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16:1-14
찬송가 374장 ‘나의 믿음 약할 때’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싶어 고대 자료들을 복원하려는 시도들이 있습니다. 이런저런 그림들을 두고 예수님의 얼굴이라고 말하지만, 실제 예수님의 얼굴이라고 할만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모습을 추정할 수는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이사야 53장 2절입니다.
(이사야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흔히 이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께 인간적인 매력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심지어 권력을 마다하였고, 돈과 명예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보기에 인간적 매력이 느껴질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병든 사람의 곁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고, 무시당하던 사람의 친구가 되었으며, 모두가 비난하던 죄인을 용서하고 안아주는 모습을 통해 인간의 진정한 매력은 겉모습이 아니라, 그 속의 진실함인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오늘날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매력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삶의 방식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모두가 쳐다볼 만한 뛰어난 매력을 가졌더라도 그 삶이 허망하게 끝나는 아쉬운 사람이 있고, 인간적인 매력은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데 그 삶이 깊고 진하여 늘 향기나는 가득 찬 사람이 있습니다. 교우님들은 어떻습니까? 남유다의 세번 째 왕인 아사는 삶의 어느 순간에 추구하던 매력의 기준이 바뀌었고, 그로 인해 큰 아쉬움을 남기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사 왕이 남긴 아쉬움과 왜 그가 아쉬움을 남기는 인생이 되었는지를 알려줍니다.
(1-6) 아람 왕을 의지한 아사
아사 왕 제삼십육년에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서 라마를 건축하여 사람을 유다 왕 아사에게 왕래하지 못하게 하려 한지라
아사 왕이 유다를 통치하던 초기에 그는 우상을 타파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여 유다에 평안을 가져왔습니다. 심지어 구스 사람 세라가 10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을 당시, 아무도 아사의 승리를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였습니다.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이런 일은 소문이 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였는지 북쪽 이스라엘 사람 중 아사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에게 인간적인 매력을 느낀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의 왕 바아사는 남과 북의 지리적 경계인 ‘라마’라는 곳에 성곽을 세워 사람들이 오갈 수 없게 만들고, 또 그곳에서 남유다와의 전쟁을 준비하였습니다.
이같은 이스라엘의 도발에 전에는 구스의 100만 대군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이겨냈던 아사가 이전과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2) 아사가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궁 곳간의 은금을 내어다가 다메섹에 사는 아람 왕 벤하닷에게 보내며 이르되
아사는 이스라엘의 도발 앞에서 갑자기 아람왕 벤하닷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역대기를 읽는 독자들이 혼란스러워지는 내용입니다. 조금 전까지 유다에 종교개혁을 일으킨 아사입니다. 그래서 온 나라에 전쟁이 없는 하나님의 샬롬(평안)을 가지고 온 장본인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있습니다.
학자들은 유다에 평화가 머무른 기간 동안 아사의 신앙이 식어갔다고 해석합니다. 아사 시대의 평화는 영원한 평화가 아닙니다. 일시적일 뿐입니다. 하지만 아사는 거기에 물들어 버렸습니다. 마치 베드로가 변화된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이곳에 초막 셋을 짓고 안주하자고 말하던 모습처럼, 영원한 평화가 아니라 일시적 평화에 만족해 버린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많은 사람이 아사를 찾아왔을 때, 그들은 아사에게 ‘당신은 위대한 왕’이라고 부추기지 않았겠습니까? 인간적인 매력이 다분했던 아사에게 사람들은 온갖 달콤한 말로 추켜세웠을 것입니다. 이에 점차 물들어 가던 아사는 평화의 시기를 지나며 자신이 추구해 오던 매력의 기준이 바뀐 겁니다. 본래 그 내면에서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던 믿음을 기준으로 살았던 아사가 이제는 힘과 능력과 권모와 술수에 의지하는 인간적 매력을 기준하여 사는 허망한 인생으로 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사는 벤하닷에게 도움을 구하고자 은금을 준비했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원문에는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궁 곳간의 은금이라는 말 사이에 ‘모든’이라는 형용사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전과 왕궁 창고에 있던 모든 은금을 전부 벤하닷에게 갖다 바쳤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큰 금액을 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3) 내 아버지와 당신의 아버지 사이에와 같이 나와 당신 사이에 약조하자 내가 당신에게 은금을 보내노니 와서 이스라엘 왕 바아사와 세운 약조를 깨뜨려 그가 나를 떠나게 하라 하매
아사가 창고에 있던 모든 은금을 준 이유는 북이스라엘을 막으려고 벤하닷과 동맹을 맺고자 하는데, 사실 벤하닷은 이미 이스라엘 왕이었던 바아사와 동맹이 맺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성립되어 있던 동맹을 깨고, 자신과 새로운 약속을 하자고 요청하려니 대충의 금액을 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큰돈이 있으면 나라 간의 약속도 깨는 가벼운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도무지 의지할 수 없는 대상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사는 그 가벼운 일을 위해 창고의 모든 은금을 다 써버렸습니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약속이지만, 어쨌든 벤하닷이 돈을 받은 이상 이스라엘을 공격해 주었습니다.
(4-5) 벤하닷이 아사 왕의 말을 듣고 그의 군대 지휘관들을 보내어 이스라엘 성읍들을 치되 이욘과 단과 아벨마임과 납달리의 모든 국고성들을 쳤더니 바아사가 듣고 라마 건축하는 일을 포기하고 그 공사를 그친지라
벤하닷은 북이스라엘의 몇몇 성읍을 공격하였는데, 5절에 나타나는 지명들이 그곳입니다. 그런데 이들 장소는 모두 목초지이거나, 교통의 요충지이거나, 곡식을 저장해 두던 창고가 있는 장소입니다. 군사적으로 방어하지 않으면 안되는 곳이기에 이스라엘 군대는 빠르게 대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전까지 라마를 건축하던 자재들이나 도구를 일시에 버려두고 재빨리 떠났습니다. 그런 까닭에 아사가 라마를 짓던 재목들을 손에 넣게 됩니다.
(6) 아사 왕이 온 유다 무리를 거느리고 바아사가 라마를 건축하던 돌과 재목을 운반하여다가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하였더라
아사는 북이스라엘이 버린 재목으로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하였습니다. 게바와 미스바는 북이스라엘과의 접경 지역으로, 아사는 여기에 다시는 이스라엘 군대가 남하하지 못하도록 요새를 세웠다는 말입니다. 이는 다른 의미로 아사가 자기 생각과 힘을 공고히 하여 ‘이제는 내 힘으로 유다를 지켜내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유다를 하나님이 아닌 자기의 나라로 공고히 세우려는 불신앙의 모습을 보이는 장면입니다.
개혁자였을 때 아사는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하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을 매력의 기준으로 삼았기에 많은 사람에게 주목받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 그는 교만에 빠져 권모술수를 써가며 자기 왕국을 건설하는 일에 혈안이 되었습니다. 이는 도무지 인간으로서 존경할 수 없는 추한 모습입니다. 결국 ‘무엇에 의지하여 사는가?’라는 영적인 질문이 사람을 아름답게도 하고, 추하게도 만듭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매력있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먼저 내가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지 자문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7-14) 아사에게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이같이 변질되어 버린 아사의 모습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보기에도 아쉽지만, 무엇보다 하나님께 가장 큰 아쉬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견자를 보내어 그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7-9) 그 때에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나와서 그에게 이르되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구스 사람과 룹 사람의 군대가 크지 아니하며 말과 병거가 심히 많지 아니하더이까 그러나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하나니라는 선견자가 아사에게 그의 불신앙과 인본주의적인 태도 때문에 이후에 전쟁이 있을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하나니의 말에서 흥미로운 점을 볼 수가 있는데, 7절에서 그는 아사에게 “왕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으므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다”라고 말합니다. 은금을 주고 동맹을 맺었지만, 그럼에도 아사가 통제하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8절에서는 과거에 아사가 구스 사람과 룹 사람의 큰 군대를 만났지만,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의 손에 넘기셨다.”고 전합니다. 곧 그렇게 큰 군대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기만 한다면 아사의 통제 하에 있게 됨을 전합니다. 인생을 살아 본 사람들은 누구나 고백할 것입니다. 내가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더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이라도 이런 일은 통제할 수 없을거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가진 아주 작은 힘도 인간의 모든 문제를 풀기에는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의지하여 살아야 하겠습니까? 너무 쉬운 질문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단순한 질문에 바른 대답을 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교만하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아사가 그렇습니다.
(10) 아사가 노하여 선견자를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의 말에 크게 노하였음이며 그 때에 아사가 또 백성 중에서 몇 사람을 학대하였더라
아사는 하나니의 충고를 괘씸하게 여겨 그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옥’이라고 되어 있지만, 원문의 의미로는 ‘고문실’입니다. 하나니를 고문실에 잡아넣고 고통을 주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니에게 고통을 주는 아사의 모습은 결국 하나님을 고통스럽게 하겠다는 의미이지 않겠습니까? 들을 귀가 없는 것은 차치하고, 하나님을 철저하게 등진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선견자 하나니를 아사에게 보내신 것은 아쉬움 때문입니다. 인생 전반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종교개혁을 일으킨 모습으로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요청입니다. 기회를 주신 겁니다. 그런데 아사는 자신이 하나님께 회개할 기회를, 오히려 선견자 하나니에게 회개를 받고자 그를 모질게 고문하는 기회로 날려버렸습니다. 하지만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거기서 멈추시지 않으십니다. 또 다시 아사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12) 아사가 왕이 된 지 삼십구 년에 그의 발이 병들어 매우 위독했으나 병이 있을 때에 그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
하나니를 고문했던 만큼 하나님은 아사에게 고문이라도 하셔서 그를 돌이키고자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아사는 발병이 났습니다. 학자들은 통풍이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극심한 고통 중에서 그는 회개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마지막 기회를 얻은 겁니다. 그런데 그마저 12절에서는 의사들에게 “구하였더라”라며 허무한 끝맺음을 알려줍니다. 아사가 얻은 최후의 기회가 그렇게 날아가고, 더이상 아사의 행적에 의미가 될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사의 인생은 거기서 종결됩니다.
(13-14) 아사가 왕위에 있은 지 사십일 년 후에 죽어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우매 다윗 성에 자기를 위하여 파 두었던 묘실에 무리가 장사하되 그의 시체를 법대로 만든 각양 향 재료를 가득히 채운 상에 두고 또 그것을 위하여 많이 분향하였더라
아사의 죽음 이후 장례가 치러졌는데, 역대기 기자는 그 장례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합니다. 그중 14절 말미에 “그것을 위하여 많이 분향하였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많은 사람이 아사의 장례를 찾아와 아쉬워하며 분향했는데, 히브리어 원문의 의미로는 ‘어마어마하게 큰불을 살랐다.’는 뜻입니다. 규모 면에서 역대기 기자가 특별하게 기록할 수밖에 없는 큰 장례식입니다. 아마도 인간적으로 매력적인 사람이었기에 수많은 행렬이 찾아와 그 죽음을 아쉬워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아쉬운 분은 하나님입니다. 아사가 하나님을 진실하게 섬기며 그윽한 향기를 풍기던 인생 전반과 달리 그의 후반에는 인간적인 매력에만 심취하여 결국 허망한 죽음을 맞이하였고 교만한 자의 말로를 보여 줄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흔히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의 수사 루터로부터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종교개혁의 기치가 된 문구들이 여럿 있지만, 그중에 라틴어로 된 이런 말이 있습니다.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에클레시아 레포르마타 셈페르 레포르만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기독교에서의 개혁은 언제나 성경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일은 한 번 행해지고 말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이 끝나는 날까지 항상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사는 아쉽게도 그의 인생 전반에 유다를 멋지게 개혁했지만, 그것으로 안주해버렸기 때문에 그 인생 후반을 아쉬움만 남기고 말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인간이 가지는 매력, 곧 아름다움은 일시적으로 그치는 외모나 능력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끝없이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영혼의 창문을 열고 주님과 만나며 교제하려는 의지에서 인생의 아름다움은 깊어집니다. 오늘 우리는 인간적으로는 매력적이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과 많은 사람에게 아쉬움을 남긴 아사의 인생 후반을 보았습니다.
부디 이를 교훈 삼아 우리들은 개혁된 교회로서 항상 개혁되기를 힘쓰십시다. 끝까지 개혁되기를 소망하십시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까지 말씀으로 돌아가, 어제보다 더 깊어지고 그윽해진 오늘을 살아가기를 기대하십시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깊고 진한 아름다운 매력을 가진 인생으로 인정받는 주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에게 아사의 인생 후반 모습을 통해 어떤 사람이 진정 아름다운 매력을 가진 사람인지 알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을 도구화하려는 인본주의적 생각과 하나님처럼 되려 하는 교만에서 떠나게 하여 주옵소서. 날마다 주님과 사귀며 주님의 도구로 주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는 성경의 사람, 말씀의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적당한 모습에서 안주하려는 나태함을 벗고, 항상 개혁되려는 성실한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우리와 만나 주시고, 우리 영혼의 닫힌 창문을 열게 하여 주옵소서. 이 하루도 주님의 은혜와 평강을 간절히 구하오니 풍성하게 내려 주실 줄 믿사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라마를 건축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2. 이스라엘의 도발에 맞서고자 유다 왕 아사는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습니까?
3. 선견자 하나니의 충고에 아사의 반응은 무엇이며 그는 어떻게 대응하였습니까?
4. 하나님께서 아사에게 주신 기회는 무엇이며, 역대기 기자가 아사의 장례를 자세히 기록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작성: 황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