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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 바깥에서 들어온 티끌을 쓸어내라 ~ 420. 조계로 가는 길
411. '바깥에서 들어온 티끌을 쓸어내라'
유상공(劉相公)이 절에 들어와 조주선사가 마당을 쓸고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대선지식(大善知識)께서 무엇 때문에 티끌을 쓸어내십니까?’"
“밖에서 들어왔어(從外來).”
유상공(劉相公)이란 관리가 조주선사를 찾아왔다. 조주가 마당을 쓸고 있으니, '큰 선지식(善知識, 소설가처럼 작가라고도 함)이 되셔 가지고 어찌 몸소 티끌을 쓸어내십니까?' 라고 물었다. 큰스님은 이제 모든 번뇌의 먼지를 다 털어내셨을 텐데 아직도 남아있는 티끌이 있습니까? 하고 선(禪)적으로 도전해 보는 격이다.
'밖에서 들어왔어(從外來).' 직지인심(本分)으로 한 방에 날려 버린다. 결론적으로 유상공 같은 티끌이 계속 밖에서 들어오니, 즉 바깥 경계가 때때로 마음을 흐리게 하므로 계속 마음을 갈고 닦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 말을 들은 유상공의 표정은 어땠을까?
중국의 황사(黃沙) 때문에 우리나라가 매년 피해를 많이 입기도 하지만 북경에만 가도 밖에서는 항상 마스크를 써야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을 정도로 공중에 먼지가 많은 것 같다. 요즘도 북경의 스모그 현상이 심각하다고 한다. 관음원 앞마당에도 이곳저곳 바깥에서 휘날리다가 날아온 종잇조각이나 먼지들이 매일 쌓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조주는 이 먼지가 어디선가 바깥에서 날아오기 때문에 마당을 쓴다고 했을까? 먼지가 쌓인 이치를 따져 보면 그럴듯하긴 하지만 뭔가 조금 이상한 느낌이다.
여기서 조주는 이 마당의 먼지를 빗대어 유상공의 마음속의 먼지들을 털어내라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 마음속의 먼지인 객진번뇌는 원래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바깥 대상, 경계에 마음이 끌려가서 식(識)이 움직이기 때문에 번뇌가 쌓이는 것이다. 그 먼지를 조주도 매일 쓸어내고 있다만 유상공, 그대도 깨끗이 씻어버리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물론 조주로서는 이제 더 쓸어낼 먼지도 없겠지만 그러면서도 항상 점검하고, 조그만 허물이라도 생길까 삼가는 모습이다. 영원한 도인(道人)은 모두 이런 모습이 아니겠는가?
412. '날카로운 칼'
한 스님이 물었다.
“날카로운 칼(利劍)이 칼집에서 나올 때는 어떻습니까?”
"새까맣다(黑)."
"똑바로 물었을 때는 어떻게 알아봅니까?"
"그런 한가한 공부는 없다(無者閒工夫)."
"사람 앞에서 차수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언젠가 그대가 차수(叉手)하는 것을 보았었지."
"차수하지 않을 때는 어떻습니까?"
"누가 차수하지 않는 자이냐?"
'날카로운, 예리한 칼(利劍)이 칼집에서 나올 때'는 어떤 경우를 말하는 것일까?
이제 '척'하면 '착'하고 알아챌 것이다. '살인도(殺人刀), 활인검(活人劍)'이란 말을 들어보았는가? 사람을 죽이는 칼, 다시 사람을 살리는 칼로서 조사, 선사의 말 한 마디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살리기도 한다는 말이다.
법문을 듣고 실제로 목숨이 끊어진다는 말이 아니라, 그만큼 마음에 큰 충격으로 와 닿아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옴짝달싹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 충격이 쇠망치로 내리치듯이 크면 클수록 깨달음에 도달할 확률은 더욱 높아진다. 그래서 크게 한번 죽어서 크게 다시 살아나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날카로운 칼이 칼집에서 나오면, 앞에서 말한 대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그러나 예리한 칼이라고 말만 따라 가다가는 수천 생을 살아도 제 길을 찾지 못한다. 선사들은 말의 뜻을 벗어난 말을 사용한다. 격외구(格外句), 격식을 벗어난 말 마디, 바로 암호(code)이다. 이 말의 의미를 잘 새겨들어야 한다.
"새까많다(黑)." 날카로운 칼이 칼집에서 나올 때는 새까맣다고 대답한다. 도대체 그 의미를 알기가 어려워서 암흑 같다고 하는 말이다. 깨치지 못한 사람에게는 상황에 따라 악몽과 같은 순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충격이 크면 클수록 더욱 찬사를 받을만하니 신기할 뿐이다. 그러고 보면 이 선(禪)은 참으로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운동의 법칙, 관성의 법칙,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위 문답의 나머지 부분은 별로 해설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아 생략한다. 다만 마지막 한 마디, "누가 차수(叉手)하지 않는 자이냐?" 란 조주의 질문이 있는데, 이 사람은 꼭 찾아야 한다. 성인을 대하면 차수(손을 빗겨 잡음)하고 예의를 차려야 하는데, 예의를 차리지 않는 그 사람을, 바로 그 사람이 TV 코미디의 말처럼, '느낌 아니까'.
413. '힘을 얻는 곳은?'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사문이 힘을 얻는 곳(沙門得力處) 입니까?"
"그대가 힘을 얻지 못하는 곳이 어디냐?"
'사문이 힘을 얻는 곳(沙門得力處)'이란 마음공부하는 모든 수행자에게 힘(力)이 부쩍 붙는 장소를 말함인데, 그 곳이 어디냐고 조주에게 묻는다. "그대가 힘을 얻지 못하는 곳이 어디냐?"고 조주는 그 스님에게 되레 묻는다. 이 말은 세상 삼라만상 그 어느 곳에도 도(道)가 살아 숨쉬고 있다는 말이 되겠다. 알면 참으로 쉬운 것인데, 아직 발견하지 못하면 아무리 쳐다봐도 찾아지지가 않으니 참 불가사의하다.
나라면 또한 "그대가 힘을 얻을 곳은 그대 자신 밖에 없다"고 답하겠다. 조주는 이 세상 어느 곳인들 힘을 얻지 못할 곳이 어디에 있겠느냐고 했는데, 나는 그대 자신 밖에 없다고 한다면 위대한 조주선사를 허물이 있다고 볼 수 없으니 내가 잘못 말하는 것인가? 그래도 발바닥 밑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414. '눈 앞에 학인이 없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큰스님께서 학인(學人)에게 보여주시는 법입니까?"
“눈 앞에 학인은 없다(目前無學人)."
"그렇다면 세간에 출현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러자 조주선사는 "몸조심해라" 하고 작별인사를 했다.
"조주선사께서 학인(學人), 공부하는 수행자인 저에게 보여주시는 법은 무엇입니까?" 보여주는(示) 것은 바로 가리키는(指) 것이다. 달마대사 이래 선사들이 사용하는 직지인심(直指人心)을 말하는 것이다. “눈 앞에 학인은 없다(目前無學人)." 마음공부하는 스님을 보고 학인이 없다고 말하니 무슨 뜻인가. 본분(本分)으로 보자면, 이미 공부를 끝낸 부처만 있다는 이야기이다. 바로 여러분은 모두 본래 부처란 뜻이다.
"그렇다면 (큰스님은) 세간에 출현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라고 했다. 조금 기이하다. 아마도 이 스님은 '목전에 학인이 없다'는 격외구의 뜻을 알아차린 것 같다. 공부하는 사람이 없이 모두 끝냈다고 한다면, 본분으로 보면 중생이 이미 성불(成佛)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붓다가 어머니의 태중에서 나오기 이전에 이미 중생을 제도하여 마쳤다고 하는 말처럼 조주 큰스님도 '세상에 나타나지 않은 것이 됩니다' 라고 답한 것이다.
사실 이 한 마디만 가지고 확실히 깨쳤는지 판단하기는 아주 어렵다. 어록이란게 군더더기는 다 빼버리고 공안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골자만 골라서 수록했기 때문에 많은 부분이 생략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선(禪)의 핵심만 공부하면 된다. 조주도 이 스님의 대답에 대해서는 수긍하고 "몸조심해라", 즉 깨친 것을 잘 보존하고 갈고 닦아라고 했을지 모르겠다.
참고로, 법화경 방편품에는 '제불세존은 오직 一大事(일대사)의 인연을 가져 세상에 출현한다. 사리불아! 어떤 것을 제불세존은 오직 일대사의 인연으로서 세상에 출현한다고 말하는가? 제불세존은 중생들에게 부처의 지견(佛知見)을 열게(開)하여 청정함을 얻기를 바라므로 세상에 출현한다. 또한 중생에게 부처의 지견을 보여주기(示)를 바라므로 세상에 출현한다. 중생들이 부처의 지견을 깨닫게(悟) 하기를 바라므로 세상에 출현한다. 중생들이 부처의 지견(知見)의 길에 들어가게(入) 하기를 바라므로 세상에 출현한다. 사리불아! 이것을 제불은 오직 일대사의 인연을 가지므로 세상에 출현한다고 이름한다.' 고 설하여, 개시오입(開示悟入)을 득도(得道)의 4가지 문(門)이라고도 한다.
415. '조사와 경전의 뜻'
한 스님이 물었다.
"조사의 뜻(祖意)과 경전의 뜻(敎意)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조주선사가 주먹을 쥐고 머리 위에 얹으니 그 스님이 말했다.
"큰스님께서도 그런 것이 있으시군요."
선사가 모자를 벗으면서 말했다.
"말해 보아라. 내가 무엇을 가졌느냐?"
"조사의 뜻과 교(敎)의 뜻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달마대사 이래 조사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 선(禪)과 붓다의 모든 말씀을 기록한 경전(敎)속의 가르침이 같은지, 다른지 묻고 있다. 중국이나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도 선종과 교종의 갈등과 반목이 많았고, 그래서 보조지눌이나 서산휴정대사 같은 분은 선교일치를 강력히 주장하기도 했지만 아직도 그 갈등은 지속되고 있는듯 하다. 그것은 깨달음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함으로 인해 비롯된다고 할 것이다.
흔히 물을 마셔 보아야 차고 더움을 알 것인데, 마셔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알겠는가 라고 비유한다. 누가 마셔보고, 누가 마셔보지 않은지는 빤하게 보일 것이다.
서산대사는 선가귀감에서 '선은 부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의 말씀이다'고 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듯이 어찌 말만으로 그 마음속을 알 수가 있겠는가? 옛날 스승인 용담선사가 캄캄한 밤중에 촛불을 훅 꺼버리는 통에 깨달은 덕산선사는 "저는 오늘부터 천하 노스님들의 말씀을 다시는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답하고, 가지고 있던 모든 경전을 불태워버렸다.
그렇다고 경전을 본다고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붓다의 말씀 그 이면의 뜻을 캐낼 수 있다면 종이 속에서 다이아몬드를 얻는 격이다. 그래서 조사, 선사들도 깨달은 후에는 여러 경전을 섭렵하면서 보림(保任)을 하기도 한다. 이 경전도 선(禪)을 통해 마음을 깨친 후에 읽어야 그 뜻을 확실히 알 수 있지, 그 전에는 읽어도 이해할 수 없는 가르침이 너무 많다. 그러니 아무리 경전을 달달 외워도 그 참된 뜻은 전혀 모르는 것이다.
조주는 이 질문에 주먹을 쥐고 머리 위에 얹었다. 마치 이전에 남전선사 앞에서 짚신 한 짝을 머리에 인 것처럼. 그 스님은 의아하여 어안이 벙벙했지만 짐작 가는 것이 있다는 듯이 "큰스님께서도 그런 것이 있으시군요." 라고 말한다. 선사들의 수상한 행동을 이전에 접해 본 적이 있다는 말일 것이다. 또한 조사의 뜻과 경전의 뜻이 큰스님의 그런 행동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하고 넌지시 지적하는 면도 있다.
조주가 모자를 벗으면서 "말해 봐라. 내가 무엇을 가졌느냐?" 고 물었는데 그 수행자의 뒷반응은 알 수가 없다. 만약 그때 나라면 "큰스님과 똑같은 것을 저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을 것이다. 여기서 조주가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자성(自性), 여러분의 마음일 뿐이다. 뭐, 특별한 걸 기대하는가. 흠.
416. '마음은 머물지 않는다'
한 스님이 물었다.
"마음이 멈추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을 때는 어떻습니까?"’
"살아있는 이것이 바로 심식(心識)의 부림을 받는다."
"어떻게 해야 심식(心識)의 부림을 받지 않습니까?"
조주선사는 고개를 숙였다.
'마음이 멈추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는다(心不停不住)'고 했는데, 이 말은 6조 혜능조사가 '단경'에서 설하기를, '도(道)는 모름지기 통하여 흘러야 한다. 어찌 도리어 정체할(멈출) 것인가? 마음이 머물러 있지 않으면 곧 통하여 흐르는 것이요, 머물러 있으면 곧 속박된 것이다'고 하고, 또한 '망상을 제거하여 마음이 일어나지 않음을 일행삼매(一行三昧)라고 한다면 이 법은 무정(無情)과 같은 것이므로 도리어 도를 장애하는 인연이다' 라고 한 뜻과 같다.
또한 마음이 머물지 않음은 금강경의 사구게인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즉, 마당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는 그 머물지 않는, 집착없는 마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위 질문은 마음이 무정물(無情物)처럼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는 무기(無記)에 빠지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면 어떻습니까? 라고 묻는 것과 같다.
"살아있는 이것(是活物)이 바로 심식의 부림을 받는다." 살아있는 이것은 죽은 마음이 아니라 펄펄 살아있는 한 물건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이 물건(마음)이 온갖 잡생각과 의식(識)에 질질 끌려 다니기도 한다. "어떻게 하면 심식의 부림을 받지 않습니까?" 번뇌 망상에 끌려 다니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라는 질문이다.
이렇게 물으니 조주는 고개를 떨궜다. 이것도 직지인심이다. 머리를 숙인 조주를 바로 보라. 이것은 '번뇌망상에 끌려 다니지 않는 것은 고개를 떨구는 이 행동이다' 라며 부처의 작용을 보여주고 있는데, 본심(本心)은 인연이 있으면 그에 맞춰 작용을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그냥 무심(無心)을 지키고 있다.
417. '도는 나지 않는다'
한 스님이 물었다.
"도는 어디서 생겼습니까(道從何生)?"
"이것은 생긴 것이지만 도는 생기고 없어지는 것(生滅)에 속하지 않는다."
"원래 그런 것입니까(莫是天然也無)?"
"이것은 원래 그런 것이지만 도(道)는 그렇지 않다."
‘도(道)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나 같으면 불자가 옆에 있었으면 이런 쓸데없는 질문에 바로 한 대 쳐버리겠는데, 조주는 참으로 노파심이 대단하다. 단 한 수행자라도 깨달음으로 이끌겠다는 굳은 마음으로 일생을 바친 선사라고 할 것이다.
"이것, 도(道)는 생긴 것이지만, 도는 생기고 없어지는 것에 속하지 않는다." 도(道)라는 이름은 있지만 도는 불생불멸이다 이 말이다. 도가 어떤 모습이길래 생기니, 없어지니 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원래 그런 것입니까?" 도는 본질적으로 생기고 없어지는(生滅) 것에 속하지 않는 것이냐는 질문이다. 도(道)뿐만 아니라 모든 법(法)이 불생불멸이다.
"이것은 원래 그런 것이지만 도(道)는 그렇지 않다." 도(道)란 원래 생기고 없어지는 것에 속하지 않지만 도(道)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이게 무슨 소리인지 다가오는가. 지금까지 계속 도는 불생불멸이라고 말하고선 또한 그렇지 않다니.. 이상한 말의 논리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모든 법은 인연에 따라 생겨나지만 자체 성품이 없어 공(空)하고, 생겨나지도 없어지지도 않는 불생불멸이고, 도(道) 또한 불생불멸이다.
그러나 도를 깨치지 못하면 모든 법이 불생불멸인 것을 전혀 알 수 없다. 곧 도를 증득(證得)함이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절대진리로 보면 도(道)는 생기지 않지만 세상 눈으로 보면 도(道)는 존재한다는 뜻이다.
418. '조사의 뜻만 알면 된다'
한 스님이 물었다.
"조사의 뜻(祖意)과 경전의 뜻(敎意)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조사의 뜻을 알면 바로 경전의 뜻을 안다."
조사의 뜻과 교(敎)의 뜻이 같은지, 다른지는 바로 위에서 설명드렸다. 여기서 조주는 "조사의 뜻을 알면 바로 경전의 뜻(敎意)을 안다." 고 대답한다. 그렇다.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깨달은 후에 경전을 보면 8만 장경의 내용이 한 눈에 들어온다. 한 순간에 8만권이나 되는 경전을 다 본다는 뜻이 아니라, 처음 읽는 경전도 신비롭게 그 뜻을 금방 알아챌 수 있다는 말씀이다.
경전만 그러한가? 유교, 도교 등 동서양의 어려운 모든 철학서나 물리과학 책이나 마찬가지이다. 너무 나이가 들어 깨치면 물리적으로 시간이 좀 부족해서 그렇지 이 세상의 모든 학문에 통달할 수 있다. 마음 하나 깨치면 그 마음 언저리만을 훑어온 세상의 학문이란 세발의 피인 것이다. 내가 너무 과장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자녀들이 한번 마음을 깨치게 해보라. 불교 신자가 아니라 해도 세상에서 충분히 난 사람이 될 것이다. 이를 믿지 않으면 선(禪) 수행할 이유도 없다. 부처의 지혜를 갖추고자 하는데 이런 정도에 만족하겠는가? 보다 젊을 때 깨치지 못함을 한스러워할 뿐이다.
419. '이류중행(異類中行)'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다른 부류 가운데 행함(異類中行) 입니까?’
"옴 부림, 옴 부림."
'이류중행(異類中行)'은 조주선사의 스승인 남전보원(南泉普願)선사가 주창한 수행방법으로 이류(異類)란 사람과는 다른 생물, 즉 동물 등의 중생을 뜻한다고 하는데, 사실은 깨달은 이와 아직 미혹한 중생을 구분하는 말이다. 남전대사는 30년 동안 산에서 밭을 갈며 수행하였는데 동물에게는 망상이 없음을 보고 깨친 자는 인간 이외의 중생들 틈에서 생활하며 수행과 교화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보살이 깨친 후에는 육도(六道) 가운데 윤회하면서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행을 이류중행이라 하기도 한다. 세상에서 여러가지 복잡하게 해석하고 있는데, 스스로 깨쳐서 모든 중생을 구원해라 이 한마디일 뿐이다.
이류중행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조주는 "옴 부림, 옴 부림." 이라고 답했는데, 이것은 몸을 보호하는데 사용하는 진언(眞言, mantra)이라고 한다. 귀신, 마귀로부터 해침을 당하지 않기 위해 암송하는 주문(神呪)이란 뜻이다. 그러면서 육도에 윤회하는 미혹한 중생을 어두움에서 구해내는 가르침의 주문이 되기도 할 것이다.
420. '조계로 가는 길'
한 스님이 물었다.
"높고 험하여 오르기 힘들 때는 어떻습니까?"
"나는 스스로 꼭대기에 살고 있다."
"조계로 가는 길(曹溪路)이 가파른 걸 어찌합니까?"
"조계로 가는 길은 험하다."
"지금은 무엇 때문에 도달하지 못합니까?"
"그 길이 높고 험하기 때문이다."
‘도(道)의 산이 높고 험해서 오르기 어려울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렇게 묻는 말이다. "나 조주는 스스로 꼭대기에 살고 있다." 이미 높은 봉우리(高峰)을 정복하여 위에서 내려다본다는 뜻이다.
"그러나 조계로 가는 길(曹溪路)이 너무 가파릅니다." 조계(曹溪)의 길이란 우리나라 조계종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옛날 중국의 6조 혜능조사가 조계산에서 교화를 펼쳤다고 하여 선수행의 도량을 조계(曹溪)라 부른다. 도를 닦아 깨닫는다는 게 너무 어렵다는 뜻이다. 하나도 어려울 게 없는데..
"조계로 가는 길(曹溪路)은 험하다." 조주도 오늘은 아주 평범하게 응대하고 있다. 그래, 선(禪)수행이란 게 편안한 것만은 아니다.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은 무엇 때문에 도달하지 못합니까?" 도달하려면 진정한 무심(無心)에 들어야 할 것이다. 모습 없음(無相)을 자각하고, 작위적으로 힘쓰지도 않고(無作), 원하는 것도 없이(無願), 생각 없음(無念)을 이루어야 한다.
방거사 말대로, 마음을 텅 비울지언정 아무것도 채우려고 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것은 계단을 밟아 올라가려면 너무 높고 험준하다." 이 강설이나 다른 선어록 등을 오직 마음으로 반복해서 읽으면서(이해하려 하지 말라) 푹 젖다시피 선(禪) 속에서 노닐다보면 어느 틈엔가 다가와 있을 것이다. 이것이 가장 낮고 평탄한 길이다. 어렵게 올라가지 말라. 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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