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장성의 요새 입암산성을 찾아서
<입암산성에 서서>
- 두레 -
노령산맥 기운이 길게 뻗은 저 산하는 수천 년 조상들의 피와 땀이 서린 곳. 국난 극복의 요충으로 노령을 남북으로 넘나들며 감시할 수 있는 이곳은 셀 수 없이 많은 조상들의 영령이 깃들어 있는 곳입니다.
살육과 기아와 피와 전쟁 ..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일들이 지금은 너무도 아름다운 이곳에서 벌어졌으리라 생각하니 참으로 가슴 아픈 마음뿐 입니다.
세상사가 무엇인지.. 당시의 수많은 민초들의 고달픈 삶의 현장을 떠올려 보면서 인간은 왜 서루 미워하고 증오하며 서로를 죽이지 않으면 않되는 걸까? 증오하며 서로 죽였었던 그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하고 있는 것일까? 인간의 본능이 바로 그런 것일까.. 잠시 깊은 생각에 잠깁니다.
생노병사 (生老病死), 애별이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취온고(五取蘊苦)...
세상에 태어난 인간의 숙명으로 피할 수 없는 8가지의 고통입니다만 죽으면 세상사 아무것도 필요 없건만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습니다. 어느 덧 늙고 병들면 누구나 가기 싫어도 가는 곳 비록 백년을 오래 산다 할지라도 그게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입암산성 가는 길>
호남고속도로를 달려 정읍을 지나면 내장산 톨게이트가 있다. 이때 우측에 입암 저수지가 있는데 커다란 산줄기가 앞을 가로 막는다. 왼쪽으로는 내장산으로 달리는 산줄기의 시작인 봉우리가 보이는데 이것이 입암산에 있는 갓바위라는 것을 사람들이 잘 모른다. 노령을 지나는 터널이 장성과 정읍을 경계한다는 사실을 알고 백양사 톨게이트를 빠져 나오면 북이면이 있다. 북이면에서 바라보면 긴 산줄기가 남북으로 이어져 장관을 이룬다. 아마도 이 산줄기가 내장산과 백양사로 이어지려니 생각한 산꾼은 별로 없다. 하지만 북이면을 지나 곰재에 올라 주변을 바라보면 산군들의 웅좌가 대단하다. 해발 고도가 높고 병풍처럼 드리워진 산줄기의 기상이 첨예의 요새처럼 단단하다. 내장산 국립공원에 속한 이곳은 긴 남창계곡이 있는데 고속도로에서 보이는 긴 산줄기와 백양사에서 뻗어 나온 마루금이 협곡을 이룬다. 많은 인파가 몰리는 내장산 계곡과 백양사 계곡과는 유명세를 덜 타서 한적하다. 공단에서 전하기는 복잡한 가을 단풍철에는 내장사나 백양사를 찾기 보다는 이곳 입암산성이 있는 남창계곡이 훨씬 좋다고 안내한다. 호남의 3대 산성으로 유명한 입암산성을 품고 있는 입암산은 수려한 경관과 삼림욕장 그리고 남창계곡이 있어 산꾼들이 눈여겨 볼만한 산행지이다.
<전남대학교 수련원>
<남창계곡 입구>
<삼나무>
<장성새재 알림판>
<남문에서 북문까지의 여유로운 산성 순례>
키가 무척 큰 삼나무가 있는 입구에서 우측으로 몽계폭포와 백양사 상왕봉 가는 길이 있다. 공단 관리소에서 바로 갈라지므로 백양사 갈 때는 신경 써야 한다. 계곡을 따라 조금 오르면 꽤 넓은 옛길을 만나는데 장성새재와 순창새재 가는 길이 잘 보존되어 있다. 새재란 새도 쉬어간다고 해서 붙인 이름인데 장성새재는 옛 선조들이 장을 보러가거나, 한양에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정읍으로 넘어갈 때 지름길로 이용한 고개라고 한다. 새재라는 이름은 ‘새의 목처럼 잘록하게 생겨서’, ‘새도 쉬어 넘기 때문에’, ‘샛길(間路)이라는 뜻’으로 부른다고 한다. 옛날에는 이 길로 통행하는 사람들이 많아 주막이 있었으나, 1960년대 말부터 마을 사람들이 떠나고 군사용 도로로만 이용하다가 지금은 차량의 왕래를 막고 숲속 탐방로로만 이용하고 있다.
호젓한 계곡을 따라 오르다 보면 삼나무 단지를 만나는데 휴양림으로 좋은 휴식 공간이다. 다리를 건너 잘 정비된 오솔길을 지나면 입암산성 갈림길 이정표를 만난다. 여기서 우측은 남문으로 가고, 왼쪽은 갓바위로 향한다. 남문으로 가는 길을 따라 계곡이 계속되는데 산성까지 이어져 숲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정겹다. 쉼터에서 만난 두꺼비 녀석은 사람을 만나 놀랐는지 줄행랑을 친다. 평일이어서 사람은 별로 없었는데 몇 몇 탐방객들이 지난다. 개울가에서 깨진 자기와 기와 조각들을 줍는다. 사기는 닳고 닳아 매끈하고 기와는 풍파에 무늬도 지워졌는데 옛날 사람들이 살았던 생활 도구들이어서 역사의 숨결을 느끼게 한다. 남문은 의외로 입암산의 절벽을 끼고 있는데 계곡과 산줄기를 연결하여 쌓은 산성은 요새처럼 견고하다. 산성의 치와 계곡에 쌓은 배수구는 성안에서 확인하니 무척 견고하고 튼튼하다. 또한 남문 주위의 성안은 계곡이 계속되고, 우물도 많아 얼마 전까지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새재 갈림길>
<삼나무 단지>
<은선동 삼거리>
<화려한 독버섯>
<두꺼비 출현>
<남문 가는 길>
<입암산성 남문>
산성 남쪽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분지 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사방이 높아 외부에서는 성안이 보이지 않지만 성 내부는 넓어 비교적 대규모의 병력과 주민이 주둔, 거주했으리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곳에서 고려 말 대몽항전기에는 몽고군을 물리친 사실이 있으며, 조선시대 정유재란 때에는 윤진 장군이 왜군을 맞아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전시 때에는 성을 개축하여 둘레가 2,795보에 이르렀고, 포루가 4곳, 성문이 2곳, 석문이 3곳이 있었으며, 성내의 계곡물이 흘러드는 연못이 9개, 샘이 14개로 물 걱정이 없는데다가 성내 사찰이 5개나 되었고 각종 무기고와 군량 7,000석 이상을 저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현재에도 정연하게 쌓은 성벽이 무너지지 않고 남아 있는 모습을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남북의 큰 두 개의 성터는 당시의 웅장했던 산성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입암산성에는 산성마을(성내리)이 있었는데 갓 쓰고 두루마리를 입은 주민들이 한 동안 살았다고 한다. 이들은 지리산 청학동 주민들처럼 유교를 믿으며 살았으나, 1980년대 중반이후 타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현재는 마을 터만 남아 있다. 절구며 생활 도구로 쓰이던 물건들이 마을 터에 남아 그들의 삶을 엿보게 한다.
<산성 성곽>
<남문>
<배수구>
<남문 치 근처 성곽 모습>
<城의 연혁 및 규모>
입암산성의 초축 연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부터 존속했던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성(城)은 해발 550~560m의 능선을 따라 축조된 포곡식 형태를 띠고 있으며, 성곽의 총 연장은 신증동국여지승람지에는 1만2천28척(약 3.6km), 여지도 4천139척(약 1.2km), 증보문헌비고 2천795파(약 3.6km) 장성읍지 4천139파(약 6km)로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성의 규모가 일치하지 않는 것은 여러 차례 수축(조선 효종 4년, 숙종 2년)으로 인해 확장·개축되어 시대별로 상이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잔존하고 있는 성곽의 흔적은 5천208m이나 대부분 붕괴되어 있다. 성곽의 높이는 ‘여지도서’와 ‘증보문헌비고’에 12척(3.5km)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지형에 따라 차이가 있다. 평지나 계곡 부분이 경사지 부분보다 높게 쌓아지는 등 최대한 지형을 이용한 노력이 엿보인다. 성곽의 축성법은 문헌에 밝혀져 있지 않으나 성곽의 외면은 석벽을 이루고 내부는 흙과 잡석을 다져서 쌓아 올리는 삼국시대의 축성 방식인 내탁법을 사용한 듯하다. 석축 방식은 물림 쌓기로 자연석과 활석을 거의 수직으로 쌓고 맨 위에는 미석을 약간 돌출시켜 그 위에 치첩(여장)을 약 1m 정도로 쌓았다. 석축이 거의 원형에 가깝게 남아있는 지역은 남문터 주위로 미석과 치첩, 측구를 찾아볼 수 있다. 남문의 옹석식 문도와 배수구 시설, 하단에 종출 초석(縱出礎石)을 둔 축성 방법이 특이하고 특히 성내에 크고 작은 방죽을 두어 수원(水源)을 확보, 장기간의 농성을 가능토록 했으며 남문의 기둥 받침이 조선조 때 것과 삼국시대 것(네모 구멍)이 함께 발견되고 있다. 특히 성(城)에는 포루(砲樓) 4곳을 비롯해 암문(暗門) 3곳, 여울(溪) 1곳, 연못 9개, 우물 14개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며, 1864년 폐성된 후 1990년대 초반까지 주민들이 주거했었다.
입암산성은 후삼국 시대 고려가 태동할 때 견훤과 왕건이 한 판 승부를 겨루기도 했으며, 고려시대 1256년(고종) 송군비가 남해안에 침입한 몽고군과 싸우면서 축성했다고 전해지며, 그 후로 임진왜란 때에는 이 성의 별장 윤진이 순절했다. 장성읍지에 의하면 1593년(선조 26년) 장성 현감 이귀가 개축하고, 1653년(효종 4년) 현간 이유형이 성의 너비를 넓혔으며, 1677년(숙종 3년) 장성부사 홍석구가 다시 95파(1파 : 양팔의 길이)를 더 증축했다고 전한다. 성내 건물로는 대관(大館)을 두고 그 동쪽과 서쪽에 두각(頭閣), 그 좌우에 월곽(月廓)이 있었고, 군기고와 공남루 등이 배치되었으며, 성내 사찰로는 유상사, 장경사, 흥경사, 인경사, 옥정사, 고경사가 있었다고 한다. 병사는 별장 1명, 군관 2명, 승장 1명 등 총 900명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이 성의 동원에 대비하고 있는 병력은 장성 778명, 고창 200명, 정읍 187명, 흥덕 157명, 태인 1701명이었다. 그리고 이들에게 소요되는 군량미는 총 17094석이며, 벼가 1048석, 콩이 988석인데 이 군량미의 보급은 나주, 광주, 영광, 고창, 정읍, 태인이었으며, 군량미를 나누어 보관하여선 곳의 이름을 딴 지명이 바로 남창이다. 남창계곡의 유래는 바로 남창이라는 남쪽에 있는 군량미 창고라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성터에서 발견된 자기 그릇 파편>
<기와 조각>
<남눈 문루 주춧돌>
<남문>
<기와조각>
<입암산성>
<성벽>
<城과 관련된 문헌들>
‘고려사절요’와 ‘동국병감’등에 따르면 ‘고려 고종 43년(1256) 몽고 6차 침입 때 적병이 여러 섬 공격을 꾀하므로 조정에서는 이광·송군비 등을 내세워 방어키로 했는데, 몽고 병이 이를 알고 방비를 함으로 이광은 다시 섬으로 들어가고 송군비는 입암산성으로 들어갔다’고 적고 있다. 또 ‘장성읍지’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해인 선조 26년(1593년)에 장성현감 이귀가 현인 윤진과 더불어 개축했으며, 정유재란(1597) 때 남하하는 왜병들을 당시 산성 수축관 윤진의 지휘 하에 관병·의병·승병들이 가로막고 싸우다가 장렬히 순절하였다’고 기록됐다.
<성벽과 배수구>
<남문 성곽 안>
<성내 마을터 안내판>
<성내리 모습>
<성내리>
<성내리 주민들이 사용한 절구통>
<윤진 순의비>
<윤진 순의비(尹軫 殉義碑)>
남문을 지나 북문으로 가는 도중에 산성이 냇가를 따라 있고, 사람들이 살았던 곳으로 추정되는 집터와 밭들이 보인다. 또한 윤진 순의비를 길가에서 100미터 가면 볼 수 있는데 이 성과 연관되어 꼭 보아야 한다. 윤진의 순절비는 1742년(영조 18년) 장성부사 이현윤이 국가의 명을 받아 세웠고, 크기는 높이 118cm, 넓이 58cm, 두께 20cm이다. 윤진(1548~1597)의 자는 계방(季邦), 호는 율정, 본관이 남원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성 남문창의에 참여하여 활약했으며, 전라감사 이정암에게 입암산성 수축을 건의하고 허락 받아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하는 지혜를 가졌고, 정유재란 때 입암산성 별장에 임명되자 수 백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가족과 함께 들어가 일본군과 싸우다 성이 함락되어 순절하였다. 그때 왜적은 성에 육박하였고, 4개 읍의 군수는 모두 도망치고 없어 입암산성을 수성하기 위한 대책을 세우기 위해 일단 피했다가 다시 싸우자는 권유가 있었으나, 이를 뿌리치고 끝까지 산성을 지키다 전사한 것이다. 이때 윤진의 처 권씨도 남편이 순절하자 자결하였으며, 이들의 넋을 위로하고자 조정에서는 입압산성에 순절비를 세우도록 하고, 쌍여문(雙閭門)을 내렸다. 윤진의 아들 윤운구는 칼을 맞아 절벽으로 떨어졌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고 한다. 정유재란이 끝난 뒤 나라에서는 윤진 장군의 의기와 부인 권씨의 절개를 높이 기려 장군은 좌승지에 추증하고 부인은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한다. 윤진 순의비는 영조 때의 전라도관찰사 권적이 글을 짓고 장성부사 이현운이 글씨를 써서 세웠다. 비석의 앞, 뒷면 윗부분에는 전서체로 贈左承旨尹公殉義碑(증좌승지윤공순의비)라 쓰여 있고, 그 아래에는 순절한 윤진 장군의 행적과 부인 권씨가 자결한 내용을 비교적 자세히 기록했다. 비록 간단하게 지붕돌을 얹어 세운 평범한 비석이지만 입암산성과 더불어 그 역사적 가치는 무엇보다 크다.
<윤진 장군의 장렬한 최후>
입암산성에는 윤진 장군(尹軫·1548~1597)의 한을 묻고 있다. 남원 출신인 윤진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강 기효간과 함께 장성 남문창의를 발의했던 인물이다. 정유재란 때 입암산성 수성장에 임명되자 당일 부인 권 씨와 아들 운구를 데리고 성에 당도 했을 땐 이미 왜적의 발길이 닿았고, 인근 고을 수령들도 모두 도망간 상태였다. 그러나 장군은 일단 피했다가 싸우자는 주변의 권유를 물리치고 끝까지 성을 지키다 장렬히 최후를 마쳤다. 윤 장군이 죽자 권 씨 부인 역시 남편의 뒤를 따라 자결하고 말았다. 이때가 정유년 9월 16일로 추측된다. 윤 장군은 현재 장성 봉암서원에 배향 되었으며 영조 18년(1742) 장성부사 이현윤이 전라감사 권 적(權 摘)의 글을 받아 성 안에 순절비를 세워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오재만 문화유산사진연구소장 글)
<정유재란 순국비>
<성안에서 본 산 정상 모습>
<성안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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