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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바로프스크의 밤
강회장 일행이 탄 세 대의 벤츠가 식당을 출발한 것은 10시 30분이 되었을 때였다. 기온은 저녁때보다 뚝 떨어져서 영하 20도를 넘어서 있다.
레닌 대로를 곧장 달려 올라가는 벤츠 대열의 선두차에는 김영규 부장이 직원들과 함께 탔고 가운데의 벤츠에 강회장과 이남호가, 유장석은 후미의 차에 탔는데 옆에 앉은 것은 김상철이다.
유장석이 술기운에 붉어진 얼굴로 조수석을 바라보았다. 뒷머리를 보이고 앉아 있는 사내는 장국진이다.
「이봐, 하바로프스크 근처에 조선족들이 얼마나 살고 있나?」
장국진이 뒤쪽으로 상반신을 돌렸다.
「예, 작년에 조사를 했는데 32만 5천7백 명이었습니다, 전무님.」
「사할린에 있는 동포까지 합한 숫자인가?」
「예, 전무님.」
「우리가 조사한 숫자보다 적은데.」
「러시아 전체로 치면 40만 명이 조금 넘습니다, 전무님. 하지만‥‥‥」
「하지만 뭐야?」
「동포들의 인력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중국 국경 부근의 조선족만 해도 50만 명이 넘는데다 또‥‥‥」
「또 뭐야」
「밀입국자들도 많습니다.」
얼굴에 웃음을 띤 유장석이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김대리, 네가 빠르게 가르쳐 가는 모양이다. 장국진이를.」
「저, 장국진 씨는 근대의 정식사원으로 채용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김상철의 말에 유장석이 눈을 크게 떴다.
「채용되었지 않아? 결정이 된 일이다.」
「정식 서류로 계약이 되고 월급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보상금 지급처도 확실하게 해두고 싶은 모양입니다.」
그러자 유장석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당장에 서류를 만들라고 하지. 외국생활을 많이 해서 그런지 말이 통하는 친구구만, 장국진이는.」
레닌 대로는 영광 광장 앞에서 직각으로 오른쪽으로 꺾어지게 되어 있었는데 두 블록을 가면 왼쪽에 콤소몰 광장이 나온다. 차량의 대열은 영광 광장 앞에서 속력을 줄이고 오른쪽으로 돌았다.
사람의 통행이 뜸해진 시간이다. 광장과 영원한 불이 있는 전몰병사의 위령비 쪽은 짙은 어둠에 덮여 있었다.
선두차의 운전사는 서울에서 온 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고참 사원이었다. 앞에서 달리고 있는 회색 승용차 때문에 차의 속도가 떨어지자 힐끗 백미러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2차선에서 바짝 옆으로 붙어오는 트럭이 보였다. 입맛을 다신 그는 회색 승용차의 뒤로 차를 바짝 대었다. 이쯤하면 2차선으로 비껴 서주는 것이 예의인 것이다.
두 번째의 벤츠에 타고 있던 이남호는 차 옆으로 트럭의 엔진 부근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민간 트럭으로, 엔진 옆으로 둥근 커버가 씌워진 구형이었지만 요란한 엔진 소리에 강회장도 그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그 순간이다. 트럭이 불쑥 튀어 나간다고 느끼는 순간 트럭 옆쪽의 두꺼운 캔버스 천이 들쳐 올라가면서 서너 개의 총구가 나타났다.
「아이구!J
저도 모르게 고함을 친 이남호가 회장의 목을 한 팔로 감아 안고 앞으로 엎드리는 순간 요란한 총성과 함께 유리창이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유리 파편이 피부 위로 떨어져 내렸고 앞에 앉은 직원의 신음소리도 들렸다.
트럭이 옆을 스치고 지나가자 김상철은 무의식중에 머리를 들어 앞쪽을 바라보았다. 캔버스 천으로 적재함을 덮은 트럭은 맹렬한 기세로 회장 차 옆으로 다가가는 중이다. 앞자리에 앉은 장국진도 긴장한 듯 그쪽을 바라보았다.
트럭이 회장의 벤츠와 나란히 달린다고 보이는 그 다음 순간이다. 벤츠 쪽을 향한 적재함에서 불꽃이 튕겨 나오면서 요란한 총성이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회장의 벤츠가 브레이크를 힘껏 밟았으므로 이쪽 운전자는 그야말로 아슬아슬하게 오른쪽으로 비꼈는데 빙판길에 미끄러지면서 인도의 블록을 받고 멈춰 섰다. 차 안에 타고 있는 사내들이 일제히 뛰어나갔을 때 트럭은 멀어져 가는 중이었고 회장의 벤츠는 2차선에 비스듬히 멈춰 서 있었다. 한걸음에 달려간 김상철이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회장님!J
「이봐, 우린 괜찮다. 」
의자 앞쪽에 납작 엎드려 있던 이남호가 그제야 머리를 들었는데 회장은 보이지 않았다. 유장석과 장국진이 달려왔고 앞 차에서도 직원들이 몰려왔다. 도로는 순식간에 마비가 되어 차량들이 줄을 이어 섰다. 이남호가 몸을 일으키자 바닥에 깔려 있던 회장이 상반신을 세웠다. 그리고는 피투성이가 되어 뒤엉켜 쓰러진 앞자리의 두 직원을 보았다.
「이 놈들.」
회장이 눈을 부릅떴다.
「어디 두고 보자.」
「회장님, 어서.」
이남호와 유장석이 서둘러 그의 팔 하나씩을 잡았다.
「어서 숙소로 가시지요. 이곳은 저희들이.」
유장석이 머리를 돌려 김영규를 찾았다.
「김부장, 네가 이곳을 맡아.」
「예, 어서, 염려마시고.」
눈을 치켜뜬 채 반쯤 얼이 빠져 있던 김영규가 소리쳐 대답했다.
찬바람과 함께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마비된 도로에 자동차의 라이트가 첩첩이 쌓이기 시작할 때 경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콤소몰 광장 쪽에서 다가왔다.
숙소까지는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차에서 내린 그들은 회장을 옹위하고는 한 덩어리가 되어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모두 흥흥한 기세였고 당장에라도 누군가를 물어뜯을 듯한 표정들이었다.
회장은 2층의 응접실로 들어서자 소파에 몸을 던지듯 앉았다.
「꿀물 한 잔 타 오너라,」
주춤거리며 문 앞에 서있는 박미정에게 말하고 난 그가 앞에 서 있는 이남호와 유장석을 바라보았다.
「어떤 놈들이냐?1
사건 이후로 그들에게 처음 던지는 말이었다.
비뚤어진 넥타이를 한 채 서 있던 이남호가 한 걸음 다가섰다.
「찾겠습니다, 회장님. 무슨 수단을 쓰더라도.」
「우리가 습격당한 것을 곧 모두 알게 될 겁니다. 러시아 정부 쪽에서도 조사를 하겠지요.」
누구라고 선뜻 말할 수가 없는 것은 러시아 정부만 제외하고 주변의 모든 나라가 이번의 계약에 대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박미정이 가져온 꿀물을 마시고 났을 때 방문이 열리더니 직원 한 명이 들어섰다.
「저, 손님이 찾아왔습니다만, 안기부 과장이라고 합니다. 꼭 뵙고 싶다고.」
이남호가 퍼뜩 머리를 들었다.
「건방진 놈들 같으니. 유전무, 당신이 나가 봐.」
최악의 상황일 때 면담 신청이 온 것이다. 유장석이 아래층 현관 옆의 대기실로 들어서자 의자에 앉아 있던 두 사내가 일어섰다. 심재택과 이석도이다.
「전 안기부 과장 심재택이고 이 사람은 저희 직원입니다.」
심재택이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난 비서실의 유전무요.」
악수도 생략한 유장석이 자리에 앉자 그들도 따라 앉았다.
유장석이 그들을 쏘아보았다.
「무슨 일이요? 이런 시간에. 더구나 우격다짐으로 안으로 들어오다니, 이런 무례가 어디 있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구만, 당신들은. 그 지시가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통할 곳에 가서 써 먹어야지.」
이석도가 눈을 치켜 떴지만 심재택은 그래도 노련한 사내였다.
그는 머리를 끄덕였다.
「서울에서 연락을 받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번 계약은 즉각 중지해야 한다는 정부의 지시 말입니다.」
「난 모르는 일인데.」
「그럼 지금 전해 드리지요. 계약을 중지하지 않으면 법에 위반됩니다. 근대그룹은 물론 강회장께 중대한 결과가 닥칠 것입니다.」
「공갈 그만 치라고 대통령에게 전하시오.」
「그건 강회장 말씀입니까?」
「비서실의 유장석 전무 말씀이오.」
「그렇게 전하지요.」
머리를 끄덕인 심재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쨌든 회장님께서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물론 이건 제 개인적인 인사입니다만.」
「회장님을 뵈려고 식당 앞에서부터 따라왔었지요. 그런데 트럭이 제 차를 추월해 갈 적에 운전석에 앉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두 명 다 동양인이더군요,」
유장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이유는 뭐요?」
「오해를 살 염려가 있다고 생각되어서 제 독단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
「용의자 리스트에서 안기부는 제외시켜 주시지요. 그 말씀도 드리려고 우격다짐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인투리스트에서 영광 광장까지는 직선거리로 대략 백 미터가 조금 넘을 뿐이었지만 오성그룹의 최선호 전무가 총격 소식을 들은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쯤 지난 후였다.
시내에 나갔던 고정문이 헐레벌떡 달려 들어와 강회장의 피습 소식을 전해준 것이다. 12시 가깝게 된 시각이었다.
그러나 강회장 일행이 탄 승용차가 총격을 받고 두 사람이 죽었다는 것만을 들었을 뿐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다.
앞에 앉은 고정문을 한동안 바라보던 최선호가 입을 열었다.
「안기부 짓일까?」
안기부의 심재택에게 강회장과 로스토프가 아무르 식당에서 식사 약속이 있다는 정보를 전해준 것도 이쪽이다.
고정문이 머리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북한 공작원들의 짓일지도 모릅니다.」
「또는 마피아 짓인지도.」
「우리가 안했다는 것만 확실하군.」
그러면서 최선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누구의 짓이건 간에 강회장이 습격을 받았다는 것은 보통 사건이 아니다. 이쪽이 잠자코 있는 동안에 상황은 급박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어떤 놈이 했건 간에 그자들은 로스토프와 강회장과의 저녁 약속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거야.」
「그렇지요. 우연히 보고 습격 했을 리는 없습니다.」
「근대 쪽에서는 우리를 의심하고 있을까?」
「우리가 이곳에 와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당연하지요.」
근대 쪽의 머리도 이쪽 못지않은 것이다. 서은영에게 쪽지를 보낸 것이 신우그룹이 아니고 오성이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최선호가 머리를 들었다.
「박대용이를 불러.」
「지금 말입니까?」
「지금 당장, 내가 만나잔다고.」
고정문이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까지 박대용을 만날 때에는 이쪽에서 그의 연락을 기다렸는데 그것은 보안유지 때문이었다. 박대용은 고정문에게 연락처를 알려주면서 특별한 일이 아니면 절대로 연락하지 말라고 당부했던 것이다.
「뭐라고 말할까요?」
고정문이 묻자 최선호도 생각에서 깨어난 듯 그를 바라보았다.
「응? 급한 일이라고, 그렇게만 말해.」
「알겠습니다.」
고정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호텔 안의 전화가 도청되고 있다는 것은 기본상식이다.
차에서 내린 최선호는 꽁무니를 이쪽으로 하고 길가에 멈춰 서 있는 검정색 승용차로 다가갔다. 조수석의 문을 열고 오르자 핸들을 쥐고 있던 박대용이 그를 바라보았다. 찌푸린 얼굴이었다.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갑자기라니, 박형. 오늘밤 사건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야겠소.」
「강회장이 총격을 받은 사건 말입니까?」
박대용이 쓴웃음을 지었다.
「강회장은 총알이 스치지도 않았다고 합디다. 같이 타고 있던 비서실장도 그렇고, 앞자리에 탔던 운전기사와 수행비서만 현장에서 즉사했소.」
「도대체 누구 짓이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압니까? 난 당신들이 저질렀는가 하고도 생각했는데.」
「이곳에선 하루에도 서너 번씩 총격사건이 일어납니다. 경찰 추산으로 무기가 10만 정이 넘게 깔려 있다는 거요.」
「추측이라도 가는 대상은 없소?」
「그레고리의 잔당이 공격했거나 아니면 한국 정부의 지시로 안기부 요원이 그랬을 수도 있겠지. 또 마피아가 경고를 했는지도 모르고.」
「일본 정부나 북한 쪽도 가능성이 있다고 할 참이군.」
「그렇소, 강회장은 원체 적이 많으니까 말이오.」
머리를 끄덕인 최선호가 박대용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쨌든 고맙소. 그럼 다른 소식이 있으면 곧 나에게 전해주시오.」
「그건 염려하지 마시오.」
핸드 브레이크를 풀면서 박대용이 입맛을 다셨다.
「이번 정보가 급한 것이기는 하겠지만 앞으로 이렇게 부르지는 마시오.」
오케안 어시장 건너편에 있는 시멘트 벽돌집은 박대용이 지난 달에 얻은 셋집으로 지금은 내부 수리중이어서 비워두고 있었다.
새벽 2시 가깝게 된 거리는 조용했고 건물들의 불도 대부분 꺼진 시가지는 짙은 어둠에 덮여 있었다.
승용차를 길옆의 골목에 주차시킨 박대용은 골목 쪽에 나 있는 샛문으로 다가갔다. 얼핏 보아서는 구분이 안 되는 샛문을 주먹으로 두드리자 눈높이에 나 있는 손바닥만 한 구멍이 열렸다. 구멍이 닫히면서 빗장이 풀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는 머리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샛문이 열리자 그는 재빠르게 안으로 들어섰다. 서너 명의 사내가 그를 바라보며 서 있었는데 모두 동양인이다. 잠자코 그들을 지난 박대용이 안쪽의 방문을 열자 소파에 앉아 있던 이금철이 머리를 들었다. 안쪽의 페치카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으므로 셔츠를 풀어헤친 그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그놈이 왜 찾는 거야?」
대뜸 그가 묻자 박대용은 찌푸린 얼굴로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누가 그랬는가 알고 싶다는 거요. 그래서 머리가 어지럽게 말해 주었는데.」
그는 이금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는 도중에 세 번이나 검문을 받았소. 경찰과 군 수사기관까지 동원된 대대적인 수색작업이 벌어지고 있단 말이오.」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야. 내일 아침에는 집을 비울 테니 걱정하지 말라구.」
이금철이 입맛을 다셨다.
「억세게 운이 좋은 놈이야, 강씨 놈은. 수십 발을 쏘았는데도 살아남았어.」
「이제 다시 기회를 잡기가 힘들 거요. 오늘 수상과 국방장관이 내려오면 경비도 더 삼엄해질 것이고.」
「두고 봐야지.」
그러자 박대용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가봐야겠소. 그 망할 놈들이 부르는 바람에 밤중에 이리 새끼처럼 쏘다니게 되었구만.」
「돈 받은 값어치는 해줘야지.」
힐끗 이금철을 쏘아본 박대용이 방을 나왔다. 사내들을 지나 샛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추위가 온몸을 휘감았다. 바람 끝이 드러난 피부를 칼날처럼 베고 가는 심한 추위였다. 슈바 깃에 머리를 묻은 그는 차로 다가가 열쇠를 구멍에 넣었다.
그 순간이다.
뒷머리를 강타당한 박대용이 차체에 얼굴을 부딪치면서 고꾸라지듯 엎어졌다. 박대용이 겨우 머리를 들어 뒤쪽을 바라보았다. 사내 한 명이 마악 주먹을 내려치려는 참이었으므로 반사적으로 입을 쩌억 벌리며 눈을 치켜떴으나 몸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는 다시 옆머리가 부서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고 의식을 잃었다.
시멘트 벽돌집이 군경 합동 병력에 의해서 포위된 것은 그로부터 20분쯤 후였다. 거리는 수백 명의 군경에 의해 봉쇄되었고 밤하늘을 울리며 떠 있는 헬기들의 서치라이트가 거리를 대낮같이 비추고 있었다.
「1분의 여유를 준다. 항복하고 나오라.」
마이크를 쥔 미하일 서장이 벽돌집을 향해 소리쳤지만 이미 샛문과 현관의 좌우에는 군경의 특공대가 돌입 준비를 끝냈다.
1분의 시간을 재려는 듯 미하일이 시계를 내려다보는 시늉을 하며 마이크를 옆에 선 부하에게 건네주고는 권총을 빼 들었다.
30초도 되기 전이다. 밤하늘을 향해 한 발을 쏘자 현관과 샛문에 붙여진 폭약이 동시에 폭발하면서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문 양쪽에서는 안쪽으로 가스탄을 던져 넣은 특공대가 돌입준비를 하고 있었다. 경찰차를 방패로 삼아 뒤에 서 있던 미하일이 옆에 서 있는 장군을 바라보았다. 그는 로스토프 사령관이 파견한 사령부 소속 참모였다.
「산 채로 잡기는 힘들겠는데. 부상자나 잡아야겠소, 장군.」
「할 수 없지. 입만 성한 놈을 찾는 수밖에.」
그때 안에서 콩을 볶는 듯한 기관총 소리가 났으므로 그들은 말을 멈추었다.
횐 가스가 밖으로 구름처럼 뿜어져 나오는 건물 안에서 밖으로 총을 쏘아대는 것이었다. 문 밖에 서 있던 대원 두어 명이 연달아서 건물 안으로 무엇인가를 집어 던지자 건물이 들썩이는 듯한 폭발음이 들렸다. 폭음이 그치면서 안에서의 총성도 그쳤다. 가스 마스크를 쓴 채 벽에 일렬로 붙어서 있던 대원들이 그때 안으로 뛰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건물 안에서 다시 요란한 총소리가 울려 나왔을 때 장군이 미하일에게 머리를 돌렸다.
「서장, 사건이 난 지 몇 시간도 안 되어서 놈들을 소탕했으니 훈장감이오.」
「그까짓 훈장은 이젠 필요 없어. 백 달러를 가슴에다 붙여주는 게 훨씬 실용적이지.」
그러자 장군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경찰서장도 미국식이 되어가는군.」
「개방에 발맞추는 거요, 장군.」
요란한 총성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걸 보면 안에서 치열한 사격전을 벌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특공대원들이 꼬리를 물고 안으로 들어갔다.
총성과 폭음이 이곳까지 전해져 왔으므로 숙소의 직원들은 불안한 표정이었다. 김상철과 장국진이 숙소에 돌아왔을 때는 총성이 그쳐 있었지만 새벽 3시가 넘었는데도 잠자리에 든 직원은 드물었다.
그들이 곧장 2층의 계단 옆에 있는 방으로 들어서자 소파에 마주앉아 있던 유장석과 한일만이 머리를 들었다.
「그놈은 어떻게 처리했어?」
유장석이 묻자 그들은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자백을 받았습니다. 북한 쪽뿐만 아니라 일본 정보국과 오성그룹 모두에게 정보를 팔아왔다고 하더군요.」
「그렇겠지.」
「오성그룹과 안기부가 서로 정보를 주고받는 관계인 것도 말해 주었습니다.」
「안기부 사람들이 식당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과 말이 맞는군.」
머리를 끄덕인 유장석이 옆쪽의 한일만을 턱으로 가리켰다.
「한이사가 금방 마피아 그라노프의 연락을 받았어. 작전이 끝나고 북한 공작원 시체 12구를 확인했다는군. 부상자가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어.」
그러자 장국진미 헛기침을 했으므로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아졌다.
「제가 박대용한테서 들었습니다만 이번 작전의 책임자는 이금철 대좌입니다. 그는 해외사업단 소속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자입니다. 그자에 대해서는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몰살당했다지만 그라노프를 통해서 경찰에 정보를 던져 줘야겠군. 그자가 있나 확인해 보라고 말이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유장석이 김상철과 장국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수고들 했어. 오성그룹 놈들을 감시시켜 놓았던 것이 적중했어, 이중첩자를 잡으니 소득도 이중으로 오는구만 그래.」
김상철과 장국진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가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런데, 참, 그자는 어떻게 처리했나?」
김상철과 장국진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는데 입을 연 것은 김상철이다.
「이제 다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럼 더 이상 묻지 않겠다.」
방을 나온 그들이 계단을 내려갈 때 장국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것은 시작이야. 저쪽은 이번 일에 실패했다고 그냥 물러나지 않아.」
그들 옆으로 직원들이 지나갔으므로 장국진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들은 다시 지하실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설령 계약을 끝낸다고 하더라도 개척과정에서 쉴새없는 파괴공작을 해올 거란 말이야. 그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야,」
「그러니까 나 같은 자가 빛을 볼 수 있는 것 아니냐.」
김상철이 그를 돌아보며 웃었다. 그들은 지하실 한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히터 장치는 되어 있었지만 5평 정도의 방에는 양쪽 구석에 간이침대 하나씩이 놓여 있을 뿐 다른 가구나 장식이 없어 썰렁하였다. 이곳이 그들의 숙소인 것이다.
「회사에 입사했을 때 이런 일을 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말이야. 회사에서 날 필요로 하는 것을 보면 기운이 나고….」
침대에 걸터앉은 김상철이 장국진을 바라보았다. 김상철은 어느새 러시아어 학습용 이어폰을 한쪽 귀에 꽂고 있었다.
「내 배경으로는 난 절대로 출세할 수가 없었어. 회사 입사도 할 수 없었을지도 몰라. 이 프로젝트가 없었다면 말이야.」
「어떤 배경인데?」
장국진이 궁금한 듯 묻자 김상철이 머리를 저었다.
「그건 알 필요 없어.」
안인석이 다가오자 강형문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수시로 표정이 변하는 자인만큼 방심하지는 않았지만 찡그린 것보다는 나아 보였다.
「대리님, 무슨 일입니까?」
「여기 앉아.」
옆에 놓인 의자를 당겨 준 강형문이 자신의 의자도 그쪽으로 당겼다. 오전 10시경으로 넓은 사무실에서는 간간이 컴퓨터 키를 두드리는 소리만 들려올 뿐 조용했다.
「안인석 씨의 8인치 웨이퍼 예상 수요안은 훌륭했어, 팀장한테서도 좋은 평가가 나왔어.」
강형문이 부드럽게 말했다.
「대만의 A사가 예상보다 빠르게 치고 올라오지만 지금 우리의 경쟁상대는 오성이야. 놈들을 따라잡아야 돼.」
오성의 메모리 분야 반도체 수출실적은 세계 1위이다. 그들은 엄청난 연구투자와 기획, 생산시설의 확충으로 선두주자 자리를 차지했고 근대는 뒤를 쫓는 상황이었다. 강형문이 컴퓨터의 키를 두드려 화면을 가리켰다.
「이것 봐, 유럽시장의 올해 3개월간 우리 실적은 작년대비 23% 성장인데 ‥‥‥」
그는 재빠르게 다시 키를 두드렸다.
「여기 오성의 실적은 42% 성장이야. 우리의 두 배 가깝게 돼.」
오성전자의 작년 매출액은 8조 원 가량으로 근대의 두 배에 가까웠으므로 매출액이 많은 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성장률이 이쪽의 두 배라면 그 격차는 엄청나게 벌어지는 것이다.
안인석이 입을 열었다.
「오성이 영국의 합작사에 80% 가격으로 물건을 대량으로 넘겨주고 있기 때문 아닙니까?」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야. 우리도 합작사에 넘겨서 유통시키고 있어.」
「오성이 넘기는 물량이 우리보다 많습니다, 대리님.」
「이것을 보게 .」
강형문이 키를 두드리고는 화면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이곳에 함정이 있어. 피터슨과 B&A상사의 실적이 3개월간 60% 증가한 1억 7천만 달러야. 이 두 놈의 매월 증가율은 10% 이상이란 말이야.」
그가 뽑아낸 자료는 재경원에서 집계한 반도체 수출통계였다.
팔짱을 낀 강형문이 안인석을 바라보았다.
「재경원이나 통상산업부의 통계는 기업에서 보내준 자료에 의해서만 집계가 되지. 선적서류와 수출금액으로 맞춰보기는 하지만 일일이 조사할 수는 없어.」
「그렇다면 이 자료가 틀렸단 말입니까?」
「자료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야. 총계는 맞는데 피터슨과 B&A가 실제로 오성의 물건을 가져갔느냐 하는 것이 문제야.」
「일본의 고마쓰사 상무가 연초에 오성전자의 간부진과 만나고 갔어.」
「우리 부에서 내린 결론을 이야기해 주지. 오성은 생산량을 극비에 붙이고 있어서 정확한 통계를 내기 힘들지만 웨이퍼 가공능력은 월 15만장 미만이야. 그런데 3월까지의 통계를 보면 월 20만 장 이상을 전 세계로 수출하고 있어.」
「그렇다면 고마쓰와‥‥‥」
「고마쓰와 손을 잡고 일본에서 가공 웨이퍼를 들여와 외국으로 넘기는 거지. 세관 안에서 수입 수출이 이루어지는 것이니까. 서류만 찍으면 되는 일이야. 법에 저촉되지도 않고 수출입 물량만 통계에 기록되는 것이지.」
「그렇다면 우리를 누르려고.」
「그래, 우리에게 시장 점유율을 뺏기지 않으려고 고마쓰와 손을 잡았을 가능성이 많아, 이것은 우리 부의 조사팀이 내린 결론이야.」
「안인석 씨 일본어 잘하지?」
갑자기 그가 말을 돌렸으므로 안인석이 머리를 들었다.
「예, 조금,」
「고마쓰의 한국 대리점에서 이번에 신입사원 모집을 하고 있어. 어때? 거기에 지원할 생각 없나?」
「놀란 모양이군. 이것은 간부급 회의에서 나왔던 의견이야. 믿을 만한 사원을 지원시켜서 그쪽 정보를 빼내자는… 그래서 생각난 것이 안인석 씬데.」
「물론 봉급과 수당에다가 정보비 명목으로 매달 상당한 돈이 지급될 것이고 고마쓰 쪽에서도 봉급이 나가겠지. 그건 합격된 후의 일이겠지만.」
「그리고 본인이 원하면 일정기간이 지난 후에 복귀할 수가 있어. 아마 인사고과에 큰 플러스가 될 거야.」
「만일에 거절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자 강형문이 입을 벌리고 소리 없이 웃었다.
「본인이 싫으면 할 수 없는 거지, 이건 강요하는 것이 아니야.」
「전 싫습니다.」
「그럼 기밀이나 지켜주라구. 내 생각이지만 지원자는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을 테니까,」
컴퓨터 앞으로 몸을 돌린 강형문이 머리를 돌려 안인석을 바라보았다.
「내가 안인석 씨 위치에서 그런 제의를 받았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는데.」
그는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난 했어 설령 회사가 날 밀어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도 했겠고, 분하다는 마음도 들었겠지만.」
「전 대리님과 다릅니다.」
「다르지, 여러 가지로.」
그는 컴퓨터로 머리를 돌렸다.
「난 이곳에 내 인생을 걸고 있으니까 말이야.」
노바 호텔 스카이라운지는 안인석이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그가 앉은 아래쪽으로 불야성을 이룬 강남의 밤거리가 보였고 옆쪽으로 밤하늘을 뚫을 듯이 솟아 있는 것은 남산 타워였다.
술병을 들어 잔을 채워주는 이유미의 기척에 안인석이 창에서 머리를 돌렸다.
「시베리아 문제로 언론에서 매일 근대를 비판하던데, 회사는 괜찮아?」
「상관없어, 그런 것.」
안인석이 술잔을 쥐었다. 이유미와 이렇게 둘이서 마주앉은 것은 꽤 오랜만이었는데 오늘따라 그녀가 선선히 나와준 탓에 안인석은 기분이 조금 풀려져 있었다. 물론 이곳도 새로운 분위기여서 마음에 든다.
「강회장이 러시아로 모든 재산을 옮길지도 모른다고도 하던데 그 말이 사실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안인석이 입맛을 다셨다.
「난 그따위 루머에 신경 쓸 기분이 아니야.」
「왜? 회사일인데」
「오늘 대리 놈이 날더러 다른 회사에 시험 쳐서 가라는 거야.」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이유미에게 안인석이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나한테 정보원이 되라는 거지. 진급을 보장해주고 봉급도 이중으로 받게 된다면서.」
「그래서 뭐라고 했어?」
「뭐라고 하긴, 거절했지. 그따위 치사한 짓을 하면서 월급쟁이 노릇은 못해.」
「‥‥‥‥」
「제 놈은 회사에 인생을 걸었다나? 날더러 제 흉내를 내라는 거야.」
「안 간다고 했으니 불이익 같은 건 없을까?」
「기밀이나 지켜주라면서 없는 것으로 하자고 했지만 조금 꺼림칙하긴 해.」
안인석이 술을 벌컥 들이괴고는 이유미를 바라보았다.
「엊그제 하바로프스크에 가 있는 친구한테서 연락을 받았는데 상철이가 대리로 진급을 했다는 거야. 개척단에 파견되었던 직원들 모두 한 계급씩 올라갔어.」
「어머나, 잘 됐네.」
「상철이는 잘해, 오기가 있고 적응력이 강한데다 출세하기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을 테니까. 나도 그 소식 듣고 기뻤어, 진심으로.」
「그놈이 여기 있다면 상의를 할 수 있을 텐데,」
이유미가 손을 뻗어 탁자 위에 놓인 안인석의 손을 쥐었다.
「기운을 내. 갈등이 있는 것은 인석 씨뿐만이 아니니까.」
「솔직히 회사와 내 사생활과의 구분을 할 수가 없어.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밖에서 풀리지가 않는단 말이다.」
「이제 그런 소리 그만해.」
담배를 입에 물면서 이유미가 말했다.
「걱정할 것이 뭐가 있다고 그래? 회사 그만두어도 평생 먹고 살 만큼 유산을 물려받을 사람이, 회사 들어가기 전에도 한 달 용돈을 월급의 몇 배씩 받아썼지 않아?」
잠자코 시선을 주고 있는 안인석을 향해 그녀가 말을 이었다.
「때려치워도 그만이다 하고 왜 밀고 나가지 못해? 뭐가 겁나서」
시트를 끌어당겨 가슴을 덮은 이유미는 천장을 바라보며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방 안은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아서 축축하고 끈적이는 공기로 덮여져 있었지만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 싫었다.
안인석과는 꽤 오랜만에 갖는 섹스였고 그것이 서로를 달아오르게 한 모양이었다. 하체에 남아 있는 약간은 무겁고 나른하며 짜릿한 느낌이 결코 싫은 것은 아니었다. 팔베개를 하고 누워 천장으로 담배연기를 뿜어내던 안인석이 입을 열었다.
「어떤 선배는 결혼하면 훨씬 적응이 빨라진다고 하더구만. 자기도 그랬다는 거야.」
「‥‥‥‥」
「네가 좋다면 회사 때려치우고 아버지 병원 사무장을 할 수도 있고 가게를 차릴 수도 있어. 백화점은 안 되겠지만.」
안인석이 벌거벗은 상반신을 일으켜 세우고는 이유미를 내려다보았다.
「적응하지 못하는 나한테 실망한 건 아니야? 만날 때마다 너한테 못난 소리나 지껄이는 나한테 말이야.」
「그런 거 없어.」
「예전과는 네가 달라진 것 같아서 그래. 한때는 내 분위기가 그렇게 만들었나 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고.」
「아아, 답답해.」
이유미가 시트를 젖히고 일어서자 그녀의 알몸이 드러났다. 그녀는 알몸인 채로 냉장고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냉장고 안의 빛을 받은 그녀의 알몸이 뚜렷한 입체감을 지니고 드러났다. 생수병을 집은 그녀는 벌컥이며 병 채로 물을 마셨다. 벽시계의 바늘이 새벽 1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고 앉은 안인석이 말했다.
「유미, 넌 아직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어.」
「난 직장생활을 더 하고 싶어.」
팬티를 찾아 발에 꿰면서 이유미가 말했다.
「몇 년 더 하다가 결혼할 거야.」
「‥‥‥‥」
「초조하게 생각하지 마, 인석 씨.」
브래지어를 채우고 셔츠를 입으면서 이유미가 그에게로 다가가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난 사흘 후에 LA에 가게 됐어. 한 달 동안 지사업무를 도와주라는 회사 지시야.」
「옆에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해.」
「괜찮아, 회사 일인데 할 수 없지.」
안인석도 침대에서 일어나 팬티를 찾아 입었다. 이유미가 전등스위치를 켰으므로 방 안은 환해졌는데 그것이 제각기 옷을 찾아 입는 두 남녀를 더욱 어색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그들은 옷을 다 입는 동안 한 번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고 입도 열지 않았다.
근대그룹의 중공업그룹 회장이며 조선의 회장인 강용식의 집무실은 아마 총회장의 집무실보다 20배는 클 것이다. 그리고 장식품도 총회장실처럼 질박하지가 않다. 호화롭지는 않았지만 넓은 바닥을 온통 덮은 카펫에 맞춤 집기들과 장식품들은 근대그룹 2인자의 품위에 손색이 없도록 배치되어 있었다.
강용식은 미국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은 인물로 아버지를 닮아 추진력도 뛰어났지만 온건한 성품이었다.
그는 앞에 앉은 이상기를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글쎄, 제가 연락이 안 된다면 믿지 않으실 테니 할 수 없지요. 하지만 이제 제가 해드릴 일이 없을 것 같은데요,」
이상기가 입맛을 다셨다. 그는 청와대의 안보수석으로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비밀방문을 한 것이다. 50대 초반이었으나 하얀 머리와 주름진 얼굴은 그를 10년쯤 늙어 보이게 했다.
「강회장께서 그 정도로 무모하신 분인지는 몰랐습니다. 도대체 대통령의 말을 이렇게 무시하셔도 되는 겁니까?」
「무시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일 끝내고 나서 틀림없이 찾아뵙고 말씀 드릴 겁니다, 수석님.」
「글쎄, 일을 끝내다니요. 계약을 하면 안 된다고 그렇게 말씀을 드리는데도.」
「‥‥‥‥」
「북한을 자극해서 좋을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땅을 임차해 우리 영토화한다는 회장님의 계획은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는데요, 수석님.」
강용식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그리고 이제까지 저희 근대그룹에 가해진 압력으로 수천억 원의 물적 손실이 났고 예상손실은 수조 원에 이를 것 같습니다. 그걸 처리해 주실 방법이 있습니까?」
「미국 해리티지 재단이나 뉴욕 타임스에서 발표한 한국의 시베리아 임차에 대한 견해는 긍정적이었습니다. 미국의 군부 쪽에는 절대적으로 찬성을 하고 있어요. 물론 한국 군부도 마찬가지 입장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한국 군부의 누가 그래요?」
「각하의 임기가 끝나면 말씀 드리지요.」
「허어.」
이상기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졌다.
「강회장, 정말 이렇게 나오실 거요.」
그러자 강용식의 얼굴도 굳어졌다.
「아버님이 총격을 받아 겨우 목숨을 건지셨다는 것은 알고 계시지요?」
「‥‥‥‥」
「목숨을 걸고 하시는 일입니다. 그것도 나라를 위한다는 사명감으로 그곳에 조선족 동포들을 이주시킬 계획이고, 도시를 만들어 또 하나의 한국을 세운다는 장대한 계획입니다. 그런데 정부는 우리가 그곳에서 원목만 베어서 사리사욕만 채우려 한다고 언론을 통해 수없이 매도하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계획을 내보이려 하면 기관을 통해 가로막고.」
「이것 보시오, 강회장.」
「권력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근대는 정부에서 아무리 죽이려고 해도 안 될 겁니다. 이렇게 일 년이 지나서 정권이 바뀌면 도대체 어떻게 책임을 지실 겁니까? 그때 판단을 잘못했다고 하실 겁니까?」
「지금 나한테 협박하는 겁니까?」
「그까짓 북한과의 정상회담 안 되면 어떻습니까? 선원 몇 명 송환시켜 주고, 이산자 몇 명 왕래시켜 주고 나면 곧 끝날 텐데.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북쪽사람들의 속성을.」
「허어.」
「그런다고 국민들이 표를 주지 않습니다. 이제는 국민들이 그런 일회성 대북정책에 놀아나지 않아요. 정말 답답들 하십니다.」
「정말 상종 못할 사람이군.」
이상기가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어디 두고 봅시다. 어떻게 되나.」
「잠깐만요, 수석님 .」
웃음 띤 얼굴로 강용식이 그를 바라보았다.
「잊고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러시아 대통령은 한국 정부가 더 이상 계약을 방해한다면 국교 단절과 함께 대사관 철수, 그리고 한국을 적국으로 간주하겠다고 발표할 예정입니다. 아마 오늘 오후에 러시아 대사가 외무장관을 방문할 것입니다. 확인해 보시지요.」
「그때에는 아무리 언론에 기름칠을 해놓았더라도 언론이 현 상황을 국민들에게 알려주겠지요. 시베리아 임차의 실익이 무엇이고 정부의 의도는 무엇인가를. 아마 그것도 비밀에 붙였다가는 매국노가 될 테니까요. 감춘 사람 모두가.」
안기부장 권준규가 청와대의 비서실장실에 들어선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 후인 11시 30분경이었다. 급한 김에 청와대로 들어가는 차 안에서 안기부장과 외무장관 그리고 통일 부총리까지 오도록 연락을 한 이상기는 발바닥에 땀이 날 지경이었다.
안민수 비서실장실에 모인 것은 회의 결과를 즉각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대통령이 여성단체장들과 오찬회동이 끝나고 나서 보고를 받도록 해야만 했다.
제일 늦게 들어선 안기부장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이상기로부터 강용식의 협박내용(?)을 전화로 들은 것이다.
「어젯밤에 하바로프스크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강회장이 총격을 받아 직원 두 명이 현장에서 죽었고 강회장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는 것은 여기 계신 분들은 대충 알고 계시겠지요.」
그 사실은 그가 아침에 안보위원회원인 둘러앉은 사람들에게 알려준 것이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조금 전에 다시 정보가 왔습니다. 습격한 자들의 아지트를 군경 특공대가 기습해서 일망타진 했는데 모두 12명을 사살 또는 생포했습니다. 그자들은 북한공작원들이었지요.」
다시 그의 말소리가 방을 울렸다.
「러시아 정부가 아직 공식 발표한 것은 없지만 하바로프스크 전역에 북한인들의 검거령이 내려졌습니다. 북한 여권을 가진 자는 모두 잡아들인다는 겁니다. 이러한 조치는 곧 블라디보스토크, 니호트카까지 연장될 것이라고 합니다.」
「북한 측의 대응은 없습니까?」
비서실장이 물었다. 그러자 권준규가 머리를 저었다.
「없습니다. 러시아 땅에서 테러를 한 증거가 있는데 나설 처지가 못 되지요. 그자들이 한국을 대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통일 부총리가 피식 웃었으나 입은 열지 않았다. 이상기가 헛기침을 했다.
「제가 전화로 사정은 대강 말씀드렸는데, 강용식의 협박에 대처할 방안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자 말대로 오후에 러시아 대사가 외무장관을 찾아올 것인가 말 것인가를, 그리고‥‥‥」
「오후 3시에 대사와 부대사가 방문하겠다는·연락이 조금 전에 왔습니다.」
이제까지 잠자코 있던 외무장관이 말하자 방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입을 연 것은 통일 부총리다.
「방문 목적은 말하지 않았습니까?」
「중대한 일이라고만 해서 지금 차관이하 실무자들이 모든 서류를 챙기고 있지요.」
장관이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석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외교적으로 엄청난 사건입니다. 러시아가 국교단절을 하면 한국은 당장에 고립무원의 상태가 돼요, 북한이 어떻게 나올지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10년 공부 도로아미타불이지.」
혼잣말처럼 권준규가 말했으나 모두 알아들었다. 그가 이제는 분명하게 말했다.
「뉴욕 타임스나 미국 군부, 주한 미군 사령관도 근대의 시베리아 임차에 긍정적이오. 대통령과 정부가 일본과의 관계 때문에 소극적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들은 시베리아가 일본과 북한, 러시아 세 세력의 완충지 역할을 할 것을 기대하고 있고 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니 그것이 현실적이어야‥‥ 우리는 지금 당장 북한과의‥‥‥」
이렇게 이상기가 입을 열었는데 부총리가 손을 들었다. 말을 그치라는 시늉으로 좀체로 그런 일이 없던 사람이었다.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저지한다고 해도 내일 강회장은 계약을 할 것이고, 그때에는 우리만 곤경에 처할 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 망신입니다. 러시아 대사가 오기 전에 계약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통보를 합시다.」
그러자 모두 부총리를 바라본 채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발의자는 책임을 져야 하는 법이다. 그가 말을 이었다.
「물론 비공식이오. 근대가 계약을 하더라도 정부의 지시를 어긴 것으로 놔둬야 국가 기강이 섭니다.」
비서실장 안민수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도리가 없는 것 같군요,」
「그렇습니다. 각하께서 결심을 해주신다면 러시아 대사관 쪽에 통보를 해줘야겠는데요. 그자들이 찾아오기 전에 말입니다.」
외무장관이 말했다.
「실장께서 서둘러 주셔야겠어요.」
권준규가 말하자 안민수가 머리를 끄덕였다.
「각하께서 점심 식사중이더라도 내가 직접 말씀을 드리지요.」
그러자 이상기가 얼굴을 굳힌 채 시선을 떨구었다. 근대와 러시아와의 문제는 그의 소관이었고 이제까지 그가 직접 각하를 뵈었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는 여기서 볶음밥이라도 먹으면서 기다리지요.」
주위를 둘러보며 권준규가 말했다.
「어떻습니까? 실장께서 다녀오시는 동안 여기서 청와대 볶음밥이나 먹읍시다.」
강회장이 강용식으로부터 정부의 비공식 승인방침을 연락 받은 것은 그날 저녁, 마악 저녁식사를 시작하는 때였다. 이남호로부터 보고를 받은 강회장이 수저를 들면서 말했다.
「시베리아 임차가 거론되던 5개월 전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수천억의 손실을 입었다. 금응제한, 투자규제, 세무감사에다 토지정리, 거기에다 원자재 수입규제까지. 그것을 누가 보상해준단 말이냐」
식탁에 둘러앉은 것은 이남호와 유장석, 그리고 계획단의 중역 세 사람에다 한일만 이사까지 포함해서 일곱이다. 박미정은 고용된 러시아 여인과 함께 바쁘게 움직였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회장의 기분은 조금 풀린 모양이었다. 어젯밤의 총격 사건으로 이쪽의 주장에 더욱 무게가 실려 질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내일 계약조건에 대한 검토가 끝나면 모레 정식 계약이 될 것이야. 각자 빠뜨린 것이 없도록 준비를 해.」
그러자 유장석이 머리를 들었다.
「서울에서 대기하고 있는 2진은 모레 저녁에 이곳에 도착하도록 하겠습니다. 시베리아를 비워두기가 불안해서요.」
이미 개발된 유정을 말하는 것이다. 강회장이 머리를 끄덕였다.
「모두 몇 명이야? 이번에 올 직원은?」
「김동호 부장 인솔로 85명입니다.」
「그럼 여기 남아 있는 직원들은 모두 휴가를 보내. 고생들 했으니 금일봉을 주어서. 그리고 탐사단원들한테는 내가 말한 대로 그렇게 하고.」
「준비해두고 있습니다, 회장님.」
이남호의 목소리도 밝았다. 된장찌개를 먹던 회장이 옆을 지나는 박미정을 바라보았다.
「미정이 솜씨가 아주 늘었다. 이제 된장찌개가 제법이야.」
박미정이 말없이 웃었으나 이남호가 거들었다
「다재다능합니다, 회장님. 성실하구요.」
회장이 좋아하는 단어만 골랐으니 회장의 얼굴이 더 펴졌다.
「내가 중신을 하지, 틀림없는 놈으로 회사에서 골라주마.」
그러자 중역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웃었다. 회장이 중매를 서서 고른 놈이니 해당 중역들이 뒤를 안 봐줄 리가 없다. 따라서 그놈은 회장의 말대로 자연스럽게 틀림없는 놈으로 성장할 것이니 회장 말이 맞는 셈이 된다.
「그런데 회장님.」
유장석이다.
「김상철 대리는 이곳에 남아 있겠다고 합니다. 장국진이 때문에. 그자와 같이 있다가 1진과 함께 시베리아로 들어가겠다고 하는데요.」
그러자 회장이 수저를 내려놓고 그를 바라보았으므로 식탁 주위는 조용해졌다.
「그놈은 참.」
이윽고 회장이 혼잣말처럼 말했으나 뒤쪽에 서 있던 박미정까지 다 들었다.
「나는 요즘 그놈한테 빚진 기분이 든단 말이야. 마음이 무거워.」
회장이 중역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놈은 업보를 벗어나려고 목숨을 걸고 있는 거야.」
그러자 유장석이 헛기침을 했다.
「저도 목숨 빛을 졌습니다, 회장님, 이대각 부장도 그렇지요.」
「그놈도 서울로 돌아가서 휴가를 보내고 돌아오도록 해. 장국진이는 이곳에 남겨둔다. 지사원들과 같이 있도록 하고 도망치면 놔둬라.」
회장이 명쾌하게 결론을 내리자 모두들 홀가분한 얼굴로 다시 식사를 계속했다.
밝은 분위기의 식탁이었고 박미정의 마음도 마찬가지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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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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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ㄳ
즐감요~~~ ! 감사합니다.
ㅈㄷ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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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감요~^^
읽을 수록 신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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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잘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