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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해설 스크랩 북녘으로 간 문필전사들(2)
李 乙 추천 0 조회 58 12.07.11 07:2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문학평론(2)

 

북녘으로 간 문필전사들

 

○ 박팔양 (朴八陽, 1905~1988, 필명 : 여수麗水, 금여수金麗水).

 

일제가 대한제국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의 공식 명칭은, ‘한?일협상조약’이며, 흔히 제2차 한?일협약, 을사보호조약 또는 을사5조약이라고도 한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제2차 영?일동맹조약을 퉁해 미국과 영국으로부터도 한국에 대한 종주권宗主權을 인정받았다. 또 포츠머스조약을 통해 러시아로부터도 한국에 대한 지도, 감리, 및 보호의 권리를 승인받아 한국에 보호조약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일제는 이미 1904년 5월 31일 내각회의에서 우리나라 국방 및 재정 실권 장악, 외교 감독과 조약 체결권 제약 등을 통해 한국에 대한 보호권을 확보하고 강압적으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여 내정 간섭의 길을 연 후에, ‘한?일 외국인 고문 초빙에 관한 협정서’(제1차 한?일협약)를 체결하게 하고 군사, 재정, 외교 고문을 파견했다.

1905년 2월에는 협정에도 없는 경무 고문과 학부참여관을 파견하여 한국의 내정을 장악해 나갔으며, 같은 해, 2월 22일에 일본은 ‘독도獨島’를 강점하고서 ‘다게시마[竹島]’로 명명했다. 정녕 적반하장이었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우리 영토인 독도를 아주 오래된 자기네 섬이라며 억지주장을 펴고 있다. 그렇게 따진다면 독도는 물론 대마도對馬島도 우리 땅이다. 온갖 수단으로 정지작업을 거친 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한국을 보호국保護國이란 미명 아래 식민지화 하는 데 박차를 가했던 것이다.

 

시국이 혼란했던 바로 그 시절, 1905년 8월 2일에 박팔양은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다. 서울로 유학을 가서 초등하고를 마치고, 배재고보를 걸쳐 1923년에 경성 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 동아일보 신춘문예 작품공모에 응모하여 시「神의 酒」로 당선했다. 그 후에, 정지용, 박제찬 등과 카프활동을 하면서, 동인지『요람』을 발간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외일보 등에서 기자생활도 했다. 천부적이고 문학적인 재질을 타고난 박팔양의 시의 경향은 원형적 심상에다 짙은 서정성에 바탕을 두어, 자연과 물아일치物我一致의 세계를 추구했다. 한편으로는 사회 현실에서 발견되는 모순과 괴리에 대한 비애감 깃든 참여시參與詩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의 초기 작품인 시「물노래」(1923), 시「공장」(1923), 시「여명 이전」(1925) 등은 현실에 대한 참여시로 기우는 것 같았으나 거의 대부분의 시가 자연에 친화된 서정시로 창작되었다. 그가 1926년에 정식으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즉 카프(KAPF)에 가입하고서 10여년 뒤인, 1946년에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맹원이 되었다. 그 해 월북하여 1988년 10월 82세로 임종하기까지, 북한의 노동당과 김일성에게 극진한 충성을 다 바쳤기 때문에, 철저한 사회주의 시인으로써 절대적 위치를 차지했었다.

박팔양이 월북하자마자, 그의 재능이 북한 노동당이나 김일성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게 했다 그래서 평북도당 위원회의 기관지인《바른말》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기관지인 《정로》의 편집국장을 역임했고, 또한《로동신문》의 부주필과 김일성 종합대학 어문학부 강좌장 등도 역임했다. 6?25 남침으로 전쟁을 일으킨 인민군을 따라 전장에서 종군기자로도 활동했다. 이때부터 주로 노동당이나 김일성이 요구하는 선전, 선동적인 시를 주로 썼으며, 휴전을 전후한 1953년에는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 그리고 1955년에는『조선문학』편집위원 및 조선 작가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등 화려한 경력을 가졌다.

 

박팔양은 카프에 가입하면서, 철두철미한 프롤레타리아 시인으로 전향했다. 적극적이고 투철하게 노동계급의 해방을 위한 시「나를 부르는 소리 있어 가로되」(1926), 시「밤차」(1927) 등을 발표하여 불합리한 식민지 현실을 폭로하는 반면에, 가난하고 무지한 하층 계급에 대한 동정심을 일으키면서, 이들이 뭉쳐 단합한 의지로 미래를 개척할 신념과 난관을 헤치며 희망을 읊으려고 했다.

박팔양의 열정적으로 창작한 시기를 1930대 중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30년 기간으로 잡는다. 이 시기에 박팔양은 다양한 주제의 작품을 발표했다. 그러면서 박세영, 이용악, 조벽암 등과 더불어 북한의 시단詩壇을 이끌어가던 주역에 속했다. 이 시기에 그의 대표 시로 꼽는 작품은, 시「진달래」(1930), 시「봄, 승리의 봄, 연설회의 밤, 선구자」(1937) 등이다. 더러는 이념적이긴 하나 짙은 서정성이 엿보였다. 해방 후 북선 항전 시기에 쓴, 시「다시 맞는 영광의 날」(1946), 시「조국과 인민의 영광, 영광, 찬란한 자유 독립의 길로」(1948)에 가서는 모든 작품이 오직 북한 체제와 이념을 찬양하며 선전 선동하는 시로 돌변했다. 625전쟁과 그 이후에 쓴, 시「진격의 밤」(1951), 시「우리 학생들」(1952), 시「수령께서 오시다」(1953), 시「건설의 노래」(1954), 시「친리마의 노래, 문경고개」(1958), 시「비날론 이야기」(1963), 시「농촌으로 가는 길」(1966)은 노동당과 김일성에게 충성스런 문필전사로서 선전 선동의 나팔수가 되었다.

박팔양은 1960년대 들어서는 공산주의 골수분자가 되고 말았다. 노동당과 김일성에 대한 충성은 극에 달하여, 충성의 헌시와 송시 등을 수시로 바쳤으며, 이밖에도 그에게 있어 드문 서사시「황해도의 노래」(1951)와「눈보라 만리」(1961)에 발표했다. 시집으로는,『박팔양 선집(1957)』과 1948년, 1981년, 1992년에 『박팔양 시선집』이 북한에서 출간되었고, 소설 작품으로『오후 여섯 시』가 있으며 한국에서는 시집『여수 시초』와『박팔양 시집』이 발간되었다.

 

□ 남한에서 발표한 작품들

 

추방되는 백성의 고달픈 백魄을 실고/밤차는 헐레벌덕어리며 달아간다/도망군이 짐싸가지고 솔밭길을 빠지듯/야반 국경의 들길을 달리는 이 괴물이여!//…중략…//피곤한 백성의 몸 우에/무겁게 내려 덮인 이 지리한 밤아/언제나 새이랴냐 언제나 걷히랴냐/아아, 언제나 이 괴로움에서 깨워 일으키랴느냐

-시「밤차」(1927. 조선지광).

 

종합잡지《조선지광朝鮮之光》은 1922년에 발행할 때, 주간週刊으로 나오다가, 나중에 월간으로 나온 잡지로서 사회주의적 경향과 문화 예술에 관한 내용을 주로 다루었으며, 정지용, 소설가 유진오, 이효석 등이 활약했다.

일제 강점기에 거의 70%가 소작농이었던 농민들은 ‘보릿고개’라고 불리던 춘궁기春窮期를 해마다 연중행사처럼 겪어야만 했다. 이런 빈곤화貧困化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 일부는 도시나 국외로 이주하여 일자리를 찾아 헤맸다. 이들은 일본 본국이나 일본의 반식민지였던 만주 등지에서 저렴한 노동력으로 혹사당하면서 연명해야 했다. 이 시는 그런 상황에 처해, 고국을 등지고 정처 없이 떠나는 백성들의 절박한 처지를 읊고 있다. 시어가 직사화기처럼 정면으로 뿜어내는 듯하여, 다소 거칠게 느껴지지만, 보헤미안적인 서정성과 영탄사가 어우러져, 식민 통치하에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여기서 화자의 기우杞憂는, ‘걷히랴나’, ‘일으키랴나’의 의문형 종결어미에서 보듯이, 걱정스레 물으면서도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불투명한 그들의 앞날에 대해 불안해한다.

시가가 좁다고 먼지 휘날리며 달리는/××××자동차와 마차/그것은 오늘의 ×××× 무엇이란 말이냐/보아라 거리와 거리에 모혀슨 우리 ××××/평소에 묵묵히 말하든 친구들의 오늘을//…중략…//5월의 향기로운 공기를 통하야/오오 울리라 우리들의 교향악을

-시「데모」(1928. 조선지광).

인용한 시에서 박팔양이 아주 열성적으로 프롤레타리아 이념을 고무 찬양하는 작품으로선 대표작이라 하겠다. 당시 식민지 통치하에 있던 농민과 서민들에겐 ‘데모’가 무엇인지조차 모를 온건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당시 연명하기 위해 일제 식민지 정책에 강요하는 대로 길들어져 가고 있었다. 국제노동절인 흔히 ‘5?1절’ 또는 ‘메이데이’라고 불리는 이 날, 박팔양은 극좌의 모습으로 급변하여 사회주의 혁명을 외치는 대중의 대변자처럼 선전 선동한다. 하지만 일제는 이것을 좋게 보지 않았다. 소위 부르주아적 문인들을 향한 적대적인 감정 노출 경계하면서, 일부 극좌인 프롤레타리아 문인들의 작품에 대한 사전 검열을 강화했다. 이를 교묘하게 피하기 위해 박팔양은 시어들 중에 노골적인 부분을, ××××를 표기하는, 숨기는 글자, 복자伏字를 사용하여 검열을 피했다는 것이다. 시는 언제나 短文이다. 시에서 복자를 사용한다는 것은 장려할 일은 아니다. 그 부분이 이 시가 지닌 주제이므로, 차라리 동전의 양면처럼 다의성多義性을 지닌 시어를 대신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날더러 진달래 꽃을 노래하라 하십니까/이 가난한 시인더러 그 적막하고도 가녈픈 꽃을/이른 봄 산골짜기에 소문도 없이 피었다가/하로 아침 비바람에 속절없이 떨어지는 그 꽃을/무슨 말로 노래하라 하십니까//…중략…//그러나 진달래 꽃을 오라는 봄의 모양을 그 머리 속에 그리면서/찬바람 오고가는 산허리에서 오히려 웃으며 말할 것이외다/오래 오래 피는 것이 꽃이 아니라/봄철을 먼저 아는 것이 꽃이라고

-시「너무나 슬픈 사실」(1930. 조선지광).

□ 북한에서 발표한 작품.

 

5월 하늘 바다처럼 푸르고/저 높이 휘날리는 오력의 깃발/자랑스럽게 우리 이날에 나아가노니/만국 노동자들과 함께 나아가노니//…중략…//형제여! 가슴 벅찬 승리 속에/경제 건설과 유격전의 승리 속에/내달아 또 싸우고 싸워 이기자/뜨거운 손길 맞잡고 평화와 통일에로

-시「5?1의 노래」(1950. 문학예술).

 

북한은 애국愛國이라는 미명 아래 인민들의 무보수 노동을 착취하기 위해, 소위 ‘애국노동운동愛國勞動運動’은 천리마 운동을 시작한 1957년 전까지 강요했다. 그래서 해마다 5?1절을 앞두고 각 분야 별로, ‘5?1절 이전에 올해 상반기 과제를 초과 당성하자.’ 등 여러 가지 구호를 내걸었다. 이른바 ‘5?1절기념증산돌격운동’이니 ‘5?1절경축증산경쟁운동’으로 명명하면서 노동을 강요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1970년에 들어와 매년 4월 15일 김일성의 생일을 대대적으로 경축하면서, ‘민족의 명절’로 규정한 다음부터는 51절은 김일성의 생일을 전후한 증산경쟁운동으로 바뀌었다. 이 시는 6?25 남침 직전에 국제노동절을 맞아 노동 의지를 고무하면서 승전을 다짐하는 목적시다.

 

전차는 전호에서 총탄을 쏘며/농민은 공습 밑에서 씨를 뿌리며/노동자들은 굴 속 공장에서/전체 인민이 굳세게 싸우는 조선//…중략…//우리의 전투적 역량을 보여 주마/단결된 우리의 최후의 승리를 보여 주마/그러나 마지막에는 보여줄 네가/이 대지 위에 남아 있지 못할 것을

-시「5?1절」(1951.문학예술).

 

이 시는 6?25 전쟁 중에, 국제노동절을 맞이하여, 노동자를 칭송하기 위해 쓴 작품이다. 그리고 내용은 매우 호전적이면서 선동적이다. 북한은 노동당의 정책이나 김일성의 교시를 ‘~운동’, ‘~투쟁’, ‘~돌격대’ 등으로, 소위 사회주의 경쟁운동용어로 하부조직까지 일사철리로 하달되자마자 실행에 옮기며 그 목표에 대한 결과를 따진다. 괴기천만怪奇千萬한 각종 운동이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달고서 억세게 쏟아져 나왔다. 이처럼 북한 노동당은 잠시도 인민을 쉬게 하지 않았다. 그저 틈만 나면, 인민들의 피땀을 짜내면서, 인민들을 허울 좋은 사회주의 혁명의 노예로 만들기에 급급했다.

예컨대 그런 운동에는, …가위밥모으기운동 가재잡이운동, 강반석려사따라배우기운동, 고기생산운동, 꽃파는처녀근위대운동, 구공탄개조운동, 김일성교시 백번읽고백번쓰기운동, 김정일노래부르기운동, 낟알이삭줍기운동, 넝마바치기운동, 녀성보잽이운동, 다람쥐잡기운동, 달그림자보기운동, 대를이어충성서약운동, 도토리줍기운동, 뚜껑벗겨주기운동, 두몫세몫하기운동, 매끼한숟가락절약운동, 모피수집운동, 물감봉지한번더털기운동, 물없이밥해먹기운동, 미군찌르기운동, 민물고기기르기운동, 빨간치마헌납운동, 100삽뜨고허리한번펴기운동, 뱀잡이운동, 별보기운동, 붉운별따기운동, 빈손퇴치운동, 산나물채취경쟁운동, 쌀한톨절약운동, 새벽별보기운동, 생일선물바치기운동, 세고랑매고한번허리펴기운동, 쇠조각줍기운동, 시궁창파기운동, 십자무늬도배지제거운동, 알곡주머나차기운동, 유일사상전인민적학습운동,이고지고안고뛰기운동, 이잡기운동, 1분1초운동, 장가시집가기운동, 전략물자비축운동, 쥐가죽수집운동, 집을깨끗이거두는운동, 충성의편지이어달리기운동, 치마폭에싸기운동, 털실모으기운동, 퇴근안하기운동, 파리잡기운동, 풀베기운동, 하루한그릇줄이기운동, 한짐더지기운동, 햇빛안보기운동, 허리안펴기운동, 헝겊뒤져모으기운동… 외에 ‘~운동’은 수없이 많다.

그뿐만 아니라, 마치 전쟁놀이를 하듯이, ‘~투쟁’이니, ‘~전투’ 또는 ‘~돌격대(전)’이라는 군사용어로 무고한 인민들을 홀리게 만들고서 노동력을 빼앗았다. …감나무동산돌격대, 감자고지점령투쟁, 강냉이고지점령투쟁, 강철고지점령투쟁, 공작기계1만대고지점령투쟁, 교조주의?형식주의퇴치투쟁, 기름절약투쟁, 김매기1개월투쟁, 년간목표4개월단축투쟁, 대속도전, 돌격반전투, 두몫세몫돌격전, 랑비와훔쳐먹는형상과의투쟁, 리수복영웅돌격대, 명태잡이100일전투, 모내기돌격전, 고기고지점령투쟁, 물자절약투쟁, 반탐오반랑비투쟁, 반항공비상경계투쟁, 150일전투, 120일전투, 100일전투, 부식토생산투쟁, 3대고지점령투쟁, 3대기술혁명력량강화투쟁, 생산결사대, 생산돌격전, 석탄고지점령투쟁, 세멘트고지점령투쟁, 속도전돌격대, 속도전청년돌격대, 수산물고지점령투쟁, 15일전투, 알곡고지점령투쟁, 야간돌격투쟁, 어로전투, 5개전선점령총돌격전, 운수계획초과완수투쟁, 월말돌격전, 2배가생산전투, 일본자본주의침습과의투쟁, 전격전, 절약수집투쟁, 절약투쟁, 주택고지점령투쟁, 돌격전, 최후의돌격전, 충성의속도전, 70일전투, 8?15기념돌격전, 휘발유절약투쟁…등으로 인민의 생활에 고충을 심화시키고 있다.

박팔양이 북한 노동당의 문필전사로서, 인민군의 종군기자로서 김일성에게, 주어진 책무와 충성을 다 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위에서 인용한 시 외에도 박팔양은 본궁[노동 계급의 거리]에서 생산되는, 비날론[비닐}과 노동자를 찬양하는 시「본궁 이야기」로 노동자들을 찬양하고 더 분발해 줄 것을 바란다.

 

나는 우리 학생을 사랑한다/그들은 진실로 새로운 세대의 사람들/새 조선의 영특한 아들과 딸들/참되고 굳세인 그들을 자랑한다//…중략…//어떠한 고난이 닥쳐와도/어떠한 장애가 길을 막아도/그들은 태연히 웃으며 넌즛이 말하네/내 몸은 이미 조국에 바친 몸이라고

-시「우리 학생들」(1952. 조선문학).

 

박팔양은 다른 월북 시인들에 비해 활동의 폭이 큰 편이었다. 그는 늘 기회가 주어지거나 기회를 포착해, 노동당이 현실과제로 삼는 정책노선과 김일성의 교시와 그 의중에 들어맞는, 어떤 조직이나 단체의 행사나 기념식 등에는 반드시 참석하여 즉흥적으로 시를 창작해 시기적절하게 문예지 등에 발표하곤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최고의 시인으로 높이 샀다. 노동당의 정책을 누구보다 선전 선동을 잘하며, 김일성도 그의 재능과 충성심을 인정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김일성 종합대학교 어문학부 강좌장도 역임하게 되었다. 이 시는 그가 교직에 막 들어가서 머물고 있을 때, 창작한 시로 추측된다. 젊고 발란한 어린 학생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는, 한편으로 전쟁에 대한 증오심과 아울러 적에 대한 끊임없는 적개심, 투쟁 정신을 고취시켜 줌으로써, 조국에 대한 애국심을 가질 수 있다는 내용의 장시長詩다.

 

철갑옷을 입은 옛날 장수처럼/용광로야 너는 우뚝 서 있구나/우리 조국 푸른 하늘에 높이높이/용광로야 너는 산악처럼 서 있구나//…후략…

-시「용광로야」(1958.조선문학).

 

6?25 동란 때, 폭격으로 인하여 북한에서 손꼽는 황해 제철소나 김책 제철소 등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발전소나 제철소 같은 국가기간시설은 피아彼我를 막론하고, 전략적 군사적 표적에서 피하기 어렵다. 노동당은 전후 복구 작업을 통해 이 공장들을 최단 시일 내에 복구하고 쇳물을 뽑기 시작했다. 복구 작업을 진행함에 있어서 많은 철제가 필요했으나 생산이 수요를 따를 수가 없었다. 더구나 용광로는 정규적으로 연간 2~3회의 보수작업을 진행해야 함으로, 그 때는 가동하지 않았다. 또한 용광로의 보수 작업은 열이 식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그 기간이 대체로 2~3주간이나 걸렸다. 더욱이 중공업에 역점을 두었던 기계 및 시설에 대한 증보수가 시급했다. 박팔양은 기자 출신답게 발 빠른 행보로 현장으로 달려가, 용광로 조업식操業式에서 북한의 기계 산업을 찬양하고 노동자들의 근로 의욕을 고취시키려고 읊은 작품이다.

 

수령께서 오신다는 말씀에/학생들은 기쁨에 넘쳐넘쳐/영명하신 그 분께 드릴/전성의 꽃다발을 엮었다//…중략…//강철은 불속에서 단련되나니/포화의 불길 속에서 자라나는/젊은 간부들은 우리의 자랑/만족하신 듯 수령께서는 미소하시네

-시「수령께서 오시다」(1953. 문학예술).

 

남침을 강행했던 북한에서는, 동란을 일으킨 6월 25일에 대하여, ‘인민전체투쟁의 날’, ‘미제철거투쟁의 날’, ‘미제반대의 날’, 그리고 ‘반미투쟁의 날’이라고 제멋대로 불러댄다. 1950년 6월25일에 발발되어 국지전 양상으로 밀고 밀리는, 공방만 계속되어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3년의 동족상잔의 비극은,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그날 오후 10시부터 모든 전선戰線에서 전투행위가 중지되었다. 선전포고도 없이 남침해서 적화통일에 실패한 북한은 반성은커녕 지금도 6월 25일을, ‘전승기념일戰勝記念日’로 삼고 있으니 한심하다. 이 시는 38°선 휴전협정이 가까웠던 어느 날, 전쟁의 상처가 깊은 곳, 학교나 군부대, 산업시설을 찾아 인민을 격려하며 위로하던 김일성을 경의하며 환영하는 심정으로 읊었다.

 

그 분들이 우리나라로/강을 건너오시던 날 밤은/별도 없는 밤이였건만/광명으로 큰길이 밝았더이다//…중략…//아아 어둠이 달아나는 통트는 아침/이 나라 수많은 고지위에 나부끼는/두 나라 인민의 깃발/동방은 붉게붉게 동터오고/태양은 높이높이 솟아 오릅니다

-시「중국인민지원군」(1953. 조선문학).

 

6?25 전쟁 중 불리했던 인민군의 전세에 중국공산당은 수차례, 지원군을 보내주어 위기를 모면하게 해준 모택동에게 감사함을 전하는 내용이다. 산문작리고 평면적인 시어로 신선한 표현은 찾아볼 수 없다. 1950년 10월 25일에 6?25 동란을 일으킨 북한을 도우려고 중공군이 전쟁에 투입되었다. 그 후 매년 ‘중공지원군 참전 기념일’로 규정하고 기념행사를 벌인다.

 

산골짜기를 흘러내리는/깨끗하고 맑은 시냇물이/이 곬 물이나 저 곬 물이나/모두 다 바다로 들어가듯이//…중략…//하지만 평화의 노래 속에 크레믈린은/전세계 선량한 사람들의 마음의 고향/그 분께서 고요히 잠드신 붉은 광장에/오늘도 눈부신 영광이 넘쳐 흐른다

-시「위대하신 그분」(1954. 조선문학).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의 스탈린 묘소를 참배하면서, 소회를 읊었다. 스탈린(1879~1953)은 레닌과 볼세비키당黨을 확립했고, 그 과정에서 시베리아에 5회나 유형流刑되었으나, 10월 혁명을 지도하고 혁명 후, 소위 붉은 군대[赤軍]을 조직한 소련의 전前 서기장이다. 박팔양은 이 시에서, 소련이 북한 함께 공산주의 낙원을 이룩하는 혈맹血盟의 동반자임은 내비친다. 그는 북한과 뜻을 함께하는 사회주의 국가, 중국, 소련 등을 찬양하거나 다양한 주제로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김일성에 대한 충성의 헌시, 송시 등이 많다. 특히 사회주의 국가의 지도자에까지 경의와 찬사를 바치는 내용이나 산업 현장에서 노동자들에게나 재외동포에까지 북한의 노동당 정책을 선전 선동하는 시를 다작多作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는, 시「보천보」, 시「눈보라 만리」, 시「헌시」등이다. 그리고 조선노동당 제3차 당대회의 축시「우리당은 자랑스러워라」와 조선노동당 제4차 당대회의 축시「영광드립니다」에서도 사회주의 건설에 대한 찬양을 아끼지 않았다.

 

평양-북경/국제열차 힘차게 달려간다//…중략…//열차여! 그대 힘차게 달려라/인민중국의 새로운 건설터로

-시「국제열차」(1955. 조선문학).

 

인민혁명의 공산주의 열사들이/깊이 잠들어 있은 이 언덕은//…중략…//오늘 궂은 밤비 내리는 대만에도/아침 햇빛에 붉은 꽃 활짝 피어나게 하라

-시「남경 우화대」(1955. 조선문학).

 

양자강 건너 호남의 소산향은/물 맑고 산 좋고 살기도 좋다//…중략…//넘치는 영광의 마을이여!/모주석을 낳은 소산향이여!

-시「소산향」(1955. 조선문학).

 

위 인용한 3편의 시는 1955년에 박팔양이 중국을 방문하여, 그 소회를 소재로 형상화한 작품들이다. 국제열차를 타고 오고 가면서 사색에 잠긴다. 나날이 발전해 가는 중국의 변모를, 그리고 모택동의 고향을 떠올린다. 그 해『조선문학』(12월호)에 발표한 작품들로 선전 선동의 호격언어나 이념은 짙지 않아 시어가 편안하게 다가오다.

 

아르메니야 목화 따는 마을에/꼴호즈를 찾아 우리는 갔다/뜨거운 친선의 정겨운 인사를/농민 형제들게 전하러 갔다//…중략…//목화송이처럼 피어만나는/당신들의 이 행복한 살림살이/그것이 어찌 당신들만의 승리이랴/이는 곧 우리들의 승리이어라

-시「목화 따는 마을에서」(1957. 조선문학).

 

1917년 4월 러시아 혁명기간 중 레닌이 발표한 강령[4월 테제 : April Theses]으로 1917년 10월 볼세비키혁명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소비에트를 지배했던 사회주의자들은 2월혁명을 부르조아혁명으로 해석했고, 부로조아지가 권력을 잡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들은 두마(Duma : 제정 러시아 국회)의 자유주의자들이 형성한 임시정부의 통치에 복종했다. 그러나 레닌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지배할 경우, 두 세력은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임시정부 지지를 그만 두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즉각 철수할 것과 토지를 농민들에게 나누어줄 것을 요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또한 소비에트가 은행 국유화와 공산품 생산과 분배를 관리할 것을 요구했다. 레닌은 이 테제를 사회민주당원 모임에서 처음 발표했고 그 뒤 볼세비키위원회에서도 발표했는데, 두 곳에서 모두 거부되었다. 그러나 몇 주 후, 제7차 전당대회에서 이 테제를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표어와 함께 당의 기본 방침으로 받아들였다. 노동자와 군인들은 볼세비키 표어를 이용하며 소비에트가 7월에 권력을 장악하도록 시도했으며, 10월이 되자 레닌의 당은 소비에트의 이름으로 임시정부 권력을 빼앗았다. 10월 혁명으로 레닌이 주도한 소비에트정권이 1917년 11월 8일에 탄생되었다.

이 시는 1956년 ‘소련의 10월 혁명축전’에 참석한 박팔양이 여러 유적지와 농촌을 돌아보면서 쓴 일종의 여행 시에 속한다. 이 작품에서는 그의 잠꼬대 같았던 선동 선전의 정치성은 보이지 않고 자연의 객관적 상관물에서 풍기는 서정을 바탕으로 읊었다. 소련 방문을 하면서 여러 편의 작품을 남겼다. 시「여객기는 구름 우로」, 시「모스크바」, 시「레닌그라드」, 시「아라라드의 산봉」등 사상과 이념보단 목가적 전원의 아름다운 서정을 노래했다.

 

그 옛날 로씨야의 소설들에서/친한 지 오래인 그대 백화나무 숲/씨비리 대지의 백화나무 숲이여!/가도가도 끝이 없이 보이누나////그러나 이제는 백화나무 숲속으로/사회주의 락원의 노래소리 퍼지누나/마을 둘러싸고 진달래 붉게 피여/새 씨비리, 행복의 봄을 노래하누나

-시「백화나무 숲」(1959. 조선문학).

 

백화(白樺)는 자작나무의 다른 이름이다. 주로 아시아 동북 또는 북부지방 깊은 산에 나는데 나무껍질이 희며 엷게 벗겨지는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 역시 1956년 소련을 방문한 후, 귀국하여 틈틈이 여행에서 보았던 풍경들을 떠올리면, 이념과 사상을 배제하고 낭만과 서정으로 읊은 작품이다. 인용한 시 외에도, 시「로씨야 땅은 얼마나 넓던지」, 시「쏘비에트 사람들」, 시「한 태양 아래」, 시「순양함 아브로라호」등을 발표했다.

 

청진 부두에 상봉의 날이 밝았네/흰 꽃보라처럼 눈보라가 날려도/부모 형제 맞는 뜨거운 심장들이/노래를 부르며 부두로 모여만 오네//…중략…//아아, 얼마나 즐거운 조국의 아침이냐?/아아, 얼머나 복된 우리들의 나날이냐?/우리들은 즐거운 새해를 맞는다/동포를 맞아 승리를 노래하면서

-시「승리를 노래하면서」(1960. 조선문학).

 

일본에 사는 교포 중 공산주의자들이 1955년 5월 25일에 조작한 단체를 일컬어, ‘재일조선인총연합회在日朝鮮人總聯合會’이며 약칭 조총연朝總聯으로 불린다. 이 단체는 북한 노동당의 지령에 따라 재일 교포의 사상을 붉게 오염시키는 한편, 일본을 기지로 삼아 남한에 대한 북한의 대남적화공작을 돕는 하수인이었다. 그 예를 들면, 1974년 8?15광복정 기념식에서 문세광으로 하여금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려다가 미수에 그치고 영부인이 서거하는 참변을 빚기도 했다. 북한은 일본에 있는 조총연의 조직이나 중공 치하에 등, 해외에서 살다가 북한 치하에 들어오는 사람을 모두 ‘귀국자歸國者’로 분류하여 엄중하게 감시한다.

이 시는 1959년 2월부터, 이른바 조총연 동포들이 일본에서 북송선을 타고서 청진항에 입항할 때, 박팔양이 현장에서 이를 환영하면서 읊은 시다.

 

내 검은 머리가 희어진 이 나이에/일찍이 한번도 들어본 일이 없는/당신들의 그 이야기 내 기슴을 울려/펼쳐든 신문장을 적시였노라//…중략…//천리마의 열정 드높은 붉은 대학생들의/호담한 웃음 속에 우리 시대 꽃피여가고/사람 목숨 앞에 모든 것 바치는 의료 일꾼들/웃는 그 얼굴에 깊은 사랑이 어리였어라

-시「귀중한 당신들」(1961. 조선문학).

 

박팔양이 흥남을 방문하여, 그곳의 비료공장, 병원의 일꾼, 함흥의대 학생들에게 천리마 운동을 선동 선전하기 위해 노동력을 부추기는 목적시다. ‘천리마운동千里馬運動’이란 북한 인민들의 노력을 조직적으로 최대한 갈취하기 위해 짜낸 운동이다. 북한은 휴전 후, 소련, 중공 및 동구권 공산국가의 원조를 얻어 전후 복구 3개년 계획을 완수했다. 이를 바탕으로 북한은 중공업 우선의 경제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기 위해 이른바 5개년 계획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자금, 기술 원조를 구걸하기 위해 김일성은 1956년 대표단을 직접 이끌고 소련, 동구권 공산국가들을 순방했으나 5개년 계획의 무모성을 신랄하게 규탄 받았고, 한편 원조를 외면당하고 말았다. 궁여지책으로 5개년 계획을 완수하자면 보다 많은 노력의 착취와 내부 예비의 동원과 절약의 방도밖에 없었다.

1956년 12월 11일 노동당은 ‘당전원회의黨全員會議’를 소집하고, ‘최대한 증산과 최대한 절약’이라는 구호를 내세우기에 이르렀고, 이에 성과적 수행을 위해 인민들을 증산과 절약 투쟁에 내몰았다. 또한 종래와 같은 분산적이고 비조직적이었던 노동 경쟁 운동을 지양止揚하고 좀 더 집단적이고도 조직적인 노동 경쟁 운동의 전개를 강요했다. 이에 따라 노동당은 평남 청년 탄광 개발 돌격대, 강계 청년 발전소 돌격대, 청년 철도 건설 돌격대 등 노돈 생산성을 고도로 발휘하도록 충동했다. 주로 청장년靑壯年을 사주하여, 개간지, 광산 개발 작업, 철도 부설 작업, 전력 공사 등에 몰아넣은 이 운동은 형식상 자발적인 것처럼 가장했지만 실제는 강제적이었다.

이것이 천리마운동의 발단이었고, 실제로 천리마운동이라는 말은 19598년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천리마운동은 당시 북한의 직업동맹職業同盟위원장 김왈룡金曰龍이, ‘사회주의 건설에서 우리 당의 총 노선으로 되어 있는 천리마운동은 전후 3개년 복구 계획에서 5개년 계획에로 이행하는 것과 관련하여 당과 인민 앞에 조성된 격심한 난관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을 직접적인 계기로 하여 발생한 것이다.’라고 규정한 것으로 보아 천리마운동의 실질적인 발단은 1956년 12월, 노동당 전원회의를 기점으로 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천리마운동은 1958년 9월, ‘전국 생산 혁신자 대회’를 거쳐, 1959년 3월, 평안남도 강서군에 있는 강선 제강소의 진응원 작업반에서 시작한 천리마 작업반 운동으로 발전했다. 천리마운동은 그 후 천리마 기수, 천리마 시대, 천리마 말고삐, 천리마 작업반, 천리마 인민반, 천리마 직장, 천리마 공장, 천리마 학교, 천리마 대학, 천리마 학부 등 숱한 용어를 만들었으며, 이와 같은 용어가 의미하듯, 북한 인민들은 마치 망아지 새끼 취급을 받으며 노동 노예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박팔양은 이와 같은 천리마를 부르짖으면서, 가는 데마다 노동을 선전 선동하며 부추겼다. 그리고 1961년 815 해방 15주년을 맞아서, 축시「조국통일」을, 1964년에는 항일혁명투쟁 때, 감옥에 갇힌 박록금 여전사를 떠올리며, 시「노래를 불러달라」를, 1965년에는 청진 제강소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아닌 흰 연기를 보면서, 산업 발전을 칭송하는 시「검은 연기 사라지다」를 발표했다. 월북 전 박팔양은 남한에서도 열렬한 카프의 맹원으로 사회주의 사상과 문학에 심취되어 있었다. 그러기에 북한 사회에서 그가 어떤 위치에 있었으며 어떤 활동을 했을까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월북한 문인들이 대개 그러하듯 일생의 절반은 남한에서 나머지 절반은 북한에서 보내다 타계했다. 박팔양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41세에 월북하여, 1988년 10월 83세로 생의 종지부를 찍었다. 그가 만약 월북하지 않고 남한에서 남아서 문학을 자유롭게 창작활동을 했다면 오늘날에 와서 후세들이 그의 문학적 업적을 어떻게 평가했을까를 생각하니, 갑자기 답답하고 어둔해진다. 모르긴 해도 지금쯤 천재적인 기량이 남긴 작품들로 하여금 한국문단의 우둑 솟은 금자탑 내지 온 국민들의 가슴 속에 자리한 하나의 순수서정의 샘으로 솟구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마저 든다. 1946년 월북하여 1960년대 중반까지 사회주의 문학의 깃발을 높이 들고 동분서주 어디든 뛰어다니며 사회주의 혁명을 의해 선전, 선동에 앞잡이 되었던, 시쳇말로 아주 잘 나갔던 그였다. 그렇게 노동당이나 김일성의 총애를 받던 박팔양의 앞길에 뜬금없이 불운한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1962년 한설야를 비롯한 이용악, 안희남, 현덕, 안함광 등과 더불어 종파분자宗派分子로 몰려 숙청肅淸을 당하고 말았다. 종파분자란 종파행위 즉, 파벌을 형성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북한식 용어, 그러나 노동당과 김일성의 반대파를 숙청하기 위해 자주 쓰는 상투적인 용어다. 그 종파계층宗派階層은 노동당 내의 여러 파벌을 뜻했다. 예컨대 국내파, 남로당파, 소련파, 연안파, 갑산파, 직계파 계열 등, 노동당 전체의 이익을 외면하고 자파自派들만의 작은 이익만 꾀하며 노동당 조직체 안에서 분열적 책동을 하는 자들의 집단 또는 계층에 대하여 김일성의 1인 독재 체제 확립을 위해 무자비한 숙청을 감행했다. (북한 용어대백과) 그 후에 북한 문단에서 박팔양을 물론 그의 작품을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문필전사文筆戰士로 충성을 다한 박팔양을 숙청이란 올가미를 씌우게 한 죄목罪目은 명백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추측하건대, 박팔양은 남한 출신인 동시에, 박헌영이 비호하는 문인 주에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노동당은 소위 월북 문인 대다수를 숙청하기 위한 구실로, 그들에게 부르조아적 요소를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사상검토思想檢討’를 했다. 사상검토란, 노동당 정책에 적극 호용하지 않거나 위배되는 언동을 했을 때, 그와 같은 행위를 하게 된 사상근원을 밝히기 위해 강요되는 호상비판互相批判을 말하는 것, 즉 북한 인민 개개인이 김일성 독재 체제에 충성심의 검열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사상검토회란, 노동당 및 사회단체들에서 소위 비공산주의적 사상을 뿌리 뽑기 위해 참가자들의 사상을 비판批判 또는 자기비판 하는 형식으로 검토하는 모임을 말한다. 이 구실로 많은 문인들이 숙청되고 말았다.

박팔양이 죽은 지, 4년이 지난 1992년에『박팔양 시선집』(조선문학 예술조합 출판사)이 발간되었다. 이 시선집의 머리글에다,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께서 크나큰 온정을 베풀어 이 시선집이 출간되는 것’이러 전제되어 있다. 여기에 수록된 작품은 90여 편, 7장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거의 해방 후, 그의 대표시를 포함해 미완성 유고작인 시「이름 없는 한 풀잎의 노래」와 시「헌시」, 시「종군4행시초」등이 실려 있다.

 

□ 주요 문학활동

 

천부적으로 문학적 감성을 가진 박팔양은 주로 시를 발표했으나 이따금 평론이나 수필, 그리고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나타낸 단상斷想에도 관심을 기울려 문예지에 글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시인 이상화李相和’에 대한 평론을『조선문학』(1955)에 발표했다. 이 평론의 도입부분에 이상화(1901~1957)를 항일 민족시인이라고 호평好評해 놓고서, 그 다음에 이상화가 등단한 순문학동인지『백조白潮』(1922 창간)를 대표적인 부르조아 문학잡지라고 혹평酷評했다. 전혀 틀린 지적은 아니다. 이상화는 <백조> 동인에 참가하여 백조파의 낭만적 기질과 감상적 풍조를 조화시킨 낭만적 경향의 작품을 주로 발표했다. 그 후 이 같은 탐미적, 퇴폐적 세계에서 벗어나 민족 현실을 직시하는 격정적 시 세계로 나아갔다. 사실 이 잡지와 관련된 시인들은 낭만주의 시 경향을 띠우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박팔양은 이상화의 등단작품인, 시「나의 침실로」, 시「이별」, 시「허무교도의 찬송가」등 초기 작품들을 물고 늘어졌다. 퇴폐적 경향이 짙으며 허무주의와 지극히 짧은 향락을 추구하는 부르조아 시인이라고 폄훼했다. 그러면서도 박팔양은 이상화의 시적 자아가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에 의해, 의식의 변화를 가지게 되었으므로, 그 동안의 낡은 시풍에서 벗어나 시의 주제를 대중의 실생활 속에서 구하였다고 다시 호평했다. 박팔양의 사회주의 사상으로 평가하는 3?1운동은, 러시아 10월 혁명에 고무된 한반도는 1919년 최초로 ‘항일민중폭동’이 확산되자, 일본 제국주의와 봉건지주들에 대한 저항의식이 불타올랐고, 이상화도 일제 침략자들과 부르조아 지배 계급 및 일체의 봉건지주들에 대한 증오를 시로 승화시켰다고 했다. 러시아 ‘10월 혁명’과 우리의 ‘3?1독립운동’은 근본정신이 전혀 다른 성격의 민중운동인데, 하물며 박팔양의 불순한 사상은 두 사건을 같은 연결선상에 올려놓으려고 했다. 여하튼 박팔양은 이상화의 시적 변모에 초점을 두었다.

이상화의 초기 시「이별」(1922)과 시「거러지」(1925)를 비교 분석하였으며, 그밖에 1925~1926년대에 쓴 시「시인에게」, 시「폭풍우를 기다리는 마음」, 시「선구자의 노래」, 시「빈촌의 밤」, 시「통곡」등을 들어, 이상화가 확실하게 부패한 부르조아 데카당 문학이나 낡아빠진 퇴폐적 자연주의 문학에서 일탈했다고 호평했다. 그러나 박팔양은 이상화의 대표시「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가.」(1926)의 해설에서, 일제에게 빼앗긴 조국에 대한 항일투쟁의 이미지를 애써 약화시키는 대신 남북한의 현실에 맞도록 토지를 뺏고 빼앗긴 봉건지주와 힘없는 농민, 근로 대중과의 상층작용에 이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항일 민족시인 이상화는 자본주의 부르조아 시인에서 벗어난, 프롤레타리아 신경향파 문학에 불을 지핀 선각자로 묘사하고 있으며, 이 불길이 카프문학으로 이어져 마침내 이기영, 한설야 등으로 연결됨으로써 부르조아 문학을 압도하게 되었다고 했다. (시속에 숨어있는, 124)

 

1946년 5월 28일, 이른바 김일성의 교시敎示(문화와 예술은 인민을 위한 것으로 되어야 한다)가 있자, 박팔양은 기다렸다는 듯이,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김일성 원수의 교시로 밝혀진 인민을 위한 문화 예술의 길>이란 단상에서…‘그 동안 문학 예술 분야가 큰 발전을 했지만, 대중화되는 데 아직도 미흡한 부분이 많다’…고 했으며, 모든 문학 예술인들에게…‘대중 속에 들어가서, 대중을 찾아가서 대중이 알아들을 말을 하며, 대중이 원하는 글을 쓰며, 대중의 요구를 표현하고 해결하며, 대중과 같은 의복을 입으며, 대중에서 배우며, 또한 대중을 배워주어야 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1961년 11월27일, 김일성의 교시(작가 예술인들이 근로자 대중 속에 들어가서 이들의 요구에 대답할 작품들을 창작해야 할 것)가 있자, 박팔양은 그 교시를 받들고 따라줄 것을 문화 예술인들에게 강조했다. 이처럼 박팔양은 철저하게 북한 체제를 옹호하고 북한의 문학 예술계에서 전위적 역할을 자임하면서 모든 작가들에게 현대 문학의 창작은 물론,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카프문학‘과 ’혁명문학‘에 대한 연구 활동도 병행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팔양은『조선문학』(1966)에 ,시를 꾸며내지 말자>라는 제목으로 단상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서정시가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기 우해서는 사물을 감성적으로 깊이 느끼고 시를 쓸 것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생각하면서 시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재미있게 구성하거나 교묘하게 꾸며내거나 아기자기하게 만들어 낼 것이 아니라, 대중 생활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가 그 현실을 몸으로 느끼고 받아들이고 깨달은 바를 표현하는 작가적 노력만이 진실한 감동을 전달할 수 있는 시다…고 했다. 이 단상에서 박팔양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곧 서정시가 단조로운 목가적인 것이어선 안 되며. 혁명적이고 전투적인 것이기 때문에 깊은 철학과 사색이 요구된다는 뜻으로 전달된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공산주의 문학 외에는 창작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박팔양은 자작한 수필「김소월을 생각하며」를 통해 김소월의 시「진달래 꽃」을 침이 마르도록 칭송했다. 시인 김소월(金素月, 1902~1934)의 본명은 정식廷湜이다. 오산학교 재학시절에 시인 김억金億의 지도로 시를 쓰게 되었다. 1920년《창조》지에 시「낭인浪人의 봄」, 시「그리워」등을 발표하여 등단했다. 너무나 유명한 김소월은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정서와 율격[리듬]을 조화시켜 아름다운 작품을 써서 수많은 독자를 사로잡은 시인이다. 이러한 시인을 박팔양은,…1920년대 우리 농촌의 참담한 현실, 농촌 여성들의 봉건주의와 자본주의의 이중 억압 속에 참혹하게 유린당한 사실을 반영한 작품으로 평가하면서, 김소월을 우리 시문학의 길을 연 선구적 시인이자, 애국적 서정시인.…이라고 추켜세웠다. 1920년대에 우리 언어가 사대주의에 사로잡혀 국한문을 혼용했으나 한문을 기본으로 쓰던 시대에 순우리말인 한글만으로 시를 쓴 김소월이지만, 1930년대 전후로 시를 쓰지 못한 것은 이 시기 노동 계급과 부르조아 계급 사이에 심리적 변화와 갈등이 컸던 것으로 안다며 꼬집기도 했다. 그러나 김소월을 일컬어, 애국적인 향토시인, 현대 시문학의 개척자, 한글만으로 아름다운 시어를 구사한 우리 시대 최고 시인이라고 극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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