋째, 어떻게 가르쳐야 합니까? 본문 7절에 보면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신6:7).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지런히'라는 말은 그저 열심히 가르치라는 것보다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샤난'이라고 하는 이 말은 영어로 'repeat', 반복하여 가르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원래는 '갈다'라는 뜻이며 'sharpen' 날카롭게 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혹 칼이나 낫을 갈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칼을 갈 때에는 숫돌에 물을 뿌려가면서 살살 갈아야 합니다. 서두르면 날이 넘어버립니다. 앞뒤로 살살 아주 오랜 시간을 두고 갈아야 제대로 날을 세울 수 있습니다. 급하다고 빡빡 밀었다가는 날이 훌렁 넘어가고 맙니다. 그래서 목수들을 보면 쉬는 동안에 마냥 대팻날을 갈지 않습니까? '부지런히 가르치라, 서두르지 마라, 반복해서 가르치라' 칼을 갈듯이 창을 갈듯이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어 알도록, 사랑하도록, 순종하도록 해야 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 교육의 기본입니다. 여기에 '마음을 다하고', 마음이란 히브리어로 지성의 소재(所在)를 말하며, 지식과 재능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뜻을 다하여', 감성과 인격을 말하는 것으로 우리가 즐거워함은 하나님이요, 우리의 행복도 하나님이니 인격 전부를 다 기울여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힘을 다하여', 체력을 말합니다. 이처럼 구체적인 생활 전부를 기울여서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들의 교육 이념이요 철학입니다.
미국의 저명한 작가인 월터 반게린은 자기 아들과의 다음과 같은 경험을 그의 책에 썼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된 매튜라는 아들이 만화책을 무척이나 좋아했는데, 하루는 도서관에서 만화책을 몇 권 훔쳐왔습니다. 아들의 방에 들어가 그 사실을 발견하고 아버지는 아들을 엄하게 꾸중했습니다. 그를 데리고 함께 도서관에 가서 책을 반납했습니다. 매튜는 도서관 직원에게도 단단히 꾸중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듬해 여름에 아들이 다시 책방에서 만화책을 훔쳐왔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 또 다시 만화책을 훔쳐왔습니다. 이제 아버지는 아들의 문제를 더 이상 그대로 둘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의 손을 잡고 서재로 끌고 들어가서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매튜야, 아빠는 아직까지 너를 때린 일이 없어. 그리고 지금도 너를 때리고 싶지가 않다. 그러나 오늘은 너에게 도둑질하는 것이 얼마나 나쁜 일인가를 가르쳐 주어야만 되겠다." 그리고 아들을 자기의 무릎 위에 구부리게 한 후에 아주 호되게 손바닥으로 다서 차례를 때렸습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아들은 방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을 했습니다. "너는 여기서 반성하고 혼자 있거라. 아버지는 나갔다가 잠시 후에 들어오겠다." 월터가 아들을 방에 혼자 두고 나왔을 때, 그는 참을 수 없어 그냥 어린아이처럼 울어버렸습니다. 한동안 운 아버지는 세수를 하고 다시 서재로 들어갔습니다. 이러한 일이 있고서 여러 해가 지난 뒤, 매튜가 어머니와 둘이서 자동차로 어디를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은 지난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메튜는 어머니께 말했습니다. "엄마, 나는 아버지와 그 일 이후로 다시는 도둑질을 안 했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결코 도둑질을 안 할 거예요." 그래서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그 때 아버지에게 매 맞은 것이 그렇게 아팠니?" 그러자 매튜는 대답했습니다. "엄마, 그래서가 아니에요. 나는 그 때 아버지가 우시는 소리를 들었어요." 부모의 사랑과 훈육이 자녀를 바르게 합니다.
왜 배우는 것이 이처럼 중요합니까? 배워야만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회든지 그 교회의 건전한 성장은 교회 교육에서 나타납니다. 초대 교회 교인들은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2:42)고 했습니다. 이를 보면 초대 교회가 제일 중요하게 힘쓴 것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도 자녀들을 교회학교에 보내어 어려서부터 말씀 속에 잘 가도록 해야 하고, 장년들도 부지런히 말씀을 배워 확신한 일에 거해야 하겠습니다.
존 헤이우드(John Heywood)는 "배우지 않으려면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낫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두 발로 걷는 교육이 없다면 네발로 기어다닐 것"이라는 교육 명언도 있습니다. 사랑도 연습하며 발전하고 신앙도 연습하며 성장합니다. 난폭한 망아지를 길들이면 능력 있는 명마가 되듯이 훈련은 인간의 정신을 길러줍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치 산 자가 죽은 자보다 우월하듯이, 교육받은 자는 교육받지 않은 자보다 훨씬 우수하다"고도 말했습니다. 인간은 배우고 가르치기에 인간인 것입니다. 브라우닝(Browning, E.B.)은 '무지는 무죄가 아니라 유죄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몰랐으니 상관없다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이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존스(Jones, S.)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무지가 고의적인 경우일 때에는 무지 그 자체가 범죄이다.' 그렇습니다. 배우지 않은 것이 죄요, 가르치지 않은 것이 죄입니다.
대구 어떤 교회의 장로님의 아들이 고 3이 되면서부터 교회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목사님이 물었더니, "요즘 대학 입시 공부를 하느라고 못 나오는데 대학에 합격하면 다닐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목사님이 몹시 안타까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해 대학 입시에 떨어졌고, 그 다음 해에도 실패했습니다. 장로님의 온 가족이 슬퍼하고 우울해 하면서 교회에 나왔는데 그는 창피하다고 교회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후 그는 방탕하기 시작했고, 술집에 드나들며, 밤이면 그런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춤을 추었습니다. 이 젊은이가 대구 고고클럽 화재 사고 때 불에 타서 시체가 되어 교회에 나왔습니다.
중국의 한 철학자가 제자들에게 "인생에서 진정으로 만족할 일은 무엇이겠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좋은 친구를 만나는 일, 소유를 늘려나가는 일, 연인의 사랑을 받는 일 등을 말하자, 스승은 조용히 말했습니다. "많은 만족이 있을 것이다. 그 중에 하나 진정으로 만족할 일이란, 우리가 어린이들에게 길가는 법을 가르쳐 준 다음, 그 어린이가 우리를 본받아 신념에 가득 찬 얼굴로 일러 준 길을 따라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고요했던 예루살렘은 신앙과 진리의 정신적 유산을 남겼으나, 육체적으로 바빴던 로마는 넓은 길과 굉장한 원형극장과 목욕탕과 부스러기를 남겼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자녀들의 신앙과 정신 교육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가장 간곡하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주님의 지상명령인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이번 여름을 맞아 영아부와 유치부 성경학교, 아동부, 중고등부, 청년부, 수련회를 갖게 됩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인 교육 사역에 전 교우가 함께 참여하고 협력하는 가운데,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하신 주님의 임재가 늘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