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현대사
베트남전쟁과 미국의 쇠퇴
베트남전쟁
분단되었던 베트남에서 1955년 11월 1일부터 1975년 4월 30일까지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 James KF Dung, SFC/wikipedia | Public Domain
베트남전쟁은 미군이 패배한 사상 최초의 유일한 전쟁이었다. 1973년 1월 파리에서 조인된 베트남 화평협정은 형식만으로 판단한다면 미국의 패배를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남베트남 정부군과 해방 전선(베트콩) 사이에 정전을 결정하면서 더 이상의 병력증강을 금지하는 현상유지를 전제로 미군의 철수가 약속된 것이다. 즉 미국이 지원하고 있던 사이공1) 의 남베트남 정부는 존속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남베트남 해방 전선과 그 정부의 존재도 인정되었다. 하지만 정전은 약속되었으나 그것이 지켜진다는 보증은 없었다.
베트남전쟁에서의 미국의 패배는 군사적이라기보다는 본질에서 정치적 및 도의적이었다. 미국이 지원한 남베트남 정부는 남베트남 국민의 대다수에게 지지를 받지 못했다. 미국은 "코뮤니즘의 침투를 방지함으로써 인권과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킨다"는 대의명분을 걸고 베트남전쟁에 개입했으나 미국이 지원했던 부패한 남베트남 정부의 지배자는 인권이나 자유, 민주주의의 보장 따위에는 전혀 관심도 없는 인물이었다. 이들 타락한 정치가들의 만행에 분노한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고, 베트남인들의 존경을 받던 승려들의 분신 자살 등이 민심의 지지를 받았다.
미국에서도 1930년대 루즈벨트 정권 이래의 민주당 정권이 유지했던 도덕적 신뢰가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한꺼번에 무너졌다. 1972년 6월 워싱턴의 워터게이트 건물에 있던 민주당의 사무실에 연관공2) 을 가장하여 침입하여 도청기를 설치하려던 7명의 남자가 체포되었다. 이들을 심문하던 중 공화당 닉슨의 재선을 확실히 하고자 한 대통령 주변 인물의 공작이었음이 분명해졌다. 게다가 이 도청사건에 대통령 자신이 개입되었다는 것이 폭로되었다. 닉슨은 케네디와 존슨에 의해 추진된 베트남에의 군사개입에 종지부를 찍고 중국 및 소련과 관계개선을 해서 동서 긴장완화의 기틀을 다지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목적이 옳으면 수단도 정당하다는 자세는 이 정권을 통해 한결같이 관철되었다. 공화당 정권은 '도청'이라는 인권 침해를 '현실주의'라는 구실로써 정당화하려 했다.
미국의 언론이 폭로한 워터게이트 사건은 인도차이나 전역의 자유주의제도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닉슨의 베트남 철수정책은 다음과 같은 가정에 기초할 때에만 타당한 것이 될 수 있었다. 북베트남이 미국의 의중을 의심하고, 앞으로도 미국이 남베트남 정권에 강력한 지원을 계속할는지 의혹을 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1974년 미국의 군사적 개입에 대한 의회의 강력한 반대와 워터게이트 사건 후에 미국민의 정부에 대한 불신의 확대로 미국정책에 대한 모호성의 안개가 완전히 걷히고 말았다. 닉슨의 후임자 제럴드 포드는 미국 내의 반전여론 때문에 협정 같은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장악하려는 북베트남의 남침을 막을 수 없었다.
미국의 원조가 끊기면서 1973년부터 군사적 균형은 북베트남 쪽으로 확실히 기울었다. 그 해 말 북베트남은 군사적으로 2 대 1의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드디어 침공이 시작되었다. 1975년 1월 중부베트남 전역에서 백만 명의 난민이 사이공으로 피신했다. 4월 21일에는 남베트남의 구엔 반 티우 대통령이 사임하고 타이완으로 도망했다. 미국의 해병대의 헬리콥터가 사이공의 미대사관 지붕에서 미국의 관리와 베트남인 몇 명을 실어 날랐다. 이는 미국 역사상 가장 크고 치욕적인 패배였으며, 남베트남인들에겐 재앙과 같았다. 1976년 4월 북베트남이 주도한 남북 베트남 선거가 벌어져 7월에는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이 선언되었다.
미국 사회의 변화
베트남전쟁에서의 미국의 패배는 미국 사회를 분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에서는 전통적으로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가 정치의 주류를 점해 왔다. WASP은 건국 이래 전형적인 미국인이었다. 18세기에 들어서 아프리카에서 흑인이 노예로서 유입되었고, 19~20세기를 통해 유럽에서 다양한 이민이 유입되었다. 아시아로부터 19세기 철도건설 등에 중국인들이 투입되었다. 그 후 일본인들도 태평양을 건너왔다. 제2차 세계대전 전후에는 유대인들이 망명으로 유입되었으며, 중앙 유럽과 동남 유럽에서 이민이 급증했다. 한국인들도 '미국의 꿈'을 찾아 이민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 사회는 오랫동안 '인종의 도가니'라고 불리게 되었다. 미국은 다양한 인종적 · 문화적 · 역사적 기원을 지닌 사람들을 흡수하여 '인종의 도가니'에 용해해 하나의 국민으로 융합시키는 불가사의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많은 관찰자가 주목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다양한 뿌리를 가진 사람들이 만든 국가임에도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보는 것처럼 '다민족국가'처럼 되지는 않았다.
각각의 모국으로부터 지니고 온 문화를 버리지는 않았으나 기본적으로는 공통의 언어3) 로 대화를 나누며, 공통의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자기인식을 가진 하나의 '민족(Nation)'에 의해 구성되는 국가라는 모습을 나타냈다. 인권과 자유와 민주주의를 강조한 미국 독립선언의 정신은 미국에 건너와 그 땅에 정주하는 사람들에게 미국인이라는 아이덴티티의 확신을 용이하게 했다. 아이덴티티는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게 되는 자기인식이다. '국가'로서의 또한 역사적으로 집합한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의 공유(共有)가 미국에 건너온 사람들을 '미국인'으로 변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하기는 하나 민족적 뿌리의 차이에 의한 미국 사회의 계층구조 형성은 피할 수 없기도 했다. 아프리카에서 유입된 흑인들은 노예로 출발했고 중국인들은 철도 건설을 위한 노동력 제공자(쿨리, 苦力)로, 일본인은 소작농으로 각각 밑바탕으로부터 생활을 시작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결코 사회적으로 완전히 평등하지 않았다. 더욱이 경제적 격차는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 이민자들은 사회, 경제적으로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을수 없었더라도 사회적 지위를 향상하고 경제적 생활을 개선해 줄 가능성을 믿고 있었다. 아메리카라는 국가, 그리고 아메리카라는 사회는 '동질화'를 목적으로 하는 그들의 노력을 받아 줄 것이라고 그들은 확신하고 있었다. '미국의 꿈'을 품고 그들은 미국에 이민한 것이다.
그러나 유럽에서 이민한 대다수 사람을 제외한 흑인과 기타 소수파가 처하게 된 상황은 다른 것이었다. 그들은 너무나도 오랫동안 미국 사회로부터 소외(疎外)되어 다수파 미국인에 의해 엄격히 차별(差別)되었다. 그들이 하나의 인간의 권리에 눈을 뜨게 되자, 그들은 차별과 소외의 긴 역사에 대해 크게 반동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들 중에는 유럽 등지에서 미국으로 넘어왔던 사람들과는 다르게 뿌리(Roots)를 버리고 미국 사회에 '동질화'하지 않고 오히려 루쯔를 중시하여 재발견하여 아예 '이질화' 또는 '이질성의 강조'를 목표로 하는 부류도 출현하여 차별에 저항했다.
미국의 외교가 크게 흔들리고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패배하는 우행(寓行)에 휩쓸리게 되었을 때, 미국인들에게는 서방의 지도 국가로서의 미국이라는 확신이 사라졌으며, 그것은 곧 미국 사회의 통합력이 떨어지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베트남전쟁에서는 많은 흑인 병사가 가혹한 전투에 참전하여 전사했다. 그러나 베트남전쟁에서 귀국한 병사들은 고향에서 존경을 받기는커녕 반전여론에 밀려 홀대를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미국인들에게 미국이라는 국가이념은 무엇인가? 미국인을 하나로 결합할 수 있는 목표는 무엇인가? 이러한 의문들을 제기하면서 미국 사회의 통합력마저 상실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미국이라는 국가의 아이덴티티 위기는 미국이라는 사회의 통합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새뮤얼 헌팅턴은 그의 저서 「분단되는 아메리카」에서 "과거 3세기 반에 걸쳐 여러 인종, 민족, 종교를 받아들여 온 WASP 문화와 전통 및 가치관을 미국인들은 다시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라고 하여 미국의 새로운 분열에 대한 위기감을 표현했다.
1970년대 이후에는 서방 여러 나라 가운데 압도적으로 우위에 서 있던 미국의 경제도 '통화의 위기'와 '석유 위기'를 경험하면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경제와 산업의 측면에서 미국은 한국전쟁 후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룩한 일본과 경제성장을 향해 이륙을 시작한 아시아의 신흥국 과 경제적으로 마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