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수 교수 시집 『하늘과 기러기』출간 !! 시집 '하늘과 기러기' 상재를 축하드립니다 -강릉사랑문인회- " 김일수 교수 시집 '하늘과 기러기' 출판기념회 서평 (엄창섭 시인) 맑은 영혼에서 통신된 따뜻한 감성적 형상 -김일수 시인의 『하늘과 기러기』, 그 응시의 시학-
엄창섭(국제펜클럽한국본부 고문, 모던포엠 주간)
1. 생명외경의 당위성과 시적 합리성 인식의 파동을 기호화하며 시 쓰기를 즐길 줄 아는 좋은 시인이란, 정체된 전통성의 회복은 물론, 빗나간 전통의 실을 가능한 자신의 시 안에 다시 꼬아 넣는 맑은 영혼을 소유한 존재이다. 비교적 전통의 맥락에서 생성된 ‘김일수 시인의 『하늘과 기러기』, 그 응시의 시학’은 정신적 피폐함으로 인해 고통 받는 현대인들의 불안의식마저 동양적인 숙명관으로 일관성을 지탱하며 시적 토양에 경작한 질료이다. 까닭에 그의 시적 특성이나 내구성은 대상의 응시(凝視)를 화합과 사랑으로 전이시키는 힘을 공리적 시관으로 풀어내어 시적 치유(治癒)를 모색하며 인간존재에 대한 반문의 시사(示唆)이기에그 놀라움은 하나의 충격이다. 한 사람의 정직하고 지조 있는 시인이기에 앞서 ‘국가경찰위원장, 한국형사정책연구원장’을 역임하고 고려대학교 명예교수로서 한국기독교생명윤리위원회 위원장의 직무를 수행하는 김일수(金日秀) 시인은, 천년의 시향(詩鄕)으로 일컬어지는 옛 ‘하슬라’의 땅 강릉 태생이다. 그는 제134회 월간 『모던포엠』의 신인상 당선소감에서 “젊음의 한때 시를 무척이나 좋아했지만 시와 떠나 살던 대부분의 세월을 법과 정의를 위한 정신적 논쟁의 각축장에서 보냈다. 나는 그곳에서 마치 지원병처럼 전선을 따라 동분서주하다가 비로소 인생의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낯선 집으로 돌아온 느낌이라.”고 술회(述懷)하고 있다. 오랜 망설임 끝에 간행하는 시집『하늘과 기러기』(모던포엠, 2015)에서 하늘과 기러기의 상징적 관계층위에 관한 배경지식(schema)을 기억에 담아두지 않을 수 없다. 애써 ‘님은 하늘, 나는 작은 새’의 연계성을 불러내며 즉물적 현상에서 피사체의 미동도 놓치지 않고 인식의 내면으로 파고들어 분할·통합하는 언어의 작동법이나 시어(詩語)의 이중구조와 단순성에 구속받지 않더라도, 원형상징에서 ‘하늘’은 ‘구원, 절대의지의 징표’로 화자가 희구(希求)하는 이상, 즉 신앙의 대상은 관념적으로 풀이되어진다. ‘기러기’는 새끼를 희생으로 키우는 지조 있는 조류로, 깨끗한 곳에서 서식하면서 가을의 전령사로서 절도와 지혜가 있는 철새이며 부부애의 상징이다. 이 같은 측면에서 한자어의 노안(蘆雁)이나 날아오르는 기러기를 회화한 문양(文樣)이 ‘최상의 상서로움’을 의미하는 것임은 주지할 바다. 모름지기 정신작업의 종사자들은 그 동공이생명의 본체인 우주와 내면인식의 경계를 위하여 항시 투명하게 열려 있어야 한다. 까닭에 즉물적 현상에 대한 응시와 깊은 사유 뒤에 추구한 시 의미는 ‘삶의 구조와 생명외경의 경계’라는 시각에 접근하여 자유로운 바람의 선율(旋律)과 영혼의 울림을 시적으로 형상화하는 시적 작위에 일가(一家)를 이룬 김일수 시인의 삶의 족적은, 시집 편집의 목차처럼 “제1부 하늘과 기러기, 제2부 물그림자, 제3부 묵은 날의 짐을 풀고, 제4부 둥근 달 향기, 제5부 기억의 오솔길을 따라”에 짜임새 있게 직조되고 변형되어, 세월이 흐르는 그 덧없음도 의미와 가치로 채워져 한 사람의 시인이 ‘최고의 지혜를 지닌 현명하고 명성이 빛나는 자임’을 새삼 확증시켜주고 있다. 특히 새로움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우리 시의 극단적 변화양상이 점차 언어유희(pun)로 빠져 드는 위험과 직면하고 있는 서정의 경계에서 반서정(反抒情)을 생성하는 행태가 친숙함 속에서 은폐된 내면인식의 작위(作爲)에 의한 시적인식과 주체의 변형은 그 의미망을 확장시킨 인자(因子)로 가늠된다. 사유(思惟)의 존재인 인간은 그 자체가 가장 방대하면서 생체적으로 섬세한 하나의 우주이기에, 삶의 문제를 깊이 있게 언어의 질감과 본질적 삶의 무상감을 절제하여 “후미진 해변의 공동묘지를 지나다 유골도 이름도 없이 잡초만 성성한 초라하기 그지없는 한 묘소를 만났다. 내 머리카락 흩날리던 바람은 그쳤지만 얼굴주름을 타고 흐르던 한줄기 눈물에서 오래 묵은 바다의 짠맛 음미해 보았다.(눈물과 바다)”에서 죽음에 대한 문제의식을 정신풍경의 양상으로 빚어낸 그의 시적발상은 다분히 생명의 엄숙성을 자각한 일상의 감동이 잠식(蠶食)된 미학적 산물이다. 이처럼 혼돈에의 방황을 끝내려는 삶의 역주 뒤의 평온함으로 매혹적인 예감의 수용성은 더없이 따뜻하다. 폴 발레리의 ‘시적 형식은 자동적으로 자신을 회복시키는 법, 안과 밖이 관통된 일원론적 사유로 인간과 우주를 연대시킨 통로임’을 수용할 때, 시각과 인식의 미끄러짐 속에서 김일수 시인이 낯익은 대상에 적합한 시적 질료를 찾기에 고뇌한 끝에 추구한 창조적 영혼은 견고한 고독에 의한 정신적 행위로, “먼 산에 잔설(殘雪)/더 머물다 가라 해도//아지랑이 불길 속/종달새소리 높고//떠도는 구름에/따신 바람 실려 오면//괴나리봇짐 메고 서둘러/보릿고개를 넘어간다(사계(四季)ㅡ봄)”의 보기처럼 언어의 지시적 기능이 우세한 까닭에 힘의 가락과 체온을 지닌 힘겨운 도보(徒步)는 밝고 경쾌한 템포로 변주되고 있다. 시성(詩聖)인 셰익스피어가 『사랑의 헛수고』(4막 3장)에서 “사랑이 말을 할 땐 천상의 모든 신들이 소리를 맞춰 합창하며 온 하늘 전체가 황홀해진다.”고 기술하였듯 비교적 새로운 시문학의 지형도를 펼쳐 보이는 그의 시편은 시적 여과과정을 통해 정제된 생산물이기에 모호성이나 칙칙함이 없는 순수서정의 빛남으로 푸른 생명감이 돋보인다. <정의에 관한 사색노트>나 또는 “이른 봄부터 민주광장에서/자유와 정의의 씨를 뿌리고/물주며 씨름하던 내가/광복절에 나선 나들이 길/나의 조국 나의 강산/여의도 하늘 밑에서는 먼 이방인처럼 외롭다(63빌딩에서)”에서 절감되는 시적 정조(情調)처럼 부당한 구속으로부터의 진정한 자유인이기를 열망하기에 본래의 나(眞我)로서의 자존감을 지닌 담백한 시격의 소유자로서 선하고 의로운 불꽃을 끄지 않으려고 단독자의 길을 걷는 소회야말로 지난(至難)한 몸짓 그 자체가 감동의 회복이다. ‘상징의 숲’을 거니는 시인은 존엄한 존재로서 생명력 있는 언어로 죽어가는 대상도 사랑해야 하고 생명적인 형상으로 빚어내는 그 소임을 수행하기 위해, 머레이 북친의 지적처럼 생태위기를 벗어나려면 인간중심주의의 경계를 무너트려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김일수 시인의 담백한 시격은 낯설음과 허망함이 단절과 교접되어 때로는 절규 같은 울음이며 빗물의 흐름으로 해명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좋은 시란, 외연과 내포의 최원(最遠)의 양극에서 모든 의미를 통일한 것으로 생명의 재해석임을 수락하며, 이제 분망한 우리네 삶과 이중적 거리를 두고 따뜻한 감성으로 정신기후를 조성시켜주는 그의 행복한 시 읽기에 세심한 관심을 지니며 느림의 시학에 근거하여 탐색하는 생명적인 작업은 더없이 건강하다.
2. 의미론적 순환(循環)과 존재의 시학 ‘의미론적 순환(循環)과 존재의 시학’으로 해명해도 거부감이 없는 김일수 시인의 시편에서 지속적으로 감지되는 것은, 일상의 삶에서 접하는 자잘한 현상이 때로는 파괴적이고 동물적이나 경계의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그의 고뇌가 시적 인식의 깊이에 잇닿아 있는 점이다. “날개 꺾인 철새의 처절한 몸부림과/저만치서 되돌아서는 임의 발자국 같은/이기심의 돌부리를 넘어서지 않으면/사랑과 믿음의 자리에 들지 않고서는/끝내 잡을 수도 헤아릴 수도 없는 음향이 있다(난청)”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인간이 유한적 존재임은 각론하고, 우리의 현실적 삶에서 언어공해의 심각성을 강도 높게 일깨우는 그의 시편은, 언어의 분별력과 배려에 의한 삶의 교시(敎示)이기에 존재의 꽃으로 빛나는 엄숙한 생명경외의 사상은 이토록 그 층위를 변형시켜 “파도를 넘어 수평선에 가 닿는 것/거기, 하늘이 내려와 수면과 입 맞추고/일렁이는 물결의 파장을 잠재우고/따뜻한 시선으로 겸손의 결을 따라/조용히 수평선을 응시하는 등대의 하얀 속마음 같은 것(오해에 관한 사색노트)”에서 예감치 못했던 깊은 사유를 통한 시적 심리가 ‘그리움의 정수(精髓)’로 빛남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영국의 스펜더가 <시작의 과정(a make of poem)>에서 “주의집중, 기억력, 영감, 신념, 음악성”에 관하여 논의하였듯, 미적주권이 확립된 순수서정시의 극대화가 가뜩이나 어려운 시간대에 ‘따뜻한 감성과 매혹적 형상’으로 시적 상상력을 응축시켜 형사(形似)한 김일수 시인이, 감동의 회복을 위한 고뇌는 눈물겨운 정신작업으로 새삼 충직한 독자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된다. 시학적 현상을 대상으로 ‘정의, 분류, 분석, 평가 등에 관한 일체의 검증’은 생명적인 정신작업과 그 맥이 잇닿아 있기에 시인과 독자와의 이해의 간극(間隙)을 좁혀 시인의 문학성과 그 뜻의 해명은 유의미하다. 고희의 시간대를 지나치며 그 자신이 “웬일이냐고 캐묻는데 구차스러워/애인과 나눈 사랑의 흔적이라니/주위의 눈빛들이 축포를 터트리는 듯했고/내 칠순잔치는 그토록 화려하게 막을 올렸다(칠순잔치는 그렇게 시작됐다)”는 주위의 눈빛들이 축보를 터트리듯 탄성이 절로 발아되는 현상이기에, 비센떼 우이도부로가 시학의 근본원리를 ‘현실의 해체와 변형’으로 의식하면서 시인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것이 ‘감성적 시학이며 예술론임’을 주장한 점은 다행스럽다. 작금의 현대시는 객관화된 상대주의적 가치에 지나치게 노출될 때 소통의 불가능을 초래하는 위험성을 지닌다. 따라서 명쾌한 소통을 위한 묵언과 관조의 통로이행은 진정한 자의식과 적확한 언어를 찾기 위한 사유의 시간과 긴밀한 관계성을 맺기에, 해체로서의 창조원리와 주체의 분열에 있어 진정한 시인은 창조자로서 ‘작은 신’이 되는 체험을 때로는 고백하기에, 시적 행위야말로 삶의 현상을 부정하고 파괴하고 해체하는 힘의 연계선상에서 이루어질 수 있기에, 표제 시격인 <하늘과 기러기>에 관해 한번쯤은 심사숙고할 타당성이 따른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인용한 시편 ‘나그네의 이향에서/본향의 먼 하늘을 향해’의 시구처럼 절대 구원자의 상징인 하늘과 진아(眞我)의 표징인 기러기와의 단순대칭은 독실한 그리스찬인 그 자신의 깊은 신앙심에서 발현(發現)된 의미의 시적형상화이다. 그 외의 시편 <어머님 편지>나 <어머니의 돋보기>에서 무론하고, 지각과 인식의 미끄러짐 속에서 자유롭고 매혹적인 시적 작위는 익숙함 그 자체가 낯선 사유의 상투성에 의해 생산된 기형일 수도 있다. 그 같은 시적 정조(情調)는 “돛단배 하나 가득 꿈 싣고 출항을 했지/멀고도 외로웠던 항로/금빛생명 은빛 사랑은 가고/이국의 해변은 적막일 뿐(序詩)”에서 시적 상상력을 통하여 입증된다. 어디까지나느림의 시학에 접목시켜 미적인 서정성보다 자극적인 공감각의 파상(破狀)으로 만연되는 미의식의 저속화를 해소하기 위해 ‘심상의 소통과 상징성’을 거부감 없이 조화시켜 수락한 그 자신의 고뇌와 노력의 행방은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인자로 지적된다. 아울러 “고향의 선영은 고조, 증조, 조부,/부모와 숙부모 모두 잠들어 있는 곳/나도 죽으면 그 먼발치에 가 묻히리라(죽어 어디에 묻힐까)”를 포함해서 <가라앉은 결혼반지>, <귀향>, <동병상련>, <三代>, <어머니의 돋보기>, <손자의 돌상차림> 등에서 해명되어지는 가족과 혈연에 연계한 분별력과 집착에 의한 애증은 마침내 신선한 감동을 안겨준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스스로 자신을 태우면서/세상에서 가장 밝은 빛이 되신, 식을 줄 모르는 사랑/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이처럼 ‘세상의 빛, 아름다운 이름’ 어머니의 순결한 사랑 앞에 평생을 감동하고 감사하며, 지상의 작은 천국인 가정을 축으로 한 일관된 그 자신의 돌봄과 심상의 소통을 위한 이행작업은 때때로 황홀한 숨 막힘에 견주어진다. 뿐만 아니라, 종교성이 내재된 서정적 자아의 관점에서 사유하는 심령의 상처를 치유하는 정신작업은, 심각한 언어의 공해로 영혼마저 피폐된 오늘의 사회현상에서 또 하나 삶의 본질에 대한 가치 있는 교시적 의미로서의 확인이다. 특히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어린 아들에겐 심지어/호롱불 장난도 금하셨던 아버지/철없는 손자에겐/처마 밑 장작더미 옆에서/대보름쥐불놀이 놀아도/빙그레 눈감아 주시다니(三代)”에서 생의 이법을 통해 체득한 것처럼, 창조주는 너무도 소중하고 아름다운 대상은 인간의 손으로 잡을 수 없게 하였듯이 김일수 시인의 순진무구한 영혼의 노래는 아아(峨峨)한 청산처럼 아득한 그리움과의 연계성을 지닌다. 그 같은 현상들은 끝내 ‘바람 잘 날에 기(旗)를 올리는, 떨어지는 꽃잎의 넉넉함이며, 젖비린내의 달콤한 기억 또는 저 깊은 그리움의 빈자리, 강물 위에 뿌려지는 푸른 달빛’이다.
3. 감성의 새로움과 에스프리 상처 받은 이들의 영혼을 치유하기에 족한 따뜻한 감성의 시집 『하늘과 기러기』로 독자 곁으로 선뜻 다가선 김일수 시인은, 눈물겨운 삶의 고뇌를 통해 자기본령을 지탱하려고 이 땅의 어느 시인보다 자존감을 수호한 존재이다. 그 같은 시적 잠언(箴言)은 위대한 삶의 교시로서 충만한 생명감을 안겨주고 있다. 그의 정직한 시편들은 깊은 사유의 세계에 생명기호를 교신하거나, 푸른 목숨의 바다에서 파도소리마저 감미로운 선율로 탄주하는 시적 재능이 수사(修辭)로 빛나 소소한 삶의 일상에서 디오니소스의 영광에 머물게 한다. 따라서환유적 결핍으로 이질적인 욕망의 그림자가 엄습하는 점을 감안할 때, 성숙한 독자는 라깡적인 발상으로 의욕적인 욕망이 ‘다른 어떤 것’을 추구하는 환유적 행위로 견주어 지기에,‘절제된 언어로 본질적 형질을 회복하는 고독한 창조적 제작자’로 칭하여도 결코 모순되지 아니하다. 이 점에 있어 “당신의 위대함을 포옹하는 순간은 지금이다.”라는 오프라 윈프리의 주장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예지력(叡智力)이 빛나는 김일수 시인의 시편은 매혹감을 체득케 하는 상상력의 통합이기에 시적 변명을 허락하지 않는다. 온유한 성품을 지닌 그 자신이 평생을 형법학자로서 지극선(至極善)이 상실된 불투명한 일상에서 갈등 앞에 그토록 고뇌하다 “회초리 끝은 꽃샘 추위인 양 매서웠지만/아린 흔적엔 늘 온기가 남아 감돌았으니/동토를 적시는 봄비 같이/방종의 굳은살을 녹이던 눈물(사랑의 매)”에서 입증했듯이 인식의 통로를 거쳐 자연의 숨소리로 변형시킨 행복한 언어의 집짓기는 한순간 경이감을 안겨준다. 여기서 차고 처연(悽然)하되 투명한 시적 이미지는 암울함과 칙칙함을 말끔 정화시키는 매개로 작용한다. 비교적 그의 시편에 수용된 현대의 불안의식, 발화하는 현대의 감각적 표현 등으로 지적될 뿐 아니라 내면인식에 깊이와 중량감을 더하여 한층 눈부신 존재의 꽃을 피워내고 있다. 그의 시편에서 하나의 특이성은, 인간소외의 문제를 온 몸으로 항변하다가 홀로 있기와 직면하는 대상과의 관조를 위해 거대한 공해의 도시공간을 뛰쳐나와 자연(physis)과 연계성을 맺는 현존재(Dasein)로서 삶의 본질을 일관되게 입증하려는 순수한 신앙심에 잇닿은 끈질긴 집념이다. 한편 P. B. 쉘리의 지적처럼 “시인은 영감의 비의(秘義)를 해명하고 사제로서의 소임” 수행일 것이나, 최소한 행복한 언어의 집짓기에는 주의집중 하여야 한다. 시적 형상화란, 삶의 다양한 소재의 선택과 세계의 만남에서 깨어남을 계기로 지속적인 변형을 추구하는 작업이기에 “하얗게 단장한 담장 고양이가 곧잘 뛰어 넘는다/흙발로 차고 넘은 담벼락에 다닥다닥 새겨진 발자국/화가인 집주인도 상상하지 못한 기이한 무늬다/도둑고양이가 그림 한 점 몰래 물고 와 걸어놓았다(도둑고양이)”처럼 갈등과 모순에 의한 구조물의 확장을 위해 낯선 물상과의 힘겨운 현재적 상황이 때로는 부딪기지만, 나약한 패배감와 두려움, 그리고 현실의 안주에 대한 거부감은, 새로운 질서의 창출을 위한 영혼의 세계에 접하는 감동, 즉 앙양된 심리상태의 적절한 유지에 의해 그 진위는 해명된다. 시론에서 ‘꽃’의 상징성은 생명의 고귀함과 아름다움이라는 이미지의 압축적 표현에 기인하기에, 비교적 지상적이며 여성상징인 꽃을 시적 질료로 식물성 언어로 즐겨 다루는 김일수 시인의 <백일홍>, <금강초롱>을 포함한 “감꽃 편편(翩翩)이 내려와/하얀 이밥인 양 수북이 쌓이곤 했었다(회상·3-감꽃)”나 또는 “떨어지는 꽃잎의 넉넉함/더 이상 바라지 않는 빈 마음(낙화)”에서 확인되는 시적 발아(發芽)로 그 자신이 현상적으로 지순하고 진정한 한 사람의 평화주의자임은 쉽게 입증된다. 모름지기 꽃은 재생이라는 순환적 이미지로서 바슐라르적 상상력에 의한 식물의 불이며, 생명의 빛인 까닭에 그의 시편에 수용된 꽃의 기능은 단절과 죽음을 이겨내는 강인한 생명력의 통로이며, 견고한 신앙심에 의한 또 다른 의미의 인자이다. 이처럼 동시대의 어느 시인보다 ‘비어 있음의 충만함과 인고의 기다림’으로 일관성을 유지하며 그의 작열하는 시혼은 측은지심(惻隱至心)과 결부되어 있다. “영원으로 가는 길 위에/하얀 그림자 하나 드리운다/마야 문명의 시간/영혼의 숨결 호흡하며 고독한 사제(司祭)는/만상을 불러 모아 불변의 질서로 옷 입힌다(해시계)”는 시적 상상력에 의한, 흔들리는 물상의 그 본질을 파악하는 투시적 효과와 긴장 뒤의 안도감을 안겨주는 반응, 그리고 분망한 삶에서 느림의 시학을 교시하기에 그의 시사(詩史)는 미적주권의 확장으로 보다 견고하다.특히 그의 시편 <고로쇠나무>에서 “날카로운 창 끝에 찔려서도/곤고한 영혼들에게 아낌없이/물과 피를 쏟으셨던 십자가 위의 예수처럼/가녀린 등허리 찢긴 살갗 사이로/하염없이 흐르는 피/목마른 영혼들 마시라고 정겹게 내어주는/연민 깊은 고로쇠나무”를 통하여 안정감을 지탱한 시적 형상화는 자연의 순차를 거역하지 않은 삶의 질서에 대한 확고하고도 일관된 신앙이다. 생생한 일탈의 정신을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상의 피 흘림을 연계한 시학의 질감과 터치에 의한 창조적 활력(gold brain)으로서의 생명적인 시작 행위야말로 따뜻한 감성에서 묻어난 감미로운 눈물과 천상의 층계를 오르는 고독한 순례자의 행보임에 틀림이 없다. 이 같은 말끔 정제(精製)된 시어로 그의 시적 인식이 공감각적으로 처리된 눈부심은 심령의 가난함에 의한 시적 추이(推移)를 걸쳐 기독교의 신앙과 결속된 실험적 윤무(輪舞)로 이해된다. 한편, 김일수 시인이 목가적 서정으로 내면인식을 채색한 아름다운 창조적 영혼은 기법의 단순성과 담백한 시격에 의해 모남이 없을뿐더러, “감성의 새로움과 에스프리”의 극대화로 불안의식의 회복과 온몸을 던져온 일상의 삶은 절박함을 털어낸 뒤의 평온함이 자리해 있어, “하늘에 단지 뭉게구름뿐일지라도 살아 존재한다는 것에 기뻐해야 한다.”는 인류의 정신적 스승인 헤르만 헤세의 지적처럼 그의 시적 세계는 투명해서 깨끗하고 한층 평화롭다. 시집의 평설을 가름하며, 실험적인 시의 깊이와 다양성을 주지할 때, 이 시대의 진정한 휴머니스트인 김일수 시인은 별처럼 존귀한 존재감과 정체성의 자리매김을 위하여 잔존한 재래시의 단점을 현대시의 기법과 감각으로 극복해야 한다. 알맞은 시적 토양의 조성을 위한 실험정신으로 ‘행동과 언어, 그리고 깊은 사유’를 시종자의 극대화로 확장시키되 생명의 씨앗을 파종하는 농부의 보폭(步幅)으로 ‘슬로 라이프(slow life)적인 시학’에 입각한 시각에서 대상에 대한 깊이와 파동은 관망할 점이다. 모쪼록 세계와 자아의 관계성을 모색하며 전략적이고 도전정신에 가까운 변형을 위해 시적 대상에 드리워진 깊고 칙칙한 어둠의 그늘을 말끔 걷어내는 생명외경과 미적주권의 확장을 시대적 소임을 충실히 이행하여 “맑은 영혼에서 통신된 따뜻한 감성적 형상”에 하늘의 은총과 생명감의 충만을 더없이 소망한다.
-엄창섭 시인의 『하늘과 기러기』서평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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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일수교수님의 출판기념회에 다녀왔습니다. 변호사 아들이사회를 보았습니다. 가족들 소개가 있었는데요 모두 훌륭하게 키운 터여서 참 부러웠습니다. <수신제가>의 모범이어서 <치국평천하>에 참여할 자격이 충분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엄교수님이 어제 출판기념회 도중 실시간으로 보낸 카톡을 받았습니다.
'홍 회장님께서 지금 축사를 하고 계신다'면서 사진과 함께 말이죠.
서평은 이미 한 달쯤 전에 보내왔었지만 출판기념회 후에 올리리라 생각했었기에 늦었습니다.
삼년상을 치른다는 기러기를 앞세운 제목부터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축하합니다.
그리고 글, 그림, 음악을 삼위일체로 만들어 올려주신 월광 선생님께 감사합니다.
실로 오랜만에 방문해보니 면목이 없습니다.
그동안에 카페지기님은 물론, 허돌 시인님을 비롯한 회원님들의 노고가 여전하셨음에 더욱 그러합니다.
'강릉사랑문인회' 이름만큼이나 강릉문인을 감미로운 푸른 달빛으로 보살피고 어루만지는 모성의 그 따뜻함은 감동과 감사입니다. (엄창섭)
심온님의 시집 '하늘과'기러기'가
정평 높은 엄 교수님의 서평이 더해져 광채가 휘황합니다.
두 분의 아름다운 어울림이 극적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