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인제 설악산 봉정암 적멸보궁
설악산 소청봉 서북쪽 중턱에 천하의 승경 봉정암 적멸보궁이 있다.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3.7일 기도를 마치고 귀국한 것은 선덕여왕 12년(643)의 일이다. 문수보살이 현신해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를 전해주며 해동에 불법을 크게 일으키라고 부촉했으니, 신라로 돌아온 스님은 우선 사리를 봉안할 곳부터 찾았다. 양산 통도사와 경주 황룡사 9층탑에 사리를 봉안했으나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보다 신령한 장소에 봉안하고 싶어 발길을 북으로 돌린 스님은 먼저 금강산을 찾아 엎드려 기도를 했다. 기도를 시작한지 이레 째 되는 날, 갑자기 하늘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오색찬란한 봉황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 스님은 기도의 감응으로 알고 봉황새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더니 봉황새는 높은 봉우리 위를 선회하다 갑자기 어떤 바위 앞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스님은 봉황이 자취를 감춘 바위를 유심히 살펴보니 봉황이 사라진 곳은 바로 부처님의 이마에 해당하는 부분이었다. 이 불두암을 중심으로 좌우에 일곱 개의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었다. 자장율사는 바로 이곳이 사리를 봉안할 곳임을 알고 봉황이 인도한 뜻을 따르기로 했다. 스님은 부처님의 형상을 한 바위 밑에 불뇌사리를 봉안하고 5층탑을 세우고 암자를 지었다. 절 이름은 봉황이 부처님의 이마로 사라졌다 하여 ‘봉정암(鳳頂庵)’이라 붙였다. 신라 선덕여왕 13년(644)의 일이었다. 자장율사의 간절한 기도에 의해 절터를 잡은 봉정암은 이후 불자라면 살아 생전에 한 번은 꼭 참배해야 하는 신앙의 성지로 정착되었다.
신라 고승 원효대사는 불연이 깃든 성지를 순례하다가 문무왕 17년(667)경 잠시 이곳에 머물며 암자를 새로 지었다. 낙산사를 창건한 의상대사도 이곳을 참배했으며,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 지눌도 1188년이 이곳을 참배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수많은 고승들이 앞을 다투어 이곳을 참배하는 까닭은 오직 한 가지 여기에 부처님의 불뇌사리를 봉안돼 있어서였다. 봉정암은 지금까지 아홉 차례의 중건과 중창이 있었다. 1923년 백담사에 머물던 만해 한용운 선사가 쓴 <백담사사적기>에 따르면 조선 중종 13년(1518) 환적(幻寂)스님이 세번째 중건불사를 했고, 네번째는 명종 3년(1548)에 등운(騰雲)선사가 절을 고쳐지었다. 이어 인조 10년(1632)에는 설정(雪淨)화상이 다섯번째 중창을 했다.
특히 설정화상의 중창 때는 부처님의 탱화를 새로 봉안하고 배탑대(拜塔台)를 만들었으며 누각까지 지었다고 한다. 여섯번째 중건은 정조 4년(1780) 계심(戒心)스님에 의해 이루어졌고 일곱번째는 고종 7년(1870) 인공(印空), 수산(睡山) 두 스님이 불사에 원력을 모았다. 그러나 6.25 전쟁때 설악산 전투로 봉정암의 모든 당우가 전소되어 10년 가까이 5층 사리탑만이 외롭게 서 있다가 1960년 법련(法蓮)스님이 1천일 기도 끝에 간신히 법당과 요사를 마련했다. 현재의 봉정암의 모습을 갖춘 것은 1985년부터이다. 우리나라 사찰 중에 가장 해발이 높은 봉정암은 기도를 하면 반드시 감응이 있는 도량으로 유명하다. 자장율사의 창건설화도 그렇지만 이 밖에도 신이한 영험과 이적의 이야기가 수없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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