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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의 주요문화유산 해설8 : 용두산공원 ] | ||
1. 용두산공원 개요 ![]() 우선 지리적으로 태백산맥의 주맥이 부산으로 들어와 동서로 나뉘는데, 동으로는 장산, 금련산, 황령산으로 뻗어 금련산맥을 이루고, 서로는 금정산, 백양산, 구덕산, 승학산, 천마산으로 금정산맥을 이루고 있다. 부산의 본산은 금정산으로 부산 시가지 한가운데를 뻗어 내리다 바다를 향해 끝맺음을 하는데, 용이 동해에서 뭍으로 올라오는 형상이라 하여 용두산이라 이름을 짓고, 옛 시청자리를 용미산이라고 불렀다. 좌로는 용호반도가 좌청룡격이고, 우로는 장군반도가 범의 위세이고, 북으로는 구봉산이 거북의 형상으로 구부려 있고, 남으로는 봉래산이 봉황의 모양으로 펼쳐져 있다. 이곳에는 숙종 4년(1678년) 초량 왜관이 설치되었고, 1876년 개항 이후에는 일본인들의 전관거류지로 지정되어 침략의 발판으로 정치, 경제, 교통, 문화가 이 곳을 중심으로 발달하였고, '식민지형' 근대화가 시작되어 일본의 흔적이 도처에 남아 있다. 해방 후에 일본신사가 헐려지고, 한국전쟁때 밀려든 피난민에 의해 대규모 판자촌이 형성되었으나, 1954년 12월 10일 대화재로 불타버린 뒤 이곳에 70여종의 나무를 심어 공원으로 재조성하였다. 시민의 종은 1997년 12월 시민들의 모금으로 건립되었으며, 해마다 재야, 3.1절, 광복절 등 3차례씩 타종을 하고 있다. 2. 용두산공원내 시설물 1) 4·19혁명탑 용두산공원은 1957년 이승만 태통령의 호를 따서 우남공원으로 개칭되었고,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있었다. 그러나 1960년 4·19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은 철거되었고, 자유당 독재정권과 부정부패에 항거하다 돌아가신 故 신정융 열사등 19위(位)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고자 1961년 7월 국제신문사 주관으로 부산시민의 정성을 담아 위령탑을 건립하였다. 탑의 규모는 부지면적 113평, 탑높이 11m, 둘레 27.8m이며 탑 우측으로는 오석으로된 19위의 이름이 새겨진 명패가 있다. 매년 4월 19일은 시장님이하 관계자들이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참고자료로 19위(位)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신정융, 강수영, 김영계, 정환규, 전청언, 김성길, 신보웅, 백윤선, 정삼근, 김세창, 최경자, 지부수, 최봉옥, 박형철, 옥치용, 강명임, 최정수, 손경호, 박점도 2) 이순신 장군 동상 긴칼 옆에 차고 부산 앞바다를 내려보고 계시는 동상은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다. 이 동상은 임진왜란시 우리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충무공의 무공과 호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1955년 경상남도 도지사 이상용에 의해 세워진 높이 11m 폭 3.8m의 전신 입상이다. 그가 부산포 해전에서 승리를 이끈 날이 1592년 음력 10월 1일이었는데 양력으로 환산하면 10월 5일이 되어 그 날을 부산 시민의 날로 정했다. 이순신 장군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면 본관은 덕수, 자는 여해, 시호는 충무로 1545년(인종원년) 5월 28일에 출생하여 32세에 병과에 급제,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仕)라는 임시직으로 처음 관직에 나갔다. 임난때는 한산대첩의 큰 무공을 세워 정헌대부(正憲大夫) 즉 정이품에 해당되는 관직에 올랐으며 1593년에는 남해안 일대의 적 수군을 완전히 일소하고 한산도에 진을 옮겨 본영(本營)으로 삼고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 즉 경상·전라·충청 3도의 수군을 통제지휘한 수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이후 1598년 일본으로 철수하던 일본군과 대전하다 노량진에서 54세로 최후를 맞았다. 3) 안희제 동상 독립운동자인 안희제(1885∼1943)선생의 호는 백산으로 경상남도 의령 출신이다. 양정의숙을 졸업한 후, 동래에 구명학교, 의령에 의신학교 등을 창립, 교육사업에 힘썼다. 1909년(융희3)에 서상일·신성모·박중화를 비롯한 80여명 동지를 규합하여 항일 비밀결사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구국 운동을 전개했다. 1911년 남북만주와 시베리아에 유랑하며 독립운동자들과 사귀고, 3년후 귀국하여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경영하며 무역업에 종사하는 한편 뒤로는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의 연락처로 사용했다. 1926년에는 운영난에 빠진 <중외일보>를 맡아 일본의 총독정치를 맹렬히 공격했다. 그 뒤 다시 만주에 건너가 동경성에 발해농장을 세워 교포의 생활안정과 청소년 교육에 힘썼다. 대종교를 신봉하여 총본사전강·교적간행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민족고유의 종교를 통한 민족정신 고취에 힘썼다. 1942년 11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9개월만에 병으로 보석되었으나, 이듬해 목단강(牧丹江)에 있는 영제의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받았다. 3. 초량왜관 조선초에 왜구금지와 조선인 송환을 위해 왜에 대한 회유책으로 왜관을 설치했다. 1407년 부산포, 내이포(진해웅천), 1418년 염포(울산)를 개항하여 교역·숙박지로 제공되었다. 삼포왜란 후 절영도(영도, 1601∼1607)에 임시왜관을 설치한 후, 현 수정동에 두모포왜관(1607∼ 1678)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두모포는 좁고 수심이 얕아 정박에 불편한 이유로 용두산에 초량왜관(1678∼1876)을 설치했다. 1) 규모와 구성 - 약11만평의 장방형, 3개의 문과 2M 돌담 - 동관(삼대청 : 관수가, 재판가, 개시대청) - 서관(삼대청) - 6개의 복병소 : 일본인 난동과 밀무역 감시 - 설문 : 왜관의 한계, 조선과 일본인 출입통제 - 연향대청 : 일본사절을 위로, 향연 - 초량객사 : 조선국왕에게 숙배 2) 기능과 유물 - 외교교섭 - 경제교류 : 공무역, 개시무역, 밀무역 - 개시무역(매월 3, 8일에 이루어짐) : 조선은 인삼, 목면, 쌀, 중국의 비단, 일본은 은,구리, 철 교역 - 밀무역을 막기위해 금제조항 5가지 제정 : 약조제찰비 세움 3) 왜관 사람들 - 훈도, 별차 : 통역관 - 관수 : 일본측 책임자 4) 역할 - 부산의 단독 왜관으로 인해 개항후 중심지가 동래에서 부산으로 옮겨지면서 부산이 대일관계에 중요지역으로 부각 4. 용두산공원 주변의 모습 1) 주한 미문화원 건물 우리 근·현대사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건물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사 건물이었고, 해방 후에는 미문화원으로 사용되다가 한국전 때는 임시 미대사관으로 이용되었다 . 1921년 설립된 동척은 부산·경남지역에 13개소의 농장을 경영하며 연평균 5만석의 소작료를 거둬들였다. 1996년 47년만에 폐쇄된 미문화원은 지금은 근대역사관으로 탈바꿈했다. 2) 헌 책방 골목 대청로 사거리 건너 보수동 쪽으로 난 사선 방향의 좁은 골목길에 집결된 책방이다. 해방 후 국제시장에서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책을 난전을 벌여 팔던 상인들에서 기인한다. 한국 전쟁 때, 가져 온 귀중한 책을 호구용으로 내다 팔려는 피난민과 책을 구입할려는 피난민이 폭증하여 큰 시장이 형성되었다. 3) 국제시장 부산 최대의 재래시장으로 해방 후 철수하는 일본인들로부터 전시 통제물자가 쏟아져 나오며 시장이 형성되었다. 그 후 한국전쟁 때 부산항으로 들어 온 전쟁 군수품, 전쟁의 혼란속에 급증한 밀수입 상품등 온갖 상품이 이입되어 전국으로 공급되었다. 4) 영도 다리 1934년 준공된 한국 근·현대사의 상징물인 국내 최초의 도개식 다리로 하루에 2번씩 20분간 도개했다. 1935년 영도다리 위로 전차가 개통되었고 가혹한 식민지 삶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의 자살 행렬이 이어져 '잠깐만'이라는 표지판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5) 임시수도 기념관 1926년에 지어진 건물로 도지사 관사로 사용되다가 한국전 때 이승만 대통령의 관저로 사용되었다. 부산 정치 파동의 산실로 자유당 독재 정치가 싹튼 곳이다. 1984년 <임시수도 기념관>으로 지정되었다. 6) 송도 해수욕장 1913년 일본인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개발된 국내 최초의 해수욕장으로 1964년 거북섬과 해수욕장 서쪽 산언덕을 잇는 케이블카가 설치되고, 공중 줄다리 설치되면서 관광지로 급부상하였다. 7) 40계단 40계단이 널리 알려진 것은 6·25때문이었다. 40계단이 위치한 동광동과 영주동 일대에 피난민들이 판자촌을 이루고 살았다. 피난민들에 의해 40계단 근처는 구호물자를 파는 돗데기 시장이 크게 이루어졌고, 6·25가 끝난 후에는 암달러상으로 북적댔다고 한다. 1953년 11월 옛부산역 대화재가 있은 후 주변이 잠식되어 4M 가량 폭이었던 것이 약 1M가 남았다. 이 옆의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찍은 40계단 앞에 1993년에 중구청에 의해 기념비가 세워졌다. 40계단 기념비 뒷면에는 박재홍님이 불러 40계단이 더욱 알려지게 된 <경상도 아가씨>라는 노래의 가사 1절이 새겨져있다. 40계단 근처에는 2003, 2, 12에 개관한 <40계단 문화관>이 있어 피난시절의 모습도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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