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림 없는 내 삶의 우선순위
2023. 3. 5(주일낮예배) 사도행전 27:22-26
유튜브에 이영표의 동기부여라고 치면 열방울의 땀을 흘렸는데 열 한방울만큼 발전하는 거 그런거 없습니다는 강의가 나온다. 그 강의에서 이영표선수는 중학교 때 드리볼 연습을 많이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공을 몰고 가면서 다른 선수를 제치는 것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드리볼 연습을 한 이영표선수는 이제 공이 주위에 떨어지면 그것을 먼저 차지하고 싶었다. 그래서 공이 주위에 떨어졌을 때 더 빨리 반응하여 달려가고 싶어서 줄넘기를 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1학년에 가자마자 이단뛰기를 하루에 천 개를 하기 시작했다. 이단뛰기 100번을 하면 너무 힘들어서 100번은 10번을 했다. 그렇게 2년동안 줄넘기를 하여서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한번에 2단뛰기를 천 번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되는 동안 줄넘기가 2번 끊어졌다. 줄넘기가 끊어지는 날 이영표선수는 너무 좋았다.
왜 이영표 선수가 그렇게 좋아했겠는가? 첫 번째는 줄넘기가 끊어졌기 때문에 그날은 그냥 집으로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영표선수가 좋아한 진짜 이유는 내가 지금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열심히 줄넘기를 한 이영표는 이제 공이 주변에 떨어지면 그 누구보다 더 빨리 반응하여 공을 향하여 달려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축구선수로서 누구보다 열심히 땀을 흘리며 훈련하였던 이영표선수는 그 강의에서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 중에 어느 것을 먼저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한다.
여러분 생각에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중에 어느 것을 먼저 해야 하는가? 이영표 선수는 하고 싶은 일을 먼저 하면 나중에는 해야 할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삶을 살게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반대로 해야 할 일을 하고 살면 나중에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이영표 선수는 자기의 삶을 근거로 이렇게 대답한 후에 어느 것이 지혜로운 삶인가?를 물었다.
여러분 생각에 어느 것이 지혜로운 삶처럼 보이는가? 우리의 신앙은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갈등한다. 쉬운 예를 들면 주님은 우리에게 용서하라, 사랑하라고 말씀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앞에 실수한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는 것은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람의 잘못을 천하에 알리고 내가 위로받는 일을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먼저 하기 때문이다.
또 보시기 바란다. 우리 주님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였다. 그러므로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된 삶을 사는 것은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이야기 한다. 그래서 돈도 좀 벌어야 하고, 또 아이들도 좀 키워야 하고, 또 직장에서 동료들과 즐거운 시간도 가진 후에 해야 할 일을 하려 하는 것이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아닌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다. 그랬던 바울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는 결단을 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작정한다. 그리고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겠다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예루살렘을 위하여 헌금한 것을 전달하기 위하여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가려 하였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전달을 한 후에 바울은 로마로 가겠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바울의 계획은 이제 이만큼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였으니 좀 쉬어야겠다는 모습이 전혀 없다. 바울의 생각에는 오직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는 말씀에 순종하고 있었다.
그러면 이러한 바울의 삶에 어떤 역사가 일어나야 하는가? 정말 놀라운 것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이 결단을 한 후에 적지 않은 소동이 일어났다. 데메드리오라는 은장색이 그 직공들과 영업하는 자들을 선동한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므로 아데미 신상이 잘 팔리지 않는 상태에서 데메드리오가 선동하자 그들이 다 일어났다. 그래서 바울을 찾던 사람들은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연극장으로 갔다. 아마 데메드리오는 그 연극장에서 바울을 기다렸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친구들의 만류로 인하여 연극장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나 때문에 가이오와 아리스다고가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바울은 그들을 구하러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울이 겪은 고난의 전부가 아니었다. 바울은 계획대로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는데, 예루살렘에도 소동이 일어난다. 그래서 바울은 결박되었고, 기회를 얻어서 유대인과 유대지도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지만, 아무도 바울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바울의 변론을 들은 사람들은 더 분노하고,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밥도 먹지 않겠다는 결사대 40명까지 결성되었다. 상황이 더 나빠졌다는 것이다.
왜 바울의 고백과 결단 후에 더 큰 고난이 있었겠는가? 이찬수 목사님이 사랑의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섬길 때 옥한흠목사님이 내 년에 개척을 하라는 말씀을 하였다. 그 말에 벌벌 떨면서 어디서 하면 좋을까요? 하고 물었더니 옥목사님은 분당같은 신도시가 좋겠지?하고 말씀하였다. 그래서 이찬수 목사님은 분당을 개척지로 정하였다. 그리고 예배드릴 처소를 찾고 있었는데, 이찬수 목사님에게 전화가 왔다. 아버지 목사님이 은퇴를 하게 되었는데, 후임으로 이찬수 목사님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에 3천명이나 모이고, 건물있고, 뒤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있는 그 교회에서 청빙을 받은 것이다. 분당에 70평에 엘리베이트도 없는 건물을 보고 있었던 이찬수 목사님에게 예배당이 있는 3천명의 교회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때 이찬수 목사님은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집에 가서 사모님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 하였더니 사모님이 아주 간단하게 해결해 주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겠구만, 당신이 진짜 개척할 의지가 있는지 없는지 하나님이 테스트 하고 있네
사모님의 그 말에 목사님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3천명의 교회에 청빙받지 않고 분당에 개척하여 오늘의 분당우리교회를 섬기는 목사가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가 아니겠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에서 결박된 바울은 죄인된 몸으로 배를 타고 로마로 압송되고 있었다. 그런데 유라굴라 광풍을 만난 것이다. 그 광풍이 얼마나 거칠었던지 배가 주위에 있는 모래톱(스르디스)에 걸릴 것같아서 사람들은 배의 키도 놓았다. 자신들의 힘으로 배를 조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냥 풍랑에 배를 맡긴 것이다. 그리고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하여 배에 있는 물건과 장비도 바다로 던졌다. 이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고 하늘을 보았는데, 하늘은 캄캄하여 해와 별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한 상태에서 배에 탄 276명의 사람들은 다 절망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배의 모든 사람이 다 두려워 떨 때에 바울은 어떠했겠는가? 하나님의 사자가 바울 곁에 서서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였고 말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자가 바울 곁에 서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울이 두려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곧 담대함으로 일어날 수 있었다.
바울이 어떻게 담대하게 일어날 수 있게 되었가? 오늘 본문 23-24절 읽기 바란다.
(행 27:23-24)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바울 곁에 선 하나님의 사자는 바울에게 2가지를 말한다. 먼저 한가지는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다고는 것이다.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고 결단하고 고백한 바울의 그 비전을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겠다는 말이다. 그러면 가이사 앞에 서야 하는 바울은 유라굴라 광풍 앞에서 결코 죽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자는 바울에게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고 말한다. 여기서 주었다(카리조마이)는 말은 희생제물을 드릴 때 하나님이 용서와 은혜를 베풀어 주는 것을 말한다. 구약 시대 하나님 앞에 희생제물을 드려서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또 은혜를 베풀어 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주었다는 말씀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이 너와 함께하는 사람들을 다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겠다는 말씀인 것이다.
놀랍지 않는가? 사도 바울이 삶의 바른 우선순위를 두고 역경을 이기며 나아갈 때 하나님은 그 역경 가운데서 위로와 소망을 주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러한 바울을 통하여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위로와 은혜를 베풀어서 그들이 절망에서 소망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포기할 수 없었던 바울의 사명이 바울을 살리고, 또 그와 함께 한 사람들에게 진정한 소망과 위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이 땅에 위로와 소망을 주는 성도의 참된 모습이 아니겠는가? 지금 미국 켄터키 에즈베리 대학의 부흥운동으로 세계가 깜짝 놀라고 있다. 2월 8일 채플 시간에 설교자는 여러분은 주님의 사랑을 깨닫기 전에 졸업을 하지 마십시오.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런데 그 설교에 감동받은 19명의 학생이 예배가 마친 후에 강단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지나고, 수업이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렇게 기도할 때 주위를 지나가던 학생과 교수들이 그 기도의 자리에 함께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떤 학생은 그 모습을 SNS에 올려서 학교 안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전달하였고, 나중에는 학생들과 교수만이 아니라 그 지역의 교우들과 목회자들도 그 강단으로 몰려와 함께 기도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기도회는 2월 23일까지 계속되었는데, 그 기간 중에 많은 사람들이 성령께서 자신의 마음에 임하는 것을 느꼈고, 그래서 간증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리고 지금은 켄터키 캠벌랜드 대학교, 오하이오 시드밸 대학교, 펜실대학교 벨리포스대학교, 테내시 중학교까지 부흥의 불길이 불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부흥운동의 시작이 어떻게 일어났는가? 19명의 학생이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임하기까지 이 강단을 떠나지 않겠다고 결단하며 나아갈 때였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여잡고 굳건하게 나아가는 그들을 통하여 역사는 일어난 것이다.
그러면 이 부흥운동이 우리 교회에서도 일어날 수 있지 않는가?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우선순위로 삼고, 결단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위로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리를 통하여 절망한 이 세대에 소망이 심겨지는 은혜도 보게 될 것이다. 저와 우리교회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삶을 최우선으로 두고 살아서 이 세대에 소망을 심어주는 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