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도통장 정공의 서문으로 보내다 [贈都統將鄭公序(증도통장정공서)]
글/雲巖 李炳權
번역/羅千洙
갑오년(1894년) 음력섣달 열엿샛날에 내가 나주에서 소요(騷擾) 사태를 피하였는데 귀소객(歸巢客)이 나에게 묻기에 말하기를 “대저 전투란 죽을 곳으로 가는 것이니 옛날에 군사를 잘 써서 비록 백번 싸워 백번을 이겨도 그 사졸들이 죽어 나가고 무기를 잃는 것이 한둘로 끝나지 않고 도리어 간혹 포상의 은전이 공로에 걸맞지 않아 마음이 몹시 불쾌하고 즐겁지 않은 것이 있다.”라 하였다.
이제 들으니 나주 도통장 정군(鄭君)이 동학 소요사태를 평정하면서 한사람의 사졸이나 한 개의 병기도 잃지 않고 물리쳤지만 겸손하게 자기를 지켰다고 모두들 말하기를 ‘그렇다’ 라고 말도 많았는데 그 상세함을 청하여 묻기도 하였으며 말하기를 아득한 상고시대라 하였다.
오늘날 세상으로 말하여도 거센 물결을 막고 있는 저주산(砥柱山)이요 세찬 바람에도 꺾이지 않은 풀은 한편으로는 초토사요 한편으로는 도통장일 뿐이다. 나주에 있으면서 눈으로 직접 본 그 전말(顚末)을 청컨대 그대를 위해 말하노라.
아아, 슬프다. 금번 호남 호서의 전체 牧과 府의 고을에서 비적(匪賊)들이 소요 읍의 수령들이 혹 곁눈질하여 엿보면서 영접하는 자도 어느 정도 있었다. 벼슬을 한 집안이나
사족의 가문들은 격하고 강개하게 창의하여 토벌하자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오로지 나주목사 민공(閔公)은 분연히 토벌하여 섬멸할 뜻을 가지고 정군(鄭君)을 도통장으로 가려 뽑았는데 평소에 병서를 읽지 않았지만 항오(行伍)를 연습한 사람으로 골라 뽑아서 이 민공(閔公)에게 위임한 것은 현명한 것이다.
격렬한 기상과 의리로 사지(死地)에 나아가면 분격하여 몸을 돌아보지 않은 것이 이 정군(鄭君)의 충(忠)으로 정군(鄭君)이 통장(統將)이 된 후로부터는 밤낮으로 방어를 계획하였으며 이 당시에 즉시 큰일을 창건하기 시작하니 쥐처럼 엿보고 여우처럼 의심을 하고 그 사이에 흉악하게 이를 가는(孼牙) 자가 없지 않았으니 인정이 여기 저기 흩어져 합치하기 어려웠는데 이치상 당연한 것이었다.
정군(鄭君)은 홀로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배척하였는데 서문(西門)전에서 한번 크게 이긴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로 한사람의 사졸이나 한 개의 병기도 잃지 않으니 귀신이 하늘인지 군사의 기세가 번개가 번득이듯 하였기에 모든 의심이 얼음 녹듯 풀리면서 자연히 한마음이 되었다.
금성관에서 백리가 곧 쇠로 만든 독이요 철로 쌓은 성이란 것을 확실히 알았다. 대저 지리의 이점은 인화(人和)만 못하지만 하물며 인화(人和)와 지리의 이점을 겸하였으니
어찌 누가 감히 대적(對敵)하는 자이겠는가. 또 민공(閔公)이 성(城)을 지키는데 사졸들과 함께 고생을 하면서 농사일을 맡아보는 관리[田]에게 다만 판삽(版鍤)의 일을 맡겼다.
〔甲午臘月旣望, 余自羅州避擾, 歸巢客有問於余曰 : “夫兵死地也, 古之善用兵者, 雖百戰百勝, 物故其士卒, 兦失其器械非止一二, 而反或以賞典之不稱功, 悒悒不樂者有之.” 今聞羅州都統將鄭君之削平東擾也, 不喪一士卒一器械退, 而謙謙自持, 有諸曰 : “然”曰曰, 請問其詳, 曰上古邈矣。今世言之頹波砥柱, 疾風勁草, 一則招討使, 一則都統將而已乎。在羅州目擊其顚尾, 請爲子言之。嗚呼痛哉, 今番匪擾全湖牧府之州, 守令之邑或睥睨迎接者有幾焉。簪纓之家, 士族之門, 激慨倡討者無一焉。惟羅州牧閔公, 奮然有剿滅之意, 選鄭君爲都統將, 素非讀兵書習行伍之人也, 而擇而委任此閔公之明也。激氣義就死地, 而奮不顧身此鄭君之忠也, 自鄭君爲統將之後, 晝宵計畫防禦, 而是時卽倡建大事之初也, 鼠覘狐疑, 不無孼牙其間, 人情之落落難合, 理固然矣。鄭君獨排衆議, 而何幸西門戰一大捷, 不喪一士卒一器械, 天耶神耶士氣電騰, 衆疑冰釋自然一心。錦館百里便作鐵甕金城信知。夫地利不如人和,
而況人和兼地利, 孰曷敢敵之者歟? 且閔公之守城也, 士卒同苦, 任田單版鍤之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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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장(統將)이 출전하면서 개연히 수레에 올라 범방(范滂)처럼 세상 어지러움을 다스려 맑게 하려는 뜻이 있었으며 다시 사창과 고막원 양쪽으로 나아가 싸울 때 또한 한사람의 사졸이나 한 개의 병기도 잃지 않았으며 다섯 번째 싸운 용진과 여섯 번째 치는 남산에서 승리를 고하였는데 또한 한사람의 사졸이나 한 개의 병기도 잃지 않았기에 개선의 노래를 부르며 정모(旌旄)의 깃발로 東學을 내 쫓으니 남평의 수령(守令)이 무사하였으며 수레를 타고 남쪽을 지휘하니 영암의 도적들이 모두 평정되었는데 또한 한사람의 사졸이나 한 개의 병기도 잃지 않았다.
오호 장하구나. 전후로 여덟 번 싸워 여덟 번 이기면서 하나도 잃거나 하나도 손해 본 것 없으니 과연 도통장이 용병을 잘하고 잘 부렸던 것이다. 아니면 충의가 천신(天神)을 감동시켜서 그러했던 것인가.
실로 민공(閔公)이 성(城)을 지킨 것은 인화(人和)였으니 도통으로서 전투에 나아가서는
다만 인화(人和)로서 이끌었던 것이다. 조빈(曹彬)은 옛날의 명장으로 촉나라를 정벌하면서 송(宋) 태조가 함부로 살생하는 것을 경계하라는 뜻을 잊지 않고 촉나라 삼파(三巴)가 이미 평정되었어도 한사람도 사람이 사망한 일이 없었다.
크고 작음이 비록 다르겠지만 지금 도통장이 비적들의 소요를 토평(討平)하면서도 대체로 그러하였다. 이어서 조정은 상전(賞典)의 많은 일이 일이 많아 상전(賞典)에 조금 더디었는데 이는 옛 사람들도 근심했던 바인데 돌아와 통장을 보니더욱 스스로 겸손하고 겸허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도통장이 여러 차례 전승을 이루는 것은 가능했으나 그 겸손하기가 어렵지만 잘하였다.
나 역시 가솔들을 이끌고 여러 번 서문 밖 가까운 동네(골짜기)로 피신하였으나 아이들[兒曹]로 하여금 독서를 권하고 침식을 편안히 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또한 도통의 힘이었다.
돌아와서는 비록 평소에 교분이 없었으나 한번 치하하러 가고자 하였으나 임금이 거느린 군사가 와서 머물기에 억측을 올리며 응접한 것이 미진한 것 같다. 그러므로 숙향(叔向)을 취하고 기해(祁奚)의 일을 보지 못하고는 승평(昇平)과 짝하여 좋이 고향으로 돌아 와 객들에게 말하기를 “도통이 여러 번 싸워 여러 번 이긴 것은 지혜와 용기에 힘입은 것이요 의병이라고 무적은 아니라고 말하고 사졸을 하나도 잃지 않은 것은 선과 복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하고 하늘의 도(道)는 선한 자에게 복을 준다”라고 말하니 객들이 ‘네, 네’ 하며 공손히 대답하고 물러갔다.
이듬해 가을 8월 2일에 난와 오공(難窩 吳公)을 방문하니 하루를 묵으니 오공(吳公)이 나에게 도통장에게 드리는 초고를 나에게 보내어 보여 주었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나 또한 사람을 염려하여 분연히 대략의 내 생각을 드러내며 객과 묻고 답하였는데 자질구레한 내용을 표현하는 것이 부끄럽기는 한데 모름지기 평소의 교분이 없다 하여 외면하지 않고 어떻게 하여서라도 말미에 내 뜻을 덧붙여서 도통장을 권면하기를 오직 바라기는 도통장이 공(功)을 이루었다 말하지 말고 동학의 소요에 무위(武威)를 잊으라 했다.
비록 왕실의 근심을 평정하였다고 하나 다시 다른 날 일이 생기면 부추길 것이다. 지금 세상이 주시하고 바라는 것은 도통장이 아니라면 누구이겠는가. 도통장이 충성을 다해서 비적을 배척하는 날이 많이 있을 것 같으니 더욱 더 힘쓸지어다. 다시 짧은 율시 한수를 차운하니 이르기를
어린아이나 심부름하는 하인들도 그대 이름을 외울 것이니 小兒走卒誦君名
충의로 당당히 이 명성을 얻었도다. 忠義堂堂得此聲
대륙은 다시 동쪽 바다의 해가 밝게 빛나고 大陸復明東海日
한양의 북쪽을 바라보니 푸르른 산이 높구나. 漢陽北望碧崢嶸
운암 이병권
〔都統之出戰也, 慨然登車有范滂澄淸之志, 再戰社倉兩出古幕, 亦不喪一士卒一器械, 而告捷五戰聳珍六伐南山, 亦不喪一士卒一器械, 而唱凱旌旄東驅, 南倅賴安, 輜轂南指靈盜悉平, 而亦不喪一士卒一器械。嗚呼壯哉, 前後八戰八捷無一失一損者, 果都統善用兵而使之歟。抑忠義格天神, 而然之者歟。實閔公守城之人和, 爲都統出戰, 抑以和而致之者歟。曹彬古名將也, 其伐蜀也, 不忘宋太祖戒妄殺之意, 而三巴旣平一人不喪事之。大小雖殊, 今都統之削平匪擾其庶幾乎。繼以朝家多事賞典差遲, 此古人所悒悒者, 而歸視都統益自謙謙誰知? 都統之屢捷可能, 而其謙難能也哉。余亦提携家累避寓西門外近洞, 使兒曹勸課讀安寢食, 亦都統之力也。其歸也, 雖無雅分欲以一賀適, 王師來留其供臆應接, 似有未遑者。故取叔向不見祁奚之事, 昇平作伴好還鄕矣, 客曰 : “都統之屢戰屢捷, 頼其智歟勇歟。曰否義兵無敵, 曰不喪一士卒由其善乎福乎, 曰天道福善.” 客唯唯而退。翌年秋八月二日訪吳公難窩, 而一宿吳公示余贈都統一草書, 而要而次之。余亦在念人也, 奮然略陳其與客問答, 以表區區之望望, 須無無雅分外之, 如何尾附己意, 以勉都統, 惟願都統勿謂功成, 而忘武東擾。雖平北憂更煽他日有事。今世注望非都統, 而誰歟? 都統效忠似有多斥匪之日, 益加勉旃哉。更次一短律曰: “小兒走卒誦君名, 忠義堂堂得此聲。大陸復明東海日, 漢陽北望碧崢嶸。〕〔右雲巖 李炳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