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국어의 상실과 열병
─아고타 크리스토프(Kristóf Ágota)와 그의 작품 『문맹』
<목차>
1. 아고타 크리스토프에 대하여
2. 『문맹』의 시대적 배경
3. 작품 해설
4. 낭독
5. 토론
6. 참고문헌
<본론>
1. 아고타 크리스토프에 대하여
스위스에 거주하면서 프랑스어로 글을 썼던 헝가리 출신의 소설가, 1935년 10월 헝가리의 시골마을인 치크반드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빈곤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1956년 헝가리 혁명의 여파를 피해 남편과 4개월 된 딸을 데리고 헝가리를 떠나 오스트리아를 거쳐 스위스의 뇌샤텔로 이주한다. 생계를 위해 시계 공장에서 일하면서도 『헝가리 문예』에 시를 발표하고, 프랑스어를 배우며 희곡과 소설을 써나간다. 1987년 첫 번째 소설인 『비밀 노트』를 출간하고, 5년에 걸쳐 『타인의 증거』와 『50년 만의 고독』을 완성한다. 이 3부작은 40여 개 언어로 번역되며 큰 성공을 거둔다(한국에서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라는 제목으로 소개). 이후 여러 편의 소설과 희곡 작품을 출간하며 1992년 리브르 앵테르상, 2001년 고트프리트켈러상, 2005년 쉴러상, 2008년 오스트리아 유럽 문학상, 2011년 코슈트상 등을 수상한다. 2011년 7월 뇌샤텔에서 일흔다섯 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1)
2. 『문맹』의 시대적 배경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1935년 헝가리에서 태어났다. 그 즈음 헝가리에는 세계 2차대전의 여파가 잔존하고 있었다. 헝가리는 제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 패배의 대가로 영토의 70퍼센트 이상을 주변국에게 할양하거나 신생국에게 내줬다. 헝가리는 과거의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추축국에 가담하게 된다. 추축국에 가담한 이후 헝가리는 회담에서 주변 영토를 양도받고 헝가리인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을 합병하는 등 영토를 회복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헝가리는 독일의 소련 침공 이후에 계속되는 실패 이후 추축국 탈퇴를 결정하지만 이를 알아챈 아돌프 히틀러가 헝가리의 유전 지대를 점령하고 항복을 받아내었다. 헝가리가 소련에 항복하자 헝가리는 연합국으로 참전하게 된다.
2차 대전 직후 독일에 점령당한 헝가리의 수도였던 부다페스트는 폐허가 되었고 헝가리 동부는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또한 항공기 생산 공장과 각종 정유공장이 있었던 각종 산업단지들은 연합국의 폭격을 맞고 처참하게 부서졌다. 이러한 경제 상황 속에서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빈곤한 유년기를 보냈다.
헝가리 혁명은 1956년 10월 23일 부다페스트에서 자유를 갈구하는 시민들의 함성으로 발발했다. 학생·노동자·시민은 스탈린주의 관료집단과 공포 정치에 반대해 반 정부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스탈린 동상을 파괴하는 등 반정부 이념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1956년 크리스토프는 이러한 헝가리 혁명의 여파를 피해 모국을 떠나 오스트리아로 떠나게 된다.
작가가 이주한 오스트리아는 헝가리 난민들을 받아주고 일할 자리를 준다. 아고다 크리스토프는 시계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도 집필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는 오스트리아를 거쳐 스위스의 뇌샤텔로 망명하게 되고, 프랑스어라는 새 언어를 만나게 된다.
3. 작품 해설
『문맹』은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평생 적의 언어로 글을 써야했던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문학적 언어적·정체성에 대해 다룬 에세이다. 그 본인은 『문맹』이 그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덜 문학적인 작품이라고 밝혔으나, 일생동안 포기하지 않고 적의 언어와 투쟁하며 문학이라는 길을 끝내 놓지 않은 그의 삶은 그 자체로 이미 문학적으로 아름답다.
내 나라를 떠나지 않았다면 나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더 어렵고, 더 가난했겠지만, 내 생각에
는 또 덜 외롭고, 덜 고통스러웠을 것 같다. 어쩌면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어디에서건 어떤 언어로든지 나는 글을 썼으리라는 사실이다.
 ̄『문맹』 p.52
그렇기에 태어나서 52세 나이로 작가로서의 성공을 거두기까지 그의 삶이 특유의 투명한 문장으로 드러나 있는 이 에세이는 그의 다른 소설, 혹은 다른 작가의 다른 창작물과는 피교할 수 없는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나는 앞서 외국어로 책 읽는 행위가 주는 두려움과 해방감을 바다에서 헤엄치는 일에 비유했다.
하지만 그것은 독서에 국한된 비유일 뿐, 나는 외국어로 문학작품을 쓰는 일이 줄 절망과 고통의
크기에 대해서는 감히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하지만 살점을 발라낸 뼈대처럼, 어둠 속에 번쩍이
는 벼려진 칼처럼 간결하고도 수식 없는 문장들을 나의 모국어로 번역하기 위해 몇 번이나 다시
읽는 동안 나는 그런 작업은 지평선을 바라보며 검붉은 대지 위를 걷는 것과 비슷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운명이 쥐어준 언어를 단도처럼 가슴에 품은 채, 두눈을 뜨고 태양이
솟는 지평선, 영원히 닿지 않을 것 같은 그 끝을 향해 한 발 한 발 내딛는. 그것은 여행일까. 고
행일까.”.
 ̄『문맹』 p.125-126
4. 낭독
취리히의 난민 센터에서 우리는 스위스의 여기 저기로 ‘분배된다’. 그런 식으로, 우연히, 우리는
마을의 주민들이 가구를 가져다 꾸며준 두 칸짜리 아파트가 기다리는 뇌샤텔, 좀 더 정확히 말하
면 발랑쟁에 도착한다. 몇 주 뒤, 나는 퐁텐멜롱에 위 치한 시계 제조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나는 5시 반에 일어난다. 아기를 먹이고 옷을 입 히고, 나 역시 옷을 입고 공장까지 나를 데려다
주는 6시 반 버스를 타러 간다. 나는 아이를 어린이 집에 맡기고 공장에 들어간다. 공장에서는 저
녁 5시에 나온다. 나는 어린이집에서 딸아이를 찾고, 버스를 다시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마을의
작은 가게에서 장을 보고, 불을 피우고(아파트에는 중앙 난방이 들어오지 않는다), 저녁 식사를 준
비하고, 아이를 재우고, 설거지를 하고, 글을 조금 쓰고, 나 역시 잠을 잔다. 시를 쓰는 데는 공장
이 아주 좋다. 작업이 단조 롭고,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으며, 기계는 시의 운 율에 맞춰 규칙적인
리듬으로 반복된다. 내 서랍 에는 종이와 연필이 있다. 시가 형태를 갖추면, 나 는 쓴다. 저녁마다
나는 이것들을 노트에 깨끗이 정리한다. 공장에는 열 명 남짓의 헝가리인이 일하고 있 다. 우리는
점심시간에 구내식당에서 만나지만 우리가 익숙하게 먹던 음식과 너무 달라서 거의 식 사를 하지
않는다. 나의 경우, 적어도 1년 동안은 점심 식사로 빵과 우유를 탄 커피만 먹는다. 공장에서는
모두들 우리를 친절히 대한다. 사람 들은 우리를 보면 웃고, 우리에게 말을 건다. 하지 만 우리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사막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사회적 사막, 문화적 사막. 혁명과 탈주의
날들 속에서 느꼈던 영광이 사라지고 침묵과 공백, 우리가 중요한, 어쩌면 역 사적인 무언가에 참
여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했던 나날들에 대한 노스텔지어, 고향에 대한 그 리움, 가족과 친구
들에 대한 그리움이 뒤따른다. 우리는 이곳에 오면서 무엇인가를 기대했다. 무 엇을 기대하는지는
몰랐지만 틀림없이 이런 것, 활기 없는 작업의 나날들, 조용한 저녁들, 변화도 없고 놀랄 일도 없
고 희망도 없는 부동의 삶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다. 물질적으로 보면 우리는 예전보다 조금 더 잘
살고 있다. 우리는 방 하나 대신 두 개를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는 석탄이 충분하고 음식도 넉넉
하다. 그렇지만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비하면 너 무 비싼 값을 지불한 셈이다. 아침의 버스 안
에서 검표원은, 매일 아침 보는 뚱뚱하고 유쾌한 검표원인데,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내 옆에 앉
아 나에게 말을 한다. 나는 잘 이 해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그가 나에게 스위스가 소련인들이 여기
까지 오지 못하도록 할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나를 안심시키려고 한다는 것 정도는 이해한다. 그는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더 이상 슬퍼할 필요도 없고, 내가 지금 안전하다 고 말한다. 나
는 웃는다. 나는 그에게 소련인들이 무섭지 않고 만약 내가 슬프다면 그것은 오히려 지금 너무 많
이 안전하기 때문이라고, 직장과 공 장, 장보기, 세제, 식사 말고는 달리 생각할 것도, 할 것도 없
기 때문이라고, 잠을 자고 내 나라 꿈을 조금 더 오래 꿀 수 있는 일요일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달리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기 때문이라 고 그에게 말하지 못한다. 어떻게 그에게,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 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짧은 프랑스어로, 그의 아 름다운 나라가 우리 난민들에
게는 사막, 사람들이 ‘통합’이라든지 ‘동화’라고 부르는 것에 다다르기 위해서 우리가 건너야만 하
는 사막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을까. 그때까지 나는 어떤 이 들은 끝끝내 거기에 도달
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미 처 알지 못했다. 우리 중 둘은 징역형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음에 도 헝
가리로 돌아갔다. 다른 둘은, 젊은 미혼의 남성들이었는데, 더 멀리 미국과 캐나다로 떠났다. 다른
네 명은 더 멀리, 우리가 갈 수 있는 한 가장 멀리, 가장 높은 경계선 너머까지 갔다. 이 네 명
의 지인들은 우리 유배 시기의 첫 두 해 사이에 죽음을 선택했다. 그중 하나는 바르비투르산 수면
제로, 다른 한 명은 가스로, 나머지 둘은 끈으로, 그중 가장 젊은 사람은 열여덟 살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지젤이었다.
 ̄『문맹』 p.85-92
뭔가 읽을 것이 있을 때면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나는 계속 읽고, 그러고 나면 울면서 잠든 밤 사
이에 문장들이 태어난다. 문장들은 내 곁을 맴돌다, 속삭이고 리듬과 운율을 갖추고, 노래를 부르
며 시가 된다.
어제, 모든 것은 더 아름다웠다.
나무들 사이의 음악
내 머리카락 사이의 바람
그리고 네가 내민 손안의
태양.
 ̄『문맹』 p.34
5. 토론
『축복받은 집』(1999)으로 오헨리문학상, 펜/헤밍웨이문학상, 퓰리처상을 석권한 줌파 라히리(Jhumpa Lahiri)는 아고타 크리스토프와 다르게 글쓰기 언어를 본인의 의지로 바꾼 작가다. 그는 1994년 피렌체 여행 도중 거리에서 들은 이탈리아어에서 기이하게도 친숙함을 느낀다. 미국으로 돌아와 작품을 집필하면서 계속 이탈리아어를 공부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줌파의 이탈리아어에 대한 욕망을 채울 수 없었다. 결국 그는 2012년 여름, 가족과 함께 로마로 이주하였다. 이주 6달 전부터는 모국어인 영어를 버리고 이탈리아어로만 글을 읽었고, 이주한 이후에는 그것으로만 작품을 썼다. 이탈리아어 사전을 뒤져가며 글쓰는 험난한 과정이었지만, 줌파는 아주 완전하고 원초적인 작문의 기쁨을 느낀다.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는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활동한 소설가·극작가이다. 그는 기타 외국어를 전공하긴 했지만, 글은 모국어인 영어로 썼다. 그러나 그는 “내 모국어는 글을 쓰기 위해, 혹은 그 뒤에 있을 공허함을 위해서 찢어야 할 베일처럼 느껴진다. (중략) 그것들은 기교, 혹은 탈을 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2) 고 말한 뒤, 프랑스어로 작품을 집필했다. 그에게 있어서 모국어를 버리고 외국어로 자신의 작가로서의 영혼을 바꾼 일은, 일종의 문학·예술 차원의 도약이었다.
이렇게 아고타 크리스토프와 두 작가의 사례를 보며, 학우분들의 생각을 묻고 싶다. 여러분은 과연 주체적이든 강제적이든 간에, 어떤 이유에서든 본인의 모국어를 버리고 외국어로 글을 쓸 수 있는가? 또한 그 과정에서 따라오는 감각은 아고타 크리스토프처럼 고통스러울까, 아니면 줌파 라히리처럼 환희에 젖어 있을까.
6. 참고문헌
아고타 크리스토프, 『문맹』, 한겨레출판, 2018
David Shields, 『reality Hunger』. Alfred A. Knopf. 2010
위키백과, “1956년 헝가리 혁명” https://ko.wikipedia.org/wiki/1956년_헝가리_혁명 (접속일: 2019년 3월 10일)
최재봉, 「줌파 라히리가 이탈리아어로 ‘망명’한 이유」, 한겨레, 2015 (접속일: 2019년 3월 10일)
편서풍을 타고 뉴욕으로 가면서 생각했다. 동쪽으로 태평양을 건널 때 우리는 운명에 순응한다고. 바람에 맞서는게 아니라, 길들이고 부린다. 하지만 지금 만나러 가는 작가는 서쪽으로 태평양을 건너는 중이다. 바람을 거스르고, 운명에 저항한다. 미국 프린스턴대학 줌파 라히리(50) 문예창작과 교수. 퓰리처상을 받게해 준 영어를 버리고, 2년 전부터 유전적 인연 전혀 없는 이탈리아어로 산문과 소설을 쓰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도 번역된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와 ‘책이 입은 옷’이 그 열매다. 줌파의 데뷔작인 소설집 ‘축복받은 집’은 2000년 퓰리처상을 받았고, 45개국어로 번역됐다. 미국에서 소설을 가장 잘 쓰는 작가라는 칭찬은 부담스럽겠지만, 영어를 가장 능란하게 구사하는 작가 중 한 명임을 부인할 독자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프린스턴 대학 뉴사우스 빌딩 6층에 있는 ‘작가의 방’을 찾았다. 방문에는 사무엘 베케트(1906~1989)의 엽서 크기 사진이 붙어 있다. 아일랜드 출신인데도 프랑스어로 작품을 쓰며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작가.
―베케트다.
“(미소지으며) 맞다. 대학 시절부터 나는 그가 좋았다. 영어를 그렇게 잘 쓰면서도, 자발적으로 튕겨져 나와 프랑스어로 글을 썼던 작가. 그런데도 그렇게 잘 썼다.”
줌파의 부모는 벵갈 출신 인도인. 런던으로 이민가서 그녀를 낳았고, 줌파 두 살 때 다시 미국 로드 아일랜드로 일자리를 찾아 떠난 뒤 정착했다. 그러므로 공식적으로 줌파는 인도계 미국인. 바너드 대학에서 영문학을, 보스턴대 대학원에서 소설을 전공했고, ‘축복받은 집’ ‘저지대’ ‘그저 좋은 사람’ ‘이름 뒤에 숨은 사랑’까지 4권의 장편과 단편집을 영어로 썼다.
―당신은 운명을 거스르는 자일까. 낳아준 인도, 키워준 미국도 아닌, 혈연관계 전혀 없는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다니.
“신비한 과정이지. 나는 이탈리아에 완전한 타인이다. 살아본 적도 없고, 친구도 없었다. 내 운명을 다시 재건축하고 싶었다. 내면의 목소리에 따랐을 뿐이다. 그 목소리에 순응하자, 감정이 깊어지고, 강해졌다. 2015년 이후 나는 영어로는 소설과 산문을 발표하지 않았다. 현재로서는 계획도 없고. 대신 이탈리아어 소설 40여편을 썼다. 연말쯤 책으로 묶을 계획이다.”
보스턴대 박사과정 시절, 줌파의 논문 주제는 르네상스 건축과 문학이었다. 1994년 줌파와 그 여동생은 이탈리아 여행을 스스로에게 선물하겠다고 마음먹었고, 피렌체를 선택했다. 이탈리아와의 첫 만남이었다. “전혀 모르는 언어였는데, 번개에 맞은 느낌이었다. 무분별한, 말도 안되는 열망을 불러 일으켰다”고 했다.
―무분별한 열망 때문에 다른 짝(언어)을 탐하다니. (웃으며) 바람 피운 것 아닌가.
“(웃으며) 나는 영어를 내 남편이라고 믿은 적이 없다. 모국어가 없다, 내게는. 얼핏 엄마가 두 명이라 볼 수도 있겠지. 벵골어와 영어. 그런데 둘 다 모국어라 생각하지 않는다. 차라리 고아 같다. 웃기지 않나. 미국은 늘 자신이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왜 다른나라 말로 쓰는지, 그러고 싶어하는지,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지.”
줌파가 고개를 들어 엽서 속의 베케트를 본다. 짧고 날카로와 송곳같은 머리, 반항 가득한 눈빛. 아일랜드는 800년 동안 잉글랜드의 식민지였다. 게일어를 쓰는 아일랜드에게 영어는 제국의 언어. 베케트는 프랑스에 귀화했고, ‘고도를 기다리며’를 비롯한 소설과 희곡을 영어와 프랑스어로 번갈아 썼다.
―다시, 당신에게 베케트는.
“이탈리아어를 선택하고 공부하면서, 자유를 느꼈다. 물론 영어보다 능숙하지는 않지. 하지만 뭐랄까. 꽃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활짝 핀 순간이 아니라, 피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과정 중에 일어난다. 영어는 차라리 컴플렉스였다. 베케트는 영어를 거부했고 불어를 선택했지. 아마 지축을 흔드는 경험이었을 거다. 베케트의 여정이 내게 용기를 줬다.”
꼽아보면 베케트 뿐이었을까. 헝가리 출신이지만 불어로 소설을 썼던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의 아고타 크리스토프, ‘롤리타’를 영어로 쓴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우크라이나 출신이면서도 영어를 가장 잘 구사하는 미국 작가 3인 중 한 명으로 꼽혔던 ‘로드 짐’의 조셉 콘래드…
―’이중언어 작가클럽’ 막내 선언인 셈?
“글쎄. 나보코프는 분명 영어보다 러시아어를 잘했을 거다. 아고타 역시 불어보다는 헝가리어를 잘했겠지. 그들이 용기를 준건 맞지만, 그들과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한다. 나는 더 작고 좁은 언어로 들어왔으니까. 헝가리어를 읽는 사람들은 불어를 쓰는 사람보다 적지 않았을까. 러시아나 우크라이나보다는 영어권 독자가 더 많지 않을까. 이탈리아? 상대적 소수다. 하지만 위험이 없으면 자유도 없는 법. 익숙한 언어로 더 잘 쓴다는게 내 미래는 아니었다. 나를 표현할 새로운 방법을 찾았을 때, 나는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화제를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으로 옮겼다. 그가 줌파의 오랜 독자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 오바마 재임 초기에는 ‘대통령 직속 예술 인문 위원회’의 6인 위원 중 한 명으로 임명받은 바 있다.
―어떤 일을 했나.
“문학, 연극, 클래식 등 학교에서 예술을 직접 체험하거나 창작할 수 있도록 돕자는 취지였다. 청소년의 예술 창작 의지를 북돋고,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공교육에서의 예술 부문 강화라고 할까. 오바마와 나는 문화와 예술에 대한 비전을 공유했다. 그는 정열적인 리더이자 작가다.”
‘작가들의 작가’로까지 불리는 줌파지만, 문학 바깥의 삶은 어떨까. 미 유력지 ‘타임’의 남미 전문 기자와 결혼한 그는 고교생 아들과 중학생 딸이 하나씩 있다.
―당신의 아이들도 책을 좋아하나.
“아들이 열한 살 될 때까지 매일밤 책을 읽어줬다. 남편이랑 나랑 하루씩 교대로.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 이제는 아이들이 크고 나니, 아이들이 우리에게 책을 읽어준다. 내가 요리할 때면, 딸이 책을 읽는다.”
―검색하면 모든 걸 찾을 수 있는 스마트폰 세상이다. 왜 굳이 문학을, 책을 읽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대답 대신 자신의 방에 붙어 있는 포스터 하나를 손으로 가리켰다. ‘The Purpose of the writer is to keep civiliztion from destroying itself’라는 알베르 카뮈의 ‘다짐’이 굵고 큰 글씨로 적혀 있다. “문명이 스스로를 망가뜨리지 못하도록 막는 게 작가의 임무다.”
“나는 예술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시켜주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독서라고 생각한다. 아빠가 기자고 엄마가 소설가니까, 우리 아이들은 부모가 집에서 책 읽는 걸 매일 봤다. 건강한 경험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부모가 하지 않으면서,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건 옳지 않다. 뇌과학이 인간의 감정 메커니즘을 설명하고 있고, 곧 해결할 거라는 이야기가 많다. 하지만 나는 인간의 감정을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문학이라고 믿는다. 문학으로 타인의 감정을 배웠고, 나의 감정을 이해했다. 문학이 타인을 구원할지는 함부로 말할 수 없지만, 최소한 나를 구원했다.”
줌파가 프린스턴 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임명받은 지 만 1년이 지났다. 한국과의 인연을 물었을 때, 그는 자신의 책상에서 서류 더미를 꺼냈다. 학생들 기말시험 과제로, 자신이 좋아하는 외국 작가의 단편을 영어로 번역한 뒤 리뷰를 쓰는 것이라 했다. 줌파는 발음을 힘들어했지만, 살펴보니 한국 작가 김연수와 윤고은의 단편이었다. 그는 “한국에는 아직 한 번도 가본 적 없지만 이렇게 인연이 생기고 있다”면서 “한국 작가의 작품을 읽어본 건 처음이지만, 흥미로운 에너지가 가득하고 시각도 신선하다”고 했다.
6층 창문으로 오후 5시의 햇빛이 스몄다. 그녀가 아이들 저녁 챙겨줄 시간이라며 가죽 점퍼와 라이더용 헬멧을 챙긴다.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니, 건물 앞 거치대에 그녀의 민트블루 자전거가 있다.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작가. 자신의 언어로 규정하지는 않았지만, 줌파가 작가로서 가장 도망가고 싶었던 건 ‘자기복제’와 ‘동어반복’으로서의 문학이 아니었을까.
창작자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익숙함. 기술자라면 숙련이 반갑겠지만, 예술가에게 반복은 독이다. 줌파가 편애하는 베케트는 왜 프랑스어로 쓰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문체 없이 쓸 수 있으니까. 엄청난 자유가 그 안에 있다.”
헬멧을 쓴 줌파가 두 바퀴로 달려갔다. 스스로를 동력 삼아 달리는 자유. 석양 무렵의 햇살이 자유롭게 부서졌다.
1) 아고타 크리스토프, 『문맹』, 한겨레출판, 2018, 작가 소개
2) David Shields, 『reality Hunger』. Alfred A. Knopf.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