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문학과 인생 1. 문학은 어디에서 왔는가? 문학과 예술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가? 문학연구가들은 이 숙제를 심리학적 입장과 사회학적 입장에서 파악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1.심리학적 기원설 문학예술의 기원을 인간의 심적 동기에서부터 찾아보려는 입장이다. 문학예술의 창작심리 즉 예술적 충동(art impulse)측면의 고찰로 심리적 동기에 따라 모방충동설, 유희 충동설, 흡인 본능설 자기표현 본능설로 나눈다. 1) 모방충동설 모방충동설(imitative impulse)은 그리스어 '미메시스'(mimesis)에서 나온 말이다. '미메시스'란 모방으로 번역되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이어 쓰여졌다. 플라톤과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극(劇)이나 시(詩)를 미메시스 즉 모방이라고 생각했다. 미메시스는 神들과 영웅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그것은 인간본성에 속한다고 설명한다. 코울리지는 「섹스피어 批評」에서 시란, 模寫(copy)인가, 아니면 模倣인가를 논의한다. 그는 우리가 시로부터 쾌락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모사가 아닌 모방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워즈워드(W. words worth)도 "우리가 希求하는 것은 현실 그것이 아니라 현실의 표현이며, 사실이 아니라 모방이다"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는 사물을 모방하려는 本性이 있으며 또한 모방된 것을 보고 기뻐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어서 이 본능이 예술을 낳게 하는 동기이며 추진력이다"라고 주장한다. 2) 유희 충동설(遊戱 衝動說) 유희중동설(play impulse)을 독일의 칸트(I·Kant)에 의해 시작되었다 칸트는 "노동에 비해 예술은 유희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3) 흡인본능설(吸引本能說) 흡인본능설(instinct to attract other by plearing)은 인간이나 동물에게는 남을 자기에게로 끌어 들이려는 본능적 충동이 있으며 이 충동에 의해 예술이나 문학의 기원을 주장한다. 이학설은 다윈(C. Darwin)의 진화설에서 출발하는데 그는 이 흡인은 동물의 세계에서 그 형태로 설명하고 있다. 즉 길짐승과 날짐승들은 암컷에 비해 수컷의 자태가 더욱 화려한데 이는 암컷을 자기한테로 끌어들이기 위한 본능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동물에게는 도망치거나 숨어버리면 찾아 보려는 본능도 있다. 때로는 찾아오는 것보다 멀어져 가는 것에 매력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므로 동물은 상대를 자기에게 끌어들이기 위해 도망을 치거나 숨어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흡인본능설은 이런 흡인력이 예술창조의 동기라는 것이다. 4) 자기표현본능설(自己表現本能說) 자기표현본능설(self-expression instinet)은 인간에게는 자기를 표현하려는 본능적충동이 있으며 이런 본능에 의해 문학·예술이 창작도니다고 생각하는 학설이다. 허드슨(W. H. Hudson)은 그의 「문학연구 서장」에서 문학 창작의 동기를 인간본능에 두고 네가지 실체적 목적을 들고 있다. ①자기표현에 대한 욕구 ②인간의 행위에 대한 흥미 ③현실세계화 사상의 세계에 대한 흥미 ④형식애호의 흥미 2. 사회적 기원설 문학·예술 기원설의 사회학적 입장에서는 인류학과 고고학의 자료 및 근세의 미개민족의 실제 생활을 관찰 연구하여 그속에서 문학·예술의 기원설을 끌어낸다. 곧 과학적인 망상과 실증적인 고찰로서 문학·예술의 기원을 찾아보자는 학설이다. 1)실용적 기원설(實用的 起源說) 문학·예술은 생활의 실용성 때문에 발생한다고 보는 학설이다. 헝가리 출신인 예술사회학자 하우저(A. Hauser)는 「문학과 예술의 사회화」에서 "예술이란 어떠한 동기에서 그리고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라고 자문한 뒤, 예술의 기원(The Origins of art)은 노동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무기, 가구 등의 조각이나 문신 같은 것들의 상징이라던가 실제적인 주인의 부호를 의미한다. 또 무용의 동작은 사냥하는 짐승들의 동작이며 생활의 실제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2) Ballad Dance(민요·무용)설 민용·무용설은 모울튼(R. G. Moulton)에 의해 주창되었다. 모울튼은 말, 소리, 몸짓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 민요무용인 Ballad Dance는 원시문학의 형대로서는 창조적 목적으로 발전되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성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홍해를 건넜을 때의 승리의 노래와 춤이나 다윗의 이야기(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해 춤추었다는)를 그 예로 들고 있다. 2. 문학의 가치 '문학의 가치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은 고대 그리스 기대 이후 지금까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철학적 관점에서 문학의 본질과 가치에 대해 최초로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플라톤이었으며, 그 문제점을 다시 지적하여 논의를 전개한 이가 아리스토텔레스다.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시인이란 이데아로부터 3단계나 떨어져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상국가에서는 시인을 추방해야 한다는 '시인추방론'을 주장했다. 모방가는 진실로부터 매우 멀리 떨어져 있으며 보이는 그대로의 것을 전부로서 취급한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개별적인 것에서 단지 일부분만을 그것도 가상 속에 있는 것을 다루기 때문이다. 즉 플라톤은 시인을 이데아(진리 혹은 본질)를 추구하는 철학자, 그리고 이데아에 따라 물건을 제작하는 제작자, 그리고 제작해 놓은 물건을 모방하는 예술가 등으로 구분하고 진리 인식의 차원에서 예술가를 배척하였던 것이다. 이런 플라톤의 '시인 추방론'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예술(문학을 포함한)적 가치를 옹호한 이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는 진리는 직관만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 과정을 통해 인식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그 인식의 통로로 예술을 들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으로서의 사물의 고유한 본질이 물질 그 자체 속에 내재하고 있으며 이념의 영역 속에 속하지 않는다는 진리관을 갖고 있었다. 그의 형상론에 따르면, 모든 물질은 그 속에 놓여 있는 형상 즉 자신의 고유한 현실성을 달성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형상적 현실성은 사물의 고유한 본질 형상을 위한 인식적 가치를 지닌다. 오늘날 문학의 가치를 논함에 있어 위에서 언급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일반적인 예술론적 원리로 인정되고 있다. 말하자면 삶의 법칙을 예술의 고유한 방식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오늘날 리얼리즘의 행위의 개연성에 비추어 볼 때 거의 일치한다. 리얼리즘에서의 개연성은 경험적인 것과 사변적인 작업에 함께 참여하기 때문에 문학은 진리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 이 가능성은 시의 구조 내에서의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발생한다. 구조화 의미의 상호작용은 형상과 진료의 어떠한 분리도 이단시한다. 그러한 파악된 리얼리즘은 비록 19세기 이후로 그 용어가 사전적인 기술과 관계된 문학에 쓰여지는 것에 관례로 되었지만 문학적인 의미로서의 타당성을 지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에 진리 인식의 통로로써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으며, 이러한 주장이 오늘날 문학 작품 존재의 가치를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학의 가치를 문학의 본직에 입각하여 논의한다면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1) 언어 예술로서의 가치 언어 예술로서의 문학이 다른 예술과 구별되는 가장 독특한 특징은 표현 매재(媒材, medium)로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문학 이외의 다른 예술들은 모두 감각적인 재료를 표현 매재로 사용한다. 예를 들면 회화는 시각적인 매재인 색깔을, 음악은 청각적 매재인 소리를, 조각은 질감과 부피를 지닌 매재를 사용하여 우리의 감각 기관에 직접 호소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언어를 표현 매재로 하는 문학은 직접적으로 감각 기관에 영향을 비칠 수 없으며 언어라는 기호의 해독을 전제로 우리의 감각과 만난다. 즉, 언어 그 자체는 관념이며 구체적 사물을 기호화한 것이기 때문에 감각과의 직접적인 교감은 불가능하다. 시에서 빨간색의 시각적 효과를 나타내려 할 경우, 우리는 '빨갛다', '새빨갛다' 등으로 말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빨간색을 표현 매재로 사용하는 미술의 감각적 효과에 비하면 상당히 미약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종소리를 직접 듣는 것과 종소리를 언어로 기호화하는 문학의 경우를 비교해 보면 감각적 효과의 차이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밖에 촉각적·후각적·미각적 감각 역시 마찬가지이다. 말하자면 문학에서는 감각이 언어가 지닌 개념을 통해 지각될 뿐이다. 문학은 이처럼 우리의 감각 기관에 직접 호소하는 능력이 매우 미약하다. 그러나 '감각의 직접성'이 불충분한 대신 다른 예술에서는 불가능한 '관념'을 직접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것은 언어를 매재로 사용하는 데서 오는 이점이다. 언어는 다른 예술의 감각 매재들과는 달리 사상이나 관념을 직접적으로 담아 낼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언어는 문학을 문학으로 성립시키는 하나의 예술적 질료(質料, material)가 된다. 언어가 문학에서 하나의 질료로서의 속성을 지닌다는 것은 언어적 특성에 기인한다. 언어는 1차적으로 말소리(형식-청각 이미지)와 의미(개념)로 성립되는 기호이기 때문이다. 말소리와 의미라는 두 요소를 지니고 있는 언어의 이러한 특성은 다시 문장과 문장의 구조적 결합에 의해 관념의 덩어리를 이루어 내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언어는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사상을 쉽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밖에도 문학은 언어를 표현 매재로 사용함으로써 시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 풍부한 재현 및 표현의 영역을 가질 수 있다. 예를 들면, 역사적으로 펼쳐지는 어떤 사건의 과정이나 공간적으로 전개되는 현실의 다양한 모습은 다른 예술로는 담아 낼 수 없다. 문학은 이렇게 인간과 세계의 모든 대상을 그릴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다양한 장르롸 폭 넓은 영역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2) 반영 예술로서의 가치 문학 작품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 현실과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다. 작품의 가치는 작품이 외부 현실과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라고 말하면서 문학을 역사보다 우위에 둔 것은 문학 작품이 역사보다 현실의 본질을 훨씬 더 잘 반영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현실을 충실히 반영한다는 것은 다양한 현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보편적 진실을 바라보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반영은 진리 인식의 통로로서 기능을 한다. 훌륭한 문학 작품이 감동을 주는 것은 그것이 진리 반영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은 역사·사회에 대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역사적 현실에 대항하여 모순된 현상에 대해 진리를 수호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그 작품의 표현의 아름다움을 넘어 역사적 현실에서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별이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한용운, <님의 침묵> 중에서- 기(이별) ― 승(슬픔) ― 전(희망) ― 결(신념)이란 구조를 가지고 있는 <님의 침묵> 중 反轉에 해당하는 인용부분은 1920년대 어두웠던 역사적 현실 이면에 숨어 있는 보이지 않는 '진리'를 반영하고 있다. 우리가 문학을 통해 역사적·사회적 진실을 규명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며, 현실의 모순을 넘어 전망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3) 허구적 보편성으로서의 가치 문학은 언어를 질료로 삼는 예술이지만, 이러한 예술로서의 문학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허구(虛構, fiction)적으로 꾸며지는 것이다. 흔히 문학은 진실을 추구한다던가 진실 그 자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 때의 진실은 그것이 담고 있는 미적 가치 내용에 대한 평가라 할 수 있는 것으로 그러한 미적 가치 내용을 담고 있는 문학작품의 형상화 틀을 허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허구는 조리에 맞지 않는 허무맹랑한 거짓말이 아니라 그럴듯하게 꾸며내어 마치 사실인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속성을 일컬어 개연성(蓋然性, probability)이라고 하고 그럴듯하게 꾸민 거짓을 개연성 있는 허구라 한다. 문학이 허구하고 할 때 대표적인 장르에 해당되는 것은 시, 소설, 희곡이다. 시인의 영탄적 감정 효현이 대부분인 시는 고백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제외되기는 하지만 서사성이 가미된 서사시들은 여전히 허구적 속성에 의해 지배되지 않을 수 없다. (가) 이날이야말로 동소문 안에서 인력거꾼 노릇을 하는 짐첨지에게는 오래간만에도 닥친 운수좋은 날이었다. 문안에(거기도 문밖은 아니지만)들어간답시는 앞집 마나님을 전찻길까지 모셔다 드린 것을 비롯하여 행여 손님이 있을까 하고 정류장에서 어정어정하며 내리는 사람 하나하나에게 거의 비는듯한 눈길을 보내고 있다가 마침내 교원인듯한 양복장이를 동광학교까지 태워다 주기로 되었다. 현진건<운수좋은 날>부분 (나)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 밤에 남편은 두만강을 무사히 건넜을까? 저리 국경 강안(江岸)을 경비하는 외투 쓴 검은 순사가 왔다 - 갔다 - 오르명 내리명 분주히 하는데 발각도 안되고 무사히 건넜을까? 소금 실은 밀수출 마차를 띄워 놓고 밤새 가며 속태우는 젊은 아낙네 물레 젓던 손도 맥이 풀려서 파! 하고 붙는 어유(漁油)등잔만 바라본다. 북국의 겨울밤은 차차 깊어 가는데. - 김동환, <국경의 밤> 중에서 - (가)의 김 첨지나 (나)의 젊은 아낙네는 허구적 인물이며, 그들이 행한 행위 역시 허구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허구적 인물과 행위가 일제하 우리 민족 구성원의 그것이라고 믿게 된다. 왜냐하면 '김 첨지'는 당시 서울의 수많은 인력거꾼 가운데 어느 누구일 수 있으며, '젊은 아낙네' 역시 국경에 살던 어느 여인일 수 있기 때문이다. 거짓말이지만 진실되게 보이게 하며 허구의 세계이지만 그것을 현실로 유추하게 만드는 그 원동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특수한 현상을 뛰어넘어 보편성을 획득하는 힘이다. 작라는 상상력을 통해 인물과 사건을 창조하고, 독자는 상상력을 통해 작품을 수용하는 것이다. 4. 효용성으로서의 가치 문학의 효용성으로서의 가치는 작품과 독자가 상호간에 맺고 있는 관계에서 비롯한다. 이것은 문학이 갖고 있는 기능적 측면, 즉 문학은 독자에게 쾌락을 제공하는가, 교훈을 하는가? 독자는 어떤 인식 과정을 통해 작품을 수용하는가, 독자가 수용한 작품의 가치는 어떻게 사회화되는가를 다룬다. 일반적으로 문학의 효용성에 대하여 회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문학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은 구체적 생산물이 아니기 때문에 문학이 인간에 생존문제 즉, '먹고, 입고, 사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는 문제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를 통해 하나의 문학 작품이 인간의 역사를 바꿔 놓은 사건들을 찾아 볼 수 있다. 미국의 남북 전쟁이 끝났을 때, 에이브러험 링컨은 남북 전쟁에서 북군의 승리의 영광을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의 저자 스토우 부인에게 돌렸다. 그 작품은 당시 미국에서의 흑인에 대한 인식을 '동물에서 인간으로' 전환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으로 인해 북군이 주장하는 '노예해방'은 하느님 앞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명분을 가질 수 있었고, 이런 명분이 군사적으로 열세였던 북군에게 강력한 정신적 힘을 갖게 했던 것이다. 이렇게 문학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역사까지도 바꿀 수 있는 효용성을 갖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문학에 있어 교훈설이란 기존의 도덕률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그 자체를 인식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문학이 다양한 현실을 통해 보편적 진실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학의 쾌락설을 본질적으로 '진리'를 인식했을 때 오는 기쁨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문학 작품에서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은 바로 '진리'를 인식한 기쁨 때문이다. 나아가 그 감동의 강한 전파력이 그 사회 구성원과 공유됨으로써 문학의 윤리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문학의 사회화·윤리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3. '인간'의 거울인 문학 겨울날 밤 화로불가에서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부터 동화, 우화, 삼국지, 일리아드, 오딧세이, 동명왕편 같은 신나는 무용담이나 로미오와 줄리엣, 순애보 같은 가슴저린 이야기들 속에는 진지함이 깃들어 있다. 따라서, 문학은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부터 명작에 이르기까지 삶의 궁극적인 진실을 담고 있다. 인간은 문학을 통해 삶의 진실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실이란 무엇인가? 영국의 시인 키츠는 "아름다움은 곧 진실이며 진실은 아름다운 것이다" 라고 했다. 언뜻 '진실 = 아름다움' 이라고 들리지만 진실은 아름다움도 추함도 아니다. 진실은 '있는 그대로의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상대(반대)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밤과 낮, 빛과 그림자, 선과 악, 삶과 죽음이 그것들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나눌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不可分의 관계다. 그것은 서로를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빛이 없는 곳에 그림자가 있을 수 없고 선이 없는데 악이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불행은 늘 함께 존재하는 긍정과 부정적 측면 중 긍정적인 측면을 인정하려는 데서 싹튼다. 그러나 인간은 긍정적인 측면보다 슬픔과 괴로움 같은 부정적인 측면을 더 많이 갖고 있다. 그래서 영국의 시인 셀리는 "인생의 가시밭에 나는 쓰러져 피를 흘리노라"고 노래하고 있다. 불교에서도 인생을 苦行라고 한다. 인생자체가 生老病死의 네 가지로 이루어진 고통의 바다라는 것이다. 中世에서도 인간은 천사와 동물의 중간적 존재라 했다. 그러나 인간들은 이 양극단을 인정하지 않은 채 남이 보기에 좋은(긍정적인) 나만을 자신이라고 여긴다. 무례하고 더럽고 잔인하고 아·더·메·치·유한 부분은 자신이라고 보아주지 않는다. 이런 현상과 심리상태는 지식이 많을수록 문명이 발달한 사회일수록 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그것이 부정적인 나의 다른 모습이며 부정적인 면을 남에게 보이는 것은 내게 이롭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Sigmund Freud는 부정적인 나와 긍정적인 나의 비율을 9 : 1이라고 선언한다. 즉, 인간의 의식 밑에는 무의식이 있는데 그것은 주로 이드(ID)라고 하는 원초적 성욕으로 이루어져 있다. 매우 불합리하고 이기적이며 쾌와 불쾌의 원칙에 의해서만 움직인다. 이 주장을 쉽게 풀어보면 우리에게는 내가 알고 있는 나와 모르는 내가 있는데 내가 알고 있는 나는 교양 있고 예의바르며 친절하고 도덕적이지만 모르는 나는 정반대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모르는 내가 사사건건 내 일에 간섭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 모르는 나는 실제로 내 행동의 9/10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남을 칭찬하려 했지만 화내게 되고 걱정해주려 했지만 비꼬게되고 다정하게 해주려 했지만 실수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부정적 측면들이 모이게되면 날벼락 같은 큰 불행을 불러들이기도 한다. 이쯤 되면 언제까지나 모르는 나를 그대로 모른 척 할 수는 없다. 어떻게든 알아보아야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살아온 타성 때문이다. 낳아서 성장하고 교육받는 동안 우리는 부모로부터, 선생님으로부터 부지런 하라, 예의 있게 행동해라, 공손해라, 성실해라, 착해야 한다는 등 긍정적인 측면의 요구와 교육을 받아 왔기 때문에 섬뜩할 정도로 부정적인 측면이 자신의 다른 면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설사 알려고 해도 저절로 고개가 돌아가고 만다 作家들은 인생의 모순과 설명되지 않은 부분들에 관심을 갖고 그것들을 연구한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보려하면서 그 결과를 문학작품 속에서 구체화시키고 있다. 사실 그들은 그 대가로 많은 것을 지불하게도 한다. 진실을 보려는 두려움을 잊기 위해 술이나 여자나 마약에 빠지기도 하고 때로는 정신질환을 앓기도 하며 심하면 죽기도 한다. 그 덕분에 우리는 안방에서 편한 자세로 앉거나 누워서 그 괴로움 부분을 읽거나 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모르는 나, 있는 그대로의 삶에 대한 진실을 만나게 하는 문학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오이디푸스 이야기이다. 그리스 테베시의 왕(라이오스 VS 이오카스테 = 오이디푸스) 왕과 왕비 → 오이디푸스 장래를 신탁(神占:신점) - 아버지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 왕과 왕비→ 아들을 이웃나라 야산에 내다버린다 → 나뭇군에 의해 구조 → 성장 → 자신이 성장 비밀을 알자 고향을 찾아 방랑 → 방랑 중 오만한 왕을 결투→ 왕을 죽인다 → 스핑크스 수수께끼로 백성을 괴롭힌다 → 이오니카 여왕→ 문제를 해결하면 결혼해주고 왕의 자리를 주겠다고 공고 → 오이디푸스 문제해결 → 왕(테베시)이 되었다 → 어느 해 가뭄과 기근 민심혼란 → 그 원인 신탁(신점) → 나라안에 아버지 죽이고 어머니와 살고 있는 자의 더러운 행위 때문 → 범인을 찾아보니 오이디푸스(자신) → 왕비 자결 → 오이디푸스 스스로 두 눈 뽑고 다시 방랑의 길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오이디푸스만의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의 보편적인 이야기다. 프로이드는 이것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 한다. 즉 모든 남자아이들에게는 은근히 아버지를 없애고 어머니와 가까워지려는 본능적 욕구가 있다 물론 이것은 자아를 발견하고 성장하려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누구든 이런 숨겨진 욕망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이렇게 숨겨진 사실을 밝혀내고 드러내는 것이 문학이 나타내는 진실이다. 그러므로 문학과 삶은 다르지 않으며 너와 나 역시 다르지 않다. 가량 경찰이 도둑질을 했다던가 교사가 돈을 받았거나 친척 누군가가 스캔들을 일으켜 집안이 파탄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흔히 '아니, 이럴수가...' 하며 마치 자신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일처럼 말한다. 그러나 그 일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우리 자신의 일이 될지 모른다. 그것은 자신도 부정적인 측면의 90%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국시인 모던은 교회에서 누군가를 애도하는 조롱이 울릴 때 "저 종이 누구를 위해 울리는지 묻지 마라 그것은 너와 나를 위함이기도 하는 것이기에"라고 노래한다. 이제 우리는 왜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무지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자신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문제지만 자신의 부정적인 면을 좀 체 인정하려 하지 않는 사람이 더 문제인 것입니다. 아무튼 오이디푸스의 비극은 이 무지하고 가련한 인간의 운명에 대한 일종의 진혼곡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이디푸스 뿐이 아닙니다. 쉑스피어의 주인공들을 보십시오 절대 권력의 리어왕은 딸들에게 기만당하지만 백전백승의 무어장군인 오셀로는 자신이 흑인리라는 열등감 때문에 아내를 질투하고 의심하다가 마침내 죽이게 됩니다. 충성스럽던 장군 백베드는 마녀들에게 현혹되어 왕을 죽이고 반역을 일으키다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지고 맙니다. 그들을 처음부터 자신에게 부정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요? 그러나 진실과 만났을 때 끔찍한 자신의 참모습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의 부정적인 면과 만나지 않기 위해 눈감아버리거나 평생 필사적으로 도망다니는 거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렇게 모르는 것이 많을까요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무려 16년 간을 공부하고 사회를 체험하며 살아왔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온 것이 지혜가 아니라 지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지식과 지혜는 판이합니다. 지식은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며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이런 지식은 쌓으면 쌓을수록 아는 나와 모르는 나의 간격을 벌려 놓습니다. 곧 지식이 한계라고 할 수 있지요 지혜는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대로 보아주고 포용해 주는 것입니다. 여기 진흙탕이 있습니다. 지식으로 더럽고 깨끗한 것을 분별한다고 해서 진흙탕의 물은 깨끗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흙탕을 있는 대로 그대로 두면 진흙이 밑으로 가라앉고 맑은 물이 떠오릅니다. 그 물을 통해 전체를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삶이라는 진흙탕에서 맑은 물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지식보다는 지혜이고 지혜가 인간을 행복과 만족으로 이끌어 갑니다. 마치 더러운 연못에서 향기 그윽한 연꽃이 피워내듯... 문학은 여러분의 지식을 잘 활용하여 여러분이 자신 속에 숨기고 외면해 온 삶을 바라보고 포용하게 합니다. 오이티푸스 이야기는 자신이 현명한 것이 아니라 패륜아였다는 것을 알았다는데 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조건과 한계를 알고 절망하는데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더러움을 알았을 때 그것을 얼마나 겸허하게 받아들여 변화 했는냐가 중요합니다. 인간의 지식은 부분적이지만 신의 지식은 전체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숨겨진 이면을 포용하여 전체적이 될 때 이제까지와는 다른 신적 차원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지혜자라고 부르고 성인(聖人) 또는 초인(超人)이라고 합니다. 오이디푸스가 눈이 없는 장님의 모습으로 끝없이 참회하며 방황하다가 죽자 신들은 그 무덤을 신성한 존재로 승격시킵니다. 그의 참회가 그를 다른 차원으로 인도한 것이지요. 문학의 비극적인 이야기 끝에 있는 이 부분을 우리는 '카타르시스'라고 합니다. 곧 정화(精華)라는 뜻이지요 이런 정화의 과정에서 부가가치 된 또 하나의 중요한 것은 '아는 나'와 '모르는 나'가 화해하고 포용하여 미움과 불신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자신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생깁니다. 자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 없이는 사람을 사랑하거나 믿을 수 없습니다. 그 뿐 아니라 자기와의 화해와 포용은 본래부터 지니고 있던 엄청난 잠재력을 일깨워 줍니다. 불신과 갈등, 미움에 박혀 있던 에너지가 솟아오르게 됩니다. 애정과 열정에 불타는 창의적인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문학은 바로 이런 가능성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4. 참다운 애정의 실현 「연애는 인류에게 부여된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다.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 즉 그가 없으면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그런 한 사람을 발견하는 것이 그 시초가 된다. 연애란 바로 이런 인간을 얻기 위한 것이며 이렇게 맺어진 두 사람은 서로를 위해서만 산다. 각자는 상대를 위해 생활을 더 아름답고 풍부하게 만들고 싶다는 소망을 품는다 일종의 give and take인 것이다. 「연애는 한 인간이 또 하나의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고귀하고 풍성한 것이다 사소한 이기주의는 모두 크고 넓은 사랑의 흐름 속에서 녹아 없어져 버린다」 애정의 이상적 상태를 매우 아름답게 표현한 견해중의 하나다 그러나 이것은(연애, 또는 사랑이라고 표현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갈등과 고통을 수반한다. 예컨대, 남승들은 아름다운 여성을 대할 때 공포를 느끼거나 그 대상을 일부러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가도 여성과 친밀해지는데 성공한 남성들은 애정이 식은 듯한 감정을 보이기도 한다. 이런 감정들이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애정표현을 요구하는 여성들과 갈등을 야기하게 된다. 여성들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여성들은 연애시 상대를 계속해서 시험하는 냉철한 작업을 되풀이하는 경향이 있다. 사회적·경제적 위치로 상대의 평가 기준을 삼는가하면 결혼이 행복의 최종관문이라고 믿기도 하고 결혼 후에는 상대 때문에 자신의 행복이 손상되고 있다는 생각도 한다. 이런 감정들이 스스로의 갈등이 되게 한다. 그렇다면 이런 인간의 애정감정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 애정의 실제 모습은 질투라는 감정으로 연속된다 상대가 다른 이를 선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감정 속에서 대부분의 에너지를 소모한다. 예전에 배해 애정의 농도가 어떤가 그것이 자신만을 향해 있는가에 에너지가 집중된다. 그 결과 부정적인 징후가 발견되었을 때 비극은 시작된다. 1. 어떤 이에게 있어 애정은 상대방이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을 때 만 성립되기도 한다. 상대가 다른 이성에게 눈을 돌리거나 자신을 포기했을 때, 즉 상대가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을 때 비로소 자신이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2. 어떤 이들은 상대를 적으로 돌리는 것으로 애정을 품는다. 이성들간에 인가가 높은 이에 대해 냉담한 태도를 나타낸다. 깊은 열등감을 갖고 있는 경우이다. 이들은 대개 유년시절 부모로부터 충분한 인정을 받아보지 못한 채 성장한 사람들이다. 자신의 애정이 상대에게서 인정받지 못 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 결과 그는 냉담하고 공격적이라는 평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3. 이성적인 사랑의 형태로 기적적이고 운명적이며 환상적인 로맨스를 꿈꾸는 이들이 있다. 연애는 가장 높은 가치인 삶의 형태라고 보는 사람들이다. 흔히 "사랑에 빠진다"는 표현이 가능한 이 애정 형태는 삶의 다른 가치들을 그 밑에 복종시킨다 <젊은베르테르의 슬픔>이 여기에 속할 수 있다. 이런 베르테르의 사랑방식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보통의 인간은 자신의 욕망이 성취되지 않는 영역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성숙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고 타인들과의 적절한 화합관계를 구성해 간다. 그러나 베르테르는 자신의 욕망이외의 세계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가령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실패로 인생을 체험하며 성숙해간다는 일반론적인 사랑의 개념을 시인하지 않고 있다. 또 괴테가 약혼자 있는 여성이라는 사실에 대한 도덕불감증도 한 예가 된다. 그에게 있어서 세계는 제로가 아니면 전부인 것이다. 따라서 자신을 자해(自害)함으로써 상대의 애정을 획득하려는 태도는 전형적인 유아기적 삶의 대응방식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부정적인 점에서 보면 <로미오와 줄리엣>도 자유스럽지 않다 만약 로미오와 줄리엣이 결혼에 성공했다고 가정해보자. 사랑에 대한 환상과 생활의 이상보다 현실에 대한 의견 차이로 부부싸움도 있을 것이고 혹 로미오는 반대로 줄리엣 역시 총각들의 구애를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로미오와줄리엣>의 이야기는 아름답다고 한다. 사실이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기성세대의 완고한, 모순된 제도와 질서를 붕괴시키는 순진성에 있는 것이지 그들이 사랑의 완성이라는 모범적인 답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4. 또 다른 예는 편역된 애정관이다 여러 여성들을 전전하면서도 애정의 충족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극단적인 예가 <돈주안>이다. 이런 유형의 인간을 우리는 색정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음 글은 돈주안이 그의 엽색행각을 비난하는 하인의 말을 반박하는 내용이다. 돈주안의 이 말에는 한편 일리가 있기도 하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애정을 완성해 가는 관습과 이론 자체를 공격하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 갖고 있는 이성에의 '진실한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돈주안은 인간의 욕망이란. 윤리나 규범, 전통적 가치들에 의해 규제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천부적(天賦的)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세계라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작품말미에서 돈주안은 지옥으로 떨어져 형벌을 받게된다. 돈주안의 주장과 행동은 인간의 자유가 천부적이라는 점에서 일면 수긍이 가지만 문제는 주안의 욕망 충족 행위가 타인의 욕망을 파괴한다는데 있다. 그는 자신이 중대한 '진실한 열성'으로 수많은 여성들과 '사랑'을 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 사랑 때문에 수많은 여성들에게 상처를 주고 그녀들의 인생에 타격을 가하는 것이다. 돈주안과 유형을 유년기에 이성의 부모로부터 학대를 받았거나 버림받는 체험이 있는 자에게서 나타난다. 또는 갖가지 이유로 이성과의 결합에 대한 부정적인 의식을 유년기부터 스스로에게 주입해온 체험을 갖고 있는 자도 같다. 잠재 의식 속에 숨어 있었던 체험과 저변심리가 그의 인생을 여성들에 대한 복수에 몰두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세계 속에는 행복이나 화합보다 갈등이나 불행, 고통을 더욱 많이 수반한다. 즉 사랑에는 애착심, 독점욕, 질투, 갈등, 희생 등 부정적 감정들이 늘 활개를 치고 잇다. 인간이 갖고 잇는 정신세계 중 가장 '아름답다'는 사랑의 감정이 이처럼 불행한 방식과 의식으로 거듭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상대방이나 시대(법과 제도, 관습, 도덕 등)의 사회에 문제가 있는가? 아니면 자신에게 있는 것인가? 만약 상대나 시대적 사회에 원인이 있다면 이것은 운명과 숙명 위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자신에 있다면 그것은 치유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애정의 문제가 자신 인생 전체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증언한다. 불행한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자신의 그릇된 인생관이나 그릇된 삶의 스타일을 남녀 관계 속에 그대로 옮겨 놓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참다운 애정을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아무리 인간의 자유와 권리가 천부적이라 하더라도 참다운 애정을 달성할 수 있는 능력도 완성품으로 부여된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의 미래의 어느 지점에 '이상적인 목표'로써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목표에로의 접근은 자신이 스스로를 대하듯 상대를 자신의 또 다른 객체로 인식할 때 가능해진다. 이기주의와 독선, 의심 등이 걸림돌이다. 이것들을 먼저 치우고 자신에게 관대하듯 상대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배려가 중요하다. 둘째, 이를 위해 자신의 인생에 걸려있는 문제들 즉 열등감, 분노나 슬픔 등 부정적 감정을 시인하고 그것들을 긍정적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이 필수적이다. 내 안에 있으면서도 내가 알지도 못했고 시인하려 하지 않았던 이런 부정적인 인식들을 인정하고 포용할 때 우리는 자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생긴다.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는 결코 상대를 사랑 할 수가 없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5. 창조와 자유로서의 문학 윤동주의 마지막 작품 <쉽게 씌여진 시(詩)>는 "동경(東京)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창작되었다. 이 시야말로 마지막 작품이라는 문학사적 의미에다 윤동주 문학의 정점이라는 평가에 손색이 없다. 개인적으로 본다면 경제적인 어려움, 사회적으로 본다면 전시 체제의 불안한 분위기 속에서 감행된 윤동주의 유학은 끝없는 도정(道程) 가운데 하나였지만 결국 그 자신의 비극적 종말을 배태하고 있었다. "창(窓)밖에 밤비가 속살거려/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여기서 내선일체(內鮮一體)의 망령이 지배하는 때에 우리는 "남의 나라"라고 분명히 말하는 윤동주의 의식 저편을 가늠해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의 다음 구절에서 우리는 시와 시인에 대한 그의 특별한 인식을 본다.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어찌하여 윤동주는 시인을 "슬픈 천명"이라 정의하고 있는 것일까? 적국의 심장에 유학생의 신분으로 찾아 든 이 여린 시인이 말하는 슬픔은 문득 식민지적 상황을 떠올리게 하지만 사실은 좀더 근본적인 문제가 천착을 기다리고 있다. 시인이란 슬픈 천명, 이것은 개인적인 또는 사회적인 역학 관계를 넘어선 다른 의식의 연장선상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곧 릴케의 이른바 "시인은 신의 저주를 받은 인간"이라는 외침의 변주이다. 절대적 신의 영향 아래에서 벗어난 근대적 지식인으로서 릴케는 신이 관장하는 일의 핵심을 건드리는 존재가 시인이라고 보았던 것 같다. 신이 관장하는 일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창조이다. 인간을 만들고 인간의 일을 관장하는 미다스의 손, 그것이 곧 神일진대, 시인은 감히 신만이 알 수 있는 인생의 비의(秘義)를 그의 시적 감수성으로 찾아내고 신이 내리는 인생의 정의를 대신하고자 한다.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이 같은 행위야말로 신에게 저주받을 짓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릴케는 시인의 존재가 얼마나 엄청난가를 이 같은 역설로 보여 주었다. 신의 저주를 받은 인간, 그러기에 슬픈 천명이다. 이는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훔쳐 인간에게 가져다주고 영원한 저주를 받은 사건과 유사하다. 윤동주가 릴케의 시를 특히 가까이 했다는 증거는 여러 연구를 통해 밝혀지고 있거니와, 대표작 <별 헤는 밤>의 "프랑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라는 구절에서도, 굳이 그의 이름을 거명한 이유를 우리는 "슬픈 천명"의 의식으로 연결시켜 보게 된다. 그에게 시와 시인에 관한 릴케적 사유가 깃들였음을 저간의 사정을 통해 확인한다. 재언커니와 이는 근대적 의식의 산물이다. 모든 면에서 신에게 복종했던 시대에 문학과 종교는 아루런 마찰이 빚어지지 않았다. 시는 다만 신의 목소리를 담아 내는 도구로서 기능했다. 이같이 평화호운 공존이 깨진 것은 근대적 인간의 의식의 성장이 가져온 산물이다. 인간은 이제 인간으로서의 사유와 그것을 담는 그릇으로서 시를 생각하고 신으로부터 도망쳐 나왔다. 시가 담을 내용이란 그러기에 필연적으로 신의 사리와 겹쳐질 수밖에 없었고, 거기에서 위대한 반란은 시작되었다. 인생의 비의를 캐고 말하기, 그것은 곧 신과 시인이 만나 경쟁하는 자리가 되고 만 것이다. 슬픈 천명으로서의 문학, 그것은 시에서만이 아니다. 소설에서도 조금은 다른 양상을 띠며 나타난다, 루카치가 그의 <소설의 이론>에서 "소설은 신에게 버림당한 세계의 서사시이다. 소설 주인공의 심리 상태는 악마적이다."라고 말한 부분을 보자. 릴케의 시가 신과의 대립이라면 루카치의 소설 이해는 버림당한 세계의 그 무엇이다. 루카치는 그 같은 심리 상태가 악마적인 데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성스러운 것의 대립항으로서 악마성은 그러나 인간 본연의 자리를 찾아가는 또 하나의 길이다. 물론 이것은 신과의 대립점임이 분명한테, 그러므로 신에게 버림받게 되지만, 소설은 인간의 악마적 기질로부터 인간성을 탐구해 가는 근대적 인간중심주의의 산물이다. 그러기에 연구자에 따라서 루카치의 말은 "소설은 원죄론적인 인간 이해와 근친적인 장르인 것처럼 보인다"(송상일, <부재하는 신과 소설>)라고 해석하게 된다. 소설이 보다 직접적으로 종교적인 문제와 부딪히게 되는 데에는 소설 자체의 장르적 특성과 연계되는 일면이 있다. 소설은 문학의 여러 장르 가운데 가장 근대적인 성향을 띤다. 물론 소설은 근대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근대적인 그것과 많은 차이가 있다. 영웅들의 신기한 일생담 위주의 이전 소설에서 변화된 근대 소설의 모습은 일상인들의 평범한 생활을 소재로 하되 거기에는 세계와 불화하는 인간 의식의 고뇌와 갈등이 그려진다. 인간의 세계에 대한 이해는 과학의 발달과 궤적을 같이해 나가지만 과학으로 알게 된 세계보다 미궁에 빠지는 새로운 의문이 더 많아졌음은 하나의 아이러니이다. 모든 일이 신의 조화와 섭리 속에 운행된다는 고대인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모든 운명적 사건을 인간으로부터 찾게되면서 인간은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모르는 더 많은 사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신에게 미루었던 부분들 곧 종교적 세계에 서 벗어난 다음 인간이 안게 된 더 큰짐이다. 그러나 근대적 인간은 그 같은 고민을 거부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 속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소설은 이 같은 근대인의 의식을 가장 잘 담아 내는 그릇이었다. 근대를 맞는 시인이 자신의 의식 세계 속에서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자 했던 데 비해, 소설은 더 복잡한 사회적 구도 속에서 일상적 생활을 그려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거기에 갈등은 증폭되고 고민은 쌓여 갔다. 시인은 신을 대신하려 했지만 소설가는 신이 없는 곳에서 새로운 인간을 발견하려 했다. 비록 그것이 악마적이라 해도. 상황이 그렇다고 하지만 인간은 영원히 신을 떠날 수 있는가? 사실은 버림받았음으로 해서, 버림받았다고 스스로 경계지음으로 해서 확인하는 더 큰 자리가 있었다. 신의 자리, 그것은 문학과 종교를 결코 끊어 놓지 못하는 줄이다. 문학과 종교는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없는 것일까? 근대의 세계 속에서 영영 결별하고 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답변은 이미 앞에서 암시되었다. 예술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상상'은 없는 것을 머리 속에서 형상화하는 것이요 예술이란 거기에 살을 입혀 존재를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술가는 창조주와 같은 일을 하는 '창조자'가 되는 것이다. ― 문익환, <신학과 문학의 만남> 중에서 이 말은 기실 베르자예프가 창세기 1장의 '하느님의 형상'을 '창조주의 형상'이라고 이해한 데 대한 설명이다. 절대적 존재자인 신과의 공존은 신이 시인에게 부여한 고유의 임무를 누구도 적대적으로 보지 않는 데서 출발한다. 창조는 신의 고유영역이다. 그 같은 영역에 동참할 인간 가운데 가장 닮은꼴을 한 존재가 시인, 곧 예술가이다. 신의 한 영역을 빼앗아 오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대리하는 것이다. 그런 마음만이 다음과 같은 시를 만들어 낸다.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 김현승, <눈물> "가장 나아종 지닌 것" 곧 궁극의 가치를 '눈물'로 표상한 이 작품에서 시인은 인간의 슬픔과 기쁨을 그가 믿는 절대자와 함께 하려는 미덕을 가지고 있다. 이 같은 마음 씀씀이가 곧 종교와 문학이 극적으로 만나는 자리이다. 물론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과 같은 시구에서 이 작품이 기독교적 神 안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지만 좀더 넓게 본다면 이 작품의 주제는 우주 삼라만상이 나고 죽은 자연적 질서 속에서 설명된다. 꽃이 시드는 자리에 열매가 맺는 사실은 그대로 자연의 법칙이다. 자연의 법칙을 심상히 여긴다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사실 이보다 위대한 질서란 없다. 그것은 생로병사 인간의 운명을 상징하거나 설명한다. 그런데 마지막 연을 보라. 웃음을 만든 다음 눈물을 지어 주셨다. 그사이에 '새로이'라는 부사가 끼어있다. 이 말이야말로 이 작품의 전체를 쥐고 있는 핵심이다. 신은 인간의 행복을 보장한다. 최소한 그를 거역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런데 뜻밖의 슬픔이 닥친다. 몹쓸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를 거역하지 않았는데도 어떤 불행이 한 인간의 일상적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 우리를 당황하게 하고 신의 존재마저 부정하게 하는 경우란 대체적으로 여기서 생긴다. 거기에 '새로이'의 의미가 살아 있다. 신은 이미 처음부터 웃음과 눈물을 함께 주셨다. 다만 웃음을 먼저 주시고 '새로이', 그것은 웃음과 결부되는 어떤 부가된 의미로서가 아니라 전혀 개별적이고 독립적으로 지어 주신 것이다. '새로이'라는 시어에는 시인인 내가 미처 모르고 있다가 '새로이' 깨닫는 어떤 것이라는 의미가 추가된다. 이것이 곧 신과 공존하고 화해하는 시인의 미덕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기독교와 관련된 근대의 종교와 문학의 문제가 주를 이루었다 그렇다면 불교 쪽에서는 어떠한가? 오늘날 우리 사외에 국한한다면 불교는 첨예한 현실문제에서 비켜나 있는 듯하다. 오히려 서양 사회에서 불교에 대한 관심이 높고 새로운 패러다임의 생성 기제로서 효용성을 높이고 있는 것과는 대비된다. 그런 까닭에 문학에서도 몇 작품을 제외한다면 중심적이거나 긴요한 자리에 놓여 있지 못하다. 그러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본다면 불교가 우리 사회의 핵심 화두였고 거기에 문학과의 자리 매김이 문제시되기도 한 때가 있었다. 다만 불교는 종교적 특성상 어떤 다툼의 양상은 심하지 않다. 깨달음의 좀더 절묘하고 적확한 표현에 힘이 실려 문학은 종교와 병치되는 자리를 이미 일찌감치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시(漢詩)의 변용 양태인 선승(禪僧)들의 禪詩 또한 불립문자(不立文字)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엄명 속에서도 오히려 활발히 씌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경전이 다 보여 주지 못한 깨달음과 가르침의 세계를 담고 있다. 우리의 경우, 그것은 한시만이 아니다. 신라 시대를 풍미한 향가는 상당 부분이 문학 속의 종교라고 보아야 한다. 문학과 종교적 세계가 어우러진 명편을 들라면 그 첫 번째 명예는 당연히 월명사 지은 <제망매가(祭亡妹歌)>에 돌아간다. 생사의 길은 예 있으매 두려웁고 나는 간다는 말도 못 다 이르고 갔는가 어느 이른 가을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은 모르겠네 아, 미타찰(彌陀刹) 만나는 나는 도 닦아 기다리리. 서정 시가로서 신라의 향가 최고의 명편이다. 월명사는 죽은 누이를 위해 재를 올리면서 이 시를 썼다. 일견 평범해 보이는 표현의 내면에 속 깊은 울림이 있다. 구태여 요란을 떨지 않는 것이 진정성에 가까운 법이다. 다만 삶의 고통은 죽음이라는 운명적 환경이 만들어 준 것, 도 닦는 사람이라고 거기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에 속절없는 인간의 생애를 비유한 솜씨가 비상하기만 하다. 그것도 다름 아닌 "이른 가을 바람"이다. 아마도 이 대목이 시의 핵심이리라. 언젠가는 죽겠지만 이다지 이르게 찾아온 죽음이 한 사람의 심금을 울린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이 시는 여덟째 행까지 평범한 인간이 토로할 슬픔을 전제된 감정 속에서도 마음껏 뱉어 놓고 있다. 한바탕 시원하게 울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라면 승려의 신분으로 주책 맞을 일, 아홉째 행에서 감탄사를 길게 뺀 다음 흩어진 감정을 추스린다. 다시 만날 것을 믿고 기다리는 마음이야말로 구도자이면서 시인으로서 그가 택할 최선의 길이다. 그 지점이 곧 한 편의 시로 완성되는 순간이다. 배경 설화인즉 재를 마친 자리에 바람이 불어와 이 시를 적은 종이를 날렸다고 한다. 서쪽방향이다. 이 대목에서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향가가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켰다는 기록을 일부러 적어 넣고 있다. 천지와 귀신이 감동하는 노래, 우리는 여기에서 종교와 문학이 합일하는 또 다른 극적인 상황을 목격하게 된다. 다만 이것은 시만의 문제가 아니다. 소설, 나아가 문학이 가지는 종교와의 역동적인 관계이다. 또한 종교의 어느 쪽을 굳이 가릴 일도 아니다. 그 같은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글은 깊이 음미되어야 한다. 기독교 소설에서 신앙 ― 또는 신 ― 은 부재(不在)의 양태로만, 훼손된 모습으로만 나타난다. 참으로 그래야 할, 그럼으로써 기독교는 소재가 아닌, 소설의 본질적인 요소로서 내재하게 된다. 기독교는 작가에게 문제라야지 고정관념일 수는 없다. 고정 관념으로서의 기독교를 옹호하거나 비난하는 이들이 붙들고 있는 것은 언제나 시대 착오적인 기독교의 '신화'일 뿐이다. 그러나 참으로 기독교는 신화를 배척하고 불확실한 신앙의 모험을 체험하는 것이며 신을 그 신앙 속에 부재로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이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브리서 11 : 1) 하고 사도 바울은 말했다. ― 송상일, <부재하는 신과 소설> 중에서 이 글에서 기독교를 불교로, 소설을 시로 바꾸어도 그 의미는 한결같다. 그러므로 윤동주가 말하는 "슬픈 천명"이란 부재하는 신의 시대에 사는 인간의 문학적 운명이다. 약력 [현직] 1985년「現代詩學」추천 등단(전봉건) (한국시인협회, 한국문인협회, pen크럽, )會員 前, 경기대학교 겸임교수 現, 서울시립대학교 근무 [학력] 1986년 경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98년 동국대학교 대학원 졸업 2004년 문학박사(성균관대학교) [주요연보] 1988년 제 1詩集「다박솔의 꿈」, 문예춘추사 1990년 제 2詩集「바람에 생을 묻고」, 도서출판 둥지 1992년 隨筆集「햄버거 속의 된장국」, 문학통신사 1994년 제 3詩集「는개 내리는 언덕」, 도서출판 둥지 1996년 칼럼집「풀잎혈서」, 문학통신사 1998년 제 4詩集「하늘이 그린 바람무늬」, 다인미디어 2000년 詩論集「詩, 어떻게 가꿀 것인가」, 다인미디어 2000년 제 5詩集「하늘이 심은 풀꽃」, 조선문학사. 2004년 제 6시집 「거두기」, 조선문학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