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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국현 영문학자와 세계 명작 소설을 읽으며 원작 속 영어 표현을 배워봅니다. 이번에는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를 함께 읽어봅니다. <편집실> 존 스타인벡(John Ernest Steinbeck, 1902~1968)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분노의 포도』는 대공황기의 미국 오클라호마(Oklahoma)의 농민들이 극심한 가뭄과 모래폭풍에 황폐해진 땅에서 거대 은행과 기업의 횡포에 시달리다 삶의 터전을 빼앗긴 채 새 삶을 찾아 서부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가는 과정에서 겪는 비극적 운명을 그린 작품입니다. 농민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황폐한 자연환경과 금융기관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조직의 몰인정하고 냉정한 특성에 대해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어떤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가족과 사회 공동체의 연대 필요성을 자각해가며 가족애와 인류애를 잃지 않는 인물들을 인상적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스타인벡은 1939년 출간한 이 작품으로 <퓰리처 상>과 <내셔널 북 어워즈>, 그리고 196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분노의 포도는 발매되자마자 50만부가 넘게 판매됐을 뿐 아니라 <20세기 폭스 영화사>가 동명의 영화로 제작하여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을 정도로 대중적으로도 크게 성공한 작품입니다 성서를 원형으로 한 배경과 구성 이 소설의 제목은 성서에서 나온 것입니다.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라는 제목은 「요한계시록」 14장 19절의 “the great wine-press of the wrath of God(하느님의 분노의 큰 포도주 통)” 같은 구절이나 「신명기」32장 32절의 “grapes of gall(쓰디쓴 포도)”을 떠오르게 합니다. ‘포도’는 하느님의 축복과 저주라는 양면성을 지닌 ‘포도주’를 연상케 하며, ‘분노’는 죄나 악을 벌하는 신성하고 영원불변한 하느님의 태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사랑과 더불어 신의 영속적인 속성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서부로 떠나는 13명의 사람들 즉, 12명의 조드(Joad) 가족과 케이시(Casy)는 예수와 열두 제자를 생각나게 합니다. ‘샤론의 장미(Rose of Sharon)’와 ‘노아(Noah)’도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과 이름이 같은데요. 케이시는 마치 예수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그가 하는 말들이 성서적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는 점도 이 작품이 성서와 연관된 점이 있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조드 일가가 고난을 피해 서부로 이주하는 것 자체가 바로 낙원을 찾을 꿈을 안고 복지 가나안으로 떠난 유대 민족의 이주와 겹칩니다. 구약성서에는 모세가 이집트인들의 핍박을 피해 유대인들을 이끌고 가나안복지를 찾아가는 출애굽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세의 인도하에 이집트를 떠나 벌판을 헤매며 오랜 여행 끝에 목적지인 가나안에 도착하지만, 그곳에서도 고생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고 하지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민족적 유대감은 깊어졌고, 단결된 공동체 의식을 바탕으로 그들은 좌절하지 않고 계속 생존해 갑니다. 『분노의 포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고향인 오클라호마의 땅을 빼앗기고 새 희망을 찾아 서부로 향하는 험난한 여정을 거쳐 톰 조드 일가가 도착한 캘리포니아는 약속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도착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겪은 고난과 시련은 톰 조드 일가는 물론 함께 한 공동체 구성원들의 삶에 대한 믿음과 의지를 단단하게 결속시켜 주지요. 이 작품은 전편이 30장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오클라호마의 가뭄(1장~10장)’, ‘캘리포니아를 향한 여행(11장~18장)’, 그리고 ‘캘리포니아에서 새 삶을 살고자 한 이주민들의 투쟁(19장~30장)’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체 30장 가운데 1,3,5장과 같은 홀수 장은 일종의 막간, 혹은 중간 장으로 본 줄거리와는 따로, 그 이야기의 배경을 이루는 일반적인 사회, 자연환경, 지리 조건을 압축해서 보여줍니다. 이야기의 본 줄거리는 짝수 장에서만 진행됩니다. 짝수 장과 홀수 장은 그 문체에 있어서도 서로 다른데요. 홀수 장은 때로 시적인 리듬을 구사하여 파노라마 같은 화폭을 펴놓으며 표준어를 사용한 평서문인 반면, 이야기가 전개되는 짝수 장은 대화가 많고 방언, 속어, 비어가 섞인 복잡한 어투로 구성돼 있습니다. 가뭄과 은행의 횡포 소설의 첫 장면은 오클라호마에 내리는 흙먼지에 쌓인 마을을 묘사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마을이며 농토가 모두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고, 사람들은 천천히 쌓여가는 먼지 속에서 숨죽이며 살아갑니다. When the night came again it was black night, for the stars could not pierce the dust to get down, and the window lights could not even spread beyond their own yards. Now the dust was evenly mixed with the air, an emulsion of dust and air. Houses were shut tight, and cloth wedged around doors and windows, but the dust came in so thinly that it could not be seen in the air, and it settled like pollen on the chairs and tables, on the dishes. The people brushed it from their shoulders. Little lines of dust lay at the door sills....In the morning the dust hung like fog, and the sun was as red as ripe new blood. All day the dust sifted down from the sky, and the next day it sifted down. An even blanket covered the earth. It settled on the corn, piled up on the tops of the fence posts, piled up on the wires; it settled on roofs, blanketed the weeds and trees. 다시 밤이 돌아왔을 때는 깜깜했다. 별은 흙먼지를 뚫고 비치지 못했고, 창문의 불빛들은 마당 너머 비추지 못했다. 이제 먼지는 공기와 골고루 섞여 먼지와 공기가 어우러진 곤죽이 되었다. 모든 집들은 문을 꽁꽁 닫았고, 문이며 창문마다 헝겊을 쑤셔 박아 넣었지만 먼지는 너무도 미세하게 들어와 공기 중에는 보이지도 않으면서 의자며, 식탁이며 접시 위에 꽃가루처럼 내려앉았다. 사람들은 어깨에서 먼지를 털어냈다. 문턱에는 가느다란 먼지 줄이 생겼다....아침에 흙먼지는 안개처럼 자욱했고, 태양은 무르익은 선혈처럼 붉었다. 하루 종일 먼지가 체에서 걸러지듯 하늘에서 날렸다. 그 다음날도 그랬다. 매끄러운 담요가 대지를 뒤덮었다. 옥수수 위에 내려앉고, 울타리 말뚝 위에 쌓이고, 철조망에도 쌓였다. 지붕에 내려앉고 잡초와 나무들을 뒤덮었다. ![]() 조드 가의 둘째 아들 톰(Tom)이 4년의 복역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장면으로 이야기는 시작합니다. 오는 길에 순회 설교사인 짐 케이시(Jim Casy)를 만나 동행하는데, 그가 다시 찾은 고향은 극심한 가뭄과 맹렬한 모래폭풍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곳으로 변해 있고, 설상가상 농민들은 은행 빚에 떠밀려 당을 뺏긴 채 소작인으로 전락하거나 땅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들을 땅에서 몰아내는 무자비한 두 힘을 상징하는 것은 ‘은행’과 ‘트랙터’입니다. 은행은 사람들이 만들었으나 오로지 이익을 먹고 살며 농민들을 땅에서 내쫓고도 결코 그들의 처지에 공감하거나 동정할 줄 모르는 통제할 수 없는 무한한 힘을 지닌 무자비한 괴물로 그려집니다. The bank-the monster has to have profits all the time...We know that-all that. It's not us, it's the bank. A bank isn't like a man. Or an owner with fifty thousand acres, he isn't like a man either. That's the monster. 은행, 그 괴물은 언제나 이익을 내지 않으면 안 되지...우린 그걸 알아. 다 알지. 이건 우리가 하는 게 아니야. 은행이 하는 거라구. 은행은 인간과는 달라. 5만 에이커의 땅을 가진 지주도 인간이 아니긴 마찬가지지. 그건 괴물이라구. 은행 이자를 내지 못하는 이들을 땅에서 무자비하게 몰아내는 것은 트랙터입니다. 트랙터는 현대문명을 상징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생명이 없고, 땅에 대한 애착심이나 그 어떤 친밀감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생명 없는 트랙터를 운전하는 인간도 대지를 모르고 사랑을 모르기는 마찬가지. 조드 일가를 몰아 낸 트랙터 운전수는 기계와 한 몸이 된 것 같은 괴물로 묘사됩니다. The man sitting in the iron seat did not look like a man; gloved, goggled, rubber dusk mask over nose and mouth, he was a part of the monster, a robot in the seat...He could not see the land as it was, he could not smell the land as it smelled; his feet did not stamp the clods or feel the warmth and power of the earth. 쇠로 된 좌석에 앉은 사내는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다. 장갑을 끼고, 안경을 쓰고 코와 입에 먼지막이 고무마스크를 낀 그는 그 괴물의 일부였으며, 좌석에 앉은 로봇이었다...그는 땅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고, 땅의 내음을 맡지 못했다. 그의 발은 흙덩이를 밟지 않았고, 땅의 온기와 힘을 느끼지 못했다. 이런 비인간적인 힘에 밀린 조드 일가 열세 명은 낡은 차를 트럭으로 개조해 가재도구와 함께 인부를 구하는 캘리포니아로 떠납니다. 자신이 직접 일궈온 땅을 떠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할아버지에게 커피에 탄 수면제를 먹여 태운 뒤 시작된 이들의 여정이 얼마나 험난한 여정이 될 것인지는 차도를 건너는 ‘거북’으로 보여줍니다. ![]() 3장에 등장한 ‘거북’은 횡단하기 어려운 고속도로와, 불개미와 고양이의 공격 등과 같은 역경을 극복하고 4인치 높이의 콘크리트 벽을 넘어 꾸준한 전진을 멈추지 않는 것으로 그려지는데요. 쌩쌩 달리는 차를 겨우 피한 거북이 그의 껍질 속에 보리 이삭과 클로버 씨를 품어 길 건너 맞은 편 땅에 떨어뜨리는 것처럼 조드 가족들은 삶의 씨를 품고 국토를 횡단하여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가지요. 사실 이 거북은 단순히 조드 일가를 넘어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생명에 대한 애착을 함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And now a light truck approached, and as it came near, the driver saw the turtle and swerved to hit it. His front wheel struck the edge of the shell, flipped the turtle like a tiddly-wink, spun it like a coin, and rolled it off the high-way. The truck went back to its course along the right side. Lying on its back, the turtle was tight in its shell for a long time. But at last its legs waved in the air, reaching for some-thing to pull it over. Its front foot caught a piece of quartz and little by little the shell pulled over and flopped upright....The turtle entered a dust road and jerked itself along, drawing a wavy shallow trench in the dust with its shell. 이번에는 한 대의 소형트럭이 다가왔다. 가까이 온 운전사는 거북을 발견하고 치고 지나가려는 듯 커브를 틀었다. 앞바퀴가 등껍질의 끝에 부딪혀 거북은 티들리 윙크 원반처럼 튕겨져 동전처럼 뱅그르 돌다가 도로 밖으로 굴러 떨어졌다. 트럭은 오른쪽 제 길로 돌아가고 거북은 훌렁 뒤집힌 채 껍질 속에 오래 틀어박혀 있었다. 그러더니 마침내 다리가 허공에 버둥거리면서 몸을 뒤집을 뭔가를 찾았다. 앞발이 석영 조각을 붙잡더니 조금씩 껍질이 끌어당기더니 털썩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거북은 먼지투성이 길로 들어가더니 뒤뚱뒤뚱 걸어가면서 먼지 위로 껍질을 끌고 물결 같은 얕은 홈을 내면서 갔다. ![]() 고난의 여정 끝에 드러난 낙원의 허상 이렇게 시작된 조드 가의 여정은 순탄치 않습니다. 작은 트럭에 열세 명의 일행과 짐을 실었으니 그 모양새부터가 가관인데다 공간도 빽빽하고 자리도 불편하니 연로하신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 힘든 여정을 견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제 트럭은 단순히 트럭이 아니라 그들이 타고 다니는 동시에 그들이 생활하며 끌고 다녀야 할 가정이 될 것입니다. 마치 거북의 등껍질처럼 말이죠. The family met at the most important place, near the truck. The house was dead, and the fields were dead; but this truck was' the active thing, the living principle. The ancient Hudson, with bent and scarred radiator screen, with grease in dusty globules at the worn edges of every moving part, with hub caps gone and caps of red dust in their places—this was the new hearth, the living center of the family; half passenger car and half track, high-sided and clumsy. 가족들은 가장 중요한 장소인 트럭 주변에 모였다. 집도 죽고 밭도 죽어 있었다. 하지만 트럭만은 활동하는 것, 살아있는 원리였다. 라디에이터 스크린은 찌그러져 상처투성이고, 움직이는 모든 부분의 낡은 끄트머리마다 먼지투성이 기름이 번질거리고, 바퀴통 덮개는 떨어져 나가고 대신 붉은 먼지가 덮개처럼 덮인 이 낡은 허드슨, 이것이 새로운 가정, 가족생활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반은 승용차고 반은 트럭인, 높게 널빤지를 둘러 싼 이 볼썽사나운 자동차가. 이런 험한 모습을 하고도 이들이 캘리포니아로, 즉 ‘서쪽으로 향해가는 것(westering)’은 한편으로는 미국의 개척주의 정신을 잇는 발전의 상징이자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도전의 여정으로 보입니다. 애초에 뉴잉글랜드를 포함한 동쪽에 정착했던 미국인들이 서부 개척시대를 거쳐 태평양 연안에 도달했던 것처럼 조드 일가가 서쪽으로 향하는 여정은 비록 초라하고 비참한 모습일지라도 고향 땅에 남아 비참해 지는 것보다는 낫다는 판단에서 시작됐고, 이는 작가 스타인벡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오클라호마의 고향 땅을 떠나기를 거부하는 이웃 그레이브스(Muley Graves)라는 인물이 마치 동물처럼 퇴락해가는 모습은 조드 일가가 선택한 여정의 불가피성과 정당성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들은 그렇게 66번 도로에 올라섭니다. ![]() Highway 66 is the main migrant road...66 is the path of a people in flight, refugees from dust and shrinking land, from the thunder, of tractors and shrinking ownership, from the desert’s slow northward invasion, from the twisting winds that howl up out of Texas, from the floods that bring no richness to the land and steal what little-richness is there. From all of these the people are in flight, and they come into 66 from the tributary side roads, from the wagon tracks and the rutted country roads. 66 is the mother road, the road of flight. 66번 도로는 이주 도로다...66번 도로는 도망치는 사람의 길이다. 흙먼지로 황폐해진 땅에서, 트랙터와 줄어든 소유권이 천둥처럼 짖어대는 소리로부터, 남쪽에서 북쪽으로 천천히 침입해오는 사막의 침입으로부터, 텍사스 주에서 소용돌이치며 휘몰아쳐오는 바람으로부터, 땅에 아무런 이익도 주지 않으면서 거기 있는 얼마 안 되는 것마저 훔쳐가는 홍수로부터 도망치는 사람들의 길이다. 이 모든 것들로부터 도망치는 사람들의 길이다. 그들은 66번 도로를 향하여 좁은 곁길에서, 마차 길과 바퀴자국투성이 시골길에서 몰려든다. 66번은 어머니의 길, 도망의 길이다. 바로 이 66번 도로에서 조드 가족의 여정이 시작된 후 이내 고난이 시작됩니다. 할아버지는 오클라호마를 떠나기도 전에 일사병에 걸려 숨을 거두고, 큰아들 노아는 캘리포니아를 눈앞에 둔 채 콜로라도 강을 건너는 것이 두려워 일행을 떠나 사라집니다. 오클라호마에서 밀려드는 가난한 이주민들(‘Okies’)에 신물이 난 마을 경관에 쫓겨 사막을 횡단하던 도중 결국 할머니마저 숨을 거두고 맙니다. 이러한 비극이야말로 66번 도로의 흔하디 흔한 잔인한 일들입니다. The people in flight from the terror behind-strange things happen to them, some bitterly cruel and some so beautiful that the faith is refired forever. 등 뒤의 공포로부터 달아나는 사람들, 그들에게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진다. 어떤 것은 가슴 아프도록 잔인하고, 어떤 것은 믿음의 불이 영원히 다시 켜지도록 아름답기도 하다. ![]() 할머니의 죽음이 특히 가슴 아프고 인상적인 것은 검문소를 지나면서 할머니는 숨을 거두었지만 일단 검문소를 지나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했던 톰의 엄마는 가족들의 동요를 막으려 할머니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견뎌냅니다. 가족의 죽음마저 침묵한 채 떠나야 하는 이들의 절박함이 가슴 아프게 전해지는 가운데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 깊은 인물 가운데 한 명인 엄마(Ma Joad)를 주목하게 됩니다. 아버지가 아니라 엄마인 그녀가 조드 일가의 기둥 역할을 합니다. 궁한 살림에서도 식구를 배불리 먹이려고 최선을 다하고, 가족이 흩어질 위기에 처할 때에도 그녀는 기가 꺾이는 일이 없이 단호한 태도로 늘 하나로 뭉쳐 살 생각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녀 세계의 핵심 또한 가정이었으며, 가족에 대한 그녀의 집착은 고향 땅에 대한 집착과 마찬가지로 원초적인 본능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어머니는 가족의 구심점이자 초인적이면서 완전한 존재입니다. From her great and humble position in the family she had taken dignity and a clean calm beauty...from her position as arbiter she had become as remote and faultless in judgment as a goddess. 가족 내에서 그녀의 위대하고도 겸손한 위치로 인해 그녀는 위엄과 깨끗하고 조용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결정을 내리는 위치에 있는 그녀의 위치로 인해 판단을 내릴 때 그녀는 마치 여신처럼 초연하고 결점 없는 존재가 되었다. 66번 도로를 따라 이주하는 ‘오키스들’이 늘어남에 따라 밤이 되면 곳곳에서 이주자들의 캠프가 형성되는데, 이 캠프는 모든 요건을 갖춘 하나의 세계이자 그들만의 공동체가 됩니다. 그곳에는 서로 지켜야 할 약속과 규율이 형성됩니다. Every night a world created, complete with furniture-friends made and enemies established;...The families learned what rights must be observed—the right of privacy in the tent; the right to keep the past black hidden in the heart; the right to talk and to listen; the right to refuse help or to accept, to offer help or to decline it; the right of son to court and daughter to be courted; the right of the hungry to be fed; the rights of the pregnant and the sick to transcend all other rights. 밤마다 모든 요건을 갖춘 하나의 세계가 형성되었다. 친구가 생기고 적이 형성되었다....가족들은 어떤 권리가 준수되어야 하는지를 배웠다. 텐트 안에서 사생활의 권리, 과거를 마음속 깊이 간직할 권리, 이야기 하고 듣는 권리, 도움을 거부하거나 받아들일 권리, 도움을 제안하거나 도움을 사절할 권리, 아들은 구애하고 딸은 구애받을 권리, 배고픈 자가 음식을 제공받을 권리, 다른 모든 권리에 우선하는 임산부와 고아와 병자들의 권리. 물론 남의 사생활을 침해하지 않기, 간통과 살인 등 마땅히 금해야 할 권리도 있었지요. 이주자들이 많아지고 여러 번의 캠프 생활을 하게 되면서 66번 도로 위의 이주자들은 그들 세계의 규칙을 변화, 발전시키면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해갔습니다. 캘리포니아에 점점 가까워지면서 이주민 숫자가 무려 30만 명이 넘는다는 사실을, 캘리포니아 주민들은 밀려드는 이주민들을 적대시하면서 그들 땅에 캠프가 세워지는 것도, 그들이 정착하는 것도 원치 않는다는 사실도 확인합니다. 그런데도 왜 캘리포니아에 일자리가 부족하다는 광고 전단은 끊임없이 시골마을에 뿌려져서 사람들을 서부로 불러 모으는 걸까요. 캠프에서 만난 한 젊은 사내는 이렇게 말합니다. “Look,” the young man said. “S’pose you got a job a work, an’ there’s jus’ one fella wants the job. You got to pay ’im what he asks....But s’pose they's a hunderd men wants that job. S’pose them men got kids, an’ them kids is hungry. S’pose a lousy dime’ll buy a box a mush for them kids. S’pose a nickel’ll buy at leas’ somepin for them kids. An’ you got a hunderd men. Jus’ offer ’em a nickel-why, they’ll kill each other fightin’ for that nickel. Know what they was payin’, las’ job I had? Fifteen cents an hour. Ten hours for a dollar an’ a half, an’ ya can’t stay on the place. Got to burn gasoline gettin’ there.” “이봐” 젊은 사내가 말했다. “자네에게 일자리가 하나 있다고 생각해봐. 그리고 일자리를 원하는 친구는 한 명뿐이야. 그러면 자네는 그에게 그가 요구하는 대로 줘야해....하지만 그 일자리를 원하는 백 명이 있다고 생각해봐. 그 사람들에게는 아이들도 있는데, 아이들이 배를 곯는다고 생각해보란 말이지. 그 더러운 10센트 동전 한 닢이면 아이들에게 옥수수 한 통은 사 먹일 수 있다고 생각해봐. 5센트 한 닢이면 적어도 뭔가는 사 먹일 수 있다고 생각해보란 말이지. 그런 인간들이 백 명이 있다는 거야. 그들에게 5센트 한 닢 주겠다고 해봐. 아마 서로 죽이고서라도 그 동전을 차지하려고 할 걸. 내가 바로 얼마 전까지 한 일로 얼마를 벌었는지 알아? 시간당 15센트야. 열 시간을 일하고 겨우 1달러 50센트. 게다가 거기서는 잘 수가 없어. 거길 가려면 기름을 써야지.” ![]() 그들이 찾아온 캘리포니아는 낙원이 아닌 것이지요. 이 이야기는 조드 일가의 운명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현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더욱 비극적인 현실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들이 떠나온 오클라호마의 대지가 흙먼지로 뒤덮이고 가뭄으로 갈라진 것과 달리 캘리포니아의 대지는 풍요롭습니다. 풍요로운 대지에 버찌며 커피, 오얏, 배, 그리고 포도의 결실은 풍성합니다. 그러나 수확 인건비를 충당할 수 없어 열매는 그대로 말라 썩어 가고 있습니다. 수확을 못한 작은 과수원들은 빚더미를 안은 채 은행으로 넘어갑니다. 그렇게 캘리포니아에는 썩어가는 과일과 수확하지 못하는 땅에 얹힌 부채의 물결만 가득합니다. 커피와 옥수수는 땔감으로 쓰고, 감자는 강물에 내다 버리고, 돼지는 산 채 파묻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버려지는 어떤 것도 굶주린 이들의 손이 닿을 수는 없습니다. 이 끔찍한 역설적 비극은 다음 장면에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The people come with nets to fish for potatoes in the river, and the guards hold them back; they come in rattling cars to get the dumped oranges, but the kerosene is sprayed. And they stand still and watch the potatoes float by, listen to the screaming pigs being killed in a ditch and covered with quicklime, watch the mountains of oranges slop down to a putrefying ooze; and in the eyes of the people there is the failure; and in the eyes of the hungry there is a growing wrath. In the souls of the people the grapes of wrath are filling and growing heavy, growing heavy for the vintage. 사람들이 그물을 가지고 강물에 감자를 건지러 오면 파수꾼들이 그들을 밀어낸다. 사람들이 산더미처럼 버려진 오렌지를 주우러 털털거리는 차를 몰고 오면 거기에는 석유가 뿌려져 있다. 사람들은 우두커니 서서 감자가 떠내려가는 것을 지켜본다. 구덩이 속에 던져져 생선회가 뿌려진 채 죽어가는 돼지들의 비명을 듣고 썩어 문드러진 물이 흘러나오는 산더미 같이 쌓인 오렌지를 지켜본다. 사람들의 눈에는 패배의 빛이 떠오르고, 굶주린 사람들의 눈에는 복받쳐 오르는 분노가 담겨 있다. 사람들의 영혼 속에는 분노의 포도가 가득 차 수확기를 향하여 가지게 휠 정도로 무겁게 무겁게 자라간다. 길고 긴 여정 끝에 그들이 낙원이라고 찾아왔던 캘리포니아의 실상은 이처럼 더욱 가혹하고 비참했습니다. 포기할 수 없다, 새 삶을 살고자 한 투쟁 캠프를 전전하던 조드 일가는 몇 번의 사건도 겪게 됩니다. 특히, 한 실업자 수용소에서 톰이 오만하게 굴던 경찰관을 다치게 한 사건이 벌어지는데, 톰은 가석방 상태라 잡히면 바로 교도로소 갈 처지여서 도망가 숨고 대신 케이시가 잡혀갔다 풀려납니다. 그 북새통 사이에 ‘샤론의 장미’의 철없는 남편은 임신한 아내를 두고 도망을 가버리죠. 엎친 데 덮친 고난 속에 그들은 위드패치 국영캠프라는 곳에 도착하는데, “가장 위대한 현실적 공동체의 실현(the greatest practical realization of community)”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곳은 시설이 좋은데다 자치활동도 잘 조직된 캠프여서 가족들은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정착합니다. 여러 캠프들 가운데 이 위드패치 캠프는 스타인백이 이상적 공동체의 모습으로 제시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에서 톰과 케이시를 중심으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니 이쯤에서 소설의 가장 중요한 인물인 톰과 케이시, 두 인물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 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 조드 가의 차남인 톰은 강한 체력과 의지, 침착한 태도에 의리와 정의감이 있는 청년입니다. 작은 사고로 교도소에 다녀오기는 했지만 어머니의 애정과 케이시의 영향을 받으며 서부로 이동하는 내내 가족에 대한 책임을 성실히 수행해 왔습니다. 그는 케이시를 보며 점점 더 공동체에 헌신하는 인물로 성장해 갑니다. 케이시는 순회설교자로 종교적 교리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사상과 행동을 따르며 사랑과 동정을 중시하는 소박한 휴머니즘을 지닌 인간입니다. “I don't know nobody name' Jesus. I now a bunch of stories, but I only love people. An' sometimes I love 'em fit to bust, an' I want to make 'em happy.” “나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몰라. 이야기라면 한아름 알지만, 나는 인간을 사랑할 뿐이야. 때때로 파멸하기에 꼭 알맞을 정도로 인간을 사랑해서 나는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그는 죽은 자의 영혼보다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삶을 중시합니다. “I wouldn't pray for a ol' fella that's dead...if I was to pray, it'd be for the folks that don't know which way to turn.” “나는 죽은 이를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아...내가 기도를 한다면 그건 어디로 갈지 몰라하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가 될 거야.” 그는 인간은 타인을 포함한 전체와 함께 나아갈 때 신성한 존재가 된다고 믿습니다. 특히, 인간은 협력해야 하며, 함께 힘을 모아 사회의 변화에 맞서야 한다는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는 인물입니다. 그가 톰에게 알려준 「전도서」의 한 구절입니다. “Two are better than one, because they have a good reward for their labor. For if they fall, the one will lif' up his fellow, but woe to him that is alone when he falleth, for he hath not another to help him up.” “둘이 하나보다 나으니라. 그것은 두 사람의 노고에 대해 더 나은 보답이 따르기 때문이니라. 둘이 있다가 쓰러진다면 그 중 하나가 다른 친구를 일으켜 줄 것이지만, 혼자 있는 이는 쓰러지면 불쌍하도다. 그를 도와 일으켜 세워 줄 이가 없음이니라.” 톰을 대신해 감옥에 갔을 때 상한 콩을 받고서 자기 혼자 불평했을 때는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모두 합세해서 외치자 죄수들의 의사가 관철된 경험을 한 케이시는 조직의 힘과 필요성을 절감하게 됩니다. 위드패치 캠프에서 케이시가 파업지도자로 변신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스타인벡은 케이시를 이상적인 민중의 지도자상으로 그려내고 있으며, 톰은 그런 케이시를 닮아갑니다. 이런 톰과 케이시, 둘 모두 위드패치 수용소에서 위기에 직면합니다. 임금시비로 경찰에 쫓기던 케이시에게 수상한 사람들이 시비를 걸어 한 사람이 곡괭이로 케이시를 내리치고, 그 장면을 본 톰은 곡괭이를 빼앗아 그 사내의 머리를 다시 내리칩니다. 이 폭행사건으로 케이시와 사내, 둘 다 죽고, 가족들은 위드패치 캠프를 떠나며, 톰은 산으로 숨어들어 지내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계속 근처에 있으면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 것을 안 톰은 마침내 가족을 떠나기로 하고 작별을 고합니다. 이번에는 어머니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케이시의 죽음은 톰을 ‘나’라는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우리’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커다란 기폭제가 됩니다. 쫓기는 그를 찾아 온 어머니에게 자신은 내내 케이시 생각만 한다면서,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묻는 어머니에게 “케이시가 하던 일을 하겠다.”고 대답합니다. “Lookie, Ma. I been all day an' all night hidin' alone. Guess who I been thinkin' about? Casy! He talked a lot. Used ta bother me. But now I been thinkin' what he said, an' I can remember--all of it. Says one time he went out in the wilderness to find his own soul, an' he foun' he didn' have no soul that was his'n. Says he foun' he jus' got a little piece of a great big soul. Says a wilderness ain't no good, 'cause his little piece of a soul wasn't no good 'less it was with the rest, an' was whole. Funny how I remember. Didn’ think I was even listenin’. But I know now a fella ain’t no good alone.” (...) “Tom,” Ma repeated, “what you gonna do?” “What Casy done” “저, 어머니 낮이나 밤이나 내내 혼자 있었어요. 제가 누굴 생각했는지 아세요? 케이시예요! 그 사람은 내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지요. 질릴 정도로요. 하지만 지금은 그가 한 말만 생각하고 있어요. 모두 기억이 나요. 언젠가 한 번은 자기 영혼을 찾을 황야로 나갔대요. 그리고는 자기만의 영혼이라는 건 없다는 걸 알았대요. 자신은 엄청나게 큰 영혼의 일부일 뿐이라는 걸 알았다는 거예요. 황야는 아무 소용도 없었다는 거예요. 자기의 작은 영혼이 나머지 전체의 영혼과 함께 전체가 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래요. 이런 걸 기억하다니 우스운 일이예요. 귀 기울여 들은 것도 아닌데. 하지만 나는 이제 알아요. 인간이란 혼자는 아무 소용없다는 걸 말이지요.” (...) “톰,” 엄마가 그를 다시 불렀다. “너 뭘 할 작정이냐?” “케이시가 하던 일요.” 긴 고난의 여행을 하면서, 케이시의 영향을 받은 톰은 이제 자기 자신과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뛰어넘어 억압받고 고통 받는 이웃을 돕고자 케이시처럼 행동하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이지요. 그들이야말로 바로 톰 자신의 모습이며, 그가 함께 있어야 할 ‘우리’임을 톰은 깨닫은 것 같습니다. “Then I'll be all aroun' in the dark. I'll be ever'where--wherever you look. Wherever they's a fight so hungry people can eat, I'll be there. Wherever they's a cop beatin' up a guy, I'll be there...I’ll be in the way kids laugh when they’re hungry an’ they know supper’s ready. An’ when our folks eat the stuff they raise an’ live in the houses they build—why, I’ll be there.” “나는 어둠 속의 어디에나 있을 테니까요. 나는 어디에나, 어머니가 바라보는 어디에나 있을 거예요. 굶주린 사람들이 싸워서 먹을 수만 있다면 나는 거기에 있을 거예요. 경찰이 누군가를 두드려 패고 있으면 나는 거기 있을 거예요....아이들이 굶다가 저녁이 준비된 걸 알고 웃으면, 그 웃음 속에 나는 있을 거예요. 우리 식구들이 우리 손으로 기른 음식을 먹고 우리 손으로 지은 집에서 살 때 나는 거기 있을 거예요. 거기 내가 있을 거예요.” 작가인 스타인벡은 톰과 케이시를 통하여 사람들이 비인간적이고 인위적인 형식과 법칙, 관습에 얽매이기보다는 자유롭게 감정을 표현하고 자연스러운 사회적 유대감을 중시하면서 이기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공동체와 하나 되는 인류애를 강조합니다. 두 사람이 떠난 자리를 여전히 굳건히 지키고 있는 어머니 또한 두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녀는 인간의 순수성과 참다운 애정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려주는 듯합니다. “I'm learnin' one thing good,” she said. “Learnin' it all a time, ever' day. If you're in trouble or hurt or need--go to poor people. They're the only ones that'll help--the only ones.” “나는 좋은 것 한 가지는 알고 있단다.” 그녀가 말했다. “언제나, 매일 그것을 배우지. 곤경에 처하거나 상처를 입거나 혹은 뭔가 필요할 게 있거든 가난한 이들을 찾아 가거라. 그들이야말로 도움을 줄 유일한 사람들이란다. 유일한 사람들이지.” 톰과 어머니, 케이시는 개인과 가족이라는 좁은 범주를 넘어 모든 인간들과의 관계를 인식하고 ‘인류애(the love of mankind)’를 강하게 긍정하며, 인간은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살아남을 것이라는 낙관론을 지닌다는 공통점을 보여주는 인물들입니다. 이들이 보여준 보편적 인류애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조드 가의 딸인 ‘샤론의 장미’를 통해 인상적으로 제시됩니다. 이제 그 마지막 장면으로 가기 전에 ‘샤론의 장미’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샤론의 장미, 이기적 주체에서 이타적 존재로 조드 가의 딸인 ‘샤론의 장미’는 이기적인 인물로 등장하지만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대단히 인상적인 장면을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처음부터 그녀는 남편 코니(Connie)와 뱃속의 아기가 전부인 듯 본능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도로에서 개가 치었을 때나 할아버지 장례를 치를 때도 슬퍼하기 보다는 그런 부정한 일이 자기와 태아에게 미칠 영향을 더 염려하지요. 하지만 톰이 그러하듯 그녀에게도 서서히 이타적인 태도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어머니가 간직해 온 물건 중에서 귓불에 구멍을 뚫어야만 하는 귀걸이를 선택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그녀가 한 단계 성장하려는 고통의 체험인 동시에 통과의례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엄마의 책임과 위치에서 감수해야 할 고통을 미리 체험한다고 할 까요. 귓불을 뚫는 것은 그녀를 감싸고 있던 이기적인 세계를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여행 도중 할머니가 죽어갈 때 어머니가 그녀를 돌보며, 그 옆에 아이를 가진 샤론의 장미가 있는 모습은 이 가족의 정신적 기둥인 엄마의 역할을 그녀가 이어받을 것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When you are young, Rosasharn, ever'thing that happens is a thing all by itself. It's a lonely thing. I know, I'member, Rosasharn...You gonna have a baby, Rosasharn, and that's somepin to you lonely and away. That's gonna hurt you, an' the hurt'll be lonely hurt, an' this tent is alone in the worl', Rosasharn...They's a time of change, an' when that comes, dyin' is a piece of all dyin', and bearin' is a piece of all bearin', an' bearin' an' dyin' is two pieces of the same thing. An'then things ain't lonely any more, Rosasharn...” And her voice was so soft, so full of love, that tears crowded into Rose of Sharon's eyes, and flowed over her eyes and blinded her. “젊을 때는 말이다, 로저샨, 벌어지는 일은 다 그냥 저 혼자 벌어지는 것이지. 그건 참 외로운 일이란다. 알지. 나도 기억한단다, 로져산....넌 곧 아이를 낳을 거야, 로져산, 그건 너에게 외롭고 뚝 떨어진 것 같기도 할 게다. 고통스러울 게고, 그 고통은 외로운 고통일 거야. 이 텐트도 세상에서 외로운 것이고 말이다, 로저샨...하지만 변하는 시기가 있지, 그 때가 되면 죽는다는 일은 그저 많은 일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지. 태어난다는 것도 그저 모든 태어남 가운데 하나일 뿐이고, 죽음과 탄생은 동전의 양면에 불과하단다. 그러면 모든 일이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되지, 로저샨...”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나 부드럽고 사랑이 넘쳐서 샤론의 장미의 눈에 눈물이 고이더니 주르르 흐르는 바람에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이 장면에서 흘리는 샤론의 눈물은 그녀의 변화한 모습을 극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굴에 도피해 있던 톰은 결국 가족을 떠나고 조드 일가는 목화 따는 일을 하는데, 겨울비가 끝없이 내려 캠프 주변의 둑을 위협합니다. 해산 일이 가까웠던 ‘샤론의 장미’는 섬처럼 고립된 캠프에서 사산을 하고 맙니다. 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견뎌낸 뒤에도 비가 그치지 않자 결국 가족들은 그곳을 떠나기로 하고 국도로 올라갔다가 한 창고 안에서 엿새나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굶주림에 지쳐 숨이 끊어져가는 아버지와 어린 아들을 만납니다.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먹이려고 자신은 내내 굶어왔다는 것을 아이를 보고 알게 되지요. 그 이야기를 들은 엄마와 ‘샤론의 장미’는 서로의 마음을 읽습니다. ‘샤론의 장미’는 아이를 창고 밖으로 내보낸 뒤 문을 닫고는 굶주림에 죽어가는 남자에게 다가갑니다. For a minute Rose of Sharon sat still in the whispering barn. Then she hoisted her tired body up and drew the comfort about her. She moved slowly to the corner and stood looking down at the wasted face, into the wide, frightened eyes. Then slowly she lay down beside him. He shook his head slowly from side to side. Rose of Sharon loosened one side of the blanket and bared her breast. “You got to,” she said. She squirmed closer and pulled his head close. “There!” she said. “There.” Her hand moved behind his head and supported it. Her fingers moved gently in his hair. She looked up and across the barn, and her lips came together and smiled mysteriously. 잠시 동안 샤론의 장미는 빗소리가 속삭이듯 들리는 헛간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윽고 지친 몸을 일으키더니 깃이불을 꼭 여몄다. 그녀는 천천히 구석으로 걸어가더니 그 남자의 쇠약한 얼굴을 내려다보며 크게 뜬 겁먹은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그녀는 천천히 그 남자 곁에 누었다. 남자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샤론의 장미는 담요의 한쪽 깃을 느슨하게 풀고 자신의 젖가슴을 드러냈다. “먹어야 해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몸을 꿈틀거리며 더 가까이 다가가 남자의 머리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자요!” 그녀가 말했다. “자, 어서요.” 그녀는 손을 사내의 머리 뒤로 움직여 받쳐주었다. 그녀의 손가락들이 가만가만 사내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헛간을 둘러보는데, 꼭 다문 입술을 한 그녀 얼굴에 신비한 미소가 떠올랐다. ![]() 짐작하실 것처럼 이 마지막 이 장면은 적잖은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외설적이다, 선정적이다”라거나 “예술성보다는 상업성이 가미됐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나오기도 했지요. 하지만 작가인 스타인벡의 태도는 단호했습니다. 그는 마지막 장면에서 상징적 의미를 발견할 수 없는 독자는 작품을 읽을 자격이 없다고까지 지적하며, 이 장면은 ‘사랑의 상징(a love symbol)’이 아니라 ‘생존의 상징(a survival symbol)’이라고 말했습니다. 가장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던 ‘샤론의 장미’가 ‘나’와 ‘가족’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우리’ 모두를 포용하는 자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면서, 스타인벡은 서로에 믿음과 배려, 이해와 포용력이 가난하고 고통 받는 위치에 있는 인간들이 계속 나아가고 생존할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을 역설합니다. 하기에 마지막에 샤론의 장미가 짓는 ‘신비한 미소’는 자신의 생사를 넘어 보다 큰 ‘삶’과 자신의 몸이 연결되는 것을 느끼는 여인의 살아있다는 기쁨, 사람을 살려준다는 기쁨에서 나오는 본능적 미소인 듯합니다. 소설의 전체 내용에서 보듯 아무리 힘들고 험난한 상황에서도 결국 사람들은 살아간다는 인간의 생명력에 대한 믿음이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강인한 생명력은 특히 엄마와 딸, 두 사람으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그런 점에서 다음과 같은 엄마의 말은 인상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Man, he lives in jerks--baby born an' a man dies, an that's a jerk--gets a farm an' loses his farm, an' that's a jerk. Woman, it's all one flow, like a stream, little eddies, little waterfalls, but the river, it goes right on. Woman looks at it like that. We ain't gonna die out. People is goin' on--changin' a little, maybe, but goin' right on.” (p.571) “남자는 단속적으로 움직이며 살아가지요. 아기가 태어나고 사람이 죽지요, 그건 단속적인 움직임이에요. 농장을 얻고 잃지요. 그것도 마찬가지예요. 여자는, 모두가 하나의 흐름, 강 같은 흐름이지요. 작은 소용돌이가 있고 조그만 폭포도 있지만 그 강은 그대로 흘러가지요. 여자는 세상을 그렇게 봐요. 우리는 죽어 없어지지 않아요. 사람들은 계속 나아가요. 조금씩 변화하지만, 계속 나아가는 거예요.” 우리의 삶을 흔히 강에 비유하지요. 그건 아마 멈춤 없이, 끊임없이 유유히 흐르는 강의 속성이 인간의 삶과 닮아있기 때문이기도 할 텐데요, 스타인벡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단절되지 않고 계속 흘러가야 하는 인간 생존의 상징으로 두 여인과 이 마지막 장면을 선택했습니다. 이 작품 속에 나타난 스타인벡의 휴머니즘은 인본주의적 가치와 인간 삶의 공생의 원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많은 사람들, 특히 우리들에게 강한 호소력을 지닌다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특히, 케이시와 어머니 같은 인물에게서 보이는 휴머니즘과 상부상조의 사상, 땅에 대한 집착, 그리고 공동체, 특히 가족을 향한 헌신은 한국독자들에게 마음에 강한 인상을 남기며, 작품 속 ‘오키들(Okies)’의 이주와 일제 강점기 시절 자신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만주로 이주해야 했던 한국의 농민들 사이의 유사성에 관심을 두는 경우를 종종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드 일가처럼 만주에서 새 삶을 시작하리라 생각했던 한국의 많은 ‘오키들’에게 만주는 분명 캘리포니아는 아니었지요. 그렇기에 ‘오키들’에 대한 스타인벡의 깊은 공감과 동정, 그리고 그들을 학대하는 경제, 정치제도에 대한 분노는 여전히 강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는 듯합니다. ---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 1902-1968) 존 스타인벡은 신세계 미국에서도 비교적 최근에 개척된 켈리포니아주의 설리너스에서 출생한 초대 개척민의 손자였습니다. 대학을 중퇴한 이후 선원, 노동자, 통신원, 산장지기 등의 직업을 전전하며 창작을 하던 중 1928년 『금배』Cup of Gold”가 출간 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많은 작품이 사회비판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바탕에는 언제나 견고한 휴머니즘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스타인벡은 고난 받는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을 이해하며 포용하는 한편,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공동체 구성원 사이의 조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인간은 어떤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분명한 확신을 지니고 있습니다. 스타인벡은 인간과 자연과의 밀접한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면서, 인간의 원초적인 숭고함이란 인간이 대지와 맺는 밀접한 유대관계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인위적인 것에 대해 불신하며, 간혹 그런 특성은 ‘문명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스타인벡은 또한 인간을 독립적인 존재로 보기 보다는 무리, 집단이라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보는 입장을 취하기도 합니다. 파업하는 노동자들, 서부로 몰려가는 실향민들의 무리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고, 그 속의 각개인과는 다른 생리로 움직이는 별개의 생물과도 같은 하나의 존재라고 보는 듯합니다. 개개의 인간은 그가 속한 커다란 세계의 일원이므로 그 공동체 내에서 서로 돕고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생물학적 인간론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스타인벡은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과 미래를 굳게 믿었습니다. 노벨상 수상연설에서 그는, 인간이 지닌 용기, 동정, 공감, 사랑의 능력을 강조하면서, “작가의 사명은 인류에게 희망을 북돋아주는 데 있다”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대표작품들 『천국의 목장』(The Pastures of Heaven, 1932), 『의심스러운 싸움』(In Dubious Battle, 1935),『생쥐와 인간』(Of Mice and Men, 1937),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 1939), 『통조림공장 골목』(Cannery Row, 1945)『에덴의 동쪽』(East of Eden, 1952), 『달콤한 목요일』(Sweet Thursday, 1954) 등. ![]() 여국현의 영문학 살롱 다시보기 ① 로빈슨 크루소 Click▶ ② 제인 에어 Click▶ ③ 더버빌가의 테스 Click▶ ④ 오만과 편견 Click▶ ⑤ 위대한 유산 Click▶ ⑥ 주홍 글씨 Clic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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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