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표창장 / 곽주현
<황금 연못> 시간이다. (매주 토요일 8시 30분, 케이비에스 1 티브이) 배경음악과 함께 황금물고기 한 마리가 연못을 헤엄치며 시작되는 일명 ‘인생 토크쇼(talk show)’다. 집에 있으면 꼭 이 프로그램을 시청한다. 다른 일을 하다가도 이 시간만 되면 멈추고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켠다. 평범한 노인들이 출연해서 주제를 정해놓고 경험담을 풀어나간다. 내 나이도 그 언저리에 있기에 그들의 이야기에 빠져들어 웃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이를 본 딸이 “아빠도 이런 프로 보는 연세인가요?”라고 묻더니 “아, 그렇지. 아빠도 이제 노인이지.”하면서 중얼대듯 말하며 지나간다.
첫 사연은 70대 후반의 할머니인데 열한 살 무렵 시골에 살다가 여수 이모 집에 와서 생전 처음 목욕탕에 가서 모두 홀랑 벗고 씻는 것을 보고 느꼈던 어색함과 뻥뻥 쏟아지는 뜨거운 물이 무척 신기했다고 입담 좋게 말한다. 또 생전 처음 바다를 보고 느꼈던 신비한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어린 시절엔 이렇게 평범한 일상과 자연현상도 큰 구경거리이고 놀라움이었을 것이다.
다음은 한의원에 손주를 데리고 침 맞으러 갔다가 잃어버려서 정신이 나갔다는 사연이다. 아이가 다섯 살이었는데 한 정거장 더 간 곳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전화해 줘서 찾았다 한다. 할머니의 전화번호를 평소에 달달 외우게 했는데 그게 큰 도움이 되었단다.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어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았다. 내 손주도 꼭 연락처를 간직하게 해야겠다.
끝날 무렵에는 ‘황금빛 내 인생’이라는 코너로 마무리한다. 늘그막에 인생 2막을 보람있게 살아가는 분을 찾아내어 그 사람의 활동상을 소개하고 상패(賞牌)를 준다. 이번 주인공은 <모정의 뱃길>로 이름이 알려진 분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한 문화영화다. 여수남초등학교(1962년) 졸업식은 눈물바다가 된다. 세 가구만 사는 가장도라는 외딴섬에서 딸을 6년간 나룻배로 통학시킨 어머니의 사연 때문이다. 이십 리(8km) 뱃길을 하루도 빠짐없이 육지 학교로 보낸 것이다. 태풍 주의보가 내려졌는데도 배를 저어 가다가 파도에 밀려 정신을 잃었는데 지나가던 큰 배에 구조되기도 했다 한다.
나도 여객선이 닿지 않은 낙도에 근무하면서 육지를 오고 가다가 생사가 갈릴 뻔한 경험이 있어 그분의 어려움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뱃길 통학 사연이 신문에 소개되어 편지와 선물 등 많은 도움을 받았다며 출연한 딸이 눈물을 훔친다. 학교를 도저히 보낼 수 없는 환경이었지만 그의 어머니는 오직 배워야 산다는 일념으로 딸을 교육했다. 드라마가 따로 없다. 정규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는 분이 그렇게 했다니 그저 놀랍다. 그때 그 소녀는 대학을 나와 교사로 되어 근무하다 정년퇴직하고 복지관을 찾아다니며 노래로 봉사활동을 수년간 계속하고 있다. 그래서 상패를 받는다. 이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내게도 늘 상을 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
내 아내는 무척 바쁘게 움직인다. 하루 동안에 해내는 일의 양을 대충 헤아려 봐도 그녀는 슈퍼노인이다. 새벽 다섯 시만 되면 어김없이 일어난다. 한 시간 반 동안 요가를 하고 난 후 묵주를 굴리며 기도한다. 그다음에 식사 준비, 세탁, 설거지, 손주 등원시키기, 집 안 청소, 시장보기, 반찬 만들기 등 많은 일을 한다. 하루 동안의 일을 대충 말했지만 좀 더 세세하게 나열하면 이것보다 훨씬 많다. 서울에서 7년, 목포에서 5년째 거의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 서울은 큰아들, 지금은 딸네 집이다.
서울 생활은 어려움이 많았다. 낯선 곳이고 며느리와 함께 생활한다는 게 어렵기만 했다. 무슨 흠이 있거나 마음에 안 들어서가 아니고 남의 집에 얹혀 지내는 것 같아 그랬다. 그런데 아내는 전혀 그런 내색 없이 아이들을 돌보고 집안 살림을 잘 꾸려갔다. 그 많은 일도 전혀 불평이 없이 해내고 손자들을 온 정성을 다해 돌본다. 아들 내외가 아이들을 못 보고 아침 일찍 출근한다. 그래서 며느리가 퇴근하면 얼마나 보고 싶었겠냐며 아이를 안겨주며 방으로 들어가라 한다. 저녁 식사 후 설거지도 피곤할 테니 아예 설거지통 근처에도 못 오게 했다.
둘째 손자가 성격이 까탈스러워 짜증을 내고 울기 시작하면 숨이 넘어갈 것처럼 자지러지곤 했다. 외할머니가 와서 보고는 놀라며 저런 애는 처음 봤다며 고생한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고 갔다. 그래도 밉다는 내색 한번 안 내고 얼리고 달랜다. 아이들은 크면서 이런저런 일을 겪는다며 그 녀석을 업고 거의 밤샘하는 날도 있었다. 옆에서 보자니 안타까웠지만, 아내는 그저 예뻐 죽겠다며 웃기까지 한다. 그렇지 않아도 남다르게 아이를 좋아하는 성품인데 자기 손자를 얻었으니 오죽하겠냐 싶기도 했다. 그 꼴통 손자는 잘 자라 3학년이 되었고 가끔 영상통화로 피아노 연습곡을 들려준다. 재능이 있어 보인다.
살면서 우리 부부는 많이 부딪치며 지내왔다. 의견 충돌로 심하게 다투는 일이 많았다. 지나고 보니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건다’라는 말처럼 별일도 아닌 것에 핏대를 세우곤 했다. 특히 40대 50대에서 더 그랬다. 그 무렵에 고부간의 갈등이 심했기 때문이다. 무조건 아내를 나무라며 참으라고 했다. 그래서 큰소리가 잦았다. 아버지가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고 홀로 다섯 남매를 키운 어머니는 성격이 강한 분이었다. 가족 모두가 자신의 말에 복종하길 원했다. 아들인 나는 이해하고 따를 수 있었지만, 아내는 그러지 못했다. 우리 때문에 고생 많이 하셨으니 어머니께 고분고분하라고 다그쳤다. 갈등은 점점 수렁으로 빠지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지옥 같았다. 다른 사람이 어려움이 있을 때는 쉽게 도움을 주곤 했지만 내 문제는 어렵기만 했다. 그러다가 어머니는 요양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죄책감에 시달렸다. 한동안 아내에 대한 원망이 컸지만 이제 모두 끝나버린 일인데 더는 말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모두 내 탓으로 돌렸다. 시간은 약이었고 나이 듦은 아내에 대한 이해를 넓게 할 수 있었다.
부부는 늘 함께하므로 서로를 잘 알고 있다고 여기지만 살다 보면 예전에 알지 못했던 면을 뒤늦게 발견하고 놀란다. 아내는 며느리와 함께 살면서 7년 동안 한 번도 얼굴 붉히는 일이 없었다. 아무리 좋은 사이라도 얼굴 맞대고 살다 보면 단점이 보이기 마련인데 불평 한마디 없었다. 서울 생활을 끝내고 기차 타고 귀향하면서 어떻게 며느리와 그렇게 다툼 한번 없이 지낼 수 있었느냐고 물었다. 가족에게 잘하고 살림도 알뜰하게 하는데 무엇을 더 바라냐며 웃는다. 그러면서 혼자 말하듯 “그만하면 됐지요.” 한다. 아내의 재발견이다. “아이고 천사 났네.” 하고 마주 보며 웃었다. 그래서 <황금연못>을 볼 때마다 상장 하나씩 준다. 마음만으로.
첫댓글 사모님께 마음은 물론이고 매년마다 주셔도 모자람이 없겠네요. 쓰신 글 꼭 사모님께 읽어보라고 하세요..선생님의 마음이 그대로 전달될 테니까요.
새벽에 잠이 깨서 새 글 소식이 있어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어요. 사모님 말씀 "그만하면 됐지요." 참 감동적이에요. 저도 사람한테 큰 기대하거나 욕심 부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네요.
사모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묻어있네요. 읽을 수 있도록 사모님에게 슬쩍 단서를 주기를 바랍니다.
멋진 분과 사시네요.
손주 돌보미가 12년이군요.
내리사랑이 대단하시네요.
담주가 마감인데 대단하셔요.
선생님!
저는 시작도 못했답니다. 호호
귀한 글입니다. 같이 사는 분에게 인정받는건 대단한 일이지요.상 까지 주고 싶을 정도니 얼마나 좋은 분이실지 짐작이 갑니다. 두 분이 행복하시길 바라는 마음이 샘솟습니다.
저는 맨날 글 속에서 남편 흉을 보는데 선생님은 사모님께 상을 주고 싶다니요.
반성하게 하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