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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강우근(姜佑根)
출신지: 경북 영덕
훈격: 애족장(1990)
운동계열: 3・1운동
강우근(姜佑根) 1880. 7.17~1957. 7.18
경상북도 영덕(盈德) 사람으로서 기독교(基督敎)인이다.
영덕군에서는 김세영(金世榮)·권태원(權泰源) 등에 의해 독립만세운동이 계획되었는데, 당시 목사인 그는 김세영이 보낸 김혁동(金赫東)으로부터 이 계획을 전해 듣고 이곳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3월 18일 영덕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3월 16일 교회에서 기독교도인 김암우(金岩佑)·이정규(李正奎)·김용하(金龍河)·김귀근(金貴根)·강대열(姜大烈) 등에게 거사 계획을 알리고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으며, 이튿날에는 김순근(金順根)·송기주(宋基柱) 등에게도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3월 18일 오후 2시 30분경, 그는 영덕 장터에서 50여명의 기독교도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수백명의 장꾼들이 호응하여 장터는 만세소리로 진동하였다. 그러나 그는 황급하게 출동한 일본 군경에게 체포되었으며, 이해 5월 2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고등경찰요사 32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428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375·1376면
이름: 강원명(姜元明)
출신지: 함북 회령
훈격: 애족장(1990)
운동계열: 임정・중국방면
강원명(姜元明) 1917. 2.11~
함북 회령(會寧) 사람이다.
북간도에서 독립투사 강병일(姜秉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1년 중국군에 입대하여 주용(朱榕)단장 휘하에서 항일구국군으로 활동하였다.
1943년에는 만주(滿洲)에서 일본인 회사인 삼능상사(三 商社) 청도(靑島)지점에 근무하면서 국부군(國府軍)과 접선하여 대적 정보 공작활동을 하였다.
1945년 8월에는 중국 신포(新浦) 및 연운(連雲)에서 군경독찰처(軍警督察處) 상위독찰관(上尉督察官)으로 임명을 받고 중국군 장립중장군 지휘부(張立中將軍指揮部)에서 활동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註 함북지사 확인서
중국주한대사관 확인
박기성, 안춘생, 이강훈 확인
이름: 강원보(姜元寶)
출신지: 황해 장연
훈격: 건국포장(1993)
운동계열: 3・1운동
강원보(姜元寶) 1859~.
황해 장연(長淵) 사람이다.
1919년 3월 7일 황해도 장연군 장연읍내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장연군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11일 천도교인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준비과정에서 강원보는 3월 7일 장연읍내에서 여현구(呂鉉九)를 만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도록 권유받고, 함께 비밀회의를 가졌다. 이들은 장연읍 장날인 3월 11일(음 2월 10일)을 기해 궐기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태극기를 제조하고, 각 곳에 연락을 취하여 시장에서 일제히 만세운동을 하기로 하였다.
3월 11일 오후 1시경, 강예봉(姜禮鳳)이 큰 태극기를 들고 군중 앞에 나서면서 만세운동이 시작되었고, 곧이어 2백여 명의 군중이 여기에 참가하였다. 이 과정에서 강원보도 만세운동을 종용하고,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시위행진을 벌였다.
강원보는 이 일로 피체되어 1919년 5월 26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736面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4輯 792面
·每日申報(1919. 4. 20)
이름: 강원태(姜遠太)
출신지: 전남 강진
훈격: 건국포장(1993)
운동계열: 학생운동
강원태(姜遠太) 1911. 5. 9~1978. 4.10
전남 강진(康津) 사람이다.
1930년 1월 광주학생운동으로 많은 학생들이 수감된 것에 대해 항의하고, 학생운동에 동참하였다. 강진군 대구면(大口面) 소재 대구공립보통학교(大口公立普通學校) 출신인 광주고등보통학교(光州高等普通學校) 학생 윤가현(尹珂鉉)이 동맹휴교(同盟休校)를 전개하려 하자 이에 동조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동년 1월 15일 대구공립보통학교 학생 이상면(李相冕)·이진희(李珍熙)·김상환(金相煥)·김승호(金承鎬)·윤충현(尹忠鉉)·박채언(朴采彦) 등과 협의하여 광주학생운동에 동조하고 동월 18일 동맹휴교를 결행할 것을 계획하여 거사일인 동월 18일 오전에는 대구면 구수리(九修里)(舊, 修仁里) 노상에서 등교 중인 학생들에게 "등교해서는 안된다. 만약 그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구타하는 등 신체에 위해를 가할 것이다"라면서 동맹휴교를 독려하다가 피체되어 8개월 간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判決文(光州地方法院, 1930. 3. 14)
이름: 강원형(姜遠馨)
출신지: 경북 칠곡
훈격: 대통령표창|독립장(1968|1980)
운동계열: 의병
강원형(姜遠馨) 1862. 2. 19 ~ 1914. 9. 25
경상북도 칠곡(漆谷)군 지천(枝川)면 신동(新洞)리에서 태어났다. 1895년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만행이 자행되자 이를 규탄하는 구국상소를 올렸다. 1904년 2월 일본이 러 ・ 일 전쟁을 도발하고 일본군을 한국에 상륙시켜 「제 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해서 내정을 간섭하며 침략정책을 강화하자, 1905년 1월 대한십삼도유약소(大韓十三道儒約所)를 설치하고 그 수좌(首座)가 되어 일본공사관에 항의공함을 보내어 일본의 침략정책과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반성을 촉구했으며, 일본이 계속 내정간섭을 자행할 때에는 결사적으로 이에 맞서 싸울 결의를 전달하였다.
1905년 3월 일본 헌병대가 전참판 최익현(崔益鉉), 전판서 김학진(金鶴鎭), 비서승 허위(許蔿) 등 3인을 일제 침략정책을 규탄하는 격문을 돌렸다 하여 구속하자, 강원형은 일본군 사령부에 항의공함을 보내어 일본의 불법을 힐문하고 3인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또한 대한 13도유약소의 대표로서 각국 공사관에 공함을 보내어 일본의 교활한 침략정책을 규탄하고 3인의 구속에 대한 공개담판을 요구하였다. 강원형 등의 이러한 운동으로 3인은 석방되었으나 강원형은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45일간 구속되었다. 1905년 5월에 석방된 후에도 일본의 배신과 침략정책을 규탄하는 항의공함을 일본 공사관에 여러 차례 발송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곧 13도 유생 연명소(聯名疏)에 소수(疏首)가 되어 상소를 올리고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처단을 요구하고, 일본공사의 횡포무례를 엄징할 것을 요구했으며, 같은 뜻을 시민들과 세계에 성명하여 시민들의 국권회복에의 궐기를 호소하였다. 이로 인하여 1905년 11월 28일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4개월 간 투옥되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出典:『大韓民國獨立有功者功勳錄』第1卷,國家報勳處, 1986年, pp.117~118.
註ㆍ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288面
ㆍ韓國獨立史(金承學) 下卷 73面
ㆍ皇城新聞 1905. 1. 16, 3. 14, 3. 16, 6. 20
ㆍ高宗時代史(國史編纂委) 387面
ㆍ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1卷 342面
ㆍ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7卷 109面
ㆍ獨立運動史 資料集(國家報勳處) 1卷 569面
이름: 강원호(姜元浩)
출신지: 평북 강계
훈격: 애국장(1995)
운동계열: 의병
강원호(姜元浩) (1883)~미상
평북 강계(江界) 사람이다.
황순일(黃順一)・강기동(姜基東) 의진에 가담하여 경기도 양주(楊州)・포천(抱川)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7월 일제는「정미7조약(丁未7條約)」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는 등 식민지화에 광분하였다. 이에 전국적으로 수많은 의병이 봉기하여 상실된 국권을 회복코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강원호는 의병에 투신하여 1908년 음력 12월경 의병장 황순일의 휘하에서 동지 30여 명과 함께 총검을 휴대하고 경기도 양주군 일탄면에 침입하였으나 군자금 획득에는 실패하였다. 이어 1909년 음력 1월경부터 경기도 양주군과 포천군 등을 주 무대로 군자금 확보와 친일파 처단에 주력하던 의병장 강기동의 휘하에 들어가 좌익대장(左翼大將)이 되어 각지를 무대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5월 30일 강기동 의병장이 포천군 송산동(松山洞)에서 일본군 헌병대의 밀정인 이일남(李一男)・김윤흥(金允興)・노수원(盧守元) 등 3인을 잡아 처단할 때 척후를 담당하면서 조력하였다.
또한 그는 같은 해 7월 11일 양주군 둔야면(芚夜面) 누원(樓院) 전완준(全完俊)의 집에 돌입하여 "우리들의 행동을 의정부 헌병분견소에 통보하였으니 그곳의 밀정이다"고 그를 힐책하였다. 그러나 이 때 그가 도주하자 강기동 의병장과 의논하여 그의 집 을 불태워 친일행위를 응징하는 등 주로 친일파 처단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1910년 7월 18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받았으나, 이에 불복 공소하여 9월 7일 경성공소원에서 징역 15년으로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음
出典:『大韓民國獨立有功者功勳錄』第12卷,國家報勳處, 1996年, pp.41~42.
註・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28・29面
・韓國獨立史(金承學) 下卷 71面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別集 第1輯 142・143面
이름: 강유진(姜有鎭)
출신지: 전남 나주
훈격: 대통령표창(1995)
운동계열: 학생운동
강유진(姜有鎭) 1910. 2. 20~1950. 12. 1
전남 나주(羅州) 사람이다.
1926년 11월 조국의 독립, 사회과학의 연구, 식민지교육체제 반대를 목적으로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한 장재성(張載性)은 1929년 6월 동경중앙대학(東京中央大學)을 중퇴하고 귀향하여 성진회의 명칭을 독서회중앙본부(讀書會中央本部)로 개칭하였다. 또한 각 학교별로 핵심지도부를 조직한다는 방침에 따라 광주고보(光州高普)는 자신이 맡고, 광주농업학교는 문승수(文升洙), 광주시범학교는 임종근(林鍾根), 광주여자고보(光州女子高普)는 장매성(張梅性)을 조직책으로 하는 학교별 독서회를 결성하여 학생들을 조직하고 이론적으로 훈련시켜 항일독립운동을 추진해 나갈 것을 계획하였다.
이에 따라 1929년 9월 전남 광주사범학교(光州師範學校)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는 임종근 등과 함께 광주사범학교 독서회를 조직하고 사회주의 연구, 동지 규합, 일제로부터 독립 실현을 목적으로 활동을 전개하다가 학교 당국으로부터 강제 퇴학당하였다.
그 후 1929년 11월 광주고보의 한국인 학생들과 광주중학 일본인 학생들의 충돌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운동이 전개되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일경에 의해 피체되어 8개월 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出典:『大韓民國獨立有功者功勳錄』第12卷,國家報勳處, 1996年, pp.42~43.
註・光州學生獨立運動史(光州學生獨立運動同志會, 1974) 106~117面
・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237・238面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3輯 1614~1624面
이름: 강유홍(姜有鴻)
출신지: 평남 미상
훈격: 애족장(2006)
운동계열: 일본방면
강유홍(姜有鴻) 미상~1932. 5. 4
일본에서 한국인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투쟁하다 폭력단에 의해 살해되었다.
강유홍은 평안도 출생으로 일본 동경(東京)에서 자유노동자가 되어 재일조선노총(在日朝鮮勞總), 관동자유노조(關東自由勞組),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全協] 토목건축노동조합의 강동지구(江東地區) 강동교분회(江東橋分會)에 소속되어 항일운동을 하였다. 그 후 전협 토건본부(土建本部) 상임위원이 되었고, 토건본부 지방 조직책으로 관동(關東), 북륙(北陸), 산리(山梨) 지방에 파견되어 각 지방 지부의 재건과 창립에 적극적으로 활약하였다.
1932년 4월 강유홍은 암수현(岩手縣) 기선군(氣仙郡) 시작촌(矢作村) 대선도선철도공사장(大船渡線鐵道工事場) 한인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전협 토건중앙으로부터 김범이(金凡伊)와 함께 파견되었다. 암수현의 작업장은 전협 토목건축노동조합의 지도하에 자유노동자가 동맹파업을 하고 있었다. 이 파업은 전협의 대표적 동맹파업이었는데, 1932년 4월 26일 각 반장(飯場) 및 한인 활동가 60여명, 일본인 4명이 참가하여 동맹파업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파업 노동자들의 요구사항은 노동시간의 단축, 임금인상, 부상수당, 해고반대 등이었다.
강유홍은 4월 28일 업무 중지를 선언하고 현장에서 대회를 열어 동맹파업을 결의하였다. 한인 노동자들이 동맹파업을 단행하자 당황한 유전조(有田組)는 경찰, 소방대 등을 동원하여 파업을 진압하려고 하였다. 5월 2일부터 파업 진압이 시작되어 100여 명의 폭력단이 투입되었다. 강유홍은 동맹파업단의 철저한 방비를 선두에서 지휘하였다. 5월 4일 저녁 폭력단은 술을 마시고 파업을 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강유홍은 폭력단을 피하여 동지의 집으로 피신하였는데 폭력단이 쫓아와 그들이 휘두른 몽둥이에 머리를 맞아 중상을 입고 또 다른 동지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폭력단은 다시 쫓아와 중상을 입은 그를 구타하여 학살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별집 제3집 418면
·朝鮮獨立運動(金正明, 1993) ⅳ 228면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창작과비평사, 1996) 15, 16면
·近代日本社會運動史人物大事典(同 編纂委員會, 1997) 2권 542~543면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朴慶植) 244면
이름: 강윤(姜沇)
출신지: 충남 논산
훈격: 건국포장(1993)
운동계열: 3・1운동
강윤(姜沇) 1899. 4.28~1975. 1.30
충남 논산(論山) 사람이다.
1919년 4월 1일 공주군(公州郡) 공주면(公州面) 공주시장(公州市場)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영명학교(永明學校) 교사·학생·졸업생·기독교인 등이 중심이 되어 계획되었다. 3월 24일 밤 9시 공주면 대화정(大和町) 영명학교 교실에서 교사 김관회(金寬會)·이규상(李圭商)·현언동(玄彦東), 졸업생 김사현(金士賢), 학생 오익균(吳翼均)·안성호(安聖鎬), 목사 현석칠(玄錫七) 등이 모였다. 이들은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독립만세운동에 공감하고 4월 1일 오후 공주 장날에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김관회는 3월 25일 같은 학교 조수 김수철(金洙喆)에게 계획을 설명하고, 학생 동원과 학생 윤봉균(尹鳳均)이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 약 1,000매의 등사를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영명학교 학생인 강윤을 비롯한 유준석(柳俊錫)·노명우(盧明愚)·윤봉균 등은 3월 30일 김수철을 만났고, 이들과 함께 3월 31일 영명학교 기숙사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다. 또 김수철은 이규남에게 대형 태극기 4개를 제작하게 하였다.
4월 1일 노명우·유준석 등은 선언서를 각각 100매 휴대하고, 강윤과 윤봉균·김수철 등은 태극기를 하나씩 들고 공주시장으로 나갔다. 시장에 도착한 이들은 오후 2시 군중에게 선언서를 살포하고, 태극기를 휘두르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신속한 제지로 만세운동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좌절되었다.
그는 이 일로 피체되어 1919년 8월 2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기까지 4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判決文(公州地方法院, 1919. 8. 29)
·豫審終結決定書(公州地方法院, 1919. 7. 28)
·永明(공주영명고등학교, 1990) 57∼59面
이름: 강윤조(姜潤祚)
출신지: 경남 통영
훈격: 애족장(1990)
운동계열: 3・1운동
강윤조(姜潤祚) 1890. 1.15~1962.12.22
경상남도 충무(忠武) 사람이다.
1919년 4월 2일의 통영(統營)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이날 오후 3시 30분경, 고채주(高采周)·김영중(金永仲) 등과 함께 장터에 모인 3천여명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장꾼들이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치게 되어 장터는 갑자기 독립만세소리로 진동하였다.
이때 일본 경찰이 출동하여 해산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시위군중을 이끌고 만세시위를 계속하였다. 그러자 일본 경찰은 소방 펌프로 시위군중에게 물을 뿜어대는 등 무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그는 모자를 벗어 흔들며 계속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었으며, 이해 5월 13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판결문(1919. 5. 13 대구복심법원)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259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238·1239면
이름: 강윤희(姜允熙)
출신지: 경기 가평
훈격: 독립장(1998)
운동계열: 의병
강윤희(姜允熙) 1868. 11. 11~1909. 11. 30
경기 가평(加平) 사람이다.
1905년 서울에 설치된 유약소(儒約所)에 참여하여 김동필(金東弼), 경현수(慶賢洙) 등과 함께 을사5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며 각국 공사에게 이의 부당함을 알리는 등 활동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의병을 일으키기로 계획한 뒤 1907년 10월에 관동(關東) 창의부(倡義府) 이린영(李麟榮)의 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이후 직접 의병장으로 부하를 거느리고 강원일대에서 일군(日軍)과 교전하는 등 활동하였다. 1909년 5월 20일 일군 토벌대에 피체(被逮)되어 교형(絞刑)을 받고 순국하는 등 공적이 인정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國家報勳處.
이름: 강익승(姜益勝)
출신지: 충남 홍성
훈격: 건국포장(1993)
운동계열: 3・1운동
강익승(姜益勝) 1893. 9. 7~1922. 4. 8
1919년 4월 1일 밤 충남 홍성(洪城)에서는 금마면(金馬面) 가산리(佳山里)에 설치된 임시 연극장에서 관객들이 독립만세를 불렀다. 민영갑(閔泳甲) 등은 가산리 이원교(李元交)의 집에서 연극이 공연되고 있을 때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계획하였고, 이날 관람객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제안하여 동의를 구한 뒤, 20∼30명의 관객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던 것이다.
만세운동이 일경에 의해 해산당하자, 이들은 이튿날 홍성 장터로 나가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강익승은 이날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4월 23일 홍성경찰서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犯罪人名簿(金馬面)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권 1182∼1184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133∼134면
·洪陽史(洪陽史出版委員會, 1969) 49면
·홍성지역의 3・1운동 (김진호, 홍성지역 독립운동의 전개와 독립운동가,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2004) 49∼50면
이름: 강익형(姜益亨)
출신지: 평남 덕천
훈격: 애족장(1990)
운동계열: 국내항일
강익형(姜益亨) 1894.12.14~1955. 8.21
경북 김천(金泉) 사람이다.
그는 1920년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대한독립단은 박장호(朴長浩)·백삼규(白三圭)·전덕원(全德元) 등이 1919년 4월 남만주 유하현(柳河縣)에서 조직한 복벽적(復 的) 항일결사였다.
동단은 도총재부(都總裁部)·총단(總團)의 본부조직과 남만주제일사단(南滿洲第一師團)이란 무장군대를 갖추고 서간도와 국내에 지단도 설치하였는데, 1920년 동단의 김달규(金達奎)·박승엽(朴承燁)·이원보(李元甫) 등은 국내와의 연계투쟁을 위해 평남지단(平南支團)을 결성하고 영원(寧遠)·맹산(孟山)·덕천(德川) 지역으로 지단조직을 확대하였다. 각 지단은 본부의 방침에 따라 독립사상 고취, 군자금 모집, 부일분자 응징, 관공서 파괴, 관공리 처단 등의 무장력에 바탕한 직접투쟁을 행동목표로 하였다.
그는 평남지단 조직책 박승엽의 지도를 받아 정진원(丁進源)·정계록(丁繼綠)·이종현(李宗鉉)·정붕익(鄭鵬翼) 등과 함께 덕천군 내의 유림들을 중심으로 애국세력들을 망라하여 동단의 덕천지단을 조직하였다. 지단장은 이윤실(李潤實), 부단장은 정계록이 선임되었는데 동단은 이후 전단·격문·〈독립신문〉 배포·군자금 모집활동 등을 폈다.
그는 김승문(金勝文)과 함께 군자금 모집을 담당, 여러 차례에 걸쳐 천여원의 군자금을 모연하여 본부에 전달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을 펴던 중 맹산독립단(孟山獨立團)의 관공리 처단과 군자금 모집활동에 연루되어 그를 비롯한 동지들은 1921년 6월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1921년 10월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판결문(1921. 10. 24 평양지방법원)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393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499·504·522∼524면
·동아일보(1921. 10. 28)
이름: 강인성(姜仁聲)
출신지: 전북 익산
훈격: 대통령표창(1992)
운동계열: 3・1운동
강인성(姜仁聲) 1897. 1. 13~1930. 8. 1
전북 익산(益山) 사람이다.
1919년 3월 5일 당시 영명학교(永明學校) 학생으로 같은 학교 교사인 이두열(李斗悅)・김수영(金洙榮)・박연세(朴淵世) 등과 함께 3월 6일 군산(群山)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만드는 등 거사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일경에게 사전 발각되어 동지들이 연행되자 기독교 신자인 학생회원을 규합, 인근 주민 등 50여 명과 함께 군산 시내로 진출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가행진을 벌이고 군산경찰서 앞에서 구속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등 활동하다가 피체되었다.
같은 해 3월 31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하여 4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언도받아 상고하였으나 6월 1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0卷, 國家報勳處, 1993年, p.16.
註・判決文(1919. 4. 30. 大邱覆審法院)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523~525面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9卷 283面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1498~1503面
이름: 강인수(姜人壽)
출신지: 경남 밀양
훈격: 독립장(1980)
운동계열: 임정・중국방면
강인수(姜人壽) 1900. 12. 29~ 이명:강팔수(姜八壽), 양검(楊儉)
경남 밀양(密陽) 사람이다.
김원봉(金元鳳)이 조직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군사훈련의 필요성을 느끼고 1924년 10월에 중국군 간부 양성학교인 황포군관학교(黃捕軍官學敎) 제4기 보병학교를 졸업하였으며, 그후 중국군 장교로서 교관(敎官), 중국군 배련영장(排蓮營長) 부단장 주임(副團長柱任) 등을 역임하면서 대일전(對日戰)에 참여하였다. 1940년 7월부터는 조선의용군 및 조선민족혁명당 특파원등으로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광복 후에는 임시정부가 환국을 결정함에 따라 일본군내의 한적 사병 접수 업무 및 광복군의 확군 문제와 일본군 무장해제의 협조, 그리고 한국 교포들의 생명, 재산 보호를 위한 임시정부와 중국정부간의 합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광복군 총사령 이청천(李靑天)장군의 명령으로 광복군 각 지대에서 일본군 점령지역에 군사특파단을 파견하도록 하는 동시에 일본군내 한적 사병을 접수하여 잠편지대(暫編支隊)를 주요 도시에 설치하게 되었다. 한적 사병의 인원을 약 10만명으로 보고 기설 3개 지대 외에 7개 잠편지대를 증설하여 도합 10개 지대로 확장하며 각 지대는 완전한 사단 편제로 조직한다는 계획이었다. 따라서 잠편지대는 1945년 10월 중순부터 10월말까지 전방에서 각각 조직되었다. 이때 그는 광동(廣東) 잠편지대에 참모로 배속되어 지대장인 최덕신(崔德新)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51년에는 중국군 육군 소장에 승진되어 계속 복무하다가 1965년에 퇴역한 후 현재 대만에서 거주하고 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0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수여하였다.
出典:『大韓民國獨立有功者功勳錄』第5卷,國家報勳處, 1988年, pp.460~461.
註ㆍ光復軍名單(光復軍同志會)
ㆍ自由中國國防部參謨總長 確認
ㆍ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6卷 546・608面
이름: 강인수(姜寅秀)
출신지: 충남 천안
훈격: 애국장(1990)
운동계열: 만주・노령방면
강인수(姜寅秀) 1869. 5. 8~1932. 10. 27
충남 천안(天安) 사람으로 1924년에 경북 안동(安東)으로 전적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강제체결됨을 통분하여 서울에서 동우회(同友會)를 조직하고 주권회복을 도모하였으며, 1907년에는 해아(海牙)밀사파견에 연루되어 노령해삼위(海蔘威)로 피신하여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1920년에는 만주에서 북로군정서 김좌진(金佐鎭)과 조국 광복을 도모하고 청산리 독립전쟁(靑山里獨立戰爭)에 참가하였다. 1925년에는 만주 영안현(寧安懸)에서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고, 검사원(檢査院)의 검사원(檢査員)으로 선임되어 지방조직과 독립군의 편성 및 훈련에 주력하였다.
1929년에는 재만 각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여 한족연합회(韓族聯合會)를 결성하였으며, 1930년 일제의 탄압이 혹심해지자 하얼빈(哈爾濱) 접경지인 산시역(山市驛)에 은신하였다가 1932년 10월 하얼빈도외(道外) 북정양가(北正陽街) 4호에서 병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음.
出典: 『大韓民國獨立有功者功勳錄』第4卷, 國家報勳處, 1987年, p.500.
註・韓國獨立運動史(國史編纂委員會) 4卷 139面
・白棲晋州姜氏行狀
・除籍謄本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5卷 515面
이름: 강인택(姜仁澤)
출신지: 함남 홍원
훈격: 애족장(2009)
운동계열: 국내항일
강인택(姜仁澤) 1892. 8. 2~1962. 11. 13
1919년 3월 3일 함남 홍원군(洪原郡) 읍내 시장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가하였다.
천도교 신자인 강인택은 3월 3일 홍원군 천도교 교구당에서 강남섭(姜南燮)으로부터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았다. 적극 찬동하고 동지들과 함께 운동 방법 등에 대해 협의하였다. 그 결과 3월 16일부터 3일간 읍내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강인택은 천도교 신자들에게 이 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는 한편, 동월 13일 독립선언서 약 1,000매를 인쇄하는 등 운동준비를 비밀리 진행하였다.
약속된 동월 16일 강인택은 홍원 읍내 시장에서 군중들에게 조선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한 후 조선독립만세를 우렁차게 외쳤다. 이에 호응하여 군중들은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연호하며 시위행진에 나섰다.
이로 인해 강인택은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6월 1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2년 이후 강인택은 천도교의 지도급 인사로서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 중앙집행위원, 재외조선인노동상황조사회(在外朝鮮人勞動狀況調査會) 위원, 조선교육회(朝鮮敎育會) 이사 등을 역임하며 조선인의 교육문제와 재외 조선인의 인권보호를 위해 활동하였다. 1923년 전조선청년당대회(全朝鮮靑年黨大會)의 준비위원, 1924년 언론집회압박탄핵회(言論集會壓迫彈劾會) 등에 참가하여 청년운동과 언론운동에도 관여하였다. 1927년경 국내외에서 민족유일당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동참하여 신간회(新幹會) 경성지회(京城支會) 간사와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속적으로 항일운동에 헌신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判決文(京城覆審法院:1919. 6. 14)
·判決文(高等法院:1919. 7. 26)
·東亞日報(1922. 5. 11·5. 18·10. 23·11. 30, 1923. 2. 24, 1929. 7. 23)
·中外日報(1927. 5. 27·6. 3·6. 12, 1930. 4. 14)
·言論集會壓迫彈劾會의 件(1924. 6. 28) 檢察行政事務에 관한 기록 1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12집 271~274, 제14집 118·314·564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2권 701~702, 제8권 404~406·678~681, 제10권 714면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國史編纂委員會) 제6권 787·876·893면, 제9권 155면
이름: 강인호(姜仁浩)
출신지: 평북 정주
훈격: 대통령표창(1963)
운동계열: 광복군
강인호(姜仁浩) 1919. 4. 23~
평북 정주(定州)사람.
1963년 대통령표창.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5卷, 國家報勳處, 1988年, p.1117.
이름: 강일(姜 日(姜星求))
출신지: 충남 부여
훈격: 애족장(1990)
운동계열: 학생운동
강일(姜日) 1911. 3.25~1974. 1.21 이명:姜星求
충남 부여(扶餘) 사람이다.
1926년 6월 고향에서 군중들과 함께 일본학교 폐지를 주장하며 시위를 펴다 피체되었으나 미성년자로서 풀려났다고 한다.
그후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이에 호응하여 동조시위를 펼 것을 계획하고 1930년 2월 유복윤(柳福允)·노명우(盧明愚) 등과 함께 항일격문을 제작하여 부여농업보습학교(扶餘農業補習學校)에 살포하였는데, 이일로 인하여 일경에 피체되어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5년형을 언도받았다.
1931년에는 비밀결사 대성당(大星黨)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펴던 중 피체되어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후 1936년 대성당의 재건을 시도하다 재차 피체되어 1년 동안 구금당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611면
·동아일보(1930. 2. 9)
·조선일보(1930. 2. 7, 2. 14)
이름: 강일구(姜日求)
출신지: 충남 부여
훈격: 건국포장(2009)
운동계열: 국내항일
강일구(姜日求) 1910. 9. 23~미상
1931년 10월 충남 부여군(扶餘郡) 구룡면(九龍面)에서 이호철(李戶喆) 등과 함께 비밀연구모임을 조직하고 사회과학을 연구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강일구는 부여공립보통학교(扶餘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고 서울의 배재고등보통학교(培材高等普通學校)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고 만주와 일본 등지를 돌아다니다가 1931년 8월 귀향하였다. 이후 최재봉(崔在鳳)이 경영하는 조선일보(朝鮮日報) 부여지국에서 일하면서 동리의 야학교 교사를 겸임하였다. 이 무렵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깊게 인식하고 항일투쟁의 수단으로 사회과학 서적을 구독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에 접근하였다.
강일구는 1931년 10월 5일 구룡면 금사리(錦寺里) 산중에서 동지들과 함께 공산주의연구협의회(共産主義硏究協議會)를 결성하고 교양부를 담당하였다. 이후 1933년 3월 23일 보다 적극적인 운동실천을 위해 동회를 해체하고 공산주의자협의회(共産主義者協議會)를 결성하고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각 부락에 야학을 개설하여 연극, 강연 등을 개최해서 농민의 계몽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동년 4월 중순경에는 칠모회(七모會)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야학운영과 사회주의 사상 보급에도 힘썼다. 동년 5월 부여군 장암면(場岩面)의 야학담당자로서 활동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강일구는 1935년 11월 2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5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註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刑事事件簿
·東亞日報(1933. 9. 29·12. 9)
·朝鮮日報(1935. 4. 30)
·朝鮮中央日報(1935. 10. 16·11. 3)
·共産主義硏究協議會, 共産主義者協議會, 農民俱樂部 및 七會모사건(1936. 3) 思想彙報 제6호 216~217, 219~220면
·일제시기 충남 부여·논산군의 유지집단과 혁신청년집단(지수걸, 2005) 韓國文化 제36집 216면
·일제하 부여지역 동족마을의 농민운동연구(장세옥, 2002) 湖西史學 제33집 8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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