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한국 독립군의 활동 답④
제시된 내용은 모르더라도, 자료의 출전에 표시된 '지청천, 1933년, 대전자령 전투'의 개념을 통해 한국 독립군임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한국 독립군은 북만주 일대에서 중국 호로군과 한·중 연합 작전을 전개하여 쌍성보 전투(1932), 사도하자 전투와 대전자령 전투(1933)에서 일본군에게 승리하였다는 것 기억하세요.
1920년대 만주에서는 3부를 비롯한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 운동이 전개되어 남만주 지역의 국민부와 북만주 지역의 혁신 의회가 조직되었습니다. 혁신 의회는 한국 독립당과 한국 독립군을 조직하여 북만주를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국민부는 조선 혁명당과 조선 혁명군을 조직하여 남만주 일대에서 활약하였어요. 당시 만주 지역에서는 만주 사변으로 중국인의 반일 감정이 높아 한국 독립군과 조선 혁명군은 중국군과 연합하여 독립 전쟁을 전개하였어요.
한국 독립군은 지청천이 이끌었으며, 북만주에서 중국 호로군과 연합하여 쌍성보, 대전자령 등지에서 일본군에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조선 혁명군은 양세봉이 지휘하였으며, 남만주에서 중국 의용군과 연합하여 영릉가와 흥경성에서 일본군을 격퇴하였어요. 그러나 1930년대 중반 들어 투쟁 방법과 주도권을 둘러싸고 한·중 사이에 갈등이 커져 상당수 독립군은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 본토(관내)로 이동하였고, 일부는 한국광복군에 참여하였습니다.
①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직할 부대로는 광복군 사령부, 광복군 총영, 육군 주만 참의부, 한국광복군을 들 수 있습니다.
② 조선 의용대에 대한 설명입니다.
김원봉 등이 이끄는 민족 혁명당의 주도로 중국 관내 최초의 한인 무장 부대인 조선 의용대가 조직되었어요(1938).
③ 의열단을 이끌던 김원봉은 1930년대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으로 조선 혁명 간부 학교를 설립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습니다.
④ 한국 독립군은 중국 호로군과 연합하여 북만주 일대에서 일본군에 맞서 항일 전쟁을 펼쳤습니다.
⑤ 청산리 대첩 이후 독립군 부대들이 연합하여 조직한 대한 독립군단에 대한 설명입니다.
일본군을 격퇴한 후 독립군 주력 부대 4,000여 명은 밀산부에 집결하여 서일을 총재로 대한 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소련령
자유시로 이동하였어요. 그러나 소련의 적군은 독립군의 지휘권 양도를 요구하였고, 이를 거부한 한인 부대를 공격하여
무장 해제시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백 명의 독립군이 희생되었어요(자유시 참변, 1921. 6.).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1920~40년대 만주와 중국에서의 항일 운동
■ 1920~1940년대 국외의 주요 무장 항일 운동 부대
부대 | 창설 | 위치 | 주도 | 활동 |
대한 독립군 | 1920 | 봉오동 | 홍범도 | 봉오동 전투 |
북로 군정서군 | 1920 | 청산리 | 김좌진 | 청산리 전투 |
대한 독립군단 | 1921 | 밀산부 | 서일 | 간도 참변 후 조직, 자유시로 이동 |
조선 혁명군 | 1929 | 남만주 | 양세봉 | 흥경성, 영릉가 전투 |
한국 독립군 | 1930 | 북만주 | 지청천 | 쌍성보, 대전자령, 사도하자 전투 |
동북 항일 연군 | 1935 | 한·만 국경 | 김일성 | 보천보 전투 |
조선 의용대 | 1938 | 한커우 | 김원봉 | 조선 민족전선연맹(민족 혁명당)의 군사 조직 |
한국 광복군 | 1940 | 충칭 | 지청천 | 임시 정부 산하, 국내 정진군 편성(미군 OSS 지원) |
조선 의용대 화북지대 | 1941 | 화북 | 윤세주 | 호가장 전투 |
조선 의용군 | 1942 | 화북 | 김무정 | 조선 독립 동맹의 군사 조직, 인민군 편입 |
■ 1930년대 만주와 간도에서의 한·중 연합 작전
구분 | 조선 혁명군 | 한국 독립군 |
활동 지역 | 국민부(남만주) 휘하 군사 조직 | 혁신 의회(북만주) 휘하 군사 조직 |
중심 인물 | 양세봉 | 지청천 |
한․중 연합 | 중국 의용군과 연합 | 중국 호로군과 연합 |
주요 전투 | 영릉가 전투(1932), 흥경성 전투(1933) | 쌍성보 전투(1932), 대전자령 전투(1933), 사도하자 전투, 경박호 전투 |
이후 활동 | 만주 지역 중국 의용군 약화 → 1934년 양세봉 피살 후 약화 | 일제의 대토벌 작전, 임시 정부의 이동 요구 → 중국 본토로 이동(1934) |
한국 독립군과 중국 호로군의 합의 내용(1931)
1. 한·중 양군은 최악의 상황이 오는 경우에는 장기간 항전할 것을 맹서한다.
2. 중동 철도를 경계선으로 하여 서부 전선은 중국이 맡고, 동부 전선은 한국이 맡는다.
3. 전시의 후방 전투 훈련을 한국 장교가 맡고, 한국군에 필요한 군수품 등은 중국군이 공급한다.
한국 독립군의 항일전
그 때는 만주에 풍운이 험해지고 일제는 군사 행동을 일으켜 북만주 지역까지 마수를 뻗치므로 우리 부대는 중국군과 손잡고 항일전에 들어갔다. 쌍성보 공략전을 비롯하여 사도하자 전투, 동경성 습격, 경박호 대첩, 대전자령 전투 등 대전투만도 몇 차례 치루었다. 이때는 소극적 게릴라전이 아니고 대규모 전투였다. 우리는 1933년까지 만주 땅에서 싸우다가 일제 침략의 전면화에 따라 효과적 대책을 강구하던 중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소명이 있어 남중국으로 떠나갔다.
<오광선 인터뷰>
조선 혁명군과 중국 의용군 합의 내용(1932)
중국과 한국 양국의 군민은 한마음 한뜻으로 일제에 대항하여 싸우고, 인력과 물자는 서로 나누어 쓰며, 합작의 원칙하에 국적에 관계없이 그 능력에 따라 항일 공작을 나누어 맡는다.
조선 혁명군의 항일전
영릉가의 뒷산에 대기하고 있다가 적을 요격하여 수 시간의 격전이 벌여졌다. …… 같은 해 5월 8일 일·만 연합군은 다시 영릉가에 진격해 왔다. 한·중 연합군은 이를 역습하여 2일간이나 격전이 계속되었다. …… 같은 해 7월 7일, 영릉가 석인구에서 적의 내습을 받았으나 마침 조화선 부대의 내원을 받고 양세봉의 영웅적 독전으로 적 40여 명을 사살하고 경기관총 3정과 소총 30여 정을 노획하였다.
<영릉가 전투 기록>
1930년대 무장 항일 운동 문제를 제시합니다.
유사 기출문제
25회 고급 38번 문제
38. 조선 혁명군의 활약 답③
제시된 자료에 나타난 '영릉가 전투', '양세봉' 등을 통해 조선 혁명군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조선 혁명군은 1930년대에 남만주에서 항일 중국군과 연합하여 한·중 연합 작전을 펼쳐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였습니다.
만주에서는 1920년대 말 전개된 참의부·정의부·신민부 등 3부 통합 운동의 결과로 남만주에 국민부(1929)와 북만주에 혁신 의회(1928)로 재편되었습니다. 국민부 아래 조선 혁명당과 조선 혁명군을 두어(1929) 군 정부 기능을 하였고, 혁신 의회는 군 정부를 조직하지 못한 채 해체된 후 지청천 등이 주도하여 한국 독립당을 결성(1930)하고 일제가 만주를 침략(만주 사변, 1931)하자 한국 독립군을 조직(1931)하였습니다.
일제가 만주 사변을 통해 만주를 점령한 후 만주국을 수립하면서(1932) 이 지역에서 독립군의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 혁명군과 한국 독립군은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1932년 이후로는 항일 의식이 고조된 중국군과 연합하여 한·중 연합 작전을 전개하였어요.
지청천의 지휘 아래 북·동만주 일대에서 활약한 한국 독립군은 중국 호로군과 함께 쌍성보 전투(1932. 9), 사도하자 전투(1933. 3), 동경성 전투(1933. 7), 대전자령 전투(1933. 7) 등에서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한편,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 혁명군도 남만주에서 중국 의용군과 연합해 영릉가 전투(1932. 3), 흥경성 전투(1933. 3) 등에서 일본군을 격퇴하였습니다. 1934년 양세봉이 피살된 이후 세력이 약화되었지만 1930년대 후반까지 항일 투쟁을 지속하였습니다.
① 서일을 총재로 하여 결성되어 소련령 자유시로 이동하였던 대한독립군단에 대한 설명입니다.
청산리 대첩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후 약 4,000명에 이르는 독립군 주력 부대들은 밀산부에 집결하여
서일을 총재로 하는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시베리아로 이동하였다가 자유지 참변을 겪었습니다.
②, ⑤ 한국광복군에 대한 설명입니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고, 한국 광복군은 연합군과 연합하여
공동으로 인도와 미얀마 전선에 참전하는 등 대일전을 수행해 나갑니다. 1942년에는 화북 지역으로 이동하지 않은
조선 의용대 일부(김원봉이 이끔)가 한국 광복군에 참여하여 군사력이 한층 강화됩니다.
③ 조선 혁명군은 남만주에서 한·중 연합 작전을 펴 영릉가 전투(1932. 3), 흥경성 전투(1933. 3)에서 승리하였어요.
④ 조선 의용대에 대한 설명입니다.
김원봉은 조선 민족 혁명당을 결성하고(1937) 그 산하에 조선 의용대를 조직하였어요(1938). 조선 의용대는 기존의
만주에서 결성된 항일 독립군 부대와 달리 최초로 중국 관내(중원 지역)인 우한에서 결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21회 고급 37번 문제
37. 조선 의용대 답④
제시된 자료에 민족 혁명당의이 조직한 부대라고 하였으니, 조선의용대입니다.
1935년 중국 관내에서 민족유일당으로 형성된 조선 민족 혁명당은 1937년 중·일 전쟁이 시작되자 공산주의 정당과 연합하여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을 결성하고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조선 의용대를 창설하였다(1938).
조선 의용대는 의열단 출신의 김원봉을 중심으로 하여 중국 국민당 군대와 함께 선전 활동, 일본군 포로 심문 등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조선의용대의 일부는 중국 국민당의 과도한 통제와 소극적 항일 투쟁에 반발해 화북 지역으로 이동하여 조선 독립 동맹 및 조선의용군을 결성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1942). 조선의용군은 중국 공산당군(팔로군)의 지원을 받으며 함께 태항산 전투, 호가장 전투 등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조선 의용대의 대원이 화북 지역으로 이동한 후 김원봉과 남은 세력들은 한국 광복군에 합류하였다(1942).
한편 1945년 8월 소련이 대일전을 개시하자 조선 의용군은 만주로 진격하여 세력 확대를 꾀하였고, 국공 내전(1946~1949)에서 중국 공산군의 승리의 견인차 역할을 한 후 북한으로 입북하여 인민군으로 편입되었다.
①, ② 조선 혁명군에 대한 설명입니다.
③ 1920년대 초 청산리 대첩 이후 독립군 부대에 대한 설명입니다.
④ 조선 의용대는 기존의 만주에서 결성된 항일 독립군 부대와 달리, 최초로 중국 관내(중원 지역)에서 결성되었던 부대입니다.
⑤ 지청천이 이끌던 한국 독립군에 대한 설명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19회 고급 45번 문제
45. 한·중 연합 작전을 전개한 한국 독립군 답①
지도에 표시된 쌍성보, 사도하자, 대전자령은 모두 한국 독립군이 중국 호로군과의 연합해 항일전에서 승리한 것이죠.
다음에도 나올 수 있으니 꼭 기억해 두세요.
만주에서는 1920년대 말 전개된 참의부·정의부·신민부 등 3부 통합 운동의 결과로 남만주에 국민부(1929)와 북만주에 혁신 의회(1928)로 재편되었습니다.
국민부 아래 조선 혁명당과 조선 혁명군을 두어(1929) 군 정부 기능을 하였고, 혁신 의회는 군 정부를 조직하지 못한 채 해체된 후 지청천 등이 주도하여 한국 독립당을 결성(1930)하고 일제가 만주를 침략(만주 사변, 1931)하자 한국 독립군을 조직(1931)하였습니다.
일제가 만주 사변을 통해 만주를 점령한 후 만주국을 수립하면서(1932) 이 지역에서 독립군의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 혁명군과 한국 독립군은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1932년 이후로는 항일 의식이 고조된 중국군과 연합하여 한·중 연합 작전을 전개하였어요.
지청천의 지휘 아래 북·동만주 일대에서 활약한 한국 독립군은 중국 호로군과 함께 쌍성보 전투(1932. 9), 사도하자 전투(1933. 3), 동경성 전투(1933. 7), 대전자령 전투(1933. 7) 등에서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후 중국군과의 갈등을 겪었던 한국 독립군은 임시 정부의 요청에 따라 지도부 대부분이 중국 관내로 이동합니다. 지청천은 훗날 임시 정부가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는 데 중심 역할을 하였습니다.
한편,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 혁명군도 남만주에서 중국 의용군과 연합해 영릉가 전투(1932. 3), 흥경성 전투(1933. 3) 증에서 일본군을 격퇴하였습니다. 1934년 양세봉이 피살된 이후 세력이 약화되었지만 1930년대 후반까지 항일 투쟁을 지속하였습니다.
① 지청천은 한국 독립군을 지휘하며 쌍성보 전투를 비롯한 많은 작전에서 큰 성과를 거뒀어요.
② 대한 독립군단에 대한 설명입니다.
청산리 대첩 이후 일제가 간도 참변을 자행하자 북간도에 있던 독립군 부대들은 새로운 항일전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중·소 국경 부근인 밀산 방면으로 이동한 후, 북로군정서의 주도 아래 여러 부대를 통합해 대한 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소련령 자유시로 이동하였습니다.
③ 한국 광복군에 대한 설명입니다.
④ 한국 독립군과 같은 시기, 남만주에서 활동하던 조선 혁명군에 대한 설명입니다.
⑤ 한국 광복군에 대한 설명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17회 고급 40번 문제
40. 1930년대 초반의 한·중 연합 작전 답⑤
문제에 제시된 (가)는 한국 독립군, (나)는 조선 혁명군입니다.
만주에서는 1920년대 말 전개된 참의부·정의부·신민부 등 3부 통합 운동의 결과로 조선 혁명당과 한국 독립당이 결성되었고, 그 산하에 조선 혁명군(1929)과 한국 독립군(1931)이 편성되었습니다. 1930년대 들어 일제가 만주 사변(1931)을 일으키고, 이듬해 괴뢰국인 만주국을 수립(1932)하여 만주 일대를 장악하면서,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은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두 독립군 부대는 일제의 만주 침략에 맞서 싸우면서 항일 중국군과 연합해 한·중 연합 작전을 전개하여 여러 차례 일본군을 격퇴하는 전과를 올립니다.
남만주에서는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 혁명군이 항일 중국군과 힘을 합쳐 영릉가 전투, 흥경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퇴하였습니다. 1934년 양세봉이 피살된 이후 세력이 약화되었지만 1930년대 후반까지 항일 투쟁을 지속하였습니다.
지청천의 지휘 아래 북·동만주 일대에서 활약한 한국 독립군 역시 항일 중국군과 함께 쌍성보 전투, 동경성 전투, 대전자령 전투 등에서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중국군과의 전리품 배분 등을 둘러싸고 갈등을 겪었던 한국 독립군은 임시 정부의 요청에 따라 지도부 대부분이 중국 관내로 이동합니다. 지청천은 임시 정부가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는 데 중심 역할을 하였습니다.
① (가)의 한국 독립군은 1931년, (나)의 조선 혁명군은 1929년에 조직되었습니다.
따라서 중·일 전쟁(1937) 이전에 조직되었습니다.
중·일 전쟁(1937) 이후 조직된 항일 독립군으로는 조선 의용대(1938), 한국 광복군(1940)을 들 수 있습니다.
②, ④ 한국 광복군에 대한 설명입니다.
③ 청산리 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둔 북로 군정서, 서로 군정서 등의 독립군 부대에 대한 설명입니다.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무찌른 후 약 4,000명에 이르는 독립군 주력 부대들은 밀산부에 집결하여 서일을 총재로
하는 대한 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시베리아로 이동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14회 고급 30번 문제
30. 만주와 간도, 중국에서의 독립 운동 답④
일제 강점기 국외 독립 운동의 중심지는 북간도, 남만주(서간도)와 연해주, 중국 내륙, 그리고 미주 지역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지도에 국외 독립 운동의 중심지를 표시하고 각 지역에서 있었던 독립 운동을 고르는 문제네요.
(가)~(라)지역이 어디인지 알 수 있는 특정 도시(하얼빈, 삼원보, 난징)만 주어졌네요.
이런 문제를 푸는 데는 평소에 국외 독립 운동 기지와 관련한 지도를 눈여겨 본 분들이 유리하겠죠?
(가)는 북만주 지역입니다.
이 지역과 관계된 독립 운동으로는 쌍성보 전투(1932)입니다.
쌍성보 전투는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 독립군과 중국군이 연합(한·중 연합군)하여 일본군에게 승리한 전투입니다.
이 두 연합군은 북만주에서 사도하자 전투, 대전자령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습니다.
(나)는 북간도 지역입니다.
이 지역 근처에 있는 용정에는 명동 학교, 서전서숙 등의 민족 학교가 세워졌던 곳입니다.
(나) 지역에서는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 군정서군이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 등 여러 독립군 부대와 연합하여
청산리에서 일본군에게 크게 승리하였습니다(1920). 이는 항일 독립 전투사에서 가장 큰 승리였습니다.
(나) 지역보다 조금 오른쪽 위에 있는 봉오동에서는 청산리 전투 직전,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이 일본군에게 승
리한 곳입니다(봉오동 전투).
(다)는 남만주 지역(서간도라고도 함)입니다.
삼원보는 신민회가 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하였던 곳입니다.
이 지역에는 경학사, 신흥 무관 학교가 세워졌었습니다.
(다) 지역에서는 1930년대 들어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 혁명군이 활동하였습니다.
조선 혁명군은 중국 의용군과 연합하여(한·중 연합군) 영릉가 전투, 흥경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쳤죠.
(라)는 상하이입니다.
상하이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세워진 곳이라는 거 잘 아시죠.
만주 사변(1931) 이후 일본은 상하이까지 침략합니다(상하이 사변, 1932).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상하이 사변 승리 기념식이 열렸을 때, 김구가 이끄는 한인 애국단의 윤봉길 의사는 기념식
단상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군 장교과 고관을 처단합니다(훙커우 공원 의거)
이 의거에 감동한 중국 국민당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후원합니다. 이는 한국 광복군 탄생의 밑거름이 됩니다.
ㄱ - 청산리 대첩 이후 일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의 한인 동포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집과 학교, 교회 등을 마구
불태웠는데, 이를 간도 참변이라고 합니다.
일본군을 피해 독립군을 재정비하기 위해 약 4,000명에 이르는 독립군 부대들은 밀산부에 집결하여 서일을 총재로
하는 대한 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소련령으로 이동하였다가 자유시 참변을 겪고 다시 만주로 돌아옵니다.
대한 독립군단을 결성한 곳은 지도에 중국과 소련 국경에 호수가 표시되어 있는 곳에 있던 밀산부입니다.
ㄷ - 지청천의 한국 독립군은 (가) 지역인 북만주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같은 시기의 (다) 지역에서는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 혁명군이 활동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ㄴ, ㄹ로 묶인 ④번입니다.
13회 고급 11번 문제
11. 1920~30년대 항일 독립 운동 답③
많은 분들이 어려워하는 항일 독립 운동에 대한 문제네요.
사료를 통해 시기를 파악해야 하는 문제라 더욱 어렵게 느끼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리 어렵지 않은 문제입니다.
반복적으로 하는 문제풀이 조언이지만, 사료 파악 문제는 사료에서 핵심적인 개념들을 잡아내면 파악하기가 무척 쉬워집니다.
이 문제도 마찬가지니 한번 파악해 보죠.
(가)의 핵심 개념은 '백운평...6일간 치열한 전투'입니다.
백운평은 청산리 대첩의 첫 전투가 시작된 곳입니다.
청산리 대첩은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 군정서와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 그리고 여러 독립군 부대가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6일 동안 첫 전투인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 전투, 어랑촌 전투 등 1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던 독립 전쟁사상 가장 큰 전투였습니다.
(나)의 핵심 개념은 '미쓰야'입니다.
일제는 독립군을 탄압하기 위해 만주 군벌과 문제에 주어진 내용을 골자로 하는 미쓰야 협정을 체결합니다(1925).
이로 인해 만주와 간도 지역에서 활동하는 독립군 부대들은 일본 군경뿐만 아니라 현상금을 노리는 만주 군벌 경찰의
감시와 탄압도 피해야만 했기 때문에 활동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다)의 사료를 보면 한국군과 중국군이 연합하여 대일 항전을 한다는 한·중 연합 작전의 내용임을 알 수 있어요.
제시된 사료는 한국 독립군과 항일 중국군의 합의 내용의 일부입니다(1931).
만주에서는 1920년대 말 전개된 3부 통합 운동의 결과로 조선 혁명당과 한국 독립당이 결성되었고, 그 산하에 조선
혁명군과 한국 독립군이 편성되었어요. 일제가 만주 사변(1931)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하고 만주국을 세우자, 두 독
립군 부대는 항일 중국군과 연합 작전을 전개하여 여러 차례 일본군을 격퇴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북만주의 한국 독립군은 지청천의 지휘 아래 중국군과 연합하여 쌍성보 전투, 사도하자 전투, 대전자령 전투에서 일
본군을 격파하였습니다.
남만주에서는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 혁명군이 영릉가 전투, 흥경성 전투에서 항일 중국군과 힘을 합쳐 일본군을
격퇴하였습니다.
(라)의 핵심 개념은 '대한 독립군단 조직', '적색군(소련 공산당 군대)의 공격으로 큰 피해'입니다.
이를 통해 자료가 자유시 참변(1921)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청산리 대첩에서 패배한 직후인 1920년 10월 말부터 일본군은 독립군의 근거지를 없앤다는 명분으로 간도의 한인
동포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집과 학교 등을 불태우는 반인륜적 만행을 저질렀는데 이를 이를 간도 참변이라 합니다.
간도 참변으로 활동이 어려워지고, 동포 사회에 피해를 주는 것을 피하기 위해 소련·만주 국경 지대인 밀산부에 집결
하여 독립군은 부대를 재정비해 1921년 4월 대한 독립 군단을 결성한 후 소련령으로 이동합니다.
독립군은 헤이룽 강 연안의 자유시로 이동하였으나 독립군 내부의 군 지휘권을 둘러싼 분쟁 과정에서 소련군의 공격
을 받아 이른바 자유시 참변을 당하였습니다(1921. 6)
이를 시기 순으로 연결하면 (가)-(라)-(나)-(다)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10회 고급 46번 문제
46. 1920~30년대 항일 무장 독립 운동 단체 답④
제시된 도표는 1920~30년대 만주 지역에서 독립 운동 단체들의 계보를 나타낸 것이죠.
봉오동, 청산리 대첩 이후 간도 참변, 자유시 참변 등의 시련을 겪은 독립 운동 단체들은 효과적인 항일 투쟁을 위해 통합을 추진 여러 독립 운동 단체들이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3부로 통합되게 되죠. 이들 3부는 자치를 담당하는 민정 기관과 독립군의 훈련과 작전을 담당하는 군정 기관으로 갖춘 자치 정부의 성격을 가졌어요.
(가)는 신민부를 결성한 독립운동 단체이므로, 김좌진 중심의 북로군정서가 중심이 된 대한독립군단, 대한독립군정서를
주축으로 한 북만주 지역의 독립 운동 단체들이 해당됩니다. 이들은 1925년 3월 신민부를 결성합니다.
(나)에 들어갈 3부 중 하나는 참의부로, 참의부는 임시정부의 직할부대로, 임시 정부로부터 군정부로 승인받았죠.
(다)는 국민부입니다. 1920년대 후반 국내에서는 신간회가 조직되자 국외에서도 민족 유일당 운동의 기치 아래 활발한
통합 운동이 일어나 1928년 국민부(남만주)와 혁신 의회(북만주)로 통합됩니다.
국민부는 정의부 주력파와 참의부, 신민부 일부 인사들이 통합되어 조직되고,
혁신 의회는 신민부 군정파와 정의부, 참의부 일부 인사들이 통합되어 결성됐죠.
(라)는 1930년 조직된 한국 독립당으로 그 산하 무장 독립군 조직으로 한국 독립군을 편성했어요.
이들은 1930년대 들어 일본이 만주를 침략(만주 사변(1931))을 일으키자 한, 중 연합 작전을 폈답니다.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 독립군은 중국 호로군과 연합해 쌍성보·사도하자·동경성·대전자령 전투에서 승리하였어요.
만주 사변(1931)으로 이 지역에서 활동이 어려워지자 1930년대 후반 중국 본토로 이동해 임시 정부에 합류합니다.
ㄱ - 자유시 참변 이후 만주로 돌아온 독립군들이 조직을 정비해 3부를 결성하자 일제는 독립군을 탄압하기 위해 만주
지역의 중국 군벌과 미쓰야 협정을 체결합니다.
(가)는 미쓰야 협정 이전의 독립 운동 단체이므로 틀린 내용입니다.
ㄷ - 혁신 의회, 국민부는 개인 본위로 통합한 결과 성립된 것이 아니라, 민족 유일당 운동의 기치 아래 통합 운동이
일어나 결성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3부의 성립과 독립 운동
(1) 3부의 성립 : 만주 지역 독립 단체들을 통합 → 3개의 군정부 성립
① 참의부(1923) : 임시 정부의 직할 부대 표방(압록강 건너편 지역)
② 정의부(1924) : 남만주의 길림, 봉천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
③ 신민부(1925) : 자유시 참변을 겪고 돌아온 독립군 중심(북만주 일대)
(2) 3부의 성격과 의의
① 자치를 담당하는 민정 기관과 독립군의 훈련과 작전을 담당하는 군정 기관을 갖춤
→ 무장 독립군을 편성하여 독립 전쟁 전개
② 북간도를 제외하고 전체 만주 지역을 나누어 통치한 사실상 3개의 자치 정부임
(3) 3부의 통합 민족 유일당 운동의 기치 아래 1928년 국민부와 혁신의회로 통합
① 국민부 : 정의부 주력파와 참의부·신민부 일부 인사들이 통합 → 조선 혁명당 조직 → 조선 혁명군 결성
② 혁신 의회 : 신민부 군정파와 정의부·참의부 인사들이 통합 → 김좌진을 중심으로 한족 총연합회 구성
→ 한국 독립당 조직 → 한국 독립군 결성
8회 고급 45번 문제
45. 각 시기 항일 무장 투쟁의 특징 답④
각 시기 항일 무장 투쟁의 특징을 파악하는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를 어려워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은데, 이 문제를 풀면서 시기별로 알아두시죠.
(가) 1910년대 : 간도, 남만주(서간도), 소·만 접경 지역, 연해주 지역 등에 조선인 집단 거주지가 형성되고,
이를 바탕으로 독립군 기지, 학교들이 건설됩니다.
(나)~(다) 1920년대 : 만주와 간도에서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 등 독립군이 일본군에게 승리(1920)를 거둔 후 간도
참변(1920), 자유시 참변(1921), 미쓰야 협정(1925) 등의 시련기를 거쳐 3부(참의부, 정의부, 신민부)가 성립되죠.
(라) 1930년대 초, 중반 : 만주 사변(1931)으로 일제가 만주를 점령하자 조선 혁명군과 한국 독립군은 항일 중국군과
한·중 연합 작전을 전개해 크고 작은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마) 1930년대 후반~광복 : 조선 의용대(1938), 한국 광복군(1940), 조선 의용군(1942)이 활약한 시기입니다.
① 대한 광복회는 박상진, 김좌진 등이 1910년대에 국내에서 조직한 비밀 결사 단체입니다.
이 당시 세워진 무관 학교는 삼원보에 세워진 신흥 무관 학교인데, 이는 신민회 출신 독립 운동가들이 세웠죠.
② 조선 의용대(1938)는 조선 민족 혁명당(1937) 산하에 조직된 독립군 부대입니다.
③ 한국 광복군의 국내 정진군 편성과 국내 진입 작전 계획은 1940년대의 일입니다.
④ 1930년대 초반에 한국 독립군과 조선 혁명군은 한·중 연합 작전을 전개해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⑤ 북로 군정서의 대표적 승리인 청산리 대첩은 1920년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7회 고급 47번 문제
47. 조선 민족 전선 연맹(1937) 답④
제시된 자료는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의 창립 선언문입니다(1937. 12.)
일제가 만주 사변을 일으켜(1931) 만주를 점령하자 이곳에서 활동하던 무장 독립운동 단체들은 중국 관내로 이동하였습니다. 이후 중국 관내의 독립운동 세력은 일본에 맞서 모든 세력을 하나로 통합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져 조소앙이 이끄는 한국 독립당, 김원봉의 의열단, 만주에서 이동한 지청천의 조선 혁명당 등이 참여하여 민족 혁명당을 조직하였습니다. 민족 혁명당은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가 참여한 중국 관내 최대의 통일 전선 정당이었지만,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시 정부 고수파가 참가하지 않았고(당시 조선 민족 혁명당은 완전한 통일 전선을 만들기 위해 각 단체들은 물론, 임시 정부도 해체할 계획을 세웠었습니다), 좌경화된 의열단 세력이 주도권을 잡자 조소앙, 지청천 등이 이탈함으로써 힘을 잃었습니다.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1937) 민족 혁명당을 계승한 조선 민족 혁명당을 중심으로 통합에 찬성하는 좌익 단체들은 한구에서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을 결성하였습니다. 1938년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군사 조직으로 조선 의용대 3개 지대를 조직하고 정보 수집, 포로 심문, 후방 교란 등 중국군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였습니다.
ㄱ - 조선 민족 연맹 전선은 의열단을 이끌었던 김원봉이 주도한 민족 혁명당이 주도로 조직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이끌고 있던 김구 등은 민족 혁명당 등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ㄴ -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은 산하에 군사 조직으로 조선 의용대를 조직하였습니다(1938).
조선 의용대는 의열단이 설립하였던 조산 혁명 간부 학교 출신들을 중심으로 하였으며, 주로 중국군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였어요.
ㄷ -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은 좌우 합작 단체가 아니라, 사회주의 계열 단체들이 연합하여 결성하였습니다.
ㄹ -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은 약화된 민족 통일 전선의 강화를 위한 움직임 속에서 창립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ㄴ, ㄹ로 묶인 ④번입니다.
5회 고급 35번 문제
35. 중국 관내, 만주에서의 무장 항일 운동 답⑤
이 문제는 각 사실들을 답지를 통해 하나씩 설명하겠습니다.
① 황포 군관 학교는 중국 국민당의 장개석이 설립한 군사 학교로서, 여기서는 의열단을 이끌었던 김원봉 등이 입교하여
교육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② 김구는 국민 대표 회의(1923) 이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침체에 빠지자, 국면 전환을 통해 이를 극복하고자 상하이
에서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였습니다(1931).
③ 1920년대 의열단을 이끌던 김원봉은 1930년대 들어 황포 군관 학교를 마치고 중국 관내에서 민족 혁명당이라는
민족 유일당을 조직합니다(1935).
이후 조선 민족 혁명당을 결성하고(1937) 조선 민족 연합 전선을 구축한 후 그 산하에 조선 의용대라는 군사 조직을
창설합니다(1938).
④ 한국 독립군은 북만주를 무대로 지청천이 이끌며 쌍성보, 사도하자 전투에서 중국 호로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던 독립군 부대입니다.
⑤ 조선 혁명당의 군사 조직인 조선 혁명군은 양세봉이 이끌었던 독립군 부대입니다.
이들은 중국 의용군과 연합하여 영릉가 전투와 흥경성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승리하였어요.
지청천의 지휘 아래 쌍성보, 사도하자, 대전자령 전투 등에서 승리한 것은 한국 독립군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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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부분! 알기 어려웠는데 자세한 설명 항상 감사드려요^^ 좋은 하루되세요
댓글은
감사합니다....라는 글은 달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문제에 대한 난이도, 자료 등에 대한 느낌이나
개인적인 문제풀이 접근법 등을 달아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유의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댓글 단 분은 등업 안됩니다.
중일연합투쟁도 단골인듯요.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은 따로
연합한 중국군과 전투를 정리해서
암기해두실 필요가 있는 듯.
제가 공부하기 가장 힘들었던 부분인데요.
쓰리 봉~ 샘들 너무 헷갈렸다는요ㅠㅠ
김원봉, 김두봉, 양세봉~
한국사 공부 이제 시작하는데도 이해하기 쉽네요! 특히 독립운동단체는 이름도 비슷해서 헷갈리기도 하는데 표로 정리해주니까 너무 좋네요^^
독립단체 부부은 이름이 너무 헷갈려요 ㅠ_ㅠ 여러번 봐서 눈에 익혀야겠어요
사실 한국사 공부를 처음 시작하는데.. 조선 쪽도 상당히 생각했던 것보다 양이 많네요 ㅠ ㅠ 그래도 이것 보고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다같이 화이팅해요
독립단체 열심히 암기만 했지 정확하게 구분을 하진 못했던것 같아요..
문제 풀때마다 자꾸만 틀려서 해설을 찾게 되는데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강의를 들었어도 너무 헷갈리는거는 어쩔수 없는걸까요??
혹시 쉽게 암기는 방법 팁이 있다면 그것두 알려주면 진짜 너무 좋을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와 그냥 간단한 문제 해설뿐 아니라 관련된 일들 까지 정리해주시니 이해가 쏙쏙 잘 될것 같습니다.
아직 공부시작 전인데 한국사 사랑방과 함께하면 훨씬 효율적인 공부가 가능할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역사적 지식을 제대로 공부할수있어서 좋네요 ^^
저에겐 역사적 시기와 지도 문제가 어렵네요. 특히 꼼꼼하게 공부해야 할거같아요. 그래도 설명이 자세하게 나와있어서 도움 많이 되었습니다. 열심히 암기해야겠어요
초심자인 제가 보기엔 다소 어려운 문제이지만 상세한 해설 덕분에 어렵지 않게 이해 할 수 있네요.
너무 자세한 설명으로 그냥 머리에 팍팍 들어오네요. 시간의 압박이 문제네요.
해설이 친절해서 좋습니다 ㅎ
더 열심히 해야겠어요~~!!
정리가 정말 잘되어 있네요 많이 배우고 갑니다. ㅎ
1930년대 무장투쟁은 자주 출제 되는 부분이죠 ㅎㅎ
너무 정리가 잘되어 있어서 좋아요 ^^
정말 감사합니다. 한국사에서 정말 외우기 힘든부분인 조선후기 정치 변화, 식민지 시대 투쟁부분 깔끔하게 정리된거 같습니다.
표로 깔끔하게 정리해주셨네요 나중에 다시한번 제대로 정독해야겠습니다
독립군 활동 부분을 어려워하는 편이라... 열심히 해야겠네요 ㅠ
독립군 부대가 특히 헷갈려요. 조선, 독립, 광복 이름이 다 비슷비슷해서... 문제 계속 푸는 수 밖에 없나봐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