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에는 권력의 부침이 있고, 인간들의 시작과 끝이 있다.
죽음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죽음이 코 앞에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몇 천년이라도 살것처럼...
역사속에서 수천년동안 권력의 종말을 수없이 되풀이 되었건만
인간들은 언제나 어리석게 손안의 권력을 휘두르고 부나비 처럼 권력의 불속에서 비참하게 죽어갔다.
이것이 그토록이나 인간들이 원하던 권력의 속성이거나 종말의 참 모습이거늘.....
언제나 깨닫지 못하고.
그럼 두번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숙종은 첫 왕비로 인경왕후를 맞았으나 일찍 사별하고 인현왕후(仁顯王后)를 첫째 계비로 맞았다.
그러나 인현왕후는 희빈 장씨의 모함으로 폐위되었다가
갑술환국 때 복위되었으며 35세에 원인 모를 병으로 소생없이 세상을 떠난다.
다음 해 숙종은 인원왕후를 둘째 계비로 맞는다.(정비)
오랫동안 아들이 없던 숙종이 궁녀 장소의(張昭儀 훗날 장희빈)에게서 왕자 윤(경종)을 얻는다.
이듬해 윤을 세자로 책봉하고 장소의에게 희빈이라는 품계를 내렸다.
그 후 인현왕후 민씨를 폐비하고 장희빈을 왕비로 책봉하였으나 숙종은 곧 이를 후회하고
인현왕후를 복위하고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렸다.
잠시 뒤에 등장하는, 장희빈의 대빈묘는 경기도 광주에서 1969년 9월 홍릉으로 이장되었다.
어쨋든 이 역사극의 히로인 장희빈에 대해 설명을 위해 연대표로 요약하면,
효종 2년 (1651) 장희재 출생(오빠)
효종 10년(1659) 장희빈 출생.
현종 10년(1669) 1월 장희빈의 아버지 장경 사망.
현종 11년(1670) 11월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 출생.
숙종 12년(1686) 12월 궁녀이던 장희빈이 숙원이 됨.
숙종 14년(1688) 장희빈이 소의가 됨.
숙종 14년(1688) 10월 장희빈이 왕자(후일 경종)를 낳음.
숙종 15년(1689) 1월 장희빈 소생 왕자가 원자로 정해짐. 장숙정 소의에서 정1품 희빈 봉함
숙종 15년(1689) 2월 송시열이 후궁 소생 왕자를 원자로 봉하는 것은 이르다고 상소함.
숙종 15년(1689) 2월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국을 주도하고 부친 장경이 영의정에 증직됨.
숙종 15년(1689) 4월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출하기 위해 구전을 조사하게 함.
숙종 15년(1689) 5월 숙종이 인형왕후 민씨를 폐출함.
숙종 15년(1689) 5월 숙종이 희빈 장씨를 왕비의 전지를 내리고, 장경을 옥삼부원군에 추증함.
숙종 15년(1689) 5월 희빈 장씨가 왕비로 정해짐.
숙종 15년(1689) 6월 숙종이 송시열을 전라도 정읍에서 사사함.
숙종 15년(1689) 6월 숙종이 희빈 장씨 소생 원자를 왕세자로 책봉함.
숙종 15년(1689) 10월 숙종이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함.
숙종 19년(1693) 4월 궁인 최씨가 숙원이 됨.
숙종 19년(1693) 10월 숙원 최씨가 왕자 영수를 낳음. **** 2달후 사망
숙종 20년(1694) 4월 1일 갑술환국
숙종 20년(1694) 4월 12일 폐비 인현왕후가 입어, 장희빈으로 강등, 장경의 부원군 교지를 불사름
숙종 20년(1694) 6월 숙원 최씨가 숙의가 됨.
숙종 20년(1694) 9월 숙의 최씨가 왕자(후일 영조) 금, 영잉군을 낳음.
숙종 21년(1695) 6월 숙의 최씨가 귀인이 됨.
숙종 25년(1699) 10월 귀인 최씨가 숙빈이 됨.
숙종 25년(1699) 12월 숙빈 최씨 소생 왕자가 연잉군에 봉해짐.
숙종 27년(1701) 9월 23일 장희빈이 인현왕후 죽기를 기도한 일이 발각됨.
숙종 27년(1701) 9월 25일 숙종이 장희빈의 자진을 명하는 비망기를 내림.
숙종 27년(1701) 10월 8일 숙종이 승정원에 하교하여 장희빈을 자진하게 함.
숙종 28년(1702) 1월 장희빈을 양주에 장사지냄.
숙종 44년(1718) 12월 장희빈의 천장지(묘를 옮길 장소)를 광주로 정함.
경종 2년(1722) 1월 경종이 어머니 장희빈의 사당을 세우고 칭호를 정함.
경종 2년(1722) 10월 장희빈을 옥산부대빈으로 추존함.
여기서 경종은 장희빈이 낳은 왕자이고,
그후 태어난 동이의 첫 아들 영수는 2달만에 사망한다.
이어 다음해 연잉군(영조)를 낳는다.
장희빈 사약장면은 너무나 유명해 많은 설명이 필요치 않고
또 동이에서도 이어 계속될 드라마이지만 인현왕후가 죽고 장희빈의 악행과 저주, 신당 등이
발견되면서 세자 생모였지만 사약을 받게 된다.
(연산군 당시가 떠오르지만...무서운 역사의 반복일뿐..)
장희빈은 자진 후 양주에 묻혔다가 아들 경종때 광주로 이장한 후
최근 숙종이 묻혀있는 홍릉으로 이장됐다.
후일 영조대왕이 되는 연잉군은 당시 법도에 의해 군에 봉해졌고,
당시 정비인 왕비에서 난 세자나 왕자는 대군으로 불렸으며
비,빈 등 후궁에서 난 왕자들은 군 이라 했다.
장자는 원자를 거쳐 세자에 봉해지고 마마로 불린다.
또 왕자들의 이름은 항렬이나 대신들이 주로 짓어 받치는데
주목할만한것은 세간에 사용하지 않는 자들을 골라 썻다는 사실이다.
이는 당시 왕자의 이름이 만들어지면 누구도 사용할수 없기에 세간에 자주 사용되는 자들을
피하다 보니 이상하고 어려운 한자의 이름을 사용하게 됐다는 점이다.
백성을 어여삐여기사....
연대표에 보면,
동이, 최숙빈의 직위는 왕비 밑 최고의 정1품 빈에 오른다.
동이는 모두 3명의 아들을 낳았지만 영조대왕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찍 죽는 아픔을 격었다.
실제 최숙빈의, 정읍의 구전되는 설화에 따르면, -물론 기록도 있다-
고아였던 최씨는,
영광군수로 부임하며 이 다리를 지나던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에 의해 거둬져 딸처럼 길러졌고,
숙종이 첫 왕후(인경왕후)를 잃고 인현왕후를 선택하면서 함께 입궁했다는 기록이 있다.
정읍시는 국도 인근에 ‘숙빈 최씨 만남의 광장’을 완성, 2006년3월 중 개장했다고 한다.
또한 시에서는 조선왕조 5백년 역사에 가장 흥미로운 신데렐라 스토리를 이벤트로
개발할 계획도 밝혔다고 한다.
일천한 기록뿐인 최숙빈은 이후 23세까지 무수리 생활을 했으며 주로 침방에서 바느질을 했다.
또 다른 기록에서는,
왕자 이금(훗날의 영조) : 침방에 계실 때에 무슨 일이 가장 하시기 어려우셨습니까?
최숙빈 : 중(中)누비·오목누비·납작누비 다 어렵지만, 세(細)누비가 가장 하기 힘들었습니다.
솜을 넣어 누비는 바느질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런 대화가 기록으로 남겨졌을지
무수리의 힘든 나날을 짐작케 한다.
때문에 영조는 평생 누비옷을 입지 않았다는 설도 전해온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면서....
훗날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홍씨가 쓴 한중록에
두 어머니를 그리워 했고 특히 생모에 대한 애틋함이 지극했다고 적고 있다.
또 다른 일화는,
영조가 연잉군일때 서씨 집안의 규수(훗날 정성왕후)를
아내로 맞이해 첫날밤을 치르면서 영조가 아내의 손을 잡고
"손이 참으로 곱다."면서 칭찬을 하자 신부가 무심코
"궂은 일을 해본 적이 없어서 그렇다."고 말해 그날로 부인을 소박했다.
무수리로 고생했던 어머니의 거친 손과 발을 생각해서 화가 난것인데
숙빈 최씨는 맨발로 물지게를 많이 지고 다녀 항상 손과 발이 아프다고 했으며,
바느질로 거칠어진 손을 생각했던 때문이었다. 이후로 후궁들만 찾았고,
끝내 정성왕후는 66세가 되어 죽을때까지 자식을 한명도 낳지 못했다.
특히 영조의 후궁들은 모두 궁녀나 여종들이었고 사도세자를 낳은 영빈이씨 역시 여종이었다.
영조는 강한 왕권을 갖추었지만 재위 중 여러 차례 금주령과 사치풍조 금지 조치를 내렸고
스스로 절제하는 검약한 생활을 했다.
효심이 깊었던 영조는 재위기간 중 절반이 넘는 29년 동안
상당한 정치적 무리를 감수하면서까지
생모 최숙빈에 대한 추숭사업을 끈질기게 추진했다.
노론 정권의 힘을 이용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탕평을 추구한 영조의 통치 스타일이
서인 세력을 활용하되 외적으로는 당쟁과 거리를 두었던
최숙빈의 삶과 절묘하게 겹치는 현상을 결코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지 않을까.
최숙빈은 (1670-1718) 48세로 죽었다.
숙종은 장희빈 사건이후 추후 폐단을 막기위해 경국대전에 법을 제정해
후궁이 왕비에 오를수 없도록 했는데 아리러니하게 그 첫 피해는 최숙빈이 받았다.
장희빈과 인현왕후가 죽었으나
최숙빈은 세자의 모친이면서도 끝내 왕비에 오를수 없었다.
일설에서는 굳이 오를수도 있었겠지만 세자를 위해 극심한 당쟁을 피해갔다는 설도 있다.
이후 인원왕비가 간택되고 연잉군은 양자로 입양되어 세자가 되고 무사히 영조가 될수 있었다.
극심한 당쟁속에 여러 차례 암살의 위기도 피했다.
심지어 인원왕비 치마폭에 숨어 칼날을 피한 일화가 있을 정도이다.
각고의 세월을 지나,
최숙빈이 죽고 6년이 지난 1724년 8월30일, 연잉군, 영조는 등극한다.
그리고 조선왕조 최장수 재임기간인 51년 7개월을 기록하며 83세에 붕어한다.
물론, 재임동안 파란만장의 드라마는 계속되고...
재임기간중, 장자인 효장세자가 죽고,
딸 화순, 화협도 죽었으며 며느리와 조강지처 정성왕후도 먼저 세상을 떴다.
특히 효장세자가 죽고 7년만에 얻은 외아들 사도세자를 삼복더위에 뒤주에 가둬
8일만에 죽게하는 아버지가 된다.
당시 28살이었고 이산(훗날 정조)을 비롯 후궁들이 낳은 3명의 아들이 있는 외아들을....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이산(정조대왕)이 없었더라도 사도세자가 죽었을까?? 라는
가정에는 여러 추론을 지금도 낳고 있다.
결국 자식이 아비를 죽게하고,
아비가 아들을 죽여야만 권세를 누리는 그런 피비린내나는 역사의 한 대목이 아니었을까?
잠깐 다른 줄기로 빠졌지만,
최숙빈과 장희빈의 목숨을 건 싸움은 이미 죽어 묻쳤지만 아직 끝난것이 아니다.
제2라운드가 기다리고 있는것이다.
그것은 바로 경종과 영조의 배다른 이복형제간의 왕권다툼이 그것이다.
그럼 오늘은 이만하고...
다음 편에서 계속..... <2회 완>
<영조대왕 영정> - 동이의 아들 -
< 영조와 정순왕후의 쌍릉 , 뒷모습 >
< 홍릉. 전경 >
영조와 정조가 죽은후에 정성황후는 막강한 세도를 부린 탓에 정성왕후가 죽자,
바로 영조 옆에 쌍릉으로 봉해졌다.
< 장희빈의 묘소 전경 >
< 장희빈 대빈묘라 불린다. 좀더 가까운 전경 사진. 뒤편에 바위가 보인다. >
< 일명 '장희빈 기세바위' 로 불리는 참나무 밑의 갈라진 암석 사진.
장희빈의 기세 때문에 죽어서도 바위가 갈라졌다는 것이다. >
< 요즘 최숙빈 다시보기 붐이 불면서 책도 여러권 출간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