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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교시-귀농 선배와의 만남
나의 좌충우돌 올챙이 농부시절
오늘 주제가 귀농 첫걸음입니다. 귀농 전후의 마음자세나 체크리스트는 별도의 교재인 매뉴얼에 자세히 쓴만큼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 하지는 않겠습니다. 대신 오늘은 교재에 없는 이야기, 귀농초에 주고 받은 편지글,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할까 합니다. 세상만사가 그렇듯 모든 일은 사람과의 사업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교육생이 아닌 귀농 후배로서 여러분보다 앞서 내려온 이가 어떤 행로를 거쳐 홍성에 안착하게 되었는지 지켜봐주시기 바랍니다.
솔직히 저는 도시에 있을 때 지극히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은 농촌진흥청의 현장명예연구관, 농촌경제연구원의 현장리포터로 활동하며 몇몇 기관단체에서 이름을 기억하고 있으니 제게는 농촌이 더욱 고마운 존재입니다. 저같이 단점이 무수히 많은 사람에게도 끊임없이 할 일이 주어지니 농촌은 분명 기회와 가능성의 땅임에 분명합니다. 제가 가진 유일한 장점이 한 가지 있다면 필요를 느낄 때 적극적으로 바뀐다는 겁니다.
이를테면 어떤 책을 읽고 깊이 감명을 받으면 저자와의 소통을 시도합니다. 이런 특성은 귀농을 준비할 때도 유감없이 발휘되었습니다. 귀농을 결심하고 즉시 농민신문을 구독했는데 마침 독자투고란에 어느 선배 귀농인의 사연이 실렸습니다. 조금 길지만 제가 교육시 자주 쓰는 자료인지라 여기 그대로 싣겠습니다. 당시 저는 그분께 제가 쓴 책 한 권을 보냈습니다.
이환의님께서 보내주신 책과 편지 잘 받았습니다. 책의 내용을 보고 하신 일에 대해 소비자의 한 사람으로 박수를 보냅니다. 기업에서 볼 때 소비자가 봉이듯이 농사꾼도 정책의 봉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사실 저는 귀농시 조용히 사는 전원을 꿈꿔 왔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귀농, 그날부터 도전하면서 배우면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습니다.
저희 이야기가 1996년 12월 2일 KBS 6시 내고향에 방송되었습니다. 그로부터 많은 분들이 오셨고 또 궁금해 하셨죠. 도시민들이 귀농을 하시고자 여러 가지 것들을 알고싶어 하시는데 저 자신은 무조건 좋다고만은 답을 못해드렸습니다. 농사꾼도 어찌보면 의사나 약사처럼 생명을 다루는 귀중한 직업인데 주위의 시선은 그렇지 못합니다. 저희가 들어올 당시는 더더욱 오죽 못났으면 귀농했을까라는 주위의 편견, 특히 관공서의 태도는 참 힘들었습니다. 서론이 매우 길어졌네요.
저희의 경작지는 십 년 임대로 들어왔고 집은 이곳에 와서 임대지 한켠에 지었습니다. 그리고 주력 품목은 토종닭이고 그외 야채와 상추 등도 합니다. 그리고 이곳의 지가는 국립공원내 별장지로 상당히 고가입니다. 평당 30만원 정도이나 매물이 없습니다. 그러나 정선군쪽은 아직 평당 8천원 정도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이사올 당시만 해도 농촌이었으나 지금 이곳은 주위가 모두 상권 형성이 되다보니 권하고 싶은 곳이 못됩니다. 책을 읽다보니 이환의님 부부같은 분들이 농촌으로 많이 들어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면으로 글을 쓴다는 것이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려드릴 수 없어서 안타깝네요. 지금 저희는 유기농을 하면서 환경감시단원으로 활동도 합니다. 그리고 경실련 회원이기도 하구요. 사실 제가 인천서 살았다면 글쓰는 일도 없었을 걱예요. 이곳으로 와서 이곳저곳에 투고하고 공무원과의 대면에서 참 많이도 울었습니다. 한 예로 집앞에 간판을 놓고 두릅을 팔던 어느날 불법간판이라고 면직원이 와서 철거를 요구하더군요. 저는 농산물을 팔아줄 것을 요구했지만 면직원 입에서 나온 말은 “이 무식한 아줌마야!”로 시작된 고압적인 행동이었습니다. UR 타결, WTO 등으로 시끄러울 때 면직원이 초보농부인 나에게 보여준 모습입니다.
지금은 그 여직원을 용서하고 언젠가는 찾아가서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을 기도합니다. 언제 한 번 오세요. 시간이 되는대로 오시면 좋겠네요. 전화를 주셔도 좋구요. 그리고 농사는 자기자신과의 싸움인 것 같아요. 연락을 주시면 도와드릴 수 있는 것은 도와드릴께요. 안녕히 계세요.
송◯◯ 올림
지금도 이분과는 가끔 연락을 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더욱이 제가 사는 면내의 학교 출신인지라 더욱 친근한 느낌이 듭니다. 귀농학교 시절 아내에게 오늘의 홍동을 있게한 풀무학교의 홍순명 선생님께서 따뜻한 격려의 엽서 한 장을 보내주셔서 아직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특히 엽서중 ‘일본시대 독립운동하는 정신으로 바른 시골사람이 늘기를 바라고’ 라는 귀절은 귀농후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이 되었습니다. 엽서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봅니다.
오미정씨,
봄 모습이 하루하루 익어가고 있습니다. 요즘 교지를 손에 잡히는대로 보내드립니다.
귀농에 뜻을 두고 구체적인 협의까지 하신다니 보통은 어려운 일입니다. 일제시대 독립운동하는 정신으로 바른 시골사람이 늘기를 바라고, 또 두 분에게 너무 무리없는 귀농이 이뤄지면 좋겠습니다. 고향에 있는 학교니 언제고 들러주십시오.
1997. 4. 19 홍순명 드림
이렇게 인연을 맺은 홍선생님은 제 인생의 스승으로 홍동지역에 바이오가스 시스템(Biogas System) 도입, BMW(Bateria Mineral Water)농법, 아시아오리농업대회 개최 등으로 함께 했습니다. 말이 귀농학교 시절이지 기실 아내와 저는 당시 사정으로 귀농학교에 두 사람이 합쳐 세 번밖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기수는 2기지만 동기들 얼굴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후 본부 이사를 거쳐 귀농운동본부와는 지금까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홍성을 최종 귀착지로 낙점하게 된 것도 순전히 본부의 추천에 따른 것으로 삶의 전환점을 마련해준 분들께 늘 감사하게 됩니다. 홍선생님의 엽서에 힘을 얻어 저는 서울에서 시골로 삶터를 옮기기 열흘 전에 장인 장모님께 한 통의 편지를 드렸습니다. 긴 글인지라 추려 적겠습니다.
장인, 장모님 보십시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저희 부부와 아리수,미지 역시 두 분의 염려와 기원속에 건강히 잘 있습니다. 하나뿐인 귀한 딸을 데려가서 호강은 커녕 이 고생 저 고생 시켜 평소 두 분께 죄스런 마음이 가시지 않습니다. 더욱이 추석을 코앞에 두고 많이 놀라실 소식을 전해드리게 되어 더욱 송구스럽습니다. 드릴 말씀은 이번 추석을 지내고 9월 21일 일요일에 저희 가족이 시골로 이사를 가게 된 사실입니다. 아내나 저나 결혼후부터 줄곧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복잡하고 각박한 도시를 떠나 공기좋고 물맑은 시골로 내려가서 살자는 논의를 해왔는데, 그 계획을 앞당겨 작년 11월부터 구체적으로 준비를 해왔습니다.
기억나시는지요? 올 2월에 제가 처가를 거쳐 전국 곳곳을 둘러보러 다니던 일 말입니다. 그간 경남 산청, 충북 진천, 충남 금산, 전북 전주, 광주 인근 등 짬이나는 대로 서울 말고 저희가 살만한 곳을 찾아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곳이 고향과 처가의 중간쯤에 자리잡은 홍성군 홍동면 금평리 상하중 마을입니다.
많은 지역을 돌아다닌 결과 이곳이 다른 농촌지역과는 달리 젊은이들이 많이 살고, 너른 지역에 총 농가수가 오십호 정도로 쾌적하고 면소재지와 가까워 아이들 교육이나 살아가는 데 큰 불편이 없고 인심도 좋은 편이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중략)
농토는 논이 열두 마지기에 밭이 세 마지기쯤 됩니다. 모두 집주변에 있고 토질도 비옥하여 농사가 잘 된다 합니다. 도지는 논이 3분작으로 조금 센 편이고 밭은 쌀 석짝입니다. 집주인은 서울에 살고 동생분이 마을에 있어 여러모로 도움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장인, 장모님!
이미 이곳 서울에는 농사를 지으려고 시골로 내려가려는 사람들의 모임(전국귀농운동본부)가 생기고, 저희같은 사람들을 모아 농사체험, 농사짓는 법을 가르치는 학교 비슷한 단체들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곳에 오는 사람들도 옛날처럼 사업에 실패해서 시골로 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염되고 각박한 도시생활이 싫어 내려가려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40대 이상도 거의 없고 대부분 2~30대로 요즘은 처녀,총각들도 꽤 많습니다. 저희도 이곳 귀농운동본부 소개로 금평리에 들어가게 된 것이지요.(중략)
그러니 저희가 내려가서 농사짓는다고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두 분 가까이에 딸자식 부부가 사는 만큼 이따금 잘 사나 감독도 하러 오십시오. 저희도 자주 찾아 뵙겠습니다. 저나 아내나 돈 욕심없고 자식교육 욕심도 없으니 그저 평범하게 열심히 살아갈 생각입니다. (중략) 성급한 판단일지 모르겠으나 앞으로 서울은 사람이 살기 힘들 정도로 교통, 환경문제가 심각해질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향후에는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서울을 떠나 시골로 내려올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말씀을 드렸으나 언제 어디에 가든지 집사람과 알뜰살들 싸우지 않고 화목하게 살려고 합니다. 부디 너무 염려하지 마시고 그저 지켜봐 주십시오. 늘 건강하시고,한가위 푸근하게 맞으시길 빌겠습니다. 내려가서 찾아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1997년 9월 10일
불효 사위부부 올림
처가 식구들이 염려할까봐 비밀스럽게 귀농준비를 해오다 추석 며칠전 전격적으로 알려드린 편지입니다만 바람직한 방법은 아닙니다. 이사후 처음에는 많이 걱정하셨지만 몇년이 지나자 오히려 가까이에 딸자식 부부가 있어 무척이나 든든해 하셨습니다. 당시 귀농시점이 가을이어서 농사일은 거의 없었지만 할 일은 많았습니다. 70대 노부부가 빌려살던 집이라 곳곳에 치우고 정리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였습니다. 당시 일기 두 편을 통해 초보 귀농인의 애환을 살펴 보겠습니다.
97년 10월 31일 <이타적인 삶>
오전내내 감나무 밑의 잡동사니와 쓰레기를 치우고 양수기에 보온재를 덮어줬다. 그런데 두 시경 양수기가 이상 반응을 보인다. 한 시간 가까이 걸려 간신히 양수기를 살려내고 세 시경 이기영씨와 함께 금마에 있는 처가 논으로 볏짚을 실으러 갔다. 논에는 장인,장모님이 이미 한 시경부터 나오셔서 못난 사위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셨다고 한다. 저녁 늦게 다시 양수기가 고장이 났다, 아홉시 십분경 지역민인 김00씨 집으로 전화해 내일 오전에 양수기를 봐달라고 요청했더니 그 즉시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왔다. 이 추운 밤에 모자도 안쓰고 써치라이트를 들고와서 한참을 고생했다. 정말 타인을 위해 특별한 애정이 없다면 이렇게까지 하기는 힘든 노릇이다.
97년 11월 11일 <인분 푸기>
어릴때 말고는 처음 해보는 일이라 완전무장한 후 미뤘던 인분을 푸기 시작했다. 한 시간여 냄새나는 작업을 무사히 마치고 외양간을 손본 후 바깥마당 주변의 대밭을 정리했다. 오후 두시반경 아내는 할머니와 예산으로, 나는 홍성에서 임시로 취직을 위해 점포들을 둘러봤다. 하지만 불황이라 그런지 일자리가 거의 없어 생활정보지만 한아름 들고가 농협에 앉아서 신문을 들춰보고 있노라니 나중에 경비아저씨왈, “손님, 한참동안 앉아 계셨는데 누구 기다리세요?”라고 물어왔다. 머쓱해서“아뇨”라고 답하고 계속 신문만 탐색했다. 그나마 눈에 들어온 정보 하나는 주유소 야간 주유원. 30세 이상에 월급은 75만원에서 80만원이고 근무시간은 오후 7시부터 익일 8시까지란다.
귀농한 97년 가을, 첫 농사로 오십평쯤 마늘을 심고 98년 봄에 본격적인 농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전 자료를 찾아보니 그해 5월 8일에 서울살 때 친하게 지내던 이웃에 보낸 편지가 눈에 띕니다. 지금 찬찬히 살펴보니 농사 첫해 새내기 농부의 즐거움과 어려움이 같이 묻어나는 것 같아 소개해 드립니다.
심선생님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오래간만에 소식 띄웁니다. 심선생님은 물론 과거 안면이 있었던 분들께도 변변히 연락드리지 못하고 이곳 시골로 온지도 벌써 8개월이 넘었습니다. 지금은 IMF 로 인해 귀농바람이 불고 있지만 마땅한 지역을 찾아 다리품을 팔다가 귀농운동본부의 도움으로 홍성에 정착하였고 이곳을 선택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다른 지역에 비해 젊은이들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튼 저희 가족은 작년 9월 21일 귀농 이후 특별한 문제점없이 건강히 생활하고 있습니다. 마을 인심이 넉넉하여 작년 가을이후 겨울까지 거의 모든 채소류를 주민들로부터 거저로 받는 행운을 누렸고,겨우내 이웃 냉이밭에서 마음대로 냉이를 캐어 지지고 볶는 행복도 맛보았습니다. 이미 저희보다 먼저 내려온 귀농 선배가 있어 형제처럼 지내고 저희 이후로 인근 마을에 다섯 가족이 정착하는 등 이곳은 가히 귀농자의 메카라 불리울 정도입니다. 모두 40중반 이전의 젊은 농군들이지요. 그리고 대부분 귀농운동본부를 거쳐온 관계로 유기농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저희의 농지규모는 논이 2천 4백평, 밭이 천평이며 내년에는 올해 매입한 농지를 포함해 논이 4천평으로 늘어나고 밭도 필요해 따라 더 매입할 생각입니다. 솔직히 초보농군으로, 특히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는 유기농으로는 벅찬 규모입니다. 벌써 밭에는 마늘, 양파, 완두, 얼갈이 배추, 열무, 강낭콩, 도라지, 고추, 생강, 호박, 유월태 등이 자라고 있으며 완두콩은 수확을 코앞에 두고 있습니다. 올해의 주력작목은 생강으로 약 3백평을 심었고 씨앗값만 55만원이 들어갔습니다. 벼농사는 밥맛이 좋다는 고시히까리, 찹쌀, 흑향미가 못자리에서 잘 자라고 있습니다. (중략)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작년 겨울에 5~6개월된 암송아지를 사와 잘 길렀는데 그만 얼마전에 급체로 죽었습니다. 배합사료와 짚위주로 먹이다가 갑자기 푸른 풀을 주니 너무 먹어서 소화불량에 걸렸다고 하더군요. 거금 80만원을 주고 사왔지만 그동안의 수고와 사료값에 손해가 매우 큽니다. 250kg이나 나가는 소를 묻는 것도 큰 고역이었습니다. 그 외의 짐승으로는 닭 몇 마리와 토끼 한 쌍, 발바리 한 마리를 기르고 있습니다. 쥐들도 꽤 있지만 걔들은 자기 혼자 크니까 기르는 것은 아니지요.
요즘은 말그대로 눈 코 뜰 새 없이 지낸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보통 아침 6시에 일어나 저녁에는 작물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일하고 있습니다. 저녁을 먹고나면 대개 8시반쯤 됩니다. 뉴스보고 신문 뒤적이다 열시쯤해서 그냥 곯아 떨어집니다. 애들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어린이집 교육이 충실해서 위안을 삼고 있습니다. 엊그제는 하루종일 논두렁 작업(물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논둑의 쥐구멍 따위를 보수하는 일)을 했는데 아내가 미나리를 뜯다가 미끄러져 그만 논속으로 풍덩 빠지는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해보니 농사란 게 만만치 않은 일이더군요.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짓겠다”는 생각으로 달려들면 얼마 버티지 못할만큼 노동강도가 센 일이 농사일입니다. 저희 부부도 내려온지 두 달이 못되어 아침에는 손가락을 구부릴 수 없을 정도로 농부증 증세가 나타납니다. 귀농한 사람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또 경운기나 관리기 따위의 농기계는 잘못 다루면 매우 위험해서 사람이 죽거나 상하는 예를 종종 듣고 있습니다. 저만해도 경운기가 도로에서 급경사지 논으로 들어가 뛰어내리지 않았으면 큰 일 날뻔한 일이 있었습니다. 매사 조심해야겠지요.(하략)
1998년 5월 8일
홍성군 홍동면 금평리에서 드림
이 글속에 귀농 후배님들께 드리고픈 말씀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농촌의 인심, 유기농의 수고로움, 새내기 농부의 고된 하루, 아이들 이야기, 농기계의 위험성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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