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이경은 한국 전쟁 중 서울 명동의 미 8군 PX의 초상화부에 근무한다. 그녀는 자기 때문에 두 오빠가 폭격으로 죽었다는 죄의식이 있으면서, 동시에 두 아들을 잃고 망연자실한 상태로 살고 있는 어머니와 암울한 집안 분위기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으로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최 사장은 우람하고 큰 중년의 사나이, 옥희도를 데려온다. 그러나 새로 온 옥희도는 환쟁이들에게 환영받지 못한다. 왜냐 하면, 환쟁이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들의 수입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식구가 불었다는 압박감이 이경을 전에 없이 활기차게 만들었다.
환쟁이들이 서로 잡담하며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면서 문득 옥희도는 다른 환쟁이들과는 조금이라도 달랐으면 하는 느낌을 가지게 되고, 황량한 풍경이 담긴 눈을 가진 옥희도에게 마음이 끌린다. 이경은 옥희도를 사랑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생각이 때론 아프고, 때론 감미롭고 어쩌면 두려워, 어떤 뚜렷한 감정을 추려낼 수는 없어도, 그 생각에서 조금도 헤어나지를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다이아나 김이 자신의 초상화를 부탁하기 위해 찾아온다. 다이아나와 이경은 서로 비슷한 약점을 가지고 있다. 다이아나는 미국 여자처럼 능숙하게 영어를 하면서 조금도 읽고 쓸 줄은 몰랐고, 이경은 능숙하지는 못해도 읽고 쓰면서도 초상화부로 필요한 몇 마디 이외에는 영어를 잘하지 못했다. 그런데 며칠 전 그림을 찾으러 온 미군이 트집을 잡으며 이야기하자 통 알아듣지 못하고 당황하고 있을 때 다이아나가 와서 그 미군을 설득해 돌려보냈다.
그 뒤로 이경은 다이아나의 애인에게 온 편지를 읽어 주고 대신 편지를 써 주기도 하였다. 다이아나가 자신의 초상화를 미국의 애인에게 보낸다는 이야기를 하자 이경은 얼떨결에 옥희도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러나 옥희도가 그린 초상화를 본 다이아나는 심하게 빈정거린다. 옥희도는 스카프에 그린 초상화를 뺏어 아무렇게나 구겨 뭉갠다. 이경은 옥희도를 기쁘게 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중에 그림값을 받아 옥희도에게 주나 다이아나에게 모멸을 받았을 때보다 한층 깊이 상심하는 그의 모습에 이경은 당혹해한다. 옥희도의 제의로 저녁 식사를 한 그들은 명동 거리와 장난감 침팬지가 술을 따라 마시는 완구점 사이를 거닐며 서로의 고독을 느낀다.
그 다음 날부터 옥희도는 감기 몸살로 인하여 결근하였고, 왜 결근하는지 모르는 이경은 PX 전공(電工) 태수와 함께 옥희도를 찾아간다. 거기서 옥희도의 부인을 보고 호감을 갖는 자기에게 화가 나 곧 돌아오게 된다.
해가 1952년으로 바뀌고 이경이 21세가 되었다. 새해 첫날 이경은 재작년 설빔이었던 한복을 입고 태수를 만나러 나갔다. 이 날 만나기로 한 것은 태수의 일방적인 약속이라서 그런지 2시간 넘어 나왔음에도 미안함을 느끼지 않았다. 둘은 커피를 마시고, 영화를 보고, 태수의 집에도 갔지만 이경은 태수에게 별다른 느낌을 가지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는 곧 그의 집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도중 태수에 대한 연민을 느끼고, 그에게 베풀 수 있는 것은 베풀고 싶어한다.
새해 들어 옥희도는 병이 나았는지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옥희도는 가끔 기침을 했으나 저번 문병 갔을 때보다는 가벼운 편이었다. 옥희도는 다른 환쟁이들과 같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경과 옥희도는 우연히 예전의 그 장난감 가게에서 만난다. 여기서 그를 만난 이경은 온종일 같이 있던 사람 같지 않게 그에게 새로움을 느낀다. 그리고 그녀는 응석을 부리듯이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걸었다. 옥희도와 이경은 아무런 약속도 안 했으면서 매일 밤 어김없이 침팬지 앞에서 만났다. 눈이 몹시 온다던가 날씨가 유별나게 춥다든지 하면 완구점 앞의 구경꾼은 둘일 때도 있었다.
어느 날 태수는 형님과 형수님에게 색시감이 있다며 소개시켜 준다고 하고는 이경에게 양해를 구하고 같이 나갔다. 서로 대화를 하고 있는 동안 태수의 형님이 옥희도의 오랜 친구였다는 사실이 생각나자 거북해진 이경은 곧 일어서서 그 자리를 나온다. 이경은 태수와 팔짱을 꼈을 뿐, 서로의 마음이 화음을 이룬 적이 없는 사이라는 것에는 전혀 변화가 없음을 느낀다.
이경은 환상을 간직하고 있었다. 완구점 앞에서 옥희도와의 만남이 그것이었다. 이경은 곧 태수와 그의 가족들과 있었던 일은 잊었다. 그냥 뿌연 회색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이경과 옥희도는 매일 완구점 앞에서 그들의 '함께 있음'을 즐겼다. 그리고 이경은 옥희도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지만, 옥희도는 어울리는 사이가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이보다는 어울리는 사이가 더 축복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하며, 태수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옥희도는 진짜 화가가 되고 싶다고, 미치도록 그리고 싶다며 말하고는 며칠 동안 나가지 못함을 이경에게 말한다.
이경은 PX에 나오지 않는 옥희도를 찾아간다. 그녀는 옥희도의 집, 캔버스 위에서 하나의 나무를 보았다. 거의 무채색의 불투명한 뿌연 화면에 꽃도 열매도 잎도 없는 참담한 모습의 고목이 서 있었다. 화면 전체가 흑백의 농담으로 마치 모자이크처럼 오톨도톨한 질감을 주는 게 이채로울 뿐 하늘도 땅도 없는 뿌연 혼돈 속에 고목이 괴물처럼 부유하고 있었다.
이경은 옥희도의 부인이 생활의 어려움만을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는 그녀에게 화가의 아내가 될 자격이 없다고 말하며 달음질쳐 빠져 나온다. 이경은 오로지 불투명한 공간에서 죽어 가는 고목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옥희도가 그런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을 그가 그 모든 것에 심한 기갈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경은 얼마 전 알게 된 GI의 기갈을 도울 수는 있어도 옥희도의 기갈을 도울 수는 없음을 서글프게 깨닫는다.
자신이 어떻게 되든 옥희도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 옥희도가 자신과 더 가까이 있었다면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변명이 더 소중하다고 느낀 이경은 GI와 약속한 호텔에 들어가지만 핏빛으로 물들어 보이는 시트를 보고, 혁과 욱이 오빠처럼, 시트를 붉게 물들이며 참담하고 추악하게 조각이 날 것 같아 거기서 도망쳐 나온다.
이경은 골치가 한결 개운해지면서 좀 더 선명하게 잊었던 날들을 생각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혁이 오빠가 죽은 기억이 다시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그녀는 문득 집으로 가기가 싫어졌다. 그리고는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녀는 옥희도의 부인을 생각했다. 다만 그녀에게 푹 안기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 그리고 옥희도의 집으로 가서는 잠을 청한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에게 어머니는 어젯밤의 딸의 행방을 궁금해하는 눈치가 조금도 없다. 어머니가 밥상을 차리고 자리에 눕자 그녀는 양단 이불 위에 힘없이 얹힌 까실한 손에, 정맥만이 비대하게 솟은 손을 만져 보았다. 어머니의 손은 뜨거웠고, 머리에는 꽤 높은 열이 있었다. 초췌한 어머니의 얼굴은 고통스러운 호흡만을 계속하고 있었다. 하룻밤이 지나도 어머니의 상태가 좋아지지 않자 그녀는 의사를 데리고 왔다. 진찰을 마친 의사는 상당히 위독한 상태라고 말하고, 처방을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곧 죽게 된다.
태수의 형수님은 이경의 모친상을 자신의 일인 양 도와 주려 애를 쓰고, 태수와 결혼시키려 한다. 그러나 이경은 태수에게 우리는 그냥 알고 지내는 사이일 뿐이라고 말하고 옥희도와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한다. 또한 옥희도 역시 이를 인정한다. 태수는 아연해하고, 옥희도는 이경에게 아버지와 오빠의 환상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라고 이야기를 하며 떠난다. 그리고 얼마 후 태수와 이경은 결혼을 한다.
세월이 흘러 이경과 태수는 두 아이와 함께 살아간다. 어느 날 신문에서 고(故) 옥희도 유작전의 기사를 읽고 태수와 함께 유작전에 간다. 거기서 이경은, 지난날 옥희도가 그리고 있던 어두운 단칸방에서 본 한발 속의 고목이 지금의 자신에게 고목이 아니라 나목(裸木)이었음을 알게 된다.
[작품 읽기]
2
<전략> 새로 온 옥희도 씨는 환쟁이들의 이런 반발을 아는지 모르는지 듬직한 등을 이쪽으로 돌린 채 아무것도 진열되지 않은 쇼윈도를 가려 놓은 부우연 휘장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나는 그가 그릴 것을 마련하기 위해 서랍 속의 사진들을 모조리 꺼내었다. 기한에 관계없이 그리기 쉬운 것, 까다롭지 않은 주문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숱한 얼굴, 얼굴들 ― 이국(異國)의 아가씨들은 한반도 전쟁이 머리 위를 왔다갔다 하는 일을 겪어 보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늘진 고뇌가 전연 없이 오히려 인간적이 아닌 동물이라기보다는 화사한 식물에 가까운 ― 만개한 꽃 같은 얼굴들이었다.
그 중에서 특징을 잡기 쉽고 모발이나 눈빛이 복잡하지 않은 것을 몇 장 골라 가지고 옥희도 씨한테로 갔다.
"시작해 보시겠어요?"
그는 조용히 시선을 창에서 나에게로 돌리더니
"고마워." 하고는 누런 종이 봉투에서 가늘고 굵고, 납작하고 둥근 각종의 붓을 우루루 쏟았다.
"어머나, 붓까지 준비하셨어요, 붓은 여기도 있는데……."
나는 빈 깡통에 꽂힌 별로 쓸모 있어 보이지 않는 몽탁한 붓들을 눈으로 가리키며 필요한 몇 가지 일을 일렀다.
"붓이나 물감은 제공하기로 돼 있어요. 헝겊도 제공하기는 하지만 망쳐 놓으면 배상하셔야 되구요. 스카프 하나 망쳐 놓으면 그림 두 장 값이 날아가게 되니까 까딱 잘못하면 하루 종일 헛수고하게 되죠. 그래도 망쳐 놓은 만큼의 물감 값은 따지지 않으니 관대하다고 봐야겠죠. 그리고 참 손님이 마땅치 않아 하면 몇 번이라도 고치든지 뭣하면 아주 새로 그려 줘야 되구요. 아무튼 제일 중요한 건 닮게 그리는 거예요. 아시겠어요?"
그는 대답 대신 어린애처럼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그와 나의 눈이 깊게 마주쳤다. 내가 먼저 섬칫해져서 눈을 피했다. 아주 황량한 풍경의 일각 같은 것이 그의 눈 속에 깊이 잠겨 있는 것 같아서였다.
그는 연방 고개를 기우뚱거려 가며 밑그림을 그리면서 가끔 주문(呪文)처럼 나직이, "아주 닮게 아주 닮게." 라는 것이었다.
나는 암만해도 그가 못 미더워 손님이 없는 사이사이마다 그의 곁에 가서 그림이 돼 가는 것을 지켜보고 내 돼먹지 않은 글씨도 읽어 주며 하였다.
"너무 닮게에만 신경을 쓰실 필요는 없어요. 조금쯤 달라도 뭐……이를테면 사진보다 조금 예쁘게 닮을 수 있으면 그것도 괜찮으니까요. 요령이 있어야 해요."
"흥 그런 요령이 하루 아침에 생길 줄 아나베. 남은 몇 년 두고 익힌 거라구."
평소 말수 적은 진(秦)씨까지 오늘은 조금 빈정댄다.
"저……이런 그림에 경험이 좀 있으신지?"
"그야 난 본시가 환쟁인걸."
"그럼 전직(前職)도 역시……. 극장 같은 데도 계셔 봤겠군요."
"아니. 직장은 여기가 처음이고, 난 그냥 환쟁이었어요." (그냥 환쟁이라? 그냥 환쟁이……) <후략>
9
<전략> 나는 완구점의 침팬지를 만나고 싶었다. 그 유쾌한 친구가 위스키를 따라 마시고 또 마시고 하는 광적인 폭음에서 차차 차차 동작이 느려지며 허탈로 돌아가는 모습 앞에 있고 싶었다. 여전히 노점인 완구점은 붐볐고 구경꾼은 거지반 어른이었다. 장난감을 좋아하는 어른이 나뿐이 아니어서 적이 마음이 놓였다.
무더기로 쌓인 자동차, 기차, 인형, 비행기, 총칼 따위를 다 제쳐 놓고 유독 손님들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는 침팬지란 놈이 주인을 위해 돈을 좀 벌어 준 것 같지는 않으니 뻔뻔한 놈이다.
오늘은 그 놈이 옆에 시종까지 거느리고 있었다. 눈이 툭 불그러지고 흰 이를 드러낸 검둥이 인형이 꽁무니에 태엽을 단 채 징을 들고 서서 주인의 향연(饗宴)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표정한 완구점 주인 영감이 하품을 늘어지게 하고 나서, 쭉 늘어선 구경꾼을 시들한 듯이 흘겨보고 마지못한 듯이 마른 나뭇가지 같은 손을 침팬지쪽으로 뻗는다. 개막 징을 듣는 관객같이 나는 숨을 죽이고 흥분을 누른다.
주인 영감은 먼저 침팬지 꽁무니의 태엽을 틀어 주고, 이어 검둥이의 태엽을 틀어 나란히 세웠다.
두 놈은 리드미컬하게 어깨춤을 춰 가며, 한 놈은 위스키를 따라 마시고 한 놈은 신나게 징을 두드렸다. 두 놈은 아주 호흡이 잘 맞아 한 놈이 점점 빠르게 거푸거푸 위스키를 따라 마실수록 한 놈은 주흥을 돋구듯이 점점 세게 징을 쳤다.
그러자 구경꾼들은 덩달아 전신을 흐느적대고 웃고 또 웃었다. 나도 웃었다. 웃다웃다 나중에는 눈귀에서 눈물이 흐르도록 웃었다.
구경꾼들이 숨을 죽이기 시작하자 그 놈들의 동작도 점점 느려졌다. 그들의 동작이 완전히 멈추자 맥이 탁 풀리며 몸이 흐느적흐느적 땅으로 흘러내릴 듯한 피곤이 왔다.
눈귀의 눈물을 닦고 사람들이 흩어지고 새 사람이 오고 하는데 나는 그저 망연히 서 있었다. 머리가 텅빈 채 아무런 생각도 들어서지 않았다. 나는 문득 내가 쓰러지지도, 땅으로 흘러내리지도 않고 서 있을 수 있음은 누군가의 부축 때문인 것을 깨닫는다. 그의 부축은 능숙하고 편안했다. 찬란한 빛처럼 어떤 예감이 왔다. 나는 돌아보지 않고 오래도록 그 예감만을 즐겼다.
"그만 가지."
예감대로 옥희도 씨의 음성이었다. 따뜻하고 착한 시선이 나를 굽어보고 있었다. 오랜 별리(別離) 끝에 해후처럼 반가움이 벅차 왔다. 우리는 사람을 헤집고 나와 같이 걸었다.
"어린애같이 아직도 장난감을 좋아하나?"
"선생님은요?"
"별안간 그 놈이 보고 싶었어. 그 주정뱅이가……."
"저도요. 막 뛰어왔어요."
"나도 그랬어. 왜 그랬을까? 사뭇 걷잡을 수 없을 만큼이었어."
"우리는 우리의 해후를 예감했나 봐요."
"해후라니? 우리는 요새 늘 같이 있었는데…." <후략>
12
<전략> "그림은 다 그리셨어요?"
제일로 궁금하던 것을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디 있어요? 좀 봐도 될까요?"
무릎에 앉았던 막내가 벌떡 일어나더니 웃방으로 난 장지를 열었다. 나는 그제야 오늘 부인이 애들을 웃방으로 보내지 않은 이유를 알았다. 전등이 없는지, 있는데도 안 켰는지 웃방은 어둑한데 80호 정도의 캔버스가 벽에 기대어 놓여 있고 넓지 않은 방바닥은 온통 빈틈없이 어지러져 있었다. 테레빈유의 냄새가 확 끼쳤다.
나는 캔버스 위에서 하나의 나무를 보았다. 선뜻한 느낌이었다.
거의 무채색의 불투명한 부우연 화면에 꽃도 잎도 열매도 없는 참단한 모습의 고목(枯木)이 서 있었다. 그뿐이었다.
화면 전체가 흑백의 농담으로 마치 모자이크처럼 오톨도톨한 질감을 주는 게 이채로울 뿐 하늘도 땅도 없는 부우연 혼돈 속에 고목이 괴물처럼 부유(浮遊)하고 있었다.
한발(旱魃)에 고사한 나무―그렇다면 잔인한 태양의 광선이라도 있어야 할 게 아닌가? 태양이 없는 한발―만일 그런 게 있다면, 짙은 안개 속의 한 발……무채색의 오톨도톨한 화면이 마치 짙은 안개 같았다.
왜 그런 잔인한 한발이 고사시킨 고목을 나는 그의 캔버스에서 보았을까?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꼬마는 잽싸게 장지문을 닫아 버렸다.
향긋한 생강차가 식어가는데 나는 마실 구미를 잃었다.
나는 그림에 대한 전문적인 감상안이 전연 없는 채 그림을 단순하게 사랑하고 즐겨 왔었다. 국민 학교 교실 벽에 장식한 그림에서부터 화랑에 전시된 유명 무명 화가의 그림들, 또 인쇄 잘된 화첩의 대가의 그림들을 사랑했다.
나는 그런 그림들에서 어떤 언어를 시각했다기보다는 그냥 그 빛과 빛깔을 즐겼었다. 삶의 기쁨이 여러 형태의 풍성한 빛으로 나타난 그림들을 사랑했다. 이렇게 나의 그림에 대한 눈은 오색 풍선을 동경하는 아이들처럼, 포목점 앞에서 아름다운 천을 선망하는 여인처럼 소박하고 단순했다.
내 이런 소박한 감상안은 그의 그림에 적지아니 당혹하고 있었다. <후략>
17
<전략> S회관 화랑은 삼 층이었다. 숨차게 계단을 오르자마자 화랑 입구였고 나는 마치 화랑을 들어서기도 전에 입구를 통해 한 그루의 커다란 나목(裸木)을 보았다.
나는 좌우에 걸린 그림들을 제쳐 놓고 빨려들 듯이 나무 앞으로 다가갔다.
나무 옆을 두 여인이, 아기를 업은 한 여인은 서성대고 짐을 인 여인은 총총히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지난날, 어두운 단칸방에서 본 한발 속의 고목(枯木),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웬일인지 그게 고목이 아니라 나목(裸木)이었다. 그것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다. 김장철 소스리 바람에 떠는 나목, 이제 막 마지막 낙엽을 끝낸 김장철 나목이기에 봄은 아직 멀건만 그의 수심엔 봄의 향기가 애닯도록 절실하다.
그러나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 가지[枝]들이 빈틈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무, 그 옆을 지나는 춥디 추운 김장철 여인들.
여인들의 눈앞엔 겨울이 있고,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나목을 저리도 의연(毅然)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
나는 홀연히 옥희도 씨가 바로 저 나목이었음을 안다. 그가 불우했던 시절, 온 민족이 암담했던 시절, 그 시절을 그는 바로 저 김장철의 나목처럼 살았음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또한 내가 그 나목 곁을 잠깐 스쳐간 여인이었을 뿐임을, 부질없이 피곤한 심신을 달래 녹음을 기대하며 그 옆을 서성댄 철없는 여인이었을 뿐임을 깨닫는다.
'나무와 여인'……그 그림은 벌써 한 외국인의 소장으로 돼 있었다.
나는 S회관을 나와 잠깐 망연했다. 오랜 여행 끝에 낯선 역에 내린 듯한 피곤인지 절망인지 모를 망연함, 그런 망연함에서 남편이 나를 구했다.
빨간 풍선을 놓친 계집아이가 자지러지게 운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로 빠져들 듯이 풍선이 멀어 간다.
드디어 빨간 점을 놓치고 만 나는 눈물이 솟도록 하늘의 푸르름이 눈부시다.
옆에 앉은 남편도 풍선을 쫓았던가 고개를 젖힌 채 눈이 함빡 하늘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뿐, 이미 그의 눈엔 십 년 전의 앳된 갈망은 없다. 그뿐이랴. 여자를 소유하고 가정을 갖고 싶다는 세속적이 소망 외에는 한번도 야망이나 고뇌가 깃들어 보지 않은 눈. 부수수한 머리가 늘어진 이마에 어느새 굵은 주름이 자리잡기 시작한 중년의 그가 나는 또다시 낯설다.
저만치서 고등 학생들이 배드민턴을 친다. 콕이 나비처럼 경쾌하게 날아와 라켓에 부딪치는 소리가 마치 젊은 연인들의 찰나적인 키스의 파열음처럼 감각적으로 들린다.
나는 충동적으로 그의 이마의 주름진 곳에 그런 키스를 퍼부었다.
그가 낯선 게 견딜 수 없어서였다. 그가 아주 타인처럼 낯선 게 견딜 수 없어서였다.
나무들의 그림자가 길어지고 우수수 바람이 온다.
이미 낙엽을 끝낸 분수가의 어린 나무들이 벌거숭이 몸을 애처롭게 떨며 서로의 가지를 비빈다.
그러나 그뿐, 어린 나무들은 서로의 거리를 조금도 좁히지 못한 채 바람이 간 후에도 으시시 떨고 있었다.
<작품 설명>
- 나목(裸木) -이 작품은 6.25전쟁으로 인해 황폐해진 정신을 갖게 된 사람들이 그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치밀한 묘사로 그려 낸 장편 소설이다.
폭격으로 인한 두 오빠의 죽음이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 느끼며 살아가는 이경과 전쟁의 와중에 생활난 때문에 미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리며 살아가는 옥희도는 사회적 상황이 만들어 낸 황량한 정신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태엽을 감아야 온갖 재롱을 피우는 완구점의 침팬지처럼 어떤 힘에 의해 조종당하는, 의식 없는 꼭두각시가 되어버린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황량함을 평범한 여인의 일상 생활로 되돌아가 극복하는 경아, 그리고 화가의 길에 들어서 작품을 남기고 떠난 옥희도는 꽃과 무성한 잎을 다시는 피우지 못하는 고목(枯木)이 아니라 잠시 성장을 멈추고 어려운 한 시기를 극복하는 나목(裸木)이었던 것이다.