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청주정씨 대종회(淸州鄭氏 大宗會)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문목공 한강(文穆公 寒岡) 스크랩 회연서원, 한강 정구, 청주정씨 한강종택, 종부-펌
정천식 추천 0 조회 235 08.09.17 21:16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서원의 문루인 견도류見道樓에서 바라 본 회연서원 건물동이다..   여름 날 서원 앞 400년 느티나무 그늘 아래에서 책을 읽는 상상해 보니 한강 선생이 나요.. 내가 곧 한강 선생이 된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400여년 전 성리학자 한강 정구(1543-1620) 선생이 선조16년(1583) 이 곳에 회연서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인조 5년 (1627) 제자 및 유학자들에 의해 서당은 헐리고 다시 회연서원이 건립되었으며 숙종16년(1690)에 회연서원이란 이름으로 사액을 받았다..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 되었다가 1984년에 유림에 의해 다시 재건 되었다..

 

회연檜淵이라 하였으니.   어딘가 연못 하나 정도는 있을 만도 한데 

글쎄????  그 옛날에는 있었을까??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가야산의 한 줄기가 북동쪽으로 길게 뻗어 내리다가 회연서원 서편에 노인봉이라는 봉우리를 하나 만들어 놓고 그 여기(餘氣)가 수륜면의 대가천에 다달아 생명을 다하고 봉비암(鳳飛巖,봉황이 날아오르는 바위)으로 맺힌 형국이다.. 

 

풍수학인의 관점에서 회연서원과 봉비암을 관하여 보니.. 약간의 아쉬운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회연서원은 가야산 북동쪽으로 뻗어 내린 노인봉의 동쪽 자락이 대가천 물을 만나면서 를 응결한 명당처가 된다..  북동쪽이라함은 의 방향이 된다.. 우리가 묘제를 지낼 때 조상묘 외에 산신제를 꼭 지내게 되는데 그 산신제를 모시는 위치가 조상묘를 기준으로 북동쪽으로 잡는 이치와 같다.. 

 

가야산 북동쪽 줄기가 일자형의 산룡의 형태로 뻗치다가 노인봉에 이르러서는 두 날개를 펼친 봉황의 형태로 바뀐다.. 그 비봉(飛鳳)의 머리부분에 해당하는 곳에 회연서원이 놓여 있고 부리에 해당하는 부분에 봉비암이 서 있다

 

전설의 새 봉황은 길조를 상징한다봉황이 나타나면 나라에 大吉한 징조라 하였는데 이 곳 봉비암에서 날아오른 봉황이 이 지역을 회유하다 다시 봉비암에 내려앉아 이 지역 숲에서 둥지를 틀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봉비암에서 날아오른 봉황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면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기는데 바로 이 의문점 때문에 아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봉황은 오동나무 숲에 둥지를 틀고 대나무 열매를 먹으며 살아간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봉황과 연관이 되어 있는 지명, 건물 등에는 항상 오동나무와 대나무 그리고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봉황의 알 등이 함께 하기 마련인데  이곳 회연서원 북동쪽 끝자락 사당과 맞닿아 있는 봉비암 주변을 둘러보니 대나무가 보이지 않는다(약간의 어린 대나무들은 눈에 띄지만..) 오동나무 역시 마찬가지다..

 

반드시 날아오른 봉황이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귀의처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사당 뒤편 봉비암 자락에 제법 무성한 대나무 숲을 인위적으로 조성하고 현재 소나무와 느티나무가 어우러져 있는 백매원 앞 숲에 오동나무(벽오동이라면 더 좋겠지만..) 숲을 만들어 주고  그 숲 속에  흰 돌을 둥글게 다듬은 봉황 알 몇 개쯤 놓아 둔다면..

 


서원 서편에 새로 건림된 사당 건물동이다




경북 민속자료 제 86 호 지정되어 있는 성주 수륜면 수성리 중매댁(中梅宅)이다.. 회연서원 인근 마을 초입에 자리한 집인데 무흘구곡의 제2곡인 한강대를 찾아 들어가다 만난 것이다.. 청주 정씨 문중의 정재철선생이 1903년부터 12년간에 걸쳐 완공된 가옥인데 조선시대 전통적인 가옥 구성요소에 시대적 흐름이 잘 반영되어 있어 중요한 자료로 평가 되어 지고 있다

 

안채,사랑채,대문채,고방채,중문채의 5채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진 속의 건물은 사랑채이다.. 오른쪽에서부터 사랑마루방, 사랑방, 사랑부엌칸,중사랑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의 모습인데.. 좌측에  살짝 보이는 헛담 너머로 안방, 부엌, 찬방이 자 형태로 사진 중앙에는 가운데방, 갓방, 작은부엌이 일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목조 민속자료이다보니 화재가 제일 큰 적일게다 그럼 소화기가 있어야지.. 함 그렇고 말고.

 


사랑채의 사랑마루방의 모습이다들창문을 들어 놓고 툭 터진 들판을 바라보며 시 한 수 읊는 모습.

 

여름 밤 지인들과 함께 들창문 아래로 쏟아지는 별빛을 소주잔에 받아 들고회포 한번 풀고 싶다.

 


그러나저러나.  한강대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지나는 길손도 없으니 어디 물어 볼 때도 마땅찮다 가장 가까운 민가에 들러 여쭙기로 하고 중매댁 바로 옆에 있는 집으로 들어가본다

 

..

 

그런데 뭔가 범상치가 않다사랑채에 걸린 자그만 당호도 그렇고 대나무 숲의 비호를 받고 서 있는 上格의 사당도 그렇고

 

이상해……이 집에 뭔가 비밀이 있을 것 같아..

 

아지매 한 분이 땔나무를 열심히 옮기시고 계신다

 

실례합니다.. 한강대를 찾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면 되는지요??

 

아지매는 왜 한강대를 찾고 있느냐며,, 지금은 한강대 가는 길도 없어졌고 관리가 잘 안돼..크게 볼 것도 없다시면서 하던 길을 계속 하신다..

 

아주머니 저기 보이는 저 사당이 예사롭지가 않네요………. 라는 나의 물음에 엉뚱한 이야기로 곧바로 되받아 치신다

 

혼자 오셨어요?? 혹시 한강대가 뭔지 아세요??

 

몇 마디 서로 문답이 오갔다 

 

그 아지매는 청주정씨 한강 종가댁 종부님 이셨다 다시 말해 한강 정구선생의 종택인 셈이다

 

이미 오후 5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라.. 마음이 바쁜 나그네인데  종부님께서는 잠시 마루에 앉아 차 한잔 하길 권하신다  사양을 해도 계속 권하시는데 어른의 권함을 너무 피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듯하여 안채의 마루에 앉아 종부님께서 차려 주신 안동 식해를 맛보면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한강정구선생에 대해.. 한강 종택에 대해.. 종부의 삶에 대해..

 

문득 종부님께서 보여줄게 있다시며 방으로 따라 들어오란다..  1994년에 매일신문에 연재된 종부(宗婦)라는 코너를 스크랩해서 병풍으로 만든 것인데 선물을 받으신 것이라고 영남지역 종가 30(??)여 곳의 종부님들과의 인터뷰 기사였는데 이게 자신이라며 손가락으로 가르쳐 주시면서 다른 종부님들에 대해서도 이런 저런 설명을 곁들어 주셨다

 


안채 바로 곁에 자리한 한강 정구 선택을 모신 사당이다 집터보다 제법 높은 위치에 뒤로는 빼곡한 대나무 숲을 등지고 서 있는 모습이 격조 있어 보이고 묵직하게 느껴지는 것이 잘 관리되고 있다는 氣感이 느껴진다

 


대화가 터지지 전. 일을 하시는 종부님의 모습이다  어느 문중이나 종택의 경우는 손님이 많기 마련이다.. 제사와 손님맞이가 종택의 가장 큰 일인 셈인데.. 워낙 찾아 오는 손님들이 많다 보니 다 맞이할 수는 없고해서 그래도 자신의 문중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손님일 경우는 최상의 대접을 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 

 


한강 정구 선생에 대한 종부님의 몇 가지 문답테스트에 합격점을 받은 것인지  마다하는 나를 계속 안채로 초대하신다.  안동 식해를 준비하시는 종부님.

 


평소 흠모하던 한강 정구선생의 사당을 곁에 두고.. 한강 선생의 종택 마루에 앉아 종부님과 나누었던 소중한 대화



사진 속 붓글씨 쓰시는 분이 종부님이시다. 지금부터 10여년 전의 사진인데.. 상당히 미인이시다  안채 마루에 걸려 있는 액자와 족자 속의 붓글씨를 보니 붓글씨에 문외한인 나의 눈에도 깊은 내공이 담겨 있음이 보인다..

 

시집오기 전 친정에서도 많은 교육을 받았지요.. 신랑 얼굴 한 번 못보고 청주정씨 한강 종택으로 시집을 와서 평생 조상을 모시면서 살았답니다.. 이젠 이 종택에서 혼자 살고 있는데 아침,저녁으로 사당의 조상님을 모시는 게 제 일이지요.. 자식들은 다 잘 되었답니다 

 

하지만..

 

조상모시는 일도 아마 내 대에서 끝나지 않겠어요.. 도시에서 자라고 지금도도시생활을 하고 있는 며느리에게 이 일을 대물림 해준다는 게 어디 가능이나 할지..  제 명이 끝나는 날까지는 조상모시기에 신심을 다 할 자신이 있지만 자식 대에 까지 이어질 수 있을는지..  

 

멀리. 어둠이 내려 앉기 시작한다.  봄이 되면 가족들과 함께 다시 찾을 것을 약속 드리고는 서둘러 일어난다.. 종택에서는 찾아온 손님이 집을 떠날 때는 아무리 몸이 아프고 상대가 어리다하여도 집 바깥까지는 꼭 배웅을 하는 법이다(과거에는 노자 돈까지 지어 주었지만..)  날이 차니 아무리 들어가시라 하여도.. 종부님은 내 차가 출발할 때까지 밖에 서 계신다..

 

 

아참.. 회연서원 사당의 허물어진 담장 보수문제와 봉황과 관련된 대나무숲, 오동나무숲 등에 대한 나의 견해를 말씀드리지 못했구나..다음 기회에 꼭 한번 여쭈어 보리라!!!!

 



디카 배터리가 다 되어 병풍과 식해는 폰카로 찍었다 식해는 먹다 말고 찍어서 인지 내용물이 충실해 보이지 않는다.. 실제론 건더기가 무척 많았는데..  맛있었다. 어디서 이런 음식 먹어 보겠는가???  종가집 음식 말이다..

 

 

종부님과의 대화 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얼마 전 신문에 실린 나의 기사 바로 옆 기사의 주인공이 되시는 경북대학교 한문학과 김시황 교수님이 종부님 친정 집안 할아버님이 되신다고

 

 

 

 

얼마전..  우리 문중인 야성 송씨 인의공파 족보를 살피다.. 나의 12대조 되시는 아헌공 송원기 할아버님(실질적인 우리집안의 중시조) 자리에서 정 한강이라는 이름을 본 적이 있었다.. 다시 한번 그 부분을 찾아보니

 

아헌공 송원기는 숙부 신연 선생으로부터 사사를 받고 정 한강과 더불어 구미 인동의 장 여헌과 학문을 논하였다..(한문실력이 짧아 족보의 내용을 간단히 풀이)

 

 

한강 정구선생은 1543생(중종) 이다.. 아헌공 송원기 할아버님은 1548년생(명종)이고..    여헌 장현광 선생은 1554년 생(명종)으로 세 분 모두 선조대의 임진왜란와 광해군시절의 험난했던 시기를 사셨던 동시대 분 들이다

 

마음 속으로 흠모해왔던 한강 정구선생이 우리 가문의 중시조 격인 12대조 아헌공 할아버님과 동문수학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고 자지 않아도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제 집안의 뼈대 있는 족보도 제대로 꿰고 있지 못하는 놈이 어디 건방지게 남의 집안 족보에 그리 관심을 두고 있었나  하는 자괴감도 든다

 

 

 

 

 

조선 중기 성리학의 양대 산맥이였던 남명학과 퇴계학을 수학한 뒤 의학, 역사, 천문, 풍수지리, 예학 등 여러 학문에 통달했던 대학자 한강 정구선생.

 

 선생을 주향한 회연서원에 서 있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 400년 느티나무

 

말없는 그 노거수처럼......  나 역시 그렇게 살고 싶다

 

 

2006년 병술년 마지막을 이틀 앞둔 어느 날 밤

 

산림처사..  풍경.. 씀..

 
다음검색
댓글
  • 08.09.18 12:37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견도루가 아니라 현도루가 맞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 08.09.29 16:41

    풍수적으로 해석한 회원서원 잘 보았습니다. 짧은 소견으로는 풍수에 근거하여 지어 설계를 하여 지었다면 꼭 바로 옆이 아니어도 대가천 건너 산이름이나 동네 명칭에서도 비보를 찾아 볼 수 있지 않을 까 합니다.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