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몬 스틱
현장비평가가 뽑은 2009
올해의 좋은소설
11편 중 1편
『현대문학』출판
고 은 주
1967년 부산 출생.
1995년『문학사상』등단.
소설집『칵테일 슈가』.장편소설『아름다운 여름』
『여자의 계절』『현기증』『유리바다』『신들의 황혼』『시간의 다리』등.
<오늘의 작가상>수상.
쪽지가 도착한 것은 시나몬 스틱을 휘젓고 있던 때였다. 처음 컴퓨터 앞에 앉았을 때에는 쪽지 알림창의 숫자가 0이었는데 잠시 부엌에 갔다 오니 숫자가 1로 바뀌어 있었다. 카푸치노를 마시려는 순간 계피향이 느껴지지 않는 걸 깨닫고 다시 부엌에 다녀온 터였다.
‘이 쪽지를 받는 분이 김미연 씨가 확실하다면 답장 부탁드립니다. 알려드릴 얘기가 있습니다.’
쪽지를 열면서 카푸치노 한 모금을 다시 마셔보았다. 여전히 계피향이 느껴지지 않았다. 시나몬 스틱을 대여섯 번이나 휘저었는데도 불구하고.
‘제가 이렇게 쪽지를 보내는 것은 김미연 씨가 섣불리 간통죄 등으로 일을 복잡하게 만들 사람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자세한 얘기는 차차 하겠으니 일단 본인 확인을 부탁드립니다.’
이제는 업데이트도 제대로 하지 않는 미니홈피에 딸려 있는 쪽지였다. 요즘 내가 애용하는 블로그에는 가족 얘기를 쓰지 않지만 미니홈피에는 가족사진을 제법 올려두고 있었다. 그 사진들 속의 내 모습이 아마도 신중하거나 소극적으로 보인 모양이었다.
답장버튼을 누르자 내용입력창이 확 펼쳐졌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기라도 한 듯이 나는 흠칫했다. 그 순간, 컴퓨터 키보드의 Y 자판과 U 자판 사이에 끼어 있는 작은 먼지덩어리가 눈에 들어왔다.
훅, 하고 힘주어 입김을 불어보았지만 먼지덩어리는 Y 자판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버렸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Y 자판을 뜯어냈다. 그 과정에서 작은 먼지덩어리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키보드 곳곳을 살펴보던 나는 이내 포기하고 카푸치노를 마시기 시작했다. 계피향은 여전히 느껴지지 않았다. 에스프레소와 우유의 냄새는 느껴지니 코가 막힌 것도 아니었다. 나는 한동안 코를 킁킁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시나몬 스틱이 들어 있는 유리병을 열자 계피향이 흐릿하게 풍겨 나왔다. 뚜껑을 열 때마다 한꺼번에 밀려나오던 강렬한 계피향을 꽤 좋아했었는데······. 아마도 오랫동안 유리병 뚜껑이 열려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카푸치노를 만들어 먹은 지도 꽤 오래된 것 같았다.
하나씩 비닐봉지에 싸여 있는 시나몬 스틱을 굳이 다 꺼내어 한꺼번에 유리병에 담은 것은 인테리어 효과를 위해서였다. 그러니 향기 따위야 어떻든 상관없었다. 나는 다시 얌전히 유리병의 뚜껑을 닫았다.
뚜껑을 닫고 나니 답장을 쓸 마음이 생겨났다. Y 자판과 U 자판 사이에 끼어 있던 작은 먼지덩어리의 행방은 여전히 궁금했지만 나는 마음을 다잡고 키보드를 끌어당겼다.
‘저는 김미연입니다. 모든 것을 정확히 말해주세요. 어떤 얘기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쪽지를 보내고 카푸치노를 다 마시고 난 뒤, 청소를 시작했다.
스무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먼지는 곳곳에 내려앉아 있었다. 스무 시간 전에 했던 것과 똑같은 순서로 나는 다시 청소를 했다. 진공청소기에 먼지제거용 말총 브러시를 끼우고 집 안의 장식품들을 쓸어내리는 일에 특히 공을 들이는 것도 똑같았다. 좁은 노즐을 이용해서 틈새의 먼지를 제거하는 일로 청소를 마무리한 것까지도.
타인의 집을 방문할 때, 나는 늘 먼지를 살펴본다. 아무리 인테리어가 잘된 집이라도 먼지가 눈에 띄면 세련된 장식 따윈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먼지는, 시간의 흔적이다. 아무것도 닿지 않은 시간의 흔적.
나의 남편은, 먼지에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이다. 당연히 청소 같은 건 하지 않고도 살 수 있다. 그동안 누군가가 대신 치워줬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는 먼지가 굴러다니는 환경에서 태연하게 지낼 수 있는 인간형이기도 하다.
물론, 먼지가 굴러다니는 곳에 그가 있는 모습을 내가 직접 목격한 적은 없다. 무엇보다도 내가 그런 환경을 참지 못한다. 하지만 정말 그런 곳에 있게 된다면, 그는 분명 태연하게 지낼 것이다. 결혼한 지 9년. 그 정도쯤은 남편에 대해 짐작할 수 있다.
본체의 뚜껑을 열고 커다란 비닐봉지를 씌운 뒤 청소기를 뒤집었다. 필터를 통해 걸러진 먼지들이 비닐봉지 속으로 쏟아져들어가는 동안, 어김없이 미세먼지가 눈앞을 떠다녔다.
나는 비닐봉지를 단단히 묶고 나서 그 주변에 다시 청소기를 돌렸다. Y 자판과 U 자판 사이에 끼어 있던 작은 먼지덩어리는 무사히 비닐봉지 속으로 들어갔으리라 확신하면서.
말하자면 그 아이는, 남편 애인의 옛 애인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참으로 통속적이고 심란한 관계였다.
‘답장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예상했던 대로 차분하고 친절한 분이군요. 저는 김미연 씨 남편이 현재 만나고 있는 여성의 친구입니다.’
쪽지의 도입부는 진부했다. 지금은 그 여성의 친구이지만 얼마 전까지는 연인관계였고 나의 남편 때문에 사이가 멀어졌다는 설명 또한 진부했다. 그 여성이 남편보다 무려 열네 살이나 어리다는 얘기는 진부함의 절정이었다. 그런 진부한 내용들로 쪽지 한 통을 다 쓴 뒤 그 아이는 당돌한 질문들로 새로운 쪽지를 채웠다.
‘저는 단지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하고 싶을 뿐입니다. 우선, 당신의 남편이 제 친구와 깊은 관계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 그리고 김미연 씨 부부가 이름만 부부일 뿐 사실상 남남처럼 살고 있다는데, 사실입니까? 금전관계가 얽혀서 현재 헤어지지 못할 뿐 2년 안에는 다 마무리 짓고 이혼한다는 것도 사실입니까?’
풋, 웃음이 나왔다. 묘하게 흥미롭기도 했다. 슬쩍 미소까지 지은 채 나는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저는 남편으로부터 당신의 친구에 대해 들은 바가 없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부부는 원래 남남입니다. 이것은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세 번째 질문은, 금전관계가 무엇을 말하는지 몰라서 답할 수가 없군요. 부부는 경제적 공동체이기 때문에 어떤 부분이든 금전적으로 얽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름만 부부일 뿐이라서 곧 헤어질 거라는 말은, 젊은 여성을 농락하는 유부남들의 공통적인 변명이 아니던가요? 그들이 약속하는 기간 또한 대개 2년이라고 하더군요.’
답장을 하지 않는 게 나았을까? 홀린 듯 단숨에 길게 써 내려간 내 답장에 그 아이는 이렇게 짧은 쪽지를 보내왔다.
‘그렇다면 부부란 과연 무엇일까요?’
거기서 멈추었어야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맹렬한 추진력이 나를 떠미는 것 같았다. 나는 의아해하면서도 답장버튼을 눌렀다.
‘그 여성과 친구라니 아마도 나이가 비슷하겠군요. 부부란 과연 무엇인지 말해주어도 이해하기 힘든 나이입니다.’
이번엔 내가 짧게 썼고 그 아이가 긴 답장을 보내왔다.
‘그래요. 당신들보다는 우리가 어립니다. 그래서 당신 남편은 제 친구를 농락하고, 당신은 나를 놀리는군요. 당신들 때문에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를 혐오하게 될까봐 두렵습니다. 부부란 과연 무엇인지 말씀해주세요. 그것을 이해하고 말고는 그다음 문제입니다. 우선, 당신이 생각하는 결혼이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그쯤에서 나의 실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어이없게도, 이 순진한 아이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참으로 통속적이고 심란한 욕망이었다.
만날 날짜와 시간, 그리고 약속장소를 쓴 쪽지를 보내놓고 돌아서자 생선 굽는 냄새가 났다. 어디선가 꽁치를 굽는 것 같았다. 아래층인지 위층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냄새는 아파트 전체를 휘감을 듯 진하게 풍겨오고 있었다.
주말마다 커피원두를 볶는 그 집은 아니었으면 싶었다. 꽁치를 굽고 커피도 볶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왠지 싫었다. 꽁치만 굽거나 커피만 볶으면서 살아야 공평한 것이 아닐까? 그날따라 나는 그렇게 억지를 부리고 싶었다.
그날 밤, 윗집에서 들려오는 교성은 유난히도 심했다. 안방 욕실을 통해서 들려오는 그 교성은 윗집에 사는 부부가 내는 소리임에 분명했다. 엘리베이터에서도 손을 꼭 잡고 있던 부부였다.
“의외의 반전이 있겠지?”
내 옆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던 남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시 묻거나 대답을 기다리는 게 싫어서 나는 서둘러 덧붙였다.
“저 교성이 가짜라든가, 두 사람이 부부가 아니라든가······.”
교과서적인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날이었다.
“이 아파트도 그렇잖아. 조용하다고 유별나게 광고를 해대더니 막상 입주해보니까 층간소음이 장난 아니잖아.”
이미지와 실체가 일치하는 경우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든 날이었다. 나의 투정과 윗집의 교성을 무심히 듣고만 있던 남편은 이윽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소리가 신경 쓰이면 욕실 문을 닫아.”
“쇼윈도 부부군요.”
“맞아. 디스플레이 커플이라고도 하더군.”
“위장 부부라는 표현도 있던데요.”
“그건 좀 심한 표현이네.”
그 아이와 마주 앉자 반말이 절로 나왔다. 예상했던 대로 나보다 한참 어리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결혼의 순결에 집착하는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순진한 얼굴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쇼윈도 부부만 그렇게 가식적일까? 누구도 어느 정도는 자신을 포장하면서 사는 게 아니겠어? 결혼생활은 인생과 다를 바 없다고 봐.”
“그만큼 남들의 삶에 관심이 많고 뭐든 비교하면서 살기 때문이겠죠. 그 친구만 해도 김미연 씨의 홈피를 매일 드나들면서 관심을 가졌어요. 내가 이 여자보다 못한 게 어떤 부분인 것 같냐면서 저한테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었죠.”
“내 남편 홈피를 통해 찾아온 모양이군. 그런데도 순진하게 거기에 있는 글과 이미지들을 믿었다니······. 남편과 연결된 홈피에 누가 솔직한 글과 사진을 올리겠어?”
“그러게 말이에요. 저도 그런 얘길 수차례 했어요. 저건 모두 다 설정이다. 이상한 경쟁심 갖지 말고 그 남자랑 빨리 정리해라······. 그랬더니 저를 정리해버리더군요.”
의외로 말이 잘 통하는 아이였다. 물기가 어린 듯 반짝이는 눈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과거를 회상할 때면 그 반짝임이 더해졌다. 그러다가 도저히 포기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질문을 할 때면 순간적으로 빛이 뿜어져나오는 것도 같았다.
“결혼은 그런 게 아니잖아요? 어떻게 그렇게 살 수가 있는 거죠?”
대화가 잘 진행된다 싶다가도 그런 질문으로 어느새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이 나는 답답하면서도 흥미로웠다.
“결혼이 어떤 건데? 어디 책 같은 데 정답이 적혀 있어?”
몸을 뒤로 젖히고 팔짱까지 낀 자세로 나는 느긋하게 되물었다. 그 아이가 순간적으로 아무 말도 못하는 것이 재미있어서 거듭 질문을 던졌다.
“결혼 전에도 후에도 순결해야만 하는 건가? 그게 가장 이상적인 거야? 때를 묻히면 그냥 폐기처분해버려야만 하나?”
그 아이는 여전히 아무 말도 못하고 약 오른 듯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소설이나 드라마가 문제야. 결혼에 대한 환상을 너무 많이 심어주거든. 삶에 대한 환상 또한 마찬가지지. 그렇게 완벽하게 깨끗하고 아름다운 모습은 실제로 거의 존재하지 않는데······. 인생이 뭐 그렇게 대단한 줄 알아?”
비아냥거릴수록 재미있어서 나는 슬며시 미소까지 지었다. 그러자 이윽고 그 아이가 말했다.
“인생이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라는 말이군요. 결혼생활이 그렇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군요.”
중얼거리듯 말하던 그 아이는 뒤통수를 치듯이 덧붙여 내게 물었다.
“그렇다면 나랑 잘 수 있어요? 대단하지 않은 인생, 아무것도 아닌 결혼생활이라면.”
우리는 같이 잔 지 오래되었다.
남편과 나, 우리는 늘 함께 같은 침대에서 잠이 들지만 같이 잔 지는 오래되었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이제 와서 새삼스레 같이 잔다 해도 나는 아무것도 제대로 느끼지 못할 것이다. 나의 감각이 무디어진 것 또한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되었다.
처음엔 후각부터 무디어졌다. 지독한 감기로 고생하면서 아무런 냄새도 맡지 못하는 상황을 겪으면서부터였다. 마침 부부동반으로 집들이에 초대받아 갔었는데 한 상 가득 차린 음식을 칭찬하려다 보니 연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후각이 마비되면 음식의 맛도 잘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날, 사람들은 내 후각에 문제가 생긴 것을 알지 못했다. 나는 그게 재미있어서 코감기가 떨어질 때까지 냄새를 제대로 잘 맡는 척하고 다녔다. 그러다가 감기가 낫고 후각이 돌아온 뒤에도 나는 여전히 연기를 하고 다녔다. 아니, 지금까지 내가 습관적으로 연기를 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내가 칭찬해온 음식들은 냄새와 맛이 제대로 느껴져도 실제로는 그다지 맛있지 않았다.
후각과 미각에 대해 그런 깨달음을 얻고 나니 다른 감각도 마찬가지였다. 청각도 시각도 촉각도 그동안 내게는 모두 습관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음악이 참 좋군요, 정말 멋진 풍경이에요, 손이 참 부드럽구나······. 습관적으로 감탄하기는 했으나 나는 진정으로 좋은 것을, 멋진 것을, 부드러운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진정으로 감탄해서 감탄사를 내뱉었던 적이 언제였는지 그저 아득하기만 했다. 이제 와서 남편과 잔다고 한들 그 아득함으로 무엇을 느낄 수 있을 것인지······.
“여기가 어디예요?”
그 아이는 당황하고 있었다.
“보면 모르겠어? 우리 집이야.”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누르면서 나는 즐거웠다.
“이럴 것까지는 없잖아요.”
당황하는 그 모습을 바라보는 느낌은 정확히 즐거움이었다. 재미있고, 흥미로운······.
“뭐가? 이만큼 깨끗하고 안전한 장소는 없어.”
나는 그 아이의 등을 떠밀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리 비싼 호텔이라도 우리 집보다는 먼지가 많을 거야. 수건이나 침대시트의 위생상태는 말할 것도 없지.”
부엌으로 가서 카푸치노를 만들면서 나는 다소 큰 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게다가 호텔은 웬만한 방음장치로는 차단하기 힘든 소리들이 들려오잖아. 그 낯 뜨거운 소리를 의식하 는 것도, 어쩔 수 없이 비교하게 되는 것도, 나는 싫어. 여긴 밤에만 간혹 교성이 들릴 뿐이야.”
“그건 뭐예요? 담배도 아니고······.”
집 안 곳곳을 둘러보던 그 아이가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와서 물었다.
“아, 이건 계피 막대야. 계피향을 내고 싶을 때 가루를 넣으면 아무래도 맛이 텁텁해지잖아. 그래서 이렇게 계피를 작게 말아 만든 막대를 넣고 휘저은 다음에 건져내는 거야.”
시나몬 스틱을 담은 유리병의 뚜껑을 열던 나는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이렇게 우아한 포즈로 말이지.”
두 잔의 카푸치노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시나몬 스틱 하나를 꺼내어 천천히 휘젓는 동안, 그 아이는 뚫어져라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너무 기대하지 마. 이건 향이 다 날아가버렸거든. 유리병 뚜껑을 제대로 닫지 않고 방치하는 바람에······.”
“그런데 왜 그걸 계속 쓰는 거죠?”
“그냥 스틱으로 쓰는 거야. 에스프레소와 우유 거품이 골고루 섞이도록······. 향이 날아가 버려도 이렇게 쓸모는 있어. 폼 잡고 휘저으면 멋있기도 하잖아? 커피라는 게 꼭 맛으로만 먹는 것은 아니니까.”
“이 결혼처럼요? 향기는 날아가버렸지만 겉으로는 멀쩡한······. 이 결혼도 처음엔 향기로웠겠죠? 사랑해서 결혼했나요? 아니면, 중매?”
아득한 기억이었다. 커피잔 속에서 건져낸 시나몬 스틱을 내밀며 나는 대답 대신 말했다.
“그래도 잘 맡아봐. 계피향 비슷한 게 느껴질지도 몰라.”
하지만 그 아이는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혐오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시나몬 스틱을 바라보기만 했을 뿐.
“어쨌든 중요한 건, 향기가 사라져도 모양은 그럴듯하다는 거야.”
서둘러 말하면서 나는 시나몬 스틱에 코를 대보았다. 흐릿한 계피향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설렘도 희망도 없는, 몸에 베어버린 습관처럼.
“하지만 본질이 사라진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본질? 그건 누가 정하지? 시나몬 스틱의 본질이 냄새라고 누가 그랬어? 어떤 사람은 커피 속에 녹아든 미묘한 계피맛을 더 좋아할 수도 있어. 우아하게 스틱을 휘젓는 과정을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솔직히 고백하세요. 이렇게 좋은 집에서 멋 부리고 살고 싶어서, 사람들에게 멀쩡하게 보이고 싶어서, 알면서도 눈감아준 거죠?”
시나몬 스틱을 손에 쥔 채 나는 그 아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렇게 살다가 식당이나 마트 같은 데서 일하기도 싫을 테고, 이혼녀라고 무시당하면서 살기도 싫을 테고······. 삶에 대해 너무 비겁한 거 아니에요?”
다시 원점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답답하면서도 흥미로웠다.
“빙고! 나이도 어린데 어찌 그리 잘 알아? 맞아. 돈 잘 버는 남편, 남주기 아까워. 그러니까 그 친구도 내 남편을 욕심내잖아. 게다가 나한테는 아이가 있고 그 친구에게는 사랑이나 희망 같은 게 있겠지. 지나온 시간들이 아까워서라도 헤어지기 힘들어. 하지만 과연 그게 다일까? 살면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일들이 한두 가지 이유만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어리다는 거야. 인생을 좀 살아봐야 한다는 거야.”
나는 또박또박 말했고 그 아이는 발끈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게로 달려드는 그 아이는 싸울 듯한 기세였다. 시나몬 스틱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어디론가 굴러갔다.
“어때요? 이래도 내가 어린가요?”
곧바로 돌진해 들어오면서 그 아이는 물었다. 거친 흔들림에 몸을 맡기면서 나는 가까스로 웃음을 참았다.
“어때요? 대체 내가 당신 남편보다 못한 게 뭔가요?”
그 질문에는 더 이상 웃음이 나지 않았다. 더욱 거칠게 흔들리면서,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비교하지 마. 비극은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거야.”
“내가 훨씬 더 못하나 보군요.”
“그런 얘기가 아니야. 남편이 어떤 식으로 했었는지 난 이제 기억도 나지 않아.”
“그게 가능해요?”
“가능하지. 행동은 기억해도 느낌은 떠오르지 않아. 살다 보면 그렇게 돼. 살아봐. 그럼 내 말을 이해하게 될 거야.”
“또 그런 소리······.”
“자, 이제 집중하자. 난 지금 내 느낌에만 집중하고 싶어.”
내 몸의 모든 감각이 살아나길 기대하면서 눈을 감았다. 그러나 딱딱한 식탁의 질감만이 등과 엉덩이로 느껴질 뿐이었다. 그리고 식탁이 두 사람의 체중을 감당하며 삐걱거리는 소리만이······.
안간힘을 쓰다가 실눈을 떴을 때, 하필이면 시나몬 스틱이 눈에 들어왔다. 거실로 향하는 길목에 놓여진 장시장 아래쪽이었다. 커피에 젖은 부분이 짙은 갈색으로 변했기에 거기 묻은 회색 먼지는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저 장식장 아래쪽에 원래 먼지가 많았던 것일까? 청소기의 사각지대를 발견한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 순간, 내 몸 위로 무너지듯 그 아이가 체중을 실어왔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 사실을 깨닫자 헛웃음이 나왔다. 참으려고 했지만 웃음은 오히려 명랑하게 터져나오고 말았다. 웬일인지 그 아이도 덩달아 웃음을 터뜨렸다. 식탁 위에 그대로 뒤엉킨 채로, 우리는 한동안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먼지는 컴퓨터 모니터나 키보드에만 쌓이는 게 아니었다. 본체 안쪽 깊숙한 곳, 하드디스크 속의 후미진 폴더 안에도 대담하게 뭉쳐진 먼지덩어리가 있었다.
나는 우선 삭제버튼을 눌렀고, 휴지통 폴더로 들어가서 비우기버튼을 눌렀다. 온갖 형태의 성행위가 나열된 동영상들로 채워진 폴더 전체를 비우고 싶었지만, 그중 단 하나만을 영구삭제했다. 남편의 취미생활은 존중해줘야 했기에.
하지만 남편이 직접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동영상은 지울 수밖에 없었다. 명색이 아내인데 그런 것까지 존중해줄 수는 없었다. 그도 명색이 남편인데 그런 것까지는 집 안의 컴퓨터 속에 넣어두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삭제한 동영상은 좀처럼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애초에 남편의 취향을 하나하나 확인해본 것이 잘못이었다. 후미진 폴더의 정체를 알아차렸을 때, 그냥 닫았어야 했는데······. 잠시 머뭇거리다가 기어이 파일을 하나씩 열어보게 된 것이 남편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는지 동영상에 대한 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뇌리에 똬리를 튼 동영상은 무한반복되며 한동안 나를 괴롭혔다. 분노라든가 질투가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다만 궁금했다. 동영상 속의 그녀가 그 아이의 친구인지 아닌지.
그리고 나는 궁금했다. 동영상 속에서 열정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남편은 그 모든 것을 제대로 느끼고 있는 것인지······. 정말 그렇다면 부러운 일이었다. 나에게서는 이미 사라져버린 정서와 감각이 남편에게는 아직까지 남아있다면, 그것은 맹렬히 부러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도 역시 포즈만 즐기고 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지만. 동영상은 그 포즈의 흔적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윈도쇼핑을 즐기나 봐요. 쇼윈도 부부답네요.”
“그래서 나는 아이쇼핑이라는 엉터리 영어를 더 좋아해.”
쇼윈도는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남편의 거짓말도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5박 6일의 홍콩 출장. 그 기간 동안 그녀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이제는 연락조차 잘 되지 않는 친구라고 했다. 그런데도 왜 내게 시비를 걸어왔던 것일까? 그것으로 도대체 무엇을 얻으려고······.
“의협심 같은 거였다고 해두죠. 어떤 형태로든 세상에 불륜이 존재하는 꼴을 볼 수 없었어요.”
“못 먹을 밥에 재나 뿌려보자는 심사는 아니었고?”
“재 뿌려도 소용이 없네요. 다들 그걸 먹고 있으니······.”
“난 이제 조금씩 신경이 쓰이는 것 같은데? 그 친구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이렇게 궁금해하고 있잖아.”
“그러면서도 계속 먹고 있잖아요. 아주 더러운 것만 살살 털어내고 끝까지 먹어보겠다는 생각이잖아요.”
통화하는 내내 그 아이는 화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만나자는 나의 제안은 거절하지 않았다.
“만나자고 말은 했지만 정말 나올 줄은 몰랐어.”
쇼윈도 예닐곱 개를 지나친 뒤, 나도 모르게 빈정거렸다. 눈앞의 쇼윈도를 바라보며 그 아이가 우뚝 멈춰 섰다.
“당신들의 삶이 이해가 될 때까지는 만날 거예요.”
“나한테서 뭔가 해답을 얻으려고 하지 마. 이런 삶을 직접 살아보기 전에는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거야. 살아봐야 안다니까.”
그 아이는 한동안 말없이 쇼윈도 너머에 시선을 두더니 이윽고 내게 물었다.
“그럼, 당신은 왜 다시 날 만나자고 했나요?”
“마찬가지야. 널 이렇게 만나고 있는 이유 또한 네가 이렇게 살아보기 전에는 이해할 수 없어.”
말해놓고 보니 만병통치약 같았다. 나이가 더 많다는 것, 그만큼 더 삶의 때를 묻혔다는 것은 상대방의 말을 무조건 막아버리기에 아주 적합한 처방이었다.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왜 다시 그 아이를 불러냈는지, 사실은 나도 알 수 없었지만······.
잠시 나를 쏘아보던 그 아이는 다시 쇼윈도로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을 따라가보니 갈색 크로스백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서둘러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괜찮아요. 그냥 눈에 띄어서 쳐다봤을 뿐이에요.”
계산을 끝내고 크로스백을 손에 쥐여줄 때까지 그 아이는 계속해서 손사래를 쳤다.
“날 위해서 받아줘. 쇼윈도 너머의 물건을 사고 싶어진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 정말이야. 쇼핑의 진짜 즐거움도 잊어버린 지 오래거든.”
내가 정색을 하고 말하자 그 아이는 물끄러미 크로스백을 내려다보다가 못 이기는 척 받아 들었다. 그리고 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우리 집으로 갈래요? 같이 사는 후배가 있지만 잠시 내보낼 수 있어요. 생각보다는 깨끗할 거예요.”
그 방에 머물렀던 시간은 고통스러웠다.
원룸이라고 하지만 매우 좁고 열악한 시설의 그 방은 예전의 자취방을 단숨에 떠올리게 했다. 대학시절, 친구 둘과 함께 가난한 몸을 뉘었던 자취방······. 다시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그 산동네······.
쿨한 척 남편의 외도를 눈감아주고 있지만, 사실은 내가 무엇 때문에 모든 것을 참고 있는지 그 시절의 기억은 알고 있었다. 나는 다만 기억을 억눌러왔을 뿐이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았으므로. 애써 이루어낸 이 모든 것을 잃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런데 나는 어느새 낯선 방에서 그 시절로 완벽하게 돌아가 먹먹해하고 있었다. 나보다 열 살이나 어린 남자와 값비싼 크로스백을 담은 쇼핑백, 그리고 각자 벗어놓은 옷들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는 방 안에서.
그러나 되살아난 것은 기억만이 아니었다. 고통도. 그 고통을 느끼는 감각도,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좁은 방 안에서 나는 거짓말처럼 교성을 질러댔다. 그 순간만큼은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그 친구 사진, 보여줄까요?”
바닥에 어질러놓았던 옷들을 다시 챙겨 입는 동안, 어색한 침묵을 참지 못한 듯 그 아이가 말했다. 돌아보니 이미 책상 서랍 쪽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아니. 열지 마.”
나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내 궁금증을 풀어줄 목적이라면, 그 서랍 열지 않아도 돼. 네 과거를 돌아볼 목적이라면 더더욱 그러지 마. 그래 봤자 소용없는 일이니까.”
이어진 내 말에 그 아이는 얌전히 서랍에서 손길을 거두었다.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는 건 고통스럽고 무의미한 일이야. 물론 나도 가끔은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지만······.”
나는 다독거리듯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그 친구에 대해서 한동안 궁금했었지만 이젠 아니야. 궁금해도 덮고 있어야 한다는 걸 나는 알아. 오래전부터 그래왔으니까.”
그리고 오래전······ 그날의 이야기를 나는 더듬더듬 해나가기 시작했다. 왜 그랬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고통스럽지만 한 번씩 되살려내던 그날의 기억을 다시금 환기해야 할 때가 되어서였는지, 단지 서랍을 열지 않기 위해서였는지······.
“비밀번호를 눌러도 현관문이 열리지 않았어. 집에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결국 열쇠수리공을 불렀지. 문을 열었더니 뜻밖에도 집 안에 남편이 있었어. 오래전, 아주 오래전 일이야.”
그때 현관에 놓여져 있던 베이지색 하이힐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최악의 상황으로 예상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었다. 열쇠수리공이 떠나자마자 나는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편은 흥분한 나를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작게 말했다. 그 말을 듣기 위해서 나는 소리 지르는 걸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지금 저 안방에는 아무도 없어. 그렇게 믿으면 현실이 되고, 믿지 않으면 모든 게 끝장이야. 어때? 믿을 수 있겠지? 그렇다면 잠시 창밖을 바라봐. 이렇게 몸을 돌리고 말이지.”
나는 안방 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남편은 내게로 다가와 거실 창문 쪽으로 내 몸을 돌려세웠다. 덜덜덜 온몸이 떨려왔다.
“놀라운 얘기군요.”
“그때 안방 문을 열어야 했을까? 애초에 현관문을 열지 말아야 했을까? 지금도 나는 잘 모르겠어.”
그날 거실 창밖으로 보았던 먼 하늘의 구름만이 또렷이 기억날 따름이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던, 손에 잡힐 듯 선명했던······. 그리고 안방 문을 여는 소리, 누군가 살며시 걸어가는 소리, 잠시 후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 등 뒤에서 서늘하게 들려오던······.
“호기롭게 현관문을 열었지만 안방 문은 차마 열 수가 없었어. 진실을 외면하고 싶었으니까. 나는 그렇게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가 곧바로 닫아버렸던 거야. 가장 중요한 것을 그 안에 넣어둔 채로”
“그걸 다시 연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아니, 다시 열린다면······.”
어느새 뺨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그 아이가 내게 물었다.
“글쎄······. 어쨌거나 이건 내가 처음으로 남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야. 여태껏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던 기억이지.”
항상 물기 어린 듯 반짝이는 그 아이의 눈이 커지는가 싶더니 좀 더 축축해지는 것 같았다. 착각이었을까?
“그때 당신 집에서 마셨던 카푸치노 말이에요. 다 식어버린 후에 마셨는데도 계피향이 났어요. 계피 막대는 확실히 계핏가루와 다르더군요. 유리병의 뚜껑이 열렸다고 해서 설마 그 향이 날아가버렸겠어요? 맛있었어요, 카푸치노.”
그 아이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실려 있었다. 그것도 착각이었을까?
Y 자판과 U 자판 사이에서 또다시 작은 먼지덩어리가 보인다.
지난번에 보았던 그것일까? 아니면, 다시 생겨난 것일까? 아무튼 이번엔 섣불리 덤벼들지 말아야지.
틈새 전용 노즐을 청소기에 끼우는데 남편이 조용히 내 곁으로 다가온다.
“오랜만에 미니홈피에 가봤더니 이상한 쪽지가 와 있더군. 한 번 보겠어?”
“아니. 남의 쪽지를 왜 내가 봐? 이상하면 그냥 지워버려.”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채 나는 서둘러 키보드를 청소하고 부엌으로 향한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
“쪽지를 보내온 사람은, 의협심 강한 청년이야.”
컴퓨터 앞에 앉는 것 같았던 남편이 어느새 부엌 쪽으로 다가오며 말한다. 나는 분주히 손을 놀려 에스프레소 커피를 뽑고 우유 거품을 만든다.
“그 청년은 당신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더군. 우리에 대해서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러나 통속적으로 예측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놀라운 건, 그렇게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내게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았다는 거야. 난 그게 더 큰 함정이 아닐까 싶어.”
카푸치노가 완성되었다. 나는 두 잔의 커피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시나몬 스틱을 컵에 담근 뒤 최대한 우아한 포즈로 휘젓기 시작한다. 언제나 포즈가 중요하다. 이런 상황에서는 더욱더.
“함정 같은 건 없어. 우리를 아는 청년도 없어. 그렇게 믿으면 현실이 되고, 믿지 않으면 모든 게 끝장이야.”
우아한 포즈에 어울리는 우아한 목소리를 지어내며 나는 말을 이어 나간다.
“어때? 믿을 수 있겠지? 그렇다면 여기로 와.”
남편은 여전히 부엌 입구에 우뚝 서 있다. 가능할까? 가능하리라 믿는다. 그도 삶에 욕심이 많은 사람이니까. 포즈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그런 어수선한 쪽지는 지워버려. 컴퓨터의 구석진 폴더에 있는 그 어수선한 동영상은 내가 대신 지웠어.”
그리고 나는 남편에게 우아한 삶을 권유하듯 커피를 내민다. 비로소, 그가 뚜벅뚜벅 식탁으로 다가온다.
“카푸치노는 오랜만이군.”
“시나몬 스틱이 냄새가 달아나서 향취는 덜할 거야.”
식탁에 앉은 그는 킁킁대며 카푸치노의 냄새를 맡아본다.
“덜한 게 아니라 형편없어. 오히려 아무 냄새도 안 나는 게 더 좋을 텐데······. 김빠진 그걸 왜 휘저었어?”
“그래도 겉보기엔 멀쩡하잖아.”
“다 갖다 버려. 그까짓 거 새로 사면 되지 뭘 그렇게 미련을 두는 거야?”
남편의 태도도 너무 단호해서 나는 새삼 카푸치노의 냄새를 맡아본다. 미묘하게 비틀어졌으나 틀림없는 계피향이 느껴진다. 새삼 음미해본 맛 또한 나쁘진 않다. 하지만 나는 이제 나의 감각을 믿을 수 없다.
컵에서 건져올린 시나몬 스틱까지 코에 갖다 대고 냄새를 맡아보는 동안, 남편은 어느새 카푸치노를 다 마시고 일어선다. 그리고 컴퓨터가 있는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이윽고 방문 닫히는 소리가 몸 전체로 느껴진다. 내가 함부로 열었던, 어떤 거대하고 위험한 상자가 닫히는 소리처럼.
그러나 상자는 또 언제 열릴 지 모른다. 저 문 또한 언제 다시 벌컥 열릴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괜스레 방문을 노려보다가 두 눈을 질끈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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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김윤식(문학평론가 ‧ 서울대 명예교수)
미약媚藥과 불륜의 함수관계
카푸치노, 시나몬 스틱, 계피향. 이것들은 대체 무엇일까. 미각인가 후각인가. 또는 그 합성인가. 이에 대한 음미만으로도 썩 비일상적. 된장이나 생선 냄새 가득한 소설, 혹은 ‘아버지, 아버지, 우리 아버지’식 글쓰기에 익숙한 풍토에서 계피향은 신선하다. 어째서? 계피향이, 그러니까 시나몬 스틱이 중산층 중년기의 불륜을 재는 잣대 구실을 하고 있으니까. 여기서 주목할 것은 다음 두 가지. 오늘의 중산층만 하더라도 키보드를 두드리며, 카푸치노를 마신다는 사실이 그 하나. 그는 또는 그녀는 필시 자기 식의 일을 하면서도 카푸치노 쯤은 음미한다는 것. 여기까지 이르기 위해 이 사회는, 그리고 우리들은 얼마나 큰 용기와 노력과 마음 씀이 지불되었을까. 그런데 그것이 키보드 두들기기로 말미암아, 또는 무슨 무슨 까닭으로(까닭은 무수히 있는 법) 소홀해지거나 게을러졌다면 어떠할까. 파탄이 올 수밖에.
다른 하나는, 이 점이 중요한데, 불륜과 미약의 관계항. 카푸치노에 계피향이 빠지면 어떠할까. 이름만 카푸치노이지 진짜일 수 없는 법. 불륜과 미약의 관계를 소설 속으로 끌어드린 것은 단연 새롭다. 후각과 불륜, 혹은 후각과 성적 관계는 동물계에서는 거의 절대적인 것. 인류는 직립보행으로 말미암아 이 후각을 은밀히 은폐하기 시작했던 것. 후손을 남기기 위해 풍기는 온갖 전략적 냄새의 총칭이 페르몬인 것. 모든 항수의 기원이 이에서 말미암지 않았을까. 문명이란 이 미약의 은밀한 발전사가 아니었던가.
첫댓글 자투리 시간에 공부하려고 타이핑을 해 보았습니다. 어렵네요, 지금 쓰고 있는 글은 10page정도 썼는데 도무지 손에 안잡히네요. 즐독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