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최대의 전쟁은 3000만 명이 죽은 獨蘇戰
趙甲濟
1941년 6월22일 독일군이 100개 사단을 동원, 소련을 침공함으로써 시작된
獨蘇 전쟁은 독일군이 붙인 암호명이 ‘바바로사’였다.
神聖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별명인데, ‘붉은 수염’이란 뜻이다.
이 전쟁은 인류역사상 가장 규모가 크고 死傷者가 많았다. 양쪽 병력이 많을 때는 천만 명을 넘었고, 양쪽 戰死者는 3000만 명에 달한다.
그 가운데 2000만 명이 소련군과 민간인,
1000만 명은 독일과 동맹국 군인 및 민간인들이었다.
2차 대전 전체 戰死者는 민간인들을 포함, 700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人命 손실이 컸던 것은, 독일과 소련이 악마적 이념으로 무장한
체제였기 때문에 人命을 무더기로 희생시키는 작전을 편 탓이다. 민간인들도
敵으로 간주, 학살하였고, 포로도 예사로 죽였다. 소련 영토에선 독일군이,
독일영토에선 소련군이 학살, 강간, 약탈을 자행하였다. 복수심에 불타는
군인들 앞에서 유태인들과 여성들이 특히 많은 피해를 보았다.
미국의 보수파는, 스탈린과 히틀러가 모두 惡黨이니 양쪽이 싸워서 한쪽이
망하고 다른 쪽이 지쳐 있을 때 그를 공격하면 나치즘과 공산주의를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소련 지원을 반대하였다.
900일간 계속된 소련의 옛 首都 레닌그라드 포위로 120만 명의 시민들이
주로 굶어죽었다. 開戰 4개월 만에 소련군 400만 명이 戰死, 부상, 포로 신세가 되었다.
아무도 소련이 살아날 것이라고 보지 않았으나 비와 눈, 그리고 T-34 전차가 그들을 살렸다. 가을비는 도로를 진흙탕으로 만들어 독일이 자랑하는 戰車軍團의 進軍 속도를 늦추었다. 이어서 찾아온 눈보라는 겨울 전쟁 준비를 하지 않은 독일군을 얼어붙게 하였다. 이때 추운 날씨에 잘 견디는 소련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독일군은 모스크바의 크렘린 첨탑이 보이는 교외까지 진출하였다가
패퇴하였다. 구조가 간단하고 고장이 잘 나지 않으며 대량생산이 가능한 T-34 전차가 독일군을 괴롭혔다.
소련은 전쟁 전에 일본과 불가침 조약을 맺었으므로, 시베리아 주둔군을 뽑아 對獨전선에 투입할 수 있었다. 스탈린이 건설한 중공업 체제가 본격적으로
가동, 독일의 무기생산을 압도하였다. 미국도 전폭적으로 소련을 지원하였다.
독일군이 破竹之勢로 소련군을 깨는 것을 본 일본은 자신들에 대한 석유봉쇄작전을 시작한 미국과 결전을 벌이기로 작심한다. 이렇게 하여
1941년 12월7일의 진주만 공습을 신호탄으로 태평양 전쟁이 開始된다.
1943년 초 스탈린그라드를 공격하던 독일 제6군 30만 명이 소련군의 포위
작전에 걸려 항복하고 그해 여름 쿠르스크에서 벌어진 사상최대 규모의
탱크전에서 독일이 밀리면서 전쟁의 주도권은 소련으로 넘어갔다. 소련군은
그 후 2년간 독일을 향하여 천천히 밀고 들어간다. 1945년 초 폴란드 바르샤바로 입성한 소련군 병력은 250만 명에, 탱크가 6250대, 비행기가 7500대,
야포가 4만1600문이나 되었다. 병력과 무기 등 물량 면에서 소련군은 독일군에 대하여 늘 세 배 이상 많았다. 그럼에도 독일군은 소련군에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면서 질서 있게 퇴각하였다.
히틀러는 소련을 무너뜨린 다음에 우크라이나 곡창지대를 흡수하고 슬라브
사람들을 시베리아로 추방하거나 아리안족(독일민족)에 봉사하는 노예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는 나폴레옹처럼 러시아의 광대한 영토와 어머어마한 자원에
짓눌려 최후를 맞았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전쟁으로 美英 연합군이 서쪽에서 독일을 쳐올 때도 독일군은 全 병력의 70%를 동부전선에 배치, 소련과 싸웠다. 2차 대전의 主戰場은 獨蘇전장이었다.
2차 대전 때 인명손실을 가장 크게 본 나라는 소련으로서 2000~3000만 명이 죽었다. 이런 희생을 치르고 얻은 東歐의 여러 나라들-동독, 체코, 헝가리,
발틱 3국,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을 위성국으로 만들었다.
소련은 對獨 전쟁을 승리로 끝낸 다음 1945년 8월8일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만주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8월6일 히로시마, 8월9일 나가사키에서 原爆을 맞은 일본은 15일 항복하였다. 한반도로 밀려 내려오는 소련군은 부산까지
갈 수 있었지만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38도선에서 멈췄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해방과 동시에 분단의 길을 걷게 된다.
오늘의 한반도 정세는 70년 전 獨蘇 전쟁의 그림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