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繹史)
역사(繹史) - 마숙(馬驌. 1621~1673) | 해동역사(海東繹史) - 유득공(柳得恭) |
(텍스트) 繹 실 뽑을 역, 풀릴 석 | 그림: (국회도서관) |
해동역사(海東繹史) 서문(序文) - 유득공(柳得恭) 번역:(고전번역원) |
東史 凡幾種哉 所謂古記 都是緇流荒誕之說 士大夫不言 可也 金富軾三國史 人咎其脫略不足觀 而名山石室 茫無所藏 雖金富軾 亦且奈何 然則唯有鄭麟趾高麗史而已 高麗以前何從而鏡考乎 余甞欲取二十一史東國傳刪其重複 以注以辨 與三國高麗二史相依而行 則庶或有資於徵信 卒卒未遂 亦未甞不去來于胸中 우리나라의 역사책(東史)이 무릇 몇 종(種)이던가. 이른바 고기(古記)라 하는 것들은 모두가 치류(緇流)들의 허황되고 황당한 말이라서 사대부들이 입에 담을 수 없는 것이다.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대해 사람들은 소략(疏略)하여 볼만한 것이 없다’고 허물을 탓하고 있다. 그러나 명산(名山)의 석실(石室)에 보관되어 있는 자료가 하나도 없었으니, 김부식인들 그런 처지에서야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오로지 정인지(鄭麟趾)가 지은 《고려사(高麗史)》가 있을 뿐인데, 고려 이전의 사실에 대해서는 무엇을 보고서 상고하겠는가. 이에 내가 일찍이 중국의 <21사(史)>에서 동국전(東國傳)만을 뽑아 모아 중복된 부분을 삭제하고서 주석을 내고 변증을 하고자 하였다. 그런 다음 《삼국사기(三國史記)》와 《고려사(高麗史)》 두 사서와 함께 참조하여 보면 징신(徵信)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는데, 끝내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항상 가슴속에 맴돌고 있었다. 吾友韓大淵上舍 性恬靜喜蓄書 閉戶考古 慨然有意于東史 與余不謀而合 又推而廣之 汎濫乎正史之外 我東數千年事實 自經傳以至䕺稗在在散見者 幾盡搜剔抄寫 又手刀與糊 離而合 合而離 蓬首流汗 殆忘寢食 用五六年之力始分類立目 勒成一部 凡幾卷 有世紀焉 有列傳焉 天文地理禮樂兵刑輿服藝文 各有其志 則居然而史矣 名之曰海東繹史 余所有意而未遂者 一朝焉獲之 不亦快哉 나의 친구인 상사(上舍) 한대연(韓大淵)은 성품이 고요하고 서책을 간직하기를 좋아하였다. 문을 닫고 들어앉아 역사를 연구하였으며, 개연히 우리나라의 역사에 관심을 가져, 나와는 서로 상의하지 않아도 의기가 통하였다. 그런데 또 이를 미루어 넓혀서 정사(正史) 이외의 것까지도 섭렵하여, 우리 동방 수천 년의 사실에 대해 경전(經典)에서 패설(稗說)에 이르기까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을 찾아내고 베꼈으며, 또 손수 자르고 붙이면서 분류하기도 하고 합하기도 하였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땀은 비오듯 흘리면서 밥먹는 것조차 잊은 채 5, 6년이나 공력을 쏟은 끝에 비로소 종류별로 나누고 조목을 세워 한 부(部)의 서책을 만드니, 모두 몇 권이나 되었다. 그 가운데는 세기(世紀)도 있고, 열전(列傳)도 있으며, 천문(天文), 지리(地理), 예악(禮樂), 병형(兵刑), 여복(輿服), 예문(藝文)에 대해 각각의 지(志)가 있어서 저절로 역사서가 되었는데, 이를 이름하여 《해동역사(海東繹史)》라 하였다. 내가 생각은 있었으나 미처 이루지 못하였던 것을 하루아침에 얻으니 그 역시 통쾌(痛快)한 일이 아닌가. 東人或言東方史籍在平壤者 焚於李勣其在完山者 又焚於甄萱之敗 此亦無稽之談 東方豈有史籍 箕聖之世斯可以斷自唐虞衛滿以前 屬之不修春秋 漢四百年自是內服 樂浪太守焉得立史官哉 此所以佚事異聞 必求諸中國然後可得也 우리나라 사람(東人)들이 혹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사적(史籍)은, 평양(平壤)에 있던 것은 이적(李勣)에게 모두 불탔으며, 전주(完山)에 있던 것은 견훤(甄萱)이 패하면서 모두 불에 탔다.”고 하는데, 이 역시 근거 없는 낭설이다. 우리나라에 어찌 사적(史籍)이 있었던가. 기자(箕子)의 시대는 당우(唐虞)부터 위만(衛滿) 이전에 해당하고 보면 역사를 쓰지 않는 시대에 속한다. 그리고 한(漢)나라 4백 년 동안에는 내복(內服)의 나라였으니, 낙랑 태수가 어떻게 사관(史官)을 둘 수 있었겠는가. 이 때문에 일사(佚事)와 이문(異聞)을 반드시 중국 쪽에서 구한 다음에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嶺東之濊 漢南之韓 蓋馬山東之沃沮 苟非陳壽 惡能知其有無哉 彼陳壽者 秉筆而書海表之事 能若是之詳者 又何也 公孫氏世襲遼東太守 立帶方郡以統韓濊諸部 司馬懿滅之 則其山川道里物産風謠 必爲太史氏所得也 영동(嶺東)의 예(濊)와 한수(漢水) 남쪽의 한(韓), 개마산(蓋馬山) 동쪽의 옥저(沃沮)에 대해 참으로 진수(陳壽)가 아니면 어떻게 그런 나라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겠는가. 저 진수란 자가 붓을 잡고 바다 바깥의 우리나라의 일에 대하여 이와 같이 상세하게 쓸 수 있었던 것은 또 어째서인가. 공손씨(公孫氏)가 대대로 요동 태수가 되어 대방군(帶方郡)을 세워 한(韓), 예(濊)의 여러 부를 통괄하다가 사마의(司馬懿)에게 멸망되었으니 산천(山川), 도리(道里), 물산(物産), 풍요(風謠)에 대하여 반드시 태사씨(太史氏)가 전해 들었을 것이다. 自是以後曰三國 又有加羅耽牟羅之屬 皆能發使執幣 見于上國 南北諸史 從而記之 此莫非東方史籍也 幸而大淵之書 今又成矣 富哉無所不有 이 이후로는 삼국(三國)이라 하며, 또 가라(加羅)니 탐모라(耽牟羅)니 하는 족속이 있어서 모두 사신을 보내고 폐백을 바치면서 상국(上國)에 알현하였다. 그러므로 남조(南朝)와 북조(北朝)의 여러 역사책에서 이에 따라서 기록하였는바, 이 모두가 우리나라의 사적인 것이다. 다행히 대연(大淵)이 지은 책이 지금 또 이루어져 풍부히 모두 갖추어지게 되었다. 昔剡子朝魯 昭子問少皥氏鳥名官何故也 剡子曰 吾祖也我知之 孔子聞而學之 籍談如周 不能對晉之分器 王曰叔氏而忘諸乎 是故不知本國之史者 古之君子耻之 若之何不觀是書也 옛날에 섬자(剡子)가 노(魯)나라에 조회 가자, 소자(昭子)가 “소호씨(少皥氏)가 새의 이름으로 관명(官名)을 삼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고 물으니, 섬자가 말하기를, “나의 조상들의 일이니 내가 그 일을 잘 알고 있다.”고 하였는데, 공자(孔子)가 그 말을 듣고서 나아가 배웠다. 그리고 적담(籍談)이 주(周)나라에 가서 진(晉)나라가 주나라로부터 명기(名器)를 나누어 받은 것에 대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자, 왕이 말하기를, “숙씨(叔氏 숙(叔)은 적담의 자(字)임)이면서도 그 사실을 잊었단 말인가?” 하였다. 이 때문에 본국(本國)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을 옛날의 군자들은 부끄러워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이 책을 읽지 않을 수 있겠는가. 儒州柳得恭序 유주(儒州) 유득공(柳得恭)은 서(序)한다. |
《역사(繹史)》는 전체 160卷이며 世系圖 1卷과 年表 1卷이 별도로 첨부됐다.
찬저자(撰著者)는 청대(淸代) 마숙(馬驌. 1621~1673)이다. 강희(康熙) 연간에 판각된 판본은 전체 40册이며 版框 高廣은 匡高 19.7公分이고 寬은 14.3公分이다. 行格은 14行24字이며 小字雙行 36字이다. 판식(版式)은 백구(白口), 무어미(無魚尾), 좌우쌍변(左右雙邊)이다. 장정(裝訂)은 선장(線裝)이며, 수장인기(收藏印記)는 학여당발태(學餘堂發兌)이며, 서발제교자(序跋題校者)로는 이청(李淸) 서(序)가 있다. 사고전서(四庫全書)에서는 사부(史部) 중에서도 편년류( 編年類)로 배당했다. 부주(附註)로는 내봉제(內封題)로 “마씨역사”(馬氏繹史)라 했으며, 原鈐 “學餘堂發兌” 硃文印記가 있다.
卷端署에는 “추평마숙완사찬”(鄒平馬驌宛斯撰)이라 했다. 앞에는 康熙 9年 李淸 序, 馬驌“徵言”이라 했다. 강희 9년은 1670년이다.
점교본으로는 왕리기(王利器) 點校가 있으니 이는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2002년에 전 10책으로 발간됐다. 나아가 齊魯書社에서도 2003년 6월에 全 4책짜리 표점본이 나왔다. 가격 또한 만만치 않은 이 제로서사본을 살까말까 몇 번을 망설이다가 사서 책상머리에 꽂아놓으니 폼은 제법 난다.
저자 마숙(馬驌)은 明末淸初에 활약한 사학자로서, 완사(宛斯), 혹은 총어(聰御)라 字號했했다. 생몰년은 1621~1673년. 산동(山東) 추평(鄒平) 사람이며 저술로는 《繹史》 외에 《좌전사위》(左傳事緯)가 있다. 평생 선진사(先秦史) 연구와 편찬에 주력해 ‘마삼대’(馬三代)라는 별칭을 얻었다.
馬驌은 字가 추어(驄御)이며 宛斯라고도 하며 鄒平 사람이다. 1658年(淸 世祖 順治 15년)에 中恩科 鄕試에 합격하여 擧人이 되었고, 이듬해 進士가 되어 淮安府 推官에 제수되었다. 이 기간 두각을 나타내 安徽 靈璧縣 知縣이 되었다. 이곳에서 5년을 재임하면서 이익을 일으키고 폐단을 없애며 간악함을 제거하고 선량한 이를 되살리니 자못 공적이 컸다. 1673年(聖祖 康熙 12년) 急症으로 官邸에서 죽었다. 사당을 세워 “文介先生”이라 했다. 馬驌은 어려서부터 聰敏好學하고 성년이 된 뒤에도 百家之言을 遍涉했다. 사학에 특히 관심을 보였으며 《左傳》 벽이 있었다. 《左傳事緯》 《繹史》 《十三代瑰書》와 같은 저술이 있다.
천지개벽에서 시작해 진나라가 멸망하는 시기를 다룬 《繹史》는
신화전설과 朝代 교체, 열국 분쟁, 방교맹회(邦交盟會), 주관예의(周官禮儀), 성현언행(聖賢言行, 용주능신(庸主能臣), 왕패지접(王霸之業) 등에 이르는 광범위한 사건들을 종합 정리하고자 했다.
《繹史》는 제1권 ‘개벽원시’(開闢原始)에서 시작해 제150권 ‘진망’(秦亡)에 이르는 시기의 선진(先秦)시대, 즉, 천지개벽 이후 육국을 통일한 진나라가 망한 시기까지 연대 순서를 밟아가기 때문에 편년체 사서처럼 보이지만 실은 紀事本末體다. 제5권은 ‘황제기’(黃帝紀)다. 하지만 편년사는 150권까지이며, 151권 이후 160권까지는 고대 지도(地圖)․천관(天官)․율려(律呂)․지리지(地理志)․시보(詩譜)․예기도(禮器圖)․명물훈고(名物訓詁)․고금인표(古今人表諸) 등을 포함한다.
이를 상술하면 다음과 같다.
본문에 앞서 첫 머리에는 世系圖와 年表가 실려 있으나 이를 卷數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그에 뒤이어 다음과 같은 순서로 본문이 이어진다.
<태고(太古)> 1~10권
1. 개벽원시(開闢原始)
2. 황왕이설(皇王異說)
3. 태호기(太皡紀) 여와(女娲)
4. 염제기(炎帝紀)
5. 황제기(黃帝紀)
6. 소호기(少皡紀)
7. 고양기(高陽紀)
8. 고신기(高辛紀)
9. 도당기(陶唐紀)
10. 유우기(有虞紀)
<3대(三代): 夏, 商, 周 > 20권
<춘추(春秋)> 70권
<전국(戰國)> 50권
<별록(別錄)> 10권
이 중 別錄이란 일종의 참고자료집이라 할 수 있으니, 이는 편년체 사서라면 가장 큰 결점이라 할 수 있는 제도사 총서인 紀傳體의 表와 志가 탈락되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繹史는 근본 골격은 기사본말체이면서도 편년체와 기전체를 가미했다고 할 수 있다.
別錄은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別錄 1 : 천관(天官)
別錄 2 : 율려통고(律呂通考)
別錄 3 : 월령(月令)
別錄 4 : 홍범오행전(洪範五行傳)
別錄 5 : 지리지(地理志)
別錄 6 : 시보(詩譜)
別錄 7 : 식화지(食貨志)
別錄 8 : 고공기(考工記)
別錄 9 : 명물훈고(名物訓詁)
別錄 10 : 고금인표(古今人表)
원추(袁樞)의 《기사본말(紀事本末)》 체례를 모방해,
각 事마다 표제(標題)를 붙였으며, 그 시말을 상세히 밝히고자 했다.
繹史
160卷, 世系圖 1卷, 年表 1卷
撰著者는 (淸)馬驌
出版年: 淸 康熙
版本: 刊本
冊數: 四十册
版框高廣: 匡高十九.七公分,寬十四.三公分
行格: 十一行二十四字,小字雙行三十六字
版式: 白口,無魚尾,左右雙邊
裝訂: 線裝
收藏印記: 學餘堂發兑
序跋題校者: 李淸 序
四庫分類: 史部 - 編年類
附註: 內封題“馬氏繹史”;原鈐“學餘堂發兑”硃文印記
卷端署 “鄒平馬驌宛斯撰”
前有康熙 9年(1670) 李淸 序,馬驌“徵言”
索書號: DS741.M3 c.2
藏館: 大學
資料來源: 古籍善本書錄
(자료설명)
* 고대(古代) 역사(歷史)를 알고자 함에는
자료도 희박하고, 많이 왜곡되어 있을 것인 바,
나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려면,
남들이 정사(正史)라고 하는 책들 만 보아서는,
그들의 꼭두각시 되기 십상 일지니,
남들이 잘 안보는 책을 보는 것도,
진실(眞實)과 더욱 가까워지리라 생각하면서
소개하는 도서(圖書)입니다.
시간되고, 마음 다가오는...자료,
특히, 태고사(太古史) 관련해서
업데이트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