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피니즘은 그 어원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알프스지방을 중심으로 전개된 산악운동이다.물론 알피니즘이라는 개념 혹은 이념이 생성되기 이전에도 사람들은 알프스에 올랐다. 종교인, 상인, 목동, 수정채취업자, 수렵꾼 등이 그들이다. 이들과 알피니스트의 차이는 그들이 왜 산에 오르는가 하는 목적에서 갈라진다.
이들은 종교적인 이유 혹은 생활의 방편으로서 산에 올랐다. 그러나 알피니스트들은 다만 '산에 오르기 위해서' 산에 오른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한다면 알피니즘이란 곧 '고도의 위험이 농축되어 있는 유희'이자 '무상의 행위'인 것이다. 근대적 알피니즘의 효시로는 1786년의 몽블랑 초등을 꼽는다.
이때의 초등자로서 등반사에 자신의 이름을 아로새긴 사람들이 샤모니의 의사 미셸 파카르와 수정채취업자 자크 발마인데, 사실은 제네바의 과학자 드 소쉬르가 내건 현상금을 노리고 한 등반이었으므로, 엄밀하고 순수한 의미에서의 알피니즘을 구현한 것은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 어찌되었건 이들의 초등소식이 전해 지자 사람들의 인식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그때까지 알프스의 험준한 고봉들은 죄다 '악마의 거처'이며 '용의 소굴'로만 여겨져 인간이 접근해서는 안되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이들의 쾌거로 말미암아 그 중세적 환상이 깨진 것이다. 이후 1800년까지를 여명시대, 그리고 1840년대 까지를 개척시대라고 부른다.
등반사에 또 하나의 획을 그은 것은 1854년 알프레드 윌스의 베터호른 초등이다.
1857년에는 세계 최초의 등산단체인 '알파인클럽(영국산악회)'이 결성되어 알프스의 초등경쟁에 불이 붙는다. 기록에 의하면 이후 약 10년 동안 4,000m급 고봉 60개를 포함하여 모두 149개의 알프스 봉우리들이 초등되었다니 알피니즘이 하나의 시대정신으로 자리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알피니즘의 황금시대는 1865년 에드워드 윔퍼의 마터호른 초등으로 마감된다.
마터호른 초등이 워낙 비극적인 결말로 맺어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제 더 이상 알프스에서는 올라갈 봉우리가 없어져버린 것이다. 10여년에 걸친 '좋았던 옛시절'은 그렇게 막을 내리고 이제 유럽등반계는 은의시대로 접어들어 안이한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을 때 돌연 신세대의 반항아가 나타나 알피니즘의 개념 자체를 송두리째 흔들어버린다. 그가 바로 알프레드 프레드릭 머메리(Albert Frederic Mummery, 1855-1895)이다.
"보다 어렵고 다양한 루트(More Difficult Variation Route)로 올라라!"
16살 때부터 영국 도버해안의 암벽에서 바위에 달라붙곤 했던 이 남자는 타고난 반항아요 모험가였다. 알프스의 봉우리들을 다 올랐다고? 그건 당신들 얘기일 뿐이야. 나는 당신들과는 다른 길로 모든 봉우리들을 다시 오를 거야. 당신들은 그저 어떻게든 정상에 오르기만 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나는 당신들과는 다른 방식-보다 어렵고 다양한 루트로 오를 거야! 훗날 '머메리즘(mummerysm)'이라 명명된 이 남자의 등반관은 이것이다. 어떻게든 오르기만 하면 다가 아니다.
남들이 닦아놓은 길을 따라가는 것이 무슨 등반인가? 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오르느냐'이다. 굳이 보다 어려운 루트를 골라 오르는 것이야말로 알피니즘의 핵심이다! 이전까지의 등반사를 지배해온 '등정주의(peak hunting)'가 폐기되고 '등로주의'가 전면으로 부상하는 순간이다.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영국초판, 1895)는 이 호쾌한 산사나이가 남긴 유일한 산악문학저서이다. 그가 그저 책상에 앉은채로 이렇게 새된 목소리를 내질렀던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새로운 사상을 악계에 당당히 발표했고 몸소 그런 방식의 등반을 실천해 보임으로써 시대를 앞서 나갔다. 등반가로서의 머메리를 만천하에 알린 것은 1879년 마터호른의 즈무트능선 초등. 머메리의 출현 이후로 이제 더 이상 '마터호른에 올랐다'는 것 자체는 알피니스트의 훈장이 되지 못한다. 문제는 어떻게 올랐느냐이다. 머메리는 너무도 험준해 당시로선 아무도 달라붙으려 하지 않았던 즈무트능선을 개척등반하여 정상에 섬으로써 그의 사상에 반발했던 많은 산악인들의 입을 쩍 벌려놓았다.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의 제1장은 당연히 이 초등기록이 차지하고 있다. 나머지의 장들도 마찬가지이다. 제2장은 1880년 마터호른 푸르겐능선 초등, 제3장은 역시 같은 해의 콜 뒤 리용 초등, 제5장은 에귀 데 샤르모 초등…그런 식이다. 특이하게도 제4장은 그와 동행한 머메리부인이 썼다. 1887년 토이펠스그라트의 초등기록이다. 그 험준한 봉우리를 아내와 함께 등반했다는 사실만 보아도 머메리의 파격적인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는 19세기 말이다. 알피니즘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긴 했지만 여전히 일반인들에게는 '다만 산에 오르기 위해서 산에 오른다'는 것은 미친 짓으로 보였으리라. 그런데 그것도 길이 안 나 있는 곳만 골라서, 게다가 조신하게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어야할 마누라쟁이까지 동반하고 오른다고?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는 빤하다. 필시 악마와 내통하고 있거나 머리가 돈 자식이 아니면 저런 짓을 할 리가 없어!
머메리의 등반기록을 읽는 것은 그래서 즐거운 일이다. 도처에서 상식과 충돌하고 페이지마다 즐거운 반란이 넘쳐난다. 게다가 머메리는 지독한 독서광이었고 <산업생리학>(1891)이라는 경제학 저서까지 출판한 인텔리이기도 하다. 정규적인 인문교양을 착실히 쌓은 영국 부르조아답게 워즈워드와 테니슨의 시를 읊조리고, 셰익스피어의 대사들을 자유자재로 인용하며, 그리스 신화에서 구약과 신약을 거쳐 조로아스터교에 이르기까지의 성전(聖典)들까지 들먹이니…
한 마디로 문학적 가치도 높은 글이어서 제대로 된 고전을 읽는 맛이 난다. 독자를 바짝 긴장시키는 상황에서도 태연히 유머를 주고 받으며 동료들과 함께 껄껄대는 모습은 과연 한 시대를 풍미한 등반가요 사상가인 머메리의 풍모를 새삼 확인시켜주는 대목이다.
머메리즘의 본질을 설파하는 유려한 문장들이 책의 제14장 '등산의 기쁨과 벌칙'은 여타의 장들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개별 봉우리의 산행기록이 아니라 자신의 등반철학을 피력한 에세이이기 때문이다. 그의 사후에 머메리즘의 본질을 논한 글들이 많이 쓰여졌지만 아무래도 원전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머메리 특유의 유머와 풍자 그리고 호방한 기개가 행간마다 넘쳐나는 명문이다.
우선 그가 얼마나 낭만적인 동시에 육체적인 인간인지를 살펴보자.
"참된 등산가는 하나의 방랑자이다. 내가 말하는 방랑자는 일찌기 인류가 도달하지 않은 곳에 가고 싶어하는 사람, 일찌기 인간의 손가락이 닿지 않은 바위를 붙잡거나, 대지가 혼돈에서 일어난 이래 안개와 눈사태에 그 음산한 그림자를 비쳐온 얼음으로 가득 찬 걸리를 깎아 올라가는데 기쁨을 느끼는 사람을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면 참된 등산가는 새로운 등반을 시도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는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마찬가지로 그 투쟁의 재미와 즐거움에 기쁨을 느낀다. 그것을 이해하려면 그것을 느껴야 한다. 그것은 행복에 대한 강력한 감정이다. 그것은 온 혈관에 욱신거리는 피를 흐르게 하여 모든 냉소의 자국을 파괴하고 비관적인 철학의 뿌리 그 자체를 강타한다."
알피니스트들이 체험하게 되는 존재에 대한 심미안을 논한 대목을 보자.
"인생의 근심걱정은 금권주의 및 사회의 본질적 속악함과 함께 아득히 저 아래쪽에 남는다. 위쪽에서 우리는 맑은 공기와 날카로운 햇빛 속에서 신들과 함께 걷고, 인간은 서로를 알며 자신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를 안다."
가이드 없이 산행한다는 것(guideless climbing) 역시 등로주의와 더불어 머메리즘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개념이다. 그는 가이드를 따라 그저 가축처럼 내몰리며 오르는 산행에서 도대체 무슨 기쁨을 느낄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것은 값비싼 행락이요 고역이며 인간의 자존심에 대한포기에 다름아니다.
"침대에 누워서도 손으로 잡을 자리, 발로 디딜 곳과 더불어 올라가는 길의 한 걸음 한 걸음을 머리 속에 환히 그릴 수 있는 가이드의 뒤를 따라 바위 부스러기의 긴 사면을 허덕허덕 올라가는 것은, 향수와 화장기름에 젖은 유행복에 풀 먹인 린넬셔츠, 번쩍거리는 구두를 신고 기차로 체르마트에 내려서는 줏대없는 인간들이나 할만한 일이다."
희대의 반항아, 낭가파르밧에 지다 머메리는 매혹적이면서도 위험한 인간이다. 어쩌면 그가 위험한 인간이기 때문에 매혹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도 자신의 등반철학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을 감지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일까?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의 마지막 장은 마치 유언과도 같은 한 문장으로 맺어져 있다.
"등산가는 자신이 숙명적인 희생자가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산에 대한 숭앙을 거의 버리지 못한다."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는 19세기의 산악문학을 대표하는 불멸의 명저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머메리는 이 책이 그러한 역사적 평가를 받게되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1895년 6월, 원고를 출판사에 넘긴 다음, 그는 오래된 자일파티 제프리 헤이스팅스 및 노먼 콜리와 함께 인도의 봄베이로 떠난다. 당시로서는 아무도 넘보지 않았던 히말라야의 8,000m급 고봉 낭가파르밧에 오르기 위해서였다. 그는 두번의 등정시도가 좌절된 이후 다른 루트를 찾아보기 위하여 친구들과 헤어져 두 사람의 구르카병사들을 이끌고 능선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것이 그가 지상에서 보인 마지막 모습이다. 머메리는 그렇게 낭가파르밧 최초의 희생자로 자신의 삶을 마감했다.
그런 까닭에 이 책에는 머메리부인의 서문이 붙어있다. 알피니스트인 남편을 둔 여자답게 징징대는 소리는 전혀 없이 간결한 사실적 기술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말미에는 머메리가 낭가파르밧에서 보내온 편지를 전재했다. 뜻밖에도 그의 마지막 육성은 담담하다. 어쩌면 등반사에 '영원한 청년'으로 남은 희대의 반항아 알프레드 머메리다운 고별사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설령 낭가파르밧에서 실패한다 하더라도 이 거대한 봉우리를 보고, 훈자와 러시아 국경 저편에 있는 위대한 산들을 바라보았으니 후회는 조금도 없소."
우리의 옛선조들은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머메리는 말한다. 길이면 가지 말아라. 19세기의 신세대 반항아가 남긴 이 한 마디는 알피니즘의 골간을 새로 세웠고 등반사를 뒤흔들었다. 그래서 20세기의 알피니스트들은 그 누구도 머메리의 영향권으로부터 자유로와질수 없었다. 21세기가 되었다고 해도 달라진 것은 없다. 보다 어렵고 다양한 루트를 찾아 곤란한 등반을 추구하는 것이 곧 알피니즘의 본질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등반시대 개막
:: 히말라야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등산행위 ::
히말라야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등산행위는 1818년 제러드 형제가 가르왈을 탐험 도중 레오 파르기알(6,791m)봉의 6천미터까지 시등한 것을 꼽는다. 1855년에는 독일의 슈라긴트와이트 3형제가 역시 가르왈의 아비가민(7,355m)을 시등한 기록도 있다. 그러나 이들의 등산은 그 자체를 목적으로한 것이 아니라 측량과 탐사활동을 위한 수단이었다.
▲ 머메리
순수하게 등산을 목적으로 히말라야를 찾아온 첫산악인은 영국의 W.W. 그레함이다. 그는 1883년 알프스의 가이드를 데리고 시킴으로 들어왔다. 여기서 캉첸중가의 탈룽빙하를 정찰하고 가르왈로 가서 난다데비(7,816m) 산군의 두나기리(7,066m)를 시등했다. 그는 다시 시킴으로 돌아와 포크트피크(6,204m)를 올랐다.
그레함은 알프스에서 은의 시대의 종말을 고하게 한 몽블랑 산군의 당 뒤 제앙(4,013m)을 초등정한 사람으로 알프스의 여러 봉을 초등정하면서 유럽산악계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한편 1885년에는 독일의 슈라킨트 형제가 가르왈히말라야의 카메트(7,756m)를 시등, 6,784미터까지 올랐다.히말라야산에 대한 본격적인 원정등반은 1892년 영국의 콘웨이가 이끄는 원정대가 최초다. 매코믹, 에켄스타인, 브루스 등의 선구적 등산가들이 참가한 이 원정대는 카라코룸의 히스퍼, 비아포, 발토로 빙하를 탐험하고 발토로 캉리(7,312m)를 시등하고 파이오니아피크(6,893m)를 등정했다. 1894년에는 스웨덴의 헤딘 일행이 파미르 동부의 무즈타그 아타(7,546m)를 시등, 6,283미터에 도달했다.
1895년에는 등로주의의 주창자인 영국의 A.F. 머메리 일행이 낭가파르밧(8,125m)에 도전했다. 그러나 이 등반에서 머메리는 디아미르빙하를 등반 도중 눈사태로 실종되고 말았다. 이것은 히말라야 등반사에 있어서 최초의 조난 기록이었다. 머메리가 남긴 등로주의는 머메리즘이란 이름으로 현대등산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미국의 워크맨 부처는 1898년에 카라코룸에가서 비아포빙하를 탐험하고 1902년에 재차 카라코룸에 가서 쵸고 룽마빙하를 탐험하고 6천미터 무명봉을 두 개나 올랐다. 그리고 1906년에는 눈,쿤 산군을 찾아가 이 지역의 세 번째 고봉인 피나클 피크(6,932m)를 등정했다. 워크맨 부인은 여성으로서 최고 도달 기록을 세웠다.
파키스탄의 고산들
Nanga Parbat (8125m)
개요
세계에서 9번째로 높은 산, 낭가파르밧. 에베레스트보다 낮지만 등반난이도는 훨씬 높다고한다. 보통 일반인들은 fairy meadow(3306m)에서 낭가파르밧의 전경을 감상한다. fairy meadow는 이름 그대로 아름답고 평화로운 산중의 초지인데 이곳에 트레커를 위한 산장이 3~4곳 있다. 옛날에는 이곳이 낭가파르밧을 등정하는 등반대의 Base camp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더 높은 곳에 high camp들이 세워져 있고 이 곳은 가벼운 트레킹 코스로 남아 있다.
대개의 8000m급 고봉들은 3~10일간의 트레킹을 하여 접근해야만 그 전모를 보여주는데 낭가파르밧의 fairy meadow는 유일하게 하루만에 8000m급 산의 모습을 숨김없이 볼 수 있는 곳이라 한다.
fairy meadow
가는 방법
Gilgit에서 KKH를 따라 남쪽으로 가다가 Astor Valley로 갈라지는 길이 나온다.이곳에 있는 다리를 Raikot bridge라고 한다. 길기트에서 약 2~3시간정도 걸리는데 Natco버스로 요금이 50RS이고 학생D/C받으면 절반이다. 길기트의 Madina G/H옆의 버스터미널에서 오전중에 버스를 타야 해지기전에 fairy meadow에 도착할 수 있으니 되도록 아침 일찍 떠나는게 좋다.(9시반, 10시반 출발하는 버스가 있다)
Raikot Bridge에는 작은 가게,호텔이 있다. 이곳에서 비포장 jeep road를 따라 계곡길을 올라가면 tato라는 산골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에서부터 부서진 jeep road를 따라 약 1시간 반에서 2시간 정도 올라가면 fairy meadow다.
Raikot bridge에서 tato까지 가는 jeep가 Raikot bridge에서 손님을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다. 요금이 편도 1100RS,왕복 1800RS이다(인원수와 상관없음,5~6인정도 탈수 있음). 길이 험하기 때문에 JEEP 이외의 교통수단은 전혀 없다. 걸어올라가면 약 4~5시간 걸린다고 하지만 한 6시간 정도 예상해야 할 듯. JEEP로는 약 한시간 소요.
jeep운전사들이 요금을 담합했는지 discount는 거의 불가능하다. 만약 왕복으로 계약 했다면 내려오기로 약속한 날, 약속한 시간에 jeep가 tato마을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픽업을 해준다. 만약 fairy meadow에 더 오래 머물고 싶거나 일찍 내려오고 싶다면 Raikot Sarai산장의 무전기를 이용하여 연락하면 픽업시간을 바꿀수 있다.
나는 오를 때는 JEEP를 이용했지만 내려올 때는 걸어내려왔다(하산시 4시간 소요).
이 길 중간에는 민가가 전혀없다. 따라서 물이나 음식을 구할 곳도 없으니 만약 걸어서 이길을 통과할 예정이라면 반드시 충분히 챙겨야 한다. 그리고 인적이 드물고 일부 현지인들은 총(자동소총까지...)을 가지고 있기도 하니 여럿이 같이 다니길 권한다.
작년 가을 TATO마을에서 외국인들에게 가이드를 해주겠다며 200달러를 요구하는 어이없는 파키스탄인이 있었다. tato마을에서 fairy meadow가는 길은 분명하고 안전하다. 왼쪽으로 Raikot Glacier를 보면서 약 한시간반정도 올라가다가 넓던 길이 오솔길로 바뀌면서 지그재그로 올라가기 시작하는데 이 오르막의 끝이 바로 fairy meadow다.
Gilgit로 돌아가려면 일단 Raikot bridge로 돌아온 후 Gilgit행 버스를 타야하는데 정규버스는 자주 오지 않고, 또 오더라도 full인 경우가 많아 문제다.(지붕에 타야한다) 중간에 갈아타더라도 일단 Gilgit 방향으로 가는 차를 아무거나 히치하여 가야한다.
머물곳
fairy meadow에는 산장이 3~4곳있는데 보통 여름철 성수기에는 모두 open하나 비수기가 되면 이중 가장 크고 가장 잘 운영되고 있는 Raikot sarai만이 문을 연다. 식당과 방갈로가 한채 있고, 텐트를 대여해주므로 앞마당에서 캠핑을 할 수도 있다. 이 곳에는 사장의 동생이 매니저로 있는데 낭가파르밧 등반경험이 있는 셀파출신이다. 한국원정대가 이곳에 온적이 있다고 한다.
이 곳 방갈로에서 보는 낭가파르밧과 빙하의 전경은 아주 아름답다. 특히 일출시와 일몰시에 시시각각 변하는 설산의 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지경.
Raikot Sarai의 단점은 비싸다는 것인데 방갈로가 400RS이고 식사는 60RS, 짜이가 10RS이다. 밤에는 무지무지 추우니 가지고 있는 옷 모두 갖고 올라갈 것.
여럿이 함께 가서 마당서 캠핑을 하면서 밤에 캠프화이어를 해보시길 권합니다.
더 자세한
Nanga Parbat
이야기
(조선일보에서)
지구상에서 최대의 절벽의 히말라야 산맥의 가장 북서쪽 끝 카시미르(kashmir)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인더스강이 뒤로는 카라코람(kashmir)과 히말라야의 평행한 봉우리 사이로 600마일이나 멀리 북서쪽을 향해 흐르고, 남으로는 수많은 봉우리들을 지나 평지까지 해발 3,000피트 이상의 거대한 도랑을 새기면서 낭가파르밧의 기본둘레를 형성하고 있다.
'벌거벗은 산'이라는 뜻을 가진 이곧은 디아미르(Diamir) 즉, '산중의 왕'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운다. 다섯 개의 큰 빙하위에 수직 암벽인 루팔벽(Rupal, 4,500m)이 남쪽으로, 디아미르벽(Diamir, 4,500m)이 서쪽으로, 라키오트벽(Rakhiot. 3,400m)이 북동쪽으로 내리 뻗고 그러한 벽위에 북봉, 주봉, 남봉이 사다리꼴 모양으로 400m 정상벽을 이루어 장엄하게 서 있는 산이 낭가파르밧이다.
낭가파르밧(8,125m)은 1895년 영국의 등산가 머메리(A.F. Mummery)에 의해서 세계에 그 신비의 모습을 드러냈다. 등로주의(머메리즘)의 효시자인 머메리는 알프스의 침봉과 북벽에서 첨예한 등반을 하며 어려운 베리에이션 루트를 개턱하는 등 등산에 있어서 벽의 시대를 열게한 록클라이밍의 선구자라고도 칭해진다. 알프스에 대한 등산의 열기가 식어가게 되는 19세기 후반 새로운 활로를 찾아 나서게 되었고, 그가 히말라야의 오지에 나타나 8천미터봉에 도전을 시도함으로써 등산계에 큰 파문을 일으키게 된다.
1932년 메르클(W. Merkl)이 이끈 독일·미국 합동대는 낭가파르밧의 북쪽을 방문하여 당시로는 미답지인 라키오트 피크에 올라 동릉까지 진출하였고, 1934년 그는 다시 5명의 독일 등반대원과 11명의 셀파로 구성된 원정대를 꾸려 전에 시도한 루트를 따라 7,800m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악천후로 하산도중 9명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1937년 카알비인(K. Wien)이 이끈 독일원정대는 등반기간 중 눈사태가 제4캠프를 덮치면서 7명의 포터를 포함한 7명의 대원이 몰사하게 되고, 1938년 바우어(P. Bauer)가 강력한 팀을 구성하여 북면루트를 공략했으나 역시 실패하게 된다. 1939년 아우프슈나이더(P. Aufschnader)가 이끈 정찰대는 디아미르벽의 2개 루트로 공격하여 각각 약 6,000m 지점까지 진출하였다.
이리하여 34, 37년의 대참사는 낭가파르밧을 독일인들의 운명의 산으로 만들었고, 1953년 독일 및 오스티리아의 메르클 추모등반으로 7월3일 헤르만불(H. Buhl)이 낭가파르밧 첫등정을 이루게 된다. 이전 등반에서 철수한 적이 있던 헤를리히코퍼(K. M. Herrligkoffer)와 아쉔브르너(P. Aschenbrenner) 리더하에 헤르만 불과 프로이엔베르거(W. Frauenberger) 및 에르틀(H. Ertl)이 정상공격을 맡았다.
알버트 프레드릭 머메리(Albert Frederick Mummery, 1855~1895)
머메리는 1855년 잉글랜드 캔트주의 도버에서 태어났다. 몸이 허약했던 그가 도버 해안의 암벽에 흥미를 느껴 등반을 시작한 것은 16세때부터였다. 등산가로서 그를 영국의 유명 암벽등반가로 일컫게 한 것은 1879년 마터호른의 쭈므트 능 초등, 1880년 마터호른의 푸르겐 능, 꼴 디 리옹, 에귀 데 그랑샤르모, 1881년 에귀 디 그레뽕, 에귀 베르뜨 남서면, 1887년 토이펠스그라트 등을 연달아 초등한 업적에 의해서다. 하지만 1895년 낭가파르밧 원정에서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당시 과감히 스포츠 등산을 제창하고 나오면서 그는 '근대 등산의 비조', '등산사의 일대 반역아'로 불리기도 했는데, 머메리즘이 탄생되면서 알피니즘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위대한 인물이다. 오늘날도 머메리즘은 알피니즘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메리 페트릭(Mary Pethrick)
릴리 브리스토우와 절친한 친구 사이였던 메리 페트릭은 알프렛 머메리의 부인이었다. 1883년 메리 페트릭은 머메리와 결혼한 이후, 비교적 짧은 기간동안 등반세계의 잔명 속에 비추어졌던 때가 있었다. 약 3년에 걸친 메리의 등반 세계에 대해 충분한 자료가 남아 있지는 않지만 그녀의 최초 등반은 1887년으로 기록된다.
그해 메리는 가이드 알렉산더 브루게너(Alexander Burgener)와 남편과 함께 융프라우, 치날롯트호른(Zinal Rothorn), 드리엑크호른(Drieckhorn), 태쉬호른(Taschorn)을 등반하며 그 과정에 토이펠즈그랏트(악마의 릿지, Teufelsgrat)를 초등하게 된다. 이러한 업적을 통해 그녀의 리더들은 물론 메리 페트릭 부인까지도 당시의 산악계를 열광시킬 수 있었다. 험악한 상태 아래 28시간이라는 연속등반 기록 가운데는 다난하기 이를 데 없는 청빙과 또는 발도 못 붙일 푸석한 얼음, 썩은 바윗길, 여기에 피켈도 잃어버린 채 급기야는 가이드 두 명마저도 부상당하는 조난을 겪기도 했다.
1892년 머메리가 다시 알프스를 찾기 전까지 4년을 칩거하였던 그녀는 다시 친구인 릴리 브리스토우와 사촌 오빠인 W.J. 페트릭과 팀을 이루어 당대 영국의 터프한 클라이머들, 이를테면 스링스비, 노면 콜리, 쏠리, 파스퇴르와 그의 자매들과 한 팀을 만들어 유럽대륙의 산악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메리 페트릭은 남편 알프렛 머메리의 후광을 입고 빛나는 산행의 업적을 남겼으나 한편으로는 남편 덕분에 당대를 주름잡던 산악인들과 상당한 친분을 최적으로 유지하며 과연 산악인의 사회성이 무엇인지를 시사하여 주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등산은 시작된다.' 근대 등산의 비조 (鼻祖) 로 일컬어지는 영국 산악인 알버트 프레드릭 머메리의 말이다.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
머리말
머메리 부인의 서문
제1장 마터호른-츠무트 능선
제2장 마터호른-푸르겐 능선
제3장 콜 뒤 리옹
제4장 토이펠스그라트
제5장 에귀유 데 샤르모
제6장 그레퐁
제7장 당 뒤 르캥
제8장 에귀유 뒤 플랑
제9장 에귀유 베르트
제10장 에귀유 베르트
제11장 작은 고개-콜 데 쿠르트
제12장 디흐 타우
제13장 카프카스의 어느 고개
제14장 등산의 기쁨과 벌칙
역자 후기
A. F. MUMMERY
Ritratto di
Piera Biliato
Testo di Carlo Caccia
Albert Frederick Mummery
Dal Grepon al Nanga Parbat by fair means
All'epoca della conquista delle vette principali - Monte Bianco, Monte Rosa, Gran Paradiso... -, nelle Alpi Occidentali segue un periodo durante il quale l'attenzione degli alpinisti si rivolge a quelle cime, come i Drus, che rivestono carattere per cosi dire “secondario”. Se volessimo proporre delle date precise, consci dei rischi nei quali cosi facendo e possibile incorrere, potremmo affermare che la prima fase va dal 1786, l'anno della prima salita del Monte Bianco, al 1865, quando venne conquistato il Cervino, mentre la seconda si protrae per i successivi vent'anni. Dal 1885, poi, sarebbero state le singole pareti a diventare protagoniste, per rimanere tali fino al 1938, quando Cassin e soci ebbero la meglio sullo sperone Walker delle Grandes Jorasses.
_________
Albert Frederick Mummery (Dover, 1856 - Nanga Parbat, 1895) si trova dunque ad agire a cavallo di due fasi e, di fatto, tra le sue imprese compaiono tanto prime ascensioni di vette “minori” quanto nuove vie su cime gia salite in precedenza. Ricordiamo allora, tenendo quale riferimento la sua autobiografia alpinistica Le mie scalate nelle Alpi e nel Caucaso, di cui avremo modo di parlare piu avanti, la sua prima salita del Cervino (nel 1871: Mummery aveva quindici anni!), la prima salita della stessa montagna per la Cresta di Zmutt (1879), la prima salita del pericoloso canalone nord del Colle del Leone (1880), quella dell'Aiguille des Grands Charmoz (1880, via ripetuta nel 1892 senza guide), l'Aiguille Verte dal Glacier de la Charpoua (1881), la leggendaria conquista del Grepon (1881, salita ripetuta nel 1892 e nel 1893, la terza volta con miss Bristow), il tentativo all'Aiguille du Plan (1892, con alcuni amici), la prima salita della Dent du Requin (1893, sempre con amici) e la prima ripetizione senza guide dello Sperone della Brenva (1894). Desideroso di ampliare i propri orizzonti, nel 1888 e nel 1890 Mummery si reco nel Caucaso e, il 20 giugno 1895, con due amici s'imbarco alla volta dell'Himalaya. L'idea era grandiosa - ingenua e temeraria ad un tempo - e travalicava cio che in quell'epoca poteva essere concepito: salire il colossale Nanga Parbat (8125 m) per la gigantesca parete Diamir, che sarebbe stata vinta soltanto nel 1962 da una forte spedizione tedesca guidata da Karl Maria Herrligkoffer. Mummery affronto la parete, sali fino ad oltre seimila metri confidando solamente nelle proprie forze ed in quelle dei compagni, ma da quel luogo selvaggio e meraviglioso non sarebbe mai piu tornato.
≪Mummery, il grande inglese, uno dei piu notevoli alpinisti dei suoi tempi. Non conosceva ancora le enormi dimensioni di questo monte, e attacco il Nanga Parbat... E' il primo che debbo ragguagliare, cui devo rendere conto. Posso ben guardarlo dritto negli occhi, stare in piedi dinanzi a lui mentre gli annuncio: non ho conquistato il Nanga Parbat servendomi dei mezzi tecnici moderni, ma assolutamente come voi intendevate, by fair means, con mezzi leali, con le mie sole forze≫. Sono parole di un altro grande, di quell'Hermann Buhl che esattamente cinquant'anni fa, nel 1953, da solo e senza ossigeno, tocco per la prima volta la vetta della “montagna nuda”.
Ma cerchiamo ora di approfondire la conoscenza di Mummery, di cogliere le idee che lo animavano e di giustificare, attraverso la lettura dei suoi scritti, cio che di lui e stato detto. La sua indimenticabile fatica letteraria, citata poco fa e pubblicata a Londra nel 1895 - il titolo originale e My climbs in the Alps and Caucasus ? e un esempio forse insuperato nel suo genere. Dalle sue pagine - sempre fresche, mai retoriche e ancora attuali anche nella vecchia traduzione in italiano di Adolfo Balliano (1930) - scaturisce l'immagine di un alpinista totalmente estraneo da quegli ideali eroici, elitari ed antistoricistici che, dalle figure quasi leggendarie di Georg Winkler e di Paul Preuss, avrebbero raggiunto il proprio apice nel classico “maledetto” della letteratura alpinistica: Fontana di giovinezza (1922) di Eugen Guido Lammer (1863-1945). Sarebbe interessante tentare un confronto serrato tra il volume di Lammer e quello di Mummery tuttavia, per ovvi motivi di spazio, ci limiteremo a considerare alcune pagine dell'opera del nostro inglese, notando immediatamente come la narrazione dei fatti alpinistici passi talvolta in secondo piano di fronte a ben piu spassosi episodi. Non indugiamo, dunque, e immergiamoci nella lettura.
≪“Ah, caro Monsieur - e Alexander Burgener, la guida di Mummery, a parlare -, ma non avete visto la piccola luce errante sul ghiacciaio del Gorner? Laggiu non v'ha terreno paludoso. Dunque si trattava veramente d'uno spirito”. Inutilmente io andava affermando ch'era una lanterna. “Una lanterna! Che diavolo ci stava a fare? La sua direzione era quella di un luogo dove non si passa mai; d'altronde non faceva i movimenti di una lanterna, ma errava di qua e di la, guizzando e girando proprio come puo farlo uno spirito immateriale che non ha meta”. Francamente ? commenta ancora Mummery - la mia posizione stava divenendo molto seria. E' cosa nota (attestata da tutte le autorita ecclesiastiche delle valli di Saas, Zermatt e Anzasca) che chiunque ha scorto uno spirito muore certamente entro le ventiquattro ore! Dissi a Burgener che, stando cosi le cose, non c'era alcun vantaggio a far ritorno (la comitiva si trovava sul Cervino, impegnata nel tentativo lungo la Cresta di Furggen, ndr)≫.
Il giorno seguente Mummery, Burgener e Benedikt Venetz, tanto piccolo e minuto quanto coraggioso e abile nell'arrampicata su roccia, si recarono a Chamonix. ≪Il nostro animo - scrive divertito l'alpinista inglese - era ancor preoccupato dalle diverse apparizioni incontrate la sera prima. La spiegazione ch'io avevo data dei fuochi fatui venne accettata ed essi vennero relegati nel semplice rango dei fenomeni naturali. Ma era meno facile sbarazzarsi della piccola luce del ghiacciaio del Gorner. Burgener e Venetz ritenevano che probabilmente qualche grossa pepita d'oro se n'era andata sul ghiacciaio per ingrandirsi con altre particelle, e sostenevano la loro teoria con argomenti assai ingegnosi. Ero pronto ad accettare tutte queste spiegazioni ma non potei ammettere che, nella sua fase di crescenza infantile, l'oro fosse capace di compiere sul ghiacciaio passeggiate cosi idiote e senza scopo. D'altra parte - e qui la narrazione di Mummery raggiunge il proprio vertice spassoso - feci osservare che il luogo era adattissimo per costituire la dimora di un drago e che i movimenti che avevamo visti parevan essere quelli notoriamente soliti di un simile rettile. Le guide su questo punto rimasero deplorevolmente scettiche e, nonostante gli argomenti certificati veri da Schenchzer ch'io citai per avvalorare le mie parole, non vollero ammettere l'esistenza di cotesta interessantissima bestia. Giunti a Chamounix (sic), un amico entro nella discussione gettando sul problema una nuova e definitiva luce. Una scolaresca di giovanette, con le insegnanti e i bagagli parafernali di studi e di curiosita aveva trascorso qualche giorno a Zermatt. Desiderose di fare diretta e intima conoscenza con il ghiacciaio, s'eran recate a passeggio sul Gorner e s'erano sparpagliate sul ghiaccio≫. Una di esse fini per perdersi, le altre intrapresero vanamente la sua ricerca e, dulcis in fundo, giunse la notte. ≪Il signor Seiler si allarmo ed invio una guida a cercarle con la sua lanterna, e la guida passo il resto della notte a cavar fuori tutta quella inconsolabile gioventu dalle buche e dai crepacci svariati ov'era caduta. Le speranze di Burgener di far fortuna, le mie di aver scoperto in pieno XIX secolo un vero dragone, vennero distrutte...≫.
Chi fosse abituato ai racconti “bonattiani” (ci scusi l'interessato...) non si scandalizzi: questo e Albert Frederick Mummery, che Doug Scott non ha esitato a definire il piu forte arrampicatore su roccia del suo secolo. Dal brano che abbiamo considerato emergono chiaramente alcune sue caratteristiche, prime fra tutte la capacita di sdrammatizzare ogni situazione e poi l'innato senso dell'umorismo. Con Mummery incontriamo un alpinista che pone i sacrifici e le sofferenze che la frequentazione della montagna comporta in secondo piano; con lui l'arrampicata diviene piacere e divertimento e dall'alpinismo - che pur era la sua ragione di vita - egli non si lascia soggiogare e possedere completamente. La sua intelligenza lo porta ad una visione oggettiva e nitida delle cose e, come gia e apparso dalle parole che abbiamo citate, egli instaura con le proprie guide - e con Alexander Burgener in particolare - un rapporto paritario.
Non e vero che Mummery rifiutasse l'alpinismo senza guide: egli cercava invece nella guida un autentico compagno di cordata, del quale essere amico e con il quale dividere onori e oneri della scalata. Mummery amava il confronto leale e diretto con la montagna, fu nemico dei mezzi artificiali e, giunto alla base della famosa placca Burgener sul Dente del Gigante, lascio un biglietto sul quale aveva scritto quella che in seguito sarebbe diventata una delle frasi piu celebri della storia dell'alpinismo: ≪Assolutamente impossibile con mezzi leali (by fair means)≫. Ancora, vogliamo ricordare le quasi commosse parole di Gian Piero Motti che, nella sua Storia dell'alpinismo (1977), scrive che ≪proprio oggi, dopo che l'alpinismo himalayano ha concluso tutto il suo periodo di conquista, ricorrendo ad ogni mezzo tecnologico lecito ed illecito per vincere, ricorrendo a colossali impieghi di uomini e di capitali, si riscopre il valore dell'esempio di Mummery≫ che, piccolo e smarrito, ≪ci piace immaginarlo ai piedi della grande parete lucente, forte solo del suo coraggio e della sua intelligenza, sovrastato dalla grandezza, ma non domato e soggiogato. Ma sia ben chiaro: non vi e nulla di eroico nel suo gesto. Forse, riprendendo un passo di un grande poeta, alcuni piu di altri sentono in se che non si e fatti per “vivere come bruti”≫.
A questo punto vorremmo dedicare attenzione particolare alla prima salita del Grepon, compiuta da Mummery con Burgener e Venetz il 5 agosto 1881. In questa occasione il piccolo inglese supera la famosa fessura di quarto grado che oggi porta il suo nome e, giunto in vetta, compie un gesto simpatico e dissacratore che, in seguito portato infinite volte ad esempio, all'austero Lammer sarebbe apparso a dir poco sacrilego. ≪La vetta - scrive Mummery - ha dimensioni degne di un palazzo e possiede tre seggioloni di pietra≫. Al piu alto Burgener ancora la piccozza, ≪il qual rito debitamente compiuto ci stendiamo lunghi sulla roccia mentre ce ne ridiamo del tenue colpo di cannone del signor Couttet sparato a Chamounix, cui rispondiamo col colpo assai piu esilarante di una bottiglia di champagne≫.
Nel 1893, come abbiamo gia visto, Mummery sale il Grepon per la terza volta ed e in questa occasione che miss Bristow, armata di un colossale apparecchio “13x18”, scatta la celeberrima fotografia con il grande alpinista alle prese con la “sua” temuta fessura. ≪La signora della comitiva ? scrive il nostro protagonista -, circondata da tre lati dal vuoto e, dinanzi, bloccata dalla macchina si prepara a cogliere il momento in cui un disgraziato arrampicatore si presentera nella meno elegante attitudine per essere ritrattato per sempre≫.
Il Grepon, dunque: ≪Una vetta inaccessibile - La piu difficile scalata delle Alpi - Una facile ascensione per signore≫. Cosi, in tre definizioni, Mummery ne ha condensato l'evoluzione alpinistica, comune, secondo lui, a tutte le montagne.
E nell'ultimo capitolo del suo libro che il nostro simpatico e occhialuto inglese presenta in sintesi i suoi principi e le idee che lo animarono e spinsero verso le grandi imprese. Cerchiamo allora di cogliere tra le pagine di Piaceri e pene dell'alpinismo i passi piu significativi, tenendo ben presente, di fronte alla loro incredibile modernita, che si tratta di parole scritte piu di un secolo fa.
≪Alcuni notissimi alpinisti - cosi esordisce Mummery - la cui opinione necessariamente ha un grandissimo peso hanno dichiarato che i pericoli della montagna non esistono piu. L'abilita, la scienza ed i libri li hanno relegati nel regno degli spaventacchi cui non si crede piu. Non chiederei di meglio che di ritener buone coteste conclusioni ottimiste≫. E gia qui ci ritroviamo lontani anni luce da coloro che, invece, cercavano nelle imprese alpinistiche proprio il rischio e il pericolo e percepivano in se stessi come l'espressione di una forza diabolica, una ≪spinta irresistibile, assetata di potenza, piu forte del nostro io. Essa e destino dell'uomo faustiano, non e evitabile, e demoniaca≫. Sono, queste ultime, parole di Pino Prati, morto sul Campanile Basso nel 1927 e sostenitore in prima linea dell'edizione italiana di Fontana di giovinezza.
Mummery ci presenta poi un'affermazione di primaria importanza nella sua concezione dell'alpinismo e che oggi, dopo rivoluzioni mancate e piu o meno celate restaurazioni, con tanto discorrere attorno ai temi del rischio e della sicurezza, sembra acquistare il suo pieno valore: ≪In sostanza se, per un istante, consideriamo la essenza stessa dello sport alpino, e certo ch'esso consiste, e consiste esclusivamente, nell'uguagliare l'abilita dell'alpinista alle difficolta opposte dalla montagna≫. E poco dopo l'alpinista inglese sembra volerci stupire anticipando, nel 1895, idee che sarebbero state “ripensate” soltanto un'ottantina d'anni piu tardi: ≪L'essenza stessa dello sport alpino - spiega - non consiste nell'ascensione di una punta, ma solo nella lotta per sormontare le difficolta. Per conto mio - e il nostro inglese manifesta cosi il proprio splendido rapporto con la montagna - sono ben libero di confessare che salirei ancora s'anche non ci fossero piu paesaggi da vedere, anche se le sole scalate possibili consistessero in quelle grotte, in quegli orribili buchi in forma di cupe marmitte dei valloni dello Yorkshire. D'altra parte - aggiunge - andrei vagando ancora sui nevai superiori, attratto dalle nebbie silenziose, o dai rutilanti raggi di un sole declinante anche se infermita fisiche o morali, anche se dopo il tempo trascorso - e qui Mummery, ancora una volta, non riesce a trattenere il tono faceto - ali o altri angelici attributi fossero venuti a trascinare in un lontano passato ogni idea di scalata su roccia≫. Il grande alpinista dimostra poi la sua totale apertura al divenire storico quando parla dello ≪scalatore futuro, essere ancora ideale, che dara l'assalto a pareti che oggi noi guardiamo senza speranza di crederle mai accessibili≫ e gia si pone in antitesi rispetto al concetto di sesto grado quale limite delle possibilita umane che, in un clima sociale e culturale profondamente mutato, si sarebbe sviluppato nei decenni successivi.
Ma se l'essenza dell'alpinismo e il superamento della difficolta, in che cosa consiste l'essenza dell'alpinista? La risposta e chiara: ≪Il vero montanaro e un vagabondo - rivela Mummery - e per vagabondo non intendo un uomo che spende il suo tempo nel percorrere la montagna di qui e di la sulle stesse tracce dei suoi predecessori≫ ma, ≪in altre parole, il vero montanaro e l'uomo che tenta nuove ascensioni. Non importa se vi riesce o no; egli ricava il suo piacere dalla fantasia o dal gioco della lotta≫. Un alpinismo “creativo” e “di ricerca” e dunque quello del vero “montanaro”, di colui che rifiuta la brutalita e l'eroismo retorico e che, invece, pone in primo piano la “fantasia” e la lotta concepita come “gioco”. E', quello di Mummery, un alpinismo che diventa - secondo quanto ha espresso con grande efficacia Bernard Amy in uno dei suoi celebri racconti e in un intrigante articolo pubblicato nel 1980 - autentica arte: l'arte di creare nuove vie, nuove meravigliose linee che solcano come rotte fantastiche oceani di pietra verticale.
≪Dal 1879 al 1893, - sono parole di Amy - prima salendo il Cervino per sei vie differenti, poi raggiungendo la cima del Grepon senza guide, Mummery ha dato vita all'alpinismo moderno. La cima, per lui, non e che un pretesto. Cio che conta e la via percorsa, il piacere della scalata di per se, la tecnica perfettamente acquisita nell'ambito di un'etica scelta e motivata dalla tecnica stessa. Ecco tutti i presupposti che permetteranno agli eredi di Mummery di diventare dei veri poeti ed artisti. La scalata di una montagna - e qui Amy ci fa notare l'attualita estrema di Mummery, mai passato di moda - diventa in quell'epoca cio che e di fatto oggi, un'arte in se, il “fine” di un'azione in quanto tale≫. I veri eredi di Albert Frederick Mummery non sono dunque coloro che nella scalata ≪invece di esprimersi, di comunicare, cercano soltanto di dimenticare se stessi e il mondo che li circonda≫ ma sono, al contrario, quegli alpinisti per i quali ≪lo stile della scalata, la realizzazione, serve a trasmettere una certa concezione dell'alpinismo e, oltre a questa, una vera e propria etica. La passione per la montagna - ecco il nocciolo del discorso - suscita allora una nuova arte di vivere, che a sua volta pone la tecnica nella sua giusta dimensione e fa dell'alpinismo cio che Mummery chiamava unmixed play (un “gioco puro”)≫.
A proposito della pratica dell'alpinismo senza guide - e quindi dell'idea che Mummery aveva delle guide stesse - e interessante leggere un passo nel quale egli spiega che ≪forse e la compitezza, cotesta supercorritrice della verita, che ha indotto i nostri maestri a dire che “una comitiva non dovrebbe mai essere composta da meno di tre persone, due delle quali han da essere guide”, a vece di dire meglio che “una comitiva dovrebbe sempre essere composta di due esperti dell'alpe con o senza l'aggiunta di uno o due esemplari di bagagli viventi”. Sarebbe infatti stranissima cosa che i miei vecchi amici (corsivo mio) Alexander Burgener ed Emilio Rey, desiderosi di valicare il Colle del Gigante, fossero costretti a ricorrere a qualche debole scolaro o a qualche decrepito turista prima di fronteggiare i pericoli del colle!≫.
Ancora, concludendo un discorso sull'alpinismo solitario, giudicato in maniera assolutamente lucida e priva di esaltata retorica, Mummery scrive di non essere un avvocato di tale modo di frequentare le montagne perche ≪non occorre avere una profonda conoscenza della media dei dilettanti per non sapere che nove su dieci di essi si romperebbero il collo se volessero tentarlo seriamente≫. E anche se egli afferma che, ≪da opposto lato, nulla sviluppa le facolta altrettanto rapidamente e completamente≫ quanto l'alpinismo solitario, con la sua innata leggerezza si stacca dai motivi oscuri e iperindividualistici di Lammer, per il quale ≪l'uomo piu forte al mondo e colui che se ne sta solo≫. Se questi poi ringrazia la montagna per ≪avergli bagnato le labbra alla coppa della morte≫, il nostro caro Mummery, archetipo di un alpinismo basato si su premesse romantiche e teso verso sempre piu grandi difficolta ma mai slegato dal contesto sociale e inoltre totalmente estraneo al mito del superuomo, termina la sua narrazione affermando con serenita che ≪l'arte dell'alpinismo consiste nel rendersi capaci di rampicare facilmente, e cotesta arte puo fino a un certo punto praticarsi gradevolmente in modo compatibile con una ragionevole sicurezza≫. Chiunque, in funzione delle proprie capacita e del proprio allenamento, puo gioirne, perche ≪fortunatamente per la piu gran parte di noi le grandi placche brune sospese oltre lo spazio incommensurabile, le delicate ondulazioni della neve sulle scannellature del ghiaccio, sono vecchie e buone amiche; esse ci portano la salute, la gaiezza e il riso e ci rendono capaci di opporre un vigoroso disprezzo a tutte le miserie che il tempo e la vita ci ergono contro≫.
Zmuttgrat, the north-west ridge
The zmuttridge, or the northwest ridge, is a challenge for the dedicated climber, it's more difficult than the hornliridge or the lionridge. There are no fixed ropes. It's three kilometers long and the only ridge on Matterhorn with a snow section. Zmuttgrat is probably the finest route on the mountain, if you are a capable climber.
The ridge was climbed for the first time the 3:rd of September 1879 by Albert Frederick Mummery with three guides, Alexander Burgener, Johann Petrus and Augustin Gentinetta.
Information
First ascent: Albert Frederick Mummery, Alexander Burgener, Johann Petrus and Augustin Gentinetta the 3:rd september 1879.
Difference in height: 1200 meters from the foot of the ridge.
Difficulty: IV-, III+. Mixed climbing.
Time: 9 hours from hornlihutte, 10 hours from Schonbielhutte.
Starting point: Usually hornlihutte. From here you traverse the Matterhornglacier to Zmuttgrat.
Descent:
Via hornligrat or liongrat.
Huts:
Schonbielhutte: 2694m. S.A.C. Built in 1909.80 places.Open from mid march to mid september.3 hours from Schwarzsee, or 4,5 hours from Zermatt, via the village Zmutt. Is situated on the other side of the zmuttglacier seen from Matterhorn. Beautiful view of the North Wall. Was used a lot more in the old days by zmuttclimbers, today most climbers start from hornlihutte.
Hornlihutte: 3260m. S.A.C. See hornligrat.
ⓒ Mike's Mountainering Guide
------ Albert Frederick Mummery (1855 - 1895) ------
Born: London, England
A brilliant rock climber who made important ascents in the Mont Blanc region and is said by many to be the father of modern Alpinism.
First ascents :-
The Zmutt Ridge of the Matterhorn 1879, with Alexander Burgener, J.Petrus and A.Gentinetta
North Summit of the Grands Charmoz 1880, with A.Burgener and Benedikt Venetz
The Grepon by the Nantillons Face 1881, with A.Burgener and B.Venetz
In spite of his achievements he was refused membership of the Alpine Club for several years, probably on class grounds.
During an expedition to Nanga Parbat, with Hastings and Collie, he and two Gurkhas disappeared whilst reconnoitring .
Publications :
My Climbs in the Alps and Caucasus (1895)
Tiger in the Snow (1967), by W.Unsworth
History of expeditions on Nanga Parbat.
Five years before the end of the 19th century, the eminent English mountaineer Albert Frederick Mummery, reached 6 thousand meters on the Diamir wall, probably even one kilometer higher. He certainly felt very disappointed when his companion?s sickness and scarcity of food forced him to give up. This tall gentelman dressed in frock coat, white shirt, and canvas jacket was convinced, that he needs only one day of climbing to reach the peak. He could not have imagined that it will take next 58 years to conquer that mountain. Mummery, undispirited by the failure, decided to attack the mountain from the other side, from the Rakhiot Valley. It was not known at that time, that the walls of Nanga Parbat are the highest on the Globe. Soon, he perished with the porters on one of the glaciers.
35 years passed, and German climbers faced their destiny. In two out of five expeditions, which took place between the wars, 10 leading German climbers and 15 Sherpas from Nepal lost their lives. Subsequent expeditions discovered the trails of earlier tragedies. The letter asking for help, carried down from from the upper camp reached its addressee afret 4 years,when he while climbing the mountain found his companion?s cold body. The body of Willy Merkel- the leader of the expedition was found covered by Sherpa, who till last moments tried to warm up dying master.
After World War II Germans again begun to attack Nanga Parbat, participating in the deadly competition with the English, the French, and Italians.with the purpose to climb virgin 8 thousand meters high mountains. Willy Merkel?s stepbrother- Karl Maria Herligkoffer, organised 10 international expeditions. Every second year he appeared at the feet of the ?German Mountain?, as it was then named. Herman Buhl of Austria (participant of the first of Herligkoffer?s expeditions) was the first man to reach the peak in 1953. However, Herligkoffer did not finish his duel with the mountain. He gave up not earlier than after having conquered the moutain from three directions, i.e. from the valleys of Rakhiot, Diamir, and Rupal. This last wall is 4.5 km long.
Reinhold Messner, the first man to win the Crown of Himalaya that is all fourteen 8 thousand meters high mountains, fought with the Diamir wall for a couple of years. The avalanche on this wall claimed the life of his brother, when while descending the mountain they almost reached the base. Reinhold attacked the mountain for next three times . His last attempt was succesful, although the mountaineer experienced the earthquake on the Diamir wall. His brother was never found.
NANGA PARBAT PEAK
Other names/spellings Nangaparbat Peak
Diamir
Elevation (feet) 26,658
Elevation (meters) 8,125
Location Gilgit, Baltistan
Pakistan
Latitude 35? 14' N
Longitude 74? 36' E
Best Climbing Months June, July, August, September
Year First Climbed 1953
First Climber(s) Herman Buhl
Convenient Center(s) Chilas, Pakistan
Nearest Major Airport Rawalpindi, Pakistan
Importance 9th Highest Mountain In The World.
Best Trek Season June To September
Of the numerous peaks situated in the Himalayan region, Nanga Parbat peak has passed into mountaineering lexicon. Standing remote and aloof, at the western edge of these ranges, Nanga Parbat's name that means “the Naked Mountain”, describes the peak better than anything else. Its sharp ridges can hold little snow and this unclad appearance is most unusual in zones where all other mountains are wrapped in white snow. It is considered the ninth highest mountain in the world.
The Murder Mountain
Nanga Parbat is much favoured by most climbers, but it were the Germans, who gave it the name, Murder Mountain. The explorer, Albert Frederick Mummery, was the first to venture on this mountain. Daunting and wild, bearing the onslaught of gnawing wind and torrential rain during the monsoons, Nanga Parbat is full of the dangers of the unknown. The Sherpas, localites of the Himalayan region call Nanga Parbat, “the maneater” or the 'Mountain of the Devil'. No other peak has claimed lives with such sickening regularity and the list of tragedies is heart-wrenching. In the last century, roads have been built in the Karakoram range, but little else has changed in this region.
Nanga Parbat has a height of 8126 meters/26,660 ft. It has three vast faces. The Rakhiot (Ra Kot) face is dominated by the north and south silver crags and silver plateau; the Diamir face is rocky in the beginning. It converts itself into ice fields around Nanga Parbat peak. The Rupal face is the highest mountaintop in the world.
Reinhold Messner, a living legend in the sport of mountaineering from Italy, says that "Every one who has ever stood at the foot of this face (4,500 meters) up above the 'Tap Alpe', studied it or flown over it, could not help but have been amazed by its sheer size; it has become known as the highest rock and ice wall in the world!"
The Nanga Parbat peak was discovered in the 19th century by Europeans. The Schlagintweit brothers, who hailed from Munich, Germany came in 1854 to Himalayas and drew a panoramic view which is the first known picture of Nanga Parbat. In 1857 one of them was murdered in Kashgar and this was the beginning of curse of Nanga Parbat.
첫댓글 불어아는분은 해석좀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