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의 서시 해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해설
―이어령「어둠에서 생겨나는 빛의 공간」『시 다시 읽기』(문학사상사, 1995) p.243
이 시는 자신의 전 생애에 걸쳐서 철저하게 양심 앞에 정직하고자 했던 한 젊은이의 내부적 번민과 의지를 보여 준다.
앞의 두 행에서 시인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그의 소망을 말한다. 이것은 인생을 오래 살아본 사람의 달관한 말이 아니다. 세상의 갖은 풍상을 다 겪어 본 나이 지긋한 사람이라면 감히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생애를 돌이켜보면서 사람이 부끄럼 없이 산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그리고 자신 역시 얼마나 부끄러운 일을 많이 저질렀는지를 알 터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불완전하며 갖가지 그늘과 어둠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쉽사리 자신의 순수한 마음을 버리고 세속적 삶에 타협하게 한다. 이 작품의 서두는 바로 이러한 가능성에 대한 단호한 거부의 선언이다. 그것은 젊은이의 순수한 열정과 결백한 신념에서 나온다.
그러나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이 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더욱이 삶 자체가 치욕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식민지의 상황 아래서 그것은 가능할 수 있는 것인가?
윤동주는 이에 대해 날카로운 반성의 언어로서 답한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
그의 괴로움은 자신이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서 생겨난다. 부끄러움이란 잘못을 저질러서만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 일을 하지 못하였을 경우에도 올 수 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자신을 돌이켜보면서 결백한 삶을 추구하는 젊은이에게 있어서 부끄러움이란 그의 양심의 뜨거움에 비례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것에서조차 괴로움을 느낀다.
그러나 이 시가 보다 높은 경지를 이루는 것은 여기에 다음의 넉 줄이 이어짐으로 서이다. 밤하늘의 맑은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생명들을 사랑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걷겠다는 담담한 결의는, 자칫 무모한 번민에 그칠수도 있는 양심적 자각을 성숙한 삶의 의지로 거두어 들인다. 그것은 극히 담담하면서도 의연한 결의와 태도를 느끼게 한다.
별도의 연으로 따로 떨어진 마지막 행은 이와 같은 결의를 시적으로 승화시킨 이미지이다.
'오늘 밤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고 했을 때, 이 별의 암시적 의미는 어둠과 바람 속에서도 결코 꺼지거나 흐려질 수 없는 외로운 양심에 해당한다. 그것은 윤동주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젊은 이성의 상징이다.
바로 이 한 줄이 덧붙여짐으로써 양심의 결백함에 대한 그의 외로운 의지는 어두운 밤 하늘과 별, 그리고 바람이라는 사물들의 관계를 통해 더욱 또렷해지는 것이다.(자료)
윤동주(尹東柱, 1915~1945)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에 수록되어 있는 31편의 작품 가운데 일반인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작품이 바로 이 「서시」라고 한다. 그래서 이 「서시」가 마치 윤동주의 대표 시처럼 되고 말았다. ‘서시(序詩)’란 작품집의 머리에 서문 대신 놓인 시로서 가극(歌劇)에서의 서곡(序曲)처럼 도입을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 말하자면 본격적인 작품들 앞에 덧붙여진 부수적인 글(액세서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서시’가 한 시인의 대표 시처럼 대접받는다는 것은 어딘가 좀 개운 찮은 느낌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이는 윤동주의 여타의 시들 중 이 「서시」를 능가할 만한 작품이 없다든지, 아니면 작품에 대한 독자들의 분별력을 문제 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전자의 경우라면 이 「서시」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수록된 어떠한 작품보다도 뛰어나다는 얘기가 된다. 서곡이 명곡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서시가 명시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이 「서시」가 발군의 작품처럼 생각되진 않는다. 의미도 별로 대단치 않고 그렇다고 시적 감각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유한한 생명들에게 연민의 정을 가지고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적은 짧은 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정도의 생각은 건전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보통사람들의 낙서장에서 흔히 만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내용이 새로운 것도 아니고, 표현이 특이한 것도 없다. 그런데도 이 작품이 사랑을 받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어떤 이는 이 작품의 구조를 기호론적인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분석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즉
①~④행의 의미구조가 ‘하늘’과 ‘땅(잎새)’과 ‘사람(나)’의 대립이며, 이는 다시 ⑤~⑧행에서 ‘별(하늘)’과 ‘죽어 가는 것들(땅)’과 ‘나(사람)’로 반복 전개되고 있는 천지인(天地人)의 구조라는 것이다. 또한 서술의 형태로 보아 ①~④행은 과거시제, ⑤~⑧행은 미래시제 그리고 ⑨행은 현재시제라고 분석해 보이고 있다. 한편 상황적 의미구조를 ‘별:어둠 vs 나:바람’의 관계로 파악하고 다음과 같이 의미 부여를 한다.
별이 밤에 의하여, 말하자면 어둠에 싸여 비로소 빛나듯이, 나는 바람에 싸여 비로소 생명과 사랑의 빛을 얻어냅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 괴로워하는 부정의 밤이 있기에,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하는 긍정의 마음이 생성됩니다. 어느덧 별과 밤의 관계는 나와 바람의 관계와 같은 패러다임을 형성합니다.
해설.2
-임보
외견상 그럴 듯해 보이는 분석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은 이 작품의 구조적 특성을 설명하는 것이지 이 작품의 우월을 증명하는 자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즉 이 작품이 ‘천지인’의 대립구조를 지녔기 때문에 그리고 ‘과거+미래+현재’의 서술구조를 지녔기 때문에 훌륭한 작품이라는 설명은 되지 않는다. 대립의 구조나 시제의 양상 그 자체가 작품의 우열을 판별하는 요소는 아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이와 다른 구조들도 얼마든지 좋은 작품이 될 수 있고, 혼합 시제가 아닌 단순 시제로 서술된 명작들도 얼마든지 있다. ‘어둠’과 ‘바람’의 관계에 대한 설명 역시 작품을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서시」가 명시라는 증거의 자료는 될 수 없다. 설령 이 작품이 앞의 분석처럼 그렇게 조화롭고 심오한 구조를 지니고 있어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치자. 그러나 대중들이 이 작품을 좋아하는 것은 그러한 구조를 이미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서시」의 무엇이 그렇게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단 말인가?
첫째,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감상성(센티멘털리즘) 때문이라고 본다. 이 작품은 ⑦⑧행을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행들이 다 사춘기적 감상(感傷)을 담고 있다. 그 감상은 괴로움, 죽음, 사랑 등의 정서가 별과 바람이라는 신비로운 무형의 사물에 얹혀서 빚어지는데, 그것이 감상적인 독자들에게 호소력을 가진 모양이다. 현대시의 독자층은 남성보다는 여성이, 장년층보다는 청소년층이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납득이 안 가는 것도 아니다.
둘째, 「서시」가 지닌 평이성을 지적할 수 있다. 현대시가 독자들로부터 소외된 중요한 이유는 난해성인데 이 작품은 이해하는데 크게 장애가 되는 요소를 지니고 있지 않다. 그래서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이점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셋째, 「서시」뿐만 아니라 윤동주 시 전반에 걸쳐 독자들이 좋아한 것은 작자에 대한 애정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비운의 시인 윤동주에 대한 동정이 그가 극적으로 남긴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향해 드러났던 것 같다. 29세의 젊은 나이로 일제(日帝)에 의해 이국의 형무소[福岡]에서 안타깝게 옥사한 그의 비극적인 생애가 독자들에게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킬 만도 하다.
우리는 작자와 작품의 관계를 지나치게 유기적으로 생각하는 습성이 없지 않다. 작품을 평가할 때 작자의 생애와 불가분의 연관을 지어 따지려 한다. 반민족적인 행위를 한 작가는 비록 작품이 좋더라도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가 하면, 또한 그 역으로 지사적인 삶을 산 작가의 작품은 실제보다 후한 평가를 받기도 한다. 한 작가의 생애와 작품이 공히 독자들의 마음을 충족시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한 작가의 삶이 독자들의 가치관에 따라 살아지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우리가 상품을 고를 때 생산자의 삶을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작품은 작가와 독립해서 평가하는 것이 마땅하다. 미국의 세계적인 시인 E. L. 파운드는 2차 대전 중 반국가적인 행위 때문에 국가로부터 규탄을 받았지만, 그것 때문에 그의 작품들이 불리한 평가를 받은 적이 없다.
우수한 작품들이 작자의 생애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것도 불행이지만, 작자에 대한 존경이나 연민 때문에 작품이 실제보다 높이 평가되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작품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다보는 수준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 윤동주를 사랑하는 독자들의 견해는 다를지 모르지만, 겨우 20대 중반에 쓰여 진 윤동주의 작품들은 아직 습작기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 감상적인 서정시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