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계수필창작교실 8기-13차시 합평자료(2023년 6월 3일 토)
문학 치료(3)
1. 면형의 집에서의 피정 /임선빈 5
1. 조용히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 복산성당 구역장, 반장들의 단체피정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2. 4월 11일 7시 30분 성당 출발하기 전 신부님의 강복을 받고 김해공항을 향해 달리는 버스를 탔다. 앞으로의 3일간의 피정 일정과 상세한 안내가 있었다. 곧바로 이어지는 묵주기도 역시 다른 단체여행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와 다름을 느꼈다.
3. 10시 10분 김해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11시 14분 제주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1번 창구로 나간 우리 일행에게 마중 나온 분은 면형의 집에서 버스 2호 차를 안내 맡은 수사님이셨다.
4. 버스 1호차는 경기도 광주 교구의 신자들 40분이 타고 있었고, 2호 차는 광주광역시 신자 4명이 복산 신자들 36명과 함께 합승했다. 총 80명의 동행이 시작되었다.
5. 1시간쯤 달려가니 미리 예약한 식당이 나왔다. 해물탕과 옥돔구이, 꽃게간장 등 맛있는 반찬이 즐비하게 나왔다. 식사 전 기도가 끝난 후 숫갈 소리만 날 정도로 정말 맛있게들 80명이 조용히 식사를 끝냈다.
6. 식사가 끝난 후 곧바로 버스가 간 곳은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에 위치한 이시돌 목장안의 ‘이시돌 새미 은총의 동산’이었다. 이시돌목장은 제주지역 최초의 전기업목장(全企業牧場)이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으로 1954년 제주도에 온 아일랜드 출신 패트릭 제임스 맥클린채(P. J . Mcgilnchey, 한국명 임피제)신부가 한라산 중간산 지대의 황무지를 목초지로 개간해 1961년 중앙실습목장을 건립한 것이 시초란다. 임피제 신부는 전쟁과 학살의 상처에 신음하고, 경제적 궁핍에 고통받고 있던 제주도에 희망의 씨앗을 뿌린 은인이고 성자 같으신 분으로 이곳을 개간한 후에는 전기업목장으로 만들어 관리하게 하신 분이라고했다.
7. ‘새미 은총의 동산’은 2009년 제주교구에서 세 개의 오름으로 둘러싸인 연못이란 뜻을 지닌 ‘삼뫼소’란 명칭을 ‘새미 은총의 동산’으로 변경하였다. 전체면적이 8만평에 달하는 이곳은 신자들이 언제 어디서나 찾아와 함께 기도할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는 제주교구 사제들의 뜻에 따라 성이시돌 목장을 세운 임피제(맥클린채)신부가 1992년 부터 목장 뒤쪽을 순례지로 본격적으로 개발하면서 시작되었다고했다.
8. 당시 교구장이었던 김창렬 주교는 이’삼뫼소‘를, ’새미 은총의 동산‘으로 명명하고 교구의 대표적인 순례지로 지정하였는데, 새미는 주님의 은총과 순례적인 기도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이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9. 들어가는 입구에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께 예수님의 탄생예고를 알리는 조각상이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여기 있는 조각상과 은총의 동산안에 있는 조각상들은 2003년~2007년에 걸쳐 조각가 박창훈님이 실제 크기로 제작한 것이라고 했다.
10. 새미 은총의 동산은 예수님의 탄생부터 최후의 만찬까지 주요사건을 표현한 예수님의‘생애공원’과 ‘십자가의 길'은 하느님께서 인류에 대한 사랑의 말씀과 구원의 약속을 실천하시고자 사람의 모습으로 오시어 스스로 십자가의 고통을 받아들이신 수난의 역사를 14개의 이야기로 구성한 기도와 묵상의 길, 삼위일체 대성당이 있는곳으로 천주교 제주교구의 순례장소라고했다. 전체면적은 약264,000㎡에 달하며 언제든 신자들이 찾아와 기도할 수 있도록 24시간 개방하고 있다고했다.
11. 십자가의 길은 130여점이 넘는 실제크기의 대형 조각 작품들이 예수님의 수난기를 재현하고 있다. 조각가 박창훈(요한)님과 많은 천주교 신자들의 봉헌으로 조성된 것이라고 했다.
12. 이곳 성이시돌 피정센터 은총의 동산 십자가의 길을 찾는 모든 분들이 재현된 십자가의 길을 통해 하느님의 숨결을 느끼고 예수님의 말씀과 고통을 묵상하며 성령의 힘으로 다시 태어나는 부활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으시길 바란다고 설명했다.
13. 예수님의 생애 공원은 성경말씀의 주요 장면 12개를 재현 실제 크기로 만들어 놓았는데 바삐 지나면서 수사님의 설명을 들었지만 가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기분이었다.
14. 성지순례로 지인들과 몇 번 다녀간 곳이긴 하지만 이렇게 면형의집 수사님의 상세한 안내를 받으면서 다닌 것은 처음이다.
15. 조각상을 보면서 성경말씀 곳곳의 주요 장면을 잘 표현했구나 하고 생각했었지만 ‘라자로야 나오너라’ 하는 라자로의 무덤을 재현한 곳을 관람할 때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죽은 라자로를 눈물을 흘리시면서 다시 살리셨을까 하는 생각에 한없는 사랑을 받던 라자로가 부럽기도 했다.
16. 어린나귀를 타고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시면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던 그 장면 , 환로를 받으신 것도 잠시,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 누가 당신을 팔아 넘길지 아시면서도 마지막 만찬시간,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라고 하시며 유다의 배반을 마음 아파하신 예수님
17. 유다는 예수님에게 자비를 구할 용기도 못내고 본인은 용서받을 수도 없는 죄인이라고 스스로 판단하고 목을 매다는 장면,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맹세까지 하면서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하고서는 닭이 울고, ‘닭이 울기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슬피 울며 예수님께 용서를 청하는 장면이 생각났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하였을 때 스스로 판단하여 용서받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자비를 예수님께 청하는 그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깨워 주는 장면이다.
18. 십자가의 길 뒤편으로 내려가니 넓은 호수와 호수 둘레에 주목나무 비숫한 작고 동구렇게 묵주알처럼 예브게 전지된 나무들이 묵주알들이 되어 사람들이 걸으면서 묵주기도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야외 미사를 할 수 있도록 제대가 있었고, 넓은 숲속에는 야외 공연도 할 수 있도록 무대와 즐비하게 의자들도 놓여있었다.
19. 그곳에서 나와 바삐 생태순례 송악산 둘레길(약2.7㎞쯤)을 걸었다. 산방산의 남쪽, 가파도가 손에 잡힐 듯 보이는 바닷가에 불끈 솟은 산이 송악산이다. 99개의 작은 봉우리가 모여있어 일명 99봉이라고도 했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이중 분화구-1차 폭발로 형성된 제 1분화구 안에 2차 폭발이 일어나 2개의 분화구가 존재-의 화산지형이기도 하다. 송악산 둘레길을 걷다 보면 형제섬과 가파도, 멀리 마라도까지 볼 수 있다. 완만한 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방목해 놓은 말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송악산은 일제강점기 일본군의 군사기지를 만들기 위해 강제 동원된 제주 사람들의 고통과 참상을 돌아보는 곳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예전엔 그 이름만큼 소나무와 동백, 후박, 느릅나무 등이 무성했다고 하는데, 일제강점기 군사기지를 만드느라 불태워져 지금은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풀만 무성할 뿐이다. 송악산의 해안가 절벽에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이 제주 사람들을 동원해 뚫어 놓은 인공동굴 15개가 있다고 했다.
20. 순례길이 끝나고 면형의 집에 들려 방 배정을 받았다. 방 짝지가 마음에 맞아 2일밤 행복할 것 같다. 방 배정을 받은 후 곧바로 미사에 들어갔다.
21. 저녁 7시부터 배식이 있었는데 수사님들이 주방에서 식당 자매님들이 일하시는 것을 같이 거들고 있었다. 음식도 깔끔하고 간도 잘 맞아 아주 맛이 있었다.
22. 이튼 닐 세멱 6시20분 소성무일도가 시작되었다. 면형의집 원장님이 선창을 하시고 신자들이 후렴을 하였는데 성스러운 기도 소리는 마음을 정화 시켜주었다. 8시 20분 아침식사, 9시 20분미사, 10시 30분 면형의 집을 출발하여 10시 50분 치유의 숲에 도착했다. 이곳은 그곳의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가꾼 숲으로 외부에 공개하고 있었다. 꼭대기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물맛이 참 좋았다.
23.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에 들렸는데 손님들로 혼잡 했지만 미리 준비해놓은 식어 빠진 돼지고기의 구운 맛은 영 아니었다.
24. 점심을 먹고 둘레 8코스를 산책했다. 대평 포구에서 논짓물까지 약 5㎞의 거리를 걸었다. 해안가를 따라 걷는 길이라서 스치는 바닷가의 시원한 바람이 상쾌함을 느끼게 했다. 천천히 걸어도 힘들기는 했지만 대부분 낙오자 없이 잘들 따라 걸었다.
25. 숙소에 들어와 먹는 저녁 식사는 꿀맛이었다. 저녁 7시 30분 고백성사, 마당에는 모닥불이 피여있고 모닥불 속에는 고구마가 구워지고 있었다. 학창시절 모닥불 추억이 아련하다. 쉴틈없이 짜여진 스케줄에 따라 움직여지는 이 시간들, 해 주는 밥 먹고 기도하고, 순례 다니는 것도 만만치는 않았다.
26. 셋째 날 7시 50분에 아침 먹고 9시 10분 미사 드리고 집에 올 짐보따리를 챙겨 가시리 유채꽃 받으로 순례길을 떠났다. 수십 개의 풍차들은 빙글빙글 돌고 아름다운 유채꼿들을 보며 사람들이 탄성을 자아내는데, 안내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 ‘여려분이 보시기에 이곳이 아름답게만 보일는지 모르겠지만 이곳은 아주 슬픈 역사를 지니고 있는 곳입니다. 가시리 이곳에서 4.3사태 때 가장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곳입니다. 그래서 가장 아픈 상처가 있는 곳을 유채꽃으로 덮어 제주 사람들이 가장 아름답게 꾸민 곳입니다. 조금은 기억하고 봐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설명을 들으니 지난 3월달 제주도에 왔을 때 그저 꽃이 아름답다고만 느꼈지 이렇게 아픔이 있는 곳인지는 몰랐다. 곧바로 안내를 받으며 평화공원으로 향했다.
27. 제주시 봉개동에 위치한 제주 4.3 평화공원은 4.3 사건 당시의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공간이었다. “ 4.3사건은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까지 7년 7개월에 걸쳐 제주도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6.25 전쟁이 시작된 1950년, 7월 초부터 8월말에 걸쳐서 경기 수원-강원 횡성 이남 대한민국 전역에서 벌어진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 단일사건 중 가장 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입니다. 학살은 대한민국 정부와 대한민국 국군 ‧ 경찰에 의해 계획적이며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국민방위군 사건과 더불어서 6.25 전쟁 기간 벌어진 대한민국의 가장 큰 오점 중 하나로 손꼽히죠. 8.15광복 직후에는 일본군이 철수하고 외지에 나가 있던 6만여 명의 제주 주민들이 일시에 귀환하여 급격한 인구 변동을 겪었고. 게다가 일제에 부역하던 경찰들이 미 군정하에서 다시 치안을 책임지는 군정 경찰로 변신 하였으며, 그 혼란한 속에서도 군정관리들은 사리를 채우는 부정행위를 일삼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제주도민들을 상대로 각 정치 집단들이 대부분 학살에 가담하거나 방관, 조장하였기 때문에 그 누구도 책임에 있어 자유롭지 못한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주도는 지리적으로 동북아시아의 요충지라는 특성을 지녀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하여 일본군 6만여명이 주둔한 전략적 기지이기도 합니다. ”
31. 안내자의 상세한 설명은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똑바로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한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어제 없는 오늘이 있을 수 없고 오늘 없는 내일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현재의 나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나라를 알기 위해서는 정확한 역사 인식의 중요성과 공직자들의 사리사욕이 얼마나 나라를 혼란에 빠지게 하고 망치는가를 다시 한번 께닫는 계기가 되었다.
32. 늦게 점심을 먹고 복자 김기량(펠릭스 베드로)의 어머니가 연복정에 올라 먼 바다를 바라보며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셨다는 그 길을 우리 일행도 걸어보면서 제주 비행장을 향해 움직였다.
33. 비행장에 도착하니 신부님의 지인분이 제주특산물 오메기떡 한 박스씩을 피정에 참여한 전 복산신자에게 주려고 준비하여 대기중 이었다. 이번 피정은 쉴새없이 기도하고 묵상하고 걷고, 자연을 음미하는 시간이었다. 보통 하루에 만보 이상 걷기는 했지만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도록 배려하였기 때문에 한 명의 낙오자도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난 아직은 뒤처지지 않고 걸을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하며 걸었는지 모른다. 행복하고 유익한 피정이었다.
2. 일산해수욕장 / 김효섭 2
방어진 가는 버스에 올랐다.한 시간 넘게 가는 거리기에 많은 생각을 정리하고 추억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마침 비가 태풍이 오는 것처럼 바람도 세게불며 내리고 있다.
비는 사람들을 우수에 젖게 한다.한 많은 민족이여서 한 민족이라 하는지.비오는 날에는 전에다 막걸리 한잔이 제격이라고들 한다. 비소리와 전 굽는 소리가 비슷해서 그런 것이다. 막걸리 보다는 옛추억을 회상하며 비를 즐기고 싶다.내게 비라는 존재는 생각을 많이하게 한다.
짧지 않은 60년의 인생.산전, 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사람이 기억할 만한 추억이 없겠는가. 보통사람은 한 직장을 수십년 다니고 정년을 하는데,나는 수십 군데의 직장으로 옮겨 다녔으니 오죽 하겠는가.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고 멈추지 않고 앞으로만 달려온 인생 내 영혼이 따라 오는지도 모르고 자만일지도 모르지만 뒤돌아보지도 않고 후회하지도 않는다.
지난 과거는 좋든싫든 지나가 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제일 불쌍하게 생각되는 사람이 왕년에 잘나갔다고 과거의 영광을 얘기하는 사람이다.그럼 현재는? 미래는? 현재를 영어로는 선물이라 하는데,현재 무얼하고 무엇을 준비 하느냐가 중요하지 않은가.과거 얘기만 하는 것은 녹음테이프를 반복해서 듣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원하고 변화를 좋아한다.쉽게 식상해 한다.그건 꼭 일부에 국한 된것이 아니다.대인관계에서도 마찬가지 인것 같다.같은 사람을 만나도 외모가 달라지면 대화와 태도가 달라진다.허나 외모보다 더 중요한 건 내면세계의 변화가 아닐까.겉모습은 짧은 시간에 변화를 할 수 있지만 내면의 변화는 시간이 필요하다.
일산해수욕장! 언제나 답답한 마음을 받아주고 위로해 주는 곳.오랜 만에 왔다.언제인지는 몰라도 밤에 출발하여 아침에 이 곳에 도착한 추억이 생각난다.그때는 일시적인 충동으로 시작 했었다.
삶의 변화는 일상적인 것을 벗어날 때 생긴다.똑같은 행동은 같은 결과만 나오는 것이다.일상은 한번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것처럼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하다.인생이 변질되지 않기 위해서는 끝없이 변화를 해야만 한다.변화는 자신의 인생을 풍유롭고 가치있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한다.
골동품만 인정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도 세월이 흘러도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되도록 끝없이 변화를 해야 되는 것이다. 어제와 다른 오늘의 삶 오늘보다 더 성장한 미래의 삶이 존재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비내리는 해수욕장을 거닐면서 애들과의 추억이 생각난다. 초등학생 두 녀석들과 불빛이나는 고기를 잡았든 추억. 그 녀석들이 이제는 이 사회의 구성원이 되어 함께 대한민국을 걱정하며 자신들의 삶을 만들어가고 있다.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무척이나 사랑한 두 놈들이 이제 본인들도 아버지라는 이름표를 달 날이 멀지 않았다. 세월은 유수 같은 것.이제는 후대들에게 제대로된 세상을 물려줘야 한다.
3. 가장자리 산세베리아 / 박정애 - 1
1 봄의 베란다다. 구석에 말라버린 산세베리아가 있다. 죽었으리라 여기면서도 차마 뽑지 못해 부목 몇 개를 세워두고, 애써 눈길을 주지 않았었다.
2 얼마 전, 혹시나 하며 물을 주려다가 새 싹을 보았다. 산세베리아가 자신의 분신을 남겨놓았던 것이다. 화분 가장자리에, 그 어린 몸이 있었다. 손가락 한 마디 쯤 되는 잎 두 세 촉이 서로를 안고 있다. 새 잎을 보고서도 죽은 산세베리아를 뽑지 못했다. 아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3 산세베리아는 둘째아들이 유치를 뽑을 때쯤 우리 집에 왔다. 어린 아이를 두고 일을 나가면서 미안한 마음에 선물로 준 것이었다. 선물이라지만 메시지가 무겁게 담겨 있었다. ‘책임감을 키워줄 무언가가 없을까?’ 아들은 강아지를 원했지만, 내 일거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4 대신해줄 것을 찾으러 간 마트에서 산세베리아를 만났다. 공기정화에 탁월하다며 유행하던 산세베리아였다. 한 뼘도 안 되는 어린잎이 화분 한 가운데 의젓하게 서 있었다. 호랑이 무늬가 선명한 녹색 잎은 세상 빛을 다 모으겠다는 의지 같았다.
5 아들은 무덤덤하게 받았지만 때맞춰 물을 주고 볕 샤워를 시키며 보살폈다. 아들과 산세베리아는 함께 잘 자랐다.
6 대학생이 된 아들이 집을 나서며 산세베리아 화분을 나에게 부탁했다. 식물이든 사람이든 때맞춰 살피는 일은 성가시고 힘들다. 아들이 홀가분해 보였던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7 화분을 맡은 나는 산세베리아가 시들면 아들이 기운을 잃을 것 같은, 근거 없는 미신에 사로잡혔다. 일주일의 처음을 화분에 물 주고 살피는 일로 시작했다. 계절에 따라 부지런히 자리도 옮겨 주었다.
8 한 번은 화분을 옮기면서 어딘가에 부딪히고 말았다. 두 개의 잎이 꺾였다. 혹시라도 붙을까 테이핑을 했지만 소용없었다. 잎이 아물고 초록의 몸에는 성장일지 같은 갈색의 얼룩이 남았다.
9 아들도 여러 번 병원 신세를 졌다. 해외여행을 갔다 다쳐서 귀국하기도 했고, 맹장염과 축농증으로 수술을 받기도 했다. 크고 작은 질환에 시달렸고 넘어져 다치는 일이 잦았다. 아들에게 흉터가 생길 때마다 나에게도 걱정의 딱지가 앉았다.
10 어느새 군대까지 마친 아들이 돌아왔지만 산세베리아는 여전히 내 몫이었다. 베란다를 은근하게 가리키는 내 손끝을 보고는 “많이 컸네요.” 할 뿐이었다.
11 아들에게는 식물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몇 년 사이 학교의 상황이 급변해 학과가 통폐합되어 버렸다. 입학했던 학과가 없어져 낯선 학과에 적응해야 했고, 졸업을 앞두고는 취업을 걱정하는 청년이 되었다.
12 취업을 못한 청년은 학교를 놓을 수 없다. 그나마 학교에 적을 두고 있어야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아들도 졸업을 미루고 취업을 위한 자격시험 준비를 했다. 하지만 노력한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을 수는 없다. 실패라는, 부모가 가르치지 않은 것을 사회가 가르쳐 주었다.
13 3포니 4포니 하는 말들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아들 또래 얘기가 나오면 귀가 간다. 청년을 위한 좋은 뉴스는 별로 없다. 나쁜 뉴스에는 가슴이 내려앉는다. 본인은 오죽할까. 그 생각을 하면 더 노력하라고 다그칠 수가 없다. 애만 쓰인다.
14 잘 자라던 산세베리아가 시들해지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따로 비료도 주고 신경을 썼지만 소용없었다. 지인들은 물을 많이 주어서라고도, 냉해를 입은 것이라고도 했다. 차마 시들어가는 것을 볼 수가 없어 외면했던 것이다.
15 아들이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여전히 불확실한 시작이다.
아들이 가는 날, 이삿짐을 싸고 운전하는 동안에도 한 가지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자리를 잡을까. 아들의 제자리는 어디일까.' 아들이 세상의 가운데가 아닌, 가장자리에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것만 같았다. 아들은 그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
16 낯선 곳에 도착한 우리는 그런 생각들을 이삿짐 어딘가에 숨겨놓고, 맛집을 검색하며 서로에게 웃어주었다. 아들의 웃는 모습에 가장자리 산세베리아가 겹쳐졌다. 나는 가장자리를 밀려난 곳이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가운데 있어야 폼이 난다고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사람의 삶에 가운데라는 게 있을까? 삶은 어디서든 피어나는 것임을, 가장자리에 핀 산세베리아에게 배웠다.
17 산세베리아가 '아들이 실패를 툭툭 털어내고 곧추설 것'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가장자리에서 시작하는 그들이 아름다워 보였다.
18 나는 죽은 산세베리아의 부목을 걷었다. 물기 없는 기다란 몸이 쓰러진다. 뿌리가 이미 녹고 없었다. 새 잎을 만들기 위해 마지막 마음까지 다 썼나보다. 볕 좋은 곳으로 화분을 옮긴다. 가장자리 산세베리아가 새롭게 출발한다.
4. 우리는 친구/이숙희
1) 가을에는 봄의 작물들을 파종해야 한다. 우리가족의 텃밭이라면 텃밭이고 농업인이라면 농업인 조그마한 농지가 있다. 남편은 7년 전 퇴직 후 거의 매일 특별한 일 빼고는 텃밭으로 도시락을 싸서 출근을 한다. 매일 출근은 하지만 정작 수확과 관련된 일 씨앗심기, 거두기는 하지 않는다. 남편이 하는 일은 예초기로 풀 자르기, 감나무손질하기, 배수로관리하기, 밭 담쌓기 등이다.
2) 밭에는 감나무를 심었다. 감나무는 9년쯤 되었다. 감나무와 감나무 사이가 텃밭이다. 텃밭을 곡괭이로 쫒아야 봄에 피는 유채꽃을 심을 수 있다. 그런데 일요일 날 밭에 가니까 멧돼지가 땅을 갈아엎어 놨다. 나는 호미로 땅을 살살 골라서 유채꽃 씨앗을 뿌렸다. 올해는 멧돼지의 도움으로 쉽게 씨앗을 심을 수 있었다.
3) 우리 밭에 오는 멧돼지는 씨앗을 심어놓은 곳은 파지 않는다. 아마 철이 든 어른 멧돼지인 듯하다. 철부지 아기 멧돼지였다면 분별심이 없어서 여기저기 파서 나의 씨앗들이 움트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멧돼지가 땅을 파는 이유는 지렁이를 잡아먹기 위해서라고 한다. 멧돼지도 단백질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편 멧돼지가 땅을 파는 이유는 몸에 붙은 세균을 소독하기 위해 진흙에 뒹군다고 한다.
4) 나는 밭농사를 하면서 알았다. 동물들이 사람보다 더 깨끗하다는 것을 몇 년 전 방울토마토를 심었었다. 그런데 방울토마토가 익으면 다람쥐가 와서 방울토마토를 따 먹었다. 다람쥐는 방울토마토의 표피인 겉 부분 습자지보다 더 아른거리는 부분만 벗기고 살 부분은 깨끗이 다 먹었다. 너무 깨끗이 먹어서 나는 다람쥐가 귀엽게 느껴졌다. 나도 절에 다니기 전에는 음식을 깨끗이 먹지 않고 쌀 한 톨의 소중함도 몰랐었다. 절에서 큰 스님 법문을 듣고부터 달라졌다. 음식을 버리면 그만큼 복을 감한다고 하셨다. 하물며 동물인 다람쥐도 음식의 소중함을 아는데 사람들은 더 깨끗이 먹고 음식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5) 2년 전에는 옥수수 모종을 한판사서 심었다. 나의 사랑을 먹고 옥수수모종은 나풀나풀 집을 넓혀 갔다. 일주일마다 밭에 가니 몰라보게 무럭무럭 잘 자랐다. 어느덧 옥수수가 열리기 시작했다. 한그루에 3개 정도 열렸다. 일주일 후 밭에 가니 아직 완전 영글지 않았다. 나는 다음 주에 와서 옥수수를 따려고 생각했다. 드디어 수확의 기쁨을 맛보려는 일요일이 왔다. 밭에 도착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옥수수가 다 누워 있었다. 고라니가 와서 먼저 수확을 해 버렸다. 그 많은 옥수수를 한 톨도 남기지 않고 깨끗이 다 먹었다. 이번에 고라니도 다람쥐처럼 너무 완벽한 깨끗함이었다. 나는 고라니의 세심한 청결에 한 번 더 동물은 정말 음식을 깨끗이 먹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6. 우리 밭에는 호피라는 고양이가 있다. 남편이 사료를 사서 매일 주니까 검둥이도 왔다. 호피와 검둥이는 부부사이다. 새끼도 몇 번이나 낳았다. 식구들이 많아졌다. 점심을 먹고 졸리면 호피는 검둥이에게 몸을 맡기고 곤하게 낮잠을 잔다. 동물이지만 너무 다정해 보였다. 그들의 가정은 많은 날들이 평화로웠다. 그런데 어느 날 대장 고양이가 나타났다. 검둥이가 싸움에서 패했나보다. 대장 고양이만 나타나면 검둥이는 36계 줄행랑을 친다. 동물의 영역싸움을 도와줄 수 없다. 그렇게 검둥이는 대장이 없는 틈만 나타나서 먹이를 먹고 갔다. 호피도 행복한 지난날을 그리워하면서 슬픈 표정이었다. 지금은 대장도 떠나고 검둥이도 떠나고 새끼도 떠나고 호피만 집을 지킨다. 꼭 사람의 일생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울먹하다.
7. 어느 일요일에는 밭에 가니까 까치들이 슬피 울고 있었다. 나는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감나무 사이로 가 보았다. 그런데 까치 한 마리가 죽어 땅에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까치들이 모여서 울고 있는 것이다. 나는 죽은 까치를 신문지로 옷을 입혀서 양지바른 언덕에 묻어 주었다. 내가 까치장례를 치러주고 나니까 까치들은 푸른 하늘을 높이 날아갔다. 죽음 앞에서는 사람과 동물이 슬퍼하는 모습이 똑 같았다. 사람은 언어로 의사표현을 하고 소통할 수 있다. 동물도 그들만의 의사표현이 있을 것이고 같은 종끼리는 서로 소통하면서 살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동물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해 주면 그들도 인간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동물과 나눔을 가지면 그들도 농작물에 피해를 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먹이를 산과 들에서 사람들이 다 채취하다 보니 그들도 굶주림에 화가 나서 농작물을 훼손한다고 본다. 꼭 사람들과의 나눔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동물들과의 나눔도 중요하다고 본다.
5. 숨비소리 1 (권정남)
1.어뜩한 새벽이다. 평소처럼 바다쪽의 길을 택하여 운동을 한다. 십 여분 정도 걸어 해안길에 들어선다. 확 트인 바다를 보니 긴 숨이 저절로 내쉬어진다. 갯내가 가슴 깊은 곳으로 훅 들어온다. 하루 중 자신에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있는 시간이다. 고요한 새벽하늘이 좋고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하다. 쏴하고 밀려드는 물결은 어스름 속에서도 뚜렷하다. 거친 파도에 몽돌이 부딪히며 리듬감 있는 소리를 만들어 낸다.
2.바다를 끼고 걷다 어머님의 숨비소리를 떠올려본다. 어머님은 이 마을에서 나고 자라 한동네 사람인 아버님과 중매결혼을 했다. 칠 남매 중 셋째에게 시집왔지만 시부모를 모셔야했다. 시내에 사는 큰아들 내외에게는 한사코 가기 싫다며 고개를 내저었고, 고향에서 농사일을 하는 셋째와 살기를 원했다. 그러다보니 종갓집이 아닌데도 조상제사에 맏며느리 역할을 떠맡았다. 늘 일에 파묻혀 산 고단한 세월이었다. 거기에다 어머님은 느지막이 해녀 일까지 배워서 삼십 여년 물질을 했다.
3.몇 년 전에 어머님은 뇌경색증으로 쓰러져 병원 신세를 졌다. 퇴원 후 가까운 우리 집에서 재활 운동과 약물 치료를 받았지만 원래의 몸 상태를 되찾지 못했다. 몇 달 후 어머님은 당신이 살던 집으로 가셨다.
4.그 후 정년퇴직을 한 남편은 어머님 혼자 생활하는 것이 미덥지 못하다며 합가를 결정했다. 보수적인 성향의 남편은 장남 역할에 대한 자세가 남달랐다. 그런 마음을 헤아려서 살림을 합쳤다. 흡족해 하시는 어머님을 보며 며느리로써 보람을 느꼈다.
5.함께 사는 동안 어머님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차츰 많은 부분에서 도움의 손길이 필요했다. 어머님은 의존적이고 수동적으로 변했다. 신체와 인지기능의 저하로 지속적인 돌봄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기력이 쇠잔해져서 절대적인 보호가 필요한 시점이었지만 나는 지쳐갔다.
“어머니 연세도 있고, 할 만큼 했으니 시설에 모시자.”
는 시동생의 제안마저 남편은 거부했다. 오랜 간병으로 나의 건강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어깨 수술을 했고, 또 약해진 관절로 인해 발목을 삐어 깁스까지 했다. 나는 남편과 어머님 요양원 입소 여부를 두고 여러 차례 논의했지만 그럴 때마다 공감능력이 부족한 단호한 태도에 낙담했고 갈등은 심해졌다.
6.그때 어머님의 숨비소리가 이러했을까? 나는 삶의 질이 떨어지고 자존감도 낮아졌으며 자긍심도 사라졌다. 작년 봄엔 충격으로 특정한 부분의 기억이 나지 않는 심인성 건망증을 경험 했다. 그제서야 내가 해오던 병간호 일부를 남편이 대신했다. 그래도 식사 수발은 고스란히 내 몫이다.
7.결혼하고 시부모와 같이 살다가 1년 만에 살림을 나니 좋아라는 나와 달리 어머님은 섭섭해 했다. 시집 온 며느리를 데리고 살면서 ‘너 왜 그리 하느냐’ 며 책망한 적이 없었다. `내가 잘못이다. 미리 말을 했어야 했는데..` 이런 식으로 손순한 데가 있으셨다.
8.그러다가 아이를 낳고 산바라지를 위해 어머님이 오셨다. 2층의 주택에 살았는데 공용화장실이 계단 아래에 있었다. 오르내리기가 불편한 산모라는 명분으로 요강을 이용했는데 어머님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때는 그렇게밖에 할 수 없다는 판단에 응석스러웠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얼마나 부끄러운 행동인지를. 칠일 동안의 힘든 구완을 끝내고 가실 때 `어머님의 은혜 잊지 않고 꼭 갚을게요` 라고 말씀드렸는데 잘해드리지 못해 항상 죄송한 마음이었다.
9.벤치에 앉아 바위를 바라봤다. 바위는 쉴 새 없이 밀려드는 거친 너울에도 묵묵히 버틴다. 파도의 몸짓에 하릴없이 내맡겨져 휩쓸리기를 반복하는 자갈과는 대조가 된다. 단단한 바윗돌 같이 파도를 이기는 사람이고 싶다. 잠수한 채 턱까지 차오른 숨을 견딘 어머님처럼.
10.한참 생각에 골몰하다 바라 본 동쪽 하늘은 불그스레하게 물들어있다. 낮게 떠있는 구름도 붉은색으로 물들여 놓았고 바다색마저도 황금빛이다.
6. 자전거가 주는 교훈 / 이성호 (3)
1.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출·퇴근할 때나 시내에 볼일이 생기면 가급적 자전거를 이용하는 편이다. 새벽 수영을 갈 때도 수영 바구니를 자전거에 걸고 다닐 정도이다.
2. 물론 불편한 점도 많다. 여름이 가까워질수록 더위에 신경이 쓰인다. 도중에 비를 만나면 낭패이므로 미리 일기예보를 확인해야 한다. 자전거 보관을 위해 거치대를 찾아야 한다.
3. 특히, 차량이나 주문배달 오토바이와 접촉 사고가 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자전거는 도로에서 가장 약자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중심을 잡고 균형을 제대로 유지한다면 마음에 드는 이동 수단인 것은 분명하다.
4. 좋은 점도 있다. ‘자전거 타기’는 허벅지가 ‘꿀벅지’가 되는 근력운동이면서 유산소 운동도 겸하고 있다. 활기차고 건강한 노년을 위해서 필요할 것이다. 80세가 되면 근육량이 30대의 절반으로 줄어든다고 하지 않는가.
5. 무엇보다도 바람을 가르며 달리면 한 마리 새가 된 느낌이 든다. 인간의 본능 속에 남아있는 자유에 대한 욕구가 자전거를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원초적인 힘에 의존하여 속도를 내어야 하고, 폭발적인 에너지로 이어지니까.
6. 하지만 ‘자전거 타기’는 육체적 건강과 정신적 자유로움만 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몸이 외부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으므로 그 에너지가 우리 몸으로 전달될 때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7. 이전 직장에서 몇 년간 본사 근무를 한 적이 있다. 본사는 주말도 없고 평일에도 밤늦게까지 일하는 경우가 잦았다. 긴 근로 시간은 스트레스를 불러왔다. 몸 여기저기에서 이상 신호가 나타났다. 따로 운동할 시간은 없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자전거를 타기로 마음먹었다. 분당 서현동에서 서울 삼성동까지 편도 한 시간 거리였다.
8. 그날도 늦은 시간에 퇴근하게 되었다. 탄천 자전거 전용도로에서 차도로 나오면 집 부근에 왕복 8차선 교차로가 있었다. 때마침 신호가 바뀌어 자전거를 탄 채 건넜다. 밤 1시경이라 차들은 보이지 않았고 두어 사람만 신호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횡단 도로를 거의 건널 무렵 갑자기 우회전하는 택시에 부딪혀 잠시 의식을 잃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몇 미터 떨어진 도로 한편에 쓰러져 있었고, 헬멧과 자전거와 랜턴은 제각각 뒹굴고 있었다. 일어나 주섬주섬 신발을 신고 자전거를 세웠다. 헬멧은 금이 간 상태였다. 살펴보니 몸에 이상은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그날따라 반주 삼아 마신 막걸리 한잔 덕분이 아닐까 싶었다. 외부 충격을 저항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기에 큰 부상으로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9. 나는 담담하였는데, 그 기사분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시간에 사람이 다닐 줄 몰랐다며 어눌한 말투로 죄송하다고 했다. 병원에 가자고 했지만, 괜찮으니 다음부턴 조심하시라 말하고 돌아섰다.
10. 아버지로부터 받은 첫 선물은 자전거였다. 어린 눈에도 과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매사 근검절약하는 분이셨는데 어쩐 일인지 자전거를 사주셨다. 성인용으로 안장이 좀 높았지만 뛸 듯이 기뻤다.
11. 아버지의 일터와 집은 제법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날은 즐거운 마음으로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도중에 소주와 안주를 사려고 가게에 잠시 들었는데 길에 세워두었던 자전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자전거를 찾으러 동네를 돌아다니며 수소문하였지만 늦은 시간이라 행인도 거의 없었다.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오며 아버지는 “다음에 더 좋은 자전거를 사주마.”라고 하셨다. 그 약속은 영영 기약할 수 없게 되었다.
12. 그때 우리 집은 여름에는 얼음을, 겨울에는 석유를 소매로 판매하였다. 가끔 일손이 부족할 땐 도와드려야 했다. 한번은 5층 사무실까지 석유 2말을 배달해달라는 주문이 왔다. 내가 다녀와야 할 상황이 되었다. 짐 없이 타기에도 부담스러운 운반용 자전거에 석유 2통을 실었다. 중심 잡기가 힘들었다. 자전거가 비틀거리면 석유가 출렁거렸고, 석유가 출렁이면 자전거는 더욱 비틀거렸다. 겨우겨우 도착하여 양손에 석유통 하나씩 들고 계단을 올랐다. 중간쯤 올랐을까? 바닥에 주저앉았다. 펑펑 울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지 못하는 체력이 서러워서였는지, 가난이 원망스러워서였는지, 주도적으로 살지 못하는 처지가 억울해서였는지 모르겠지만.
13. 자전거는 중심을 잡고, 균형을 잘 유지해야 흔들림이 없고 넘어지지 않는다. 그날 음주운전을 하지 않았더라면, 안전장치를 걸어두었더라면, 출렁거리는 석유통을 버텨낼 체력이 있었더라면 자전거는 중심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자유로움과 해방감이 절제와 안전장치로 좌우 균형을 맞출 때 자전거는 새처럼 날갯짓할 것이다.
첫댓글 자료 추가 /
이성호 문우님의 습작품을 추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