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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1.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간략설명 한국 최대의 성인과 복자 탄생지
지번주소 서울시 중구 의주로 2가 16-4(서소문 역사공원 내)
도로주소 서울시 중구 칠패로 5
1984년 이 땅에는 103위 순교 성인의 탄생이라는 세계 교회사상 드문 하느님의 역사가 나타났다. 순교자들의 피로 세운 신앙의 터는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의 가슴속에 굳건히 살아 있다. 이들 103위 순교 성인들 중 44명의 성인과 함께 수많은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한국 최대의 순교성지가 바로 서소문 밖 네거리이다. 2014년 광화문 광장에서 시복된 124위 순교 복자 중에서도 27위가 바로 이곳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한국 교회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은 바로 이곳에서 "월락재천수상지진(月落在天水上池盡)", 즉 "달은 떨어져도 하늘에 있고 물은 솟구쳐도 연못에서 다한다."라고 하여 굽히지 않는 신앙을 증거한 바 있다.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숨져 간 순교자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중 성인품에 오른 이만도 44명으로 이들은 1801년 신유박해부터 1839년 기해박해, 그리고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온갖 고통 속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다가 희광이의 칼 아래 스러져 갔다.
서소문 순교자 기념관 내부의 성당. 제대에는 16위 성인의 유해와 서소문에서 순교한 44위 성인의 위패 그리고 54위 순교자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오랫동안 서소문 시민공원으로 단장돼 있던 이 순교의 현장에는 103위 성인의 탄생을 본 1984년, 한국 천주교 순교자 현양 위원회에서 세운 순교자 현양탑이 하늘로 치솟아 건립돼 있었다. 그러나 1997년 서소문 공원 재개발과 함께 철거되자 서울대교구에서는 1999년 성령 강림 대축일에 새로운 순교자 현양탑을 공원 내에 건립하였다. 또한 1891년 서울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성지 인근의 중림동약현 성당을 중심으로 성지 보존을 위해 노력해 왔다.
소문 밖 형장이 기억하는 첫 인물은 만천(蔓川) 이승훈이다. '덩굴이 무성한 시냇물'이라는 다소 풍류적인 호를 갖고 있던 그가 태어난 곳은 서소문과 이웃한 반석골, 곧 지금의 중림동(中林洞)이다. 자신의 호와 같이 덩굴이 우거져 무성한 시내를 앞에 둔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 교회 최초로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훗날 조선 교회의 베드로로서, 본명이 의미하는 반석(盤石)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명문가에 태어나 이미 24세에 벼슬길에 나서 환히 열린 출세의 가도를 달리던 그가 환난(患難)의 길로 들어선 것은 천진암 강학회의 일원이 되면서부터이다. 광암 이벽이 주도했던 이 모임에서 새로운 학문과 사상에 접하고 부친을 따라 북경에 가게 된 그는 서양인 선교사들을 통해 한국 교회사상 처음으로 세례를 받는다. 그것이 1784년의 일이다.
조선 교회의 반석으로 전교에 힘쓰던 그는 1801년 신유박해의 서슬로 최필공, 정약종, 홍교만, 홍낙민, 최창현 등과 함께 포졸들에게 잡혀 서소문 밖 형장으로 끌려간다. 사회적 명망이 높은 이들 여섯 명의 당당한 태도와 굳센 신념은 그들을 쳐다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경탄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
그중에서 정약종은 약현 · 약전 · 약용 형제와 함께 이승훈의 처남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평신도 사도직 단체라고 할 수 있는 명도회의 회장을 역임한 그는 강직한 성품과 뛰어난 통찰력으로 주자학과 도가 사상을 깊이 탐구했다. 그러나 주자학이 공리공론에 치우치고 도가가 허무맹랑한 사상이라고 판단한 그는 마침 서양문물과 함께 들어온 한역 천주교 서적들을 손에 넣게 되고 주어사 강학회를 통해 천주교를 수용한다.
"주교요지(主敎要旨)"와 "성교전서(聖敎全書)"는 그가 저술한 두 가지의 교리서이다. "성교전서"는 방대한 내용의 교리를 종합 · 해설했으나 미완성으로 남았고 "주교요지"는 순수한 한글로 쓰여진 저술로 10장 43개 항목에 걸쳐 배움이 없는 이들도 누구나 금방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쉽게 쓰여졌다. 특히 이 책은 양반 계층의 학자가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글로 저술했다는 사실에서 인간의 평등사상을 두드러지게 나타낸다.
같은 때 강완숙을 비롯한 여교우들도 한꺼번에 참수된다. 최초의 여회장이자 주문모 신부를 숨겨 준 죄목으로 아들 홍필주와 함께 체포된 강완숙은 몇 번이나 주리를 틀리면서도 주문모 신부의 거처를 함구하다가 다른 4명의 여교우와 함께 이승훈 등이 처형된 그 자리로 끌려 나갔다.
1839년의 기해박해 때에도 서소문 밖 형장에서는 순교자들의 피가 강물처럼 흘러내렸다. 이 때 처형된 이들 중에서 41명이 성인품에 올랐는데 그중에는 성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 김제준도 포함돼 있다. 그는 고문의 혹독함에 굴복해 한 번 배교한 후로는 더욱 굳건한 신앙으로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과 그의 누이 정정혜 그리고 정하상과 같이 북경을 여러 차례 다녀온 유진길과 불과 13세의 나이로 부친과 함께 순교한 유대철 소년 역시 기해박해 때의 순교자이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 네거리는 또다시 피로 물든다. 베르뇌 주교 등 외국 선교사들이 순교하던 바로 그 날 여기서는 남종삼, 홍봉주가 피를 흘린다. 그리고 이들의 머리가 네거리 말뚝에서 채 내려지기도 전에 최형, 전장운의 목이 잘린다.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이들의 수는 헤아릴 수도 없다. 다만 그들 모두 양같이 순하게 칼을 받았고 신음도 원망도 없이 오직 천주를 행한 한마음이 얼마나 컸던가 하는 것만 미루어 헤아릴 뿐이다. 현재까지 이름이 확인된 순교자만도 100명이 넘는다. 한국 천주교회는 초기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성을 추진하여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하느님의 종에 대한 시복 절차를 진행하였다.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자 중 강완숙 골룸바를 비롯한 27위가 하느님의 종에 포함되었다. 이들은 마침내 2014년 8월 16일 한국을 사목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서소문 성지 참배에 이어 광화문 광장에서 거행된 시복미사를 통해 복자품에 올랐다.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신부에 대한 시복 절차는 계속 진행 중이다.
성지 옆에 설립된 중림동약현 성당(옛 약현 성당)은 1891년 서울에 두 번째 본당으로 설립되었고, 1898년에 완공된 명동 성당(옛 종현 성당)보다 6년 앞선 1892년 한국교회 최초의 서양식 벽돌 건축물로 완공되었다. 1905년 종탑 꼭대기에 첨탑을 올렸고, 1921년에는 성당 내부 칸막이를 철거하고 벽돌기둥을 돌기둥으로 교체하였다. 1974년부터 대대적인 해체 복원공사를 통해 1977년 사적 제252호로 지정되었으나 1998년 한 취객의 방화로 소실되어 1년 6개월의 재복원공사 끝에 2000년 9월 건립 당시 원형에 더 가깝게 복구하여 다시 축복식을 가졌다. 서소문 순교성지를 품 안에 두고 있는 성당으로서 1991년 본당 설정 100주년을 맞아 서소문 순교자 기념관을 건립하였고, 2009년 9월 13일 기존의 피정의 집으로 쓰던 곳을 증개축하여 서소문 순교성지 전시관으로 새롭게 개관하였다.
한편 서울대교구는 교회사뿐 아니라 한국사의 중요한 장소인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가 쓰레기 재활용 처리장과 청소차 주차장, 노숙인 생활공간으로 사용되던 현실을 타개하고자 2011년 7월 24일 문화체육관광부와 서울시, 중구청에 '서소문 밖 역사유적지 관광 자원화 사업'을 제안했다. 그 후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정부와 지자체 그리고 교회가 합심해 서소문역사공원(지상)과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지하)을 조성해 2019년 5월 29일 염수정 추기경 주례로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축성 및 봉헌미사를 거행하고, 6월 1일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을 공식 개관했다. 이로써 사학 죄인들과 반역 죄수들의 처형장이었던 서소문 밖 네거리가 온갖 차별과 편견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이들과 함께 서로 위로하고 화합하는 역사 문화의 중심 공간으로 거듭났다. 또한 박물관 내에 정하상 기념 소성당을 꾸며 교황청 승인 아시아 최초의 국제 순례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순례자들을 위한 매일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20년 7월 23일)]
서소문 밖 - 최대의 순교 성지
서소문 밖은 바로 임금의 궁성이 있는 한양의 공식 처형지였다. 창업 이래 조선에서는 갖가지 모반 사건과 범죄, 정변 등으로 수많은 죄인들과 억울한 사람들을 처형하였다. 사형수는 크게 모반죄와 일반 범죄로 나뉘어졌는데, 그중 모반죄의 경우는 형장이 일정치 않았지만 나머지 사형수들은 주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형이 집행되었다. "서경"에서 말한 "형장은 사직단 우측에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따른 것이다.
서소문 밖 형장은 현재 서소문로와 의주로가 교차하는 서소문 공원 인근에 위치해 있었다. 경복궁에서 바라볼 때는 이곳이 바로 사직단(지금의 사직 공원에 위치) 우측이었기 때문이다. 또 한양의 성문 밖이란 점도 있었고,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곳이었으므로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줄 수 있는 효과도 있었으며, 최종 판결을 내리는 형조나 의금부와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형장으로는 아주 적격이었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 이래 서소문 밖은 가장 먼저, 가장 많은 신자들이 처형된 순교터가 되었다. 그들은 포도청으로 끌려가 1차로 문초를 당하거나 형벌을 받고 형조나 의금부로 이송되어 판결을 받았다. 그런 다음 형조의 옥인 전옥서(지금의 광화문 사거리 동쪽 서린동 소재)에 갇혀 있다가 사령들에 의해 끌려 나와 형장으로 향하게 되었다.
"처형이 결정된 신자들은 옥에서 끌려 나와 수레 한가운데 세워진 십자가에 매달렸다. 십자가의 높이는 여섯 자 정도로, 신자들은 양팔과 머리칼만 잡아 매인 채 발은 발판 위에 놓여지게 된다. 수레가 광화문통을 옆으로 지나 서소문에 이르면 그 다음은 가파른 비탈길이다. 이 때 사령들은 신자의 발이 놓여져 있는 발판을 빼내고 소를 채찍질하여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달리게 하였다. 수레는 무섭게 흔들리고 신자의 몸은 머리칼과 팔만이 십자가에 매달린 채 고통을 받게 된다. 현장에 이르면 옷을 벗기고 꿇어 앉힌 뒤 턱 밑에 나무 토막을 받쳐 놓고 목을 잘랐다."(달래, [한국 천주교회사], 서설)
우리의 순교자들은 서소문 밖 형장에서 이렇듯 잔인한 대우와 형벌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 첫 순교자들로부터 80여 년 뒤인 1887년에 블랑 주교는 이곳 순화동의 수렛골에 교리 강습소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공소가 되고 4년 뒤에는 약현 본당(현 중림동 본당)으로 발전하였으며, 1893년에는 약현 성당(사적 제 252호)이 완공되었다.
서소문 밖에서의 순교사는 대략 세 단계로 나뉘어지는데, 첫 단계는 신유박해 초기부터 지도층 신자들을 대상으로 시작되었다. 그 결과 1801년 2월 26일에는 첫 순교자가 서소문 밖에서 탄생하였다. 한국 교회의 반석인 이승훈(베드로)과 명도회의 초대 회장인 정약종(아우구스티노) 등 6명이 순교한 것이다. 그로부터 석 달 뒤에는 여회장 강완숙(골롬바) 등 남녀 신자 9명이 순교하였고, 10월과 11월에는 황사영(알렉산델)의 '백서' 사건과 관련하여 황사영, 현계흠, 황심(토마스) 등 5명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이렇게 서소문 밖의 작은 개천가에 순교자들의 피가 뿌려진 뒤에야 박해는 막을 내렸다.
두 번째 단계는 기해박해 때로, 1839년 4월 12일에 성 남명혁(다미아노) 등 5명과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던 성 김아기(아가다) 등 4명이 이곳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이어 6월 이후에도 계속 순교자가 탄생하였으며, 8월 15일에는 성 정하상(바오로)과 유진길(아우구스티노)이 다시 이곳에서 참수되었다. 이때 조선 교회의 지도자요 밀사 역할을 하던 정하상은 미리 체포될 것을 예상하고 "상제상서"(上帝相書)를 작성하여 품안에 지니고 있었는데, 이를 조정 관리들이 발견해 냄으로써 자연스럽게 '천주교가 진교(眞敎)'라는 호교론이 알려지게 되었으나, 박해로 눈이 먼 그들은 이를 묵살해 버리고 말았다. 기해박해 때의 처형은 11월 24일에 성 정정혜(바르바라) 등 7명이 순교의 화관을 받은 뒤에야 끝나게 되었다.
세 번째의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사람은 남종삼 성인 등 3명으로 나타난다. 전국적으로 가해진 대박해임에도 이곳에서 순교한 신자가 적은 이유는, 아무 때 아무 곳에서나 신자들을 체포하거나 투옥하고 처형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기록에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이름 모를 은화(隱花, 숨은 꽃)들이 서소문 밖이 형장에서 아무도 모르게 순교의 영광을 바쳤으리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서소문 밖은 분명 한국 교회 최대의 순교 성지였다. 103위 성인 중 44명이 이곳에서 순교했기 때문이다. 이를 기리기 위해 교회 측에서는 시성식이 이루어지던 1984년에 순교 기념탑을 서소문 공원 안에 건립하였으니 지금은 재개발 때문에 훼손된 상태이다. [편집자 주 : 1999년 성령강림 대축일에 새로운 순교자 현양탑이 세워졌다]
역사는 우연일 수 없다. 우리의 복음사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가 언제나 주님의 섭리를 말하곤 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순교자들의 체포, 투옥, 포도청과 형조에서의 형벌, 서소문 밖에서의 죽음, 이들은 모두 복음의 고리를 이루면서 현재까지 이어지는 주님의 섭리요 한국 순교사의 맥이다. 따라서 형리들이 채찍질하는 수레의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을 당해야만 했던 수만은 순교자들이 '착하게 살고 영생의 복락을 얻기 위해 올바른 길을 걷는 '선생복종'(善生福終)의 삶을 살아왔다면, 순교 성지 서소문 밖 형장이 훼손되었다고 해서 결코 초라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3월호]
2. 서소문 성지
서소문 밖 성지는 조선시대 아현 고개와 남대문 밖 칠패 시장으로 통하던, 소의문(昭義門) 밖에서 사형을 집행하던 지정된 사형장이었다.
당시 풍습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고갯마루나 장터에서 사형을 집행함으로써, 경각심을 주어 범죄를 사전에 예방하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곳은 새벽부터 사람들로 붐비던 시장 골목이었기에 일찍부터 광희문과 서소문은 서울 지역의 중요한 사형장으로서 이용되고 있었던 곳이다.
그런데 이 곳이 우리 순교자들의 피로 물들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기해박해를 거쳐 마지막 병인박해까지 70여 년 동안 수많은 교우들이 주님을 증거하며 순교하였다.
현재 이곳에서 치명한 것으로 밝혀진 순교자는 모두 98명으로, 그 가운데 기해박해 때 순교한 정하상(丁夏祥) 바오로를 비롯한 41분과 병인박해 때 순교한 3분 등 모두 44분이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여의도에서 시성 되었다. 그러나 초기 우리나라 천주교를 기초하고 이끌었던 정약종(丁若鍾), 이승훈(李承薫), 강완숙과 황사영(黄嗣永) 등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들은 아직 시복도 되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신유박해는 1801년 2월 2일(음력1월10일) 대왕대비 김씨가 사학(邪学) 금지령을 내렸고, 1802년 2월 4일(음력12월22일) 토사교문(討邪教文)을 반포함으로 박해는 마무리되었다.
한국 천주교회는 이들 순교자들에 대해서 그 행적과 증언들을 정리하는 등 시복, 시성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어, 앞으로는 더 많은 성인들이 시성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아무튼 이 곳은 새남터와 더불어 한국의 최대 순교 성지임에 틀림없다.
현재 서소문 성지는 중림동 성당에서 관리하고 있다. 옛날 성당 주변에 약초 밭이 많아 약현 성당이라 불리었던 중림동 성당은 1891년 5월 8일 본당이 설립되었다. 조선교구 최초의 본당인 명동성당이 그 규모와 수많은 난관으로 인해 건립이 지연되는 가운데,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완성된 건물이다. 이 성당은 명동성당과 마찬가지로 코스트 신부가 설계하고 공사를 감독하였다. 이 성당의 벽돌은 와고개 연와소에서 병인박해 때 순교자들의 선혈로 물들인 흙으로 벽돌을 구워 건축하였고,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사적 제252호로 지정되었으나, 1998년 화재로 소실되어 2000년 9월 17일에 다시 복원하여 축성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성당 건물이었던 이 성당에는 당시 선교사들이 몸에 지니고 다녔던,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 등 초기 사도들의 성해(聖骸)가 모셔져 있다.
서소문 공원에는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을 기념해 순교자 현양탑을 세웠으나 서울시의 공원 공사로 인해 헐리고, 지금의 현양탑은 1999년 성령강림 대 축일에 새로 축성하였다.
조선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형틀인 칼 모양을 형상화한 화강석 3개의 탑은 죽음과 박해를 상징하며, 주 탑과 좌우 탑의 원형 형틀에서는 7성사(七聖事)를 뜻하는 7개의 선이 흘러내리고 있다. 따라서 현양 탑은 주님의 진복팔단 중 마태오 복음 5장 6절의 “복되어라 의로움에 목마르고 굶주린 이들!” 하는 이 말씀을 전체 주제로 하였다.
중앙 탑의 청동 조각은 참혹한 순교의 현장을 형상화하였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순교자의 모습은 예수님을 품에 안은 성모님과 같이, 오늘날 순교자를 우리 품에 받아 드려야 함을 의미한다. 주 탑을 중심으로 우측은 44분의 성인 성녀들의 명패이고, 또 좌측은 54분의 순교자의 이름을 새겨 이곳의 순교 역사를 현장화 하였다.
칼의 형상이 죽음을 상징한다면 물은 생명을 나타내며, 물 속에 비친 탑을 통해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하는 생명의 이미지를 극대화하였다. 분수대를 통하여 솟아오른 물이 투명한 판유리를 타고 부서져 내리고, 또 여기에 물소리 효과를 주어 생명의 환희와 신비를 한껏 고조시키고 있다. 또 물 속에 잠긴 조약돌은, 이 곳에서 순교한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의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야간에는 수면 아래의 조명기구에서 탑과 유리벽을 환하게 비춤으로써 현양탑의 상징을 더 효과적으로 나타내도록 하고 있다.
탑의 뒷면에는 나자로의 회생(回生)과 죽은 사람을 살려내시는 예수님을 부조로 설치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부활에 이르게 되리라는 것을 암시하였다.
이 서소문 성지에서는 정약종의 다섯 가족에 대하여 알아보겠다.
정약종은 그의 형 정약전과 동생 정약용, 그리고 수많은 친구들은 1791년 신해박해 때 마음이 흔들렸지만 정약종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더욱 열성적이었다.
정약종은 명도회 초대 회장으로써 배를 타고 가거나, 심지어 말을 타고 가면서도 묵상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어리석은 사람을 만나면 힘을 다해 깨우쳐 주었고, 아무리 답답한 사람이라도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교리에 대해 물으면 마치 자기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듯 척척 풀어 주었고, 자기가 모르는 교리를 발견하면 모든 일을 전폐하고 반드시 알아내고야 말았다.
정약종은 무식한 사람들을 위하여 한글로「주교요지」를 저술하였다. 주교요지는 여러 가지 책을 인용하고, 자기 의견을 덧붙여 아주 쉽고 명백하게 썼으므로, 어리석은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까지도 주교 요지를 읽기만 하면 교리를 쉽게 배울 수 있었다.
‘사람은 스스로 하느님이 계신 줄을 아느니라’ 라는 첫 대목에서 주교요지는 이렇게 설명한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까지도 병들고 어려운 일을 겪게 되면, 누구나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며 “하느님 이 괴로움에서 빨리 벗어나게 해주소서” 하고 빌며, 또 먹구름이 몰려오고 천둥 번개가 요란하면, 자기가 지은 죄를 생각하고 무서워서 숨으려고 한다. 만일 하느님이 계시지 안는다면 사람이 어찌 그런 마음을 가지겠는가. 라고 설명한다.
그는 사형장에서 땅을 보지 않고,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며 죽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벌벌 떨던 휘광이의 칼에 맞아 목이 반쯤 잘렸음에도 불구하고, 벌떡 일어나 십자성호를 크게 긋고, 힘없이 쓸어졌다. 이때 그의 나이는 마흔 두 살(2월26일) 이었다. 정약종의 큰아들 정철상 가롤로는 아버지의 옥바라지를 하다가 연좌 죄로 붙잡혀 아버지가 순교 한지 35일 후인 음력 4월 2일 같은 자리에서 순교하였다.
정하상 바오로는 아버지 정약종 아오스딩과 형 정철상 가롤로가 1801년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할 때 일곱 살이었고, 여동생 정정혜 엘리사벳은 다섯 살이었다.
그 당시 모친 유소사 세실리아와 여동생과 함께 풀려났으나, 가산은 몰수되어 호구지책도 마련할 길이 없어서 고향 마재로 내려갔다. 그러나 천주교를 믿지 않는 가족으로부터 천주교를 믿어서 가문이 풍비박산되었다고 천주교를 믿는 정하상 가족을 학대하였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정하상은 어머니로부터 기도와 교리를 배우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다.
정하상은 20살이 되었을 때 모친과 누이를 마재에 남겨 두고, 서울에 올라와서 조증이 발바라 집에 머물면서 박해로 흩어진 교우들을 모으고, 성직자 영입 운동에 자문을 구하기 위해 신유박해 때에 함경도 무산으로 귀양간 한학자이며, 아버지 친구인 조동섬 유스티노를 찾아가서 자문을 받고 서울로 돌아왔다.
정하상은 교회 활동과 성직자 영입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816년 양반임에도 불구하고 역관의 하인 행색으로 북경을 찾아갔으나, 북경교회로부터 성직자 파견이 어렵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그러나 결코 실망하지 않고 매년 북경을 방문하여 성직자를 간청하는 한편 서울에 성직자를 모실 집을 마련하고,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올라오게 하였다. 1823년에는 사절단의 역관인 유진길 아우구스티노와 마부인 조신철 가롤로와 함께 북경 5000리 길을 무려 9차례나 왕래하면서 로마교황청에 조선교회의 상황을 알리고, 성직자를 보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때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선교사의 전교 없이 기묘하게 복음이 전파되어, 200여명의 순교자까지 낸 조선교회가 탄생했다는 소식에 감격하여 무릎을 꿇고, 교황강복을 주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다. 마침내 1831년 9월 9일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된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모방 신부님. 샤스탕 신부님. 그리고 앵베르 주교님이 조선에 입국하였다. 정하상은 성직자를 자기 집에 모시고 사목 활동을 도왔다. 앵베르 범세형(范世亨) 라우렌시오 주교는 모방 나 신부가 보낸 신학생 외에 또 다른 3명의 소년을 유학시키고자 적당한 인물을 고르는 한편, 정하상의 성실함을 높이 평가하고, 하루 빨리 성직자로 만들기 위해 라틴어와 신학을 주교 자신이 직접 강의하고 가르쳤다.
그는 42세이며 신부 되기를 자원하여 독신을 지켜 온 정하상 바오로와 32세인 이문우(李文祐) 요한과 이승훈의 손자 이재의(李在誼) 토마스와 마카오 신학교에 간 최방제(崔方済)의 형 최형(崔炯) 베드로를 발탁하여 그들에게 라틴어 읽는 법을 가르치고 사천성의 아멜 신부가 만든 한문책으로 신학을 가르쳐 이들 중 정하상과 이문우는 2․3년 안에 신품을 받게 될 것이라고 전망(유홍열한국교회사307)하였다
바로 그 무렵에 기해박해가 일어나 정하상은 주교님을 다른 곳으로 피신시켜 드리고 자신은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정하상은 천주교를 변호하여 당시 재상이던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에게 올리는 상 재상서(上宰上書)를 작성하여 올렸다. 이는 천주교를 유교 사상에 비추어 설명한 한국 최초의 호교론(護教論)으로서, 당시 사람들이 오해하였던 “무군무부(無君無父)” 즉 ‘천주교인들은 임금도, 부모도 몰라보는 금수같아서 조상 제사도 지내지 않는다.’는 잘못된 인식을 해명하고, 천주교에 대한 박해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호교론을 써 올렸다. 이 상 재상서는 그 내용이 훌륭하여 후에 중국에서 ‘포교서’로 사용되기까지 하였다.
그의 죄목은 양인을 데려온 역적이었다. 또한 열성적인 교회 활동의 주역이었기에 그에 대한 고문과 형벌은 너무나 처참하였다.
1839년 9월 21일 앵베르 주교님, 모방 신부님, 샤스땅 신부님이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로 처형된 이튿날 9월 22일 독신인 정하상도 서소문 밖 형장에서 45세에 참수 치명 하였다.
정하상 바오로는, 11월 23일 79세에 늙은 나이에 포청옥에서 옥사한 어머니 유소사 세시리아와 12월 29일 서소문에서 순교한 동생 정정혜 엘리사벳과 함께 1984년 성인 품에 올랐다.
정하상 가족은 오직 하느님을 위하여 살았고, 다섯 식구 모두가 목숨 바쳐 순교한 성가정이었다.(현재 정하상 바오로 성인과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묘는 경기도 광주 천진암에 모셔져 있다.)
정약종의 가족 모두는 로마서 8장 18절에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 보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라는 말씀에 힘입어 오로지 주님을 증거하는데만 모든 것을 바친 고귀한 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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