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글쓰기 60 ㅡ 안녕? 홍서방! (사소)
막내 란이가 전화를 해서 무슨 얘기 끝에 홍 서방 얘기를 했다. 홍 서방이 언니가 준 용돈으로 산 구두를 너무 아낀다고, 거기에 뭐라도 좀 묻을까 봐 조심조심 걷고 또 퇴근하면 매일 닦는다고 너무 귀엽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용돈을 준 게 아니라, 10년 전 힘들 때 막내가 보내줬던 쌈짓돈을 갚자고 한 것이다. 동생은 절대로 안 받겠다고 무섭게 구니 이리저리 생각 끝에 홍 서방에게 승진 축하로 카카오로 강제 용돈을 보냈던 것이다.
홍 서방에게는 처음 선물을 한 건 아니다. 몇 해 전부터 생일날 작은 케이크라도 보내면 홍 서방은 어린애처럼 좋아한다고, 동생은 그때마다 전화를 했고 나도 흐믓했다. 그러면서 동생은 언뜻 남편을 향한 애틋한 마음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를 어린 나이에 잃은 홍 서방이 몇 해 전, 갑작스레 정말 어이없는 사건으로 젊은 여동생을 잃은 것이다. 너무도 황망해 자매들이 달려간 장례식장에서 외려 홍 서방은 우리를 위로할 정도로 흠체없었다. 원래 고상하고 품위있는 홍 서방이었지만 격랑을 이겨낸 담담하고 차분한 얼굴의 홍서방은 나보다도 더 어른의 모습이었다. 푸르고 정갈한 슬픔이었다. 자매들은 빨간 눈을 감추기 위해 얼른 뒤돌아 앉아야만했다.
그 후 동생은 카스에 문구를 내걸었다.
' 우주는 캄캄하고, 지구는 작고 외로우며 우리는 스쳐지나 간다. 하루 하루 우주와 나 자신과 타인에게 사랑을 고백해야 하는 이유이다 '
내 동생다운 글귀다. 그리고 매번 아이들과 시어머니와 같이 여행을 다녀오거나 가족 행사를 하면 열심히 사진과 글을 남긴다. 그걸로 책을 만들 거라 했다. 마치 함께 지구에 다녀간 흔적을 새겨 놓으려는 듯 말이다.
란이는 전화를 끊으며 홍 서방이 서로를 운명이라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둘은 만나기 전부터 희한한 다른 시차의 공통의 사건이 있다 했다. 4년 차이가 나는 동생과 우리 홍 서방은 둘 다, 수능날 시험장에서 잠이 들어버렸다는 것이다. 란이 말에 의하면 언니가 싸준 도시락이 너무 맛있었다. 게다가 언니가 창문 틈으로 전해준 따뜻한 차가 더 문제였다고 했다. 달콤하고 따뜻해서 마지막 시간에 안그래도 태평한 우리 막내는 꿀잠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 불쌍한 홍 서방은 겨울날, 차가운 호일에 싸간 김밥을 먹고 그만 체해버렸다. 몸 컨디션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버티다 결국 잠이 들어버린 것이다. 홍 서방은 본인이 그때 얼마나 냉한 속으로 떨어야 했는지, 얼마나 서러웠는지 잊을 수 없다고 동생에게 말하곤 한다고 했다. 결국, 노곤히 잠든 막내는 시험 감독관이 보다못해 열어 젖힌 창문과 커튼사이로 훅~ 불어오는 차거운 바람에 잠이 깼고, 그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시험은 망쳤지만 어찌어찌해서 결국 같은 대학, 같은 과에서 그렇게 무섭다던 호랑이 예비역과, 선배 빰치는 맹랑하고 겁없는 새내기로 둘은 홍서방이 말하는 운명적으로 만났다. 둘은 4년 내내 도서관이고 동아리고 어디서건 연예만 하다가 홍 서방은 회계사 시험에 낙방을 했다. 그리고 정신 안 차린다고 동생에게 차였다. 일 년 후 합격증을 들고 씩~
웃고 나타난 자존심 없는 우리 홍 서방! 그때 언니는 동생한테 독한 지지배라고 야단을 쳤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대범한 동생이 작전을 잘 짠 것 같다.
허리가 꼿꼿해서 선비같고, 눈썹이 짙고, 웃으면 보조개가 오목 들어가는 까만 피부 까만 눈망울의 필리핀왕자 우리 홍 서방! 우리가 보면 근엄해 보이지만, 란이 앞에선 노루처럼 한없이 온순해져 막내 껌딱지가 돼서 맨날 맨날 동생하고 산책하고 같이 카페 가는 게 젤로 행복하다는 우리 홍 서방.
나는 그런 홍 서방이 제일로 멋있어 보이고, 막내가 그런 우리 홍 서방을 만난 게 고맙기만 하다.
첫댓글 저는 개인적으로 이 글이 마음에 듭니다. 사소님이 3인칭으로 쓰는 글보다 1인칭으로 쓴 이 글이 편안하게 읽힙니다. 아주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사소님의 글, 저를 감동시키고, 글을 잘 쓰는 친구라고 느끼게 했던 그런 글에 가까워서 더 좋았습니다. 하필 '홍'이라는 성이 누구와 같아서 제목만 보고 여러 상상을 했던 거에 혼자 웃었기에 더 좋았을 수도 있습니다. '홍'씨 성을 가진 남자는 평균적으로 좋은 남편이 되는 걸까요? 예전 어느 때 제게 약간 관심을 보였던 '홍'씨 성의 남자가 있었는데, 문득 생각나네요. 잘 살고 있는지... 아마도 저와 엇갈렸기에 그럴 거라고(잘 살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저도 토끼님 못지 않게 자만심이 강한가요, 그라시아님?^^)
엉~~평균이라하면 또 누구죠? ㅇ호 선배가 좋은 남편이 됐을 확률은? 글고보니 우리학원 홍쌤도 오늘 내가 화원간댔더니 아내준다고 후레지아 사달라 부탁했는데 말이죠. 이거 솜사탕님께 의뢰해볼까요?
제낭에 대한 처형의 사랑이 근사해 보입니다. ^^
현실에서도 운명적인 만남은 존재하나 봅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