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는 글은 📸 스마트폰(smartphone) 화면으로 볼 수 있게 조정하였습니다.
로마서11강* 복음을 자랑
로마서 1장 24–32절 / 이찬수 목사
이제 오늘부터 다시 로마서를 살펴보려고 하는데 로마서는 그 본론이 하나님의 진노에 관한 말씀으로 시작을 하고 있다. 제가 그런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로마서 1장18절에 보니까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보니까 하나님께서 왜 진노하시는 두 가지로 설명을 하는데요. 먼저 왜 하나님이 진노하십니다.
모든 경건하지 않음 다시 말해 이 인간의 불 경건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하신 그리고 또 하나 인간의 불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이렇게 설명하는데 이 불경이 뭐냐 불 경건은 마음의 상태예요, 어떤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데 또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제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의 태도 이게 [불 경건]이라면 불리는 바로 이런 마음의 태도에서 나오는 악한 행동들 악한 열매들이 불 경건이라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마음
이렇게 하나님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마음의 태도인 불경건과 또 그런 마음의 태도가 갖는 악한 행동인 불 경건을 분노하고 계시는데요. 이제 오늘부터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이렇게 복음을 받기 이전에 우리 상태가 불경건과 불의라는 죄로 인하여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 또 하나님은 그것에 대하여 얼마나 진노하시는 이제 좀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하나님의 진노의 양상을 이 세 번에 걸친 내버려 두사, 내버려 두사, 내버려 두사, 이것으로 지금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24-25절입니다.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그들 마음의 정욕을 통해 부정함에 내주사 그들이 자기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25.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창조자]보다 창조물을 더 경배하고 섬겼느니라. 그분은 영원히 찬송 받으실 분이시다. 아멘.”
여기 나오는 정욕은 원어로 보면 에피토미(Επιτομή)는 단어인데요. 이 단어는 그 양면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이 에피토미라는 단어가 긍정적으로 쓰면 열정, 소원, 이런 것이 되고요. 이 단어가 부정 지면은 성적인 타락 차원에서의 정욕이 단어가 좋은 쪽으로 쓰면 열정과 에너지로 사용이 되지만 이게 악하게 쓰면 여러분 그 성충동에 빠져 가지고 죄 짓는 사람들을 보면은 그것도 열정이고 그것도 에너지 아닙니까? 이렇게 이 단어가 이런 이중적으로 쓰이는 단어인데요.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이 에피토미(Επιτομή) 단어가 이 성적인 정욕만 아니고 이 금지된 것을 하는 마음에도 이런 부정적인으로 지금 쓰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로 나오는 [내버려 두사] 이것은 로마서 1장26절에 나오는데요. “26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수치스러운 애정에 내주셨으니 이는 심지어 그들의 여자들도 본래대로 쓸 것을 본성에 어긋나는 것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라.” 여기 나오는 부끄러운 욕심을 영어 성경으로 찾아보니 이렇게 돼 있더라고요. 애정이 동반되지 않은 강한 성욕 원래 하나님이 주신이 성이라는 것은 부부간에 사랑과 애정을 동반한 그런 시스템으로 주셨는데 인간의 타락은 그 사랑과 우정과 애정 이런 건 다 빼버리고 그저 육신적으로 일어나는 이 충동 이거에 매여 사는 인생으로 변질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내버려 두사] 라는 표현이 또 한 군데 더 나오는데 ➤로마서 1장28절입니다. “28. 또한 그들이 자기 지식 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버림받은 생각에 내주사 합당하지 못한 그 일들을 행하게 하셨으니”
여기 나오는 이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를 원문 그대로 직역을 하면 이 분별력을 잃게 하셔서 부적절한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여기 나오는 이 상실한 마음은 이게 뭐냐? 요즘으로 치면 인간성 파괴 그래서 이 상실한 마음은 인간성이 파괴 되어서 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이 병들어 버린 상태, 그래서 그 생각과 느낌이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 이게 상실한 마음이에요. 제가 참 마음이 아픈 게요. 오늘 우리나라에서 자라나는 이 어린아이들 중고등 학생들을 보면은 그 눈빛에서 이 상실한 마음이 느껴져요.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이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이렇게 세 번에 걸쳐서 [내버려 두사] [내버려 두사] [내버려 두사] 이렇게 묘사를 하는데요. 그런데 이 1장의 구조가 참 재미있는 게 이 1장에서는 세 번의 걸쳐 내버려 두사가 나오는데 또 다른 세 번의 걸쳐 나오는 표현이 있는데 그게 뭐냐 [바꾸었느니라] 이 표현이에요.
➤23절입니다. “23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을 썩을 사람이나 새나 네 발 달린 짐승이나 기어 다니는 것들과 같은 형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누가 죄성을 가진 인간이 바꾸어버린 거예요. 그다음 두 번째로 나오는 25절에서 표현을 보십시오. ➤“25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창조자]보다 창조물을 더 경배하고 섬겼느니라. 그분은 영원히 찬송 받으실 분이시다. 아멘.” 누가 이렇게 바꿔 버렸습니까? 한 인간들이 바꾸었다는 거예요, 또, 한번 더 같은 표현이 나오는데 26절 “26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수치스러운 애정에 내주셨으니 이는 심지어 그들의 여자들도 본래대로 쓸 것을 본성에 어긋나는 것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라.”
누가 이렇게 바꾸니까?
그 로마서 1장의 구조가 참 흥미로운 게요. 이 세 번의 인간의 타락의 양상인 [바꾸었느니라] [바꾸었느니라] [바꾸었느니라] 그다음에 세 번에 그 동전의 양면 하나님 면으로 [내버려 두사] [내버려 두사] [내버려 두사] 저는 1장에서 이 교차되는 [바꾸었느니라.] [내버려 두사] 이 표현을 묵상하다가 얼핏 마가복음 1장23-24절에 나오는 이 마귀의 항변이 생각났습니다. 마귀가 주님께 이렇게 항변합니다. ➤“23. 그들의 회당에 부정한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24. 이르되, 나사렛 예수님이여, 우리를 홀로 두소서.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오셨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신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시나이다. 하매”
여러분 오늘이 땅에 돌아가는 수많은 일들을 보면.
마음에 하나님 두기 싫어하는 인간들의 불 경건에 출처, 이게 마가복음 1장23-24절에 이 마귀로부터 출처가 시작되는 거 아닙니까? 나와 상관하지 마시라고 내버려두라고 당신하고 내가 무슨 상관입니까? 저는 주님을 향한 이 마귀의 항변,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 말씀을 그 읽는데요. 우리 집에 아이가 생각이 났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집에 사춘기 아이들을 떠 올려 보면은 상황을 좀 아실 거예요.
사춘기 아이들을 키워 보면 이 아이들이 부모에게 그 항변하는 가장 중요한 골자가 뭡니까? 내버려 주라는 거 아닙니까? 상관하지 말라는 거 아닙니까? 내 인생은 내 것이니까?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은 나의 것, 내버려 주라고 그냥 나에게 맡겨 주라고 나는 모든 것 책임 수 있어요. 이게 아이들의 노래예요. 여러분이 아이들이 참 철이 없는 게요. 얘들이 뭘 모르니 만약에 그 부모가 지들이 요구하는 것처럼 진짜로 내버려 버리면 그래 안 되겠다. 내 오늘 이후로 다시는 너에게 상관하지 않겠다. 넌 네 갈 길로 가라. 다시는 내가 너에게 어떤 상관도 하지 않겠다. 이건요? 그 아이가 자기 부모에게 들을 수 있는 가장 저주스러운 말이에요.
큰일 날 이야기 아닙니까? 그런데 그 아이들 입장에서 참 다행이지 뭐예요. 어떤 부모도 아무리 화가 나도요. 자기 자식에게 앞으로는 내가 너를 내버려 두겠다. 상관하지 않겠다. 이러는 부모는 없습니다. 아 물론이 저 같은 다혈질의 부모는 열 받으면 한 번씩 해요. 네 마음대로 해라 그러나 그건 열 받아서 그런 거지 본심이 아닙니다. 어느 부모가 내버려둡니까? 이게 그 아이들에게 가장 복이라는 걸 모르니 그런 소리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만약에 이런 경우라면? 우리나라의 어느 고등학생이 부모 몰래 터키 국경을 넘어서 그 무장 단체 IS가 버렸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런 경우라면 아무리 부모가 상관하고 내버려두지 않으려고 해도 그 부모의 영력을 떠나 버린 그 아이에 대해서는 손을 쓸 수 없는 거 아닙니까?
반복되는 [바꾸었느니] [내버려 두사] 사이 말씀
왜 오늘이 본문에서 3번이나 반복되는 [바꾸었느니] [내버려 두사] 사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그 철없이 무장 단체로 가버린 그 어린 고등학생 생각이 낫고 이 비슷한 상황 아닙니까? 여러분 자식이요, 아무리 못된 짓을 하고 부모 가슴에 대못을 박아도 그 아이가 부모의 영역 안에 있는 한 내버려 두신적은 없습니다. 중요한 거는 지금 오늘이 세상은 그 철없는 아이가 부모의 영역을 떠나 가지고 그 무서움이라는 그 무장 단체로 들어가 버린 그 아이와 같은 상황이에요. 오늘이 시대가 이렇게 보호자 되시는 하나님을 벗어나서 그 항변하는 그 마귀의 메시지요. 당신이 나랑 무슨 상관입니까? 그 영역으로 들어갔더니 지금 오늘이 세상이 지금 흘러가고 있는 흐름을 한번 보십시오. 저는 그 고등학생 아이가 지금도 문득문득 생각이나요. 걔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나?
오늘이 시대가 바로 하나님의 영력을 벗어나 하나님의 간을 떠나 불과 불의 시대를 살고 있는데 분. 이 시대까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우리 모두가 지금 발을 딛고 살아가니까 그 다 알고 있는 거 아닙니까? 이 시대가 어떻게 가고 있습니까? 아 당장 여러분 지난주에 그 예비군 사격 훈련장에 있었던 총기난사 사건, 그 총기 난사 사건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뭡니까? 점점 지금이 혼미한 시대 속에 혼란에 빠져 가지고 정신을 놓고 사는 사람들이 점점점점 걱정하고 있는 시대 아닙니까? 뭐 이런 극단적인 케이스는 아니더라도 수많은 현 현대인들이 지금 불면증에 빠지고 우울증이 오고 그 마음의 공허함을 이기지 못해 가지고 참 어두운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이런 현실 아닙니까?
오늘 이 시대를 어떻게 특징짓느냐?
오늘 말씀 24절 다시 보십시오.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그들 마음의 정욕을 통해 부정함에 내주사 그들이 자기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여기 나오는 욕되게 하다. 이 표현을 총신대 이한수 교수가 이렇게 풀이하는 책을 봤습니다. 여기 나오는 욕되게 하다는 무슨 뜻이냐?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마음이 없이 탐욕의 대상으로만 다루는 행위 이게 욕되게 하다. 이게 지금 오늘이 시대의 양상 아닙니까? 그 사람의 인격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격으로 존중해주고 귀하게 여겨서 다가가는 게 아니고 사기 처먹을 어떻게 해서도 이용해 먹으려고 성적인 대상으로 삼아 가지고 가정이 있는 여자나 가정이 있는 남자나 상관없이 어떻게 해서든 꼬드겨 가지고 자기의 성적인 쾌락을 채우려고 하는 이 서로 욕되게 하다 오늘 이 시대가 이게 지금 드러나고 있는 시대 아닙니까? 제가 가슴이 아픈 것은? 이런 세상의 풍조가 지금 교회당 안에도 흘러들어와 가지고 여러분 교회당에서 만난 성도라고 절대로 믿으시면 안 되는 세상이에요.
무슨 의도로 이 사람이 내게 다가오는지를 알 수가 없는 세상이에요. 이게 욕되게 하다 2천 년 전에 하나님이 예언해 주신 말씀이 오늘이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이 주일학교 교사들을 보면? 나 진짜 불안 불안해요. 애들 가르치는 까진 좋은데 그 젊은 여선생님 남자 선생님 그 애들 다 가르치면 빨리 집에 가서 씻고 그냥 내일을 준비해야 되는데 뭐 하러 우리 교사들끼리 단합대회 하자고 그 교사가 단합해서 뭐 하려고요? 아 단합은 해야 되는데 그 남자 여자가 모여 가지고 뭐 커피 마시면서 이렇게 하면 그 사이에 사단이 그만 욕되게 하다에 이 유혹으로 찾아올 위험이 너무 많은 거예요. 아 나 찬양대를 봐도 나 진짜 위태해요.
저 아름다운 남녀는 별로 없지만 그래도 매주일 만나 가지고 저 아름다운 처녀를 이러면 마음이 막 이렇게 막 흥분이 되고 뜨거워지면 사단이 거기에이 서로를 욕되게 하도록 다가오면 이게 농담이 아니고요. 지금 전국에 많은 찬양대 안에서 이런 무서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에게 전국의 우리 청년부 주로 자매들이 메일을 많이 보내와요. 교회당 안에서 믿었던 어떤 형제에게 심지어는 믿었던 어떤 교육자에게 인격으로 다가오는 줄 알고 마음을 다 주고 몸을 다 주고 했는데 나를 이용해 먹었다고 그래서 나는 수렁에 빠졌다고 이런 절망적인 메일을 제가 생각보다 많이 봤습니다. 이게 너무 가슴 아픈 현실 아닙니까?
그 저는 우리 교회 다락방 우리 교회 다락방 중에 이제 남자 분은 남자끼리 여자 분은 여자끼리 이렇게 하는데요. 이제 최근에 와서 부부 다락방을 이제 만들어서 참 잘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게 지금 내 기도 제목이에요. 하나님께서 이 아름다운 부부로 다락방을 묶어 주실 때는 이게 남성 여성 이런 게 아니고 서로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아름다운 인격으로 가정을 세워 나가라고 부부 다락방을 만들어 줬는데 사단이 오늘 본문 24절에 나오는 욕되게 하사로 유혹을 하면요. 너무너무 죄스러운 일들이 일어날 위험이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에게 친절로 다가오면 경계부터 하세요.
그래서 여러분 부탁드리는데 교회당에서 막 이렇게 지나치게 친절한 어떤 이성이 남자가 여러분에게 친절로 다가오면 경계부터 하세요. 이 남자가 무슨 의도지 이게 아 이렇게 뭐 성가대 연습하러 가는데 막 간식을 막 이렇게 무거운 걸 들고 가는데 어떤 남자 대원이 우리 자매님한테 막 뛰어와 가지고 “어휴 여자가 이렇게 무거운 것을 들었냐고 내가 들어 주겠다.” 그러면 [싫어요.] 그리 거절을 하셔야 돼요. 아이 웃을 일이 아니에요. 나랑 무슨 상관이에요. 아 요새 여성이 힘이 없다는 건 그건 좀 그런 거 아닙니까? 지나치게 친절하게 다가가는 것도 이게 위험하고 이런 걸 설교해야 되는 현실이 너무 가슴이 아파요.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이제 목사라고 해서 그 타이틀만 갖고 믿을 수 있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아시잖아요? 저 믿지 마세요. 저 믿어서 안 돼요. 제가 여러분에게 지나친 친절을 베풀면 이게 요새 성경을 알라. 이렇게 의심하면 보셔야 돼요. 제가 그래도 여러분 기름 부은 종 아닙니까? 안수 받은 종이지만 저는 저를 안 믿습니다. 제가 여성하고 일대일로 식사하고 뭐 같은 차타고 뭐 특별한 경우 아니면 그렇게 안 하잖아요. 저 안 믿습니다. 인간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에요. 긍휼의 대상이에요. 그 우리가 더 조심, 조심 왜 이런 슬픈 설교를 해야 되느냐 왜 그렇습니까?
오늘 여러분 로마서 1장28절에 나오는 이 상실한 마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감정 이걸 잃어버린 거 아닙니까? 어른들의 괘락 변질로 우리 어린아이들이 정신세계가 지금 무너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한 열 전엔가 지금요 우리나라 인터넷을 발칵 뒤집어 놓은 10살짜리 꼬맹이의 그 잔혹시(殘酷詩) 아마 많은 분이 벌써 보셨을 거예요. 10살 먹은 애가 시를 썼는데요. 이게 인터넷에 이제 공개가 됐는데 다 뒤집어졌어요. 그 시(詩) 제목이 [학원가기 싫은 날] 너무 내용이 끔찍해서 이걸 내가 강단에서 읽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내 망설였습니다. 내용을 한번 들어 보세요. 열 살짜리가 썼다는 걸 염두에 두시서 들어 보세요.
학원에 가고 싶지 않을 땐/ 이렇게 엄마를 씹어 먹어/ 삶아 먹고/ 구워 먹어/ 눈가를 파먹어/ 이빨을 다 뽑아 버려/ 머리채를 쥐어뜯어/ 살코기로 만들어 떠먹어/ 눈물을 흘리며 핥아 먹어/ 심장은 맨 마지막에 먹어 가장 고통스럽게
이게 10살 먹은 애가 썼다고 진짜 믿겨지지 않아요. 그리고 또 뭐 얘가 뭐 철이 없어서 썼다 치고요. 그걸 책으로 묶어 가지고 시(詩)라고 내놓는 이게 지금 뭐 도대체 어떻게 이거를 설명을 해야 될지 전 정말 모르겠습니다. 제가 충격을 받은 건요. 어떤 사람이 이걸 동시로 내놓은 그 책을 사진을 찍어 가지고 올려요. 그것을 보는데 너무너무 끔찍했습니다. 그 이이 방금 읽어드린 이 내용을 써놓은 그 시에 무슨 삽화가 있느냐 하니까요. 옆에 여자 하나는 그 쓰러져 누워 있어요. 그 엄마로 이제 추측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는 어떤 여자가 그 심장을 꺼내 가지고 먹고 있는 그래서 막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는 그 삽화를 그 동시집에다가 지금 내놓은 거예요. 여러분 생각해 이게 10살짜리 애가 동시집에 나올 그림입니다. 이제 우리 현실이에요. 저는 뭐 다른 거 다 내버려 두고요. 이 시 제목이 [학원가기 싫은 날] 이게 저 너무 슬퍼요. 어린 애가 얼마나 학원가는 게 그렇게 끔찍하게 싫었으면 여러분 이런 시(詩)을 썼겠지요. 여러분 지금 로마서 1장 28절에 이 상실한 마음 인간의 감정이 지금 병들어 있는 증거 아닙니까? 그 저는 이 그 철없는 고등학생이 부모 품을 떠나 가지고 그 끔찍한 무장단체 IS로 가버린 이런 영적인 현실이 낳은 이 결과물, 그래서 오늘 우리 시대는 ➤로마서 2장5절 “5. 다만 네가 네 강퍅함과 뉘우치지 아니하는 마음에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닥칠 진노를 네게 쌓아 올리도다.”
이 시대가 이거 아닙니까? 하나님의 진노가 쌓여가는 시대, 자 그러면 이런 문제 제기 앞에 그럼 뭐 어떻게 해야 됩니까? 대안이 뭐예요. 우리 모두가 이 땅에 지금 발을 딛고 살아가는데 저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 오늘이 시대 대안은 바로 로마서 1장 16절이 확신합니다. 우리 같이 힘 있게 선포합니다. ➤“16.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그 복음이 믿는 모든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권능이기 때문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그리스]인에게로다.”
이 표현은 뭘 강조하기 강조할 때는 바울의 강조법이에요. 그러니까 부정의 부정을 통하여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는 그 말을 통해 나는 복음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이걸 강조하는 표현이에요. 바울이 왜 복음을 그렇게 여긴다고 16절에서 말합니까?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래요. 어떤 능력입니다. 17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로움이 믿음에서 믿음까지 계시되어 있나니 이것은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무서운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는 우리
이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의 의로움이 복음에 나타나 있는데 그 하나님의 의로움이 어디서 작동을 합니까? 3번에 걸쳐 바꾸었느니 3번에 걸쳐 [내버려 두사]에 이 무서운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는 우리에게 복음은 이 무서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 버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복음이 자랑스럽다 바울이 이론으로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다마스쿠스 길에서 그 포악했으며 이런 관점에서 저는 오늘 본문을 묵상하다가 이 창세기 1장 말씀이 떠올랐는데요. 여러분 제가 오늘 참 중요한 한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집중하셔야 되는데요. 하나님의 창조 기사를 다루고 있는 창세기가 지금 말씀을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전개하는 그 구조를 한번 보시면서 창세기 1장 1절부터 3절을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잘 보시기 바랍니다. 1절에서 선포가 있습니다. ➤“1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이렇게 선포가 있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기 이전의 상태를 세 가지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2절에 “2.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서 움직이시니라. 3.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자 여러분 여기에 지금 그 창조 이전의 우주의 상태를 혼돈과 공허와 흑암 지금 여기다가 규정을 하고 있는데 여러분이 창세기 1장을 제대로 읽으시려면 예레미야 4장 말씀과 함께 읽으면 좋습니다. 그러면 이 창조 기사에 대한 우리 생각이 확장이 될 거라고 저는 믿는데요. ➤예레미야 4장22절 보십시오. “22. 내 백성이 어리석어 나를 알지 못하였나니 그들은 미련한 자녀들이요, 지각이 없는 자들이로다. 그들이 악을 행하는 데는 지혜로우나 선을 행하는 데는 지식이 없도다.”
여러분 이게 지금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변질된 인간의 상태를 묘사한 거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변질된 인간의 상태를 묘사하는 예레미야 4장22절 바로 그다음 23절을 보세요. ➤“23 내가 땅을 보니, 보라, 땅이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으며 하늘들을 보니 그것들에는 빛이 없었고” 우리 성경으로 딱 봐도 이게 창세기 1장의 그 구조랑 지금 비슷한 거 아닙니까? 원어로 보면요 비슷한 게 아니고 그 단어예요. 방금 읽은 창세기 1장2절에 나와 있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할 때 이 혼돈이라는 단어가 원어로 보면 토후{טוהו} 단어인데요. 지금 예레미야 4장 23절에 인간의 상태를 설명하는 이 혼돈도 토후{טוהו} 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나오는 허라{הרה} 단어는 창세기 1장 2절에서 보라는 단어인데요. 지금 예레미야 4장23절에 공허하는 단어도 같은 단어인 보입니다. 느낌이 확 오는게 있잖아요. 지금이 예레미야서 기록자가 인간의 타락의 양상을 기록하고 있으면서 창세기 1장에 있는 그 기사를 지금 인용하고 있다는 거예요. 제가 이거를 깨닫고 나서 발견한 느껴지는 한 가지 진리가 뭔지 아십니까? 여러분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우주가 혼동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에 있을 때 이것을 창조의 능력으로 변화시켜주신 하나님에 관한 기사인데요. 이 하나님의 기사가 내 개인의 삶에도 적용이 된다는 거예요 자 여러분 창세기가 언제 또, 누가 썼을까요? 이 창세기는 모세가 썼습니다. 언제 썼느냐?
이집트 탈출 하고 가나안 도달하기 전에 광야에서 배회하고 있을 때 쓴 책이에요. 여기 지금 인생의 밤을 지내고 인생의 광야를 지내고 고난 중에 있는 성도님들이 참 많이 계시는데요. 여러분 한번 스스로 생각해 보세요. 이 광야의 특징이 뭐예요. 광야길 특징이 우선 딱 떠오르는 광야 길의 이미지는 고난이 고난, 그리고 또 광야길 또 다른 특징이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오늘이고 내일은 저거 내 인생이 어떻게 펼쳐질지 이 불확실성 이게 광야예배, 상황을 한마디로 설명하라면 혼돈과 공허와 허 여길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창세기를 그들에게 주셨는데 그 혼란에 빠져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창세기를 읽는데 2절을 보십시오. “2.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서 움직이시니라. 3.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여러분 그 혼란한 광야길 이스라엘 백성들이이 창세기를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이 나그네 인생 광야길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에 내가 빠져 있다 할지라도 내 인생 속에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그 상태 그 은혜로 내게 다가오신다, 나도 빛이 있는 인생이 될 수 있겠구나! 아멘! 이게 창세기에 저는 오늘 우리 시대를 신 광야 시대로 명령하기를 원합니다. 명하기를 원합니다. 너무나 많은 이 시대 현대인들이 그래도 어떻게 살아보겠다고 하나님 없이 어떻게 바동바동 거리며 살아보겠다. 혼미한 상태에 빠져 있는 시대예요. 정말 오늘 우리 시대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 my 시대예요.
이런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삶에 예수 그리스도가 창세기 1장3절에 나오는 빛으로 오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1장9절입니다. ➤“9 그 빛은 참 빛으로 세상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을 비추느니라.” 주님 없이 살아가던 내 인생은 분명히 어둠이었다. 살아가는 내 인생은 분명히 공허 있는데 주님 없이 살아가는 내 인생은 분명히 혼돈이었다. 저는 어제 이 말씀을 정리를 하는데 찬양 하나가 참 제 마음을 뜨겁게 했어요.
♬주님 밝은 빛 되사 어둠 해치니 나의 모든 것 다 변했네/ 지금 내가 주 앞에 온전케 됨은 주의 공로를 의지함 일세/ 나의 모든 것 변하고 그 피로 구속 받았네/ 하나님은 나의 구원 되시오니 내게 정죄함 없겠네./
어린 20대 초반 시카고에서 살아보겠다고 바동바동 치다가 내 인생이 혼미에 빠진 거 아닙니까? 자신감도 없고 이 어려운 인생길을 헤쳐 갈 능력도 없고 그런 캄캄한 인생의 어에 빠져 있을 때 빛으로 제게 찾아오셔서 제가 오늘 30년이 지난이 시간 그래도 사랑이라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신 거 이게 복음의 능력이에요. 그래서 바울이 “나는 복음을 자랑한다.” 다마스쿠스 길에서 그 복음이 나를 살렸다, 어제 이 바울의 감격이 내 마음에서 요동치는 느낌을 제가 어제 경험한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제가 이 창세기 1장 말씀과 예레미야 4장 말씀을 묵상하면서 너무너무 은혜를 받은 게 뭐냐? 여러분 우리는 이 창세기 기사에서 뭘 깨달아야 되느냐? 어떤 학자들은 이 천지창조와 관련해 가지고 이 혼돈과 공허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사용하시던 재료였다. 이 혼돈과 공허를 재료로 해서 놀라운 이 우주를 창조하셨다. 이렇게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수용 어렵습니다. 왜 기독교 역사는 하나님의 창조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했다고 믿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제가 어제 마음이 뜨거웠던 게 뭐냐? 이것을 우리 삶에 적용을 해보니까 제가 24살 시카고에서 흘렸던 눈물 흘렸던 낙심, 좌절, 혼돈, 흑암, 이걸 재료로 해서 하나님을 나는 통로로 사용하셨다는 거예요. 저는 한 번씩 미국 시카고에 방문을 하게 되면요. 뭐 화려한 건물 시어스타워 세계에서 제일 높은 빌딩, 이런데 안 찾아갑니다. 꼭 찾아가는 데가 있습니다. 23살 때, 혼동과 공허 속에 빠져 살던 그 집 265 person 리원 베드룸 당시 100년 된 목조건물 지금 한 130년 됐습니다.
그 낡은 집을 제가 찾아가요.
차를 빌려 가지고 그 동네에 주차를 해 놓고 그 거리를 한 바퀴 둘러 봐요. 이 꼭 제가 그렇게 하는 이유가 뭐예요. 20대 초반에이 집은 이 거리는 내가 혼돈이었다. 하나님은 그 혼동과 혼란과 흑암을 재료로 사용하셔서 빛 되신 주님을 만나는 도구로써 주셨으니 그것이 저에게 이제 면류관이 된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그 고생하던 거 잊어버리라. 그래요. 그 20대 그거 다 잊어버려라 지금 잘 살고 있잖아!
하나님 믿는 우리는 고생했던 그 시절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왜 그 고난 고생 그 재료를 하나님은 빛 되신 주님 만나는 통로로 쓰셨기 때문에 그 어둡고 눈물 나고 고난의 그 자리가 저에게는 면류관이 되는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무슨 일로 이렇게 힘들어하세요. 여러분 중에 제가 20대 초반에 겪었던 그 말로 다 할 수 없는 혼돈과 혼란과 그 낙심 속에 살아가시는 분이 계시다면 여러분 잊지 마셔요. 오늘의 이 아픔이 오늘의 이 혼란이 재료가 되어 빛 되신 주님 만나는 도구로 쓰여질 줄로 믿습니다. 아멘!
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17절에서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
그가 고린도후서4장6-11절에 선포하는 걸 들어보십시오. ➤“6. 빛에게 명령하사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사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주셨느니라. 7. 그러나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 안에 가지고 있나니 이것은 뛰어난 권능이 [하나님]에게서 나며 우리에게서 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에서 고난을 당하나 괴로워하지 아니하며 난처한 일을 당하나 절망하지 아니하고 9. 핍박을 받으나 버림받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나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주] 예수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왜 바울은 그 사방에서 고난을 당하나 괴로워하지 아니하며 난처한 일을 당하나 절망하지 아니하고 그 절망적인 상황에 낙심하지 않습니까? 왜 바울은 그 답답한 일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바울이 경험한 게 있거든요. 이 사방에서 고난을 당하나 괴로워하지 아니하며 당하는 이 상황이이 낙심할 수밖에 없는 이 상황이 재료가 돼요. 주님 만나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거든요. 저는 여러분들이 현실의 어려움을 빨리 피해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이 터널을 지나고 계시다면 이 어두운 터널이 빛 되신 주님 만나는 재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버려 두사의 상태 지금 가정을 깨뜨리고 변질된 자리로 가고 상상하기 어려운 죄 된 자리에가 계시는 분이 안에 계시다면 빨리 돌아오세요. 빨리 돌아오셔서 [내어버려 두사] 우리 힘으로는 그 악한 영력의 자리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데 빛 되신 주님 복음의 능력을 믿습니다. 오늘 저는 설교의 마무리를 이 찬양으로 마무리하기를 원하는데요. 그 복음 그 십자가 앞으로 해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허무한 시절 지날 때 깊은 한숨 내실 때 그런 풍경 보시며 탄식하는 분 있네. 그다음 보세요.
어두운 데에 빛이 빛이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8. 우리가 사방에서 고난을 당하나 괴로워하지 아니하며 난처한 일을 당하나 절망하지 아니하고 9. 핍박을 받으나 버림받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나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주] 예수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살아 있는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항상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의 죽을 육체 안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 그런즉 이처럼 사망은 우리 안에서 일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일하느니라.” 이 생명이 우리 속에 역사할 지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영상녹취 / 김은영 목사-
|
출처: ╋예수님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一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