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11월 초하루.
아침에 흐리다가 낮에는 비가 죽죽 퍼붓고 천둥소리가 은은하였다. 겨울 날씨가 아닌지 곧바로 여름 날씨 같았다. 비가 한번 쟁기질하기에 흡족하도록 내렸다.
좌수사(左水使)가 동학 무리 수십 명을 잡아 죽이고 이 일을 병영(兵營)에 글을 보내 말하기를 “우리 영(營)은 수로를 따라 비적(匪賊)을 토벌하니 귀 영(營)은 육로에서 비적(匪賊)을 토벌하므로, 두 곳에서 합세하여 비적 무리를 협공하여 초멸하는 날을 지정할 수 있기를 기다리겠다”라 고 하였다. 병마절도사〔兵相〕와 수성장이 모두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도내의 관장(官長)으로 감사 이하로 부터 읍재(邑宰)와 진장(鎭將)에 이르기까지 겨를이 없을 정도로 비적(匪賊)을 영접하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 오직 좌수사만 이와 같았다. 사람들이 말하여 이르기를 “조정에서 임명한 관리는 언제나 한결같은 모양으로 잘 골라 임용하는데 좌수사에 이르면 잘못 골랐다.”라고 운운하였다.
〔十一月朔癸酉 朝陰午雨滂滂, 雷鳴殷殷。不是冬日, 而卽是夏日也。雨則洽足一犂矣。左水使捉殺東徒數十, 而移文於此營曰 : “鄙營由水路討賊, 貴營則自陸路討賊, 兩處合勢, 挾攻賊徒, 勦滅可指日而待云”。兵相與守城將, 俱不應云。時道內官長自監使以下至于邑宰鎭將,莫不迎賊不暇, 而唯左水使如此。人爲之▣曰 : ”朝廷命吏, 何其一樣善擇用, 而至於左水使則未能善擇云云”。〕
○1894년 11월 초6일. 맑음.
저녁에 수성군이 해남군 별진역(別鎭驛)에 사는 동학 5명을 잡아왔으며 또 대완포 한 자루, 조총 20자루, 창 수십 개를 빼앗아 왔다. 수일 전 영암 대산에 사는 정수사(鄭水使)는
해남의 동학이 침삭(侵削)한 것을 견딜 수 없다는 뜻으로 이 병영에 기별하니 영문에서는
떠라서 즉시 총을 쏘면서 수십 명을 보내주었으나 접주(接主)는 이미 도망을 가 몸을 감추었기에 잡지를 못하였다. 오직 소위 교장과 일없이 한가한 동학만 잡아왔다고 운운하였다.
〔初六日戊寅 晴。夕守城軍捉來海南縣別鎭驛居東學五名, 又奪大碗砲一柄, 鳥銃二十柄, 鎗數十箇而來。數日前, 靈岩大山居鄭水使, 以不能耐海南東學侵削之意, 通奇于此營, 營門隨卽發砲數十名往矣, 接主則已往逃躱未捉, 惟其所謂敎長與閑散東學捉來云云。〕
○1894년 11월 초7일. 맑음.
내가 성조 때문에 택일을 정하는 일로 아버님의 명을 받들어 장흥 운수동(雲水洞)에 사는 임윤경(任允敬)을 방문하러 길을 떠나 유치(有治) 경계에 이르렀다. 이마에 노란 두건을 두른 자들이 종종 길 위를 다니고 있으며, 흑석(黑石) 저자에 이르니 붉은 색 큰 깃발 2개, 흰색 큰 깃발 1개를 단 장대가 있었고, 포성도 간간히 그곳에서 났다.
문밖에는 여섯 마리의 말이 묶여 있으며 그 무리들이 혹 수십 명 혹 7-8명씩 각 마을에 흩어져 있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동학무리들이 지난달 그믐께쯤부터 광주(光州) 남평(南平) 보성(寶城) 장흥(長興) 금구(金求/金溝) 능주(綾州) 등의 읍에서 그 무리를 징발하여 능주를 짓밟아 유린하고 지금까지 흩어졌다가 왔는데, 그 뜻이 장흥을 노략질하려고 한다는데, 그러나 정확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동학무리들이 능주(綾州)로 쳐들어가서 민가를 부수고 사람을 때리고 재물을 토색(討索)질하는 등, 하지 못할 짓이 없었다. 심지어 여인의 가발〔髲髢〕이나 어린 아이의 저고리 적삼 등 일체를 훔쳐가니 남은 것이 없었다 라고 운운하였다.
〔初七日己卯 晴。余以成造擇日事, 奉父主命訪長興雲水洞居任允敬, 發程行至有治界。頭裹黃巾者種種路上來, 至黑石市, 有紅大旗二白大旗一竿, 砲聲間間出於其所。繫馬六匹於門外, 其徒則或數十或七八, 散之各村矣。聞之人說, 則東徒自去月晦間, 發光州南平寶城長興金求綾州等邑厥類, 蹈躪綾州, 而迨今散來, 其意欲冠長興云, 然未可的知。東徒之入綾州也, 毁破民屋, 打人索財, 無所不至, 至於女人之髲髢, 幼兒之襦衫, 一切偸去無遺云云。 〕
○1894년 11월 초8일. 맑음.
나는 다른 길을 경유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일본(日本)이 장차 동학도를 죽이기 위하여 배를 띄워 무안(務安)경계에서 내렸다고 하며, 또한 3백 명이 이미 수일 전에 하동(河東)을 경유하여 광양(光陽) 경계에 들와 있다고 하였으며, 이미 동학도를 죽인 것이 수천 명이라 하였다. 이를 듣는 자는 동학도의 죽음에 몹시 기뻐하지 않은 자가 없었으며 또한 이곳의 동학도를 쓸어 없애는 일을 혹 나중에 할까 두려워하였다.
〔初八日庚辰 晴。余由他路反。聽之人說, 日本以將殺東學次, 浮船下務安界, 又三百人已在數日前由河東入光陽界, 已殺東學數千人云。聽之者無不聳喜東學之死, 而又恐掃除此處東學之或後矣。〕
○1894년 11월 초9일. 맑음.
영암 관아에서 동학을 막기 위한 뜻으로 보고하는 공문으로 군대를 청하였다고 한다.
〔初九日辛巳 晴。靈岩官以禦東學之意, 報狀請兵云。〕
○1894년 11월 초10일. 아침에 안개가 끼고 늦게 맑아 졌다.
황홀한 것이 바로 여름철 기후 같다. 아침을 먹고 지난날에 잡아왔던 별진(別鎭)의 동학 교장(敎長) 방(方)가라는 자의 목을 베고 나머지는 모두 곤장을 치고 다시 가두었다. 그들의 정황이 바로 동학도의 위협에 눌려 복종을 많이 하였기 때문이었다.
〔初十日壬午 朝霧晩晴。怳是夏令。朝後斬向日捉來別鎭東學敎長方哥者, 餘皆棍而復囚, 以其情多是脅從故也。 〕
○1894년 11월 16일. 흐림.
문득 들으니 경군(京軍)이 전봉준(全奉俊/全琫準)을 공주(公州) 경계에서 토벌하고 경경(更庚/江景)으로 달아 난 봉준(奉俊/琫準)을 추격하였으며, 김기범(金箕犯/金箕範)은 호를 개남(開南)으로 고쳤는데 이는 전주에 있으면서 스스로 ‘남원을 연다〔開于南原〕’고 했기 때문이다. 전봉준과 함께 세력을 믿고 떠세하니, 그 세력이 매우 창궐했다고 한다.
〔十六日戊子 陰。聽得京軍討全奉俊于公州界, 而逐之奉俊遁于更庚, 金箕犯改號開南, 而在全州自謂開于南原故也, 與奉俊倚勢, 勢甚猖獗云。 〕
○1894년 11월 17일. 아침에 안개가 끼고 늦게 맑아 졌다.
나주 수성군이 북창(北倉)에서 동학을 토벌하고 추격라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 도로가 단절되었기에 정확한 소식이 없어 그 자세한 내용을 들을 수가 없었다.
〔十七日己丑 早霧晩晴。羅州守城軍討東學于北倉, 而逐之云。然時道路斷絶, 無的奇則其詳不可得聞矣。〕
○1894년 11월 18일. 흐리고 바람 불고 차가웠다.
영암(靈巖)의 수성군이 대완포를 쏘며 동학도가 장차 경계를 침범하려고 하는 것을 쫓아내었다고 한다. 밤에 사람의 자취가 고요할 때 첫눈이 땅을 덮었고 밤은 추웠다.
〔十八日庚寅 陰風寒。靈巖守城軍放大碗砲, 逐東學之將犯境者云, 夜人靜時。初雪鋪地, 夜寒矣。 〕
○1894년 11월 21일. 눈.
조정에서 병영(兵營)이 성을 지켰다는 소식을 듣고 특별히 세미(稅米/조세로 받은 쌀) 4백석, 공전(公錢/公金) 3만2-3천 냥을 하사하였다. 민심은 뛸 듯이 기뻐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장흥관이 동학무리 수천 명이 웅치에서 모여 장차 장흥을 침범하려한다는 뜻으로 병영(兵營)에 문서로 보고하면서 또한 별포군(別砲軍) 5백 명, 조총 2백 자루를 청하였으나 병영(兵營)이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二十一日癸巳 雪。朝廷聞兵營守城, 特賜稅米四百石, 公錢三萬二三千兩。民心無不踴喜。長興官以東徒數千會于熊峙, 將侵長興之意, 報狀于兵營, 而且請別砲五百名, 鳥銃二百柄, 兵營俱皆不許。 〕
○1894년 11월 22일. 눈.
장흥에서 급보가 또다시 왔다. 저녁에 도총장 윤권중(尹權仲)과 수성별장 방관숙(房管叔)이 군사 2백 명을 거느리고 구원하러 갔다. 더불어 본 읍 군사 2백 명도 함께하기로 기약하고 진군하였다. 전해 들으니 전봉준(全奉俊/全琫準)이 공주(公州)를 다섯 번 침범하였는데 크게 패하여 전주로 물러났으며, 김개남은 사잇길로 충주(忠州)를 곧바로 침범하였으나 또한 패하여 전주로 물러났다고 한다. 봉준(奉俊/琫準)이란 자는 본래 전주가 태어난 곳인데 고부(古阜)에 이거하였으며, 금년 봄에 고부(古阜)에서 백성들의 소요를 처음 일으켰으며 체구가 작기 때문에 호를 녹두(菉豆)라고 하였다.
백 년 전부터 어린 아이들이 새를 쫓으면서 노래 부르기를 “웃녁 새야 아랫녁 새야 전주 고부의 녹두 새야, 너 까묵고 나 까묵고 전세(全稅) 와 대동아(大同米)를 어이 하리, 후여! ” 라 하였다. 지금까지 녹두라는 자는 어떠한가? 저글 동학이 못된 행실을 부리고 있으니 또한 우연한 연고가 아니지 않겠는가?
또 무부(巫夫/무당서방) 재주넘을 때에 말하는 것은 항상 말하기를 “어리 법사(法師) 넘어간다.”라 하고, 또 사람들이 지체되고 답답한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말하기를 “이래 저래 다 죽겄다”라고 예로부터 이 같이 늘 하던 말이 있었다. 근일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소위 동학 괴수 최시형(崔時亨), 호가 법사(法師)라고 한자의 죽음도 반드시 무부(巫夫)의 몸이 변한 것과 같을 것이며, 서장옥(徐庄玉/徐璋玉), 호가 일해(一海)라는 자의 무리도 반드시 모두 죽을 것이다. 동학은 또 스스로 서로 호칭하며 말하기를 “접장(接丈)” 이라 하니 이 말은 대체로 바로 그 무리가 죄다 죽는 날 서로 접하여 매장할 징조라고 했다고 한다. 밤에는 또 눈도 내리고 추웠다, 생각건대 군대가 행진한다면 몹시 이 고생하겠다.
〔二十二日甲午 雪。自長興急報又來。夕都摠將尹權仲守城別將房管叔, 率軍二百往救焉, 與本邑軍二百共期而進。傳聞全奉俊五寇公州, 而大敗退全州, 金開南間道直寇忠州, 亦敗而退云。右奉俊者本全州所生, 而移居于古阜, 今春創起民擾于古阜, 而體小故號菉豆者也。自百年前, 小兒驅鳥之歌曰 : “웃녁아, 아릿녁아, 全州古阜菉豆아, 눌음박역후여! 有如此而驅鳥者, 村村處處邑邑郡郡, 而又或曰 : ”웃녁아, 아릿녁아, 全州古阜菉豆아, 너묵고, 나묵고, 全稅大同어이이후여! 者矣, 于今菉豆者, 何如, 彼作梗也, 亦非偶然之故耶, 又巫夫재듀너물에, 所言常曰 : “어리法師넘어간다” 又人有遲鬱之事必曰 : “일졀다쥭것다” 自古昔有如此之恒言矣。近日人之言曰 : “所謂東學魁首崔時亨號法師者之死, 必如巫夫之飜身也, 徐庄玉號一海者之黨, 則必皆盡死也。東學又自相稱謂曰 : ”接丈“ 此言蓋是厥類沒死之日, 接接葬埋之兆云云。夜又雪寒。想軍行甚是勞苦矣。 〕
○1894년 11월 23일. 흐림.
저녁에 도총장이 장흥에서 군사를 돌리어 왔다. 듣자하니 웅치(熊峙)의 동학도가 길가는 행인 세 사람을 이미 죽였으며 장흥 수성장이 함께 행군하여 그곳에 이르렀지만 저들 무리들은 물러나 촌락으로 들어갔기에 곧장 추격하여 그 촌락에 이르렀으나 저들 무리들은 또 물러나 진을 쳤다고 한다. 그후에 접전 여부는 들을 수가 없었다.
〔二十三日乙未 陰。夕都摠將自長興還軍。聞熊峙東學已殺行路人三人, 及長興守城將行軍至彼, 則厥類退入村落。直追至厥村, 則彼徒又退而結陣云。其後接戰與否, 未可得聞。 〕
○1894년 11월 24일. 맑음.
아침을 먹은 뒤에 나는 금천(錦川)마을 화방(花枋) 누이 집에 갔다. 누이는 이집에 살면서 재앙을 피할 수 있을까 점을 쳐 고지분(蠱之賁)의 괘를 얻었다. 오후에 안풍(安豊)마을의 누이 집에 갔다. 듣자하니 관아에서 도총장 두 사람을 정하여 면내에서 동쪽과 서쪽을 맡아서 지키고 있는데 다만 이 면(面)뿐만 아니라 면(面)마다 모두 도총장이 있다고 하였다. 지난번 강진읍의 군대가 장흥에 갔을 때 금천면(錦川面)에서 또한 군사 50명을 보냈는데 보암면(寶岩面) 도총장 김한섭(金漢爕)씨는 비적(匪賊)의 무리들이 경계를 침범하였다고 잘못 듣고 곧바로 4백 명의 민군(民軍)을 거느리고 강진읍 바깥으로 달려갔으나 장흥에서 이미 회군한 강진읍 군대와 만나 서로 웃으며 군대를 돌리었다.
〔二十四日丙申 晴。朝後余往錦川花枋妹家。妹氏占居此屋可避兵, 而得蠱之賁。午後往安豊妹家。聞自官定都摠將二人, 於面內東西守直焉, 非但此面, 面面皆有都摠將云。向邑軍之往長興時, 錦川面亦送五十軍, 寶岩面都摠將金漢爕氏, 誤聞賊徒之犯境, 直率四百民軍, 馳至邑外, 遇邑軍自長興已回, 而相笑還軍。 〕
○1894년 11월 27일. 흐리다가 저녁에 비가 내려 먼지를 적셨다.
나주목사 민종렬(閔鍾烈/閔種烈)이 새로 전라도 초토사 교지를 받들자, 전령(傳令)으로 병영(兵營)의 우후(虞候)에게 병사 5백 명을 징발하라 하였다. 나주 이방(吏房)의 편지에 지난 날 수성군이 동학도를 토벌하러 나가서 동학도 2백여 명의 목을 베고 군량미 40여석과 대완포 세 자루, 조총 수십 자루, 화약 약간을 얻었다고 하였다. 밤에 장흥부사가 호장(戶長)과 이방을 거느리고 와서 군대를 요청하였다. 대체로 대흥면(大興面)의 동학이 기포(起包)하는 것을 보고 군대를 파견하여 토벌을 나서는데 형세가 매우 급박하였기 때문에 보고하는 공문서로 군대를 요청한 것인데, 보고서에 쓰기를 ‘일이 되어가는 형세〔事勢〕가 이처럼 급박하니 즉시 군대를 징발하여 형세를 도와 나아갈 일입니다’라 하였다. 장흥부사가 그 글을 보이고 밤에 즉시 돌아갔다.
〔二十七日己亥 陰夕雨洽浥塵。羅州牧使閔鍾烈, 新奉全羅道招討使敎旨, 而傳令于兵營虞候徵兵五百焉。羅州吏書尺, 向日守城軍出討東徒, 斬首二百餘級, 得軍糧米四十餘石, 大碗砲三柄, 鳥銃數十柄, 藥丸若干云。夜長興府使領戶長吏, 而來請兵焉。蓋目大興東學起包, 而遣軍出討勢甚急迫, 故報狀請兵矣。題云事勢如是急迫, 卽時發兵助勢向事云。府使見題,夜卽回去 〕
○1894년 11월 28일. 흐림.
아침을 먹은 후에 도총장 윤권중(尹權仲)이 군대 수백 명을 거느리고 장흥에 갔다. 오후에 종제 지삼(知三)이 노령산맥 이북〔嶺上〕에서 비로소 집으로 돌아왔다.
말하기를 영남에서는 이른 바 동학이란 자들이 감히 결당(結黨)하지 못하나, 간간이 동학이라고 이름 한자가 있으면 각 읍에서 일일이 쫓아가 잡아 죽였으며, 삼계(三界/三嘉) 단성(丹城)등의 읍은 수성(守城)을 이처럼 지극히 엄하게 하는 곳이 없었으며, 하동은 각 읍의 군병을 징발하여 모으면 일일이 점을 찍어 가면서 수효를 조사하였는데, 그 연유를 들으니 장차 전라도 동학을 토벌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지삼(知三)이 전라도 사람이란 것을 알고 의심스러워하는 자들이 썩 많았기에 지삼(知三)은 약장사로써 경상도를 돌아보는 뜻을 누누이 진술하는데 거의 반나절 되어서야 바야흐로 공문(公文)을 얻어 강을 건너 광양 순천 등의 읍에 이르니 목에는 염주를 걸고 머리는 누런 수건을 싸맨 자들이 이따금씩 모두가 혹은 소라를 불며 포를 쏘고. 혹은 큰 깃발을 세우고 무리지어 다녔다. 흡사 여기가 동학의 소굴이었다. 듣자하니 지난번 동학이 좌수영(左水營)을 침범하였는데 좌수영군(左水營軍)이 목을 벤 자가 자못 많았기에 지금 다시 쳐들어가려 한다고 하였다. 보성읍에 이르니 군사를 모아 바야흐로 장흥 경계로 내려가려고 하였다. 그 연유를 듣건대 장흥읍의 대흥면(大興面) 동학이 장차 귀 읍으로 넘어가려 하니 귀 읍에서는 마땅히 군대를 출동시켜 막으라는 뜻의 사통(私通)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二十八日庚子 陰。朝後, 都摠將尹權仲領軍數百往長興。午後從弟知三自嶺上始還家。說嶺南則所謂東學者不敢聚黨, 而間有以東學爲名者, 則自各邑一一追捉而誅之, 三界丹城等邑則守城莫乎此嚴至, 河東則徵聚各邑軍兵, 而點考焉。聞其由則以將討全羅道東學故也云。聞知三爲全羅道人, 疑訝者太多, 知三以▣商, 嶺還之意, 累累陳說幾乎半日, 方得公文, 渡江至光陽順天等邑, 則項掛念珠, 頭裹黃巾者, 往往皆是, 而或吹囉放砲, 或豎大旗而群行焉。恰是東學窟穴也。聞向日東學寇▣水營, 爲水營軍所斬者頗多, 而今又往寇云。至寶城邑則聚軍, 方下長興界。聞其由則長興邑以大興東學, 將踰貴邑, 貴邑宜爲發兵, 禦之之意, 私通故也云。 〕
○1894년 11월 29일. 맑음.
아침을 먹은 후에 나는 아버님 명으로 산정(山亭)의 김동지(金同知)에게 갔다. 한편으로는 그 상인을 조문하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목수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왔다. 듣자하니 장흥의 소식에 병영군(兵營軍)이 포(砲)로 공격하여 세 명의 동학도 목을 베고, 한사람은 결박하여 병영(兵營)에 보냈는데 장차 웅치(熊峙)를 넘어가 동학을 토벌한다고 하였다.
〔二十九日辛丑 晴。朝後, 余以父主命往金同知山亭。一則問其喪人, 二則以木手之不來故也。夕還家。聞長興信息, 則兵營軍砲, 斬三介東學, 而縛送一介於兵營, 將踰熊峙討東學云。 〕
○1894년 11월 30일. 맑음.
오후에 나는 용정리(龍井里)에 갔다. 밤에 장모의 대상 제사에 문득 참여하였다. 때마침 보성 소식을 들으니 민군(民軍) 수백 명이 다만 죽창을 들고 비적(匪賊)을 막는데, 멀리서 바라보고 비적(匪賊)들이 달아나버려 모두 퇴각하여 돌아왔다고 한다.
〔三十日壬寅 晴。午後余往龍井里。夜得參丈母之大祥祭焉。適聞寶城信息, 則民軍數百, 但持竹鎗禦賊矣, 望見賊徒, 而皆退還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