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1주일 완전정복10 불교철학10
견성콘서트 7부 - 출입식념경 2강(01:2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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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제가 설명 드린 16개조가 있죠. ①몸 ②느낌 ③마음 ④진리 법 요 4개조를요 호흡, 출입식념 하나를 가지고 4개를 다 체험하면서 지혜를 얻고 알아차림을 얻습니다. 그래서 지혜와 해탈을 얻으실 수가 있게 됩니다. 알아차림은요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알아차림 자리가 니르바나 자리입니다. 즉 여러분의 마음은요 오온이 여러분의 마음의 전부로 알고 살다가 여러분 안에 순수한 니르바나 자리가 나타났는데 그게 알아차림으로 나타납니다. 즉 오온을 여러분이 알아차리시다 보면 거기서 뭔가 평화롭고 고요하고 탐진치가 없는 순수한 마음이 드러나요. 당연히 드러납니다. 한 가지만 보고 있다 보면. 마음이 움직여서는 안 드러나는데 하나만 보고 있으면 드러납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 컵 하나만 보고 계시면요 “이 컵을 알아차리십시오”라고 합니다. 왜냐? 대번에 그냥 니르바나를 못 느끼시니까 “이 컵을 알아차리십시오”라고 제가 주문을 합니다. “컵만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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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에 제가 이 컵을 치워버리면 뭐만 남을까요? 알아차림만 남습니다. 그게 니르바나예요. 이걸 바로 들어가는 법이 “모른다” 입니다. 그냥 오온을 통으로 모른다고 하십시오. 뭐가 오온이 올라오든 오온이라고 판명되면 모른다고 하십시오. 하면 다시 자리 똑같은 자리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제가 번역한 수심결에 단지불회(但知不會) 다만 모르는 줄만 알면 시즉견성(時卽見性) 이것이 바로 견성이다. 이 말이 나옵니다. 뭘 모른다고 할까요? 오온을 모르는 겁니다. 이걸 숭산(崇山, 1927-2004) 스님이 미국에 가가지고 이걸 그대로 쓰셨습니다. 수심결에 나온 얘기죠. 그 얘기를 그대로 써가지고 “오직 모를 뿐” 해서 전 세계 엘리트들 머리를 “공부 더 해야 되는데 더해야 되는데 더 알아야 되는데” 하는 사람들한테 “몰라도 된다”고 하니까 평화가 오고 고요가 와서 또 많은 깨달은 분들이 나왔잖아요. 어렵지 않습니다. 위빠사나를 하셨든 뭘 하셨든 간에 여러분이 알아차리다 보면 뭔가 고요가 왔을 때 체험이 있으실 거예요. 그 고요를 붙잡으세요. 고요만이 여러분을 해탈로 인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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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세요. 한번 해 볼게요 출입식념 바탕으로 이 악보를 바탕으로 이 4악장을 그대로 다시 연주를 제가 한번 해 드릴게요. “눈을 감으시든가 반개하시고요. 허리는 세우시고 정신 바짝 차리십시오. 지금 몇 시인지 모릅니다. 시간도 모르고요.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모릅니다. 공간도 모릅니다. 과거는 없고 미래도 오지 않아서 없습니다. 오직 지금 이 순간만 현존합니다. 자신의 들숨날숨에 마음을 챙기십시오. 들이쉴 때 들이쉬는 걸 아시고요. 내 쉴 때 내쉬는 걸 알아차리면서 내쉬십시오. 어떠한 잡념이 일어나던 오온일 뿐입니다. 모른다고 하세요. 부처님이 말씀하셨듯이 오온은 고통일 뿐입니다. 무상한 거고요. 오온을 모른다라고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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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지금 일어나는 호흡만 알아차리십시오.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자신의 호흡만 알아차리십시오. 알아차림에는 어떠한 고통도 번뇌도 없습니다. 잡념이 일어나면 모른다고 하시고요 호흡으로 관심을 돌리십시오. 먼저 몸에 대해서 알아차려 보겠습니다. 길게 들이쉴 때 길게 들이쉰다는 걸 알아차리십시오. 길게 내쉴 때는 길게 내쉰다는 걸 알아차리십시오. 그리고 짧게 들이쉴 때는 짧게 들이쉰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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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차리십시오. 짧게 내쉴 때는 짧게 내쉰다는 것을 알아차리십시오. 호흡이 길면 길다고 알아차리시고요. 짧으면 짧다는 것을 알아차리십시오. 잡념이 일어나면 모른다 하시고요. 자신의 호흡만 알아차리십시오. 자, 이제는 호흡을 하는 중에 온몸에 일어나는 느낌을 두루 경험해 보십시오. 숨을 들이쉴 때 어떤 변화가 몸에서 일어납니까? 숨을 내쉴 때 어떤 변화가 몸에서 일어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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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이 길 때의 변화와 짧을 때의 변화도 알아차리십시오. 호흡의 길이의 변화에 따른 몸의 변화도 알아차리십시오. 호흡이 길게 이루어질 때 몸이 더 편안하다는 것도 알아차리시고요. 호흡이 미세하게 이루어질 때 몸이 더 편하다는 것도 알아차리십시오. 이제 몸의 작용을 평온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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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들이쉬십시오. 몸의 작용을 평온하게 하면서 내쉬십시오. 들이쉬고 내쉴 때 온몸을 향해 편안하다라고 하십시오. 호흡하면서 느껴지는 몸의 감각을 향해 편안하다고 하십시오. 그리고 실제로 편안해지는지 관찰하십시오. 몸통 팔다리 느낌을 향해 편안하다고 하시면서 호흡하십시오. 실제로 편안해지는지 관찰하십시오. 온몸에 고요하다라고 하십시오. 온몸이 고요해짐을 느끼면서 들이쉬고 내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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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이제 호흡을 통해 몸의 감각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몸이 더 맑아지는 걸 느껴보시고요.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몸이 더 청정해지는 걸 느껴보십시오. 모른다 하시고요. 몸과 마음에서 느껴지는 고요하고 편안한 느낌을 즐기십시오. 이때 마음에서 느껴지는 희열을 경험하면서 들이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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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희열을 경험하면서 내쉬십시오. 들이쉬고 내쉬면서 기뻐하는 마음을 알아차리십시오. 또 은은하게 만족해하는 즐거움을 느껴보십시오. 즐거움을 경험하면서 들이쉬고요. 즐거움을 경험하면서 내쉬십시오. 호흡을 알아차리시면서 은은한 만족감이 흐르는 것을 느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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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느껴지는 마음의 여러 가지 느낌들을 모두 알아차리십시오. 그리고 이 느낌들을 평온하게 하면서 들이쉬십시오. 느낌들을 평온하게 하면서 내쉬시고요. 들이쉬고 내쉬면서 모른다라고 하시구요. 괜찮다라고 하십시오. 지금 이 순간 어떤 것도 부족한 것은 없습니다. 괜찮다라고 하세요. 호흡을 알아차리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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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의 힘을 빼십시오. 편안한 느낌이 드는지 알아차리시고요. 고요한 느낌이 드는지 알아차리십시오. 자 이렇게 여러분은 호흡을 통해 마음의 느낌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이제 마음을 경험하면서 들이쉬고 내쉬십시오. 여러분의 고요한 마음을 느껴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 조금도 부족한 게 없다는 것을 느끼면서 호흡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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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른다라고 하시구요. 괜찮다라고 하십시오. 들이쉬고 내쉬면서 마음이 기쁜 상태인지 확인하십시오. 조금도 부족함을 못 느낀다는 것을 확인하십시오. 그리고 마음이 고요한지 관찰하십시오. 마음이 집중돼 있는지 알아차리십시오. 자 이제 오온의 모든 집착에서 초월해 있는지 알아차리십시오. 모른다라고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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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라고 하십시오. 지금 이 순간 어떤 것도 부족한 것은 없습니다. 어떠한 탐욕과 번뇌도 이 자리를 침범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내면의 확고해진 알아차림을 느껴보십시오. 어떠한 고통도 없는 순수한 알아차림으로 존재하십시오. 여기에 내가 아닌 것은 어떤 것도 없습니다. 이 자리가 청정한 해탈이고 열반의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 안주하십시오. 긴장을 풀고 푹 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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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온에 대한 집착이 일어나면 모른다라고 하십시오. 그리고 괜찮다라고 하시고 순수한 알아차림으로만 존재하십시오. 자 이렇게 여러분은 고통에서 벗어나셨습니다. 지혜가 없는 선정은 불완전합니다. 지혜는 알아차림과 있는 그대로의 관찰에서 계발됩니다. 자 이제 다시 오온으로 돌아갑니다. 호흡을 알아차려 보십시오. 들이쉬고 내쉬고 끝이 없이 순환하는 호흡을 알아차리십시오.
14:04
호흡은 늘 변화하여 무상하다는 것을 관찰하십시오. 호흡은 무상하여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관찰하십시오. 무상하고 고통스러운 호흡은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관찰하십시오. 무상하고 고통스럽고 내가 아닌 호흡에 집착할 이유가 없습니다. 호흡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으십시오. 호흡에 대한 집착이 느슨해진다는 거를 관찰하십시오. 집착이 소멸되는 걸 관찰하면서 호흡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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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을 놓아버리는 것을 관찰하면서 호흡하십시오. 이제 호흡도 오온도 내려놓으시고 어떠한 고통도 없으며 탄진치가 없는 순수한 알아차림으로만 존재하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니르바나에 도달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안주하십시오. 자 저를 보시고요.”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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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마음이 고요해지시던가요? 지금 명상 끝났다고 자리가 사라졌습니까? 저를 보시는 건 오온이에요. 식별하고 고온 너머의 알아차림이 있으십니까? 아까 느끼셨던 고요한 알아차림이 지금 있으신가요? 약해지셨다면 모른다고 하십시오. 모른다 하시면 다시 그 느낌이 생생해질 겁니다. 일상생활 바쁜 중에는 호흡을 알아차리시든가 아니면 모른다고 계속하세요. 모른다고 하는 순간 오온을 통으로 던져버립니다. “오온이 알 게 뭐야?”라고 하십니다 하면 됩니다. 지구가 무너져도요 오온일 뿐입니다. 지구가 무너지는 게 색 수상 행식밖에 더 있습니까? 제가 색 상행식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요 지구가 무너지는 것도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제가 죽고 사는 것도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걱정이 일어난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걱정도 오온이니까요? 이해되십니까? 이래서 아라한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통으로 던져버릴 수 있는 실력,
17:00
그 기술 이건 무형문화재예요. 무형문화 전수자가 되셔야 돼요. 글로 있으면 뭐합니까? 악보가 내려오면 뭐합니까? 연주를 못 하는데. 연주할 수 있는 그 심법, 노하우를 아는 사람이 없어지면요 이 땅에서는 법이 사라져요. 불법(佛法)이 아무리 있어도 승(僧) 구도자들이 없어지면요 그걸 전수받는 사람들이 없어지면요 이 땅에 도는 사라져요 우주의 법은 없는 거랑 똑같이 됩니다. 그래서 이걸 아는 분들이 많아져야 돼요. 이걸 마음으로 배우시는 분들이. 아까 말한 신령지와 해탈을 얻으신 분들이 많아지시면요 이 법은 진실한 게 되고 현상계에서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어떤 순기능을 하게 됩니다. 엄청난 이익을 얻을 수 있죠. 그래서 대승의 보살들이요 이걸 알고 나 혼자 윤회를 멈춘다 하는 그런 작은 목적으로 쓸 수가 없다, 이거는. 나는 이미 윤회를 초월한 아라한 경지에 들어갔죠. 그러니까 아라한에 들어간 사람들이 보살도를 하는 겁니다. 나는 자유를 얻었으니 내가 문제가 아니라 한 명이라도 더 깨닫게 해야겠다.
18:00
이 서원은요 그때나 서요. 그전에는 자기도 괴로운 중에 뭘로 남을 행복하게 해 줄지 답도 없이 보살도 서원을 세우는 게 되죠. 그게 진정한 보살이 아닙니다. 자기는 답을 얻어야 돼요. 이 아라한 정도 실력을 얻지 못하면요, 이게 대승해서 1주보살 정도 실력인데 이 실력이 없이는요 남을 도와줄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자기 문제가 전혀 해결이 안 됐어요. 자기도 빚지고 다니면서 남 도와주겠다고 이렇게 하면 남들도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렇겠죠. 그래서 너 거나 먼저 해라. 아라한 실력이 왜 윤회를 초월했다고 할까요? 오온에서 자유로워졌기 때문에 그거를 윤회를 초월했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나는 이제 오온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오온이 윤회하는 거거든요. 오온이 윤회를 하는데 나는 윤회를 하건 말건 간에 앞으로 나는 오온에서 나를 분리시킬 수 있게 됐다 하는 이 실력입니다. 이걸 인도에서 전통적으로 윤회를 초월했다고 그냥 얘기를 했어요. 대승은 여기에 반대한 겁니다. 오온에서 집착을 초월한다고 해서 실제 오온의 흐름이 멈추는 건 아니라고 본 거예요.
19:00
요건 입장이 다른 겁니다. 어느 학설이 더 와 닿으실 지는 여러분이 정하세요. 저는 소개를 해 드리는 겁니다. 소승은 이 정도 얻은 뒤에 윤회를 벗어났다고 본 거고, 대승은 벗어나지 못했다고 본 겁니다. 여기서 입장이 갈려요. 여기까지 설명 드리고요.
[* 초전법륜경
이와 같이 법(4성제)이 설해졌을 때, 꼰단냐(교진여) 존자에게 “일어난 것은 조건에 의해 사라지게 된다”(3법인, 고통ㆍ무상ㆍ무아[비아非我가 정확!])라는 청정한 ‘법안法眼’이 열렸다. (수다원과의 오도송) … 그때 세존께서는 “오! 참으로 꼰단냐는 깨달았다. 참으로 꼰단냐는 깨달았다”라고 하셨다.]
그다음에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을 보면서 부처님 당시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한번 제가 설명을 드릴게요. 우리가 지금 이렇게 방금 느끼고 체험한 이 내용과 석가모니께서 처음 얘기를 해 가지고 초전법륜 처음 5명의 제자가 있었어요. 그 제자한테 가르친 내용하고 제자들이 아라한에 이르는 과정을 한번 보면 도움이 되겠죠. 우리가 방금 체험한 게 가짜인지 진짜인지 보십시오. 초전법륜경을 지금 제가 다는 설명 못 드립니다만 꼰단냐(Kondanna)라고 하죠. 교진여(橋陣如) 이거 유명한 양반인데 부처님한테 처음으로 깨달음을 인가받은 분이에요. 부처님이 니르바나를 체험하고 나서요 진짜 성불하시고 나서 앞으로는 좀 어려워집니다. 여기서부터는 이제
20:00
대승도 오가면서요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를 아주 하면서 정리를 하면서 힌두교나 선불교까지 넘어갈 겁니다. 방금 이 느낌을 가지고요. 여기까지 정리를 하세요. 여러분이 체험하신 게 지금 니르바나를 아주 한 자락이라도 분명히 보셨을 겁니다. 이 창문을 통해 본 하늘이나 건물 밖에 나가서 본 하늘이나 똑같습니다. 여러분이 조금이라도 탐진치가 사라진 자리를 마음에서 느끼셨다면 그 자리에 니르바나입니다. 그 자리를 확대하세요. 늘 그 자리에 머물려고 하세요. 그러면 그게 아라한이 되는 지름길이고요. 수다원(須陀洹)은 뭘까요? 첫 번째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얻어요. 여러분이 공부하시다 보면 그다음에 사다함(斯多含) 세 번째 아나함(阿那含) 네 번째 아라한(阿羅漢)을 얻습니다. 이건 어떻게 되냐면요 뒤에 또 나오죠. 뒤에 걸 먼저 볼게요.
[* 수행의 4단계
1. 수다원(預流) : ‘자연스럽게 흐르는 알아차림’ 즉 ‘열반’의 짧은 체험(20~30%), ①~③을 벗어남
2. 사다함(一來) : ‘열반안주’가 길어짐(70~80%), ④~⑤가 약해짐
3. 아나함(不來) : ‘열반안주’가 이어짐(애씀◯), ④~⑤를 벗어남
4. 아라한(應供) : ‘열반안주’가 이어짐(애씀⨉), ⑥~⑩을 벗어남]
14페이지 보시면 수다원 사다함
21:00
아라한과가 나오죠. 수다원과가 뭐라 하냐면요 흐름에 들었다 예류과(預流果) 흐름에 들었다는 과거든요. 입류(入流)라고도 하는데 니르바나에 가는 흐름에 들었어요. 방금 조금 전에 니르바나를 조금이라도 정확히 “이게 니르바나구나”라고요. 개념적으로까지. 체험과 개념을 통해서요 “이게 니르바나구나” 아까 “현상계 무상․고․무아인 오온과는 다른 청정한 니르바나구나”라는 확신을 얻으시면 여러분은 수다원과에 도달한 겁니다. 짧은 체험입니다. 열반에 대한 짧은 체험이에요. 이게 수다원과의 특징입니다. “아! 이거구나”라고 명확해야 돼요. 이건가 하지 마시고요. 무상․고․무아를 정확히 이해하시면 니르바나도 정확합니다. 이거 아닌 거니까요. 무상․고․무아가 없었습니까? 여러분 체험하신 데. 그러면 거기가 니르바나입니다. 거기 수다원과예요. 그런데 이 짧은 체험이 있기 때문에 평상시에 여러분이 자꾸 체험하신다고 해도 평상시에 20~30%밖에 안 돼요, 이때는. 체험이 짧죠. 그러니까 이상한 짓을 더 많이 한다는 얘기죠. 고통에도 많이 노출돼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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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함과에 가면요 일래(一來)과. 한 번만 더 태어나면 된다는 과거든요. 여기(수다원과)는 칠래과(七來果) 일곱 번은 더 태어나야 된다. 여기는 한 번만 더 태어나면 된다 하는 이 사다함과는요 니르바나에 도달하기까지죠. 사다함은 지금 니르바나에 거의 도달했어요. 즉 그 증거가 뭐냐면 평상시에 이제 고통이 없는 때가 더 많아요. 니르바나에 안주한 때가 훨씬 많아요. 고통에 노출, 오온에 노출됐을 때보다 요게 사다함과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인정을 못 받죠. 한 번 더 와야 된다. 세 번째 아나함은 이제 안 와도 된다(불래不來). 천상계에서 그대로 해탈이다 하는 이 정도 양반은요 지금 니르바나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요 뭔 차이냐 하면요 니르바나에서 조금이라도 내 마음이 흔들릴 수 있는 상태예요, 아직. 이해되십니까? 니르바나를 붙잡고 있어요. 누가 와서 확 건드리면 이게 깨져버릴 수도 있는 상태예요. 요때를 아나함이라고 그러고 아라한은 이제 내가 뻘짓을 하려고 해도,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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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에 본래 니르바나가 있었거든요. 이게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여러분이 니르바나를 붙잡는다라고 제가 표현했는데요 거기에서 오해하시면 안 되는 게 니르바나가 내 마음에 원래 없었는데 니르바나를 얻었다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얻은 건 반드시 놓게 돼 있어요. 니르바나는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무위법이기 때문에 인과법이랑 상관이 없어요. 인과법은 니르바나를 만나게 하는 걸 도와줄 뿐이지 니르바나는요 원래 항상 여여(如如)해요. 그러니까 대승불교에서 여여라는 말을 쓰는 게 늘 같아요. 그냥 이 자리는. 니르바나예요. 여러분이 지금 보고 계시죠. 이 상태가 니르바나입니다. 알아차림이 니르바나기 때문에 여러분의 알아차림이 없다면 저를 어떻게 보세요. 알아차림이 없다면 오온이 일어날 수가 없어요. 뭐가 있어서 식별을 하시는데요. 식별이 사라진 뒤에 여러분은 뭔데요? 여러분은 늘 니르바나세요. 자고 일어나면 니르바나예요. 그런데 식별을 일으키니까 다시 오온에 빠져드는 겁니다. 그러면서 니르바나를 못 구한다고 해요. 파랑새 같은 거예요. 니르바나는. 여러분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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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고 계신데 못 찾아요. 가끔씩 가끔씩 여러분 탐진치가 없을 때가 와요. 여러분 가장 행복하실 때 한번 생각해 보세요. 특별할 때 아니에요. 저한테 행복할 때는 따뜻한 햇살 맞으면서 집에서 일 없이 뒹굴 때요. 뭐가 갖춰져서 행복할까요? 부족한 게 없기 때문에 행복해요. 행복지수는 원하는 것 분에 가진 겁니다. 원하는 게 없다면 행복지수는 무한대가 돼요. 가진 걸 늘려서 더 행복을 늘릴 수도 있지만 원하는 게 없으면 행복해져요. 여러분이 뭔가 원하는 게 없을 때는 니르바나 상태예요. 왜냐? 오온이 작동을 못 해요, 그때는. 오온의 작동만 멈춰지면 그대로 니르바나입니다. 원래 있던 게 나오는 거예요. 이해되시죠. 이렇게 해서 아라한이 도달한다는 것은 자신의 본래 모습을 찾는 겁니다. 그래서 선가에서 본래면목. 면목(面目)은 얼굴이지요. 면목이 없다. 본래 얼굴을 찾았다고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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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니 뭐니 다 그 얘기는요 그 자리의 아름다운 칭호예요. 니르바나 주인공 하면 상이고요. 니르바나는 상이 아닌가요? 열반도 상이에요. 불 꺼진 자리라는 뜻이에요, 니르바나는.불 꺼졌다는 상 아닌가요? 쓰지 말 거면 열반도 쓰지 말아야 돼요. 진여는 틀렸고 니르바나는 맞다. 이런 것도 참 코미디입니다. 알고 보면 코미디예요. 이 상은 내가 쓰던 거니까 좋고 이 상은 내가 안 쓰던 거니까 불편하다. 자기랑 희동오이(喜同惡異)라 그러죠. 같으면 좋아하고 다르면 싫어하는 거. 이런 마인드로 니르바나 구경도 못합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은 글로 니르바나 배운 분들이 너무 많아요. 생활 속에서 고를 바로 소멸 못 시키면서 글로 니르바나를 배워서 “내가 니르바나 좀 알지” 하고 이렇게 “뭐 물어봐.” 이렇게 얘기를 해 주죠. 얘기 듣고 있으면 저 양반도 행복하지는 않은 것 같다. 코미디죠 뭔 짓을 하고 있는 겁니까. 연목구어(緣木求魚)라고 그러죠, 맹자에서. 나무 위로, 고기 잡으러 나무 위에 올라가는 걸 연목구어라고 합니다.
26:00
연목구어가 돼요. 고기를 잡으면 바다로 가야 되는데 나무 위로 올라가요, 우리가. 니르바나 모르는 사람한테 니르바나를 물어봅니다. 찾지 마세요. 부처님 말씀 16법 안에 아까 거기 다 들어 있어요. 니르바나를 수없이 만나야 돼요.
[* 초전법륜경
이와 같이 법(4성제)이 설해졌을 때, 꼰단냐(교진여) 존자에게 “일어난 것은 조건에 의해 사라지게 된다”(3법인, 고통ㆍ무상ㆍ무아[비아非我가 정확!])라는 청정한 ‘법안法眼’이 열렸다. (수다원과의 오도송) … 그때 세존께서는 “오! 참으로 꼰단냐는 깨달았다. 참으로 꼰단냐는 깨달았다”라고 하셨다.
* ‘4성제’를 듣고 ‘고통’(5온의 무상함이 고통)의 실체를 보고, ‘고통의 소멸’(고통의 원인인 ‘5온에 대한 갈애’를 내려놓음)을 체험한 자리가 바로 ‘수다원과’이다. (고통 소멸에 안착→ 아라한과)]
자 초전법륜경에서 사성제가 설해졌을 때 꼰다냐 존자에게. 사성제를 처음에 초전법륜 때요 사성제를 얘기해줘요. 고집멸도(苦集滅道) 고통을 멸하려면 팔정도밖에 답이 없다. 이 얘기를 딱 해 주니까 꼰다냐가요 교진여가 딱 깨달았어요. 뭐라고 했습니까? 일어난 것은 조건에 의해서 사라지게 된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을 깨달았어요. “아! 오온이라는 거 내가 나라고 여겼던 것들은 다 무상하구나.” 니르바나를 살짝 맛봤으니까 이 말이 나오겠죠. 니르바나를 체험 못 했다면 무상한지도 몰라요. 이게 상대적입니다. 무상․고․무아만 알면 됐지 이게 견성(見性)이라고 자꾸 얘기하시면, 견도(見道)라고 얘기하시면 엉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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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알려고 했나요? 내가 고통스럽다는 걸 알려고 수행했나요? 열반을 얻으려고 수행했죠. 이거(무상․고․무아) 반대 개념이 이거(열반)기 때문에 이걸(무상․고․무아) 안다는 것은요 결국 이리(열반) 들어가기 위해서 안 거고요. 이걸(열반) 알고 나면 이게(무상․고․무아) 더 적나라하게 드러나요. “진짜 고통이었구나.” 이 두 개는 상대적입니다. 니르바라 자체는 절대적이지만 저게 상대적으로 우리 안에 개념으로 작용해요. 저게 명확하게 되는 게 사법인(四法印)이에요. 무상․고․무아․열반적정 이 4가지가 선명하게 알아져야 되는데 이 얘기를 꼰다냐는 알았어요. 니르바나를 봤기 때문에 무상하다는 게 선명해진 겁니다. 다만 거기 안착만 못한 거예요. 이게 수다원과의 오도송(悟道頌)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수다원과를 얻었다고 보거든요. 이때 이제 꼰다녀가 이걸 알아가지고 청정한 법안(法眼)이 열렸다라고 부처님이 인정해 줍니다. 법을 꿰뚫어보는 눈이 열렸다. 그때 세존이 얼마나 감격했겠어요. 첫 제자가 나온 거예요. “참으로 꼰다야는 깨달았다. 참으로 꼰단야는 깨달았다.” 이 말을 두 번이나 하십니다. 이때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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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천(梵天)이 울리고 뭐 난리가 나는 얘기를 씁니다. 이거 깨달았다는 거에 부처님이 너무 기뻐하세요. 처음 가르쳐서 처음 얻은 거니. 이게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5명한테 가가지고 같이 수행하던 5명인데 내가 성도(成道)하고 나서 누구를 가르칠까 하다가 가가지고 고 5명이 생각나서 가서 5명이 부처와도 아는 체하지 말자고 했던 합의를 했는데 가니까 저절로 이제 부처 모습을 보고는 탄복을 하게 돼요. 승복을 하고 배우는데 바로 교진여가. 그날 붙잡고 밤새 얘기를 했겠죠. 내가 얻은 거 사성제 사법인 이렇게 얘기하니까 수다원과가 열려버렸어요.
[* 무아의 형상경(無我相經, 상윳따니까야 S22.59)
(이 경은 부처님이 성도하시고 난 후 2번째로 설한 경이라고 한다. 첫 번째 경은 ‘4성제’를 설한 초전법륜경이다. 두 번째 설한 것이 바로 이 경으로 ‘3법인’을 설한다.)]
그다음에요. 이 고통 소멸에 안착하면 아라한인데 그 두 번째 설한 게 무아의 형상경입니다. 무아상경이에요. 초전법륜에서는요 교진여가 처음 깨닫고 이제 얘기가 끝나면 무아상경 가면요 형상경 가면은 초전법륜 뒤로 삼법인을 구체적으로 얘기해 줘요. 삼법인을 다시 명확히 얘기해 주니까 이때 다 아라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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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 버려요, 5명이. 그때 사실은, 이때 동시에 아라한에 들어간 게 아니라 이때 얘기를 들어보면 이래요. 아라한을 먼저 이룬 사람이 있으면 먼저 이룬 사람이 탁발을 나가요. 아라한 안 된 사람은 부처님 얘기 들어야 되잖아요. 이 사람이 탁발 나가서 가져오면 나눠 먹고 계속 지금 1 대 5 개인 교습이 일어난 겁니다. 이때 이 5명이 성공을 해야 이 학원이 성장하냐 안 하냐가 이 5명, 부모가 와서 데려가 버리면 끝나는 거예요. 그래서 이 5명을 합격을 시키려고요. 교진여가 처음에 1차 필기시험 합격하니까 이제 대놓고 시작합니다. 먼저 된 사람이 탁발 나가고 먹고 또 하고 계속하니까 다 터졌어요. 그 터질 때 얘기를 하는 겁니다. 삼법인 얘기를 합니다.
[1. “비구들(5명의 비구)이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색色’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무상無常)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괴로운 것입니다. 세존이시여!”(고苦)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고, 이것은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한다면 옳은 것인가?”(무아無我)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5온 중 나머지 ① 수受 ② 상想 ③ 행行 ④ 식識도 동일함)]
비구들이여 딱 5명이에요. 5명한테서 이제 시작한 게 지금 전 세계적으로 큰 학원이 됐죠 어떻게 생각하냐? 색은 영원하냐? 색수상행식 오온을 물어봐요. 이거 물어본 게 아주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제가 제일 질문 많이 받는 게 하나가 “제법무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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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도 법 아닙니까? 무위법도 법 아닙니까? 이것도 무아 아닙니까? 이것도 무아 아닙니까?” 이분들은 뭘 착각을 하냐면 번역이 좀 애매하게 돼서 일어난 착각이에요. 무아라는 것은 아트만이 아니라 즉 이야기는 뭐냐면 나라는 게, 원래 원문은 내가 아니다라는 뜻이니까. 비아(非我)가 맞는데 이걸 무아(無我)라고 번역을 해 놓으니까 “나라는 건 애초에 나라는 실체는 없다, 영원히. 아트만을 반대한다. 나라는 건 아예 없다.” 이렇게 번역이 되다 보니까 “제법무아인데 제법에는 열반도 들어가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럴싸해요. 이게 왜 엉터리 얘기냐면요 이건 뭐 반박할 가치도 없는 엉터리 얘기예요. 그런데 이런 말이 왜 자꾸 어떤 좀 알만한 분들 사이에서 자꾸 얘기가 되니까. 제법무아라고 번역해 놓고 이 법에는 무위법도 들어가니까 열반도 들어간다라고 해버리면 이게 전혀 코미디 얘기하면. 부처님은 한 번도 제법(諸法) 얘기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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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을 넣은 적이 없습니다. 불경 다 뒤져 보세요. 한 번도 없어요. 그리고 열반을 무위법이라고 분류한 건 훨씬 뒤에 부파 불교에서 한 일이에요. 열반도 하나의 법으로 분명히 사법인 중의 하나니까요. 부처님은 그런데 분명히 제법무아 제행무상 이렇게 얘기할 때는요 오온만 가지고 얘기해요. 절대 니르바나까지 얘기가 뻗어 나가질 않아요. 그리고 두 번째, 절대 이 무아는요 모든 법에 니르바나까지 포함해서 모든 법에 나라고 하는 건 애초에 전혀 없다. 이런 얘기 한 적이 없으세요. 이거는 비아(非我)라는 뜻이에요. 철저히 오온은 내가 아니라는 얘기만 계속하셨어요. 자 보세요. 그 증거입니다. 하도 답답해서 제가 요걸 한번 소개해 드리려고 뽑았습니다. “색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무상을 인정했죠. 제자들이 정확하게 인정을 합니다. 무상은 색은 무상합니다. 두 번째 “무상한 거는 괴롭냐? 즐겁냐?” 무상하니까 괴롭다는 겁니다. 괴롭다는 근거도 분명하죠. 무상하니까 괴롭다는 거예요. 그놈이 자꾸 나를 괴롭히는, 와서 괴롭히고 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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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하다는 것 자체가 괴로움이다. 내가 손에 들고 있는 거는 반드시 변해버리니까 괴롭죠.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을 두고 내 것이고, 이것은 나이며 이것은 자아이다라고 하면 옳은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내 것이 아닙니다.” 자 요게 지금 나머지 수상행식에 대해서 동일한 법문이 계속 이어집니다. 이해되시죠. 그건 내 것이 아닙니다. 무상하니까. 제법무아에 니르바나가 끼질 않아요. 두 번째 보세요.
[2. 비구들이여, 어떠한 ‘색色’(표상)이든,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바깥의 것이건, 거칠건 섬세하건, 열등하건 뛰어나건, 멀건 가깝건, 그 모든 ‘색’은 이와 같이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나’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非我)라고 올바른 지혜로 관찰해야 한다. (5온 중 나머지 ① 수受 ② 상想 ③ 행行 ④ 식識도 동일함)]
또 한 번 다시 얘기합니다. 어떤 색이든 그것이 과거의 거든 미래의 거든 색수상행식 중에서요 색은 미래 것이건 현재 것이건 안에 있건 밖에 있건 거칠건 섬세하건 열등하건 뛰어나건 멀건 가깝건 모든 색이라는 놈은 내 것이 아니고 내가 아니고 내가 아니고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하고 올바른 지혜로 관찰해야 된다라고 이 얘기를 또 수상행식에 걸쳐서 또 지루하게 얘기를 하십니다.
[3. 비구들이여, 이처럼 보고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① ‘색色’을 싫어하여 떠나고 ② ‘수受’를 싫어하여 떠나고 ③ ‘상想’을 싫어하여 떠나고 ④ ‘행行’을 싫어하여 떠나고 ⑤ ‘식識’을 싫어하여 떠난다. 싫어하여 떠나서 집착이 소멸하매 ‘해탈’한다. 해탈하면 “나는 해탈했다'(해탈한 자아, 무상ㆍ고ㆍ무아[내가 아님, 비아非我]를 떠난 아我)”라는 지혜가 생겨난다. “태어남은 다했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청정한 아我) 해야 할 일을 다 마쳤다.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무상ㆍ고ㆍ무아의 윤회를 초월한 아我)” (아라한의 오도송)라고 그는 분명히 안다.
(현상계의 ‘모든 존재’를 대표하는 ‘색수상행식’ 자체를 싫어하여 떠나라고 했다. 단순히 이 자리가 ‘무상’하고 ‘고통’이고 ‘내가 아님’이라는 것만을 알아차리라고 하지 않았다. 이들을 모두 싫어하여 내려놓고 초월할 수 있어야 ‘열반’을 바로 볼 수 있다. ‘색수상행식’을 초월하는 것이 바로 ‘해탈’이라고 하였다. ‘색수상행식’이 무상ㆍ고ㆍ무아[비아]임을 알고 이를 모두 초월할 뿐이다. ‘순수한 알아차림’은 무상하지 않고(常), 고통스럽지 않고(樂), 내가 아님이 없으니(我), 그 자리가 바로 ‘청정’(淨)이며 ‘해탈’이며 ‘열반’이다. 상락아정常樂我淨! ‘색수상행식’을 내려놓고 그 자리를 체험하고 그 자리에 안주할 뿐이다!)]
세 번째, 비구들이여 이처럼 보고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여기까지가 중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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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무상․고․무아를 알았다고 해서 해탈이 온 게 아닙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요? 니르바나에 들어가야 해탈이 되잖아요. 이걸 분명히 하십니다. 무상․고․무아를 알았다면 색을 싫어하여 떠나고. 반드시 싫어해서 버려야 해탈이 와요. 아까 호흡 16법 중에 마지막에 했었죠. 호흡이라는 것을 버렸죠. 여러분이 집착을 소멸시키고 버렸어요. 오온을 버려야 됩니다. 수를 싫어하여 떠나고 상을 싫어하여 떠나고 행을 싫어하여 떠나고 식별을 싫어하여 떠나면 떠나서 집착이 소멸하매 해탈한다. 아까 여러분이 해탈을 체험하신 거예요. 그렇죠. 이렇게 해탈하면 이런 말이 절로 나온다는 거예요. 나는 해탈했다. 즉 보십시오. 여기도 나는 해탈했다고 하면 해탈한 나가 있죠. 이해되십니까. 나가 있어요. 이 나가 진아라는 거예요. 왜냐? 열반도 내 마음이니까요. 해탈한 내가 있어요. 해탈한 마음이 있어요. 나라고 하면 또 오해가 생기니까 해탈한 마음이 여러분한테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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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를 “나”라고 하고 “주인공”이라고 하고 “본래 면목”이라 하는 겁니다. 열반은 실체입니다. 열반이 실체가 아니라는 둥 열반은 의식이 아니라는 둥 도대체 그럼 뭘로? 무의식 상태입니까? 기절을 하셔야 해탈하나요? 해탈하려면 이렇게 한 대씩 맞고 쓰러져서 “어 제가 정신을 잃었습니다.” 이게 해탈인가요? 이런 게 아니에요. 의도적으로 색수상행식이 무상(無常)하고 고(苦)고 무아(無我)인 줄 알고 버리는 사람 마음에만 일어납니다. 이해되시죠. 이렇게 해서 나는 해탈했다라는 지혜가 생기고요. 태어나면 다했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누구한테요? 나한테요. 그 마음에 이루어진 거예요. 그분 마음에. 내가 해야 할 일을 다 마쳤고 난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온을 버렸기 때문에 나는 오온이 윤회하는 거기 때문에 난 윤회를 초월했다 이 말이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대승은 그게 오온에 대한 집착을 버렸다고 오온이 어디 가는 거 아니라고 입장을 펴는 겁니다. 이게 뭔 얘기냐면 반야심경에서 첫 말이에요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주장하는 이유예요. 이게 소승 주장을 뒤덮는 거예요. 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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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하다라고만 알았느냐? 아니다. 공이 곧 다시 색이다. 즉 니르바나를 여러분이 니르바나에서 떠날 수 없다면 니르바나는 내 거죠. 니르바나에 존재하는 한에는 색수상행식도 같이 일어난다는 걸 주장합니다. 대승은요 색수상행식 자체도 청정하다고 봐요. 니르바나에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즉 여러분의 순수한 니르바나, 순수한 알아차림에 의존해서 색수상행식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도 결국은 바다가 청정하면 파도도 청정하다는 입장을 반야심경이 주장한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색수상행식에서 떠날 수 없다는 얘기를 하는 게 대승이에요. 그러면 뭘 해야 될까요? 색으로 좋은 여래의 몸을 만들고, 수로 여래의 자비심을 만들고, 상으로 여래의 지혜를 만들고, 행으로 대원을 세우고, 식으로 지혜를 얻는 겁니다. 이게 여래예요. 대승에서 생각하는 여래예요. 그래서 관세음보살 같은 분이 나와요. 니르바나에 들어가질 않아요. 들어갈 수도 없어요, 대승에서는. 부처님 생각이랑 틀려요. 석가모니 생각이랑 대승은 전혀 다릅니다. 대승은 더 나갔어요. 석가모니는 그래도 법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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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타니파타 보면 열반에 들으라고 얘기를 하는데 대승은요 열반에 들지 않는 부처나 보살을 이상형으로 세워야 되니까 아미타불하고 관세음보살이라는 기존 불교에 없던 분을 세운 거예요. 그분들은요 니르바나에 들어가질 않아요. 더 좋은 색 더 좋은 수 더 좋은 상을 가지고 중생을 구제하러 다녀요. 이게 대승과 석가모니와 소승이 다릅니다, 초기불교가. 소승의 아라한들하고요, 그러니까 대승에서 말하는, 석가모니 입장은 또 틀려요. 대승 입장은 또 틀려요. 이게 좀 헷갈리시더라도 잘 이해해 두시면 지금 앞으로 초기불교랑 대승불교가 아주 신나게 붙을 겁니다. 관전 포인트입니다. 지금 이 사람들이 이렇게 싸우게 된 배경이 뭐고? 정확히 서로 지금 이해가 안 되기 때문에 싸우는 게 뭔지 제가 정확히 설명 드릴게요. 오늘 설명 다 드릴 텐데 소승 아라한은요 석가모니랑 또 틀려요. 아까 얘기 드렸죠. 18불공법(不共法)이라고 석가모니만 하고 우린 못하는 걸 아예 인정해요. 그럼 석가모니는 레벨이 좀 다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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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정도 깨달은 게 아니에요. 석가모니는요 팔정도를 끝내주게 하고요. 소승 아라한은 팔정도를 그렇게 못해요. 이해되십니까. 팔정도를, 열반에 들었다는 것은 부처나 아라한이나 다 똑같은데, 대승 최고의 경지 보살도 다 똑같아요, 니르바나 들었다는 것 자체는. 가같이 아라한이에요, 사실은. 니르바나에 든 사람을 아라한이라고 부른다면. 하지만 석가모니 경지하고 지금 부처 제자들의 경지는 틀려요. 왜냐? 석가모니가 아라한 깨달으시려고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석가모니가 제일 둔한 근기게요? 교진여는 이야기 듣다 깨달아 버려요. 제일 상근기죠. 불경 보면 말이 안 되는 게 나옵니다. 석가모니가 처음 딱 성도하시고요 “이 법은 너무 어려워서 나나 알지 이걸 누구를 해줄 수가 없다” 하고 그냥 열반이 들려고 했는데 브라만이 와서 간청을 하죠. 아닙니다. 그래도 잘 찾아보시면 있습니다. 해서 그래 하고 했는데 얘기하자마자 아라한이 나와요. 뭔가 좀 이상하죠. 말이 안 되는 얘기입니다, 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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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경지랑 달라서 그래요. 그래서 대승불교에서 이걸 정확히 분석해요. 부처님 제자들의 경지는 1주보살의 경지고 석가모니는 최소 7지보살로 칩니다. 대승은 석가모니를 하느님처럼 얘기하죠. 그런데 냉정히 경전을 분석해 보면 석가모니 경지를 6지에서 7지 정도로 봅니다. 그 근거도 제가 좀 이따 제시해 드릴게요. 왜냐? 석가모니를 갖다가 대승해서 석가모니는 못 까니까 석가모니를 신격화시켜 버린 거예요. 대승의 최고보살이 한 10지에서 12지 그러거든요. 그리 올려버리고 석가모니 주장하고 다른 주장을 본인 입으로 하게 만들고 법화경 같은 거 보면요. 말도 안 돼요. 법화경 다 지어낸 겁니다. 지어냈는데요 무시할 게 아니라 그 지어낸 원리가 있어요. 그걸 이해하시는 게 먼저죠. 초기불경 먼저 이해를 해 보세요. 무아상경을 이렇게 보시면요 아라한이 정확히 어떤 건지 아시겠죠. 이 얘기를 제가 이렇게 글로 배우신 분하고는 대화가 안 된다는 게. 누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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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다사인가요? 태국의 고승들, 아잔 문, 아잔 차 이런 분들은요 다 인정합니다. 열반을 체험해야 된다. 붓다다사 같은 분은 찰나 열반 우리는 순간순간 열반에 접속한다. 이런 주장 다 얘기하시고요. 태국에서 아라한과를 지난 세기에 이뤘다고 인정받는, 공식으로 인정받는 아잔 문이라는 위대한 고승이 있는데 그분은 뭐라고 하냐면 “영원한 마음”이라고 불러요. 니르바나는 영원한 나의 마음, 진리 자체가 된 마음 이렇게 불러요. 그리고 그분의 제자인 아잔 차, 요즘 우리나라에 책 많이 나와 있습니다. 아잔 차 그분은요 자기의 깨달음 체험기를 썼는데 뭐라고 쓰냐면 “알아차리는 주체로만 존재했었다”라고 그래요. 그것을 니르바나라고 생각하십니다. 전혀 다르지 않아요. 그분은 호흡 관찰하다가 호흡이 뚝 끊어지면서 탁 텅 빈 제로 상태에 들어갑니다. 제로 지점으로 들어가요. 아무것도 없는데 알아차리는 나만 있어요. 그 상태에서 모든 게 무너지고 또 무너지는 걸 관찰해요. 그러다가 그대로 나와 가지고 내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얘기를 해요. 그럼 이 알아차린 놈은 누구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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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 과정을 보던 놈은 누구인데요? 그게 니르바나예요. 다 체험이 있는 사람은 똑같은 얘기를 하는데 글로 배우신 분들이 다른 얘기를 하면요 서울 안 가본 사람 어떻게 이깁니까? 서울 갔다 온 사람이 아무리 얘기해도 “야 나는 인터넷에서 다 자료 봤는데 네가 말한 거랑 틀려.” 인터넷 보신 분한테 어떻게 이겨요? 나 인터넷에서 싹 봤다. 서울 갔다 온 사람이 뭐 말을 아무리 할려고 해도 안 돼요. 자 이 경전은 지도입니다. 지도를 연구하시는 건요 그 자리 가보려고 하는 건데 지도만 연구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너무 무섭죠. 가볼 생각도 없어요. 난 지도에서 다 봤다. 내가 견성은 안 했어도 네가 말한 거 아니라는 건 알겠다. 막 이런 식으로만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많이 만났어요.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데. 서태지가 음악의 신이라는 분한테 뭐라고 설득하겠습니까? 본인이 생각하는데 완전히 꽂혀버린 분은요 어떻게 답이 없어요. 니르바나를 체험하신 분하고만 얘기가 가능합니다. 이걸 체험하시는 분은 가톨릭도 상관없고 힌두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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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없어요. 다 똑같은 얘기를 하니까요. 오온 내려놨을 때 하느님을 만나더라, 아트만을 만나더라, 불성을 만나더라, 여기에서 다른 얘기하시면요 그냥 알게 돼 있어요. 전문가들끼리 그걸 왜 몰라요. 말이 안 되죠. 지금 초기 불경 읽어도 정확히 그게 보이시죠. 보십시오. 초기불교에서 이런 얘기하면 아주 질색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무상․고․무아니까 니르바나는 어떤 속성이 있을까요? 무상의 반대는 무엇일까요? 상(常), 영원합니다. 니르바나 자리는. 고(苦)의 반대니까 락(樂). 거기에는 고통이 없습니다. 무아의 내 것 이거 아(我)는요 내 것 아님이 없어요, 그 자리에는. 아까 체험하셨지만, 순수한 알아차림에 내 것 아닌 게 없어요. 오온이 없어요 그 자리에는. 그리고 열반은 청정하기 때문에 정(淨), 상락아정(常樂我淨)이 열반사덕(涅槃四德)이라고 합니다. 대승에서 이것이 소승하고 다를까요? 초기불교랑 다른 얘기일까요? 상락아정이. 상락아정이 열반이라고 인정 못 하시는 분요 열반 안 해보셨다고 그냥 말씀드릴 수 있어요, 제가 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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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 자리를 체험하고 저 얘기가 안 나온다면 가짜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저기만이 고통을 소멸할 수 있다니 저기는 즐거운 자리예요. 내가 아닌 게 조금이라도 있으면요 오온이 있으면 여러분 괴로워요. 오온이 없다는 얘기예요. 저 나를 내가 아니란 말 쓰면 또 유신견(有身見)이다. 나를 인정했다. 이러지 마세요. 내가 아닌 오온을 버렸다는 얘기예요. 내가 아닌 게 없다는 얘기를 그럼 뭐라고 하겠습니까? 자 이해되시죠. 자 이렇게 하면은 보십시오.
[4. 세존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5명의 비구들은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에 환희하였다. 이러한 설법이 행해지는 동안에 5명의 비구들의 마음은 집착이 소멸하여 번뇌에서 해탈했다. (초전법륜에서 ‘4성제ㆍ8정도’를 듣고 수다원과를 얻은 뒤, 무아상경無我相經에서 5온의 ‘무상ㆍ고ㆍ무아[비아]’에 대한 ‘3법인’을 듣고 아라한과에 도달)
(5온 중 ‘식별’(識)은 나머지 4온인 ‘표상ㆍ느낌ㆍ생각ㆍ의지’와 함께 ‘생멸生滅’하는 ‘무상’하며, ‘내’가 아니라 ‘고통’인 ‘제법諸法’일 뿐이다.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무상한 것’은 ‘내 것’이 아니며, ‘고통’을 일으킨다. 우리의 ‘마음’ 중 ‘무상’하지 않아서 ‘내가 아님’이 없으며, ‘고통’을 일으키지 않는 ‘생멸하지 않는 마음’, ‘청정하고 순수한 마음’이 바로 ‘순수한 알아차림’이며, 이 자리야말로 ‘열반’이다! 이 자리는 ‘무위법無爲法’의 자리로 모든 인과를 초월하여 영원한 마음이며, 지복의 마음이며, 청정한 마음이다. 오직 이 자리에 안주할 때만, 우리는 모든 현상계의 구제적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세존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5명의 비구들이 환희하면서. 5명의, 설법이 행해지는 동안 5명의 비구들의 마음은 집착이 소멸하여 번뇌에서 해탈했다. 아라한에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분들은 두 번, 정확하게 초전법륜(初轉法輪) 때 수다원과를 얻고 무아상경(無我相經) 때 아라한을 얻어버려요. 이것도 더딥니다, 실제로 1000명이 그냥 해탈한 거에 비하면. 이해되시죠.
[* 법구경
일체의 행위(行, saṅkhārā)는 ‘무상’하다(無常)!”
지혜로 이렇게 볼 때 괴로움을 싫어하여 떠난다.
이것이 ‘청정’(淨)에 이르는 길이다.
모든 행위(行, saṅkhārā)는 ‘괴로움’이다(苦)! …
일체의 법(法, dhammā)은 ‘내’가 아니다(無我,非我 anattā)!]
법구경에도 보세요. 일체의 행위는 무상하다.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해탈은. 이렇게 지혜로 이렇게 볼 때 괴로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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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하여 떠난다. 이것이 청정에 이르는 길이다. 열반은 청정이라고 분명히 법구경(法句經)이 얘기했죠. 숫타니파타와 더불어 법구경은 가장 최초의 경전입니다. 모든 행위는 괴로움이다라고 똑같이 얘기가 나오고요. 일체의 법은 내가 아니라고 분명히 얘기합니다. 그리고 그걸 싫어해서 떠날 때 청정해진다. 이해되십니까. 여러분이 알아차림은 괴로운가요? 그 자리가. 알아차림이 무상하던가요? 그게 내 마음 아니든가요? 말이 아닌 소리예요. 이 자리를 체험하신 분만이 청정이라는 걸 아십니다. 제가 단언합니다. 그래서 대승열반경이 오면요 대승에서 진아는 상락아정한 마음을 말해요, 청정심을. 무슨 유신견이에요? 오온을 나라고 여기는 마음이에요? 되도 않는 얘기죠.
[* 대승열반경
(대승의 ‘진아眞我’는 ‘상락아정의 청정한 마음’을 말하는 것이니, ‘무상ㆍ고ㆍ무아(비아)’의 ‘5온’을 초월한 ‘나’이니, ‘유신견有身見’(5온이 ‘나’라는 견해)을 벗어나야만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유신견’을 ‘진아’와 동일시하는 것은 정말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 편견에 가득 찬 주장.)
‘나’(5온의 초월)라는 것은 바로 ‘여래장’이라는 것이다.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을 갖추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나’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나’라는 것이 애초부터 항상 무량한 번뇌에 덮여 있어서, 중생들이 볼 수 없는 것이다. … ‘법신’은 바로 ‘상락아정常樂我淨’이니, 영원히 일체 중생의 생사를 떠난다. … 선남자야, 일체 중생은 늘 ‘상락아정常樂我淨’의 4가지 법의 전도된 것으로 사유한다. 그러므로 ‘일체의 현상’(諸法)이 무상하고 즐겁지 않고 내가 아니며 청정하지 않음을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이 보아야 4가지 전도된 것이 끊어진다.]
그래서 보십시오. 대승열반경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대승열반경이 확실하게 이 나라는 걸 주장해요, 진아를. 나. 오온을 초월한 겁니다. 나라는 것은 바로 여래장, 여래의 씨알이니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을 갖추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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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나라는 거 없는 분 있나요? “나라는 존재감이 곧 열반이다”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 자리가 알아차림의 자리고. 보십시오. 나 배고파 .나 배고파. 그럽니다. 보세요. 니르바나는 나라고밖에 말 안 해요. 나라는 말 당연히 없죠. 나라는 존재감이라는 거죠. 이놈이 탁 말을 하면 오온의 하나에 접속하면 뭐라고 할까요? 나 배고파. 그런데 만약에 배고파랑 접속을 안 해 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나라는 존재로만 있으면? 그게 니르바나예요. 이러면 또 힌두교파라고. “드디어 커밍아웃 하는구나” 이럴 텐데. 이해되십니까? 나라는 존재감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알아차림밖에. 나라고 얘기하지도 않아요. 그냥 나라는 존재감이라는 거지. 조금도 수상행식하고 안 만나고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해되시죠. 그 얘기를 지금 대승열반경이 하는 거예요. 이와 같은 나라는 것이 애초에 항상 무량한 번뇌에 덮여 있어서. 오온 속에 있어요. 중생들이 볼 수가 없어서 그럴 뿐입니다. 법신이 바로 이 상락아정 자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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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법신이라는 겁니다, 대승에서. 진리의 자아. 법신이라는 말도 진리의 몸이라는 거죠. 진리 자체라는 거예요. 내 안에 진리 자체인 마음이 있어요. 그게 상락아정이니 영원히 일체 중생의 생사를 떠나 있다. 생사에 거기는 들어가질 않아요. 오온에 끼어들지 않기 때문에. 오온만 생사가 있습니다. 선가귀감(禪家龜鑑)에 보시면요 휴정 스님이 생사일여를 뭐라고 설명하냐면 한 생각 일어나는 게 생(生)이고 한 생각 사라지는 게 사(死) 그럽니다. 그게 오온의 생멸을 말해요. 오온의 생멸에서 내가 탁 떠날 수 있으면 그 사람이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다. 어렵지 않죠.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태평양 바다 같은 거에서 딱 바다에서 벗어나서 볼 수 있는 분은 생사를 초월하신 분입니다. 야 죽어봐. 이러지 마시고요. 생사일여는 그런 게 아니에요. 지금 판타지가 엄청나서요 생사일여 제가 이뤘다고 하면 아마 “너 죽어봐.” 이럴 겁니다. “다시 살아나나 보자.” 이런 얘기가 아닙니다, 지금. 아라한도 너무 과한 걸 요구하지 마세요. 아라한에 제가, 아라한이 스스로 폭로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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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한의 실체에 대해 조금 이따 충격 고발 이렇게 있습니다. 선남자야 일체 중생은 늘 상락아정 네 가지의 법이 전도된 것으로 사유한다. 그러므로. 일체 중생은요 오온을 갖다 상락아정이라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그게 전도(顚倒)됐다는 겁니다. 그것만 벗어나면 전도가 끊어진다. 이해되십니까. 대승열반경이라고 다른 얘기하는 게 아닌데 나라는 말에 딱 걸려가지고 “어! 대승 유신견이네. 오온을 자아라고 했네.” 이러고 더 보지를 않고 많아요, 그래가지고.
[* 백운화상어록白雲和尙語錄
불법이란 것이 원래 별다른 것이 아니니, 감정과 생각만 끊어 버릴 것 같으면, 당장에 깨닫고 인정할 것이다.]
백운화상이 고려 말의 유명한 화상입니다, 나온 태고 보우스님과 함께. 불법이라는 것이 원래 별다른 것이 아니니 감정과 생각만 딱 끊어버리면 당장 깨닫고 인정할 것이다. 이러니 언하의, 수다원, 아라한은 몰라도 수사원과는 나오죠. 여러분 모르시죠. 모르는 자리가 나라는 존재감이고 알아차림이라는 거 아시죠. 여러분 1초 열반에 드셨습니다. 1초 1초가 길어지면요 평생이 돼요.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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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거 찾지 마세요. 1초 열반이라도 1초는 그거예요. 끝내주는 게 있지 않을까? 이게 식(識)입니다. 오온이에요. 오온이 어떻게 여러분을 붙잡아 내리냐면요 “그게 너한테 별거 해줬어?” 이런 식으로 “더 끝내주는 게 있지 않을까?” 이런 얘기를 자꾸 터트립니다, 안에서. “그런가?” 하면 여러분 생사일여를 못 들어가요. 계속 부침(浮沈)만 거듭합니다. 백운화상처럼 딱 끊어버리세요. 그게 일체지(一切智)예요.
[* 대념처경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 ‘4념처’를 이와 같이 7년을 닦는 사람은 두 가지 결과 중 하나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여기서 ‘궁극의 지혜’(아라한과)를 얻거나, 집착이 남아 있으면 ‘아나함과’(불환과不還果)를 기대할 수 있다. … 보름은 그만두고, 누구든지 이 4념처를 이와 같이 7일을 닦는 사람은 … 지금 여기서 ‘궁극의 지혜’(아라한과)를 얻거나, 집착이 남아 있으면 ‘아나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보리왕자경에서는 7일도 길며, 저녁에 배우면 아침에, 아침에 배우면 저녁에 ‘특별한 경지’를 얻을 수 있다고 설하심.)]
대념처경(大念處經)이에요. 보십시오. 부처님의 생생한 증언. 누구든지 사념처를요 7년을 닦아라. 그러면 아라한을 얻거나 불환과, 아라한 아래 아나함과를 얻을 거다. 수다원도 아니에요. 7년만 닦으면 아나함 아니면 아라한이다. 그러니까 니르바나에서 안 떠난 상태는 갈 거다. 애를 썼느냐 안 썼느냐 차이죠. 애를 쓴다는 건 아직 식이 작용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나함이 욕망이 더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다음 말이 끝내줍니다. 보름은 그만두고 7일만 닦아 봐라. 그러면 지금 여기서 아라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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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거나 아나함을 얻을 거다 했죠. 그런데 보리왕자경에는 더 끝내줘요. 7일도 길고 저녁에 배우면 아침에 깨닫고요. 아침에 배우면 저녁에 깨달을 거라고 얘기를 해 줘요. 보리 왕자가 깜짝 놀랍니다. “끝내줍니다. 어떻게 아침에 배워서 저녁에 깨닫습니까?” 이러고 끝나요. 부처님의 마케팅 전략이었다고 보지 마시고 이게 가능하니까 자신하고 얘기하셨고 실제로 얘기 듣다 터진 사람이 있잖아요.
[* 아라한의 경지→ 부처님 당시 즉각 아라한이 가능했던 이유!
4념처(8정도의 핵심) 하나면 ‘아라한’ 가능. 아라한은 다름이 아니라 ‘마음챙김ㆍ알아차림’이 굳건히 확립된 경지. 애쓰지 않아도 알아차림에 머무르는 경지. 5온의 집착에서 벗어난 경지. (我空)
* 결국 ‘아라한’은 욕계ㆍ색계ㆍ무색계의 3계를 초월한 ‘열반-안주자’를 의미하며, 힌두교의 ‘생존해탈자’를 의미한다. 선불교의 ‘확철대오의 경지’와 동일한 의미. ‘아라한’이나 ‘확철대오’는 모두 ‘1주 보살’(진아-안주자)을 의미한다. ‘석가모니’도 아라한이다. 공덕에 따라 다양한 계제나 등급이 있으나 ‘열반-안주자’라는 점에서는 모두 동일하다. 그래서 모두 동일하게 부르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아라한은 ‘5온’에 대한 ‘보호복’을 입고 살아가는 존재!)]
아라한의 경지는요 부처님 당시 즉각 아라한이 가능했던 이유는 사념처 하나만으로 아라한이 가능하다고 본인이 얘기하셨고요. 사념처만 확고해지면 즉 알아차림만 내면에 흐르게 되면 아라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걸 대승에서 아공이라고 그래요. 대승 얘기를 하나 잠깐 하면요 제법무아 이거 조심하시고요. 아공이 뭘까요? 대승 공부도 좀 하시죠. 대승,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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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승 가리지 마시고요 좋은 거 다 취하세요. 왜 그러냐면 대승불교 에서 우리나라 최고의 고승들 원효나 지묵 이런 분은요 전 세계 내놔도 고승입니다. 그분들은 대승불교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대승불교 무시하지 마세요. 석가모니만이 왜 법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나요? 그 이후에도 얘기할 수 있어요. 얘기할 수 있는데, 석가모니에 어긋나는 얘기를 하면서 얘기를 하면 석가모니 욕먹을까 봐 석가모니를 팔아서 석가모니가 하신 얘기라는 식으로 하다 보니까 이게 거짓말이 된 겁니다. 내용은 좋은 내용이에요, 사실은 잘 열어보시면. 소승, 대승이 주장하는 게, 초기불교는 아공만 이야기했고 법공은 없다 이 얘기입니다. 이 아공이라는 건요 오온이 내가 아니라는 것만 깨달았다는 겁니다. 내가 오온이 아니다. 그러면 오온은 뭘까요? 오온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까요? 관심 없어요. 그게 고통을 소멸시켜주는 데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관심이 없어요, 초기불교에서는. 오온은 그냥 있는 거예요. 내가 오온에서만 벗어나면 돼요.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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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고 뭐고 없어요. 그렇죠. 그런데 대승은 더 나가요. 아까 말한 여기 일체지를 얻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대승은 중생을 구제하려면 일체지(一切智)로는 안 돼요. 중생의 처지를 다 이해할수록 더 구제가 잘 되거든요.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추구하기 때문에 오온도 1000년 전에 오온이 어떻게 굴러갔는가까지 관심이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오온을 조작하고 싶어 해요. 여래의 색신도 만들고 싶어 하고 원만보신(圓滿報身) 보신이니 화신이니 신성한 몸도 만들고 싶어 해요. 그래야 중생구제에 도움이 되니까요. 중생구제에 도움이 된다면 별짓도 다 하는 게 보살입니다. 그래서 오온이 나라 내가 아니라는 것만 아는 게 아니라 오온이 본래 공하다. 즉 공은 여기서 열반과 청정을 의미합니다. 오온 자체가 원래 바다가 청정하면 바다에 일어난 파도, 즉 이게 오온이죠. 바다가 열반이라면. 바다가 청정하면 오온도 청정하다는 주장을 합니다. 보세요. 여러분 지금 모른다고 해 보세요. 모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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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모르시죠. 제 얘기 듣고 다 하실 수 있죠. 그 니르바나가 깨지나요? 알아차림이 손상을 입나요? 알아차림은요 오온이 일어나건 말건 애초에 상관이 없어요. 즉 이 얘기는 뭐냐 하면 알아차림만 확고히 유지된다면 여러분은 오온을 더 잘 쓰실 수도 있다는 겁니다, 오온으로 인해서 고통 받지 않으시면서. 이해되십니까. 그래서 1주보살부터 머무를 주(住)자를 써요. 안주한 보살, 진아에 안주한 보살은 그때부터 신통묘용(神通妙用)을 쓸 수가 있어요. 여기서 해탈했다고 생각을 안 하고요 이제 공부 시작이라고 생각을 해요. 이게 대승입니다. 엄청난 사상이에요. 이 법공은요 오온, 제법, 오온이라는 것 자체가 원래 공하다라는 게 법공이에요. 오온이 내가 아니다. 이게 아공이고요. 오온도 원래 청정하다 이게 법공이고 반야심경은 법공을 주장한 겁니다. 초기불경은 아공을 주장하고 있어요. 부처님의 가르침은 관심은 고통에서 벗어나느냐 밖에 아니었어요. 그런데 대승의 가르침은 그 정도가 아니에요. 모든 중생을 완벽하게 도울 수 있는 법을 찾아요. 자 이거를, 지금 석가모니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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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발전된 이론인데 이거를 석가모니가 얘기 안 했다고 부정하고 마실 건가요? 이렇게 인류 역사의 무지한 발언이 있을까요? 석가모니가 안 했으니까 싹 엉터리다. 이렇게 쉽게 얘기하지 마세요. 아시고 얘기하세요. 뭐냐면 보살이 한 게 정확히 뭔지 너무나 잘 아신 뒤 얘기하시는 건 괜찮아요. 나는 입장에 탐탁치않다. 그런데 모르시고 얘기하지는 마세요. 엄청난 사상입니다, 대승은. 지금 여러분이 숨 쉬고 있는 여러분 이미 청정하다는 거예요, 알아차리실 수만 있으면. 여러분은 지금 가정을 꾸리시는 것, 고된 업무를 직장생활 하시는 것, 이게 다 청정하다는 주장을 하는 겁니다. 이게 불국토라는 거예요. 불국토를 여기 밖에서, 오온 밖에서 찾지 않고 오온 안에서 불국토를 찾아버려요. 여러분과 제가 서로 자비행을 하고요. 서로가 자비이사를 쓰시면 사무량심(四無量心)만 펼치면 여기가 이미 천국이라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중간쯤 위치해요. 소승 아라한하고 입장이 또 틀려요. 숫타니파타나 법구경 보시면 석가모니는 계속 자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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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조합니다. 나만 해탈하고 끝나는 경지가 아니라 자비를 계속 강조해요. 석가모니가 생각한 니르바나는요 훨씬 큰 개념이에요. 팔정도를 끝내주게 하고 중생 구제까지 잘하면서 니르바나를 추구해요. 이게 석가모니랑 아라한들하고 차이입니다. 단박에 아라한이 가능했던 이유가 그겁니다. 석가모니는 무수한 생을 갖다 자비행을 해가지고 육바라밀 닦아서 그 자리를 가셨어요. 결국 육바라밀 차이라는 걸 대승을 안 겁니다. 육바라밀을 하나도 안 닦아도 아라한 될 수가 있어요, 실제로. 그렇죠. 알아차리시면 되니까요. 그러니까 육바라밀 없는 아라한이 부처님 제자들이고 육바라밀을 열심히 해서 세세갱생 생마다 인욕도 하고 정진도 하고 보시도 했던 사람, 기부도 잘하고 그분이 얻은 석가모니 공덕을 아라한들은요 내가 다시 태어날 수도 없고 윤회가, 윤회를 끝나버렸다고 생각하니까 “내가 다시 태어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난 이제 어떻게 할 수가 없네.” 이게 아라한 입장입니다. 석가모니처럼 되고 싶어도 이젠 윤회 끝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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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은 안 끝났다는 얘기를 합니다. “안 끝났다. 너도 지금부터 하면 된다.” 이게 법화경의 주제입니다. 법화경 가면 이 말을 해요. 석가모니가 다시 등장해서, 소설이죠, 마하가섭이랑 다 아라한들 불러다가요 “미안하다. 그런데 사실은 니들 탓이다. 나도 원래 그게 니르바나라고 하기 싫었는데..” 이 얘기를 들어요. 화성(化城)의 비유. 숲을, “내가 정글을 너희들을 끌고 가는데 중간쯤 갔는데 너희들이 다 포기하더라. 그러니 목적은 숲만 벗어나면 진짜 좋은 세계가 있는데, 어떻게 거기까지 끌고 갈 힘이 없더라. 그래서 중간에 가짜로 성을 하나 만들었다. 니르바나라는 성을요. 그래서 너희를 좀 쉬라고 했다. 이제 정신 차렸으니 가자.” 이거를 법화경 내용입니다. 이게, 이게 그럼 초기불교 입장에서는 열 받을 내용 아닙니까. 석가모니 입으로 자기 가르침을 부정하게 만들어 놨어요, 소설이. 뭐 이따위 게 다 있냐. 이 말도 나올 수 있죠, 충분히. 대승불교 불경이 욕먹는 이유도 이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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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먹을 만해요, 그런 부분은. 그런데 왜 그랬을까요? 이걸 이해하시면 또 대승불경이 이해가 됩니다. 진짜 윤회 초월이 아니라고 본 거예요, 대승은. 그러니까 무슨 짓을 해서라도 법화경을 가짜로 지어서라도 더 가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진 겁니다. 아라한들이 그렇게, 사회에 아라한이 많은 게 오히려 사회에서는 더 안 좋을 수도 있다는 것까지 본 거예요. 나는 오온 다 끊었다고 앉아 있으면 인과적으로 이게 더 나쁜 인과를 중생구제에 도움이 안 될 수도 있다는 것까지 여러 가지를 분석한 뒤에 대승은요, 법공으로 나아가자는 주장을 한 겁니다. 이건 또 하나의 석가모니를 넘어선 하나의 또 다른 철학이에요, 대승불교는, 우리나라 선불교는. 이건 이것대로 봐주세요. 지금 이게 3단계로 보셔야 됩니다. 초기불교 입장 그러니까 소승 아라한들 입장과 부처님의 석가모니의 입장과 대승불교 입장은 다 틀려요. 지금 이렇게 하나 셋으로 나눠놓고 보죠. 그렇게 보시면요. 예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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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한에 대해서는 뭐 더 얘기 안 해도 될 것 같고요.
[* 아라한과 석가모니의 차이
아라한과에 도달한 뒤에는 ‘무루의 8정도’를 실천할 수 있음. ‘열반’에 안주하여 ‘무루의 8정도와 4무량심’ 실천. 현실적으로는 공덕의 차이에 따라 역량의 차이가 남. ‘열반’에 안주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나, 석가모니의 8정도, 4무량심과는 큰 차이가 남. (대승불교의 문제의식, 대승불교는 아라한과 석가모니의 차이를 분명히 하고,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넘어서 나아감)]
아라한과 석가모니 차이 방금 말씀드렸고요. 자비심에서 이렇게 차이가 난다고 하는데요.
[* 4무량심 (출입식념경, 깔라마경, 삼명경)
① 10방의 우주로 ‘사랑’(慈)의 마음을 확장하여 가득 채움.
② 10방의 우주로 ‘연민’(悲)의 마음을 확장하여 가득 채움.
③ 10방의 우주로 ‘기쁨’(喜)의 마음을 확장하여 가득 채움.
④ 10방의 우주로 ‘평정’(捨)의 마음을 확장하여 가득 채움.]
자 사무량심 닦는 법은 깔라마경이나 출입식념, 그 삼명경 이런 데 잘 나오는데요. 자 앉아가지고 아까같이 순수 알아차림 상태 먼저 들어가요. 그다음에요 보십시오. 자비심 기르는 법입니다. 부처님이 얘기하신 자비희사, 눈 감고 명상하다가 알아차린 상태에서 시방 우주 위, 한없이 위로 한없이 앞으로 한없이 좌로 수많은 우주로 내 마음을 확장해요. 그 모든 우주와 내가 함께 하나라고 여기면서 사랑한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 모든 중생들이 즐겁기를 바라는 게 자무량심(慈無量心). 그다음 비무량심(悲無量心)은요 비는 연민을 느끼는 거거든요. 똑같이 십방으로 마음을 확장한 다음에 거기 있는 모든 중생이 아픔을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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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워해 주는 겁니다. 함께 아파한다는 뜻이에요, 비는. 자 보십시오. 그다음에는요 십방으로 또 마음을 확장한 다음에 사람들이 해탈을 얻고 즐거움을 얻는 걸 같이 기뻐해줘요 내 일처럼(희무량심). 네 번째 그렇게 마음을 확장한 다음에 평정심을 유지해요(사무량심). 모두 우주가 나와 둘이 아니라는 식으로. 이 명상을 계속하면요 아라한이 아까 자기만의 니니르바나에 나는 니르바나 얻었다는 것보다는 중생 걱정이 앞서겠죠. 이래서 부처님은요 계속 육바라밀을 그전부터 닦았던 겁니다. 부처님의 경지랑 좀 차이가 있어요, 아라한들은. 그런데 자비희사(慈悲喜捨) 순서가 있는 게 보십시오. 남이 좀 잘 됐으면 하는 자(慈)보다 연민(悲)이 좀 더 어려워요. 남의 아파함을 같이 아파하는 게 좀 더 어려워요. 그리고요. 남의 아픈 거에 가서 같이 걱정해주는 것보다요 남이 잘 됐을 때 같이 기뻐해주기가 더 어려워요(喜). 이해되시죠.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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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잘되지는 마라” 하는 요 마음이 있을 겁니다. 요거를요 마음으로 계속 훈련하는 겁니다. 이렇게 깨어있는 상태에서. 알아차린 상태가 아니면 안 돼요. 오오는요 이런 좋은 생각 못 해요. 마지막에 평정심(捨). 남이 나한테 해코지를 하더라도 내가 평정심 유지할 수 있나 이걸 실험해 봐요. 이걸 계속 마음 닦는 분은 어디 가도 그 자비희사가 갖춰진 사람 만나면 누가 대놓고 욕 못 할 겁니다. 뭔가 그 사람한테서 기분 좋은 느낌이 날 겁니다. 이 포스를 갖춘 분은 옆에 가면 금방 녹아버리죠. 이게 부처님한테는 있는데, 아라한들한테는 없었던 거예요. 이 역량이 차이가 난 거예요. 이게 계제의 차이예요. 대승은 이걸 정확히 분석해요. 왜 이런 차이가 났을까까지 분석을 해요.
[* 마하데바의 5사事
부처가 열반에 든 뒤 약 200년 뒤 아쇼카왕 때 마하데바(大天, 대중부의 아라한)가 아라한의 경지에 대해 5가지 주장을 함.
① 아라한도 유혹을 당할 때가 있다. (몽정)
② 아라한 이룬 것을 본인이 모르기도 한다.
③ 알기까지 시간적 유예가 있기도 하다.
④ 타인이 알게 해줄 수도 있다.
⑤ 아라한도 괴로움이 있고 이를 통해 더 성스러워진다.
이러한 마하데바의 ‘5가지 일’의 주장에 대해 찬반이 갈려서, 부파불교의 분열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후 아라한은 흔해져서 더 이상 이상적 목표가 되기에 부족하다는 의견이 팽배해지며, 부처를 추구하는 ‘대승불교’가 싹트기 시작했다.]
그 주요한 원인이 된 것 중에 하나 마하데바의 오사(五事)라는 게 있는데요. 아쇼카왕 때 부처가 불교가 제일 전성기에 도달하는데 이때 마하데바라고 대중부 중에 상좌부가 아니라 아라한 중의 하나가요 제자한테 딱 걸립니다. 아라한 좀 이상한데 하는 게 딱 걸려요. 뭐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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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라한이요 밤새 꿈을 여자 꿈을 꾸고 몽정을 해가지고 옷을 씻다가 제자한테 걸렸어요. “뭔 일이십니까?” “어제 꿈의 여자가.” 그래서 “아라한이 유혹을 당합니까?” 하니까 “당한다.” 요거 인정을 해요. 이게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 제자가 아라한을 이뤘는데 모르고 있어요. “야 너 아라한 됐어.” 제자가 “아니 아라한도 자기가 됐는지 모를 수가 있나요?” “있다.” 두 번째. “좀 시간이 걸릴 수도 있나요? 아라한이 되는 데까지.” “그렇다. 단박에 아라한 되는 거 아니다.” 이 얘기를 한 겁니다. 네 번째 “선생님이 알려줬잖아요.” “그래. 타인이 알게 해 줄 수도 있다.” 다섯 번째요 마하데바가 아! 괴롭다 하다 걸립니다, 제자한테. 괴롭다. 사실은 상관이 없죠. 괴롭다고 하는 건 오온의 작용이죠. 괴로운 줄 알아차리고 있으면 괜찮아요, 괴롭다는 말을 해도 사실은. 그런데 “아라한이 괴로우신가요?” 하니까 무슨 얘기를 하냐면 “괴로움을 통해 더 성스러워진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아라한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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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퍼펙트하게 보다가 요런 이 다섯 가지 얘기가 퍼지면서 부파불교 안에서 찬반이 격론이 일어나면서 더 분열이 돼요. 아시오카왕 때 정점을 찍고 불교가 분열돼 버리는 데 여러 중요한 얘기입니다, 이게. 그러면서 대승불교가 싹 터요. 뭐냐 하면 그 당시에는 아라한이 흔했어요. 지금처럼 어렵다고 생각을 안 했어요. 그러니까 대단한 존재지만 아라한 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던 거예요. 그래서 아라한이 이상인 궁극의 목표인 줄 알았더니 좀 솔직한 아라한의 증언을 듣고 나니까 아라한에 대한 뭔가 환상이 깨진 겁니다. “안 되겠는데 부처를 우리는 추구해야겠다.” 아라한에 머문다는 게 그렇게 아름다운 일은 아닌 것 같다는 실체감. 탁발, 밥 먹고 움막에 가서 이렇게 앉아 있으면 알 수가 없죠. 아라한이 진짜 거북이도 그렇게 있을 수는 있으니까. 딱 고요하면 쥐를 봐라. 쥐 앞에서 고양이의 그 집중력. 탁. 있을 때는 모르잖아요. 건드려 봐야 아는데 팔정도가 얼만큼 있게 자비가 얼마큼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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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나와 남이 둘이 아니다까지 숫타니파타에서 노래를 하셨는데 진짜 저 아라한이 그런가? 안 그런 것 같단 말이죠. 실망이 나온 겁니다. 부처를 바로 추구하자. 그럼 어떻게 해야 되냐? “아라한이 된 뒤에 보살, 육바라밀을 닦아버리자”라는 주장이 나온 겁니다. 아라한이 된 뒤에, 즉 오온이 아공을 먼저 얻은 뒤에, 법공 육바라밀 닦아야 법공이 얻어집니다. 육바라밀은 색수상행식을 써서 현상계에서 좋은 일을 하는 거예요. 이해되시죠. 그래서 법공 사상이 나오면서 육바라밀을 닦는 쪽으로 가면서 반야심경이라는 게 나오고 금강경이 나와 가지고, 그걸 이론적으로 지지해줍니다. 색수상행식이 그걸 다 버리는 게 공이 아니라는 걸 주장해요. 그게 그대로 공하다는 걸 주장합니다. 이름만 색수상행식이지 본래 공하다. 이 주장을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해되시죠.
[* 사문과경沙門果經- 의성신
사문은 이와 같이 명상에 들어 4선정의 마음에서 ‘생각으로 만드는 몸’(意生身ㆍ意成身)을 만드는 것에 마음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이 육신으로부터 다른 몸뚱이를 변화시켜 나투게 됩니다. 색깔을 지니고 있으며, 여러 가지 각 부분들을 두루 갖추고 있으며, 감각기관이 열등하지 않는 몸을 바꾸어 나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뱀에게서 허물을 벗겨내고는 “이것이 뱀이고 저것은 허물이다. 뱀과 허물은 다르다. 저 허물은 뱀으로부터 벗겨낸 것이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법공法空의 구체적 증표→ 대승불교의 보신報身ㆍ환신幻身)]
그러면서 또 하나가 중요한 게 사문과경이라고 팔리 경전에 있는 건데 부처님은요 사선정에 든 다음에 생각으로 몸을 만들어라는 얘기를 합니다. 여기 아주 중요한 문제가 돼요. 아라한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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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신 만들었다는 아라한들이 없습니다. 이상하죠. 지금 남방불교에서는 관심사가 아니에요. 이게 뭐냐 하면 이거 가장 열심히 하는 데가 티벳 밀교예요. 의성신을 환신이라고 그러고 보신이라고 그래요. 이걸 만들 수 있냐 없냐를 아주 중시합니다, 티벳 밀교에서는. 그게 왜 그러냐면 읽어보세요. 부처님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생각으로 몸을 만드는데 그는 이 육신으로부터 다른 몸뚱이를 변화시켜 나투게 됩니다. 색깔을 가지고 있고 여러 감각 기관을 다 가지고 있고 전혀 열등하지 않은 몸을 만들어내고. 이 말을 이렇게 합니다. 어떤 사람이 뱀에서 허물을 벗겨내고는 이거는 허물이고 요놈은 뱀이라고 할 것이다. 이게 단학, 도가에서 신선들을 하는 우화등선(羽化登仙)이라고 하죠. 금선탈각(金蟬脫殼) 매미가 허물 벗듯이 이 육신을 벗어버리고 진짜 본체가 빠져나간다. 이게 단학의 얘기인데 부처님은 이런 얘기를 하신 거예요. 이게 불가에서 말한 보신이라는 겁니다. 절에 가면 대웅전에 원만보신(圓滿報身)이라고 쓰여 있어요. 원만한. 그 인과응보의 몸이죠. 참나가 아니에요.
01:03:00
법신이 아니고 니르바나가 아니고 공부한 만큼 얻은 몸이에요. 이 의성신이 그 공부해서 얻은 몸의 토대예요. 이게 왜 중요하냐면요 대승에서는 의성신을 얻은 존재들은 지구를 더 안 와요. 욕계에 안 태어나요. 그래서 이 의성신을 정확히 얻어서 욕계에 안 태어난 경지가 5지 이상입니다. 5지가 되면 의성신이만 들어지고요. 능가경에 나온 내용입니다. 8지가 될 때 의성신이 광명해지면서 7지 이상 7지 8지가 되면 지구에 안 와요. 색구경천에 태어나요. 색계에 가서 살아요. 이거를 갖다가 대승용어로요 지금 니르바나는 다 말씀을 드렸고 초기불교와 니르바나 입장은 소승과 대승에 첨예한 대립되는 부분을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보십시오. 지구가 욕계인데 지구가 속한 게 색계가 있고요. 무색계가 있는데, 무색계는 생각을 안 하셔도 돼요. 여기는
01:04:00
순수정신의 세계이기 때문에 색이 없잖아요. 우리가 아는 극락세계는 다 색계에 있습니다, 사실은. 극락경 보세요. 아미타경. 얼마나 휘황찬란한 세계인데요. 색이에요. 우리 욕계에 태어난 사람이 의성신을 이루게 되면 욕계에서의 생사를 변역생사라 그래요. 아니아니 분단생사. 거기에 한문이 있나요? 분단생사 새계에 태어나려면 변역생사를 얻을 수 얻는 존재만이 욕계에서 색계로 갈 수가 있어요. 저게 의성신입니다. 17페이지 마지막 보면 변역생사와 분단생사가 한자로 있죠.
[‘불가사의한 생사’(변역생사變易生死 ↔분단생사分段生死)]
그게 무슨 의미냐 하면요 분단생사는요 보십시오. 나눌 분(分)의 덩어리 단(段)자거든요. 분단, 단(段)은 유형의 육체가 있고요 분(分)은 수명에 한계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01:05:00
대개 제한된 수명만 사는 육신이 있는 생사가 분단생사고요. 변역생사는요 수명이 없어요. 몸을 바꿔가면서 자유자재로 존재하는 몸이에요. 그게 의성신이에요. 그래서 티벳 밀교에서는 그 의성신 만든다고 난리입니다. 왜냐하면, 그걸 얻어야만 색구경천에 갈 수가 있거든요. 색구경천에 가면요 여기는 아미타불도 있고 관세음보살도 있어서 그분들하고 같이 온 우주에 중생 구제사업을 뛰러 간다는 겁니다. 이해되시죠. 이게 티벳 대승불교예요. 대승불교 핵심은요 윤회 열반을 부정해버려요. 열반에 들어야지 하면 초기불교식으로 고통에서 벗어나 열반에 들어야지 하면 대승불교는 뭐라고 하는 줄 아세요. “이미 열반이다”라고 얘기해요. 내가, 나 존재 자체가 이미 열반이기 때문에 나는 중생구제 하는 게 내 본업이다. 즉 이것을 대승불교의 무주열반(無住涅槃) 사상이라고 그래요. 머무름이 없는 열반, 즉 나는 이미 열반이라는 겁니다. 무슨 짓을 해도 열반이다. 색수상행식이 안에 있어도 열반이고 색수상행식은
01:06:00
열반에 기초하기 때문에 색수상행식을 벗어날 수도 없다, 우리는. 이해되십니까? 이게 대승입니다. 사문과경에서 말하는 건 이 보신을 만드는 걸 얘기하고요. 이걸 얻으려면요 보십시오. 분단생사를 넘어서는 변역생사를 이루는 이 의성신을 능가경에서 3지에서 5지보살이 되면 만들어지고 5지 넘어서 결국은 7지에서 8지가 돼야 색계로 완전하게 갑니다.
01:06:27
몸은 먼저 만들어져요. 5지에서 6지에. 그다음에 7지 8지가 돼야 그걸 넘어가요. 그래서 이 8지보살을 대승에서는, 8지보살이 가야 제일 완벽하니까 색자재지(色自在地)라 그래요. 대승기신론 보면 색자재지라고 그럽니다. 몸에서 자유자재한 형색을 만들어내는 지혜. 이게 변역생사를 얻었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만 일단 한번 이해해 보시면요. 그전에 14페이지 한번 가보시죠. 아라한에 대해 제가 하나 빼놓고 간 게 있네요.
01:07:03
14페이지 위에 검은색 진하게 그려진 줄 한번 읽어보시죠.
[* 아라한의 경지→ 부처님 당시 즉각 아라한이 가능했던 이유!
4념처(8정도의 핵심) 하나면 ‘아라한’ 가능. 아라한은 다름이 아니라 ‘마음챙김ㆍ알아차림’이 굳건히 확립된 경지. 애쓰지 않아도 알아차림에 머무르는 경지. 5온의 집착에서 벗어난 경지. (我空)]
[* 결국 ‘아라한’은 욕계ㆍ색계ㆍ무색계의 3계를 초월한 ‘열반-안주자’를 의미하며, 힌두교의 ‘생존해탈자’를 의미한다. 선불교의 ‘확철대오의 경지’와 동일한 의미. ‘아라한’이나 ‘확철대오’는 모두 ‘1주 보살’(진아-안주자)을 의미한다. ‘석가모니’도 아라한이다. 공덕에 따라 다양한 계제나 등급이 있으나 ‘열반-안주자’라는 점에서는 모두 동일하다. 그래서 모두 동일하게 부르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아라한은 ‘5온’에 대한 ‘보호복’을 입고 살아가는 존재!)]
아라한은 뭐라고 되어 있죠? 불가의 아라한은요 알아차림이 확립된 사람이죠. 알아차림이요, 내면의 알아차림에 안주한 사람인데, 알아차림이 니르바나입니다. 이거는 사실은 다른 종교랑 비교하면 힌두교에서 말하는 진아에 안주한 사람이 있죠. 이것을 힌두교에서는 생존해탈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걸 선불교에서는 확철대오라 그래요. 확철대오가 뭔지 아십니까? 진아에 안착한 사람이에요. 확철대오가요 엄청난 자리가 아닙니다. 1주보살자리예요. 그래서 보조 스님이 1주보살이라고 분명히 주장했기 때문에 이런 것 때문에 보조스님이 좀 문제가 많이 된 겁니다. 보조 스님은요, 선가(禪家)에서 확철대오한 사람을 1주보살이라고 봤어요. 1주, 즉
01:08:00
제가 대승기신론 강의할 때 들은 분 아시겠죠. 이 1주(住)랑 1지(地)는 차이가 뭘까요? 1주는 정혜쌍수(定慧雙修) 지관쌍운(止觀雙運)을 1주라고 하고 1지는요 반야, 지관(止觀)이 합쳐서 반야를 이룹니다. 반야방편쌍운(般若方便雙運)을 한 사람이에요. 지관 플러스 육바라밀을 닦은 사람을 말합니다. 이해되십니까. 육바라밀을 닦은 사람. 즉 지관(止觀)을 하면요 반야(般若), 법공(法空) 아공(我空) 이 공을 깨달아요. 그런데 방편은 공에 머물질 않죠. 저 반야는요 니르바나에 도달하는 어떤 알아차림은 니르바나라면, 방편은요 색수상행식, 즉 오온을 써가지고 중생을 구제하는 걸 방편이라고 합니다. 멋진 모습, 아니면 어떨 땐 아주 남루한 모습을 일으켜 가지고요 중생을 갖다 구제해 줘요 이해되시죠. 1지보살은요 그러니까 아라한은 1지보살 소리를 못 들어요. 왜냐하면, 육바라밀을 하냐 못하냐가 아직 검증이 안 됐기 때문에.
01:09:01
자 힌두교의 진아 안주, 생존해탈자도 사실은 외도(外道)라고 불교에서 하는데 1지보살 정도입니다. 왜냐? 육바라밀을 안 하면 1지로 쳐줄 수가 없어요. 힌두교에서 요즘 마하리시 이런 성자들 유명하죠. 그러면 이게 불교로 치면 어떤 분일까요? 아라한도 아주 대아라한이에요. 이 양반이 16살 때 그냥 터져버렸어요. 참나 상태에 들어갔어요. 시체놀이를 하다가요. 시체놀이를 했어요. 나 이제 죽었다. 오온이 죽었다라고 생각한 겁니다. 죽었다 죽었다 했더니 진짜 죽은 상태로 들어가더니, 턱 하니 니르바나 알아차림만 딱 나와 버린 겁니다. 진여만 존재한 거예요. 그러고 돌아왔으면 보통 체험 일별했으면 수다원 과죠. 돌아왔는데요 공부를 못해요, 계속 상태라. 그래서 16살 때 들어갔다가 죽을 때까지 상태에 있었어요. 그게 아라한입니다. 그분이 그럼 밥 먹고 뭐 안 하나요? 다 해요. 다 하는데 뭔 얘기를 하냐면 내 몸이 바람 같다는 얘기를 해요.
01:10:00
존재한다는, 몸이 존재하긴 하는데 바람같이 나한테 느껴진다. 색수상행식이 다 그래요. 이런 게 이제 같은 얘기입니다. 지금은요 이게 아라한이랑 같다고 하죠. 부처님 초기에는 어땠을까요? 힌두교에서 부처님이 공부하시다가 불교 만드셨죠. 반대입니다. 초기에는 반대예요. 아라한이 이거(샌존해탈자)라고 보셔야 돼요. 생존해탈자를. 아라한 중에 유여열반(有餘涅槃)이라는 게 있습니다. 불교에 유여열반이라는 개념이 있고. 시간이 저렇게 됐나요? 자 보세요. 힌두교랑 이렇게 비교합니다. 불교가요 힌두교 공부도 좀 하세요. 불교인이 유여열반이라는 게 있어요. 열반인데 남을 여(餘)자 남은 게 있다는 겁니다.
01:11:00
이 얘기는 뭐냐 하면요 유여, 무여열반(無餘涅槃)이 있어요. 무여열반은요 오온이 없어진 겁니다. 이건 오온이 아직 있어요. 이해되십니까? 두 가지 열반이 있어요. 오온이 없어진 열반이 있고 오온은 여전히 있는 열반이 있어요. 오온이 있으니까 아직 남은 건 있죠. 그러면 이 마지막 무여열반을 대열반(大涅槃)이라 그래요. 대열반. 오온이 없어지니까요. 이걸 힌두교에서 똑같이 뭐라고 하냐면 원래 힌두교에 있던 얘기입니다. 이거(유여열반) 생존해탈자라고 그래요. 이것(무여열반)을 사후해탈자라 그래요. 여기(무여열반)는 완벽하게 아트만과 하나가 된 사람, 브라만과 하나가 된 사람을 말하고요여기(유여열반)는 아트만과 브라만을 깨닫고는 있지만 여전히 발현업(發現業)이라고 해서 업이 작동하고 있는 상태, 여전히 몸뚱이가 굴러가고 있는 상태를 말해요. 같은 개념입니다. 인도에서 같은 발상에서 나온 겁니다. 아라한이니 힌두교의 생존 해탈자니.
01:12:01
지바묵티(Jivamukti)라고 하는데 같은 자리입니다. 왜 석가모니 돌아가신 걸 열반이라고 하는지 이거 보시면 아시겠죠. 요즘 스님들 돌아가시는데 열반이라고 하죠. 열반에 드셨다. 그럼 우리가 죽어도 열반일까요? 아니에요. 유여열반에 든 사람이 죽을 때 열반이라고 하는 겁니다. 무여열반. 열반에 안착했었는데 이제 오온마저 사라져 버렸다고 해서 그걸 반열반(般涅槃) 마하열반(摩詞涅槃)이라고 하는 거예요. 마하열반, 대열반, 한문으로 반열반. 저런 개념 자체가요 인도식 발상이에요. 인도는 진아에만 안주하면 니르바나가 끝났다라고 판정을 했어요. 그 전통에서 아라한이 윤회를 초월했다라고 그냥 인정을 받았어요, 쉽게. 그런데 대승불교는 이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 거죠. 힌두교건 여기(불교)이건 간에 그건 아니다. 원천적으로 색소상행식을 우리는 버릴 수가 없다. 이 주장을 폅니다. 획기적인 주장입니다. 자 이것을 유마경으로 보실게요.
01:13:01
아! 소승과 대승 제가 써놓은 거 빨리 읽고 유마경과 능가경을 보시고 끝낼게요
[* 소승과 대승
소승 아라한은 ‘열반안주’는 가능하나 부처에 비해 ‘지혜와 자비’가 부족하다. (석가모니는 중생에 구제에 자유로움, 18불공법, 아라한은 포기) 그래서 ‘5온에 대한 집착’에서는 자유로우나 ‘열반’만 누릴 뿐, ‘열반ㆍ진여의 지혜와 공덕’이 원만하게 계발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런 ‘지관쌍운’(알아차림의 확립)의 아라한 경지를 대승에선 ‘1주 보살’로 보고(소승의 반야), ‘반야ㆍ방편’을 함께 닦을 실력이 될 때 진정한 보살도의 ‘1지 보살’을 인정한다.
‘보살도’는 ‘반야’로 열반에 안주하되 ‘방편’으로 윤회 속에서 중생을 구제한다. 보살도는 아라한에 도달한 뒤, 더욱 열반의 지혜ㆍ능력ㆍ자비를 계발하여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길이다. 그래서 ‘열반안주’로 ‘반야’에 안주하여 윤회를 초월한다는 발상을 반대하고, 윤회 속에서 ‘방편’을 닦아 ‘지혜ㆍ자비ㆍ능력’을 닦아간다. (대승불교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넘어서, 영원히 윤회를 버리지 않는 ‘보살도’를 추구)]
소승과 대승이에요. 소승 아라한. 열반 안주는 가능하나 부처에 비해 지혜와 자비가 부족합니다. 석가모니는 중생 구제에서는 자유로웠어요. 18불공법(不共法)이라는 게 그거고요. 아라한은 그걸 포기했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도달할 수가 없다. 왜냐? 전생부터 그건 공덕을 쌓아야 된다. 그래서 오온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운 걸 추구했는데 그런 열반만 누렸고요. 그 열반에서 나오는 지혜나 공덕을 추구하지는 않았어요. 제한적으로만 추구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지관쌍운의 자리를 대승에서는 1주보살로 보고 반야와 방편을 함께 닦을 때만 1지보살을 인정해줬습니다. 대승기신론이나 화엄경 보시면 잘 아실 겁니다. 보살도는요 반야로 열반에 안주하되. 보십시오. 지관쌍운에 머물기 때문에 이 양반은 늘 공의 상태에 있어요. 하지만 한편으로 오온은 늘 방편, 현상계 속에 존재해요. 그래서 반야로 열반에 안주하되 방편으로 윤회 속에서 중생을 구제한 사람이 보살도입니다.
01:14:01
자 여기까지 들으시면 아시겠지만, 대승불교는요 석가모니 부처님의 길을 추구하지를 않았습니다. 석가모니는 니르바나에 들었다고, 자기가 들어간다고 얘기를 하셨거든요. 이거 충격적인 얘기입니다. 대승불교는 보살도를 추구하지 석가모니를 추구하지 않는 종교예요. 말이야 석가모니를 그냥 갖다 올렸으니까. 제 말이 평소에 잘 못 들을 말이겠지만, 원천적으로 숫다니파타를 보시고 대승, 지금 유마경을 보세요. 석가모니 불교의 가르침을 부정한 겁니다, 대승은. 왜냐하면 그게 틀렸다는 게 아니라 그 너머가 있다고 인정한 거예요. 십우도 중에 석가모니 가르침은 공에 들어가는 데까지 얘기했고, 공 넘어서 입전수수(入廛垂手)니 이런 부분은 대승에서 나온 가르침입니다. 즉 이 양반들은요 열반을 애초에 추구하질 않아요. 관세음보살이 이상형이에요, 사실은. 아미타불이나. 그러니까 여기서는 불보살 개념이 차이가 없어요. 관세음보살은 영원히 부처가 안 될 겁니다. 이걸
01:15:00
이해하고 보셔야, 이게 이해가 되셔야 돼요. 왜냐? 그러니까 석가모니가 생각하는 부처 개념을 버린 거예요. 오온을 버려야 열반이라면 그런 열반은 추구하지 않겠다는 입장입니다. 이게 파격적인 얘기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경전을 다시 쓴 거예요. 도저히 석가모니 불교 가지고는 불교를 못 하겠다는 입장에 서니까 석가모니 불교도 살고 자기가 살려면 법화경 같은 걸 써버린 겁니다, 그냥. 석가모니를 띄우면서 신격화시켜 버리면서 원래 자기들이 판단할 때는 석가모니가 한 5,6지 7지보살 정도예요. 이분을 갖다가 하느님을 만들면서 화엄경 10지보살까지를 써버리는 이런 경전을 만들어 버린 겁니다. 그 너머에도 길이 있다는 걸 얘기하고 싶어서요. 이 얘기가 지금 제가 이런 얘기 어디서 안 할 텐데요. 제가 자료를 가지고 드리는 겁니다. 보세요. 유마경에 뭐라고 되어 있는지 보십시오.
[* 유마경
1. ‘몸’이 ‘무상’하고 ‘고통’이고 ‘공空’하며 ‘내가 아님’이라고 관찰하는 것은 ‘지혜’라고 이르며, 비록 몸에 질병이 있고 늘 생사 속에 있더라도 일체 중생을 넉넉히 이롭게 하되 싫어하고 게을리하지 않는 것은 ‘방편’이라고 이른다.]
몸이 무상하고 고통이고 공이며 내가 아니다 하고 관찰하는 것은 지혜다. 반야다, 이거는. 아라한이랑 똑같습니다, 이 입장에서는. 하지만 몸에 질병이 있고 생사 속에 있더라도 일체 중성을 돕기 위해서
01:16:00
절대 게을리하지 않는 게 방편이다. 하지만 그 무상․고․무아인 오온 난 버리지 않는다. 석가모니랑은 입장을 달리한 겁니다.
[2. ‘생과 사’에 머물면서도 오염된 행위를 하지 않으며, ‘열반’에 머물면서도 영원히 ‘멸도(적멸)’에 들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다.]
두 번째 생과 사에 머물면서도 오염된 행위를 하지 않으며. 이건 방편입니다. 육바라밀. 열반에 머물면서도 영원히 적멸해 들어가지 않는다. 즉 니르바나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게 이게 보살도입니다. 이런 얘기 있죠. 지장보살이나 이런 보살이 한 명이라도 성불하기 전에 나는 안 들어가겠다. 그러면 먼저 들어간 사람은 뭐가 돼요? 이해되십니까. 반대한 거예요, 석가모니 가르침에는. 석가모니는 띄우면서 그 가르침에는 반대한 겁니다. 이것도 센 얘기죠. 그럼 먼저 덥석 부처 들어간 사람은 뭐가 돼요? 갑자기, 다 들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나는 안 들어가겠다.” 그러면 들어간 사람 뻘쭘해지죠. 그런 내용을 갖고 있는 거예요. 지금 이 기존 불교랑 유관하느라 여러 가지 스펙트럼의 경전이 나와 버린 거예요. 경전마다 다 조금씩 틀려요, 입장이. 석가모니 불교와
01:17:00
자기 불교 대승불교를 어떻게 조화할 건가에 대해서 입장 정리가 사실 다 틀려요. 승만경(勝鬘經) 좀 다르고 유마경(維摩經) 좀 다르고. 유마경이 제일 세서 제가 소개해 드리는 겁니다.
[3. 비록 일체의 중생을 포섭하더라도 사랑하여 집착하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다. 비록 멀리 떠나기를 즐기면서도 ‘몸과 마음’(5온)에 의지함을 다하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다. 비록 3계(욕계ㆍ색계ㆍ무색계, 생각ㆍ감정ㆍ오감의 세계)를 돌아다니더라도 ‘진리의 본성’(법신法身)이 무너지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다. … 비록 ‘4념처’를 행하더라도 영원히 ‘몸ㆍ느낌ㆍ마음ㆍ법’을 떠나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다.]
비록 일체 중성을 포섭하더라도 구제하더라도 조금 더 사랑하고 집착하지 않으면 보살행이고 비록 멀리 떠나 니르바나에 들어가는 걸 즐기더라도 몸과 오온에 의지함을 다하지 않는다. 오온을 버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게 보살행이고 비록 3계, 욕계 새계 무색계를 벗어나야 되잖아요. 안 벗어나요. 비록 3계를 돌아다니더라도 본래 니르바나인 상태, 법신을 유지하는 것이 보살행이고. 자 오늘 핵심인 사념처가 나옵니다. 비록 사념처를 행하더라도 영원히 몸 느낌 마음 법을 떠나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다. 입장이 반대죠. 반야심경이 석가모니 가르침에 완전 반대된다는 걸 아시고 읽으셔야 됩니다. 제가 반야심경 강의한 것 들으시면 아실 거예요. 동영상 올라져 있으니까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반대한 겁니다. 공에서 색이 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색을 버릴 수가 없다.
[4. 만약 ‘무위법’만 보고 ‘정위’(아라한)에 들어간 이는, ‘보리심’을 낼 수 없다. 비유하자면 높은 육지에서는 ‘연꽃’이 피지 않고, 진흙탕에서 ‘연꽃’이 피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무위법’만 보고 ‘정위’에 들어간 자는 끝내 ‘불법’에서 나지 못한다. 번뇌의 진흙탕에 ‘중생’이 있어야만 ‘불법’을 일으킬 수 있다. … ‘번뇌’가 ‘여래의 종자’인 줄 알아야 한다. 비유하자면 ‘큰 바다’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물과 구슬을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만약 ‘번뇌의 큰 바다’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온갖 지혜의 보물’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보살은 ‘보리’[깨달음]+‘살타’[중생])]
01:08:01
만약 무위법만, 니르바나만 보고 정위, 아라한에 들어간 이는 절대 보리심을 낼 수가 없다. 더 높은 경지에 올라갈 수가 없다. 부처가 될 수 없다. 비유하자면 높은 육지에선 연꽃이 피지 않고 진흙탕에서만 연꽃이 피는 거랑 같다. 번뇌의 진흙탕에서 중생이라는 존재가 있어야만 불법을 일으킬 수가 있다. 번뇌가 여래의 종자인 줄 알아야 된다. 비유하자면 큰 바다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아주 무상의 최고의 가치를 갖는 보물과 구슬을 얻을 수 없는 거랑 같다. 만약 번뇌의 큰 바다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온갖 지혜,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얻을 수가 없다. 그래서 보살을 추구해요. 보살은 보리가 깨달음이고 살타가 중생이에요. 중생성을 끝내버리지 않겠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그대로 보살이 되시고 부처가 되시는 이런 경지를 말해요.
[*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넘어서 ‘보살도’(개인적 해탈을 버리고 진여ㆍ열반의 전지ㆍ전능ㆍ자비로 중생구제)를 추구하는 종교이다! ‘보살도’의 핵심은 ‘열반’과 ‘윤회’(5온)를 둘로 보지 않고, 늘 열반에 머물며(반야바라밀), 늘 생사를 떠나지 않으면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방편바라밀, 나머지 5바라밀, 열반의 지혜ㆍ능력ㆍ자비) → 궁극의 이상은 영원히 현상계에 머물면서 끝없이 5온을 청정하게 닦아가며 널리 중생을 이롭게 하는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부처와 보살은 둘이 아님!)]
여기서 부처는 더 이상 보살의 다른 개념이지 니르바나에 드는 존재로서의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보살 부처 개념이 아닙니다. 그리고 부처되기 직전을 말하는 보살 개념이 아닙니다. 지금 대승에서의 보살 개념은 부처랑 한 개념입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은 그냥 보살이에요.
01:19:01
부처될 일이 없어요. 부처 아래 보살로 생각하시면 큰일 납니다.그래서 지금 티벳 밀교에서는 제일 수장이 관세음보살 화신이라는 달라이 라마죠. 진짜 화신이라고 생각, 그거는 알아서 판단하시고, 서열 넘버2가 아미타불의 화신 판첸 라마예요. 웃기죠.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이나 동급이에요, 거기는.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최고의 부처로 숭앙받고요. 보살은요 그냥 중생성을 부처가 버리지 않고 있는 모습을 말하는 거예요. 실력은 부처랑 동급인데 부처가 안 되고 있어요. 그러니까 부처보다 더 지금 높은 양반이에요. 그걸 이해하셔야 됩니다. 안 그러면 지금 제가 제일 안타까운 건 대승불교 자체가 이해가 안 되고 있어요. 뭔지도 모르는 대승불교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초기불교 가지고. 예. 그거 이해하셔야 됩니다. 지금 유마가 이 말 하는 게 엄청난 중요한 얘기입니다. 연꽃을 하나 피우시려면요 여러분이 꽃이에요. 보살을 대승해서는 꽃이라고 봅니다. 화엄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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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우주에 보살들이 우주를 장엄하게 장식한다는 내용입니다. 화엄(華嚴)이라는 게요. 온 우주에 보살 천지가 되면 그게 그대로, 지상세계가 그대로 불국토가 돼 버린다는 겁니다. 현상계가 그대로 니르바나라는 주장을 하는 겁니다. 자, 그러려면 왜 진흙탕에 들어가야 될까요? 자 생각해 보세요. 간단합니다. 유마경의 이 얘기가 나와요. 사리불이나 이런, 뭐죠, 아라한 중에 최고급 아라한들한테 유마가요 그냥 이렇게 쳐버립니다. 뭐라고 치냐면요? 당신이 부처되고 싶으면 오온의 세계로 들어가라. 왜냐? 생각해 보세요. 열반만 지키고 있으면 상락아정밖에 없죠. 그런데 이 양반이 술집 가면 어떻게 될까요? 술집 가서 앉아 있으면, “아, 참아야지” 인욕바라밀이 나옵니다. 열반이 지니고 본래 지니고 있는 무한한 전지전능한 힘이 그때 나와요. 그걸 이겨내야 되니까 인욕바라밀이 나오고 거기 있는 중생들이 안타까우니까 보시바라밀이, 뭐라도 가르쳐 줘야겠다 보시 바라밀이 나오고 유혹을 이겨내야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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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계바라밀이 나와요. 그러다 보니까 이 상황을 꿰뚫어 봐야 되니까 지계바라밀이 나오고, 그러면서도 평정심을 유지해야 되니까 선정바라밀이 나옵니다. 이해되십니까. 오온 속에서만 육바라밀은 닦여요. 니르바나에는 그 잠재성만 있지 오온 속에 던져지지 않으면 절대 꽃이 피지 않습니다. 요게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입니다. 여러분이 직장 생활하시고 구르셔야 만행을 하셔야만 여러분은 보살이 될 수가 있어요. 산에 가서 고원(高遠)한 육지에서는 연꽃이 못 된다는 게 오두막 지어놓고요 딱 가서 평생 죽을 때까지 알아차리다 죽으면 윤회가 끝나지 않을까. 이게 초기불교입니다. 진짜 끝난다는 장담은 아무도 못합니다. 왜냐? 윤회를 초월한 사람은 말을 할 수가 없거든요. 말을 하는 사람은 윤회를 초월하지 않은 사람이고. 그러니까 더 얘기할 게 없죠. 자명한 걸 따르십시오. 오온이 있는 거 가지고 지금 잘 쓰시는 게 보살입니다. 이게 이제대승불교고요.
[* 능가경 → 달마가 가장 강조하며 혜가에게 위촉한 경전(능가종)
응당 이것이 ‘성문승의 종성’임을 알라. 그들은 자신의 승乘의 견해에서만 증득하였을 뿐이다. 이는 5지ㆍ6지 보살이 ‘번뇌의 결박’을 끊었으나 ‘번뇌의 습기’를 끊지는 못한 것이다. ‘불가사의한 생사’(변역생사變易生死↔분단생사分段生死)에 머물며 바로 사자후로 말하기를 “나는 이미 태어남을 다하였으며, 청정한 행위(梵行)는 이미 확립되었다. 해야 할 것은 이미 다 갖추어져서 다시는 뒤의 생을 받지 않을 것이다!”(석가모니의 오도송, 아라한의 오도송)라고 한다.]
능가경에서 자 이게 무서운 얘기를 합니다, 능가경에서. 달마가 제일 강조한 게 능가경이에요.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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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종을 원래 능가종이라고 했습니다. 응당 이것이 성문(聲聞)의 종성(種性)이에요. 성문을 얘기하다가 이 얘기를 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승에 견해에서만 증득했다. 이는 5지 6지보살이 번뇌의 결박을 끊었으나, 번뇌는 막을 수는 있지만 번뇌의 습기를 싹 정화하지 않은 거랑 같다. 육바라밀을 안 닦으면 번뇌가 아직 남았다는 겁니다. 불가사의한 생사, 변역생사를 얻었다는 겁니다. 의성신을 얻었다는 겁니다. 5,6지보살 정도 되면 의성신을 얻거든요. 그 정도 깨달음을 얻어놓고 아라한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게 실제 아라한들은 5,6지까지도 못 가요. 그렇죠. 의성신 만드는 아라한이 지금 부처님 말고 많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부처님을 비판한 겁니다, 석가모니를요. 보세요. 사자후로 말하기를. 아까 읽었던 아라한의 오도송(悟道頌)이죠. “나는 이미 태어났음을 다했고 청정한 행위는 확립되었기 때문에 나는 다시 태어나지 않으리라”는 석가모니의 오도송이자 아라한의 오도송을 이렇게 외치는데 “아니다”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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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신 얻어서 욕계에 더 이상 안 오는 경지를 가지고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능가경에서 대놓고 이렇게 석가모니의 오도송을 얘기해 놓고 이렇게 비판하고 있다는 거. 이거 충격적인 얘기지만 대승은 정확히 반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석가모니를 이렇다고 하면 안 되겠죠. 그러니까 이걸 소승 아라한들한테 탓을 돌리고 자꾸 비방하고 석가모니는 하느님으로 올려버리는 겁니다. 법화경 보시면요 석가모니가 이런 고백을 해요. “사실 그때 나 원래 성불했었는데 너희들 보라고 일부러 그때 한번 태어나서 성불하는 과정을 보여준 거다.” 되도 않는 얘기를 막 갖다 붙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대승불경이 신뢰를 잃고 있는데, 이걸 이해하셔야 돼요. 그렇게까지 해서 얘기하고 싶었던 게 뭔지? 또 충격적인 얘기 하나가 나갑니다.
[(초기불교는 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하강하여 ‘욕계’에서 부처가 되고 ‘열반’에 들었다고 보았으나, 대승불교는 ‘색계’ 중 ‘색구경천’의 연화좌에서 10지 보살이 ‘궁극의 부처’를 이룬다고 보았으며, 열반에 들지 않고 ‘의성신’을 통해 온 우주에 자유자재로 ‘화신’을 나툰다고 보았다. 힌두교의 인격신인 이슈와라[自在神]에 상응하는 신격화된 경지. 전지ㆍ전능한 자재신의 경지. (관자재보살) 대승불교는 석가모니가 이룬 경지를 5지ㆍ6지를 넘어서 7지를 이루어 ‘의성신’을 이루어 ‘색계’에 나아가는 것으로 보고, 그너머에 궁극의 부처의 경지를 설정하였다.
대승불교의 주장은 ‘초기불교의 석가모니’도 ‘의성신’을 이루어 색계로 나아가 욕계로 다시 오지 않는 경지로 보았으며, 열반에 안주한 ‘아라한들’은 잠시 ‘삼매’에 취해 있는 상태일 뿐, 실제로 윤회를 초월한 경지가 아니라고 보았다. 결국 ‘색계’에서 더 정진하여 전지ㆍ전능한 경지인 ‘궁극의부처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고 보았으며, 윤회ㆍ5온가 본래 청정하니 애초에 윤회ㆍ5온를 초월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보았다.)
* 대승불교는 ① 아라한의 열반안주에서 더 나가(↔아라한) ② 바라밀을 통해 열반의 능력을 더욱 계발하여(=석가모니) ③ 영원히 윤회계에 머물면서 온 우주의 중생을 구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석가모니/부처 신격화)]
제가 오늘은 뭐 작정한 사람같이. 근데 7탄이라요. 이 달에 요번에 한번 결산을 한번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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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주장대로라면요 보세요. 욕계에서 5지 6지보살 나아가 7지보살이 돼 버리면 색계로 태어나서 색구경천이라고 하는 지금 티벳 불교에서요 모든 부처님들이 사시는 곳이 색구경천(色究竟天)입니다. 색 중에 제일 끝내주는 천(天)이에요. 여기를 옥민이라 그래서 모든 관세음보살 다 여기 계십니다. 여기서 내려와서 중생을 구제하러 오는데 온 우주로 나가요. 관세음보살 같은 건 28천 다 돌아다닙니다. 그런데 5,6지 7지보살이 돼 버리면 이리(색구경천) 태어나 버리면 이게 다시 올 일이 없죠. 언제 오냐면 중생구제 하러는 와도 자기 번뇌 때문에 오지는 않아요.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성불을 어디서 할까요? 색구경천에서 10지보살된 다음에 10지보살 상태에서 그대로 성불을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게 대승경전인데 초기경하고 지금 다른 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초기경은요 욕계 안에 있는 도솔천(兜率天)에 부처님, 미륵부처가 지금 계시다고 보죠. 석가모니는 도솔천에 있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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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계에 와가지고 욕계에서 성불하셨죠. 성불 시스템을 전혀 지금 석가모니가 말한 시스템하고 다른 시스템을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욕계에서는 성불할 수가 없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럼 석가모니 가르침 뭐가 되죠? 그래서 이 결론이 나는 겁니다. 석가모니는 욕계에도 안 태어날 정도의 경지, 석가모니가 말한 그 가르침은 욕계에서나 색계 간다고 하는 그 가르침이라는 겁니다. “나 다시 욕계 안 와”라는 얘기를 윤회가 진짜 끝난 줄 알면 오산이다라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거기 가서 또 공부하셔서 거기서 성불해야 된다. 이게 버젓이 경전의 두 가지 가르침이 같이 돌아요. 혼용돼서 돕니다. 그래서 왜 그러냐면요 보십시오.여기 색구경천에 존재하는 게 인도에서는 시바나 이런 존재들이에요. 시바 같은 존재를 만든 겁니다, 부처님을. 힌두교에서 하나님이죠. 하나님의 존재를요 석가모니는 원래 이런 얘기를 안 하셨어요. 초기경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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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얘기가 없어요. 그런데 하느님으로 지금 승격한 겁니다. 그러니까 석가모니의 가르침, 실제 한 행적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평가를 하고, 석가모니를 시바 같은 존재로 승격시켜가지고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같은 걸 만들었죠. 관자재보살 같은 개념을 만들었는데 관자재보살에서 자재(自在)라는 게 원래 이슈바라라고 자재신(自在神)이거든요, 힌두교에서. 시바가 이슈바라입니다. 시바, 비슈누, 브라마가 자 자재신의 세 모습이에요. 자재하다는 말은요 신한테만 붙이는 건데 관자재보살이라고 해서 관세음한테 붙였잖아요. 관자재보살은 시바랑 동격입니다. 불교 내에 존재하는 하느님이에요, 사실은. 색구경천에 살면서 온 우주의 중생을 구제하는 전지전능한 존재, 열반에 들 일도 없어요, 사실. 이런 신격화된 개념이 대승불교에 등장했다는 겁니다. 여기까지 이해하시면요 이해되시죠. 초기불교의 아라한은 어렵지 않습니다. 석가모니가 이루신 경지는 어려워요. 그렇죠. 대승이 말한 경지는 또 그 너머에 있습니다. 그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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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에서 부처를 신격화, 석가모니 자체를 신격화시킨 거는 맞지 않습니다. 원래 역사적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맞지 않습니다. 그리고 소승이 우리가 윤회를 다 초월했다라고 우리는 더 닦을 수가 없다고 하는 입장도 대승에서는 반대했습니다. 이 정도 지금 설명 드리면 될까요, 이렇게. 지금 이 정도 이해하시고 불교를 보시면요 정확하게 지금 뭐가 서로 엇갈리는지를 정확히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야 될 길, 중요한 건 지금 여러분이 갈 길입니다. 일단 고를 소멸하세요. 일단 아라한 되고 보는 겁니다. 그렇죠. 다 아라한 되고 보는 거지 의성신이 있건 없건 간에 일단 고는 소멸하셔야 대승에서 1주보살 경지고, 소승에서는 아라한 경지이기 때문에 일단 거기까지는 들어가시고 보시는 겁니다. 그거 봐가지고 역량 되는 거 하세요. 역량 되는 만큼 육바라밀도 닦으시고 그럼 되죠. 여기까지 이제 제가 긴 시간을 제가 가졌는데, 아직 시간 다 잡아먹었네요. 그래서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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