道에 관심있습니까?
지금은 어떨지는 모르지만, 서울시내 종각역 부근을 지나다보면 이런 질문을 던지며 접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생뚱맞은 물음이지요. '道'라니. 21세기 서울의 도심에서 '道'를 말하는 사람이 있다니... 보통 거리에서 이렇게 '道'를 말하며 접근하는 사람은 십중팔구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의 신도지요. 이런 경우가 한 두번쯤은 있었을 테지요. 교세도 작지는 않은데 사회적으로 적지않은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는 강증산(姜甑山 1871~ 1909)계열의 민족종교인 것 같더군요. 강증산은 동학과도 연원을 가지고 있는 것 같고, 예전에는(지금은 어떤지 몰라서^^) 대학내에서도 '증산도'라는 신앙공통체가 활동을 하는 것을 본 적도 있습니다. 거리에서 도를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이끌려 따라간(?) 적은 없지만, 어떤 교리나 주장을 하고 있는 지는 궁금하더군요. 그래서 잠깐 관련자료를 열람한 적이 있었는데, 많지는 않지만 그들이 유,불,선통합을 주장한 것처럼 다양한 관련전거들이 발견되더군요.
山之祖宗 崑崙山은 原名이 須彌山也라.
崑崙山第一枝脈이 入于東海하여 生儒拔山하고, 儒拔山이 生尼丘山하여 起脈七十二峰하니 運在子午卯酉라.
故로 生孔子하여 七十二名道通也라.
崑崙山第二枝脈이 入于西海하여 生佛秀山하고 佛秀山이 生釋定山하여 起脈四百九十九峰하니 運在寅申巳亥라.
故로 釋迦牟尼는 四百九十九名道通也라.
崑崙山第三枝脈이 入于西海하여 生橄欖山하고 起脈十二峰하니 運在子午卯酉라
故로 生耶蘇하여 耶蘇는 十二名道通也라.
崑崙山第四枝脈이 入于東海하여 生白頭山하고 白頭山이 生金剛山하여 起脈一萬二千峰하니 運在辰戌丑未라.
故로 生甑山하여 天地門戶母嶽山下에 道出於熬也라. 故로 一萬二千名道通也라.
곤륜산에서 4개의 지맥이 뻗어나가는데 하나가 동쪽으로 뻗어 중국의 태산(泰山)에 이르러 공자를 낳고, 서쪽으로는 네팔의 석정산(釋定山)에 이르러 석가를 낳고, 다시 서쪽으로 뻗어 이스라엘의 감람산(橄欖山)에 이르러서는 예수를 낳았다. (정말 가공할만한 스케일의 풍수지리이론이죠^^) 4번째는 다시 동쪽으로 우리의 금강산(金剛山)으로 뻗어 강증산을 낳았다고 하네요.
그런데 이 글이 13세기초 장춘진인(長春眞人)이라는 중국의 도사가 쓴 도통연계도보(道通聯係圖譜)에 나오는 글이랍니다. 장춘진인(長春眞人)은 누구일까요?
김용선생의 사조영웅전을 처음 읽었을 때 초반 아주 멋있게 등장해서 모두 이 사람이 주인공이겠구나 생각했었지요. 소용녀의 아름다움을 무속념을 통해 읊어내기도 했고... 전진칠자 구처기(邱處機)가 장춘진인(長春眞人)입니다.^^v 자(字)는 통밀(通密), 호(號)는 장춘(長春)인 구처기(邱處機 1148~ 1227)는 지금의 산동(山東)지역인 금나라의 등주(登州) 서하(棲霞)에서 태어나 19세에 출가(出家)하게 되는데 영해(寧海) 곤륜산(崑崙山)에 들어가 전진도(全眞道) 개조(開祖)인 왕중양(王重陽)의 제자 일곱진인(七眞人)중의 한 사람이 됩니다.
중국을 이해하는 문화적 코드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중요한 부분이 도교(道敎 Religious Taoism)적 영향입니다. 중국 현대문학의 거장 노신(魯迅)은 "중국의 뿌리는 모두 도교(道敎)에 있다"고 까지 말합니다.
황제(黃帝)와 노자(老子)를 교조로 삼고있지만 노자와 장자(莊子)를 중심으로 한 도가(道家 Philosophical Taoism)사상과 구별됩니다. 도교(道敎 Religious Taoism)는 단순히 도가(道家)사상이 종교화된 수준이 아니라 국가,정치에 관한 경세(經世),치민(治民)의 술(術)에서 개인적이며 종교적인 성격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스펙트럼을 지녀서, 각종 샤머니즘이 서로 혼효되고, 중국인에게 불교의 영향은 비할바가 아닐정도로 일상 그 자체에 녹아있습니다. 유교와는 달리 종교적 요소를 중심으로 사회의 질서 및 학문, 기술을 민중의 입장에서 밝히고자 하는 데에 주안을 두는데 유교에서 배격한 미신이나 온갖 도깨비, 괴물등 귀신신앙도 포함합니다. 흔히 중국영화에서 죽은 사람을 위해 지전을 태우거나, 제당같은 곳에서 기도하는 중국인의 모습을 흔히 발견할 수가 있지요. 그리고 무관들이 수호신으로 관우를 섬겼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지만 장비는 푸줏간의 수호신이며, 반금련은 창녀의 수호자였다네요^^ 우리나라에서도 제사상에 복숭아를 올리지 않는 것도 바로 도교의 영향이라 볼 수 있지요. 신선방술(神仙方術)에 기원을 두어 불로불사의 연단술에도 닿아 있어 인체에 대한 관심으로 동양의학의 토대가 되기도 했으며, 참위설(讖緯說), 음양오행설과 불교 영향을 흡수하기도 합니다.
노장사상의 무위자연이나 무용지용에 머무르지 않고 옥황상제나 신선, 선녀를 꿈꾸는 동양에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도교에서 비롯되는 느낌입니다. 이런 상상력과 초월성의 뿌리를 두고 있어서 즉각적으로 '결정론적이며 필연적인 세계'에 대한 저항을 촉구하기도 합니다. 삼국지 초반의 '황건적의 난'은 도교집단 최초의 민중봉기로 기록되고 있고, 그후 수많은 민중봉기의 토대가 되었으며 최근에는 파룬궁까지... 그래서 수천년간 노자도덕경은 Marx의 자본론에 못지않는 위험한 금서로 취급받아 왔습니다. 조선시대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은 신주도덕경(新註道德經), 남화경주해산보(南華經註解刪補)의 저술로 사문난적(斯文亂賊)의 낙인이 찍혀 유배중에 사망할 정도였으니까요. 장생불사 곧 죽음의 현세적 극복이라는 관념적 은유는 허구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 문학과도 근원적으로 상관관계를 맺게 됩니다. 특히 무협소설에서의 도교적인 영향은 그 성립의 근거라 할 만큼 다양한 소설적 주제를 제공하게 되지요. 그래서 서구의 판타지문학에 맞설수 있는 가능성을 도교에 젖줄을 대고 있는데에서 찾을 수 있기도 합니다. 김용선생이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있는 사조영웅전을 도교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중의 한 사람인 구처기(邱處機)를 내세운 것은 도교에 대한 나름대로의 예우를 표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구처기(邱處機)는 1219년에 아라비아반도 쪽으로 서정(西征) 중이던 칭기즈칸의 청에 응하여 18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넙니다. 이때 구처기가 읊은 詩가 남아 있기도 합니다. "循環誰主宰 億劫自堅 (돌고돌며 이 세상을 주재하는 이 누구인가. 억겁의 세월은 오직 스스로 단단하여 깨뜨릴 수 없네.) 1222년말에서 다음해 초까지 대설산(大雪山. 興都庫什山이라니까 힌두쿠시산맥이겠지요.)에서 만나게 됩니다. 칭기스칸의 출생연도는 여러 설이 있지만 몽골에서는 1162년 5월31일 출생설이 유력하니까 1222년이면 예순이고, 구처기(邱處機)가 1148년 1월19일출생이니까 일흔넷이군요. 칠순의 노인을 수천킬로 멀리에서 불러 놓고는 칭기스칸은 어떻게 하면 오래 살 수 있을 지를 묻습니다.(늙은이를 욕 보이는군요^^) 구처기는 평소 섭생을 하여 오래사는 방법은 있지만 불로장생하는 약은 없다고 말하지요.(只有養生之道,而無長生之藥) 그리고 오래살려면 욕심을 줄여야 하는데 첫째 잡념을 버리고, 둘째 사사로운 욕심을 줄이며, 마음자리를 고요하게 유지해야 한다고도 일러줍니다.(淸心寡欲爲要, 一是淸除雜念, 二是減少私欲, 三是保持心地寧靜") 그러면서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하늘을 공경하며 백성을 근본으로 삼는데 있다고 조언해주기도 하지요(治國之術 以敬天愛民爲本.) 영웅은 영웅을 알아본다고 하듯이 칭기스칸은 크게 감복해서 구처기를 神仙이라 칭하고 도교를 관장하는 전권을 부여합니다. 연경[燕京, 현재의 북경(北京)]으로 돌아온 구처기는 전진도(全眞道)를 펼쳐 북방 도교(道敎)를 크게 중흥시키며, 도교의 최대 세력인 용문파(龍門派 The Dragon Gate Sect)의 조사(祖師 Patriarch)가 되지요. 이로서 전진도(全眞道)는 명의 핍박이 있기 전까지는 도교의 최고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그런데 구처기의 이 서역기행에는 신조협려(神雕俠侶)를 읽은 독자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소용녀강간사건의 주범(?) 윤지평(尹志平 1169~ 1251)도 동행을 합니다. 윤지평은 실존인물로 14살에 마옥을 찾아갔다가 구처기를 은사로 모시게 되는데 칭기스칸의 방문요청을 수락하도록 설득한 인물이기도 하며, 구처기 사후에는 전진도와 도교전체를 주관하는 역활을 담당하기도 한 핵심인물이며 고매한 도사로 알려져 있는데 김용선생은 어떤 이유로 윤지평을 희대의 파렴치범으로 만들었는지... 아무튼 3판본에는 견지병(甄志丙)으로 바꾼다고 하니 윤지평은 복권되는 셈인가요^^
도서관에서 열람하다보니까 "The Travels of an Alchemist: The Journey of the Taoist Ch'ang-ch'un from China to the Hindu Kush at the Summons of the Khan"라는 책이 있더군요. 탁월한 중국고전 번역자이자 중국학의 권위자인 Arthur Waley(1889~ 1966)가 번역한 이 책은 구처기(邱處機)일행의 서역기행에 동행했던 구처기의 제자 이지상(李志常 1193~ 1256)이 기록한 여행기 "長春眞人西游記"의 번역본입니다. 동서교류사연구에 있어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그 신빙성에 의문을 받으면서도 계속 읽히고 있는 반면 중국인의 안목으로 씌여진 이 여행기는 그다지 연구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국내에서도 중국서점을 통해서 구입할 수는 있지만 번역이 되어 있지는 않다고 하네요.
근래에는 구처기(邱處機)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도교사를 연구하는 입장에서는 도교의 중심인물이니 당연할테고, 송,원교체기의 정세를 파악에서나 그의 서역기행을 통해 실크로드연구의 측면에서도 중요인물로 인정받고 있다고 합니다.
왕중양(王重陽 1112~ 1170)
전진도(全眞道 The Complete Perfection Tradition) 창시자
이름은 중부(中孚), 자를 윤경(允卿)였는데 다시 덕위(德威), 자를 세웅(世雄)으로 바꾸었다가 도교에 입교한 후에는 이름을 철(喆), 자를 지명(知明)로 바꿉니다. 산시성(陝西省) 함양(感陽) 유장촌(劉蔣村)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집안이 부유해서 유학을 공부하며, 금나라 초기에는 무과시험에 응시해서 작은 벼슬을 얻기도 하는데 재능에 비해 하찮게 여겼던지 그만두고 고향으로 낙향하지요. 돌아와서는 구속에 얽메이지 않은 생활을 하는 탓에 고향사람들은 그의 행동거지를 보고 왕해풍(王害風)이라 부르기도 했답니다^^ 1138년 지금의 산시성(陝西省) 광현(廣縣)부근인 감하진(甘河鎭)의 어느 술집에서 두 신선[종리권(鍾離權)과 여동빈(呂洞賓)]을 만나게 되어 금단구결(金丹口訣)을 전수받습니다. 이 감하우선(甘河遇仙)의 체험으로 바로 처자를 버리고 입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종남산(終南山)부근의 남시촌(南時村)에 토굴을 파고 수도를 하는데 토굴이름을 '살아있는 죽은 몸뚱아리의 무덤'(活死人墓)라고 지었다네요.^^
후일 걸식을 하며 떠도는데 지금의 산동(山東) 모평(牟平)에 이르러 마씨 부부(마옥과 손불이)를 만나서 암자를 짓고 이름을 전진(全眞)이라 부릅니다. 이때부터 산동반도 일원에서 신도를 모으기 시작해서 1163년 전진도(全眞道)라는 새로운 기풍의 도교를 창시합니다. 고향으로 전도하려고 돌아가다가 변양(汴梁)에서 병을 얻어 1170년 1월 사망합니다. 1269년 쿠빌라이칸은 '重陽全眞開化眞君'으로, 원 무종(武宗)때에는 重陽全眞開化眞輔極帝君으로 봉해집니다.
그는 유불선 3합을 강조했는데 유교에서는 합리성(理)을, 불교에서는 영적 수양(性)을, 도교에서는 육신의 단련(命)에 의미부여를 했으며 사람들에게 道德淸靜經과 孝經을 읽기를 강조했습니다. 전진(全眞 Complete Perfection)을 도교적 수양을 통해 때묻지 않는 완전한 존재에 이르기위한 정(精), 기(氣), 신(神)의 의미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王重陽全眞集, 王重陽敎化集, 入敎五十篇이 있습니다.
남송(南宋)무렵부터 도교는 남과 북의 두 개의 파로 나뉩니다. 남쪽에는 장자양(張紫陽), 석태(石泰), 설식(薛式), 진남(陳楠), 백옥섬(白玉蟾)을 남오조(南五祖 The Five Southern Patriarchs)로 해서 후일 태일도(太一道)로 전진도(全眞道)와 도교를 양분하게 됩니다. 이들 남종(南宗)은 불가적인 내용을 도교체계에 흡수하는 패턴을 보이고 있지요. 북쪽은 왕현보(王玄甫), 종리권(鍾離權), 여동빈(呂洞賓), 유해섬(劉海蟾), 왕중양(王重陽)의 북오조(北五祖 The Five Northern Patriarchs)를 기원으로 전진도(全眞道)가 형성됩니다.
전진칠자 (七眞人 北七眞 The Seven Perfect Ones of the North)
왕중양(王重陽)의 일곱제자를 전진칠자(七眞人 北七眞 The Seven Perfect Ones of the North)라고 하지요. 마옥(馬鈺), 담처단(譚處端), 유처현(劉處玄), 구처기(邱處機), 왕처일(王處一), 학대통(郝大通), 손불이(孫不二)로 이들은 도교에 입문하기 전부터 상당한 학식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옥 (馬鈺 1123~ 1183)
그는 왕중양의 성명쌍수(性命雙修)론을 계승했으며 심(心)과 성(性)의 결합을 강조하여 성(性)과 명(命)의 관계를 신(神)과 기(氣)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以淸靜無爲而定全眞修煉風貌, 以心合性, 以神氣釋性命而終以靜淨無爲統道.) 전진도의 일파인 우선파(遇仙派 The Encountering Immortality sect)를 개창했으며, 저서로는 神光璨, 洞玄金玉集이 있습니다.
담처단 (譚處端 1123~ 1185)
본명은 옥(玉), 자는 백옥(伯玉)이었는데 이름을 처단(處端)으로 바꾸고, 자를 통정(通正), 호를 장진자(長眞子)라고 합니다. 마옥과 같은 영해(寧海)사람으로 유가(儒家)의 문헌과 사서를 모두 섭렵했으며 서예에 능했다고 합니다. 성격도 온화하고 관용이 넘치는 사람이었는데 콧병이 있어서 약을 구하러 여러 곳을 전전했다고 합니다. 왕중양이 전도여행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서 병을 고쳐줄 것을 간청하지만 왕중양은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답니다. 그래도 담처단은 계속 기다리는데 닫혀있던 문이 저절로 열립니다. 이에 왕중양은 신선의 인연이겠거니 생각하여 그를 불러들여 한 이불속에 같이 잠을 들게 하는데 다음날 일어나보니 담처단의 고질병이 깨끗이 완치가 되었답니다.^^ 그후 왕중양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모시게 되지요. 왕중양 사후에는 그야말로 환락가에서 시간을 보내는 데 그는 그 속에서 모든 유혹에 대해 무심해지는 경지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후 마옥의 뒤를 이어 전진도를 관장하는 소임을 맡게됩니다. 쿠빌라이칸은 '長眞雲水蘊德眞人'으로 봉합니다.
그는 왕중양에게 아침저녁으로 가르침을 받아서 깨우치게 되는데, 세계와 나의 이원적 분리를 부정하고, 힘든 수도 방법을 개선시킵니다. 다분히 유가(儒家)적 가르침과도 맥이 닿아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충(忠), 효(孝), 인(仁), 자(慈)가 출가수행보다 우선한다고 가르치지요. 그러다 보니 좀더 일반인들의 삶과 밀접하게 되어 포교에 엄청난 신장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는 남무파(南無派 The Namo Sect)를 개창하는데 구처기의 용문파에는 미치지 못했어도 명말까지 상당한 세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저서로는 "道藏,太平部"가 아직까지 남아있다고 합니다.
유처현 (劉處玄 1147~ 1203)
자는 통묘(通妙 또는 道妙), 호는 장생자(長生子)로 지금의 산동성 액현(掖縣)인 동래(東萊)사람으로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면서 호화스러움을 쫒지 않는 청빈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왕중양을 찾아가서 입도했으며 왕중양 사후에는 마옥, 담처단, 구처기와 함께 3년간 극진히 시묘살이도 했다네요. 그후 왕중양의 유언을 따라 낙양으로 옮겨 담처단과 걸식생활을 하며, 환락가에서 본성을 단련했답니다^^ 담처단과는 서신을 지속적으로 주고 받은 것 같습니다. 1176년 고향 액현(掖縣)으로 돌아가 법을 펼치는데 금의 황제가 초대하기까지 되며, 찾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네요. 1185년에는 전진도를 관장(掌敎)하는 소임을 맡기도 합니다. 1206년 황제로 부터 '長生輔化明德眞人'을 추증됩니다.
수산파(隨山派 The Suishan Sect)를 창시했으며, 문하의 제자가 엄청나게 많았다고 하네요. 저작으로는 仙藥集, 至眞語錄, 道德經注, 陰符演등이 있습니다.
구처기 (邱處機 1148~ 1227)
자(字)는 통밀(通密), 호(號)는 장춘자(長春子)로 지금의 산동(山東)지역인 금나라의 등주(登州) 서하(棲霞)에서 태어나 19세에 출가(出家)하게 되는데 이듬해에 왕중양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도 하게 됩니다. 산시성(陝西省) 반서(磻西)와 용문(龍門)에서 13년간 걸식이나 동굴생활을 하며 수련을 합니다. 1188년에는 금 세종(世宗)의 초대를 받았고, 1219년에는 징기스칸의 초청으로 제자 18명을 데리고 서역으로 떠나기도 합니다. 칭기스칸은 그에게 神仙이라 칭하며 宗師의 작위를 내려서 도교를 관장하게 하는 배려를 합니다.
그는 수행에서의 고행과 이타심을 강조했으며 이를 통해 내적 완성과 불사의 영약을 얻을 수 있다고 설파했습니다. 이것은 심성에 대한 체계화된 이론으로 발전해 나가서 변치않는 심성과 본성에 도달할 수 있음을 가르칩니다. 용문파(龍門派 The Dragon Gate Sect)를 개창했고, 저서로는 攝生消息論, 大丹直指, 磻溪集, 玄風慶會錄이 있습니다.
왕처일 (王處一 1142~ 1217)
호는 옥양자(玉陽子)로 지금의 산동성 모평(牟平)인 영해(寧海)사람입니다. 1168년 왕중양을 스승으로 입도했으며, 곤려산(崑崳山) 연하동(煙霞洞)에서 오랫동안 은거생활을 했으며, 9년간 신체단련을 해서 사람들이 철각선생(鐵脚先生)이라 부르기도 했다네요^^ 1188년 금 세종(世宗)의 초대를 받았고 원으로 부터 '玉陽體玄廣度眞人'으로 추증됩니다.
왕중양의 가르침을 쫒아 무위와 도교의 근본으로서의 도의 이해를 강조합니다. 세속적이며 물질적인 욕망을 완전히 포기하고, 안으로 심성을 닦아나갈 것을 주문하기도 합니다. 여산파(崳山派 The Yushan Sect)를 창시하기도 했으며 저작으로는 雲光集, 淸眞集, 西岳華山志가 있습니다.
학대통 (郝大通 1149~ 1212)
이름은 린(璘), 자는 태고(太古), 호는 염연자(恬然子 또는 廣寧子)이며, 지금의 산동성 모평(牟平)인 영해(寧海)사람입니다.(이 동네사람이 정말 많군요^^) 노장사상과 역학에 정통했고, 점괘를 뽑아내는 것을 잘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167년 전진도에 입도하는데, 1175년 옥주(沃州)로 걸식하러 가다가 돌연 깨달은 바가 있어 다리 아래에서 6년간 고행을 합니다. 묵언수행을 했는지 사람들이 불어선생(不語先生)이라 했다는 군요. 구전공(九轉功)을 깨우치고는 전도활동에 나서게 되는데 화산파(華山派 The Huashan sect)를 창시하고, '廣寧通玄太古眞人'으로 추증됩니다.
화산(華山)에는 72개의 동굴이 있는데, 기록에 의하면 이 동굴들은 학대통이 판 것이랍니다. 굵은 밧줄에 매달려 바위 절벽의 중간으로 내려와 동굴을 팠다고 한는데, 처음에는 학대통이 수도하기 위해 동굴을 팠지만 완성되면 다른 도인들이 찾아와 자신이 쓰겠다고 하면 물려주는 바람에 72개나 팠다고 하는군요.^^
손불이 (孫不二 1119~ 1182)
이름은 부춘(富春), 호를 청정산인(淸靜散人 혹은 孫仙姑)이며, 지금의 산동성 모평(牟平)인 영해(寧海)사람입니다. 마옥의 부인으로 아들 셋을 두었습니다. 왕중양을 만나 그가 '배를 반으로 가르는'(分梨) 은유를 보고 마옥과 출가를 결심합니다. 왕중양에게서 천부운전비결(天符雲篆秘訣)을 받는데, 낙양의 봉선고동(鳳仙姑洞)에서 6년간의 수행끝에 내단(內丹)을 완성하고 청정파(淸靜派 The Purity and Tranquility Sect)를 창시하며 곤단도법(坤丹道法)의 시조가 됩니다. 淸靜淵眞順德眞人으로 봉해졌고, 淸靜淵貞玄虛順化元君으로 추증됩니다. 저서로는 孫不二元君傳述丹道秘書, 孫不二元君法語가 있습니다.
道에 대한 관심이 조금은 생겨납니까?^^
첫댓글 요즘엔 종로에서 도에 관심있냐고 쫓아오는 사람 본 적이 없지만 증산도는 아직도 대학가에서 활동하고 있죠
멋지군요 +_+
증산도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봤는데..ㅡㅡ;; 아차산으로 가라던가?ㅎㅎ
보면볼수록 도가 멋있어 지는군요.ㅡㅡ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