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건너편으로부터 내 또래의 한 아이가 멋적은 미소를 띤 얼굴로 나를 향해 길을 건너오고 있었다. 마치 지난 새벽에 꾼 꿈처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 장면은 내가 처음 본 그의 모습이다.
늦은 밤 신촌 사거리 버스정거장 앞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그는 엉망으로 취해있었다. 그러면서도 같이 한잔하자고 막무가내로 내 팔을 잡아 끌었다. 옆에서 당혹스러워 하는 내 여자친구는 안중에도 없었다. 나는 속으로 혜진이 오늘은 혼자 갈 테니, 저렇게 간절히 원하는 친구와 같이 가라고 말해주길 바랬다. 하지만 내 팔꿈치를 잡고있는 그녀의 손에서 가지말라는 완곡한 힘이 전해졌다. 물론 혜진도 내가 꼭 집에 바래다 주기를 원해서라기 보다는, 이 늦은 시간에 이미 인사불성이 된 친구와 술을 마시게 되면 벌어질 뒷일이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친구와 같이 있었어야만 했다. 그러나 모래내 가는 버스가 정거장에 들어왔을 때, 나는 제대로 작별인사도 하지 않은 채, 뿌리치듯 친구에게서 벗어나, 도망치듯 버스에 올라탔다. 그때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그의 허망한 눈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도 내 가슴 속에 옹이가 되어 박혀있는 내가 본 준의 마지막 모습이다.
혜진도 준과의 이 만남이 처음은 아니었다. 두어 달 전에도 이 신촌 바닥에서 우연히 만나 술자리를 함께했던 적이 있다. 그때도 준은 우리와 만나기 전부터 이미 많이 취해있었다. 그는 다니고 있는 의대 공부가 버거워서 많이 괴로워했다. 아마도 본과로 진급을 앞에 두고 유급의 위기에 처해있었던 것 같았다. 연신 거친 말투로 학교생활에 대한 불만과 불안을 토로했기 때문에 그날의 술자리가 즐겁고 밝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이전부터 혜진도 준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었는데, 내가 너무나 자주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형이 친구 얘기를 할 때 보면 무슨 애인 얘기하는 것 같아요. 질투가 날 정도야." 언젠가 혜진이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그동안 내가 혼자 생각했던 준씨의 이미지와는 너무 달라요. 오늘 보니 사람이 너무 거칠고 어두운 것 같아. 형 얘기 속의 준씨는 언제나 천사 같은 사람이었는데." 그날 신촌 술집에서 두어시간 함께 시간을 보낸 후에 혜진이 느낀 준에 대한 평가였다. 천사라? 그렇다! 정말 오랫동안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준은 나의 천사라고. 천사 중에서도 나의 수호천사라고.
우리 집은 바로 전날 이사를 왔던 참이었다. 군인이었던 아버지의 근무지였던 군사지역인 강원도 철원 금화 산골짜기에서 청량리로 이사 온 집은 도로가에 방 한칸이 딸린 초라한 점포였다. 알을 깨고 갓 세상에 나온 병아리처럼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집 밖으로 한발짝 나섰는데, 내가 갈만한 곳이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그동안 내가 뛰어놀았던 산도, 들판도, 내도 없었다. 도로에 많은 차들이 달리는 광경만큼 낯선 것이, 그 날 길가에 서서 한참을 맡았던 서울의 냄새였다.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맡지 못 했던 낯선 냄새가 가득했다. 나는 그 냄새의 정체를 밝혀내고야 말겠다는 듯이 킁킁거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 길 건너에서 한 아이가 길을 건너오고 있었다. 내 또래의 어린 아이가 차들이 내달리는 한길을 맹랑하게 혼자서 건너는 것이 내 눈에는 대단한 모험처럼 보였다. 내 쪽을 향해 오고 있었지만, 그 아이가 설마 나한테 오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겸연쩍은 웃음도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보고 웃는 것이려니 했다. 나말고 또 누가 있나 주변을 둘러보기까지 했다.그러나 그 아이는 바로 내 앞에 와서 섰다. "너 이사 왔어?" 그 아이가 물었다. 그리고 몇 마디 나이나 이름, 이런 것을 서로 묻고 대답했다. 우리는 피차 이번에 국민학교에 입학하게 되는 동갑이란 걸 알게되었다. "우리 친구하자!" 그 아이가 어른처럼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준과 나는 친구가 되었다. 그날, 일곱 살의 준이 집앞에 서있는 나를 보고 대로를 건너면서까지 내게로 오게했던 그 강렬한 끌림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인력의 법칙은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아직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직전이었던 그때부터 내가 대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준은 끊임없이 나한테로 이끌려 왔다. 대학생 때, 어느날 밤 늦게 귀가하면 애가 타신 어머니가 하시곤 하던 말씀. "왜 이렇게 늦게 다녀? 오늘도 준이가 저녁 나절부터 너 왔냐고 열 번은 왔다 간 것 같다." 그러면 나는 신도 안 벗고 마루에 앉아 기다렸고 준은 어김없이 집 앞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한 번은 통금시간이 거의 다 돼서 집에 왔는데, 그 날도 준이 시간마다 왔었고 내가 오기 바로 얼마 전에도 왔었다고 한다. 통금까지 채 30분도 안 남았지만 나는 기다렸고, 준은 진짜 통금 10여분 전에 와서 내 얼굴만 보고 돌아간 적도 있다. "특별히 중요한 일도 없는데, 오늘 못 보면 내일 보면 되지, 뭘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왔다 갔다 고생을 해?" 미안한 마음에 이렇게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이 "내일은 내일이고, 오늘이 가기 전에 너를 꼭 보고 싶은 그런 날이 있어." 그 날 집 앞 밤거리가 어두운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던지 모른다. 덕분에 내 눈에 그렁그렁 맺힌 주책맞은 눈물을 친구가 볼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내가 중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 준은 재수를 했다. 우리는 같은 동네에 살았어도 우연히 만나지는 경우가 거의 없게되었다. 그때부터 준은 우리집 앞에서 내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대학교 3학년 때 우리집이 망우동으로 이사하기 까지 준은 우리집 앞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그러고 보니 단 한 번도 내가 그의 집에 찾아갔던 적이 없었던 것은, 준의 집이 바깥채 2층짜리 병원건물과 같이 있는 큰 집이어서 마땅히 그를 불러내는 일이 어렵기도 했거니와, 내가 친구가 보고 싶어지기 전에 항상 그가 먼저 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나면 우리는 마냥 걸었다. 대학생이 되고 부터는 주로 밤에 만났는데, 통금까지 한 시간의 여유가 있으면 한 시간을 걸었고, 두 시간의 여유가 있으면 두 시간을 걸었다. 여름에는 경희대학교 앞 그린하우스까지 가서 팥이 든 수제 아이스케이크를 사먹고 돌아오기도 했다. 아이스케키는 우리와 특별한 인연이 있었는데, 국민학교 4학년 때였던가 둘이서 아이스케키 장사를 동업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의 자본금은 물론 부자 병원집 아들인 준이 다 투자를 했다. 우리는 결국 원금을 거의 한푼도 건지지 못한 채 망하고 말았다. 우리가 다녔던 휘경국민학교 앞에도 자주 가곤 했는데, 그런 날은 학교 근처의 어떤 집 앞에서 한참을 앉아있다 돌아왔다. 우리 둘이 같이 좋아했던 한 여자아이가 살았던 집이다. 그 애는 5학년 때 브라질로 이민을 갔기 때문에 우리가 한 여자를 두고 싸우는 불미스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우리의 주된 놀이가 그냥 산이고, 들판이고, 이 동네 저 동네 싸돌아 다니는 것이었기 때문에 만나면 걷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준과의 기억은 아마도 칠할이 같이 걸어다녔던 일인 것 같다. 우리가 함께 했던 유년기는 모험으로 가득 찬 가슴 떨리는 나날들이었다. 아마도 다른 동네보다는 애들이 좀 거친 경향이 있는 역전 근처 동네라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여름이면 당시에는 시골이었고, 포도밭으로 유명했던 면목동에 시외버스까지 갈아타고 가서 포도서리를 하곤 했다. 6학년 때 여름방학 땐 동네친구들 여섯이서 거의 절도 수준의 포도 서리를 하다 동네 청년들한테 잡히는 포로 신세가 되어, 마을 동산 중턱 포로수용소에 끌려가 반나절 동안 온갖 기합을 받기도 했다. 망우리 공동묘지에서 비오는 저녁, 길을 잃고 얼이 빠져서 줄행랑을 쳤던 기억도 있다. 극장 '쌔벼' 들어가기는 우리동네 애들이 가장 즐겨했던 놀이였으며, 기차를 훔쳐 타고 기차 여행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 우리는 가게 금고를 턴 적도 있었다. 그때는 동네 애들 댓명이 정처없이 다른 동네를 떠돌고 있었는데, 우리의 두목격인 한 학년 위의 동네 형이 가던 길을 멈추고 우리를 불러 모았다. 금방 지나온 구멍가게에 주인 아줌마는 안채 수돗가에서 빨래를 하고, 점빵 쪽방에 갓난애가 자고 있는데, 그 머리 맡에 놓인 분유통을 훔쳐 먹자는 작당을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각각 구역을 맡아 망을 보고, 동네 형이 들어가 분유통을 들고 나왔다. 나는 가게 안채 마당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주인 아줌마의 동태를 살피는 임무를 맡았는데, 분유통을 들고 나오며 하얗게 질린 동네 형의 얼굴을 보면서 생각보다 겁쟁이구나 하고 생각했던 일이 떠오른다. 멀찌감치 도망을 가서 분유통을 열 때 동네 형이 핼쑥해진 얼굴로 말했다. "이거 분유가 아닌 것 같애" 그 형은 깡통을 집어 든 순간 그 통이 분유통이 아닌 것을 알아챘었다. 그래서 그렇게 하얗게 질렸던 것이다. 그 분유통은 말하자면 그 구멍가게의 금고였다. 다행히 아주 허름한 작은 구멍가게였기 때문에 통안에는 얼마되지 않는 금액이 들어 있었다. 그래도 우리 댓명이 이것저것 까먹고 다니기에는 아주 충분한 금액이었고, 그 가게에서 그 정도의 이익을 내려면 아마도 며칠을 열심히 벌어야만 했을 것이다. 기차 훔쳐 타기는 동네애들 여럿이서도 했지만, 주로 준과 둘이서만 하기도 했다. 우리동네에 기차 화물을 부리는 화물하치장이 있었는데 그곳으로 들어가고 나가면 아무도 뭐라지 않았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일하는 노무자의 가족들이 수시로 도시락 등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대개는 경춘선을 타고 퇴계원에서 내렸다. 경험에 의하여 중앙선은 돌아 올 기차를 타기가 쉽지 않고, 퇴계원까지는 중간에 검표를 하지 않으며, 기차 맨 뒷칸으로 내리면 퇴계원역 밖으로 쉽게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역 근처에 강이 흐르고 있었다. 퇴계원 강가에서 한참을 놀다가 다시 기차를 타고 돌아왔다. 우리는 그때 하얀 돌이 깔린 강가에서 무엇을 하고 놀았던 것일까? 무엇을 했던 준과 같이 했던 이 신나는 모험은 내 유년 시절의 모습 중 반짝반짝 빛나는 강가의 하얀 조각돌처럼 가장 빛나는 한 장면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우리의 놀이 중 가장 압권은 이름하여 "집 잃어먹기 놀이"였다. 국민학교 2학년 때 여름방학이었다. 준이 가슴 떨리는 제안을 했다. 자기가 기막힌 놀이를 생각 해냈는데, 집 잃어먹기 놀이라는 것이었다. 방법은 간단했지만 우리에게는 엄청난 모험이었다. 동네에서 버스를 타고 무작정 한참을 가다 내려서 다시 아무 버스나 잡아 타고, 그 버스의 종점이나 종점 근처에서 내려 발길 가는대로 돌아다니다 보면 그야말로 우리가 어느 곳에 와 있는지 전혀 종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 때 우리를 덮친 공포는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태연한 척 말하려고 해도 목이 잠겨 목소리가 잘 안 나올 정도였다. 이 놀이의 소요경비는 물론 부자집 아들인 준이 대부분을 감당했고, 나도 내가 가지고 있는 푼돈을 털어 보태곤 했다. 그래봐야 둘이 냉차 한잔이나, 찐빵 하나 사 먹고 버스를 대여섯번 갈아 탈 수 있는 돈이 전부였다. 그러므로 한 번 버스를 탈 돈 밖에 안 남았을 때는 어떻게든 우리 동네로 오는 버스를 타야만 했던 것이다. 언젠가는 마지막 남은 차비로 길바닥에서 파는 아이스크림인지를 까먹고 광화문부터 걸어 밤 10시가 넘어서야 도착, 세 아이가 (그날은 명수라는 친구도 같이 갔었다) 없어진 온 동네가 발칵 뒤집혀졌던 적도 있었다. 우리의 이 게임은 4학년 때까지 계속 되었는데, 나중에는 길을 잃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히 그만 둘 수 밖에 없었다. 그 이후엔 남산이나 뚝섬유원지 심지어는 망우리 공동묘지 등등 목적지를 정하고 다니게 되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어느날 재수생이었던 준이 내가 다니는 청운중학교에 꼭 가보고 싶다고 해서 어느 휴일 같이 가게 되었다. 학교 교문 앞에서 준은 갑자기 가던 걸음을 멈추고는 약간 얼이 빠진 모습으로 내게 말했다. "경일아, 나 지금 소름 끼쳤어! 너, 니가 들어가고 싶다고 했던 바로 그 중학교에 다니고 있는 거야!" 뭔 뚱딴지 같은 소린가 하는 표정으로 친구를 바라보았다. "우리 옛날에 집 잃어먹기 할 때 여기 왔었잖아. 생각 안 나? 그때 저 언덕 넘어 산골 동네 계곡에서 물놀이 하고 이 고개길 넘어오다가 학교를 보면서 니가 학교가 너무 좋다고 꼭 이 학교에 들어오겠다고 했잖아? 여기가 바로 거 학교야! 그때는 이 담장이 지금처럼 벽돌이 아니라 철망이었어." 그제서야 나도 새까맣게 잊고 있던 일이 어렴풋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날 우리는 어찌어찌 세검정까지 갔었고 차비가 한 번 탈 돈 밖에 안 남아서 걸어서 자하문 고개를 넘다가 고갯길 밑에 그림처럼 자리 잡은 청운중학교를 내려다 보게 되었던 것이다. 관악산과 인왕산 사이에 터를 잡은 청운중학교는 풍광으로 치면 아마 서울에서 최고가 아닐까 한다. "이 학교 이름이 뭘까?"하고 내가 물으니 "너무 좋으니까 경동중학교가 아닐까?"하고 준이 말했다. 그 해에 동네에서 수재로 소문난 파리양복점 형이 경동중학교를 들어갔기 때문에 (사실은 일차에 경기중학교를 떨어졌던 것인데) 어렸던 우리는 경동중학교가 제일 좋은 학교인 줄 알았었다. 그때 내가 그랬다. "나 이 학교에 꼭 들어가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어!" 준은 내가 소원한대로 바로 그 중학교에 들어 온 사실 때문에 소름이 돋았다고 했지만, 나는 준 때문에 전율했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자 준은 내가 다니는 중학교에 꼭 가보고 싶다고 하면서 같이 가보자고 여러 번을 졸랐다. 청량리에서 효자동 청운중학교까지 오려면 노는 날 하루를 다 소일해야 했기 때문에, 꾀가 난 나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미뤘다. "우리 학교까지 엄청 멀어서 왔다 갔다 하려면 고생이 될 텐데 무엇하러 자꾸 가자고 해?" 내가 이렇게 묻기도 했다. "니가 어떤 학교에 다니는지 내가 궁금하지 않겠냐?" 준의 대답에 나는 할 말을 잊었다. 내가 다니는 학교가 어떤 학교인지 궁금해서 죽겠다는 친구. 나는 몇 달 동안 학교를 다니면서도 새까맣게 몰맀던 사실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코흘리개였을 때 내가 장난처럼 한 소리까지 나보다 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친구. 이런 친구가 내게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힘이 났으므로 내가 나의 수호천사라고 생각했던 이 친구에게 도대체 나는 무엇이었을까? 그날 신촌 버스정거장에서 잡는 손을 뿌리치고 도망치듯 했던 나를 망연자실해서 쳐다보았던 그때 이 친구는 도대체 어떤 중요한 것을 상실하고 있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