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1주-토-이사30,19-26; 마태9,35-10,8
대림은 기다림이며 만남을 전제로한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라는 말과 같이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그리스도인의 일상사는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에 의해 이루어지는 필연이다. 우리에게 우연은 없다. 예수님이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창조주 하느님이 피조물인 인간의 형상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은 과거 현재 미래 종말까지 가장 큰 해외토픽감이다.
그러기에 믿는 이나 안 믿는 이나 예수님의 탄생을 기점으로하여 기원전과 기원후로 세계역사를 두 쪽으로 나누는 데 이견이 없다.
2000년 전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처음 오셨을 때 인류는 그분을 못 알아보고
방 한 칸 내어드리지 않고 문전박대하였다. 인류역사상 가장 애석한 일이다.
더구나 그분을 설상가상으로 십자가에 처형한 사실은 인류가 저지른 죄 중 가장 무엄한 큰 죄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아직 희망은 남아있고 그분을 몰라본 죄를 기워 갚을 길은 아직 남아있음을 감사해야한다. 그것은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시면서 “내가 아버지 집에 가서 너희가 거처할 집을 마련하고 다시 너희를 데리러 오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시 오실 주님을 이번에는 놓치지 말고 잘 마중하여야한다.
처음 오셨던 주님은 한밤중에 시골 마을 베들레헴에 살짝이 오셨다.
어둔 세상을 밝히기 위해 빛이신 분이 밤중에 오셨다. 교만한 자들을 겸손하게 하기 위해 하느님이 권능을 숨기신 채 가녀린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다. 그런데 장차 다시 오실 주님은 권능의 쇠지팡이를 쥐고 왕관을 쓰고 심판주로 모든 천사들을 대동하고 내려오실 것이다.
대림시기의 목적은 첫째로 첫 번째 오셨던 주님을 문전박대한 인류최대의 실수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도록 반성하고, 다시 오실 주님을 마중하기 위한 준비를 철저히 하자는 데 있다. 인생은 녹화방송도 재방송도 없다. 오직 생방송뿐이다.
진리 중에 가장 확실한 진리중의 하나는 언젠가는 누구도 예외 없이(신자든 불신자든, 타종교인이든) 심판주이신 예수님과 독대할 날이 반드시 오리라는 사실이다.
그날에 ‘주님이 나에게 무슨 질문을 하실까?’를 궁금하게 여기고 대답을 준비하여야 한다. 예상문제를 미리 예측하여 대답을 준비하는 것은 현명한 학생의 태도일 것이다. 주님은 그날 틀림없이 “네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느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얼마나 노력하고 수고했느냐?”가 최대관심사일 것이다.
그날에 주님이 나에게 “너는 세상에서 돈을 얼마나 벌었느냐?”거나 “어느 권좌에까지 올라갔느냐?” 혹은 “네 집을 얼마나 크게 짓고 살았느냐?”에는 관심 밖의 일일 것이다.
오로지 하느님을 위해 얼마나 수고했느냐가 최대 관심사일 것이다. 주님은 복음에서 “네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내 아버지 앞에서 너를 안다고 변호해줄 것이다.”고 하셨다.
탈란트의 비유에서 5 탈란트와 2 탈란트를 받는 사람이 열심히 수고하여 두 배로 늘려 주인에게 바치자 주인은 두 사람을 칭찬하여 “착하고 충직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앞으로 너에게 더 큰일을 맡기겠다.”고 하였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탈란트를 주님을 위해 사용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수고하면 주님은 우리를 똑같은 말로 칭찬하실 것이다.
반면에 1 탈란트를 받은 자는 수건에 싸서 땅속에 묻어두었다가 주인에게 그대로 바쳤다는 것은 하느님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이기적인 생각으로 자기자신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일만 관심을 두고 살았던 사람을 말한다고 할 것이다. 그 영혼에게 하느님은 책망하실 것이다. 그가 1 탈란트를 낭비해서가 아니라 증식시키지 않은 것에 대해 엄중한 책임을 물으시는 것이다.
그와같이 하느님이 우리에게 탈란트를 주시는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수고하고 노력하라는 명령이다.
주님과 독대하는 날 하느님은 우리에게 셈을 바치라고 하실 것이다. 그날에 당황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일일결산을 매일 하여야 할 것이다. 하느님이 주신 시간들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만족을 위해서 사용하였다면 이는 시간을 낭비한 것이요 허투루 사용한 것이니 이를 반성하여야할 것이다.
비록 선행을 하였다고 해도 내 만족이나 내 영광을 위해 행하였다면 이도 하느님과 관계없는 일이 된다. 이사64,5에, “기껏 의롭다고 행한 것조차 개짐처럼 더럽습니다.”고 말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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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모든 고을과 마을들을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셨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하늘나라 복된 소식을 전하러 오신 것이다.
이 소식은 승전보를 알리는 기쁜 소식보다 더 귀한 것이며, 영생의 이 기쁜 소식은 사실상 멸망할 인간에게 그 이상의 기쁜 소식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 영생불사약(성체성사)과 만병통치약(하느님 말씀)을 가지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이 이러한 능력이 없으실까?
예수님은 원래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영생의 약속과 무병장수하는 은총을 주신 창조주이시므로 아담이 잃어버린 은총을 다시 회복시켜주시는 것이야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불순명으로 원죄를 범함으로써 질병과 죽음이 오게 된 것이다. 질병과 죽음은 인간이 사탄의 꼬임에 넘어가 자유의지를 남용하여 얻게된 결과이다.
창조주이신 예수님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시어 원래 당신이 지니고계신 창조의 권능으로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마귀에 시달리는 영혼들을 치유해주시고 제자들에게 그 권한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니 이를 모르고 멸망의 길로 치닫고 있는 백성들이 가엾고 측은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이 마치 목자 잃은 양들처럼 기가 꺾여 갈팡질팡하고 있기 때문이다.
길 잃은 사람이 길 안내잡이를 만날 때 얼마나 반가울 것인가!
인류는 사탄의 거짓된 유혹에 따라 길을 잃고 헤매게 되었고 죽음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럴 때 예수님이 나타나시어 사는 길을 제시하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할 일인가!
그런데 창조주께서 사람이 되어 오시어 우리에게 선물하신 구원(재창조)은 단지 에덴동산에 살던 아담의 상태로 회복시켜주시기 위해서인가?
플러스 알파가 있다.
첫 창조 때 하느님은 그렇게 수고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재창조 때(구원)는 예수님이 말할 수 없는 수고수난을 겪으셨고 성부께서 십자가를 침묵 중에 바라보시며 소리없이 울으셨고 성령께서도 성화은총을 주시기 위해 그토록 수고하시어 구원사업을 완수하실 때, 첫 창조 때 보다 더 위대한 걸작품이 될 것이다.
그러면 플러스 알파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주님 부활의 은혜를 우리도 입게되어 사기지은(四奇之恩:빛나고, 빠르고, 관통하고, 상함이 없는 은혜)의 특혜를 받아 에덴동산에서와 같은 원죄의 유혹을 받는 일이 없게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성인은 “오 복된 탓이여! 너로써 위대한 구세주를 얻게 되었도다!”고 감탄하였던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소식인가?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그리스도 메시아가 오셨고 생명자체이신 분이 인류가 감당할 수 없는 십자가를 지고, 죽을 수 없는 생명자체이신 분이 죽음을 받아들여 십자가에 피흘리심으로써 죽기까지 수고수난 겪으심으로 하느님을 모독한 인간의 죄를 배상하시고 믿기만 하면 당신 부활에 참여시켜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것이 요한3,16의 “하느님은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를 믿는 사람마다 죽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심이라.” 라는 기쁜 소식이었다.
세상에는 이 소식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8.15 광복 때 일제의 항복소식을 듣고 백성들은 거리로 뛰쳐나가 만세를 부르며 기뻐 춤을 추었다.
예수님을 통한 이 구원의 기쁜 소식이야말로 날마나 기뻐 뛰며 춤출 일이 아닌가?
그래서 월요일은 원래 기쁜 날이고, 화요일은 화끈하게 좋은 날이고, 수요일은 수지맞아 좋은 날이고, 목요일은 목숨걸고 기뻐할 날이며, 금요일은 금쪽같이 기쁜 날이고, 토요일은 토실토실 기쁜 날이고, 일요일은 일마나 기쁜 날이다. 이 사실을 이전엔 왜 모르고 살았을까! 개탄하여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주님께 감사하며 기쁘게 살자!
사는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길을 잃고 헤매는 영혼들을 바라볼 때 예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안타까우실까? 우리도 이 예수님의 마음을 지녔으면 좋으련만!
그래서 주님은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추수의 주인에게 일꾼을 보내달라고 청하여라”고 요청하시고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어 그들에게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권한을 주시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주는 권한을 수여하신다. 악령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 곧 영생의 길을 잃고 헤매며 죽음의 길로 빠져들게 하였으니 이들로 바른 길로 인도하는 이들이 착한 목자들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이스라엘 집안에 파견하시어 “길 잃은 양들에게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라”고 분부하신다.
“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하신다. 사탄의 꼬임에 넘어가 창조의 본모습을 잃어버린 가엾은 인류를 회복시켜주고자 하신다.
영생의 길이 당신께 있건만 이 길을 알지 못하는 백성들에게 그 길을 가르쳐주라고 사도들을 뽑으시어 파견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한시가 급한 것이다. 먼저 하느님 나라 백성으로 간택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파견하시어 구약시대로부터 고대해온 메시아가 바로 당신이심을 가르쳐주고 구원의 길을 깨우쳐주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태오복음은 동족인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씌어진 복음서이다. 그러므로 1장부터 예수님의 족보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임을 강조하며 이스라엘의 정통 혈통을 따라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드러내고 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는 그들만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사제나라로 선택하시어 그들을 훈련시켜 만민에게 파견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죽은 이들을 살려주라고 하신다.
죽은 이를 살리는 것은 메시아를 모르고 멸망의 길을 걷고 있는 이들에게 메시아를 받아들여 영생의 길을 찾으라는 것이다.
또한 멸망의 거짓된 길로 인도한 마귀를 쫓아내고 바른 길을 찾도록 인도하라는 명령이시다.
우리도 예수님의 이 안타까운 마음을 품고 구원이 필요한 영혼들에게 다가가 영생의 길, 곧 세상을 이기는 길이 예수님께 있음을 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